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11 - 친구 자취방


짜장면이나 한그릇 얻어먹을 셈이었어. 몸을 쓰는 일을 하는 데 내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는 니가 더 잘 알테니까. 이사하는 날 나를 굳이 부른 건 혼자 짐을 싸고 나르기 적적하니 와서 재롱이나 떨고 핑계김에 술이나 마시자는 네 배려인줄 알았지 뭐. 졸업하고 몇년이더라. 서른 몇 살이 어느새 훌쩍 넘어있었으니까. 아마 그 때를 떠올린 거야. 스무살 무렵에 그 스머프 반바지만한 네 자취방에 모여 앉아서 죽어라 부어 마시던 그 때 말이야. 


이사를 하니까 와서 손을 거들라던 네 전화를 받고 호기롭게 그러마 말했지만, 실은 그날 아침에 정말 무진장 가기 싫었드랬다. 일은 왜 그렇게도 바빴냐 말이야. 기자질이라는 게 그랬어. 특히 우리 회사는 더 그랬지. 주말이면 일은 더 많았단다. 뭔 놈의 집회는 그리 많고, 뭐 그걸 굳이 다 챙기려고 하는지. 그날은 모처럼 일정이 없는 주말이었어. 그래서 늦잠을 자고 싶었나봐. 집에서 일어나서 늬 집까지 버스를 타고 또 한시간은 가야 하는데, 넌 아침 9시까지 오라고 했잖아 임마.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 이불 속에서 실눈을 뜨고, '급한 취재가 생겼다고 말하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걍 무시하고 자버린 다음에 나중에 쿨하게 사과할까' 같은 생각들을 하는 통에 잠이 깨버렸다. 씻지도 않고 비척비척 나와서 버스를 탔다.   


실은 너희 집을 다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엔 너무 기억이 많아. 부끄러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이제 그곳이 없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잘 모르겠으니 그냥 아침의 일정이 귀찮았던 걸로 해두자. 그게 제일 평범하잖아. 


# 방 한구석 먼지 쌓인 기타 


그러게, 난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우리 엄마도 이삿날이면 나한테 집 밖에 나가있는 게 더 도움이라고 말했다니까. 내가 늘 지정석처럼 앉던 구석에 또 앉아서, 그 구석에서 살았던 날들의 이야기를 꺼내 수다를 떠는 게 내 역할이었지 뭐. 이럴 줄 알고 너도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을 부른 거잖아. 누누히 말하지만 일은 원래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구. 


누구 누구가 애인한테 차이고 와서 엉엉 울다가 이불 위에 토하던 날, 군대가기 싫다고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다 결국 늦잠을 자곤 아침에 춘천까지 택시를 타니 퀵을 부르니 법석을 떨던 날, 너랑 나랑 주먹다짐을 한 날도 있었다. 분명히 내가 이겼지. 코피가 나면 지는 거라는 룰은 도대체 어느 동네 룰이냐. 니가 먼저 울었는데. 거기다 난 원래 코피가 잘 나는 타입이라니까. 그 때 우리가 왜 싸웠는지는 기억하느냐. 난 기억하지만 차마 너무 부끄러워서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에서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전지현이 더 예쁘다 임마.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어제 밤에 초록색 위액을 봤네, 난 피를 토했네, 붉은색 즙이면 그건 쓸개즙이네. 뭐 그런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도 밤이 되면 또 술을 들이 부었어. 스물 몇 살 때더라. 누구의 생일이었더라. 하여튼 누구의 스물 몇 번째 생일이었어. 넷이 앉으면 무릎과 무릎이 닿는 네 좁은 방에 7명이서 낑겨 앉아 술을 마시던 날. 생일이라고 굳이 양주를 마셔야 한다면서 싸구려 양주 몇 병을 사들고 들어와서 과일 안주랍시고 귤을 까먹었다. 그 때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날이 참 좋았어. 개미 오줌만큼도 안들어있는 양주병을 죄다 비우고 늘 그랬듯 소주병과 맥주캔이 방 여기저기에 다시 흩어졌고, 먹다 남은 라면국물과 냉동만두 따위가 널부러진 밥상. 그 밥상을 발로 슬슬 밀면서 눕듯이 앉아 노래를 흥얼 거리던 그날. 그 날 눈이 펑펑 왔던 건 기억이 난다. 뻑뻑 피워 올린 담배 연기 넘어 반지하 창문에 눈이 쌓이던 모습이 참 예뻤다. 우리가 불렀던 노래는 뭐였더라. 내가 김장훈을 고래고래 부르다 시끄럽다고 너한테 귤을 맞은 건 분명히 기억하는데. 


학교에서 도망나와 잠수를 탄 것도 그 구석자리였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서 며칠동안 밥도 안먹고 술도 안마셨다. 그냥 그렇게 침잠하고 싶었어. 그 땐 뭐가 그렇게 괴로웠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염없이 괴롭고 슬펐어. 하긴 그 때 우리는 온갖 것들이 다 아프다고 했고, 모든 것들이 다 사랑스럽기도 했어. 사흘째인가 나흘째인가 내가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던 네 말이 참 큰 위로였다. 나중에 넌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넌 늘 그렇게 날 위로해주곤 했었다. 


실은 내가 더 좋은 삶을 살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너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한 네 삶이, 스스로 삶을 꾸리고 지탱해가는 모습이 어느어느 문건 속에서 본 혁명이니 변혁이니 노동의 가치니 하는 말들 보다 훨씬 더 감격스러웠다.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노동해방이 어쩌구를 지껄이던 내게, "이렇게 술을 마시고도 아침이면 꾸역꾸역 눈을 뜨고 일을 해야 하는 게 노동자의 삶"이라면서 "니가 읽는 책 속에도 이런 게 있길 바란다"고 말하던 것도 네 방의 그 구석자리였다. 


내가 너에게 위로가 됐던 날도 있었길 바란다. 그래, 그날처럼. 지금 생각해봐도 넌 참 모질게도 차였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순정마초인 네놈이 이별을 통고하는 그녀 앞에서 온갖 멋있는 척은 다 하고 돌아온 것도 모자라 우리 앞에서도 멋있는 척 폼잡다가 취해서 질질 짜는 걸 그 때 찍어 놨어야 하는데. 잡스가 조금만 더 일찍 노력해서 아이폰이 몇년만 더 일찍 나왔으면 그 희대의 명장면을 남겨놓을 수 있었을 텐데. 그날 니가 폼잡다 넘어지면서 쪼개진 변기 커버는 아직도 그대로네. 그때 우리의 위로는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지 못했느냐고, 왜 그 앞에서는 울지도 못하고 여기서 추태냐고 놀려댔지만, 우리가 그녀의 결혼식에 똥물이라도 뿌리겠다며 허황된 악다구니를 부렸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진짜였단다. 서툴러서 그랬다. 어쨌든 걘 너 버리고 만난 그 양반이랑 결혼해 잘 산다더라. 이제 너도 행복해야 한다. 침대 밑에 아직도 고이 모셔놓은 그 상자도 이제 그만 버리렴.

    

우리의 안주는 늘 너무 초라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그럭저럭 돈을 벌고 살았으니, 이제 그럴듯한 안주를 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래도 우리의 안주는 계속 초라했다. 가끔 짜장라면을 끓여먹는 게 가장 스페셜한 안주였다. 면이 퍼지도록 졸여서 치즈와 계란을 범벅해 죽처럼 만들어 퍼먹던 그 우리의 스페셜 안주가 어느날 티비에 나왔을 때 호들갑 떨면서 저작권을 요구해야 한다면서 또 낄낄거리기도 했다. 간짜장 곱빼기를 시키고 짬뽕국물을 추가로 달라고 하면 자장면과 짬뽕을 다 먹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누가 냈더라. 기억나지 않으니 내가 낸 걸로 하자. 그건 정말 연필에 지우개를 붙인 이후 인류가 고안한 가장 좋은 아이디어였지. 우리는 그 싸구려 안주들에 줄창 술을 들이 부었다. 이과두주를 그라스에 따라 마시면서 황비홍의 주제가를 엉터리로 따라부르기도 했다. 사내란 응당 강해야 (男兒當自强) 한다면서. 


술을 마시고 울다, 싸우다,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의 이십대는 오직 그것들이었을까. 취하고 떠들고 속상해하고 슬퍼하다 토악질해내듯 다 쏟아내면 다시 살아나 또 집 밖으로 나서는 것. 생각해보니 그 스무살이 네 스머프 반바지만한 방구석에 다 쌓여있다.


# 여전히 난 스무살


어느 날부턴가 네 방에 우리가 모여 앉는 일이 줄어들었다. 누구는 차를 사고, 누구는 주택 청약을 시작하고, 누구는 장가를 가고, 어느 주식이 전망이 좋고 하는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 거리가 되면서였던 것 같다. 사실 제일 먼저 발길을 끊은 건 나였다. 난 그런 이야기들이 싫었거든. 여전히 나는 철없이 가난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고, 통장에 수만원이 없어서 벌벌떠는 삶이라. 사실 그보다는 이런 초라한 삶에도 응원을 보내주는 너희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믿는다고, 세상에 내가 하는 말이 가장 똑똑하고 믿음직스럽다고 말해주는 너희들에게 늘 화가 났고 부끄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런 것에 화를 내는 게 부끄러웠다. 아마 몇 년 사이에 위로조차 받지 못할 만큼 내가 형편없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발길도 끊고, 연락도 뜸해졌다. 


네가 제일 서운해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니 전화를 부러 받지 않은 것도 니가 제일 서운해 하리라는 걸 알아서 그랬던 것 같아. 그러면서 말은 참 호화롭게 했다. 삶의 궤적이 달라졌으니 의무감 처럼 만날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의무감처럼 지켜야 하는 것이 어떻게 우정이냐고도 말했다. 의리 놀이 같은 것 좀 하지 말라고 젠체를 하기도 했고. 생채기같은 말들을 소금처럼 뿌려놓고 실은 나도 참 속상했단다. 왜 내 삶은 계속 이모양인지. 왜 나는 늘 가난한지. 왜 나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지, 왜 나는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지. 술에 취해선 그런 말들을 일기장에 쓰는 날 밤에 전화기를 조물딱 거렸지만, 결국 너에게 전화를 하지는 못했다. 모두가 성장하고 있는데 나만 여전히 네 반지하 자취방에 있는 것 같았다. 실은 사과를 하고 싶었다. 너한테는 꼭. 

  

얼마만이더라. 너랑 통화를 한 것이.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사를 도와달라고 했고 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마하고 호기롭게 말했다. 아침에 네 방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그건 아침 일정이 힘들고 귀찮았기 때문이라고 하자. 일은 안하고 구석에 앉아 쫑알쫑알 떠들어댔던 것은 실은 너에게 하는 사과였다. 여전히 서툴어서 그렇다. 하지만 마음은 정말 진짜였단다.  네 방이 없어졌으니, 이제 나도 방구석에 쳐박아놓은 스무살에서 빠져나와야 하겠다. 너희들은 이미 훌쩍 커버렸는데, 나만 꽁하니 구석에 처박혀 세상이 어쩌구하는 말을 떠들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니. 네 방을 정리할 때 날 불러주어서 참말로 고맙다. 나도 그 구석에 안녕을 말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 무엇보다 전화해줘서 고맙다. 


