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생명의 가치를 지키자던 수녀님은 체포되고, 국가보안법은 애먼 청년을 구속했다. 어떤 노동자는 제 몸에 불을질러 결국 목숨을 잃었고, 며칠 후는 국가권력에 의해 도심 한복판에서 불타죽은 이들의 3주기다. 심지어 그 아들은 살인죄로 수감중이다. 30년 전쯤의 얘기가 아니다. 이게 2012년 대한민국의 살풍경이다.
이런 일들은 고작 대통령 때문에 발생했거나 저 간악한 미제의 간교나 초국적 기업들의 악랄한 신자유주의 수탈 때문이 아니다. 당신과 나의 탓이다. 수전손택은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가난을 부추긴다고 애기했다.
당신과 내가 알게모르게 좇고있는 성장과 성공의 신화, 모르는 척 소비하는 수천억배럴의 시체썩은 기름들, 알량한 연민의 눈길이나 몇 시간의 '봉사'로 만족하는 허위와 허식이 사실은 이 모든 일들을 부추기고 있다.
할 일은 보일러를 끄고 긴팔 내복을 갖춰입는 일, 주식시세표, 부동산 시세표, 뉴타운 예정지, 처세술, 재테크, 알량한 자기계발서를 내던지는 일, 조금 더 가난해질 일.

2.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사람들이 멍청해'
세상의 온갖 부조리들이나, 맹목적 신앙으로 이성을 잃은 종자들이나,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며 자기는 마치 세상밖에서 살아가는 양 히히덕거리는 모질이들이나, 아직도 원더걸스가 소녀시대보다 예쁘다는 미학적 맹인들을, 그러니까 스스로 '대중'이라 부르는 치들을 보면서 늘 '멍충이!!!'라고 말한다. 그걸 지켜보던 어느 후배가 이르길,
"형은 여전히 사람들한테 많은 희망을 갖고있나봐요. 역시 빨갱이."

이거 뭐 이러다 훈민정음이라도 만들 기세.ㅋ

3.
요즘 유행인 인디언식 이름짓기. 내 이름은 '지혜로운 태양의 죽음'
이건 주사파의 몰락을 예언하는 이름 아니냐며.. ㅎㄷㄷ
이름이란건 정체성의 발현이다. 서술형의 이름, 자연에 자신을 투영하여 그 지혜를 빌리려는 자연친화적 사상은 현명하고 아름답다. 지금 이런게 유행인것은 어쩌면 도무지 삶의,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이들의 유희일지도 모른다.

덧붙여, 인디언이라는 말은 틀렸다. 그건 아메리카를 인도로 착각한 어리석은 유럽인들의 언어. 타자화된 언어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정확한 표현.

4.
며칠 전 하이킥에 신세경이 나온 에피가 좋았다. 3시즌의 몇몇 에피에 나타난 지난 시즌의 흔적들을 보면서 김병욱 감독이 결말에 쏟아진 질타에 신경질이 좀 났었겠단 생각을 했었는데, 타히티가 아니라 타이완으로(이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태평양의 작고 낙후된 섬나라가 아니라 최첨단을 달리는 아시아의 중심으로 떠난다는 점.) 무사히 떠나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경이의 편지는 그 질타들에 대한 대답같기도. 아니면 던져주는 떡밥같기도. 옛다 먹고 떨어져라.ㅋ
여하튼 다시 불꺼진 주방에서 곰국을 끓이는 세경이를 보자니 마음이 을지문덕. 저 친구는 어린나이에 어떻게 저런 얼굴을 할 수 있을까. 하긴 TAKE5 뮤비에서도 저런 얼굴이었던거 같다. 눈물나는 얼굴.

5.
요즘은 역시 아이유.
사실 아이유 이번 앨범은 지난 내 멋대로 올 해의 음반 선정에서도 고려했던 수작. 삼촌들이 그저 귀엽고 깜찍하기만해서 예뻐하는게 아니다.ㅋ 그녀는 훌륭한 목소리와 감수성을 가진 흔치않은 보컬이다. 3단고음보단 낮은 음역대의 담담한 노래들이 사실 더 그녀에게 어울리는데. 그나저나, 김광진에 윤상이라니. 이번 앨범은 삼촌들의 그녀에 대한 조공.

난 노래든 연기든 글이든 살아가고 자기안에 쌓여있는 만큼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노인들의 노래와 연기를 더 좋아하는거. 하지만 이렇게 어린 친구가 그걸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모습이, 거기다 자질까지 갖춘 예쁜 소녀의 모습이 좋은건 당연한 일이다. 굳이 최고로 잘나가는 가수가 아니어도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가 되고싶다는 말이나, 공부를 못해서 대학엔 못가지만 대신 작곡 공부 열심히 하겠단 다짐, 이 당연한 얘기들을 칭찬해 주는게 더 부담스럽단 말. 그건 삶의 태도다. 삶을 건강하게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덧붙여 열심히 책을 읽고, 알랭 드 보통을 읽는 중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봤을 때 더더욱 호감. (소시의 서현이도 처세술책 말고 이런걸 읽으렴)


IU - Last Fantasy

5.
컴퓨터를 너무 함부로 썼더니 버벅거리는데다, 결정적으로 키보드의 스페이스바와 엔터키가 이빨 빠지듯 빠져버렸고, 이물질이 많이 들어갔는지 잘 안눌리는 키도 있고, 시프트키도 말썽이다. 덕분에 오타작렬.
교훈은 컴퓨터 앞에서 담배도 피우지 말고  뭐 먹지도 맙시다.

단상


1.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 이성복

나는 왜 40대 농부의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지금이나 따스한데.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브레히트)

전에 고등학교 때 한참 정치에 꿈이 부풀어 있을 때,
국회의원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학 갓 들어가 예술이니 사상이니 미쳐 있을 때,
유명 화가의 전시회에서 심오한 질문을 해댔다. 화가는 한참 쳐다 보더니 쌩까버렸다.
다시는 글 안 쓴다고 군대에 가서는 한참 뜨고 있던 여류시인에게 오밤중에 전화를 했다.
그녀가 정중히 전화를 끊었을 때, 그때도 참 부끄러웠다.
그러나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 들어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렇게 끼적거리는 잘난척도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2.
타임라인에 공지영이 우수수하기에 무언지 찾아봤더니,

"나꼼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엄청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내 딸과 또래 친구들이 정치에 관심 가지고 참여하게 되는 데에 나꼼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확인했다. 단식이니 길거리 농성이니 투신이니 삼보일배니 하는 식의 자학적인 운동은 죄송하지만 그만하고 시위 자체가 축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에서 나꼼수와 내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또 언론사가 이토록 비열하고 이토록 무기력한 꼴은 유신 때 사춘기를 보냈지만 그때도 보지 못했다. 이 절망적인 시대에 나꼼수가 언론의 역할을 대신 한다고 보기 때문에 돕기로 한 것이다." - 한겨레인터뷰 中

하지만 오늘 현대차의 노동자는 분신을 시도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자학적 운동이다.
나도 자학같은 운동이 달갑지않다. 누구라서 그러지 않을까. 누구라서 축제와 같은 운동이 반갑지 않을까. 하지만 몸뚱아리, 목숨밖엔 내놓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그것마저 하지 말라고하면 그들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치면 사실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가장 대표적인 자학적 운동방식 아닌가.
자학적 운동이 없어도 되는 세상을 바란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특히 남한사회는 자학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이,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살겠다고 올라선 곳에서 불에 타죽은 이들의 3주기가 다가온다.

공지영이 깊은 사유를 통해 뱉은 말이라고 생각치 않는다.(사실 그녀가 깊은 사유라는걸 하긴 할까 하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한다.) 그저 나꼼수 열풍에 무엇이든 끼워 맞추는 말들이었을테다. 이건 나꼼수의 결정적 폐해들 중 하나다. 모든것을 즐거움의 영역으로만 소환하려 한다. 조금 진지하면 몹쓸 것인양. 그렇다면 스스로 쇼고, 코미디임을 인정하면 괜찮을텐데. 웃고 떠드는 긍정의 힘은 먼저 절망을 고스란히 긍정하는 일부터 시작이다. 외면은 긍정과 엄연히 다르다.

3.
어제, 오늘 블로그 방문자 수가 갑자기 늘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며칠 전에 쓴 영광의재인 리뷰가 디씨인사이드 박민영 갤러리에 옮겨져 있더라. 역시 박민영 오덕인증글 다운 위용.ㅋ 앞으로도 이렇게 종종 (어느 갤러리나 팬카페에 옮겨질) 연예인 덕질 인증글을 포스팅해서 방문자를 늘려야겠다는 생각이.ㅎㅎ 나 요즘 방문자와 댓글에 목마른 블로거임. 주변의 충고대로 네이버로 이사갈까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고려중인.
(하지만 냉혹한 갤러들, 댓글 하나 남겨주지 않다니. 그 갤러리는 차가운 도시남자들만 모여있는 것이냐.ㅋ)

4.
긴 세월을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 줄 그런 사람을 찾는거야.

