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


간만의 흥미로운 드라마다. 애초부터 고백하자면 신세경과 송중기의 자태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으나, 지금에서 이 드라마에 대한 흥미의 토대는 그것이 아니다.(송중기는 이제 출연하지도 않을 뿐더러, 신세경은 주연이라는 이름과는 사뭇 동떨어진 분량을 보이지 않는가)

드라마의 축을 이루는건 두 부자지간이다.
이도와 이방원, 똘복과 이름도 명확치 않았던 그의 아버지.
주인공인 이도와 똘복의 행동의 근원은 결국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다. 서로 다른 형태로. 그러니까 이도의 경우는 아버지를 부정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군주상, 통치론을 관철함으로 아버지를 극복하려한다. 똘복의 경우는 그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인듯 보이지만 그것 역시 결국 아버지로 대변되는 신분질서, 혹은 장애를 가진 아버지를 지켜내지 못한 책임감과 죄의식(그의 삶이 오직 아버지로 귀결되는 개연성, 아버지에 대한 책임을 마치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인양 과잉하는 개연성은 극 초반부에 장황하다 싶을정도로 나타난다) 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그리움이다. 그 역시 오이디푸스.

결국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일종의 성장드라마인걸까.
라캉의 말마따나 이도의 상징계는 아버지 이방원의 권위에 굴복하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그에게는 이방원과 같은 폭력성도, 권력에 대한 집착도 강렬한 카리스마도 없다. 즉 그는 팔루스가 결여된 전형적인 오이디푸스다. 이도의 실재계는 이방원의 정치를 극복한, "모두가 권력을 나눠갖고, 권력의 독은 오직 왕만이 참고 견디어내며,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하고 칭찬하거나 꾸짖는" 그런 사회겠지만, 이 역시 라캉의 말마따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따라 만들어진다. 말인즉슨 욕망은 상징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도는 "모두가 권력을 나눠갖고, 권력의 독은 오직 왕만이 참고 견디어내며,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하고 칭찬하거나 꾸짖는"세상을 꿈꾸고 상상할 수는 있으며, 또한 그 실재계의 환상을 통해 얻은 영감으로 상징계의 무엇을 바꾸어내는 예술(그에겐 훈민정음이나 조세개혁같은 것)의 자극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실재계에 닿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어서 이방원의 무덤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라'는 자아를 만나지 않았나.

반면 똘복이의 오이디푸스는 더 정직해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억울하게 죽은 노비라기보다는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조차 거세해버리는 사회의 질서, 즉 왕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질서에 가까워보인다. 그가 거세의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 즉 신분질서, 그리고 그 정점인 왕인 것이다. 어쩌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친부가 그에겐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존재. 그래서 그는 저항하고 죽이려고 하겠지만 우리는 뻔히 알고 있다. 세종은 장수하고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훌륭한 업적도 남기고 '대왕'이라는 칭호도 얻는다. 똘복이 역시 실패하고 굴복할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나 권력의 분산같은 것들은 사실 이도와 똘복의 욕망에서 파생되는 잔여물 같은 것이다. 문자와 정보가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그것을 이양함으로서 모든 정보, 즉 권력을 자신에게로 회귀시키고 싶었던 이방원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의지를 표현 하는 것. 이도가 상스런 소리를 입에 담는 것도 마찬가지.

드라마는 세 권력의 투쟁이다. 왕과 신하와 천민.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자기의 싸움은 없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싸움. 그러니까 이도와 똘복과 정기준의 싸움이 아니라 이방원의 아들과 노비의 아들과 정도전의 아들의 싸움이다. 그것은 개인의 욕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다만,
그들의 드라마가 닿을 수 없는 그 욕망의 근원에 닿음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오래된 학자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종은 마침내 권력의 독도 권력의 달콤함도 지식도 정보도 부도 모두와 공유함으로 마방진을 완성해냈으면 좋겠다.
똘복이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삶의 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나 더 나은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삶의 길을 개척하고 살아가는 평범함을 가졌으면 좋겠다.