네 새집에는 볕이 잘들어 참 좋더라. 그 스머프 반바지에 비하면 축구장만큼이나 넓어진 집이 네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일곱명이 아니라 열댓명도 둘러앉아 술을 마실 수 있겠더라. 무엇보다 결혼을 축하한다. 어른이 됐구나. 삶에 사람을 들이는 일이, 누구의 삶 속에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 책임과 노력이 어떤 것인지 넌 참 잘 아는 사람이니까,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테다.


이제 아마 그 때처럼, 이과두주를 그라스에 부어마시던 때처럼 살 수는 없겠지.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서도 안되겠지. 하지만 그 때를 더 소중히 기억하면서 살자. 그리고 조금씩 더 좋은 어른이 되자. 


그래도 가끔 만나 황비홍 노래를 부르면서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사내라면 응당 강해야지.


++


BGM은 토이의 <안녕, 스무살>

생각해보니 나 이 노래 부르다가도 귤 맞았던 것 같은데.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10 - 인사동 노마드



인사동이야 유명한 한량들의 놀이터다. 천상병의 시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때, 천상병의 부인이 운영하는 '귀천'이라는 찻집이 인사동 어드메에 아직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설레하면서 인사동 골목을 누비기도 했다. 찻집이야 뭐 별 거야 없더라만, 거기 앉아 모과차를 홀짝거리면서 괜히 시인이 여기 어디쯤 앉아서 쓰린 속을 부여잡고 '나의 가난은'같은 시를 쓰면서 또 철없는 술타령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하는 일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 예술에 대한 동경.




좋은 예술은 좋은 삶에서 비롯한다고 여전히 믿는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믿는다. 믿는 일이란 아는 것과는 또 다른 영역의 것이니까.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는 작가들, 화가들, 배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그들의 예술에는 좋은 삶이 깃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것은 예술이 아닐 것이라고 애써 말한다. 


노래를 부르는 일, 시를 짓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는 일. 삶과 세계를 사랑해서, 그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서 더 좋은 세계와 사람을 상상하고 새로움을 그려내고 누구에겐가 건네고 또 받는 일. 오직 그런 일만을 예술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 어쩌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좋은 예술은 좋은 삶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반대로 좋은 삶이란 좋은 예술을 빚어내는 삶일 것이다. 그게 글이든 노래든, 그림이든. 이런 바람을 무책임하고 막연한 동경이라고 꼬집어도, 무식한 환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블리치에서 말하길, 동경은 이해와 가장 멀리 있는 말이라고 했지. 난 아마 예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ㅋ)


듣기로, 인사동은 좋은 시와 좋은 그림과 좋은 노래를 건네주던 예술가들, 한량들의 놀이터다. 놀이터였다. 과거에는 그랬다고 한다. 술에 취한 천상병이 시를 쓰고,  민병산이 '철학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던 시절. 그런 얘기를 어깨넘어로 귀동냥하거나 책으로만 주워들었지만, 듣기로 그 때는 그랬다고 한다. 지금의 인사동 모습에서 그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잔뜩 들어섰고, (스타벅스를 한글로 써서 인사동에 로컬라이징 했다고 마케팅하는 건 정말 너무 알량하지 않나.ㅋ) 휘황한 간판들 밑에 조악한 하회탈 모형과 효자손이 늘어섰다가, 외국인 관광객들은 호텔로 돌아가고, 한국인 젊은이들은 길 건너 종로의 술집으로 몰려들어가는 늦은 밤이 되면 모든 조명이 꺼지고 사람도 사라진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술 한되를 받아들던 한량들의 모습같은 거 사실 인사동이 아니라 어디에 있을까. 듣기로 그랬다.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있었는지, 있는지도 모를 예술에 대한 동경은 더 가소롭다. 




# 노마드



종로경찰서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인사동 끄트머리로 향하면, 높은 담벼락을 뒷배삼아 "이제 어디로 쫓아낼테냐" 하고 묻는 것 같은 술집들이 있다. '가까스로'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그 집들엔 머리 희끗한 이들이 둘러 앉아 그 높은 담벼락 바깥의 세계에서는 도통 하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을 한다. 누가 보기는 하는 지 알 수 없는 연극 포스터들이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어 있다. 옛날 노래소리와 그 옛날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부르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아마 그런 게 예술일까?. 모르겠다. 그들의 삶이 좋은 삶이었는지, 혹은 좋은 삶이 될지, 그냥 옛날을 그리워하고 세계에서 외면받는 것을 예술이라거나 풍류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니까 내가 괜한 '말' 따위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실은 모르겠다. 


어쨌거나 골목 한가운데 술집, '유목민', 노마드는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요즘처럼 덥지도 춥지도 않을 즈음이면 가게 바깥 골목에 자리를 벌이고 앉아서 소주잔이나 막걸리 사발 위로 담뱃재를 날리며 술을 마신다. 괜히 귀천에 앉아 천상병을 상상했던 것처럼, 거기 앉아서 시덥잖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나도 예술의 어느 한 구석에, 그 시절의 한량들이 벌이는 풍류의 한자락이라도 닿길 바라면서 가소롭고 알량한 허세를 부리는 거다.


인터넷에서 훔쳐온 사진이다. 앞으로는 이제 정말 사진을 열심히 찍겠습니다.



언제더라, 이삼년쯤 된 것 같은데. 그날도 골목 구탱이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 뒷자리에는 영화배우와 감독, 제작자들 일군이 앉아서 영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가끔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가끔은 어느 누구에 대한 험담을 상스런 육두문자를 섞어서 늘어놓고 있더라. 그 옆에는 환갑은 진즉에 넘었을 것 같은 남자들이 앉아서 음악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끔 인권이, 현식이, 용필씨 같은 말들이 나오는 걸로 연배를 짐작했는데, 김현식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동갑이니까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았겠다. 


그날도 맞은 편에 앉은 친구의 얘기보다 옆테이블 소리에 더 흥미를 두는 못된 습성이 동해 그들의 얘기를 훔쳐듣고 있었다. 거개가 왕년에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 뮤지션이었는지 떠벌이는 자랑을 가장한 푸념이거나, 지금 잘 나가는 그 놈들이 얼마나 사기꾼이고 나쁜 놈들인지를 알려주는 험담을 가장한 질투이거나. 우리는 그 시시껍절한 소리들을 엿들으면서 나이듦과 낡아가는 것과, 부여잡아 썩어가는 것과, 나아가지 못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희망을 근거삼아 오직 새로운 상상력에 대한 긍정만이 예술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맞아, 그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그랬다. 아마 우리의 허세와 드러내기 부끄러운 동경이 더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혹시나 우리도 늙어가지 않을까 무서워서, 혹시 우리의 삶에 정말로 예술이 깃들지 않으면 어쩌나 무서워서. 일부러. 


바이올린 가방을 든 초로의 남자가 골목으로 비척비척 들어선 건 더이상 얘기를 엿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인권이가 내 밑에서~~"라고 말하던 남자가 바이올린 남자에게 아는 체를 한다. 바이올린을 들춰맨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 테이블 옆에 서서 몇마디를 주고 받다가 이내 바이올린을 꺼냈다. 작은 스피커도 꺼냈다. 무슨 곡이었더라. 귀에는 익은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연주했다. 작은 스피커는 찢어질 듯 듣기 싫은 소리를 냈고, 연주는 썩 훌륭하지 않았다. 그래도 술에 취한 가을 밤, 인사동 어름에 흐르는 바이올린 소리가 어떻게 싫겠어. 박수를 보냈다. 


우리의 박수가 향한 건 연주자였지만, 박수를 받은 건 '인권이를 밑에 뒀던' 남자였다. 묻지도 않은 곡목으로 시작한 곡 설명을 한참하던 그는 "이제 사람들이 잘 아는 가요로 한 곡 해봐"라고 말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태도였지만 사양할 새도, 말릴 새도 없이 연주는 시작됐다. 광화문 연가. 중간중간 음정도 틀리고, 악보를 잊은 듯 듬성듬성 연주가 끊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연주를 마치면 열심히 박수를 쳐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연주는 노마드 사장님의 제지로 중단됐다. "민원 들어오니까 연주는 안됩니다". 그럴리가.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내가 이자리에서 몇 번이나 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연주중인 곡을 중간에 끊으면 어쩌나. 무례해. 무례하다고.


내가 그 무례하다고 눈살을 찌푸려봤자 무슨 상관이야. 바이올린 남자는 별다른 항의없이 바이올린과 스피커를 챙겼다. 그리고 연주를 시켰던 남자에게 막걸리 한사발을 얻어마시고선 자리를 떴다. 종로경찰서 사이로 난 좁은 길. 올 때처럼 비척비척. 그 모습을 보면서 쓸쓸해보인다고 말하려다 이내 관뒀다. 그의 연주가 어쨌건, 막걸리 한사발이나 비척거리는 걸음이나 내가 뭐라고. 그걸 쓸쓸하다고 말해. 



광화문연가를 연주할 때 동영상을 찍었다. 캡처한 후 사진은 부러 뿌옇게 보정했다.



# 예술이라 부르는 유목생활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목은 어쩌면 그 예술을 운운하는 한량들에게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어느 한 곳이고 발붙이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 안주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하는 일. 모든 것의 변화를 꿈꾸고, 늘 다음의 것을 상상하고 새로움을 향하고, 그래서 지금 있는 자리에 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떠남을 전제로 잠시간 머무는 것. 그러면 예술과 여행과 삶은 다 비슷한 것 아닐까. 우리는 끊임없이 떠나요. 우리는 끊임없이 헤어져요. 우리는 계속 부족해요. 한순간도 온전하고 안온할 수 없어요. 


며칠 전, 어떤 예술도 어떤 현실보다 극적일 수 없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현실의 삶이란 늘 더 절실하거나 부박해서, 고작 재현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진짜'의 무엇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 얘기를 할 때 노마드의 바이올린 남자를 떠올렸다. 좁은 골목길의 비척거리는 걸음과 예술에 대해서, 찢어진 소리를 내는 고물 스피커와 연주에 대해서, 소음 민원과 막걸리 한사발에 대해서. 그의 예술과 쓸쓸해보인다는 말에 대해서 떠올렸다. 좋은 예술이란 좋은 삶에서만 기인할 것이란 동경, 어떤 예술도 현실보다 극적일 순 없겠다는 말. 그 말과 동경이 허술한 것은 어쩌면 예술과 삶이라는 것이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겠다. 고 오늘은 생각했다. 바이올린 남자의 비척거리는 뒷태와 찢어진 스피커와 광화문 연가.