기다리느라, 굳이 찾아나서진 않는다.




Danny Boy - 북아일랜드가 부르는 상실과 그리움의 노래






#
영광의 재인을 보다 이 곡을 들었다. 서재명이 죽고 인우가 슬퍼하던 장면. 슬픈 장면인데도 왠지 웃음이.

'Danny Boy'의 원곡은 'Londonderry Air'라는 북아일랜드의 민요다. 하지만 이게 민요라는 간단한 말로 부르기 힘든 것이 북아일랜드에서의 위상이 우리나라의 '아리랑'쯤 되는 노래다. 심지어 북아일랜드의 국가도 이 'Londonderry Air'의 변형이다. 대니보이 역시 'Londonderry Air'의 한 변형이니까 그 무게감이 북아일랜드의 국가와 비슷한 격인 셈.

19세기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일때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수없이 전쟁터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죽으러 가는 길, 그들이 어찌 기꺼웠을까. 하물며 그들의 부모는. 언제부턴지도 모르게 북아일랜드 지방에서불려지던 구슬픈 멜로디의 이 노래를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간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불렀다.

And if you come, when all the flowers are dying
And I am dead, as dead I well may be
You'll come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And kneel and say an "Ave" there for me.

꽃이 지면 네가 돌아올거야.
그리고 난 아마 죽어있겠지.
누워있는 내 곁에 무릎을 꿇고 넌 말할거야.
안녕, 당신 곁에 있을거에요.

전쟁을 치룬듯 격렬했던 시간을 마치고 아버지의 영정앞에 섰을 때 흐른
'Danny Boy'에 살짝 웃음이 날만하지 않은가.ㅎ
이 곡은 드라마 '아일랜드'에 삽입되기도 했었는데(지금 기억엔 거의 메인테마쯤 됐던듯.)
상실과 그리움의 정서가 골자였던 '아일랜드'에 아주 적절했던 것 같다.

#
말 나온김에 아일랜드 이야기.
19세기를 지나 1949년 아일랜드는 독립했지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이주해온 개신교도가 기득권을 행사하던 북아일랜드는 독립에서 제외된다.(아일랜드는 국민 대다수가 카톨릭이다.)

그 기득권 행사는 여전하다. 북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인들과 영국인들의 종교분쟁, 민족분쟁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IRA의 투쟁이나 신페인당, 부활절 봉기같은 일들이 모두 북아일랜드와 영국간의 분쟁들이다.

그리고 가장 비참하고 유명했던 사건은 Bloody Sunday(피의 일요일). 시민권을 요구하는 비무장의 평화시위대에게영국군은 무차별 발포를 자행한다. 이후 처절한 싸움의 도화선이 됐던 사건. 피의 일요일이 지나간 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노래를 발표한다. 'Sunday Bloody Sunday'와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 폴 매카트니의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는 BBC의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영국에서 비틀즈의 곡이 금지곡이라니. 엄청 예민한 사건이었던 거다.

그리고 한참이나 지나서 아일랜드 출신인 U2가 다시 부른 'Sunday Bloody Sunday'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보노가 말하길
"난 아일랜드 사람으로 그 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Broken bottles under children's feet
Bodies strewn across the dead end street
But I won't heed the battle call
It puts my back up
Puts my back up against the wall

아이들 발밑엔 깨진 유리병.
시체들이 늘어선 거리.
전쟁의 부름을 신경쓰지 않았어.
그저 벽에 등을 기대 서 있었어.

How long...
How long must we sing this song?

얼마나 오래, 얼마나 더 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거지?


IRA의 테러리즘이나 아일랜드의 극우민족주의를 옹호하는건 아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삶이란 오직 행복을 향해서만 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
그건 억압이나 종속, 복종,포기보단 자유와, 연대, 희망, 저항, 불복종에 가까운 느낌이라는 것이다.



영광의 재인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뿌리깊은 나무와 영광의 재인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내심 더 마음이 갔던 쪽은 오히려 영광의 재인이었다. 그건 오직 박민영 때문이었는데, "뭐야, 김탁구잖아"라는 반응이 떠올랐던 첫 회의 미적지근함과 "우라질, 지랄하네"를 중얼거리는 세종, 심지어 송중기의 자태를 뽐내던 뿌리깊은 나무의 위용에 박민영에 대한 사랑도 잠시 미적지근해졌었다. (여기서 '민영아, 오빠가 미안해' 라고 하면 나 완전 오덕 인증하는거임?)

여하튼 뿌리깊은 나무에 밀려 본방사수가 힘들었던 영광의 재인의 밀린 부분들을 어제, 오늘에 걸쳐 다시보기했다. 보고났더니, 이거 생각보다 더 재밌는 드라마였네.

# 자본주의 우화

옛부터 자고로 캔디라 함은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떼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해라"라는 대사를 날려주는게 자고로 모든 신데렐라, 캔디류의 드라마 첫 회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는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그녀들은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캔디들에 비해,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형 캔디들이 갖는 삶의 태도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캔디. 어쩌면 우리도, 그녀들도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건 극중의 허영도 팀장의 대사에서도 나타난다.
"정말 비참한 건 잘못을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야"

여담이지만 모 기업의 광고가 마뜩찮은 것도 같은 까닭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은 좋아질 것도 많다는 말'이라던가. 그건 역시 쌓아올려 나아가는 것만이 오직 옳은 일임을 강변하는 말이다. "돈 벌자고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대신에 "뭐든지 열심히 해서 돈 벌거에요. 빠샤"가 꿋꿋함의 상징이 되는 시대.

조금 유치했지만 영광의 재인은 이런 세상을, 그러니까 세상을 구성하는 계급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그곳은 가족을 찾는 일 마저도 '처음엔' 돈의 힘을 빌려야 했다. 주인공들의 정직한 심성은 돈을 대하는 태도로 그려지고, 타인에 대한 호감과 사랑 역시 돈으로 표현된다. 오직 돈만이 세상의 모든 언어고 감정이고 윤리인 시대, 바로 지금. 

#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보려고 해요

이렇게 한 줄이라도 끄적거리고 싶게 만들었던 건 저 진부하고 오글거리는 대사 때문이었다. 진부하고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남겨놓아야 하는 말, 희망.

그토록 싫던 서재명 회장과 닮아가던 재인은 마침내 답을 찾았다. 그건 직원이 곧 회사라는 아버지의 말씀. 그녀는 다시 사람이 희망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을 읊조리면서 모든 희망을 사람에게 건다. 어디서 보기만 하면 하악거리는 소재인 '노동자 자주경영'. 그게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얘기일테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물려가도 우리 서로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있다는 얘기. 역시 모든 우화는 오글거려도 새겨들어야 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있다. 그들이 권하는 선이란 사람이고, 그들에게서 발견한 희망이었다. 

재밌었던 건 내내 영광의 재인의 앞길을 막았던 뿌리깊은 나무의 주제의식도 같았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책임이기 때문에 책임질 수 있는 몇몇이 해나가야 한다는 정기준과 정치의 주체는 책임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함께 토론하고 쟁명하여 고통스럽더라도 책임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세종의 대립. 그건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와 그럴 수 없는 이의 대립이었다. 정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어떤 답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안일하지 않은 대답을 내놨다면, 영광의 재인은 말했다시피 조금 유치하고 조금 조악하지만 결코 거부 할 수 없는 희망으로 대답한다. 그건 재인이 '기적'이라는 무기를 들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희망은 어쩌면 이뤄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기적같은 희망을 가져요"

냉철하고 정확한 눈도 좋지만, 때로는 무조건적이고 근거따위 없더라도 마냥 희망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도 반가운 법이다. 재인이의 기적처럼.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박민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평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못되고 차가운데다 비관적이기까지 한 도시남자라서 사실 희망의 강요. 같은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의 주체가 박민영이라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달까.ㅋ

그녀는 왜 이런 표정을 지어도 아름다운 것인가.


박민영은 예쁜데다 매우 영리하다. 그건 그녀의 작품 선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선택했던 작품들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한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자명고를 들먹거리는 이가 있더라만, 자명고는 박민영을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가치있는 작품이다. 완전한 파국, 그 섬칫할 만치의 비극을 가졌던 사극이 존재하기나 했던가. 자명고는 훌륭한 상상력의 스토리와 섬세한 감수성이 스몄던 걸작. 흠이라면 시껍할 만치의 시청률과 조기종영일까. 