결여된 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곳이지만, 그 드라마에서만은 그들이 어머니의 자궁안으로, 그들의 욕망이 시작된 곳으로, 그들이 마침내는 닿고싶은 그곳에 닿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세경의 출연 분량이 대폭 늘어났으면, 송중기가 종종 회상신으로 나타나줬으면, 김기범의 쌍커플이 좀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다.


▲신세경 사진이나. 
  아직 뿌리깊은 나무엔 이 때보다 예쁜 장면이 등장하지 않았......고 자시고 좀 출연을 하란 말이다.



111107 일기


1.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노는 일에 빠져선 블로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네. 덕분에 140자 이상의 언어를 상실한 듯하다. 함축된 언어와 간결한 표현이, 그리고 빠르고 용이한 정보의 소통이 주는 미덕이야 잘 알고 있지만 세상은 그렇게 짧은 언어로 이해되고 표현될 것이 아니다. (물론, 긴 글이라고 세상을 삶을 표현 할 건 역시 아니지만.) 블로그에 좀 더 성실해야겠다. 사람들에겐 블로그에 글쓰기가 좋은 작문공부라고 추천하면서 정작 난 한동안 글이라곤 쓰지도 않았네. 자신이 없네 어쩌니 하는거 사실 다 허세거든. 글 열심히 써야겠다.

2. 벌써 11월이다. 11월엔 김현식 아저씨의 기일이 있고,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 300일을 맞았고, 여전히 완전히 손을 떼지 못한 학교 선거가 있고, 노동자 대회가 열릴 것이다. 어쩌면 첫 눈이 내릴 수도 있고, 어쩌면 또 누군가 내 곁을 떠날 수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11월이 가을이 올 해가 끝나간다.

3. 예전엔 나이를 먹기 싫다는 언니들의 푸념을 들을때마다 사실 코웃음을 쳤다. '되게 나이 많은 척하네'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요즘 나이 먹기 싫다. 그 만큼 세월의 더께가 쌓이면 쌓인만큼 병신이 되가는 것 같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아지는건 하나도 없는 삶. 시간이 지날수록 병식력(力)이 증대되는 느낌이랄까. 어느 날부턴가는 병신오브 병신이 되어서 그레고리력 대신 병신력(曆)을 사용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다.
"2011년을 병신 원년으로 선포합니다. 병신 100년이 되는 해에 우리는 강성조국 건설을..." 으응??

4. 어제는 간만에 만난 후배와 술을 마셨다. 그 친구는 NL주사파.(헉, 아직도? 라고하면 헉, 그러게. 라고밖엔) 학교 운동을 재건해야 하지 않겠냐며 학교의 각 단대와 각 진영을 아우르는 중앙집중적 조직체를 만들어야 한다며 열변을 토한다. 서로다름을 인정하는 태도와, 각자의 다름이 틀리지 않다는 태도, 그리고 그 다음을 그려내는 상상력이 운동을 뻗어나가게 하는 동력이다. 모으고 모여서 강력한 힘을 갖는 일? 그건 운동도 진보의 방식도 아니다. 하긴 막판엔 말로는 설명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민족이라며 어떻게 민족을 부정하냐며 울분을 토하더라만.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참 착하다.ㅎ

5. 티스토리 관리페이지가 많이 변했네. 그러면서 방문자 수를 보니 고작 5명. 이글루 시절엔 그래도 꼬박꼬박 2~300명씩 찍어주던 파워 블로거였는데. 뭔가 서운하고 서럽다. 스킨을 바꿔볼까? 아님 잉끼 블로그에 가서 공개적으로 깽판을 좀 칠까??ㅋ



어떤날 - 11월 그 저녁에

요즘 본 몇 편


1. 하이킥

이제 고작 2회에 리뷰라니. 성급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러니까 이건 하이킥에 대한 리뷰라기보단 하이킥을 보고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이다. 학자금 대출과 생활고와 취업난으로 대변되는 20대를 연기해낸 백진희에 대한 열광에 대한 반응인것이다.