<아이다호>라는 영화를 봤을 때, 리버피닉스가 분한 마이크 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생 길을 맛보며 길위에서 잠드는 도로의 감별사. 길 자체가 집이고 목적지이며 경유지였던 그. 떠나고 또 떠나며 어느 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았던 그의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스콧, 마이크의 사랑을 지나고, 길위의 삶을 지나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 그처럼 안주하게되고 멈추게 되는 것이 싫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 사진을 핸드폰이나 모니터 화면 속에 박아넣고 그런 삶을 운동이나 예술 같은 표상에 끼워맞추는 얘기들을 많이도 지껄였는데. 실은 스콧의 삶도, 마이크의 삶도, 내 살아가는 꼬라지도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을 오늘은 했다. 바이올린 남자가 마신 막걸리와, 소음에 대한 민원과 나의 가난은. 떠나는 것만으  





예술이 살아가는 일만 못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이 곧 예술이고 예술은 좋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이 그냥 예술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계속 부유하며 행복함을 좆겠지. 부유하며 좋은 시를 찾는 것처럼. 다만 우리의 부유는 더 나은 곳을 향한 유목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떠나온 자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분탕질이진 않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앞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부박함이란 내일의 나아짐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어제있던 곳이 아니라 내일 있을 곳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삶이란 그런 것이고, 삶이 곧 예술이라면 예술도 그런 것이겠지. 어제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 들뢰즈는 "사막이나 스텝을 늘리되 그곳에서 인간이 살 수 없게 만들지는 말라"고 했다. 우리는 부유하며 떠난 곳을 황폐하게 할 것이 아니라 부유하며 우리의 스텝을, 사막을 조금씩 늘려 그 곳에 사람이 살게해야 한다.고 오늘은 생각했다. 



# 2018 트랜디 한량


인사동에 가봐야 천상병이나 박이엽, 민병산 같은 이들은 없다. 그들이 없으니 인사동도 이제 예전같지 않다.고 말하는 늙은 남자들은 아직 있다. 하지만 2018년 오늘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한량의 미덕이라면 그곳에 과거의 누가 있건, 오늘은 오늘의 술을 마시고 오늘의 노래를 부르면 될 일이다.ㅋ


노마드는 음식이 정갈하다. 추천 메뉴는 콩탕이다. 비지찌개처럼 걸쭉하고 되직하지 않다. 고소한 콩냄새와 담백한 국물이 좋아서 소주든 막걸리든 막 오조오억병씩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방문에서 더는 콩탕을 팔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콩국을 얻어오던 거래처 사장님이 돌아가셨단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법이니 새로운 안주를 개발하자. 지난 번엔 두부김치와 생태탕을 먹었다. 맛이 없을리가 없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 미세먼지 대신 담뱃재 날리는 노상에 죽치고 앉아 술을 먹는데, 좋지 않을리가 있나. 이게 2018 S/S 트랜드 조선 한량의 참모습이다.   


BGM은 전범선과 양반들로 하지 뭐.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9 - 을지로 판타지아



모친의 전성기 시절 나와바리는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였다.

 

꿈많은 만화가 지망생이자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이었던 모친은 결국 외할머니의 부지깽이 러시에 굴복해 인쇄소에 취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일을 놓지 않았으니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을지로의 인쇄소 골목에서 보냈다.


(나중에야 동생 넷이 줄줄이 딸린 가난한 집의 장남과 결혼한 탓으로 맞벌이가 필수였다는 정황을 이해했지만. 그땐 모친이 야근하고 돌아와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사는 집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내일 아침밥을 준비하는 데 이어 고등학생이던 삼촌의 도시락까지 준비하는 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했다. 참.)


# Pax Euljironia


당시 모친이 했던 일은 한자 타자기를 사용해 책을 조판하는 일이었다. 7~80년대엔 아직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었고, 당시의 책들은 대부분 한자 사용 빈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으니 한자 타자기의 활용도는 출판-인쇄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모친은 내가 아는 사람 중 한자를 가장 많이 안다. 여전히 가끔 방송에서 한자 사용을 틀리거나, 해석을 이상하게 하면 지적을 즐기신다.) 


이렇게 생긴 거다. 한자 활자만 3천 자 가까이 된다. 그 한자를 몽땅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활판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모두 외고 있어야 한다. 역시 손발이 불편해야 머리가 좋아진다.




다니던 인쇄소에서도, 을지로 인쇄골목의 업자들 사이에서도 모친은 꽤 유능함을 인정받은 인재였다고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셨는데 나로선 본 바가 없으니 믿을 도리밖에 없다. 암튼 그 때가 모친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다. 


모친은 지금도 대단한 풍류객이라 가끔 만취한 모자가 동틀 녘이 되어서야 귀가하다 현관문 앞에서 만나는 일도 종종 있는데, 몸과 마음과 주머니 사정까지 좋았던 그 땐 참말 대단했다고 한다.   


# Midnight in EulJi-Ro


그날은 모친의 생일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겨울이었다. 생일 선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양희은 아줌마의 콘서트 티켓을 샀다. 빠듯했던 알바비밖에 없는 대학생 나부랭이였던지라 2층의 가장 싼 좌석이었지만 그래도. 모친은 그 시절의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매우 좋아하셨다. 울다가, 웃다가. 돌이켜보니 그 해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엄마없이 맞이하는 모친의 첫 생일. 


공연을 보고 나와 모친과 술을 마시러 나섰다. 사실 그 즈음은 이미 내가 여기저기 술을 한창 마시러 다닐 때이기도 했고 특히 서울 도심 한복판은 집회 뒷풀이를 통해 수집해놓은 맛집 정보가 빠삭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자연스레 모친을 인도하려 했으나 종로통 무교동 을지로 골목골목을 누비는 모친에게 어느새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던 것이다. "니가 술을 마셔봤자지, 이 구역의 한량은 나야"라는 표정이었달까. 


모친은 그 날 골목 골목을 누비면서 그 때와 달라진 풍경, 이제 떠난 사람들,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 변해버린 당신의 모습, 하지만 여전한 당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당을 자부하던 남정네들을 말술로 꺾어버린 이야기, 미녀 동생에게 흑심을 품은 남자 놈들을 혼내주던 무용담, 그렇지만 너무 새침해 사실은 밉상이었던 동생, 그러니까 내 이모에 대한 험담, 생각보다 시시했던 첫사랑 이야기, 야근하는 밤이면 전화기 너머로 기타치며 노래를 불러주던 잘생긴 남사친, 빽판을 구하러 미군부대에 함께 숨어들던 큰오빠, 큰오빠보다 사랑하는 조용필 오빠, 양희은 언니, 못생긴 배철수, 쉘부르, 쎄시봉, 명보극장과 국도극장, 어울리지 않게 책을 좋아하던 거래처 남자, 다시말해 내 아버지 이야기까지. 골목골목의 굽이는 그녀의 삶의 주름이었고 그 골골에 갖은 이야기와 술과 음식과 토악질과 눈물이나 땀이나 설움 같은 것들이 잔뜩 남아 여전히 눅진눅진했다.  


모친을 따라 '동원집'에 처음 갔다. 동원집은 모친이 다니던 인쇄소와 매우 가까워서 당시에도 즐겨찾던 집이라고 했다. (그 땐 이 집이 TV 프로그램들이 앞다퉈 꼽는 맛집이 될 줄 알았을까.) 감자국 두그릇과 머릿고기 한접시를 시키고 소주를 마셨다. 술이 취할수록 그날 모친과 내가 나눈 대화는 아무말 대잔치가 됐다. (사실 그날의 느낌들이 남아있을 뿐 어떤 얘기를 했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게 벌써 근 10년 전 얘기다.) 


이 사진은 며칠 전 동원집에서 찍은 사진. 10년 전엔 먹기 전에 사진찍는 문화같은 건 없었다.



서로 자기말만 떠들어대고 있었고 허름한 감자국집에 앉은 모자의 다소 어색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우리의 그 날 대화는 대단히 매끄러웠는데, 그 순간 우리는 아마 같은 나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공구상가 어디쯤을 지나다 우리도 모르게 80년대 초반의 을지로로 흘러들어가버린 사람들처럼. 55살의 지훈이 엄마가 아니라 25살의 미스 박, 조용필 빠순이, 미래문화사의 에이스, 을지로의 풍류객. 박신자 씨를 만나러.


박신자 씨와 난 서로의 삶의 고민이 가장 힘들다는 듯 떠들어댔다. 그랬던 것 같다. 집을 떠나버린 남편, 내 맘도 몰라주는 그녀, 조국통일과 노동해방, 가정경제와 건강, 학생운동의 전망과 언론사 시험 진로 사이의 간극, 도무지 오르지 않는 우리집 집값. 등등등. 등등등. 서로 제 말만 떠들어대는 만취한 스물 다섯살들의 대화가 그렇듯. 영원히 넌 내게 스물다섯이야 배배, 오 곱하기 오 배배.


동원집에서 이미 취할만큼 취했지만 2차를 갔다. 굳이 골뱅이를 자셔야 한다고 하셔서. 골뱅이는 모친의 훼이버릿 술안주다. 그게 팍스 을지로니아 시절에 생긴 취향이라고. 사실 나도 술자리를 1차로 끝내본 적이 살며 없어서 (이는 모친 역시 '여전히' 마찬가지... 이걸 쓰고 있는 지금, 모친은 2차로 옮긴다며 먼저 자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골뱅이 집으로.


영동 골뱅이를 갔다. 노가리 골목과 함께 을지로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들러 맥주를 마시는 집이다. '오비 맥주집'과 함께 이 일대 주당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고. 


작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여기는 옆집인 영락 골뱅이.


   

그 날 우리 술판은 매우 늦게까지 이어졌다. 조용필과 최진희, 김현식, 스모키에 로보까지 등장한 노래방과 3차까지. 집에는 택시를 타고 갔다. 다행히 택시비는 모친이 내셨지만 그 날 술 마시느라 한 달 알바비를 거의 다 탕진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풍류객의 올바른 자세.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미드나잇 인 을지로.



# EulJi-ro Fantasia


취향을 모친에게 물려받은 탓인지 아니면 피는 못속이는 건지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마시는 동네도 이 일대가 됐다. 그보다는 을지로가 이렇게 멋과 풍류, 낭만과 해학이 가득한 동네입니다.


주로 1차는 5가의 경상도집에서 시작한다. 이른 저녁시간부터 길바닥 포장마차에 앉아 돼지갈비에 소주를 두어병 마시곤 배를 다 채우지 않은 채 일어서 을지면옥을 향한다. 냉면이 나오기 전에 술을 한 두잔쯤 미리 먹고, 냉면이 나오면 면을 흐트려 면의 곡향이 육수에 베기 전에 그릇째 두어 모금을 들이키면 돼지갈비 기름과 술냄새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입천장을 씻어내는 느낌이 든다. 제육과 냉면을 두고 소주를 또 두어병 마시고 나면 근처의 영락 골뱅이나 노가리 골목으로 간다. 배가 아직도 다 차지 않았다면 조금 걸어 다동 용금옥의 추어탕이나 길 건너 종로통의 영춘옥엘 가도 좋다.


