단상


#1
“남는 밥좀 주오” 글 남기고 무명 영화작가 쓸쓸한 죽음

‘아덴만의 여명’(가제) 영화화 전격 결정

어느 곳에선 정권의 업적을 기리는 200억원짜리 영화가 기획되던 날, 어느 곳에선 젊은 작가가 굶어 죽었다. 이 곳은 2011년의 서울이다. 격정의 소나타.

#2
명절내내 시뻘건 한우를 걸고 뛰어다니고 춤추는 아이돌들을 보고나니 현기증이 난다. 그 절정은 "이럴 때 일수록 고기 소비량을 늘려야 한다"는 자막.
한 곳에선 수백만마리의 소들이 산 채로 땅에 묻혀가고 어느 곳에선 그 시체를 소비하려고, 또 소비하라고 소리를 꽥꽥 질러댄다.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는걸까?

#3
 김진숙 위원은 크레인에 올라있고 홍대는 여전히 투쟁중이다.
도처는 싸움터다.

#4
생일이다. 낯 부끄러 말도 못했는데 어떻게 알고 케익이며 선물이며 술이며.
고맙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더욱 사랑하면서. 더 살아야겠다. 더 살아야겠다.

버스, 정류장 -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들





# 이제 만날 때가 됐다는 듯이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개봉 당시였다. 분당 총알이 400발 이상씩 소모되고, 핵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한번쯤은 있으며, 도시 전체(보통 LA나 NY)를 날려버릴 양의 액체폭탄에 대한 걱정으로 불철주야 피 흘리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헐리우드 영화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그 홍수에 화답하듯 그런 영화들에 열광하는 친구들과 몰려 다니던 시절이었다. 있어 보이는 척이 주고 일켠에 또 다른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였던 취향 덕에 일단 지루해 보이고 친구들은 혹평을 평론가는 호평을 던질 것 같은 영화들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이 영화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나서 젠체하며 "나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그 순간의 우쭐함을 만끽하곤 이내 잊어버린 그 영화들 중 하나.

이 영화를 다시 만난건 지난 봄이었다. 2010년의 봄.
언젠가 2010년을 정의한다면 '무의미'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을 친구에게 했었다. 정말 그즈음의 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무의미한 허송세월인줄을 알면서도 어떤 것도 하지 않는 무의미. 의미 없는 게으름. 집 밖은 커녕 방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다. 전화는 받지 않다가 이내 끊어버렸고(사실 끊겨버렸고) 귀찮아서 밥도 안먹었다. 담배도 잘 안폈다. 그 와중에 가지 않는 시간을 떼우려 영화들을 몇 편 다운 받아 보곤 했는데 그 안에 있었다.
정말, 이제 만날 때가 됐다는 듯이.

난 내가 아주 웃겼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고민거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치열한 삶의 반동에 따른 은둔도 아니었다.  내가 아주 못나고 게으른 놈이란 자괴감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했지만, 정작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말해보라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은둔을 즐기기도 했다. 별 말은 안하셨지만 가끔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던 엄마나, 밖으로 끌어내 보겠다고 야구티켓에 내 코드의 술집까지 찾아놨다는 친구들의 관심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관심을 받고 싶었던 유아기적 외로움과 투정이었을까. 그래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라고 물으면 글쎄, 만사 귀찮아서. 가 가장 근거있겠다. 무엇도 명확한 이유가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외로움만은 진짜였다.
그러다 이 외로운 사람들의 영화를 봤다. 이제 만날 때가 됐다는 듯이.





# 그 외로운 사람들
재섭은 핸드폰을 사지 않는다. 여전히 삐삐를 들고 다니지만 정작 누구와 연락을 주고 받지는 않는다. 관계를 유지해 나갈 의사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누군가 삐삐를 쳐주길, 누군가 다시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철학이니 역사니 정통이니 하는 말들을 제법 지껄일 줄 알던 그는 세상의 루저다. 차 한대 살 여력도 마땅치 않고 어둔 골방에서 의미 없는 소설이나 끼적이는 동네 학원 강사.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을 하찮게 여긴(여기려고 한)다. 시를 모르는 것들, 대화가 되지 않는 것들, 속물들. 친구들에게 컴플렉스를 운운하던 그의 말은 허세이기도 하지만 진심이기도 하다.


소희는 진실을 믿지 못한다. "진실은 곧 거짓"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도 사실은 거짓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진실된 말과 관계를 희구한다. 사는게 무슨 의미냐던 그녀는 친구의 죽음을 아파한다. 어쩌면 그녀는 영화를 보러가자던 원조교재 상대에게조차 진실된 관계를 그리워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여관이나 가자던 그에게 환멸을 느끼는 반복을 볼 뿐이지만.  

그/녀는 외롭다. 고립돼 있지만 그 고립을 누구도 봐주지 않아서 더 외롭거나 어쩌면 그 고립을 자기가 자초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에 더 괴롭다. 혹은 내가 정말 외롭기는 한걸까. 하는 물음. 그 알량한 자기 확신조차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외롭고 또 괴롭다. 자기로 부터도 타자로 부터도 고립돼 있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재섭과 소희 얘기가 아니다. 내, 우리의 이야기다.




#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들
서울 시내에 수백개의 버스 노선과 정류장이 있겠지만 사실 이용하는 정류장은 그리 많지 않다. 생활이 일차원적인 외로운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거기에 시간도 매일 어슷비슷하니 버스에서 정류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쩌면 매일 매일 같은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 이 사람들은 한 다다음 생애쯤엔 대단한 친구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같은 버스를 탄다는 것은 같은 곳을 향해 간다는 뜻이다. 그 버스를 같은 정류장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닮은 소희와 재섭이 있기에 가장 적절한 곳.