여하튼 이 영리하고 예쁜 배우에게 홀릭하게 된 계기는 어느 인터뷰. 성균관 스캔들이 끝나고 있었던 그 인터뷰에서 그녀는 “마지막에 대사성이 김윤식 박사라고 불렀다. 마지막까지 동생의 이름으로 박사를 한 거다. 결국 여자로서 인정받은 건 없다”라고 말했다. 극과 캐릭터를 진짜로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말 좋은 시야를 가진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던 계기.
언제나 다음 작품이 매우 기다려지는 배우랄까.

그녀의 작품중 가장 좋아하는건 런닝,구. 종종 이렇게 단편을 찍어주면 더 좋겠다.




##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

예전에 SNS에 중얼거린 낙서인데,

'인생은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경구를 떠올리며 일평생 대충 때우다 가게되면 가고 또 아님 말지 뭐. 하다가도 어느 날은 삶에 당당히 맞서는 무사가 등장하는 무협지에 주먹이 불끈불끈 하기도 한다. 이렇게 흔들흔들 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인가보다. 생각해보니 성균관스캔들에서 정조는 나침반이 흔들리는 한 틀린 방향을 가리키진 않는다는 주옥같은 대사를 날려주신다. 그래, 답은 결국 박민영인 것이다.

이걸로 완벽히 박민영 덕후 인증.ㅋ

스크랩의 소통


글쓰기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읽히기 위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글의 존재는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치유하는 글쓰기, 그러니까 일기같은건 어쩔거냐는 물음도 있지만, 그건 작자 자신이 독자가 되는 경우니 마찬가지인거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도 얘기했지만 사유는 읽고 쓰고 토론하고 쟁명하며 확장된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큰 즐거움이다. 세계가 넓어지는 즐거움. 그 즐거움을 기술의 발전으로 확장시켜 온 역사가 아마 미디어의 발달史. 구술에서 문자로, 활자로, 영상으로, 마침내 지금 2.0이라 부르는 시기까지.

그래서 미디어의 발달사는 다시 사유의 발달사로 이해할 수 있겠다. 관심을 두는 관계망이 점차 넓어져, 처음엔 가정에서, 마을로, 국가로, 마침내는 세계로. 이건 세계가 분절돼있지 않고 우주 삼라만상이 결국 하나의 관계로 이루어져있음을 이해하고 소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글의 본질은 읽히기 위한 것, 그것은 다시 말해 모든 언어는 관계맺기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SNS니 블로그니 하는 발달된 기술은 소통을 용이하게는 하였으나 소통을 가능케 했는지는 모르겠다. 깊은 사유와 친절한 우정의 언어 대신에 사람들은 140자의 강렬하고 섹시한 문장과 그 섹시함을 가능케하는 폭력, 그리고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네트워크 위에서의 무책임으로 대화를 가장한 웅변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타인과의 공명을 통한 확장을 시도하지 않고 모든걸 자기안으로 수렴하려한다. 그건 트랙백 보단 스크랩에 익숙한 풍경이다. 예쁘거나 웃기거나 자극적인 문장을 RT하고 LIKE해서 수용하는 것으로 소통의 과정을 마무리한다. 그 과정 어디에도 공명과 확장의 자리는 없다.

화제인 '나는 꼼수다'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수 있겠다.   기사링크
위트와 조롱으로 시작한 대화를 사유도, 소화과정도 없이 받아들여 이젠 그 외연의 확장에만 신경쓰게된 불통의 집단. 그게 지금 나는 꼼수다와 그 팬들의 좌표다. 그들이 내걸고 있는 최대의 가치가 소통이고 표현의 자유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건 전형적인 스크랩의 소통이다.

기존의 언어와 합리성이 결국은 그 견고함을 더 가중시킨다. 의심하고 탈주하려는 사유, 그것을 깨고 나서려는 욕망이 결국 사유의 목적이고 진보의 의미다. 결국 모든 언어의, 글쓰기의 목적이다.

고민하고,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또 생각하고, 이해하며 써야한다.
이건 사소한 한 줄의 텍스트지만, 그 의미란 사실 세계와의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목적은 왜 열심히 쓰고 방문자도 곧잘 느는데 트랙백도 댓글도 없냐는 투덜거림. 징징징.
확 이글루스로 다시 돌아가버릴까보다.ㅋ





Sigur Ros - Gobbledigook

단상


1.
사민주의, 한국 진보파 이념 최대치

레디앙의 최장집교수 인터뷰다. 북한이 사회주의를 대변하고 또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남한사회에서 사회주의의 추구는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사민주의, 혹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남한 사회 좌파이념의 최대치라는 얘기.
일견 동감하기도하고, 또 새겨들어야 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북유럽의 사민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돌이킨다면 마냥 동의할 수만은 없다. 북유럽의 사민주의는 급진 사회주의 혁명노선의 결과다. 사회주의 운동과 그에 대한 자본주의의 타협의 산물이란 얘기. 결코 '사민주의자'들의 체제내변혁에 선량한 자본가들이 감화설복되어 만들어진 체제가 아니다. 지금이야 유럽식 사민주의가 시민사회의 상식이 되어 있다지만, 그 상식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상식적이지는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회가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 발전해 나간다면 테제에 반하는 안티테제를 던져야 합이 도출되는 법이다. 남이 만들어 놓은 합을 가지고 과정도 없이 들이밀면 뭐하나.
덧붙여 말하면 난 사민주의 역시 마뜩치 않다. 그건 결국 계급의 타협. 아다시피 타협이란 그 체제를 공고히 할 뿐이다. 뭐, 대한민국과 북유럽 사민주의 국가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하면 주저없이 북유럽을 고르긴 하겠지만.ㅋ

2.
뿌리깊은 나무가 끝나고 이제는 빠담빠담이다. 통영항구와 정우성과 한지민과 김범은 있기만 해도 그림이더라.

3.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황지우, 수은등 아래 벚꽃)
트위터 시봇이 계속 시를 읽어주는데 저게 눈에 확 들더라. 엄마야.

4.
정봉주 구출운운할 시간에 송경동 시인 안부도 좀 물어줬으면. 참말로 목숨걸고 정권에 맞서 이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주셨으면, 진짜 목숨걸고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주던 시인도 좀 지켜주시지. 아, 욕나와.

5.
아이폰이 올 해의 운세를 봐줬는데 만사형통하단다. 애정운은 무려 첫사랑과의 재회. 흐음. 언제나 이발 직후의 단정한 머리모양을 유지해야겠다.

6.



자꾸 욕하고 다녀서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나 김장훈 엄청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 가난한 날이 노래가 되어.

2011 '내 멋대로' 올 해의 음반 / 올 해의 영화 결산


딱히 정산할만한 것도 없어서 늘 그랬듯이 올해의 음반과 영화 결산.
당연히 내 멋대로이며 순위는 없고, 가나다순은 복잡해서(귀찮아서) 못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따위도 없다.

음반

1. 코스모스 사운드 - Ep. 스무살


이 생소했던 이름의 노래는 듣는 순간부터 빠져들었다.
기타와 목소리외엔 별다를 것 없는 단촐한 사운드와, 후벼피듯 찌질하고 서글픈 가사는 얼마나 제목에 충실한가.
나는 성대다 류의 뽐내는듯한 보컬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박하고 서툰 목소리의 진심을 더 믿는편인데 한음절 한음절마다 마음을 다 담아서 내뱉는 것 같은 목소리는 금세 그의 세계로 빠져들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여전히 아직도 스무살의 그 쓸쓸함과 절망감의 어귀에서 헤매는 중이라.ㅋ
 Ep를 넘어 나올 그의 정규앨범에 침만 꼴깍꼴깍.

2. 허클베리 핀 - 까만 타이거


나에게 최고의 밴드는 허클베리 핀이다. 사막이나 Somebody To Love가 들었던 2집은 내 생 최고의 음반을 결산하라고해도 반드시 들어갈 앨범.
당연히 늘 기다릴 수밖에 없고 나오면 뛰어가서 앨범을 사고 공연을 봐야했던 이 밴드가 유래없이 규칙을 깨고(허크는 3년마다, 11곡의 노래로, 한글이름의 정규앨범을 낸다.) 4년반만에 낸 앨범.

너무 오래기다린 탓일까(유앤미 블루 앨범도 아직 기다리는 주제에ㅋ) 괜히 이기용이 연애를하는 것 같네, 너무 방방떠서 진중하지도 사유할 수도 없는 것 같네, 이건 변절이네 하며 툴툴거렸지만, 언제나 버리지 못하는 노예근성. 결국 내내 허크 앨범을 듣고, 올 여름의 공연엔 모두 허크가. 그런데. 어라, 이거 좋잖아. 그것도 엄청.