위에서부터 경상도집 돼지갈비, 영춘옥의 따귀찜과 을지면옥의 냉면

   



이 가게들은 모두 술 좋아하길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멋진 곳들이다. 특히 을지면옥같은 경우는 언제고 모친과도 꼭 함께 가길 바라는 곳이다. 냉면을 좋아하는 모친은 그 시절에도 을지면옥은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느 곳에선가 평양냉면을 먹어봤지만 맛은 도무지 심심한데 고기 냄새는 날대로 나서 영 못먹겠더라는. 그래서 근래들어 티비에서 냉면을 소개할 때마다 저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혀를 차는 모친에게 을지면옥의 개운한 육수를 꼭 알려주고 싶더라.


그래서 그렇게 대를 이어 을지로 판타지아. 낡고 오래됐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건 노포들만이 아니다. 기억의 전승, 삶의 연속,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더해 또 누군가에게. 술과 맛있는 음식이 연결짓는 것. 그 시절을 간직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일. 오늘을 살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 하지만 그 시절이 쌓여 주조한 오늘을 똑바로 직시하는 일. 세월을 견디고 다시 오늘을 견뎌내는 삶. 내일을 희망하는 삶. 엄마의 삶, 나의 삶. 당신의 삶. 우리의. 그렇게 계속 계속 삶을 예찬하며 을지로 판타지아.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고 냉면도 먹고.


# Diamond And Rust


기억이란 다이아몬드 아니면 녹.


을지로를 누비던 오늘의 박신자 씨에게 그날의 기억들이 찬연한 다이아몬드였으면 좋겠다.

삶에 최선을 다해 충실했고 가난과 고난에서 때로는 현명하고 또 때로는 어리석어서 이제는 나이들고 지치기도 한 그녀가, 그 다이아몬드를 자산 삼아 오늘을 더 찬연히 살아가는 멋진 여성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을지로를 누비고 다닐 나에게 오늘이 다이아처럼 남으면 좋겠다.

늘 삶과 관계에 솔직하면 좋겠다.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 '녹'으로 남지 않으면 좋겠다. 

늘 삶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고 가난과 고난을 가끔은 현명하게 또 가끔은 어리석게 맞이하면서도 늘 그 순간을 돌이키고 싶어하거나 후회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엄마에게 배운 건 그런 거다. 넘치는 알콜분해효소와 새벽귀가 본능보다는.


어느 날엔가, 이 부정기 연재에 나온 집들에서 엄마랑 같이 술을 마실 수 있게되면 더할 나위 없겠다.

하지만 그 전에 을지면옥부터 먼저.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8 서촌 - 안주마을



그 날은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싶었다. 백수생활이 길어지면서 주머니는 하염없이 가벼워졌고, 가벼운 주머니를 핑계로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있었다. 공부는 영 되질 않았고 책을 읽어도 눈에 들지 않았다. 찌는 것처럼 더운 여름에 집에는 에어컨도 없었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날.

점심 나절이 지날쯤부터 전화통을 들고 여기저기 찔러보기 시작했다. 누구는 야근이라고 했고, 누구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누구는 선약이 있다고 했다. 온갖 곳에서 다 퇴짜를 맞고 우울함이 더 차올라 있을 때, 동거남은 날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면서 술 마시러 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잡쳐버린 기분, 우울함의 끝에서 술이 넘어갈까…는 커녕 좋다고 쫄레쫄레 따라나서 서촌의 안주마을로 향했다. 안주마을에선 언제, 누구와, 어떤 상황이라도 맛있고 재밌게 술을 마실 수 있다. 짜증날 땐 짜장면, 우울할 땐 안주마을.


# 알콜 코뮨

안주마을에 들어서면 일단 육회와 카스처럼을 시킨다. 육회는 마장동 축산시장 어느 집보다도 안주마을 육회가 더 좋다. (솔직히 진짜 그정도는 아니고..ㅎ 접근성 좋은 서울 한복판에서 먹기에 충분히 맛있는 정도) 육회를 다 먹고나면 소주 안주로 적합한 음식들과 맥주 안주로 더 좋은 음식들을 모두 먹어야 하는데 그 때마다 주종을 바꿀 수 없으니 소맥을 말아 먹는 게 베스트다. 이곳은 타협과 절충의 안주마을. 술자리의 민주주의 공동체. 알콜 코뮨.

육회와 카스처럼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낮에 술마시자고 전화했을때 퇴짜를 놓은 이들이다. 바쁘다던 그놈은 일을 미뤘으니 술을 마시자고 했다. 선약이 있다던 누나는 잠깐이라도 들리겠단다. 이 와중에 내가 연락도 하지 않았던 놈한테마저 전화가 왔다. 술 마시자고. 졸지에 서로 생면부지인 사람들 6명이 버름하게 마주보고 앉았다. 아직 육회 한접시를 다 비우기도 전에. (심지어 한 놈은 자기 학교 후배를 데려왔다. 걔는 무슨 죄야.)

어색하고 버름한 술자리를 예상했지만 그날은 생각보다 훨씬 유쾌하고 즐거운 자리가 됐다. 각자 좋아하는 안주를 끊임없이 시켰고 대부분의 안주가 맛있었다. 안주마을의 미덕이다. 다양한 안주들을 모두 준수하게 내어놓는 것. 소주안주와 맥주안주, 육류와 생선, 탕과 마른안주까지 대중없어 보이는 그것들을 다 그럭저럭 괜찮게 자리에 두는 것, 그것들이 썩 어울려 보이게 하는 것.

그날 불려나온 이들의 면면도 그랬다. 한 명은 나와 같이 사는 내 대학 선배였고, 한 명은 고시생활에 코가 꿰인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대학 동기와 평범하지 않은 직장에 다니는 선배 누나도 있었다. 동창 놈에게 끌려나온 학교후배, 불쌍한 그 아이도 있었지. 아무튼 이들은 다 서로가 생면부지인 사이였다. 그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실 이들은 마른안주와 간재미회무침과 치즈샐러드가 한 테이블에 있는 것처럼 어색한 조합이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와 삶의 궤적과 영역은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음주취향과 식성, 술자리에서의 습성마저도 상이하다. 그래서 이들이 한데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심 흥미진진 기대하는 마음이 반, 지독히 어색하고 지루한 몇 시간을 보낸 뒤 아무런 재미도 성과도 없이 헤어지게 될거란 두려움이 반이었다. 그 날 그 자리가 유쾌했던 건 전적으로 안주마을의 매력 덕분이었다.

안주마을에서 어떤 안주가 가장 맛있냐고 물으면 뭐 하나를 집어내지 못하고 “다 그럭저럭 맛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준비된 대부분의 음식이 그냥 그럭저럭 맛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좋아하는 안주 하나쯤은 주문이 가능하고 누군가에겐 생소할 음식도 걱정없이 권할 수 있을 정도의 맛이다. 그래서 그날은 마치 포트럭 파티 같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씩 시킬 때마다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면서 음식을 권하고 나누는. 생면부지의 삶이 한 테이블에서 뒤섞였지만 그래도 저마다의 사람과 삶이 적당히 어울리는. 대중없어 보이는 삶과 음식들이 그자리에 적당히 괜찮게 어우러지는. 사실 살며 한 번 섞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잠시간 앉아서 벽과 차이 없이 머물를 수 있는. (물론 술은 계속 소맥이었다. 소맥이야 말로 음주문화의 헬레니즘 알콜코뮨의 이데올로그.)  




# 좁지만 좁지 않은 정신과 시간의 방

원래 워낙에 장사가 잘되고 손님이 많은 집이지만 요 몇년새 서촌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하는 바람에 안주마을은 사람이 미어터진다. 주말 저녁에는 2~30분 웨이팅이 기본이다. 가뜩이나 좁은 가게에 사람들마저 흘러 넘치니 테이블 사이 간격도 매우 좁다. 나같은 경우 화장실 한 번 가려고 일어설 때마다 좌우 양 옆 테이블이 모두 움직여줘야 한다.

신기한 건 그렇게 밀집되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묘하게 방해받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옆 테이블이 소란스러워 우리가 방해를 받는 것 같지도. 누가 들을까 염려해 우리 일행이 목소리를 줄이거나 조심스러워 하게 되지도 않는다. 왜 대학가의 거대한 프랜차이즈 술집에서는 조금만 시끄러워도 내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술을 코로 마시는지 아이폰을 앞접시 삼아 라면을 떠먹는지도 모르게 되는데 말이야.

그 이유가 뭘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두를 다 뒤섞여버리는 그 느낌,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해봤다. 옆테이블과 우리 테이블의 이질감 같은 게 잘 없으니까. 그러니까 경계하거나 방해받는 느낌을 받을 이유도 없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 추천안주는 없습니다. 다 맛있어요.

그 날 우리가 먹은 안주는 육회와 간재미 회무침, 삼치구이와 알탕, 감자전, 계란말이, 라면 등등등. 등등등. 정확히는 기억이 안난다. 술값만 25만원이 넘게 나왔던 것만 간신히 기억이.. 그 날 그들 모두를 에어컨도 없는 우리집으로 끌고가서 술을 더 먹었는데, 처음엔 없었던 어색함이 뒤늦게 밀려들어 금방 파했던 것도 간신히 기억난다.

역시 즐거움의 공은 모두 안주마을에 있다. 거길 벗어나면 다 사라지고 말아요.

어색한 누구와 술을 마셔야 한다면 안주마을로 가세요. 뭐가 맛있냐고는 묻지 마시고.
개인적으로 전 청어알젓이 좋다는 팁만.



1. 주말엔 자리 없습니다. 웨이팅 걸어놓고 옆에 봉구비어가서 맥주마시면서 기다리세요.
1-1. 일찌감치 한 명을 희생양으로 보내서 자리를 맡아놓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2. 한라산을 팝니다.

3. 사진은 이번에도 다 훔쳐온 사진입니다. 언제쯤 제가 술보다 먼저 카메라를 신경쓰게 될까요. 


4. 브금은 한대수 아저씨의 '하루아침'. 소주나 한 잔 마시고.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7 합정동 - 仙술집



홍대 앞 상권이 포화상태에 이른 2천년대 중반, 그러니까 이제 홍대 앞에 라이브 클럽들이 더는 남아있기 어려워지던 그 시절쯤, 사람들은 하나 둘 씩 거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벗어났다기 보다는 쫓겨났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신촌역 가는 기찻길에 늘어섰던 고깃집들은 기찻길을 뜯어내고 공원을 만드는 공사로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얼마 전엔 최후의 가게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나던 길에 고깃집들이 사라진 걸 보고 친구가 연락을 줬다. 무척 서운해 하리라는 걸 알았나보다.) 버름하게 드럭에 처음 갔던 중딩 때, 얼굴도 처음 본 형들이 고기며 소주를 사주면서 롹큰롤 어쩌구 하던 그 가게들이 다 사라졌다. 


피카소 거리(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데) 곳곳에 작고 허름하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가게들, 몇 년간을 제집을 드나들듯 기웃대며 정치, 연예, 시답지도 않은 화제들로 목에 핏대를 세우던 술집, 가끔은 술취한 노브레인의 불대가리나 어어부의 백현진이나 캡틴롹을 볼 수 있었던 그 가게들도 다 사라졌다. 거긴 감성주점이니 하는 연예인 이름 들어간 술집이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바뀌었고 나같은 애들은 잘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이제는 사라질(!) 타나 FF, 고고스투, 롤링 홀 같은 곳에서 공연을 보면 이런 얘기들을 지껄였다. “X발, 삼거리 포차가 이렇게 핫플레이스일 줄은 난 몰랐네”. 그리고 비척비척 상수동이나 합정동으로 걸어갔다. 술을 찾아 헤매는 술나비처럼.     