물론 오늘의 20대는 괴롭다. 그러니까 도무지 앞 말고는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괴로움이다. 서점엔 청춘을 위로한다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수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쉽게 88만원세대라고 부르고 쉽게 괜찮다고 힘내라고 말한다.

도대체 뭐가 괜찮고 또 어떤 힘을 내라고.

반값 등록금이니 청년실업이니 말을 만들어내기만 할 뿐 사실 달라지는건 없다. 오히려 이 요란스런 호들갑이 더 불편하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낸 그 사람은 결국 우리가 짱돌을 들지 않은 탓이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청춘은 원래 그런것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이게 다 가카때문인데 그러니까 원인은 우리가 투표를 안해서라고 말한다. 뭐 다 틀린말도 아니지만, 그게 위로와 격려가 되진 않는다. 그걸 억지로 우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허한 논의의 긑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보이는 앞을 향해서만 달려야한다. 그렇게 그들의 세계로 편입되거나 도태되어야 한다. 앞만 보이게 만들어 놓은 이 터널, 벗어나면 달릴 수 없는 이 철로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고작 2회밖에 안된 하이킥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극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전시했을 뿐 어떤 섣부른 위로나 해결이나 희망도 제시하지 않았다. 기대와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다. 다만 사람들의 섣부른 호들갑이 이 정확한 드라마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백진희에게도.

2. 도가니

배트맨에 대한 논쟁을 벌인적이 있었다. 그는 영웅인가 아닌가. 사적 복수의 결과로 히어로가 되는 배트맨은 영웅일 수 없다. 거기다 그는 자신의 자본과 권력을 이용하는 철저한 자본주의형 히어로. 뭐 여러종류의 수퍼 히어로가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이대면 사실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별로 없다.

사람들은 영웅을 희구한다. 클리셰와 CG를 적절히 버무리고 감동적인 권선징악의 메시지만 넣으면 완성되는 것이 히어로물인데도 끊임없이 양산되는걸 보면 알 수 있다.

인호는 영웅일까. 사적인 복수와 분노도 아니고, 남다른 정의감을 가진 것도 아닌 이 평범한 남자가 이렇듯 모든걸 걸어 뛰어 들게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조금더 설득해주길 바랐지만 영화는 그다지.

그럼에도 넘치지 않으려는 공유의 연기도, 넘치는 공유의 외모도 충분히 좋았다능.
정유미는 돈버는 영화에는 안어울린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능.

조금 더 담담하게 더 시니컬하고 더 우울한 영화였다면 좋았을걸.

3. 푸른소금

신세경은 예쁘다. 진짜 엄청 예쁘다.

에니어버드 테스트


에니어버드 테스트. 심리를 새에 비유해 표현해주는 테스트라던가.
난 보헤미안 갈매기. 좋은 듯, 나쁜 듯, 맞는 듯, 다른 듯.
어쨌건 이 심리테스트 매니아.


그나저나 흑색종마라니...ㅡㅡ;;