그동안의 허클베리 핀에서 벗어나는 앨범을 만들어낸 이기용은 이 앨범을 백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앨범이라고 자평. 동의한다. 객석을 움직이게 하는 사운드에 얹은 메시지. 베이스가 탈퇴했음에도 더욱 또렷한 리듬감은 백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테다. 심지어 이소영 누나는 치명적인 외모까지 갖게됐다. 하악하악. 옛날에 남상아 언니랑 비교해서 미안했어요.ㅋ 앞으로도 당분간 내 최고의 밴드는 허클베리 핀일듯. 한 백년쯤?ㅋ (아는 사람은 아는 밴드, 한국사람은 논외로ㅋ)

3. 이승렬 - Why We Fail


"이승열 신보 들어봤어요?"
"아니, 아직. 왜?"
"엄청나던데요."
"그렇겠지. 이승열인데"

딴딴함, 완결성, 신뢰감, 명불허전 같은 고루한 말들이 어울릴까.
코스모스 사운드가 처연하고 서글픈 친구의 노래였다면, 이승열은 내 맘을 어루만져주는 큰 형의 위로주같달까.
지루하거나 꼰대같은 맞는 말 퍼레이드가 아니라 고단함과 외로움을 앓을만큼 앓았다 일어선 똑똑한 큰 형. 미국유학 갔을때 놀만큼 놀아봤을것 같은 그런 큰 형.ㅋ 한대수 아저씨와의 콜라보가 주는 신선한 재미는 형님의 위트같은 느낌.ㅎㅎ

4. 2011 들국화 리메이크


헌정앨범은 당연히 별로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존경하는 뮤지션의 아우라를 넘어서기 위한 앨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대해야 할 것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이다. "난 이 노래를, 이 뮤지션을 좋아해서 이런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를 보여주는 고백.


들국화 리메이크는 그 미덕을 골고루 두루두루 보여주고 있다. 일단 참여 뮤지션의 면면이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데, ( 그간 있었던 헌정앨범에 메이저씬의 유명한 가수들이 참여에 의의를 두었던 일은 그냥 잊어버리고)  김바다, 허클베리핀, MOT, 국카스텐, 한음파, 이장혁, 몽니, W&Whale, 그리고 무려 테이의 밴드 핸섬피플까지.

곡과 뮤지션을 떼어놓고 어울리는 짝을 찾아주자고 했을 때, 대부분이 이장혁에게 제발을 권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못에게 매일 그대와를 매칭시키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전자는 고백이고 후자는 상상력이다. 모든 트랙이 훌륭하다. 김바다는 시나위 보컬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걸 확실히 보여준다. 그가 외치는 "앞으로!"를 듣다가 정말 앞으로 걸어갈 뻔 했다.(물론 뻥이다ㅋ) 못의 매일 그대와는 마치 음울한 스토커 살인마의 침실을 떠올리게한다. 사랑하는 그녀의 시체 옆에서 매일 아침햇살 받으며 눈뜨는 스토커.ㅋ 몽니의 치기어린 그것만이 내 세상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 외칠 어린 치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한음파는 어떤 면에선 들국화보다 낫더라는...ㅋ 염려했던 웨일의 사랑한 후에도 무리없고 담백했다. 허크야 말해 뭐해..ㅋ

5. 나는 가수다 3차 경연 - 내가 부르고 싶은 남의 노래


MBC연예대상을 받은 나는 가수다를 빼놓고 올 해를 결산할 수는 없다.
나는 가수다는 이 즈음이 정점 아니었을까 하는. 지금이야 뭐. (인터넷 기사에서 전인권 아저씨가 나는 가수다에 나올 수 있다는 얘기를 봤는데, 반갑기 그지 없다가 괜히 속상해질수도 있단 생각에 마냥 반가워하기도 애매하더라능)

임재범이, 그 임재범이, 무려 그 임재범이 나와서 빈잔을 불렀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게 저렇게 부를 수 있는 노래였구나. 임재범은 애국가나 찬송가에도 롹 스피릿을 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롹 스피릿이라면 이소라의 넘버원도. 사실 이소라가 나가수에서 부른 최고의 넘버는 사랑이야라고 생각하지만 넘버원도 빼 놓을 수 없다. 올 해 최고의 돌풍의 곡임을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가 증명해 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도 이 에피소드에서 불렸다. 여러모로 대단했던 에피소드.

6. 정차식 - 황망한 사내


레이니썬은 그렇게 주목하거나 좋아하는 밴드가 아니었다. 사실 잘 몰라서 더 관심이 없었던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당연히 정차식도 앨범 발매 후 한참이나 지나서야 듣게 됐다.

난 우울함과 쓸쓸함의 정서를 좋아하는데 그 한탄이나 슬픔, 체념의 정서에서 억지 희망의 강요보다 더 많은 위로를 얻기 때문이다. 윽박지르면서 행복하고 재미있게를 가장하는 노래들은 사실 거짓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쉽사리 희망과 즐거움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차식의 황망한 사내는 그렇게 황망한 슬픔을 노래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즈막한 바람은 없었다. 단지 내가 쓰라리고 아프고 격했던 시간 뿐인걸.] - 용서 中

이 퍼석퍼석한 슬픈 노래들에 위로받는 건 결코 내가 변태여서가 아니다.

7. 꽃다지 - 노래의 꿈


고등학교때 어릴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대학생 형이 '바위처럼'을 들려줬다. 대학에 가면 다들 이런 노래를 듣는다고 했다. 그건 반은 사실이었으나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바위처럼만은 정말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노래였으나 꽃다지로 대변되는 민중가요는 그렇게 흔한 노래가 아니었다. 이미.

어느 시절엔 소위 '빡쎄다'고 표현되는 민중가요들을 즐겨들었다. 학생회실에서 엄청 큰 소리로. 그걸 부담스러워 하는 '학우들'의 찌푸린 얼굴을 오히려 즐기면서 오만했던거다. 그때 울리던 노래들의 많은 목소리가 꽃다지였다. 꽃다지는 어떤 운동권의 상징같은 존재였던거다.

더이상 대학생과 운동권이 등치하지 않고, 민주화는 이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서 꽃다지는 무대를, 노래와 관객을 잃었다. 더이상 단결과 투쟁을 외치는 결기어린 선언의 노래가 필요치 않게됐다. 그러나 꽃다지는 희망의 노래답게 계속 노래를 불렀다.

이제 꽃다지의 노래는 결기와 분노에 찬 선언이 아니다. 그건 지나온 삶에 대한 고백과 기억이고, 희망에 대한 다짐이고 연대에 대한 위로다. 노래의 꿈이다. 그저 제창하기 쉬운 노래를 벗어나 음악적 성과를 내고, 그 성과로 다시 희망이 움트는 노래다. 그 희망에 동조하는 이들의 연대와 사랑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분명 올 해 최고의 음반 중 하나다.

8. 조덕환 - Long Way Home


일단 나는 거장이라거나 노인, 세월 같은 키워드에 굉장히 약해지는 어른공경컴플렉스 환자라는 것을 밝혀두자.

하지만 그럼에도 이 앨범이 엄청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가 그 전설의 밴드 들국화의 한 축이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위에 나는가수다에 대한 얘기도 있지만 지난 노래들을 다시 부르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자신의 노래들이라면 그 부담은 더하다.(만약 자신의 노래라 더욱 쉽다면 그건 가짜예술이다. 자기복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건 지난 시간을 긍정하는 동시에 현재를 살아 한 걸음 나아가야하는 때문이다. 안주하지않는 삶의 증명.


난 들국화의 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들국화의 위대함은 알고있다. 그래서 난 이 앨범의 노래가 역시 위대하고 30년쯤 후에 어느 찌질한 블로거가 역시 들국화와 조덕환의 위대함을 곱씹고 있을 것을 확신한다.


9. Iron & Wine - Kiss Each Other Clean


Flightless Bird American Mouth로 대변되는 그간의 아이언 앤 와인과는 또 다르다. 기타 한대에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던 미국의 조동익같은 사람이었는데 현란한 비트와 사운드가 귀를 잡아끈다. 그런데 이게 좋다. 그건 아마 사운드가 덧씌워져도 티가 나게 마련인 좋은 멜로디와 예쁜 목소리때문. 그동안과는 조금 다른 음악을 상상하는 듯한 샘교수님의 다음이 더 기다려진다.