# 내가 아는 형들은 하나 둘 날개를 접고


그 때 거기서 술 사주고 고기 사주고 같이 담배 피던 형, 누나들은 번화한 곳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부유(浮遊)하거나 갈 곳 없이 잠시 머무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잡았다고. 형들은 그 시절을 다 놀았다고 치고, 이제야 머리도 굵고 술먹고 담배 피워도 나라에서 간섭하지 않는 나이가 된 나는 여전히 아쉬워서 그 동네를 부유하거나 갈 곳 없이 머물렀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토악질을 하면서 한참을 걸어다니다가 갔다. 선술집에.


그러니까 선술집은 순전히 우연히 처음 간 곳이다. 아니다, 누가 데려갔던 것도 같다. 내가 좋아할 거라면서. 하여튼 그게 뭐가 중요해. 그 날도 롤링홀인지 타인지에서 공연을 본 날이었는데 또 하염없이 걷다가 불쑥 선술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적당히 취해있었고, 사람은 얼마 없었다. 목동들의 흐느끼는 노래소리가 없었고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우울하고 또 적당히. 적당히. 기억난다. 처음 데려갔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 자리에 앉아 사장님에게 물었다. “뭘 먹을까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선술집에선 아무자리에 앉자마자 사장님께 안주를 물어보는 게 보통이 됐다. 메뉴판도 없이 그날 그날 있는 생선도 다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선술집은 선어회 전문점이다. 메뉴판은 없고 벽에 이런 저런 메뉴가 붙어 있는데 가격은 적혀있지 않다. 병어조림이나 도미머리 구이 같은 게 써 있긴 하지만 딱히 눈여겨 보지는 않았다. 사장님에게 뭘 먹으면 좋을지 물으면 사장님은 우리가 저녁은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를 묻기도 하고 그런 거하곤 상관 없이 오늘 어떤 생선을 잘 골라 왔는지 자세하게 얘기해 준다. 한 번은 기분이 좋아서 (사실 같이 있던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혼마구로를 달라 했더니, “비싸니까 먹지 말라”고 하더라. 역시 믿고 맡깁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 친구와는 결국 잘 안됐나봅니다.


그래서 선술집은 ‘밖으로 나가버린 너를 욕하면서 안으로 취해만 가던 나’들과 함께 찾는 최후의 보루같은 게 돼버렸다.

언젠가 우리의 세대를 뭐라 규정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었나. 지금 나는 우리 세대를 ‘주변인 세대’라고 명명하겠다. 우리는 무엇이 돼야 할지 몰라서 무엇이 되길 바라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무엇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늘 괴롭고 또 외롭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이제는 차라리 외로움마저 느끼지 못해 그마저 퇴화시켜버렸다. 퇴행.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른이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아이가 됐다. 


초고층의 으리번쩍한 고층 빌딩들 사이에 남은 낡은 선술집의 모양새가 그렇다. 원래 그 주변엔 비슷한 가게들이 꽤 있었다. 지금은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한없이 치켜들어야 하는 그 건물이 있던 자리엔 히레사케가 맛있던 작은 이자카야가 있었다. 낡고 허름한 호프집도 있었다. 토악질을 하는 남자애들이 있었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이제는 혼자 남다시피 한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결국 이겨낸 걸까, 아니면 남아서 떠나지도 못하는 걸까. 어쨌든 남았다. 이건 내 얘기다. 이상하게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면 늘 만취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거기서 앉아 만난 사람들과는 그런 얘기를 했다. 떠나가는 이야기, 남아서 기다릴 이야기, 무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이야기, 결국 버리고 말 이야기.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나 정말.


사실 그건 선술집의 안주가 비싸서 그렇다. 작은 접시에 몇 점 올라간 선어회는 푹푹 떠먹기에 부담스럽고 회 한 점에 술을 몇 잔씩 먹다보니 금세 취할밖에. 그래서 술을 마실 때면 누군가는 울었던 것 같다. 선술집에서 택시를 잡으러 가는 길은 아침에 침대에서 화장실로 가는 길 만큼이나 멀다. 


# 나 이렇게 이 땅에 선 채


그래도 여전히 선술집엘 다닌다. 거기서 술을 먹고 좋은 꼴을 본 적이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찌질찌질 울거나 시원하게 토악질을 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대판 소리를 질러 싸움박질을 하더라도. 그건 그대로 오늘을 살았음을 증거하는 일이라 여기는 탓이다. 그리고 선술집의 선어회는 정말 맛있기 때문이다. (술집 유랑기에서 처음으로 맛있다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토악질을 하고. 그러고보면 숙취에 시달리는 일만큼이나 자기 존재를 절절히 확인하는 순간이 있을까. 새벽내내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사투를 벌이면 내장의 위치는 물론 식도의 위치까지 알게되지 않나. 난 내 살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골격들도 통증을 통해 가까스로 확인한다. 올 여름 두툼하게 썰어나온 고등어회를 먹고 여지없이 만취한 날,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맨날 맨날 사먹을 수 있게 살자”고 약속했다. 사는 게 뭐 별거겠냐, 맛있는 거 먹고 술먹고 토하고 싸우다 화해하는 거지. 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사실 술취해서 지껄이는 말들과 그 끝간데 없는 우울함과 자조는 분명 삶의 징후다. 살 거다. 나는 아직 고개를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 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다. 여전히 스무살. 주변인 세대니까 그런 거다. 여전히 스무살로 살면서 형들처럼 아니라던 곳으로 가진 않을 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직 아지트도 있고 그 아지트에는 엄청 맛있는 선어회도 있다. 


#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해 보리라


아마 오늘도 술을 퍼먹을 거고, 잘하면 선술집으로 가게 될 수도 있겠다. 가면 또 시덥지 않은 정치 경제 연예 연애 얘기를 하면서 싸우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얘기들을 지껄이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얘기들을 경청하게 되겠지. 그런 게 사는 거다. 어차피 살아가는 건 소극(笑劇)이다. 그러면 더 비속하고 더 웃겨야지.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해야지. 어차피 힘차게 맹진하며 골로가는 청춘이다.  




Etc.


1. 화장실이 굉장히 좁습니다. 좋은 술집은 화장실을 좁게 만들어야 한다는 법령같은 거라도 있나봐요.

2. 월요일은 쉽니다. (일요일인가? 아마 월요일 맞을 겁니다.)

3. 진짜로 좀 비쌉니다. 식사 후에 방문하시길 권합니다. 술 좀 먹는 성인남성 둘이 앉아 양껏 먹으면 십수만원은 훌쩍 깨집니다.

3-1. 무조림이 별미입니다. 회는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드시고 진짜 안주는 계속 주는 무조림으로 하는 게 노하우. 생활의 지혜, 가정경제 도우미.


4. 사진은 고등어 회 사진말고는 다 인터넷에서 훔쳐온 겁니다. 이 연재 계속하려면 나도 사진같은 걸 좀 찍어야 할텐데 술먹기 바빠서 ;;;



*동진형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 Out-Size - 맛있는 집 이야기



그동안의 술집 유랑기엔 “음식이 맛있다고 할 순 없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여야했다. 이게 맛집 탐방기도 아니고 술과 음식 이야기 보다는 그 술집에서의 ‘내 얘기’인지라 맛보다는 사연에 방점을 찍었던 탓이다. 사실 음식이 맛있는 집이란 찾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맛집이라고 불리는 곳들은 ‘먹을만한 음식’을 내놓는 것이지 맛있는 음식을 내놓지 않는다. 여기서 혼동이 발생하는데, 요즘 우리는 맛있는 음식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구분하지 못하며 산다. 암튼 그래서 이번엔 번외로 ‘맛있는 집’ 이야기를 해보려고.


1. 먼저, 나는 대체로 화가 나 있음을 알리며 재수없는 고나리질


대저 ‘회’ 라고 하면 ‘싱싱한 활어 회’를 최고로 치는 경향이 분명하다. 예전 어떤 식당에서는 아직 아가미가 꿈뻑거리는 생선 대가리를 회 접시 옆에 같이 얹어서 내오기도 했다. 어쩌라는 건지. 그러나 사실 서울에서 먹는 활어 회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제, 아니면 그제 잡은 생선을 탱크에 가둬서 수백키로는 덜컹거리며 달려온 다음 좁은 수조 안 미지근하고 더러운 물에 넣어서 간신히 아가미만 꿈뻑거리게 만들어 놓은 생선을 잡아 주는 것. 서울에서 먹는 활어란 그런 의미다.


마치 미각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회와 해산물이 싱싱하고 맛있다는 식당이 있다고해서 따라갔더니 회는 으깨질대로 으깨져서 걸레쪽 같고, 살은 핏물이 베어 선홍색이다. 새우는 너무 삶아 살이 푸석하고 조개에선 폐타이어 냄새같은 게 난다. 거기에 초장을 푹하고 찍어서 깻잎에 싸고 마늘까지 두어쪽을 올리고선 회가 맛있다고 하면 그냥 앞으로 이이의 추천은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한다.


네이버 맛집 블로거들이 주로 소개하는 홍대나 경리단, 가로수길 같은 곳의 맛집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포스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문장이 “맛있게 맵다”는 말인데, 정작 먹어보면 캡사이신 덩어리에 지랄염병조미료 범벅인 경우가 열중 여덟 아홉이다. 대포알만한 카메라를 음식에다 들이밀고 그 지랄염병조미료 덩어리를 먹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도대체 왜 이 비싼 돈을 내고 줄까지 서서 이걸 먹어야 하는 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게 패션이니까.


며칠 전에도 줄을 서서 먹는다는 대학로의 어느 돈까스 집에 갔는데 아니나 달라. 안심 돈가스이라고 내어준 6조각 (미니) 고기 덩어리는 돈가스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칼을 내주지 않고 썰어서 나온 걸 보면 한입 내지는 두입 크기일텐데, 고기가 과하게 두꺼워 이빨을 넣고 한 번쯤 한 숨을 돌린 다음에 다시 씹어야 절단이 가능할 정도다. 이렇게 두꺼운 고기를 익히려면 기름 안에서 얼마나 익혀야 하는 거야. 높은 온도로 튀기면 고기가 다 타버릴테니 저온으로 튀겼을테고 그래서인지 튀김옷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는 습자지 수준의 튀김옷이 눅눅하게 고기에 늘어붙어 있다. 아, 고기가 설익은 건 자기들만의 방식이라고 친절히 테이블마다 써붙여 놨으니 패스. 플레이팅은 참 예뻤다. 돈가스 접시만한 예쁜 돌판을 함께 주길래 뭔가 했더니 그 판위에 소금을 뿌려놨다고.. 왜 그래야 하는 건가요.