같은 버스를 탄 그/녀는 서로의 곁에서 목 놓아 눈물 흘린다. 아주 솔직한 울음. 조금 더 솔직했던 소희가 조금 먼저, 말도 행동도 운동신경도 마음도 조금 더딘 재섭이 조금 더 늦게. 그렇게 온전히 서로의 같은 방향을 같은 정류장을 확인하려는 듯 감독은 그 눈물을 오래도록 담아낸다.
(재밌었던건 재섭이 눈물 흘리던 우체통.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는 그 빨간 상자. 재섭은 우체통을 사이에 두고 소희와 이야기 나누다 눈물을 흘린다. 마치 편지 하듯이.)




눈물을 훔친 건 그 장면이다. 아, 같은 버스를 타고 눈물을 받아 줄 친구.
아니, 그보다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여담이지만, 영화 이미지를 찾으려고 검색을 하다 '지루한 원조교재 영화'란 댓글을 봤다. 원조교재의 정의는 이미 영화 안에서 원조교재 아저씨가 내려줬다. 사랑없이 돈만 왔다갔다 하면 원조교재라고. 재섭과 소희는 사랑을 한다. 그 사랑이 연인의 마음이어도 좋고 동류의 인간에게 느끼는 우정이어도 좋고 사제간의 의리어도 좋다. 다만 그들이 사랑을 하는게 중요한거다. 그렇게 편협하게 정의 내리기에 사랑이란 말은 너무 예쁘고 아깝고 소중하다.
참고로 이 댓글을 본 포털은, 예전에 '사랑'을 검색했을 때 '이성간의 연애 감정'이란 편협한 정의로 난 짜증나게 한 그 곳이다. 내 이놈을 참.




# 김민정
아, 이렇게 예쁠수가.
연기를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렇게 잘 맞을수가. 마치 맞춰 입은 것처럼.
'아일랜드'의 시연도 그렇고 김민정은 상처받고 아파서 더 날을 세우는 그런 슬픈 역할이 잘 어울린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다.
정유미나 백진희를 주목하고 있고 윤아나 신민아를 보면 정신 못차리고 하악거리지만
팬카페까지 가입한건 이 언니 하나다...ㅋ



# 이 영화에 이렇게까지 집착할 줄이야


이런 저런 말을 쏟아냈지만 그저 보고 있으면 맘이 설레는 영화다. 며칠전엔 버스 안에서 OST를 듣다가도 그런 맘이. 위로일까. 그런거였으면 좋겠다. 무튼 외로운 누구를 알게 된다면 이 영화 DVD를 내밀어 볼테다.









단상


1. "스파르타 입시학원 - 자녀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언제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습니다" 어제 길에서 발견한 한 학원의 실제 광고문구다. 이걸 대문짝만하게 차에 써붙여놨더라.

2. 머리가 나빠지는 것 같다. 이런저런 문장들이 종종 떠올랐는데, 정작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메모하는 습관에 대한 교훈이랄까.

3. "내가 알던 형들은 하나 둘 날개를 접고 아니라던 곳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난 아직 고갤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 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어"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친구가 물었다.
"제목이 뭐야?" "스무살"
왠지 모르게 둘이서 빵하고 터져선 한참을 낄낄거렸다. 스무살이라니.

4. 엄마가 구입한 스마트폰의 위력을 절감하고 있다. 난 지금 침대 위, 이불 속에 누워서 넷북으로 인터넷에 접속중이다. 아 신기해.

5. LG의 설레발이 시작됐다. 겨울쥐, 엘레발 따위의 조롱을 들으면서도 두근거리고 설레게 만들다니. 엄청난 마케팅팀. 엘지 프론트는 겨울에만 일하는거다. 겨울에 너무 열심히 일해서 정작 시즌중엔 노는 프론트. 리즈, 우리를 가을의 야구장으로 인도해줘.

6. 독하게 살자라고 새겨놓은 후배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멋대로 바꿔버렸다. '그래도 괜찮아' 그건 차라리 나에게 하는 다짐이었을까. 위로랍시곤 던지는 말들은 차라리 허세다. 누구도 누구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까? 다만 위로가 되고 싶단 마음은 진심이다. 그건 그들을 아겨서라기 보단 위로가 되어주는 훌륭한 사람에 대한 동경. 난 여전히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괴롭다.

7. "아무도 없다면 혼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 대충 살다가 대충 죽어버릴텐데" 이 말도 진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입신양명을 바라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 마이너 취향은 아마 특별하고 싶은 욕망인가보다.

8. 喝! 잠이나 자!

力士 - 김승옥


그래서 마침내 어느 쪽인가 한편이 틀려 있다는 생각이 나를 몹시 짓누르기 시작했다. 본질적으로는 두 쪽이 같지 않느냐는 의문이 나의 내부 한쪽에서 솟아나오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고 가는 '어느 쪽인가 한편이 틀려있다'라는 집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발전하여, 미리 그러기로 되어있었다는 듯이, 나는 이 양옥의 식구들 생활을 빈 껍데기에 비유하고 있었다. 빈 껍데기의 생활, 아니라면 적어도 방향이 틀린 생활, 습관적인 생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나를 끌고 갔다. 이 순간에 나는 꼭 무슨 행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한 행동이 누군가 좀 현명하고 인간을 잘 아는 사람에 의해서 심판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김승옥, '力士' 中



+

삶을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게으름이나 현명한 이에게 심판받고 싶어하는 허위와 허세.
그런 것들이 결국 삶과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갉아 먹는다.
더욱 부지런해지고 더욱 진실되야 한다. 누구가 아니라 내 눈과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직시해야 한다.