10. GD & Top - GD & Top


난 힙합이나 랩은 잘 듣지 않아서 좋고 나쁘고의 기준은 아무래도 굉장히 직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절묘하고 기발한 라임과 흥겹고 맘이 동하는 플로우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그건 결국 간지가 전부라는 뜻이다.ㅋ (물론 전문가들이 그랬듯이 버벌진트나 가리온이 짱이겠지만 난 GD가 박명수랑 만든 랩이 더 좋은걸 어째.ㅋ)

난 이렇게 신나게 양아치처럼 노는 친구들을 본적이 없다.(양아치라는 표현이 거슬릴수도 있으나 이건 굉장히 좋은 의미임. 얽메이지 않고, 말 안듣고 노는 귀엽고 예쁜 동네 말썽쟁이쯤?ㅋ) 특히 GD는 타고난 양아치. Top도 멋지지만 그건 왠지 만들어지고 훈련된 느낌이랄까..ㅋ 그래서 GD는 어저면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아이돌.

11. 조동희 - 조동희 1


엔리케 이글레시아스는 인터뷰중에 아버지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얘기를 꺼내면 두말없이 자리를 떠나버린다고 한다. 후광이란 간절하고 감사할때도 있지만 지워내고 싶을만큼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거다. 조동희는 그런 엄청난 후광을 갖고 있다. 그녀의 오빠, 조동익과 조동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기는 커녕 가장 앞장에 넣을 것인지 표지에 넣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뮤지션이다. 요 며칠전에도 술자리에서 조동희 얘기를 꺼내다 그녀를 조동익의 동생으로 소개해야했다.


그녀는 그 후광을 거부하지도 거기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그저 오빠들의 조언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자기의 노래를 완성했다. 그렇게 나온 첫번째 앨범. 지나간 시간들의 힘일까 아니면 정말 그건 핏줄의 힘일까 조동희의 노래엔 억지도 부담도 없다. 그 독백같은 목소리로 그저 담담하게 지나온 날을, 앞으로의 삶을, 소중한 것들을 노래한다. 슬프라고 강요하지도 기쁘라고 윽박지르지도 않는 자기 노래. 이 조씨남매들의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12. Paul Simon - So Beautiful Or So What



말했다시피 거장이나 어른에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이 있다. 그 대상이 폴 사이먼쯤 되면 사실 음반을 듣기전부터 좋을거야란 자기최면을 걸기도..ㅋ 사이먼 앤 가펑클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팀 중 하나기도 하다.그걸 영어로 하면 SG Wannabe(정말이다. 이 팀은 사이먼 앤 가펑클 워너비란 뜻이다).

여튼 그런 어른공경컴플렉스를 감안해도 이 앨범은 충분히 좋다. 풍부한 소리가 나는 포크랄까. 그리고 무엇보다 사이먼 아저씨의 멜로디. 이건 뭐 신사동호랭이 저리가라. 젊은 감각이란 뜻임.ㅋ 이 아저씨도 안주하지 않는 남자. 거장들은 역시 해내주신다. 어른공경컴플렉스를 고칠 생각이 전혀 안드는 이유다.




영화

1. Black Swan - Darren Aronofsky


순수한 욕망이나, 솔직한 광기 같은 것들을 꿈꾸지만 늘 갇혀있다.
그건 이성이나 관습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건 언제나 날 가장 안전한 상태로 있을 수 있게 해주지만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내가 만든 벽에 내가 갇히는 모양. 완벽한 백조여서 결코 흑조가 될 수 없었던 니나는 사실 날, 아니 사실 규칙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우릴 닮아서 더 슬펐다. 그래서 마침내 흑조가 날아 올랐을 때, 니나가 죽었지만 행복했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탈리 포트만과 위노나 라이더. 각자 마치 자신을 연기한 것 같은. 가장 완벽한 백조지만 결코 흑조를 연기할 수 없는 나탈리 포트만은 이 영화를 마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말로 한물 가버린 여배우 위노나 라이더는 무슨 생각으로 베스를 수락했을까.ㅋ

2. 만추 - 김태용


관계가 가져오는 삶의 변화를 믿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그건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걸 찾아서 헤매는 일과 비슷한거다. 시간이 멈췄던 애나는 훈의 시계를 받아 시간을 다시 돌린다. 화면은 훈과 애나 둘을 잡지만 주인공은 그 사이 어느께에 있는 둘의 관계다. 마지막 장면, 오지 않는 훈을 기다리면서 마침내 웃는 애나의 변화.


색,계에서부터 주목이야 했지만 탕웨이가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인줄은 미처 몰랐다.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는 시크릿가든이 막 끝나서 온 나라에 현빈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는데, 정말 현빈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만큼 탕웨이는 아름다웠다.


3. 세상의 모든 계절(Another Year) - Mike Leigh


이상적인 가족공동체에 들고싶은 외로움이야.
하지만 정말 그런 공동체따위 정말 있을까. 그건 사실 내 외로움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어쩌면 그렇게 멋대로 이상을 만들고 거기 들지 못하는 자신을 괴롭히고 외로워하는 자학일기 같은 것.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으랴. 아마 메리는 죽을때까지 화목한 톰과 제리의 가족을 ㅂ러워하면서 자기를 괴롭힐테다. 그건 아마 나도 마찬가지. 외로워서 어디서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신세를.

마지막 장면이 좋다. 담담하게 그 외로움을 포착하던 그 장면. 올해의 라스트 씬.

4. 혜화, 동 - 민용근


버려진 건 유기견이기도 하고, 손톱이기도 하고, 아이이기도 하고, 자기자신이기도 하다.
버려진 것들을 다시 주워모아 혜화는 마침내 자기 자신도 주워담을 수 있다. 버려진 순간 멈췄던 혜화가 마침내 움직이는(動)이야기. 그 동력은 과거에 버린 것들이지만 혜화는 주워담을 뿐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매력적인 신녀성. 영화 중간에 흐르는 앵콜요청금지가 이 영화의 테마송일까.

유다인은 올 해 발견한 주목할만한 뉴스타. 뭉테기로 볼아주는 방송국의 쓸모없는 뉴스타 상보다 내가 주는 뉴스타상이 훨씬 값진거임. 내가 찍은 배우는 반드시 곧 스타가 된다니까. 백진희도 송중기도 김수현도 그랬어.

5. 굿바이 보이 - 노홍진


비우티풀은 아버지를 긍정하면서 성장했지만, 굿바이 보이는 아버지를 부정함으로 유년기를 마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밍키를 잡아먹은 날, 내 유년기는 끝났다"고 뇌까리던 진우는 아버지의 무덤앞에서 웃음을 흘리고 담배를 피운다.
영화는 8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신파도 아니고, 가정을 파괴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정당화하는 영화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미제나 자본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운동권영화도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공존했다. 폭력적이고 무능했지만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정함으로 존재를 증명하려했던 누이. 그리고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늘 가해자를 꿈꾸는 소년.

부계, 폭력, 가부장, 경제력, 무능 같은 키워드들로 얼룩진 80년대, 하지만 사실 지금도.

류현경은 10년전 단팥빵에 나올때도 선생님 친구 역할이었는데, 여고생역이 어울리는 까닭은 무엇이냐.

6. 오월 愛 - 김태일


광주는 너무 아픈기억으로 남거나 영웅들의 신화적 싸움으로 남았다. 물론 그건 맞다. 도시 하나가 폭도가 되어 국가에 의해 학살당했고, 그에 맞서 저항했고, 스스로 해방의 도시 대동의 세상을 만들어 살았다. 그걸 가능케한 영웅들도 있었고 이름도 없이 사라진 결코 잊지 못할 아픈 기억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주던 아줌마들도 있고, 끝까지 도청을 지킬 수 없었던 어린 학생도 있다. 광주를 기억하는 방식도 기억하는 부분도 저마다 다르다. 광주는 결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과거이기도 하고, 절대 잊지 않을 한이기도 하고, 꿈에서나 봤던 아름다운 세상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이 80년 5월의 광주다.

"벌써 이 모양인데 이제 우리가 죽고나면 누가 광주를 기억하겠냐"던 얘기가 제일 가슴에 남았다. 광주가 잊혀질 수도 있겠구나. 그저 역사책 한 페이지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로 잊혀져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7. 고백(Koku Haku) - Tetsuya Nakashima


복수극은 이래야한다. 복수란 스스로 파멸하게 하는 것이다.
냉철하고 치밀하고 야비하게. 어설픈 도덕교과서식 권선징악이 아니라 스스로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압사하도록 만드는 야비한 복수극. 냉철한 얼굴 뒤에 숨은 뜨거운 복수의 화신.

스토리 전개가 좋지만 것보다 처음 30분가량 복수의 출사표를 던지는 유코선생님의 그 냉정하고 예의바른 선언이 더 오싹하다. 유코가 복수에서 한 액션이란 사실 그게 전부다. 죄 지은 자들에게 쥐어준 제 살을 달아 파멸케하는 저울.

8. 파수꾼 - 윤성현


청소년기 남자애들의 우정이란 생각보다 얄팍하다. 하지만 그 남자애들의 폭력이란 생각보다 훨씬 잔인하고 허술하다. 그건 개연성도 의미도 없는 그저 존재확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보다 쎄.