암튼 난 미각을 비롯한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자기 신체 기관의 예민함을 단련하는 정도에 따라 정교해진다는 상식에 더해 사회가 유도하는대로 시시각각 날조되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본연의 감각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와 사물, 사건에 대해 늘 의심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테레비와 인터넷이 맛있다고 하고 사람들이 많이 먹으면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백종원 식당 음식이 맛있다고 칭송하는 것과 북한 주민은 뿔달린 괴물이라고 믿는 것과 박정희가 반인반신이라고 여기는 게 사실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말씀.


2. 지랄염병 천하제일 괴식대회

 

내가 살며 가장 놀라웠던 음식은 신천의 해주냉면이다. 사람들이 몇 십분이고 줄을 서서 먹는데 처음 그 광경을 봤던 고등학교 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냉면을 먹자고 줄을 서다니!!  한참만에야 겨우 냉면 한그릇을 받아들고는 더욱 놀랐다. 씨발 이게 뭐야. 맵고 맵고 또 맵기만 했다. 물을 벌컥거리고 혀를 행구고 눈물을 쏙 빼는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매운 걸 못먹는구나” 라거나 “이거 먹으면 내일 아침에 화장실에서 힘들어” “난 괜찮은데?” 따위의 가당치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언제부턴가 매운음식을 기네스 도전하듯이 먹는 풍토가 생겼다. 불닭, 닭발이 그 선두에 있었고 떡볶이 냉면 가끔 카레 따위가 뒤를 이었다.  사실 여기에도 사회적 맥락이 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매운 음식을 찾는다. 통각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매운음식을 먹으면 엔돌핀이 과다 분비되고 거기서 쾌감을 얻게된다. 사회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은 음악뿐이 아닌 거지. 2000년대 중반이후, 그러니까 세상 살기 참 뻑뻑해지면서 이런 음식들이 마구 유행했다. 그렇게 유행처럼 휘몰아친 매운 음식의 열풍이 좀 더 자극적이고 더 신기하고 더 매운 음식으로 발전해간다. 사람들은 더 강도높고 자극적인 매운 맛에 몰리게 되고, 짬뽕먹다 토하고 불닭먹다 실려가는 일이 만들어진다. 식당들은 더욱 매운 맛을 만들기 위해 온갖 재료들을 집어 넣는다. 청양고추에서 시작해 쥐똥고추나 하바네로를 경유하더니 요즘은 그냥 캡사이신 원액을 집어 넣는다. 그건 식도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도전인 건데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 도전과 엔돌핀의 쾌감과 식도락을 혼동하게 된다. 이게 그냥 ‘맛있는’으로 치환되는 거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이런 괴랄한 음식들이 “맛있게 맵다”는 말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순창 고추장 광고하던 김혜자 아줌마 탓이다. 


얼마 후엔 갑자기 이 지랄염병같은 천하무적 캡사이신 대회의 자매품으로 치즈를 범벅하기 시작했다. 불닭 위에 치즈를 녹여 올린다거나 하는 수준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얼마전엔 졸라 매운 등갈비를 냄비에 가득 녹인 치즈에 찍어먹는 음식도 등장했다. 문화컬쳐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치즈는 매운 맛을 중화시켜주는 떡칠 사리에 가까운 음식이 됐다. 치즈의 풍미와 맛에 심혈을 기울였던 구라파의 낙농장인들이 보면 혀를 찰 일이다. 파트라슈 미안해. 이 아스트랄 미각 불지옥의 최전선엔 일단 편의점이 있다. (물론 이따위 음식을 노하우라고 팔고 있는 음식점도 엄청 많지만) 불닭볶음면에 치즈와 삼각김밥과 기타등등 온갖 것들을 넣고 죽을 쒀먹는 게 요즘 편의점 음식의 패션이다. 얼마 전에 대유행했던 허니버터칩 이후 편의점엔 온갖 것들에 허니와 버터를 쳐발라놓은 음식들이 나오기도 했다. 


음식의 맛과 궁합, 그를 알기위한 노력은 실종됐다. 퓨전이라는 말을 붙이거나 신개념이라는 말을 붙인 음식들, 괴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건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아니, 사로잡았다기 보다는 볼모삼았다. 전쟁통에 먹었다던 꿀꿀이죽. 그 땐 가난하기 때문에 이라도 먹어야겠다던  음식을 먹는 대중들의 선택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런 거도 주면 맛있게 먹을 거라는 산업의 선택이 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누구 탓하기도 어려운 일이 됐고.   


3. 맛집의 개수작 - 네이버 블로그를 금지해야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맛집 블로그라거나 어플에 등록되는 집들을 가보면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다. 으리번쩍한 접시에 푸짐한 음식을 내어오지만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어떤 집은 먹을만하지도 않은, 대놓고 먹기 힘든 음식들도 있다.

일테면 섞여선 안되는 음식들을 한접시에 내어오거나, (국물이 줄줄 흐르는 김치와 드레싱이 과한 샐러드와 기름에서 나온 순간엔 바삭했을 돈가스를 한 접시에 주는 게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름만 그럴듯했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음식..(최근 토끼정에서 크림카레우동을 먹고 나오면서 30여분째 줄을 서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당신들 시간은 그렇게 한가합니까)이 나오거나 근본적으로 이걸 왜 돈주고 먹고있나 싶은 집들이 있다.


이런 가게들의 공통된 점은 인터넷을 통한 홍보가 무척 잘되고 벌써 여러 개인 맛집소개 프로그램에 한 두번씩은 소개된 곳이라는 거다. 앞서 얘기한 치즈를 매운맛 중화용 정도로 쓰는 매운 음식 맛집들에서 치즈를 줄줄 늘려가며 맛있네요를 외치는 박지윤이나, 한입 이상 먹기 힘든 느끼한 음식을 그릇째 마셔버리는 정준하가 다녀간 곳은 이튿날이면 발을 디딜틈도 없어진다.


여지없이 블로그와 SNS에는 맛집 방문기가 올라온다. 맛에 대한 평가나 소회보다는 사진으로 ‘다녀갔음’을 기록하는 용도에 가까워보이는 포스트에는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고 비슷한 수의 스크랩이 카운트된다. 음식의 맛보다는 다른 요인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연예인들이 먹은 것을 먹어보고 그걸 인증해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식생활에서의 일상이 된 거다. 그렇게 보면 매운 양념에 버무린 빨간 요리와 죽죽 늘어나는 치즈는 그야말로 포토제닉한 음식이다.


4. 진짜 맛집


사실 진짜로 맛있는 집을 찾아내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른 이들의 동의라는 지난하고 힘겨운 과정을 생략하더라도, 내가 참으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을 죽기 전에 한 두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사실 한 끼에 수십만원 씩 든다는 파인 다이닝에 가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지만 주머니 얇은 사정상 요원한 일이고. 하지만 그래도 내 입과 혀의 즐거움을 느끼는 게 다른 어떤 요소가 아니라 올곧이 나라면 느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이 곳곳에 분명 숨어있다고 믿는다.


설탕이나 물엿이 아니라 장과 양파, 양배추만으로도 충분히 달짝지근하게 만든 떡볶이가 있고, 발데온치즈로 만든 소스에 찍어먹는 빵이나 정성스레 우린 육수에 말아먹는 냉면, 걸쭉하게 갈아만든 콩국, 발효하는 냄새가 심하게 나는 청국장, 모짜렐라와 루꼴라만 올라간 피자. 뭐 맛있는 음식은 셀 수도 없이 참 많다. 사실 잘 숙성시킨 돼지고기를 적당히 화력좋은 숯에만 구워도 좋을 일이다. 이런 음식들을 하는 화려하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은데다가 대포알 디에스엘알도 없는 식당들은 화려하지도 자극적이지도 대포알 사진기도 없어서 맛집이라고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여러분, 맛집 정보를 얻으려거든 네이버 블로그를 끊고 조선일보 주말판을 보세요. 조선일보 아저씨들이 맛집 정보는 제일 잘 꿰고 있습니다.


4-1. 그래서


다음 술집 유랑기는 내 가본 술집 중 음식이 가장 맛있는 집을 선정해보려고 합니다. 어디가 될진… 사실 정해놨습니다.ㅋ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6 종로 - 락커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암굴같은 입구다. 롤링스톤즈며 밥 딜런, 데이빗 보위의 사진이 붙어있는 입구를 지나 들어가면 담배연기 자욱한 가운데 듬성듬성 테이블이 몇개 널부러져 있다.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오는데 묘하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고요함에 가깝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테이블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인장이 그런 테이블을 딱히 자제시키는 것도 아니건만 소란스러움은 아니다. 끈적거릴만큼 친밀하지도 않고 버름할만큼 데면데면하지도 않다.


# Midnight In Rock'n Roll


자고로 락스타란 불꽃처럼 살다가 떠나버려야 한다. 벽에 똥칠하며 오래도록 사는 건 락스타의 의무가 아니다. 그러니까 60년대의 3J처럼. 


락커스에 처음 갔을 때 쯤 도어즈의 노래가 나왔다. Light My Fire. 

짐 모리슨처럼 살고 싶었는데.


락커스의 벽에는 어느 시대를 살았던 어느 락스타들의 사진이 잔뜩 걸려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누구인지를 특정할 필요는 없다. 다 락스타다. 무언가를 부쉈고 자기가 부서지는 삶을 살았던. 





락커스에는 주로 3차쯤, 그러니까 술도 좀 오르고 이야기거리도 좀 떨어졌을 때 가곤했다. 그래서 락커스에서의 대화는 주로 벽에 붙어있는 락스타들의 시시껍절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주다스프리스트의 롭 할아버지와 프레디 머큐리가 서로를 놀려대고 씹어대던 이야기나 (롭 할아버지가 "프레디는 모터사이클 대회에 나가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자 프레디가 "그가 발레수트를 입고 발레공연을 한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던)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의 러브스토리 같은 얘기들에 멋대로 온갖 스토리를 가져다 붙이며 낄낄거리며 놀아대는. 약에 찌들어 자살한 락스타는 사랑할 수 있지만 무병장수하며 옛날노래로 투어나 도는 할배들은 용서할 수 없다며 놀아대는.





길 건너 종로통에 온통 소몰이 목동들이 흐느끼는 노래만 나오는 호프집이 가득하다. 간판도 막 소리를 지르고 있다. 들어오라고. 그 골목에서 한블럭만 도망치면 롹스피릿이 이렇게나 충만한 곳이 있다. 심지어 사장님은 존 레논을 닮았다. 정말이다. 깜짝 놀란다. 그래서 과장을 한움큼 정도만 보태서 얘기하면 락커스의 암굴같은 입구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시간이 건너뛰는 그 골목과 같다. SG워너비에서 도망쳐 진자 사이먼앤 가펑클을 만나러 왔습니다.


신청곡을 많이 내지는 않지만 가요만 아니라면 장르불문 거의 대부분의 신청곡을 다 틀어주는 편이고, (가끔 가요도 틀어준다. 그렇다고 SG워너비나 휘성 같은 걸 틀어주진 않아요) 신청곡 리스트에서 파생돼 주인님이 틀어주는 음악도 좋다. 마치 "너네 이 노래도 좋아하지?" 하는 것 같이.