철학성향 테스트







감성적인 문필가 타입
| 센스, 감성, 열정
동물적 감각+논리적 이성까지 겸비한 당신은 욕심쟁이, 후후훗! 감각과 동시에 ‘쓰임’까지 고려하는 섬세함을 가진 당신.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지만, 이 감각은 명확한 데이터를 토대로 나오는 것이다. 좋아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센스쟁이 타입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동물적 감각과 함께 빛나는 통찰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어디 가서 미움 사기 십상인 타입+_+? 현대의 직업군에서 꼽자면 ‘디자이너’ 혹은 ‘설계자’에 가까운 이 부류의 철학자는?
= 흄, 들뢰즈, 마르크스, 아감벤
『철학 vs 철학』에서는?
8장 어느 경우에 인간은 윤리적일 수 있는가? 흄과 칸트
15장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헤겔과 맑스
26장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 데리다와 들뢰즈
28장 정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슈미트와 아감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동시에 유명한 회의주의자.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의외로 흄이 애덤 스미스의 절친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또 한 가지, 그가 '회의주의자'가 된 이유는 '시니컬'하거나 '허무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광대하게 펼쳐진 우주 앞에서 지적 겸손함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살던 당대에는 초월적인 신 없이 평화와 행복을 상상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아주 유쾌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 죽어 갔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성'에 꽤나 집착하는 태도를 보인 적도 있었는데, 결국엔 '이교도'라거나, '무신론자', '회의주의자'(이건 사실 꽤 모욕적인 표현이다)라는 악명을 얻었다. 하지만 후대에 칸트에 의해 정직한 사유가로 재평가되고, 들뢰즈에 의해 감각의 위대함을 보여 준 철학자로 높이 평가받았으니, 니체 말대로 "어떤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관련된 책]
맑스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상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거의 99%는 이 사람을 꼽을 듯. 적을 구워 먹어 버릴 것 같은 열정으로 글을 써 댔던 이 사람은 '천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정말 놀랄 만큼 면밀한 분석을 수행했으면서도 문학적인 감수성은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는다. 맑스의 책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꼼꼼하고 정밀한 분석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걸 가지고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역사 전체를 살펴도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맑스의 일상은 가끔 '혼돈 그 자체'였다고 한다. 가장 수입이 적을 때조차 당대의 중산층에 상응하는 정도였는데, 지출의 무능력과 사치로 인해 먼저 죽은 딸의 관조차 장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생활에서도 유능한 '천재'란 정말 없는 것인가?
[관련된 책]
들뢰즈
"그는 너무나 굳센 나머지 실망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 허무주의적인 세기말에도 그는 긍정적이었다. 질병과 죽음에도 역시. 왜 나는 과거에 그에 대해서 떠벌렸던가? 그는 웃었다.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여기 있다. 슬퍼하는 건 너야, 멍청아. 그가 말한다." (들뢰즈의 죽음 이후 『르몽드』에 실린 리오타르의 추도문)
들뢰즈에 대해 그 자신의 발언을 제외하고, 이렇게나 그와 그의 사유를 잘 표현한 말이 있었던가? 긍정적 삶의 대가였던 들뢰즈는 그 어떤 '부정적인 것의 긍정성'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그냥 부정적인 것일뿐 그로부터 긍정적인 무언가가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좋아하는 '반성'을 엄청나게 경멸한다. 반성은 우리를 위축시킬 뿐이다!
들뢰즈는 '글쓰기' 그 자체에 관해서도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형식의 글쓰기 실험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이해'할 수 없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는 있다는 것이다! 깊은 밤 고원 위에서 별 밭을 우러르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을 때 그의 저서 중 아무 곳이나 펴 놓고 읽어 보길 바란다. 말들의 미로 속에서 오바이트하거나, 오만가지로 펼쳐지는 생각의 잔치를 볼 수 있으리라!
[관련된 책]
아감벤
'벌거벗은 사람들', 오직 생명 그 자체만 남은 사람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들을 현대사회를 철학적으로 독해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똑똑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하나의 사태를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통합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이 철학자는 그렇게 역사 속에 묻혀 있던 '호모 사케르'를 현대로 소환함으로써, 현재의 '호모 사케르'를 드러낸다.
방랑하는 사람들, 자격 없고 소속 없는 사람들을 통해 자유와 대안까지 그려 볼 수 있을까? 더 자세한 내용은 『철학vs철학』이나, 아감벤의 다른 저서를 보시길! 어쨌든 우리 삶에서 '정치'를 사고할 때 주목해야 할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
[관련된 책]



문필가도 감성도 들뢰즈도 아감벤도 맑스도 다 너무 좋지만
나 이런 거창한 취향인거야?
기분은 좋지만 말이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추모공연 - 나는 행운아








의리있네, 이 딴따라들.
근데 더 의리있는건 사실 공연장 사장 형아들인가?
어쨌든 27일에 봅시다.