파수꾼은 그 지점을 명확히 잡아낸다. 그 폭력이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하지만 그 폭력에서 어떻게 기어나오는지. 그건 우정이니 용서니 하는 알량한 언어가 아니다. 그건 삶에 대한 의지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폭력을 극복한다. 폭력을 극복해내지 못한 의지는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 것처럼.

이제훈을 주목하고 있다. 고지전을 지나면서 벌써 여럿에게 주목받고 있는듯 하지만. 역시 난 신인배우를 집어내는 탁월한 역량이.ㅋ 서준영도 광평대군에 이어 KBS일일 드라마 주연을 따내며 출세의 고속 열차에..ㅋ

9. 비우티풀(Biutiful) - 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


고단한 경계의 삶. 구원과 안식은, 최후에 다가설 그 곳은 가족.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어요.

사실 비우티풀을 넣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하비에르 바르뎀 아저씨의 자태가 잊혀지지 않아서..ㅋ

10. 무산일기 - 박정범 


탈북자들은 125로 시작되는 주민번호를 받는다. 그건 2등시민의 주홍글씨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들은 그저 견뎌야한다. 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변해야하고 또 모두 변한다.

승철이 아끼던 강아지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외면하고 돌아설 때 그는 비로소 남한사람이 됐다. 그는 이제 함부로 착한척하지 않을 것이고, 쉽사리 호감을 표현하지 않을 것이고, 요령을 갖고 사람을 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는 2등시민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주홍글씨도 찍어주지 않아 불쌍히 보이는 일마저 차단당한 그게 바로 무산계급이다.

11. 북촌방향 - 홍상수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나면 할 말이 참 많지만 뭐라 한마디 감상문을 적기도 어렵다.
그저 영화속에 나온 술집들을 한번 기웃거리는 일밖엔.

매 영화마다 훅 꽃히는 장면들이 하나씩 있는데,(거의 모든 장면들이 재밌고 좋지만) 이 영화엔 김상중의 찌질한 동조장면. "나도 그 생각해본적 있는데"

나도 그래본적 있는데 말이야, 지기 싫어서 뱉은 말이지만, 대부분 정말 그 생각을 해본적 있었단 말이야.
이런 말 하면 더 찌질해 보일텐데.ㅋ

까메오 대박. 고현정은 그렇다 치고 백현진이라니..ㅎ

12. Source Code - Duncan Jones


평행우주 이론을 이용하는 SF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미드도 로스트. 한창 시즌까지 평행우주에 의한 멘붕들이 일어나는거라고 확신했었.ㅋ

이렇게 스토리가 탄탄해서 러닝타임 내내 집중시켜주는 오락영화를 좋아한다. 국내영화에서 찾자면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같은 최동훈류의 영화들. 치밀한 스토리 구성은 그 자체로 영화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되도않는 이론으로 무장하여 볼거리로 어떻게 쳐발라 버리는 예의 그 헐리웃 영화들은 더욱 혐오스럽달까.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디워같은.ㅋ

소스코드는 복잡한 주제의식 같은 건 없지만 그 탄탄한 스토리로 두시간동안 숨도 쉬지 않게한다. 올 해 나온 영화들 중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던 영화.

13. 환상극장 - 김태곤, 이규만, 한지혜


옴니버스 환상극장 자체보다는 세개의 단편들 중 하나인 한지혜 감독의 소고기를 좋아하세요?를 꼽은거다.
누구나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예전엔 고교야구에서부터 선수를 찍어서 지켜봐오다 마침내 프로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곤 기뻐하며 내 선견지명을 자랑하곤 했다. (임찬규 이형종 한기주같은 애들은 고교때부터 지켜보고 있었..ㅋ) 한지혜 감독의 전작 기차를 세워주세요를 보고선 이 감독이 만드는 또 다른 영화들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환상극장에서 이름을 발견.

사실 기차를 세워 주세요에서 받은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충분히 흥미롭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 기대감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까닭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며 하고싶어 하는 이야기들이 흥미롭기 때문일까. 어쩌면 기차를 세워주세요가 엄청 좋아서 아직도 이러는 걸수도 있다.ㅋ 그러고보니 저번에 케이블 티비에서도 틀어주던데..ㅎㅎ



아 이걸로 밥벌어먹는 것도 아닌데, 너무 에너지 쏟았다.
도대체 몇시간을 쓴거야...ㅡㅡ;;

쓰면서 더 생각난 음반이나 영화들이 있지만 여기까지만 해야지.
열심히 한다고 누가 밥사주는 것도 아닌데.


Iron & Wine - Tree By The River

단상


1.
새 해다. 멋있는 척하려고 날짜를 만들어 따지는일 따위 모두 인간들의 언어이지, 시간은 그저 도도히 흐를뿐 특별하지 않은 날도, 특별한 날도 없다는 말을 뱉은 적도 많지만. 새 해가 설레는건 마찬가지고 당연하다. 하루하루가 새롭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니 이렇게 특별한 날의 힘을 빌어서라도 새로워져야지.
한 살 더 병신이 됐다는 자학도 하지만, 사실 병신이고 싶지는 않다. 올 해엔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2.
더 예쁘고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 그 말이 모두 진심인 사람, 아는 것이 많지만 알고싶은 것이 더 많은 사람, 세상에 겸손하지만 또 세상에 주눅들지 않는 사람, 허세도 자학도 하지 않는 사람, 자기를 팔 만큼 가난하지도, 남을 살 만큼 부유하지도 않은 사람,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읽는 사람, 낙관하지 않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 폭력을 거부하는 사람, 남을 향한것도 나를 향한 것도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 관찰력이 좋아 머리모양의 변화를 금세 알아맞히는 사람, 길을 걷다 발 밑의 꽃을 밟지 않는 사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눈이 쉬운 글을 마음에 어렵게 써내리는 사람, 늘 냉장고에 음식을 남겨놓는 사람,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

3.


새해맞이 연회 With 모친.
삼겹살과 소주 만찬에 이은 골뱅이무침과 맥주.
삽겹살 먹고 남은 쌈 채소를 몽창 때려넣어 부족한 섬유질을 충당하고, 떨어진지 몰라서 미처 준비 못한 소면은 라면사리로 대체. 충분히 맛있었다. 역시 요리는 도전, 쏘울, 인간미, 융통성.

4.
"마무리에 재미있으면 올 해도 재밌었던거야"
"새 해맞이가 재미있으면 내년도 재밌겠네?"
"당연하지, 술잔 비었어"
 
엄마는 늘 지혜롭다.

5.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모두 행복한 2012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 사실 2012년에 지구가 정말로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더이상 삶의 이유를 찾는 일, 사실 귀찮았거든요. 다만 나 혼자 죽으면 주변에 대한 민폐일지도 모른다는 시덥지않는 그런 생각을 했으니, 차라리 지구가 멸망한다면... 같은 그런 마음이었어요.

술이 조금 올라서 그런건지 다만 더 살면서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겠단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모두들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행복하고 싶습니다.ㅎ

6.


올 해의 첫 곡은 내가 찾는 아이.

단상


1. 나는 원래 자타가 공인하는 효리빠인데(나 무려 핑클 전집을 테잎으로 소장하고 있는 남자임) 요즘 효리누나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다. 정치적 발언이나 소신행보 때문인거 맞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녀의 발언이 대단히 좌파간지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녀의 행보가 문소리나 김여진처럼 이 현장과 저 현장을 오가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뭣이 그녀에게 더 하악거리게 만드는 것이냐 묻는다면 그녀의 '태도'다. 일전에 동물보호활동을 하는 그녀가 가죽의상을 입고나와서 뭇매(이런 식상한 표현이 좋겠다. 그건 식상한 반응이었으니까)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변명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고. 배우고있고 더 많이 배우고싶다고. 이제야 관심이 생겼으니 조언해주고 격려해주면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이 솔직하고 단순한 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이런경우에 사람들은 일단 변명하거나 화내기 일쑤다. 정말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싶어하는 마음이, 그리고 그걸 솔직하게 드러내는 당당함이 이 누나에게 더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누나가 서른을 넘길즈음부터 보여오던 모습들이 워낙에 신뢰를 갖게하는 모습들이었지만 요즘 완전 하악모드랄까. 예전엔 '효리꿈'이라고하면 '효리랑 연애하는 꿈'이었는데, 얼마전에 꾼 '효리꿈'은 무려 이 누나한테 상담받는 꿈이었...ㅡㅡ;;;

2. 모든 엘지팬들의 습성은 일단 7월쯤되면 의기소침해지다가 9월쯤엔 야구를 끊고 11월부턴 댓글도 안다는 은둔형열독자로 스토브리그 소식을 접하다 거물 FA나 용병을 건지면 엘레발을 쳐주다 시범경기와 시즌초반까지 돌풍의 핵으로 사는 것의 반복이다. 한 10년간 그래왔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20년차 엘지팬인데내 팬생활의 절반을 그렇게 보내다니.. 다만 올 해는 뭔가 다르다. 일단 FA를 안데려오고 전력 보강이 없다. 누수 또 누수만 있을뿐. 하지만 예년과 다르다는 이유로 뭔가 될 것 같단 마음이 들다니 이젠 나를 포함한 엘지빠들은 단체로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 같다. 엉엉엉

3. 요즘 탕수육들은 찹쌀이니 소고기니 사천이니 하는 말들을 앞에 붙이고 뭔가 특색을 시도하는데, 가끔 동네 중국집, 그러니까 일품향이나 북경반점따위의 이름을 달고있는 중국집의 고기와 튀김옷이 정확히 5:5비율을 이루는 탕수육이 땡길때가 있다. 그런 탕수육은 이사하는 날 바닥에 신문지 깔고 목장갑끼고 짜장면이랑 같이 먹어주는게 간진데. 아님 학생회실 바닥에서 이과두주 안주로 아껴 호호 불어먹거나. 어쨌든 이시간에 배고파서 갑자기 탕수육 생각이 났다고.