보헤미안 갈매기


기본 성격
창조적이며 자신의 감정과 내향성에 독창성 결합하는 특징을 가진다. 지휘나 인정받는 것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기표현이 개인적이고 독특하며,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창조성을 발취한다. 습관과 권위에 도전하는 타입이며, 자기표현을 위해 때때로 규칙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창조성과 야망, 자기 성장 목표 달성 욕구가 강하며 사교적이고 성공적, 남들보다 두드러지는 것을 원한다. 자신과 자신의 창조성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며 표현형식이 신중하다. 자의식이 강하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고, 자기표현노력, 사치스러운 경향이 있으며 상류층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 개인주의자, 낭만주의자, 예술가, 독특하다는 평을 듣는 이 유형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몇몇 행동과 겉모습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좀 더 세밀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꽤나 까다롭고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로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몇 번씩 오고 갈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정서적 근원은 결핍과 상실감이다. 평범한 것, 진부한 것, 남들이 하는 것 등을 극도로 꺼리며, 자기만의 고유함이나 특별함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갈망하고 표현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특이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서 이 유형은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예술가가 많으며 예술가의 삶이 잘 어울린다. 이 유형이 예술가적 삶을 살지 않더라도 현실에 잘 적응해서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전문가 수준의 취미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부일 경우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는데 이것이 고집스러운 경우도 있다. 갈매기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시선을 모으고, 부러움을 받고 싶어하는 특징이 성공하는 삶을 살도록 이끈다. 감정에 치우치기 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면서 감정을 적절하게 컨트롤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더 안정적이 될 수 있다. 혼자라는 것에 더 쉽게 견딜 수 있고 일어나는 일을 침착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더 소심하고, 내향적이며 동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랑
자유를 주고 센스와 품위를 갖추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좋다. 갈매기는 심적 경제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상대와 결혼을 원한다. 또한 배우자 혹은 애인이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했으면 하고 바란다. 따라서 자기 관리와 품위 유지비를 인정하고 할당해주는 것이 좋으며, 아름답고 세련된 것을 좋아하여 복장이나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이해해 주는 것이 좋다. 그들이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부드럽고 따뜻하게 배려한다면 더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이 유형은 제멋대로이고 별나고 감정 기복이 심하지만 복잡한 내면을 포용해준다면 이들은 상대를 진심으로 아끼고 힘들어할 때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잘못을 말하기 보단 당신의 곤란한 입장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귀를 기울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관련 인물
에드가 알란포, 제임스 딘, 엘레니스 모리셋, 알렌 긴스버그, 실비아 폴리스

좋은 상징 동물
흑색 종마

나쁜 상징 동물
바세트 사냥개

좋은 색
엷은 자주색

격정
시기 – 자기에게 없는 것이 남에게 있을 때 잘 나타나는 감정이다.

좋은 국가
프랑스 – 최고급 요리와 의상이 상징이다.

심성락 - 그는 이미 주인공




나는 가수다에 나오는 보컬들을 좋아하지만,
음악이 오직 무대의 가운데에서 핀조명을 받는 이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선 한가지 일에 도가 튼 사람을 도인이라고 했다.
한손에 수십켤레의 구두를 들고 걷는 구두닦이와 머리 위에 몇 겹의 쟁반을 이고 가는 아줌마야말로 도인이라는.
50년의 세월동안 아코디언을 연주해온 심성락 할아버지도 도인이다.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은 이런데서 쓰는 말일까.

일가를 이룬 도인에게 세션이라니. 그는 이미 주인공이다.

그들의 칼날은 언제나 약자를 향한다 - 동정을 가장하지 말지어다


송지선이 죽었다.
흔히 '추문'이라고 표현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자연스레 추문과 짝을 이루는 관심을 빙자한 비난과 욕설과 동정이 따랐다. 그녀는 견디지 못했고 결국 더이상의 반항을 포기했다. 죽일듯이 덤벼드는 이들에게 반항을 포기했으니 죽을 수밖에.

그 추문의 상대였던 임태훈도 죽었다. 이젠.
사람들은 이제 임태훈에게 화살을 돌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요런 댓글 하나를 달아 저마다의 추모를 마친 뒤 이젠 그에게 죽일듯이 덤벼든다. 살인자니 악마니 파렴치한이니 온갖 욕설과 비난이 난무한다. 그를 옹호하려는 이도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넌 이제 죽었다."라는 말 말곤 해줄게 없어.