연말 결산 놓친 영화 몰아보기 Vol.2 - 소와 함께 여행 하는 법, 치유보단 위로





# 그 지루한 성장

"네가 성장하고 있는 중이야" 라는 말은 커다란 위로지만 사실 무책임하다. 모든 순간이 성장의 순간임을 모르는 이 누가 있을까. 다만 그 더딘 성장과 치유의 과정이 미칠듯이 지루해서 속이타는거다.

세상은 너무 빨라서 시와 노래는 늘 뒤쳐진다. 심지어 난 뒤쳐질지언정 누가 불러줄 시와 노래를 부르지도 못한다.
사랑은 늘 은전처럼 말을 흩뿌리고 지나가지만 돌이켜보면 고이 접어 아련한 흑백사진의 빛깔보단 창피하고 쾨쾨한 녹이 눅진거리는 기억이다. 심지어 그건 사랑이었을까? 자신도 없다.

 세상은 역겹다. 불만투성이라 불만을 뱉어내지만 허무하고 무의미한 불평이다.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모두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실 내가 제일 어리석다는것쯤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다 성장의 과정이야 좋아질거야." 그건 차라리 골방의 수음 같은거다.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어쩌면 도피같은거다. 여행자를 두고 누구는 보헤미안이니 낭만적이니 하는 말들로, 누구는 역마살 든 금치산자 라는 말로 치장한다. 둘다 틀렸다. 여행자는 도망자다. 적어도 우리에겐, 또 나에겐. 
삶의 무게를 온전히 견뎌내지 못하는 우매한 중생,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는,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도망자다. 플랜비따위 없는.
 

# 십우도

언제더라 십우도를 본 적이 있다. 소를 보고 찾고 돌아와 소도 나도 다시 잊는.
열번째 그림이 뭐라더라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그림이던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 결국 나야

소와 땡중과 옛사랑과 술과 여행과 꿈.
환상적인 목록이랄까. 천애절벽 작은 동굴에서 만난 영약과 무공비급 같은 기연. 그런게 인생에 있어주길 기대한다. 나만? 당신도 그렇잖아. 우리는 그렇게 헛된 망상을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그런 절망, 그걸 철들었다고 하거나 어른이 됐다고 하거나.

결국 내가 할 일이다. 소는 여행을 함께 할 뿐 어느 말도 해주지 않는다. 여행 한번에 어른이 되는 일, 책 한권으로 깨달음을 얻는 일, 술로 세상을 잊는 일 모두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결국 내가 할 일이다. 자신을 보고 잊고 다시 돌아오는 일 모두 내가 할 일이다. 더딘 성장에, 그 지루함에 대한 절망에 위로가 되어는 주겠지만 결코 치유는 해주지 못한다. 치유와 성장의 주체는 결국 나. 떠나는 것도 보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나다.



# 환상

어느 순간부턴가 선호의 꿈과 현실이 얽혀서 어느게 환상이고 어느게 현실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돌아와 다시 밭을 가는 선호와 소의 얼굴이다.
대단한 깨달음도 대단한 고통과 고행의 여정도 없이 그저 담담히 돌아와 다시 웃으며 가끔 또 화나며 밭을 가는 그의 얼굴이다. 부처가 아닐 바에야 그게 중생의 삶이다. 그렇게 이 여행으로 선호는 더딘 성장과 치유를 또 한걸음 해냈다.

그럴 수 있을까?


# 임순례

임순례 감독은 이런 영화가 좋다. 우생순 같이 예쁘고 감동적인 영화 말고.
찌질하고 평범한 내 얘기를 조곤조곤 보여주는 그런 얘기들. 사실 이게 정말 예쁜 영화인거다.


# 김영필

영화 내내 "박해일인가?" 하는 생각이.ㅋ
알고보니 비열한 거리에도 공공의 적에도 나왔던 배우던데. 필모그래피를 보고 나니 생각이 났다.
이 양반 앞으로 이름이 보이면 한번은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공장축산을 매장하라 - 전희식



공장축산을 매장하라

[기고] 공장축산을 매장하라! / 전희식


만약에 말이다. 시애틀 북미원주민 추장이 그랬던 것처럼, 구제역으로 살육당하는 소·돼지를 대표해서 1970년대를 살았던 늙은 소 한 마리가 연설을 한다면 오늘의 구제역 사태를 두고 뭐라 한탄할까?


전에 우리는 들판에서 풀을 뜯고 살았습니다. 논에서 쟁기를 끌었고 무거운 등짐을 장터로 옮겼습니다. 진실된 노동으로 한 통의 여물을 받았고, 짚 몇 단으로 일용할 양식을 삼아 고단한 하루를 넘겼습니다. 일 년에 몇 번 제사상이나 명절상에 귀한 음식으로 오르긴 했지만, 한 번도 식탐의 재료가 되어 사시사철 고깃집에 걸려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달포 사이에 100만 마리나 죽임을 당해 언 땅에 파묻혔습니다. 매일매일 소주에 곁들여 우리를 뜯어 먹던 이들이 포클레인 삽날로 우리를 짓뭉개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재앙을 왜 죄 없는 소·돼지에게 뒤집어씌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좁은 쇠창살 속에 가두어놓고 평생을 사료만 먹이는 짓을 누가 했습니까. 90% 이상을 외국에서 사온 사료를 먹이면서 눈앞에 펼쳐진 7월의 무성한 풀밭에는 제초제를 뿌려대고 우리는 단 한 입도 풀을 뜯지 못하게 한 게 누구입니까.