4.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다 '완경'이란말을 했더니 전혀 알아먹지를 못하더라. '폐경'이라고 말해줘야 알아먹는. 일상의 언어들이 갖는 폭력성을 경계해야 한다. 폐경은 여성의 월경이 끝나는 일을 상실의 의미로 표현하는 언어다. 완경은 월경이 끝나고 여성으로서의 삶의 전반기를 완성하고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 뿐 아니라 일상의 언어에서 인식하지도 못하는 폭력성(젠더의 문제인 경우가 가장 많지만 그 외에도 무수하다)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고쳐가야한다. 사실 그것이 진보의 알파고 오메가다.

5. 술이 세지는 느낌이다.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임독양맥과 생사현관을 타통해 반로환동 환골탈태하는 느낌이랄까. 이제 다 덤벼라. 내가 제일 잘먹어.

6.


돌아다니다 발견한 짤방.
에휴 말을 말자.

요즘 가끔 이런 심정일때가 많아. 라고하면 엄청 건방져 보이겠지?

스케치북 크리스마스 특집, 60년쯤이야 가뿐히






크리스마스 특집 스케치북이 여러모로 화제였고 또 재밌었지만, 가장 인상깊었던건 아무래도 이 곡이다.
성시경의 아바타보다도, 가래요정의 망사댄스보다도.

열 아홉의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아코디언을 연주해온 노 연주자와의 콜라보레이션은 보는 것만으로 넋을 놓게한다. 내가 아이유의 자태에 넋을 놓았다는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세월의 간극을 보여주면서도 넘어서는 그 무대에 넋을 놨다는거다.




그리고 이 무대. 완성이란 이런 느낌 아닐까.

비우티풀 - 아버지, 당신을 사랑 할 수 있을까요





# 고단함

욱스발은 경계에 서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이민자와 원주민의 경계, 연민과 착취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그 경계의 삶은 고단하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마지막 처연한 눈을 보지 못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을텐데. 그저 착취하고 제 배를 불릴만큼 뻔뻔할 수 있다면, 그들의 괴로움에 무관심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할 수 있을텐데. 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이 그를 더욱 고단하게 만든다. 그는 그 고단함을 묵묵히 견뎌내기만 한다. 정신줄을 놓아버리지도 않고,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방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괴로움을 쌓아갈 뿐이다. 방출하지 않고 쌓았던 고단함은 한번에 추심을 시작한다. 병이다. 그는 끝까지 고단하다.

그만 유독 고단하고 고독한 것도 아니다. 이냐투리는 세계는 모두 고단하다는 말을 하고싶어 한다.누구는 행복하고 어느 곳은 불행하단 투덜거림이 아니다. 바벨에서부터. 세네갈 이민자들은 백만마리가 넘는 닭을 잡아도 바르셀로나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은 마약을 팔거나 쫓겨난다. 중국 이민자들은 갖은 착취를 당하면서도 중국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받는다. 그들은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일한다. 욱스발은 그들을 연민하지만 그들을 착취하고 세계는 다시 욱스발을 착취한다. 세계는 모두 고단하다. 영화 내내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도시를 오시하지만 구원따위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집에 '신'의 그림이 붙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신을 가장 간절히 그리는 곳은 바로 지옥이다.



# 가족

바벨에서부터 이냐투리는 자꾸 가족에서 위로를 찾는다. 욱스발은 죽음을 준비하면서 가족을 돌이킨다. 붕괴된 가족은 욱스발의 상처를 마침내 보듬는다. 욱스발은 안나의 곁에서 죽었고, 죽어서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 눈(雪)을 보고, 담배를 피우고, 웃음을 짓고, 질문을 한다. 어머니의 정 같은걸 겪어보지 못했을 남매는 이헤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이헤가 정말로 반창고를 떼어내고 약을발라주는 장면을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기도했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이냐투리는 이제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를 떡갈나무 같은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이해하고 위로하는 존재일까. 또 부성이라는 건 정말 그렇게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마음이 따듯해지고 눈물이 나는 일과는 별개로 부성에 대한 강요같았던 텍스트들은, 오직 아버지를 이해하기만 하려는 몸짓처럼 보이던 것들은 좀 불편했다. 그건 가족만이 최후의 보루라는 얘기를 하고싶었던 것 같지만, 그래서 가족에서 위로받는 삶의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난 글쎄. 가족도 고단하고 고독한 세계이긴 마찬가지. 난 차라리 이헤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 버리길, 욱스발이 남매로부터도 고립되길, 마람브라가 차라리 자살해 버리길 바랐다. 어쩌면 그런 완벽하고 갈데없는 절망만이 삶의 진실일지도 모르니까.

가족에서 구한 위로. 같은건 어쩌면 환상. 위로도 연민도 구원도 스스로 해야 할 일.



# 하비에르 바르뎀

길었던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하몽하몽의 잘생긴 육체파 배우였던 이 아저씨는 씨 인사이드의 삶을 사랑하는 안락사 희망자와 단발머리 킬러 안톤 쉬거를 지나 이젠 2시간반 동안 혼자서 관객을 압도하는 본좌가 됐다.

다른 이였다면 가족에 대한 집착이나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계의 삶같은 걸 납득하지 못했겠지만 이 아저씨는그걸 해낸다. 결국엔 죽기직전 화장실에서 자신의 영혼을 목격한 순간, 이 아저씨가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스쳐갔을지 모를 영화를 (21그램이나 바벨이 좋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진 않았던걸 보면 난 이냐투리를 크게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 내도록 새겨놓을 영화로 만든 힘은 역시 오롯이 바르뎀 아저씨의 공이다.


코스모스 사운드 - 스무살

올 한 해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몇 년간 계속된 내 연말 결산이다.
나중이 되면 세금공제나 송년회 같은 번잡한 일들이 많아지겠지만(정말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큰일.ㅋ)
지금은(아직은) 이렇게 좋은 영화와 음악, 책같은 것들로 지난 시기를 돌아보는 게 더 좋다.

좀 더 정리해보고 제대로 결산하겠지만 우선
아무래도 올 해의 음반은 내겐 코스모스 사운드다.

찌질하고 안타까운 노래, 그게 듣기 싫거나 추해보이지 않는 노래라면 그게 아마 스무살의 노래.
스무살에 관한 다큐를 고민중이란 말에 '아무래도 너에겐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키워드'란 말을 들었었다.
스물보다 서른이 훨씬 가까운 나이가 됐는데도 여전히 이런 노래에 이런 정서에 반응하는건 아직 명확히 짚고나서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여튼, 이 덤덤하게 아픈. 쥐어짜지도 허세부리지도 않는 아픔이 올 해 가장 좋았다.





코스모스 사운드 - 스무살

단상 - 어쩌다보니 정치Ver


1.
서울대학교에 김정일분향소를 설치한 학생이 고발당했다. 난 김정일의 죽음을 과도하게 애도하거나 분향소가 차려진다해도 조문할 생각따윈 없지만,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이들의 정치적 자유까지 막을 생각은 없다. 다만 마찬가지로 그들을 비판할 나의 정치적 자유 역시 요구하겠지만. 볼테르의 유명한 경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여간해선 잘 지켜지지 않는 가치다. 언론법 수업시간에 교수님은 늘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엔 표현의 자유가 명시돼있음을 강조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2.
'닥치고'라는 말에 염증이난다. 무슨 말만하면 이젠 유행처럼 '닥치고'를 연발한다. 그건 닥치고 정치하라는 이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저들의 논리다. 닥치고 일하라던게 새마을 운동이었고, 닥치고 돈벌라는게 신자유주의, 엠비노믹스의 실체다. 언어를 상실하는 것은 저항을 상실하는 것이고, 주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가 되지 말라는 말. 그게 바로 '닥치고 정치'의 본질이다. 정치의 본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닥치지 않는 일'이다.