 사람들이 잔인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그들의 칼날은 약자를 향한다. 약자를 억압하고 핍박함으로 인정받는 자신의 우월적 지위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싸움 잘하는 옆 학교 짱한테 삥 뜯기곤 분풀이로 우리반 찌질이들을 두들겨 패던 우리반 깡패가 떠오르는 일이다. 이 순환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찾아낸다. 같은 이유에서 삶이 힘겨운 이들을 전시하는 인간극장류의 최루성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동정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지위에 안도감을 느끼는 행위다.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약자를 찾아내고 괴롭혀서 안심을 얻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떤 언론은 네티즌들의 몰지각한 악플이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정작 네티즌들은 그 논란을 재생산하고 확대한 것은 정작 언론이라며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둘 다 아니다. 범인은 이 사회의 구조다. 약자를 밟아야지만 존재가 증명되고 다른 이, 다른 것에 대한 폭력이 삶의 원칙으로 둔갑하는. 즉 다시말해 다르다는 것만으로 이미 약자가 되어버리거나 일반적인 공동체와 윤리 의식에 포섭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용납하지 않고 밟아버리는 이 저질의 사회가 그 범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누가 관심갖고 비난 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송지선과 임태훈이 연애를 했건, 구강섹스를 했건 나와는 전혀 상관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든건 '8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는 여자' , '구강섹스' , '섹시화보를 찍은 아나운서' 같은 자극적인 이미지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이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건 사회가 통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순종적인 여자는 언제나 '오빠'를 만나야 하고, 섹스는 언제나 음습한 곳에 숨겨져야 한다. 하물며 구강섹스라니. 그것도 섹시화보를 찍은 천박한 아나운서가. 아닌 척하겠지만, 그 사뭇 다른 이미지들이 당신들의 그 거창한 '관심'을 끌어낸건 사실이지 않은가. 자기가 만들어낸 이미지 아니냐고? 그걸 소비한건 당신 아닌가? 자본주의는 니즈가 있는 상품만 생산하는 법.


사람들은 무엇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듯 하다.
지금 당신이 행하는 바로 그것이 폭력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위선적 댓글을 달고 호들갑을 떠는 그 모든 일이 폭력이다. 연민과 동정을 갖는다며 또다른 희생양을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지 말아라. '다른 이'를 억압하는 것으로 밖엔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당신도 이미 깡패다. 동정을 가장하지 말지어다. 


나 사는 곳이 나 대신 운다


건물이 오래되서 그런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물이 새서 집앞 현관이 물바다.
어디서 나는지도 모르는 물이 흥건히. 물이 고이면 쓸어내느라 정신없다.
나 사는 곳이 나 대신 운다.

세번의 만남




자전거 잘 타는 법. 첫 번째, 힘 빼기.
두 번째, 멀리 보기.

"선생님, 자전거 잘 타는 법 다 알고 계시잖아요?"
"알면 뭘해. 실천을 해야지. 이 세상 모든게, 알면 뭘해. 실천을 해야지. 비켜. 힘들어"

세 번째, 실천하기.


- 세번의 만남 양희은편 中



이 아줌마, 사실 어디서든 들은 법한 뻔한 이야기를 다시 깊이 울려주신다.
노래와 삶이 같은 흐름이었으면 좋겠다는, 사기치진 않았다는 얘기가 듣고 싶다는 그 얘기도.







내 나이 마흔살에는

울지 말고 잠이 들면


공교롭게도 지금은 다섯시 반쯤 됐구나.

특별히 우울하거나 슬픈건 아니다.
특별히 불안하거나 외로운것도 아니다.

그냥 조금 어렵고 그래서 조금 귀찮다.

하지만 울지말고 잠이들면 다시 아침해가 밝아올거야.




일방통행로 - 발터 벤야민


- 언제나 드러나듯이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삶,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삶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심지어 절실한 위험의 순간에서조차 지성의 인간다운 사용법, 즉 예견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실패한다.