짝짓기를 하지 못하게 하고는 강제 인공수정으로 새끼만 빼내 가는 짓을 누가 했습니까. 구제역이 왜 번지는지 정녕 모르고 하는 짓들입니까. 대량살육과 생매장으로 과연 구제역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나 하는지요? 예방 백신만 확보하면 이런 사태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나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에 기름 넣듯이 지금의 배합사료는 쇠고기 만드는 공장에 넣는 공업용 원료입니다. 우리는 원래 되새김 동물입니다. 위가 네 개인 우리는 되새김질을 해야 정상적인 순환작용, 소화작용을 합니다. 유전자조작(GMO) 옥수수를 갈아 만든 이따위 배합사료는 단백질 덩어리와 다름없습니다. 1:1로 균형을 이뤄야 할 오메가6 지방산이 오메가3보다 무려 66배나 많은 옥수수는 되새김질은커녕 목구멍을 넘기면서 흡수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몸은 망가지고 살만 찝니다. 막사 구석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항생제들은 우리 몸뚱이를 지탱하는 의족이자 의수입니다. 우리는 늘 약물중독 상태입니다.

소 한 마리가 구제역에 걸리면 반경 얼마 안에는 전부 몰살당해야 하는 이 비참을 누가 조성했습니까. 자식같이 키웠는데 하루아침에 살처분당했다고 통곡하는 축산농가에 할 말이 있습니다. 정녕 자식을 이렇게 키우는지 묻고 싶습니다. 영양제와 항생제로 자식을 키우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축사에서 나오는 순간 바로 도살장으로 끌려가 컨베이어벨트 쇠갈고리에 걸려 빙글빙글 돌면서 바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것을 그들은 알 겁니다. 목숨이 다 끊기지 않은 채로 머리가 잘리고 사지가 조각납니다. 이런데도 자식처럼 키운다는 말은 우리가 듣기에 거북합니다. 인간들이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못해 원혼이라도 살아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좁은 이 땅에 소만 340만 마리나 됩니다. 갓난애부터 노인병원 와상환자까지 다 쳐서 14명당 한 마리입니다. 돼지는 1000만 마리나 됩니다. 세 끼 밥 먹고 살자고 이런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끝 모를 탐욕과 식욕을 부추긴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진정 파묻어야 할 것은 공장식 축산이며 돈벌이 목적의 산업축산입니다. 시급히 생매장해야 할 것은 과도한 육식문화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건강에 보탬이 되고 싶지 건강을 망치는 원흉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정 한 식구처럼 살고 싶은 것은 우리들입니다. '축산물'이 아니라 '가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유제류의 원혼을 위로하는 초혼제를 지내고 속죄하기를 호소합니다. 참된 속죄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마지막 한 마리의 소가 구제역으로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 한 마리 돼지가 파묻히기 전에.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전희식 농부·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


[한겨레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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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한 얘기지만 제 어미를 뜯어 먹고 자란 소가 멀쩡하길 바라는건 놀부심보.
그 소를 먹겠다고 그래서 그런 소를 '만들겠다고'나서는 인간들은 그냥 놀부.

제 자식의 손가락 끝에 박힌 나무가시도 견디지 못하면서.

홍대 사태를 보다가 - 우리를 위한 변명, 우리도 알아요



온라인은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난다.
돌아다니는 사이트며 블로그가 한정적이라 모두 비정규직 철폐나 홍대 총학생회의 비겁함을 성토하는 내용들이다. 맞아.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하고 우리의 연대는 더욱 공고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의 이야기다. 비겁한 스무살들의 비겁한 변명.

우리는 무엇도 허락받지 못하고 20년을 살아야 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은 애초에 우리 것이 아니었다. 애들은 몰라도 된다는 말로 우리는 격리됐다. 자아를 구분할 수 있을 때쯤부터 우리를 키운건 팔할이 경쟁과 승리에 대한 주문이었다. 아직도 도무지 정체를 모를 그 '철'이 들기 위해서 늘 친구보다 앞서거나 타인에게 냉소적이어야 했다. 꿈? 물론 꾸었다. 어릴적 내 꿈은 판검사였다. 내 친구는 부자가 꿈이었다. 대부분이 그랬다. 꿈이란 삶의 지표가 아니라 권력이나 금력에 대한 희구일 뿐이었다. 우린 연대, 상생, 낭만, 소통, 가난 같은 말보다 먼저 경쟁, 승리, 출세, 성취 같은 말을 먼저 배웠다. 아니, 그런 말만 배웠다. 우리가 스무살이 되던 날, 우리는 대학 배치표를 끼고 앉아 있었다. 수십만명의 인간들에게 등급도장을 찍어주는 그 종이 쪼가리.

그렇게 대학교에 들어왔다. 수백만원의 등록금을 내고 수백만원의 방값과 수십만원의 책값을 쓰면서. 남자셋여자셋 같은 시트콤을 보면서 키웠던 캠퍼스의 낭만이나 소설책에서나 보았던 지성인의 고뇌섞인 일갈따위 대학엔 없었다. 선배들은 우희진보다 안예뻤고 송승헌보다 못생겼다. 소설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시대는 엄혹하지도 대학생들은 똑똑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취직이 어렵다는 말은 확인되지 않는 소식통에 의해 끊임없이 날아들었고 실제로 취업을 못한 선배들을 보고 있자니 찌질하고 갑갑했다.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이젠 소 한마리 팔아선 등록금 어림도 없다. 심지어 구제역 파동이라니.ㅋ

무엇보다 펜을 들어야 했다. 이 중에 몇 명만 취업하고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게 나여야 한다. 부모님이 뼈빠지게 모아준 등록금 허투로 쓸순 없다. 아파서 결석하는 친구가 걱정은 되지만 굳이 나서서 변호를 해주고 출석을 인정받게 해주고 싶진 않다.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어차피 그게 세상사는 이치인거다. 20여년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그렇게 밀려서 서울대에 가지 못했고 그렇게 밟아서 그래도 이 학교에 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더럽고 아니꼽지만 어쩔텐가, 그게 세상인데.