 # 나만 알고 싶은 집





좋아하는 술집 중에 누구든 다 같이 가서 술마시고 싶은 집이 있는가 하면, (이를테면 전봇대집은 누구라도 함께 가고 싶은) 되게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나누고 싶은 집이 있다. 락커스는 후자. 그러니까 비장의 술집이라는 거다.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하다고 하기에 홍대와 강남이 더 익숙한 제 또래의 친구들은 아무도 모르더라만요)한 곳이지만 그래도. 


락커스는 이상하게 내밀하고 (어두워서 그른가) 묘하게 안락하다 (의자가 그렇게 작은데도!!). 어느 날 내가 술마시자며 락커스에 함께 가면 그 쪽을 되게 좋아한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막 의미를 부여해야 뭐라도 걸릴 것 같아서.ㅋ)



# 그 때


락커스에 가장 많이 드나들던 건 한 7~8년 전쯤. 그 땐 사흘에 한 번이 멀다하고. 낙원상가 옥상에 서울아트 시네마와 필름포럼이 있고, 인디스페이스는 중앙극장에, 시네코어도 그 부근에 있을 무렵이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살았던 그 때를 나는 허송세월 기(期)라고 부르는데, 매일같이 저 위에 늘어놓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교보문고에 배깔고 누워 책을 읽었다. 낮에는 중앙극장 옆에 있는 싸구려 커피집에서 커피를 사서 명동성당에 앉아 있었고 낙원상가에서 1500원짜리 국밥으로 배를 채우다 날이 저물면 락커스에서 술을 마셨다. 전화기도 없어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돈도 없어서 늘상 걸어다녔다. 걷다가 공중전화를 보면 전화를 해서 누구를 불러내거나,(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동전을 산처럼 쌓아놓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허송세월이라고 말했지만 그 때는 참 소중했던 시절이다. 얻은 것만 있고 잃은 것은 없이 버린 것만 있는 때. 락커스는 그래서 좋다. 그 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공간들, 소리나 냄새, 마셨던 술이나 사람이 좋은 것.


그렇게 1년쯤 놀고 다시 복학하게 될 때 락커스도 문을 닫고 공사를 시작했다. 셔터에는 '봄이 오면 보자'고 써 있었나. 복학하고 봄이 오고 몇 달쯤 후 락커스를 다시 갔을 땐 내부 인테리어도 매우 멀끔해지고 공간도 더 넓어지고. 그래도 예전만 못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바뀌어야 하고 넓어져야 하고 깨끗해져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지난 것들에 천착하지 않고. 시절은 시절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술집도 내 삶도.



# etc


1.

하지만 락커스는 좀 비쌉니다. 근래엔 편의점에서도 온갖 수입맥주들을 쉽게 살 수 있으니 기네스 한 병에 만원을 받고 필스너우르켈 한 병에 9천원을 받는 락커스는 확실히 비싸요.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으니 다른데서 술을 원껏 마시고 막차로 가거나, 아니면 아껴먹어야 합니다. 락커스에서 술을 먹고싶은만큼 먹었다가 기둥뿌리가 뽑혀본 경험에서 드리는 충심어린 조언입니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기둥뿌리가 하나 없어요.


2.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다 말해놨지만 '나만 알고 싶은 술집'의 기조를 지키기 위해 약도나 정확한 위치 같은 건 공유 안합니다. 그냥 검색하세요. 찾기 엄청 쉬워요. 다만 일요일은 문을 닫습니다. 일요일에 갔다 낭패보지 마시길.


3.

락커스가 문을 닫았다면 그 옆에 '오존'이라는 맥주집도 좋습니다. 이 연재에 끼워줄만큼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아요. 동행인이 에어로스미스보다 림프비즈킷을 더 좋아한다면 오존 쪽이 더 괜찮을 겁니다. 거긴 밥도 팔아요. 맛은 없지만.


4.

늘 그렇듯이 사진은 인터넷 어드메에서 불펌. 그래도 한 장은 직접 찍은 사진임니다. 친구랑 술마시다가, 쟤는 지 사진이 이렇게 쓰이는 줄 모르겠지. 초상권 따위 난 몰라요.ㅋ


5.

스토리지 사이트가 유료화되면서 음악을 올릴 방법이 없네. 기껏해야 유튜브 링크. 



   

       

 


The Doors - Light My Fire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5 한남동 - 개골목


본래 5편은 종로의 락커스를 하려했지만, 뭐 이게 돈받고 하는 일도 아니고 쓰고 싶은 순서야 내 맘이지.ㅋ

요 며칠 학교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그 때 사람들을 계속 만났더니, 한남동을 지나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오고 있으니.


개골목이라는 괴랄스러운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입학도 하기 전이었다. 오래도록 우리 옆집에 살던 형은 우리학교 화학과 96학번이다. 나도 한남동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자 그 형은 제일 처음 내게 "엄마 걱정하시니까 개골목같은데 다니지 말라"고 했다. 그 땐 개골목이 뭐 어디 유명한 술집 이름쯤 되는 줄 알았다. 


그 때 그 형의 충고란 실제로는 술 많이 먹고 다니지 말라는 농담섞인 말이었겠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개골목으로 대변되는 '그 정서'를 조심하라는 선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보게된다. 아무튼 괴랄한 골목이었고 거기에 기생한 괴랄한 삶, 또... 어쨌든. 


# 박제


개골목은 단국대학교 정문에서 한남역 방향으로 술을 찾아 걷기 시작하고 더이상 술을 마시지 않고는 걸을 수 없겠다 싶을 때쯤 나타나는 작은 골목이다. 80년대 영화에나 나올법 한 낡고 허름하고 종종 더러운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저마다 가게들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각 과마다, 무리마다 멋대로 부르는 이름들로 더 많이 불리는. 사실 각각의 무리들마다 가는 집은 거의 정해져 있어서 "개골목에 가자"는 곧 그 집을 가자는 얘기니까 이름같은 게 굳이 필요 없다.


그러니까 개골목은 골목 전체가 마치 하나의 술집처럼 인식되곤 했는데, 그건 개골목이 어떤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면 거꾸로 그렇게 골목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되는 현상이 이같은 문화를 만들어낸 것일 수도. 


아무튼 개골목에는 그 골목에서만 통용되는 '정서'가 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해보라면, 아마 '박제'. 그곳에선 사람도 시간도 공간도 심지어 음식도 박제된다. 머무름. 모든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듯한. 그리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마침내 제대로 썩지도 못하고 사라지거나, 혹은 버려지거나. 박제가 돼 더 오랜 시간을 버텨내지만 결국 색이 바래고 사람들은 잊어가고 외면했던 시간에 두들겨 맞아.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 두 발로 걸어가게 하지 않는다


개골목이라는 이름은 "네 발이 되기 전엔 나갈 수 없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이 얘기를 해준 선배들은 그네들의 선배한테 그렇게 전해들었을 테고. 그 선배들도 뭐 마찬가지겠지. 그게 뭐 중요한가. 어쨌든 정말로 네 발로 기기 전엔 나오기 힘들다. (물론 난 네발로 기어서 나온 적 없다. 내가 바로 개골목 최후의 승자.)


소주는 다른 술집보다 쌌다. 그 때 다른 술집들에서 보통 2500원이었던 거 같은데 여긴 2천원이었다 그 밑이였나. 안주라곤 꼴랑 닭도리탕 하나인데 (벽에 붙여놓은 메뉴판엔 삼겹살이니 부대찌개니 있지만 시켜본 적도 없고 시키면 나올지도 의문이다.) 닭도리탕 국물에 밥까지 볶아먹고도 부족해 냄비를 박박 긁는 주제에 소주를 더 달라고 하면 주인 할머니가 옛다 먹어라하는 표정으로 계란말이를 대자로 부쳐주신다. 그럼 또 소주를 댓병은 더 마시고, 안주가 또 부족해지고 결국 깍두기를 국물까지 퍼먹고 바닥까지 긁어먹는 '악순환'이라 쓰고 '일상'이라 읽는 일이 펼쳐진다. (그래봤자 계란말이를 또 주지는 않는다.)






닭도리탕은 솔직히 맛있지 않았다. 닭을 초벌로 익혀서 기름을 빼거나 육수를 미리 뽑거나 하는 수고 같은 건 애초에 기대도 해선 안되고 그냥 토막낸 생닭과 갖은 채소와 양념을 한 냄비에 넣고 맹물 부어서 끓여준다. 익기까지 시간도 오래걸리고 닭이 익는 동안 감자는 푸석 부서지고 당근은 흐물거리게된다. 누가 먹더라도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맛. 그런데 그걸 그렇게 먹고 다녔다. 사실 맛이 뭐가 중요하겠나. 어차피 두어시간 쯤 지나면 다 토해버릴 것들.ㅋ 개골목 초입 공터에는 온갖 싸움박질 소리와 발악발악 부르는 노래소리 (그건 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악발악이 옳은 표현이다)와 함께 토악질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여간 개골목에서 술을 먹는다는 의미는 "오늘 하굣길에 가볍게 맥주나 한잔 하자"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늘 먹고 죽자, 술마시고 니가 죽건 내가 죽건 나는 책임을 지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내일 아침 안전하게 학생회실에서 눈을 뜰거야"의 의미에 가깝달까. 정말 신기하게도 개골목에서는 아무리 술에 꽐라가 돼도 다음날 아침이면 무사히 학생회실 생활방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래, 신기해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다 나같은 마당쇠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와 땀방울이었음을 그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씨바.) 같이 술마시던 나를 따돌리고 일문과 여학우들하고 개골목에서 놀다가 만취가 돼선 개골목 앞 트럭밑에서 자고 있는 총학생회장을 업고 학생회실까지 옮겨놓은 것도 나였다. (우린 기계과 개강총회 뒷풀이에 있었다. 무려 기계과. 총학생회장 그는 나를 기계과에 버려두고...)  


# 박제된 공동체의 흔적


"네 발로 기어나가야 한다"면서도 그렇게 술들을 퍼 마실 수 있었던 건 그런 노력의 축적이었다. 


"니가 말은 그렇게 해도 날 버리고 가진 않을 거잖아." 


그건 막연한 신뢰감의 표출이었고 그 신뢰가 본심이었든 관성이었든 아니면 허세나 동경 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좀 웃기는 감정이었든 어쨌든 그 때 거기서 같이 술을 마시는 친구들에겐 그런게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학생'이나 '청춘'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집단의 특권이었거나 아니면 강요됐던 그것. 공동체, 유대감, 의리, 낭만 뭐 그런 거.


그래서인가 우리는 거기서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큰소리로. 

주로 민중가요를 개사한 '과가' 같은 거였다. 

같이 있음을 과시하고 동질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개골목엔 여기저기서 피, 심장, 조국, 미제 뭐 이런낱말이 가득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제일 시끄러운건 행정학과 애들이었다. 그네들은 과가로 '동지가'를, 학생회 사회부 애들은 '결전가'를 불렀는데, 그 노래들을 엄청 시끄럽고 결의에 차서 부르는데 술에 취해 혀는 꼬부라진 뭐 늘 그런 웃기는 상태였던 거 같다. 하여튼 어깨동무하고 팔뚝질하면서 동지가를 부르다가 갑자기 막 토하고 울고 업고가고.