3.
정명훈 얘기로 타임라인이 시끄러워진게 한참 전인데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이게 다 진중권때문ㅋ) 정명훈이 얼마를 받건 마에스트로에 대한 거장 예술인에 대한 예우와 그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감수성의 중요성에 대해선 일말의 의심도 없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물 없인 살아남을 수 없지만, 노래없인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또한 고급예술이니 대중예술이니 하는 것들로 예술을 나누는 일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접근성과 공공성의 문제,그건 좁혀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고 그에 남한사회가 극도로 미진할 뿐이다.

다만, 몇 억씩이나 받는 시향의 상임지휘자와 백만원을 겨우 넘긴 급여를 받는 연주자가 같은 오케스트라에 있을 때 양질의 예술이 만들어지리라곤, 또 예술이 공공성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가지고 정명훈 개인을 까댈거냐, 그럼 정명훈이 자기 연봉에서 연주자들 월급 인상해주랴.라고 물으면 할 말 없지만, 사실 세계적 지휘자인 그에게 가난한 예술인들이 연대의 손길을 요구하는 것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또 얼마나 있을까. 그에게 연대의 손과 더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하는게 그렇게 몰염치하고 비상식적인 일일까. 심지어 그도 바스띠유에서 해고됐을 때 그렇게 예술적 동지들의 연대를 통해 구원받았었는데.

예술이 공공성을 갖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예술이 공공재임을 모두가 인식하는 일이 가장 먼저겠지만, 동시에 창작자들의 삶의 문제도 해결하는 노력이 동반돼야한다. 이걸 가지고 닭이냐 달걀이냐를 놓고 싸우듯이 아웅다웅하기만하면, 나라면 일단 외면하게 될 듯.

4.
강정에서 27명의 활동가가 연행됐다. 문정현, 문규현 신부님도 포함해서. 대추리가 생각나는건 어쩔 수 없다. 구럼비 바위는 조금씩 조금씩 깨져나가고 있다고한다. 연대가 필요한 곳은 강정이다. 검찰청 앞에서 어느 쇼맨이 구속되는 현장이 아니라. 비행기 삯이 비싸다면, 강정 상단에서 멸치라도 한박스 주문하는 연대.

5.



종편이나 케이블이나
정치성같은건 사실 없다.
중요한건 팔 수 있느냐 없느냐.
체게바라가 길바닥 티셔츠의 인기프린트가 될줄 생전엔 알았을까.
자본이 무서운건 그점이다. 자신을 향한 저항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힘.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유머와 위트가 계속됐으면.

크리스마스엔 따듯한 멸치국수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 (누가복음 6장 23절,24절)

이틀간 술독과 강추위의 고통을 오가느라 크리스마스가 뭔지는 스케치북에 성시경이 아바타 분장한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으니, 신자는 아니어도 나도 성경말씀이나 하나.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살피러 와주신 예수께서는 이런 멋진 말씀도 남기셨다. 더 뺏기 위해서, 더 갖기 위해서 자기 아닌 다른 것들의 생명도, 가치도, 삶도 앗아가는 이들에겐 위로도 기쁨도 없다.

주민들의 생활을 빼앗고, 붉은발 말똥게와 돌고래의 삶을 빼앗고, 평화를 빼앗고, 연대와 희망을 부수는 이들에게 피고름 뚝뚝 떨어지는 솔로 크리스마스의 외로움을. 생명과 평화와 연대의 가치를 아는 이들에겐 따뜻한 멸치 다시마 국물로 우려낸 국수 한그릇과 감귤 디저트를. 주문은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람미다.

제주 해군기지건설 저지투쟁을 지원하는 강정평화상단!

savejeju@daum.net 전화 010 6286 2131

맛젓갈(200g)25,000원
다시마(200g)10,000원
멸치(200g)10,000원
고등어(1Kg)23,000원
감귤 (10Kg)25,000원

++
일단 귤 한 박스와 멸치를 좀 사야겠다.
하지만 일단 엄마와 상의해야 하는데...ㅋ


Sigur ros - Illgresi

도대체 그 길은 무슨 맛이에요? - 아이다호 , My own private Idaho





길이란 떠남을 전제로 머무는 곳이다. 누구도 길을 향해 가지 않는다. 길을 통해 걸을 뿐이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다. 떠남을 전제로 머무는 곳. 그래서 누구는 삶은 여행이라고 노래했나 보다. 삶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걷는 길에 더 닿아있을 것 같다.

마이크의 길, His road.

“이 길은 어디로든 갈 수 있지. 난 도로의 감식가야, 평생 이 길을 맛보며 살아갈 거야.”

삶의 정체가 여행이고, 방황이고, 어딘지 모를 어딘가를 향해 가기만 하는 것이라면 길 위를 삶의 지대로 삼은 마이크의 ‘길의 삶’이야말로 본질에 가장 가까운 삶일지도 모르겠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는 길을 맛보며 살아가는 길의 감식가는 사실 삶이라는 여행, 세상이라는 길 위에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이고 동시에 바람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에, 예상치 못한 시간에 쓰러져 역시나 예상치 못하게 깨어나고 또 일어서는 기면증. 어느 상처가, 어느 사건이, 또 어느 누군가에게 상처를 좌절을 절망을 얻어맞고 넘어지고 잠들었다가 어느새 다시 깨어나고 일어서는 삶이라는 길 위의 기면증 환자들. 그러나 길 위에 잠든 마이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고 깨어날 때까지 지켜봐 주고 안아주는 스콧. 우리의 길,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도 깃들어 있을 그 스콧들.





스콧의 길, His ways.


“난 돈을 받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어. 널 사랑해, 돈은 내지 않아도 좋아”

그래서 마이크도 우리도 스콧을 사랑 할 수밖에 없다. 길 위에 지쳐 잠들어도 날 지켜주는 그 스콧을, 돈을 받지 않아도 사랑한다. 스콧은 잠든 내 머리맡을 영원히 지켜줄 거라고, 이 길 위를 계속해서 함께 걸어가 줄 거라고.

그러나 사실 스콧은 없다. 스콧의 길은 삶의 지대보단 차라리 한 번의 외유. 스콧에게 길이란 머물 곳으로 가는 도중. 마이크의 길이 어딘지 모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끝이 없는 길이라면 스콧의 길은 목적지로 가는 여러 형태의 과정들. 언젠간 길의 끝, 집 안쪽 울타리 안에서 담장 밖 길 위의 삶들을 바라보겠지. 다른 이들처럼. 자신과는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렇게 길 위에 마이크를 남겨두고 떠나가겠지.

청춘을 돌려다오

그러나 사실 마이크는 없다. 평생 길을 맛보고 살아가는 방황과 청춘은 없다. 모두 어딘가를 향해 바삐 걸어갈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 마이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차라리 스콧에 가깝다. 우리는 마이크를 버려두고 언젠가는 담장 안쪽의 세계를 향해 갈 테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지금 잠든 마이크의 머리맡에서 담장 안쪽의 세계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써 ‘우리’라고 말했지만 사실 스콧을 닮은 건 나다. 꿈이니 청춘이니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이니 그저 잠깐, 마이크의 곁에서 마이크를 품 안에 안고 있는 동안에나 지껄인 허황한 ‘말’이다. 나는 길 그 자체보다 길의 끝을 상상하고 있다. 그래서 난 날 닮은 스콧이 싫었다. 다시 마주친 길에서 차창 너머로 마이크와 눈이 마주쳤을 때, 담담하게 바라보던 마이크의 눈과 달리, 미안함인지 미련인지 자괴인지 모를 끈적거리는 눈빛을 보이던 스콧이 싫었다.

청춘을 돌려주세요. 아니, 사실 내게 청춘이 있기는 했던 걸까. 내게도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는 길 위의 삶이 있기나 했었을까. 그렇다면 언젠가는 나도 어딘지도 모를, 아니 어쩌면 있지도 않은 길의 끝이 아니라 내 발밑의 길에서 살아가고 잠들고 깨어나는 솔직하고 본격적인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 막연히 마이크를 동경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어느 만화책에서 보니 동경은 이해와 가장 먼 감정이라던데.





리버는 마이크가 돼버린 걸까?

방황과 좌절의 무채색 청춘의 아이콘, 리버는 정말 마이크가 돼버린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소실점을 보게 되면 여전히 또 영원히 길을 걷고 거기서 잠드는 리버를, 마이크를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