우리가 이기적이고 비겁하다는 말쯤, 한심하다는 말쯤 이미 수없이 들었다. 위로한답시고 이해한답시고 하는 말들도 들었다. 88만원 세대니 어쩌구 하는. 하지만 "우리를 동정하지 마 thㅔ요." 어차피 그건 우리를 위로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인정 할 수 있다. 우리는 비겁하고 나약하다. 타인의 목숨줄보다 내 학점과 스펙이 더 중요하다. 이게 나쁘다는 것도 알고 그렇지 않게 분투하는 삶이 있는 것도 알고 그런 삶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일 줄도 안다. 가끔 속상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눈물이 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같은거다. 아버지에게 저항하기를 포기한 아들들. 세상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아들들.

그렇다. 이건 전적으로 비겁한 변명이고 남 탓이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난 그래서 키보드 앞에 앉아서 이기적이니 비겁하니 날을 세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의 말이 싫다. 연구실 책상머리에서 우리를 이해하는 연구를하겠다고 문을 걸어잠그는 식자들도 싫다.

여기까지 써놓고서야 그래서 뭘 어쩌자는건데? 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그래, 답은 없다.
계속해서 이 유치한 싸움은 계속될거다. 하지만 한 명 정도는 비겁한 이들을 위한 변명정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위로해주지 못하니 변명만이라도. 

이건 우리 책임이 아니에요.


카페 느와르 - 할 말이 많아서 결국 하나도 하지 못한




## 구원. 여러 이름의

"하느님 아버지 제발 저를 구원해 주세요."

결국엔 머리에 권총을 당겨 뇌수가 흘러나와 손 발이 마비됐지만 맥은 여전히 뛰고 있어 방혈도 소용없었던 베르테르와 매일매일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마리아를 닮은 소녀 모두 구원을 받았다.
다만 그 구원이 자포자기일지 희망일지는 바라보는 이의 손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십자가에 매달린채로 막을 내린 정원이의 연극처럼.

하지만 발신인 모를 편지를 전해받은 영수는 어쩌면 사랑을 잃지 않았을지도 몰라. 같은 희망.
그러니까 어쩌면 난 믿는 자일지도 몰라. 같은 희망.
나도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 갈 수 있을지도 몰라. 뱃속에 예수를 품고. 같은 희망.


## 롱테이크, 문학, 구어체, 낭만

서울 시내를 관통할 듯이 달려가는 롱테이크,
잠시의 쉼도 없이 사랑얘기를 뱉어내는 선화,
쾨테와 도스토옙스키와 모차르트와 브레히트와 라캉의 언어,

불타버린 남대문과 수돗물이 흐르는 청계천과 폐허가 된 한옥집과 동방박사들이 사는 여인숙.
낭만을 잃어버린 낭만의 도시, 서울.


## 오마쥬

수원에서 멀지않아 오산 못가 있는 도시가 고향인 남자,
복수의 도구로 망치를 준비하는 남자,
꽃병이 도무지 맞지 않아 조카를 빼앗아간 괴물을 잡지 못해 서러운 남자.
그이 기타등등등. 

이 영화광의 못말릴 오마쥬와 패러디들.


## 정성일

러닝타임이 3시간 20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친구와 
"다신 영화 안만드려고 한 편에 다 때려 넣었나보다"라며 낄낄거렸는데
아직 정성일 아저씨는 자기 얘기를 시작도 하지 않은 느낌이다.

카페 느와르는 영화광 중년의 영화와 문학 편력기.쯤일까.
지난 시간을 모두 돌이켜 자기를 만들어준 영화와 이야기와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커밍아웃 같은거.


## 정유미

늘 그렇듯이 영화 선택의 가장 큰 이유는 여배우. 정성일이나 신하균 보다는 정유미가 가장 끌리는 이름이다.
5분정도 쉬지 않고 한 컷으로 서술(그렇다 그건 서술이다)하는 사랑이야기는 마치 곡예를 보는 듯, 눈 앞에 앉아 같이 수다를 떠는 듯. 눈물 닦아 주려고 손 내밀뻔 했다능.
 



목마른 계절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놀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니면 대학교 1학년 때,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이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또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이런 완전한 순간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무엇이든지 잡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것에 의해서 뒤흔들려보고 싶다. 뼛속까지, 그런 순간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

내가 지닌 여러가지 제안이나 껍질에 응결당함이 없이 내 몸과 내 정신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무한 속에 내던지고 싶다.
- 전혜린, 목마른 계절 中


순수한 열정, 그러니까 절망이나 환희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는 그 순간에 대한 갈증.
인간으로서의 자립과 성장에 대한 열정과 갈망.
오직 나로서 존재케 하는 삶에 대한 절실한 욕구.

어떤 언어로도 가져올 수 없는 진짜 삶에 대한. 눈물 나도록 절실한

연말 결산 놓친 영화 몰아보기 Vol.1 - 페스티발, 욕망으로 살아가기











어찌어찌 하다보니 올 해는 영화 한편 변변하게 보지 못하고 지나간다.
보고싶은 영화가 별로 없었어. 라고 하기엔 사실 열의도 정성도 금전도 없어서.
종강하고 다음 일정까지의 며칠동안 잉여력만 키우느니 놓친 영화나 챙겨보려고.
나다의 마지막 프로포즈. 도 좋겠지만 일단은 어둠의 경로님.