- ... 결코 가난과 평화 협정을 맺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가해진 모든 굴욕에 대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이 더 이상 원한의 내리막길이 아니라 반란의 오르막길을 닦게 되는 그날까지 자기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 담배꼭지에서 담배연기가, 그리고 만년필에서 잉크가, 똑같이 가벼운 필치로 흘러나온다면 나는 문필가로서 내 직업의 이상향에 있는 셈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경악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깨달을 수 있음을 뜻한다.

-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도 새로운, 압축된 ㄱ내용을 풍부하게 부여 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 사람들은 용감한재봉사에 관한 동화를 떠올리고,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총소리로 다시 깨우고, 총 한 방으로 백설공주를 목에 걸린 사과에서 풀려나게 하며, 총 한 방으로 빨간 모자 소녀가 구출된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사격은 동화처럼, 성스러운 폭력으로 인형들의 존재에 적중하여, 괴물의 머리를 몸통에서 때려뉘고 그 인형들의 정체가 공주들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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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발췌 중 많은 부분이 '카이저 파노라마'에서 뽑아온 문장이다. (사실 더 많은 밑줄이 카이저 파노라마에 있었지만. 발췌는 저 만큼만)

헝클어지고 무너지고 불꺼진 파사주.를 쳐다보기. 자본의 도시, 사람이 사는 곳. 
지난 세기의 카이저 파노라마 보단 어쩌면 오늘의 서울 파노라마.

세상의 모든 계절 - 누구나 대화상대는 필요한 법이잖아요





# 누구나 대화상대가 필요한 법이잖아요

톰과 제리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아우라와는 달리 매우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다. 톰은 인자한 지질학자고 제리는 상담치료사다. 그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며 요리를 하고 주말엔 농장을 돌보는 생활을 한다. 잘생기고 위트있는 변호사 아들이 있고, 경제적으로 넉넉하며, 학식이 풍부하고, 탄소배출량을 고민할만큼 정치적으로도 깨어있다. 그야말로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가정.

메리는 제리의 직장동료다. 제리가 일하는 병원의 비서직 사무원이고, 학식이 부족하고, 이혼했고, 부유하지 못하고, 외롭고, 알콜의존증도 조금 있고, 너무 수다스럽다. 메리가 금붕어 똥마냥 제리에게 붙어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제리는 자신의 환자를 대하듯이 메리를 받아준다. 늘 Yes라고 말해주고 귀를 기울여준다. 메리는 그들 곁에 있음으로 그들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도 알고있다. 그녀는 결코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의 얘기가 아릴정도로 와닿는다.
"누구나 대화상대가 필요한 법이잖아요"


# 우리는 모두 메리일지도


메리를 보면서 내가 메리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부끄럽고 슬펐다. 외롭고 얘기할데없어 어느 곳에도 들지 못하는. 사실은 이제 그만해야 하는걸 아는데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마치 눈치채지 못한것처럼 불청객이 되거나, 과도한 호의와 과잉된 적의로 주변을, 사실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

하지만 그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사정. 우리는 모두 완벽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꿈꾸지만 어느 누구도 행복에 달하지 못하는 메리같은 삶을 산다. 늘 이상을 설정해놓고 그 언저리를 맴돌다 지치고 슬퍼하고 쓰러지고 울고 이내 체념하고 죽어버리는. 하지만 이상적인 공동체나 삶이 있을까.톰과 제리에겐 불행과 결핍이 없을까. 결국 희구도 행복도 모두 허상일지 모르겠다.




# 마지막 장면

메리는 또 행복한 가족의 즐거운 한 때를 '목격'한다. 그렇다. 그건 목격이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그녀와 그들사이에 존재한다. 그 벽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며 메리는 속으로 운다. 그건 체념일까 갈망일까. 애써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거나, 억지로 행복하게 만들어 위로하거나, 위악적으로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한 마지막 장면은(10초정도의 시간동안 아무런 소리도 내지않고 그녀의 얼굴만을 응시한다.) 내가 본 영화중 최고의 마지막 장면이다.