연말 결산 영화보기(연말 결산 영화 순위보다 이게 더 재밌네) 첫 번째는 페스티발.
이해영 감독은 정말 좋은데 그 작명센스는 좀 어떻게 안되나? 김씨 표류기에 이어 이번에도
하마타면 스킵할뻔. 자기 이름을 좀 대문짝만하게 써놓던가.





## 변태나라 정상인

페스티발은 변태영화다. 온갖 변태가 우글우글 득시글득시글.
사실 가학을 즐기거나, 복장에 도착하거나, 갈라테이아에 집착하거나 하는 것들쯤 변태라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건전하지 않은 것, 살기 좋은 나라를 방해하는 것들은 죄다 단속하라는 파출소장이나
자신을 남근으로만 증명하려는 남자(그것도 심지어 제복입은), 그리고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함을 변태로 규정짓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진짜 변태일테다.

그러니까 취향, 욕망, 사랑, 해방, 분출 이런 것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바로 우리들. 국격을 위해서 G20기간에는 음식물쓰레기도 버리지 못하는 이 경직된 사회가 변태의 세상. 우리는 변태나라 정상인.



▲ 장배는 등장인물중 유일한 진짜 변태다. 남성, 남근, 제복, 폭력, 허세로 점철된 그는 세상의 경직성과 폭력성 그리고 찌질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 욕망






누구나 자기 안에 넣고 사는 것. 성욕도 식욕도 구지에 대한 욕구도 지배 혹은 피지배에 대한 욕구도.
저마다 제각각인 욕망들이 얽히고 섞여서 만들어내는걸 관계라고 또 그 관계들이 엮이고 꼬여서 만들어 내는걸 세상이라고. 그렇다면 욕망을 이해하는 것이 자아실현의 첫걸음이겠다. 욕망이야말로 구도와 해탈의 길이기도, 생산과 번영의 거름이기도 한 법.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규범이나 질서라는 말로 강변하고 그 제어가 철저할 수록 예의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재미없다고 그런 사회를 지루하다고. 지루한 사람과 사회는 무엇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아니 생산과 창조따위 어떻게 되든 말든 경직되고 답답한 세상에 살아 남을 수는 있겠지만 살아 갈 수는 없다.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 사디즘이든 동성애든 양성애든 혹은 근친간의 사랑이든. 사람 아닌 생명과의 사랑도 생명 아닌 사람과의 사랑도.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해야 한다. 짧은 생이어서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할 테지만 적어도 내가 무얼 사랑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혹은 사랑하는 걸 사랑해야 한다.

극중 자혜가 말하길,
"제 교복 입은걸 부끄러워 마세요, 못 입고 후회하는 것들 보다는 낫잖아요" 


## 탈주, 해방, 카타르시스. 결국 페스티발



사실 영화의 말미는 너무 뻔하고 교훈적이다. 지수와 장배는 왜 화해를 한건지 도통 이해 할 수 없고, 상두도 세상밖으로 너무 쉽게 나왔다. (물론 백진희가 엄청 예쁘니까 사실 이해는 안되고 공감은 했다.) 결국 건강하고 '정상적
'인 사랑을 하게된 그들의 결말은 아쉽지만

성동일과 심혜진 커플은 그 찝찝함을 날려줄만큼 유쾌하다. 가죽바지와 채찍을 손에 들고 하늘을 날아 휘파람으로 성동일을 부르는 심혜진은. 그리고 햇살이 화창한 대로에 앉아 쇠사슬을 건네고 받아드는 이 중년 커플의 유쾌함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 지는 것, 남의 욕망에 관심을 꺼두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너와 나 모두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 영화에서 이해영 감독이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일까.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사는 하고 싶은 일도 못하게 하는 이 경직된 변태들의 세상에 던지는 말. 좀 재밌게 살자.

## 심혜진



다들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도통 왜 대단한지 모르겠고 예쁜지도 잘 모르겠던 이 여배우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배우다.
억눌리고 인내하고 감추는 엄마.에서 드러내고 즐기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그리고 마침내

"살다보면 변태 엄마도 있는거야"
"우리 지옥 가자"

이 아줌마 멋있는 줄 몰랐어.


## 백진희




그런데 사실 이 영화를 본 가장 큰 이유는 백진희 때문이다. 이해영 감독이나 류승범이나 엄지원 보다 더.
반두비와 비밀의 화원에서 보이던 그 느낌 그대로지만 여전히, 이 어린 여배우는 엄청 예쁘고 똘똘하니까.

앞으로도 백진희 나오는 영화는 꼬박꼬박 챙겨볼거임.

그렇다고 소덕후에서 백진희로 갈아탄 건 아님.

락락락 - 더 아프게 살아야 한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 - 부활

올 해의 드라마는 별 이견없이 성균관 스캔들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연말에 찾아온 드라마 하나가 가슴에 덜컥하고 내려앉아.
"삼류기타가 바닥소리를 낼 수 있다"던 김태원 아저씨의 얘기들.





빗속으로 떠나간 첫사랑에게 읊조리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를 알기에 더욱 슬픈 소녀"

아파서 약도 술도 담배도 노래도 친구도 사랑도.
그렇게 가슴에 맺히고 쌓여서 바닥소리를 내는 삼류기타리스트의 노래들이
밤을 지새게하고 눈물 흘리게 하고 술을 마시게 하고.

내, 우리의 방황이 결핍에서 비롯된것이면
그것은 어쩌면 오직 아픔의 결핍이다.
짓이겨진것처럼 아프지 않아서, 바닥에 대가리를 쳐박아보지 않아서 소리를 내지 못한다.
지금 내는 소리들은 그저 카피. 속주만 따라하며 우쭐한 밴드.
삶이나 사랑이나 혁명이나 방황,
아름다운 이름들에 대한 옹색하고 구차한 카피.

눈물이 흐르도록 아파야 한다. 그렇게 사랑하고 살아가야한다.
진심을 다해 또 무언가를 찾으면서.

아, 괜찮아요


#1
선거에 졌다.
현명하신 엄마 말씀이 넌 관여하고 지지하는 모든 선거에서 패배하니 이기고 싶으면 신경을 아예 끊으라고.
생각해보니 정말이다. 노무현 이래로 대선 총선 지자체 총학생회 선거 할 것 없이 내가 지지하고 관여하고 활동했던 모든 선거는 패배했다.
이러니 내 패배주의도 납득이 갈 지경이다.

이번만큼은 눈물따위 흘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좀 옹색하긴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어 뛰어든 선거였기 때문이다.
난 성취의 기억이 갖고 싶었다. 돌이켜보니 살며 무엇하나 성취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늘 지거나 납득하거나, 그리고 대부분 체념하거나 포기하며 살았다.

성취의 기억이란 승리의 기억과는 또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든걸 다 소진하는 기억. 포기하거나 납득하지 않고 끝까지 가진 모든걸 소진하는 기억을 한번쯤 가져보면, 정말로 'Quantum Leaf'같은 성장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모든게 다 끝난 지금에 고백하자면 이번에도 난 모든걸 소진하지 못했다. 선거엔 졌고 패인으로 분석되는 것들중엔 내 노력으로 극복 가능했던 요인들도 있다. 성적은 다시 예전만큼 떨어질것 같고 몸도 많이 축났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힘들었던 순간들도, 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고민이 넘쳐 머리가 터질듯하던 순간도, 몸이 너무 아파 어쩔줄을 모르던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든 순간들을 그리고 그 모든 계산과 고민과 바람들을 다 잊어버린 순간들.
그건 아마 '진심'이라는 진부한 말로밖에는 표현 못할 그런 것.

 이제와 성장이니 하는 것들 따윈 의미가 없다. 개표가 끝나고 예년과는 다르게 화기애애했던 그 술자리에서 다시 궁상맞게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이렇게 진심으로 움직였던 적이 없어요"
어쩌면 그 진심이 성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
돌이켜 보니 혼동하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오던 07년의 겨울엔 그랬다. 진심의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의 영역과 어른의 영역, 낭만의 영역과 철 안든 아이의 영역이 다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어른 놀이에 치중했다. 그러다 마침내 어른 놀이가 어려워지고 겁나고 두려워져서 그저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려고만 했다. 그리고서는 인생은 외롭고 고독한 법이라며 관계 따위 더욱 부질없고 의미 없다며. 죽어버릴테야.란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리면서.

어떤 한가지 요인 때문만은 아닐거다. 물론 이번 선거를 같이 하며 만났던 사람들 어려움들 고민들 얘기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들이 가장 큰 요인일테지만 그것만은 아닐테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잘 알지 못하겠지만, 진심이니 현실이니 운동이니 하는 것들은 계획잡고 도식화해서 그림그리고 집짓듯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수학공식처럼 명징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아마 그건 뒤죽박죽이고 그래서 그 정체도 알기 어렵고 또  가려졌다 드러났다 헛갈리는 것들이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가끔 문득 드러나보일때, 더욱 소중한 것인가보다.

#3
애초의 계획에는 차질이 많다. 짐이라고는 결코 부르고 싶지 않은 숙제를 떠 맡았고, 그 숙제로 다시 앞으로의 계획들을 세워야겠지만 나쁘지 않다. 그 숙제들에서 다시 이렇게 문득문득 진심이 드러나는 희열이 있겠다란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정리를 하고 싶다고 다시 돌아왔던 우리는 정리인지 아니면 다시 처음인지 모를 것들을 안고 올 가을을 마무리했다. 

#4
누가 다시 오늘의 나를 보면 어쩌면 한심해 하거나 변명하지 말라고 말할 것 같다. 그럼 아마 난 또 이런저런 말들로 그 사람을 납득시키력 애쓰거나 변명하거나 나를 치장하거나 할지도 모르겠다. 그거야 그 순간이 닥쳐봐야 알겠지만 지금의 마음은 '상관없다.'

사람의 삶이야 저마다 각각이고 그들도 나도 그렇게 말하던 현실을 딛는 발, 그건 명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다시 몽상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이건 인지부조화가 아니다. 그렇게 치부하기엔 오늘의 내가 느끼는 행복이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안녕, 달빛요정




하나도 안 힘들어 그저 가슴 아플뿐인걸.

루저, 찌질이, 모질이, 바보, 병신 으로 치환되는 나. 바닥에서, 그러니까 결국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슴아프지만 하나도 안힘든 우리를 위로해주던, 사실 우리이던 그가 떠났다.
하나도 안 힘들다. 그저 가슴아플뿐이지.

주성치와 함께라면 웃을 수 있다더니, 난 그와 함께라면 울 수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