단상들


1. 요 며칠간 인터넷엔 화제거리도 많지만, 제일 시끄러운건 아무래도 '나는 가수다'에 관한 논란들. 무슨 말들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뭐. 실망은 기대가 어긋 났을 경우다. 프로그램의 기획은 고수들이 날 선 노래로 벌이는 진검승부였고, ('날이 선 노래'를 위해 마련된 탈락이라는 장치는 조금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들은 의도에 맞게 노래를 불렀다. 결과물은 기대에 충족했다. 문제는 기대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언제부턴가 그들을 '공인'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너무 높은 도덕적 잣대와 이상적 태도를 요구했다. 프로그램의 의도는 애초부터 '인격적으로 훌륭한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가수들이 부르는 훌륭한 노래'에 방점을 찍었다. 그런 기대를 할거였으면 방송태도 좋고, 말 잘듣는 아이돌들 불러다 노래시키면 될 일이다. 어물전에서 고등어도 안팔면야 문제겠지만, 어물전가서 한우 안판다고 화 낼일은 아니다. 이마트가 다 버려놨지 뭐.

2. 내리 며칠을 쉬었다. 때마침 걸린 감기와 아르바이트가 좋은 핑계가 돼주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집으로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후배에게 "너를 객관화 시켜서 볼 필요가 있어. 지금 과잉이잖아."라고 어줍잖게 말했는데 사실 지금의 내가 과잉이다. 도대체 무얼 하고 싶은건지 무얼 할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채 흘러흘러 이 지경까지 온거다. 빈둥거리며 티비를 보는데 한참이나 전에 방송된 무르팍도사에 양희은 아줌마가 나와서 말한다. "자신을 향했죠, 거절이란걸 못하다가 단호해 질 수 있었고,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됐어요" 난 아직도 멀었다.

3. 오늘 하루종일 이 글쓰기 창을 열었다 닫았다. 글을 써내려가다 조금이라도 막히면 닫아버리고, 또 다시 쓰다 똑같이. 귀찮아진다. 자꾸. 게으름은 병인줄 알았는데, 천성인갑다.

4. 세번째 만남이란 다큐에 이자람이 나왔다. 브레히트를 원작으로한 창작판소리로 여기저기 공연을 하러 다니더라. 보고싶다.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며칠전엔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아감벤이니 지젝이니 하는 사람들을 소개해주는데 눈길도 안가더라(아 이건 좀 뻥이긴 한데.ㅋ) 언젠가 감성을 키우겠다며 영화며 노래며 마치 수험생처럼 먹어댄 적이 있었는데, 다 떨어졌나보다. 역시 뱃속에 저장한게 아니라 입안에 담아두니까 금방 다 삭아버렸어.

5. 감기가 살짝 오길래 가볍게 대처해주려 했더니 옴팡 들러붙어서는 떠나질 않는다. 하도 코를 풀어댔더니 코가 다 헐어버렸.. 머리가 울린다. 아, 집이 더러워서 아픈 것 같다. 정리하고 나면 좀 괜찮아질까. 모르겠지만 일단 정리부터 해보자.

6. 스티큐브가 없어지고 힘들게 새로 찾은 스토리지. 첫 업로드는 이자람으로 해볼까.




아마도 이자람 밴드 - 슬픈노래

파수꾼 - 그건 싸움잘하는거랑 아무 상관없어



1. 그건 추억이었을까?
2. 정말로 다치지 않았니. 나도 너도.
3. 그럼 그건 폭력이었을까?
4. 그렇다면 피해자는? 또 가해자는?
5. 얼버무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는,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아.

5. 이제훈 대박.

만추 - 이 대책없는 낭만에 대한


솔직함이나 진심. 같은 말들을 좋아한다.
사람이나, 사랑, 관계. 같은 말도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걸 사실 잘 믿지는 못한다.

감정이 움직이는 그대로. 를 꿈꾸지만 사실 난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감정. 을 더 믿는 편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걸 부정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다만 아직. 이라는 거지.
그래서 이 대책없이 낭만적이고 우직하게 순박한 영화가 좋았다.
마음이 움직이고, 결국 다시 삶을 살아가는 순간들이 반짝거리던.




버스를 타고 시애틀로 향하던 애나의 눈은 무관심보단 어쩌면 두려움에 가깝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무관심을 어떤 의지도 욕망도 없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모든게 두려운게 아닐까. 하는.
상처가 크면 딱지도 크니까.

이런 생각은 영화가 한참 지나고 그녀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할때 더 확실해졌다. 그녀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더 세상을, 사람을, 또 자신의 삶을 동여매고 있구나. 그 안에 박제시켜 놓았구나. 다시 죽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었구나. 하는 생각들.


시간이 지나며 애나와 훈이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이 달라지고, 조금씩 자기 밖으로 나오던 애나가 사랑스런 춤을 상상하고, 마침내 눈물을 쏟으며 소리지를 때. 서로가 서로를, 마음이 마음을, 만남이 관계를 또 삶을 변화시킬거라는 이 대책없는 낭만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영화를 볼 땐 대사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대사보단 애나의 얼굴, 그러니까 표정에 무게가 실린다. 그녀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표정이 자기를 지켜줄거라는 듯이. 그러다 한번씩, 범퍼카에서 달리면서 훈의 말도 안되는 대답에 피식거리며, 유령관광온 관광객들에게 놀라며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관계(들)은 변한다.

영화는 대책없이 낭만적이다. 3일의 외출동안 만난 남자와의 관계(그게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가 죽어있던 그녀를 깨운다. (훈이 애나에게 굳이 시계를 주는 이유는 그녀에게 멈춘 시간을 건네주는 의미일까) 무튼 시간이든 마음이든 감정이든 죽어 멈춰 있던 그녀를 깨워 변화시키는건 관계, 사랑, 사람. 이라는 그런 낭만.

난 낭만을 동경하지만 동경은 이해의 반대말이니까. 갖고 싶지만 정체도 모르는 것.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모두의 자유. 관계와 감정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건 그대로 건강하고 성실한 삶.

다만 헛갈리지는 말자. 모든 관계가 이처럼 낭만적일리도 또 당신을 살게하지도 않을테니.
다만 보지 못했어도 희망을 버리지도 말자.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을. 그 찰라의 소중함이란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고 짜릿하니까.


덧,
탕웨이는 아름답다.
좋은 연기를 찾고 싶다고, 어쩌면 연기는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뷰를 봤더니 더 아름답다.

덧2,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을 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왠지 뜬금없게.


엄마처럼 나이들 수 있을까?


중학교때 학원에 다니기 싫다고 떼를 쓰자 엄마는 학원에 찾아와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이렇게 다니기 싫어하면 차라리 안다니는게 나을거란 선생님의 말(지금 생각하니 그 선생님도 참 용자다. 아니면 내가 진짜 싫었거나.ㅋ)에 엄마는
"고작 공부보단 세상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때가 얼마든지 있다는걸 알려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여성주의에 관련된 텍스트들을 몇 개쯤 읽었을때 엄마와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얘기를 했다. 성매매가 얼마나 나쁜지 성매매 근절과 그녀들의 재사회화에 대해 열변을 토했을 때 엄마가 말했다.
"넌 그녀들에게 어떤 색안경도 끼지 않을 자신이 있어? 지금 네 말이 정말 그애들에게 위로가 될까?"

학교에서 도망쳐 나와서 며칠간 집에 잠수를 탔을 때 엄마가 말했다.
"넌 공부도 그러더니, 운동도 하나 똑바로 못하냐?"

양희은 아줌마의 공연에서 아줌마가 '내 어린날의 학교'를 부를 때, 엄마는 웃으면서 펑펑 울었다. 솔직하게 가감없이.


엄마처럼 나이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