그 진상의 나날들. "하지만 같이 진상을 부리는 게 청춘의 낭만이고 특권이잖아"라고 강변하는 듯한 모습.


(우리과 과가는 '조국과 청춘 두번째'를 개사한 노래였다. 이게 원래 엄청 빡쎈데 여성비율이 높은 과 특성상 부르기만 하면 곱고 예쁘게 뽑히는게 문제였다. 나중엔 그게 아예 자리를 잡아 새로운 편곡이 나와버린 느낌. 나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ㅋ)  


그러나 사실 그 때 이미 공동체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었다. 못된 구태만 남은 공동체의 흔적. 

우리는 함께 살기 보다는 각자 살다 가끔 모여 술을 마시는 관계였다. 동지같은 낮부끄런 말은 꺼내본 적도 없다. 노래를 불렀지만, 그냥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가졌던 환상, 선배들이 강요한 유대감, 마뜩치 않게 여겼지만 억울해서 나도 후배에게 강요했던 그것. 그것들을 어떻게든 보위하려 했던 감정이 모이는 곳이었다. 우리의 개골목은. 환상을 지켜내거나, 아니면 그 환상에 잠깐만 들어가 보거나. 어쨌든 공동체가 존재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 있었다. 그 환상을 가진 우리들은 개골목 밖에선 박제된 이들이었고, 개골목은 박제를 잠깐 생명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 그 어줍지않은 환상


낡고 허름하고 더러운데다 맛도 없는 개골목을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건 그 아주 오래된 대학생, 청춘의 모습을 닮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저기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면 마치 이제는 지나가버린 그 시절을 우리에게로 소환해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 같은 거였다.


2천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우리는 (적어도 나는) 늘 그런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 시달렸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들처럼 조국통일이나 노동해방을 외치기엔 어딘가 쑥쓰러웠고,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들이 열광했던 문화적 풍요도 없었다. 김연수는 뉴트롤즈와 첩혈쌍웅과 개같은 날의 오후에 열광하던 세대를 '나의 세대'라고 말하더라만, 우리에겐 함께 열광하고 공유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들지 않는 철없는 어린이가 되거나, 빨리 나이들어버린 애늙은이가 됐다. 어느 쪽이든 시간의 흐름을 잡아채고 머무는 박제의 상태.


# 버려지는 박제


철거되거나 이사간 집에서 나온 쓰레기 무더기를 보면 가끔 박제들이 섞여있다. 한 때는 살아있었을, 그 이후에도 어느 부잣집 서재에서 자태를 뽐냈을. 하지만 버려진 박제는 흉물스럽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썩어야 할 때 썩지 못한. 두 눈을 부릅뜨고 쓰레기 더미 안에 쳐박힌.


시절을 고이 보내지 못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박제가 돼버린 것들은 흉물스럽고 딱 그만큼 안쓰럽다. 어떤 욕심이 그것들을 썩어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나.


겪어보지도 못한 지난 시절을 그저 말만 듣고 그리워했던 건 시대를 박제로 만들게 한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생명도 시간도 세계는 그렇게 흐르고 변화하고 썩고 다시 태어나는 게 순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고집스럽게 낡게된다. 


개골목에서 보냈던 스무살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는 건 그 시절의 어리석고 소중했던 마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지나쳐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개골목이 있던 자리는 이제 비싼 수입 오토바이 매장과 뭐가들어설지 아직 모르는 공사장으로 변했다. 학교가 옮겨간 후에도 2년정도 더 자리를 지키던 몇몇 가게들도 이제 없어졌다. 최후까지 남아있던 개골목 할머니집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 깍두기에 곰팡이가 슬어있는 걸 보고 더이상 개골목을 찾지 않았다. 하긴 그 무렵 할머니집도 문을 닫았다. 음식도 가게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게 마련이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사랑. 깍두기는 익어야 맛있지만 곰팡이가 슬면 버려야 한다.


# 여담


1. 개골목에서 술마신 얘기를 이렇게 거창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지껄였지만, 이건 내 감상일 따름이다. 개골목에 얽힌 추억은 개골목을 들락거린 사람 수만큼 많을 테다. 그냥 난 그랬다고요.


2. 개골목에 얽힌 더럽고 야한 얘기들도 많은데, 차마 쓸 수가 없다. 그거 쓰면 거의 일베감. 


3.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해 어디어디 학회나 동아리의 단체손님을 독점하던 한남복집은 96년 H의장 정명기 의장의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다. 그래서 한동안 집회 뒷풀이 장소로 많이 쓰였다고. 하지만 내가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다. 


4. 오늘은 닭도리탕에 소주를 마시겠다.  


5. 사진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그냥 퍼왔다. 너무 예전일인가, 사진 하나 없네.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4 종로 - 유진식당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퇴임을 한 후 나는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했다. ‘탐사’라고 하는 까닭은 나의 발걸음이 내 안에 고인 어떤 질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하는 동시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갑자기 고독이 밀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이 뒤따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섰다."

오근재 - '퇴적공간'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내려 인사동 방향으로 걷다보면 낡고 허름한 해장국 집들을 잔뜩 볼 수 있다. 1500원에서 비싸야 3000원 남짓한 해장국 집들에는 할아버지들이 가득차 있다. 조금만 더 가면 길거리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바둑과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훈수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있다. 



종각 지하철역이나 종로2가 버스정류장에 내려 낙원상가 방향으로 걸어오면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 보이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인사동에 관광 온 젊은 외국인들과 낙원상가에 악기를 사러온 뮤지션들, 서울 도심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유진식당은 그 사이 한가운데에 있다. 





탑골공원에 모여앉은 노인들을 자본주의 시대의 퇴적물로 이해하건, 낙원상가를 찾은 젊은 뮤지션들을 낭만과 미래가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예쁜 꿈으로 치장하건 그들 모두는 배가 고프고 돈이 없다.


그래서 유진식당의 미덕은 '싼 가격'이다. 사실 그게 거의 가장 완벽하면서도 유일한 미덕.


# 장정 3명이 아무리 흥청망청 먹어도 5만원


가장 최근의 유진식당에서 주문한 내역을 떠올려보니,


[소수육 2접시 + 녹두부침 1접시 + 냉면 곱빼기 2그릇 + 소주 2 병]


이렇게 해서 45,000원이다. 





쥐꼬리 같은 연금이나 자식들에게 눈치받아 받은 쥐똥만한 용돈을 쥔 노인들이 모여앉아 

설렁탕 한그릇에 막걸리 한사발. 유진식당의 단골들이란 그런 노인들이니 이보다 비싸질 수는 없을게다. 

(냉면 가격은 비교적 최근에 올랐다. 얼마 전까지는 냉면도 4천원이었다.) 


장정 둘이 앉아 배가 터질 것 같이 먹고 술도 알딸딸 올랐건만 고작 5만원도 나오지 않는 것. 이것만한 미덕이 어디 있을까. 요즘 냉면집이라고 하는 것들이 죄다 한 그릇에 만 몇천원씩 받아가니까, 냉면에 만두 한접시만 먹어도 5만원 돈은 훌쩍 넘어버리기 십상이다. 


(며칠 전에 갔던 강남 평양면옥에서 냉면 2그릇, 만두 한접시를 먹고 똑같은 돈을 냈다. 4만 5천원.)


사실 유진식당의 냉면맛은 그렇게까지 훌륭하지 않다.





육수는 슴슴한 맛 대신에 진하고, 높은 염도가 그대로 느껴지는 편이고, 육향도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다. 

면도 메밀 함량이 조금 부족해 평양냉면이라기엔 면이 탱탱한 편이다. 자고로 냉면은 입술로도 끊어질만큼 부드러워야.ㅋ


하지만 가성비로만 따지면 서울시내 모든 냉면집 중 으뜸. 7천원에 이만큼 맛있는데 사실 이러니 저러니 토다는 것도 나쁜 짓인듯. 게다가 소주와 막걸리가 2천원이라니. 


유진식당은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충분히 즐기기 위해선 낮부터 앉아 놀아야 한다. 

그야말로 낮술 특화 업체.



# 삼각주


사실 이정도 가성비와 맛을 담보해내는 가게들은 꽤 많다. 아.. 꽤는 아니고, 그래도 좀 있다..ㅋ


유진식당을 좋아하게 된 건 처음으로 식당에 갔던 날의 풍경 때문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애 하나가 냉면에 소주를 먹고 있었다.

수염은 길렀다기 보다는 자르지 않은 모양이어서 자세히 보면 꽤 앳된 얼굴이었다. 잘 봐줘여 스물 예닐곱. 야상잠바에는 땟국물이 막 줄줄 흐르고 있었고, 신발도 다 떨어진 컨버스 단화였다.


그 남자애가 소주를 먹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냉면은 정말 맛있게 먹더라.


바로 옆 테이블엔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어린 남자애가 소리내 울기 시작하면 꼰대적 마인드로다가 잔소리나 시덥잖은 위로라도 할법한 상황이었지만 늘상 보는 일이라는 듯이 슬쩍 한 번 흘겨보고는 자기 설렁탕에 집중하더라. 니가 울건 말건 나는 설렁탕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듯.


울고있던 남자애도 그 남자애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던 할아버지도 사연은 모른다. 


그 날 나와 친구들은 술을 마시면서 그 남자애는 기타를 팔았을 거라는 둥, 그 돈으로 평소에 좋아하던 냉면을 먹고 있는 거라는 둥, 할아버지는 옛날에 이미 기타를 팔아본 경험이 있을 거라는 둥 온갖 소설을 짜내봤지만 몽땅 다 지루한 클리셰고. 


다만 그 기묘한 대비. 눈물을 흘리는 젊음과 그걸 이해해서인지, 무감해서인지 모를 노인의 무관심.


그 둘이 대비돼 보이기도 묘하게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장소.

퇴적물들이 모여 이룬 일종의 삼각주 같은 느낌. 


# 퇴적됐거나, 퇴적되고 있거나, 퇴적될 것이거나


오근재는 탑골공원을 '퇴적공간'이라고 불렀다.

공인된 조직에서 일정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 


우리는 종종 '노인'을 나이든 사람.으로 규정하지만, 사실 나이듬이란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다.

"더이상 당신은 우리사회에 필요없어"라는 표딱지 같은 거.


그래서 탑골공원 언저리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 나이를 떠나서 노인일지 모른다. 더이상 사회의 호명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 일정한 수입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 공인된 조직에 편입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 지금 우리는 급류에 휩쓸려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언젠가 하류에 모여 결국 퇴적될 모래더미. 그러니까 퇴적되거나 퇴적되고 있거나 언젠가는 퇴적될. 그렇게 모인 모래더미들이 쌓여있는 삼각주에서 마침내 만날. 


그 때가 되면 유진식당에서 싸구려 냉면과 소주를 놓고 만납시다. 

하지만 지난 시절의 영광을 얘기하진 말아요.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3 - 피맛골, 전봇대집



게을러서 블로그질을 하겠냐 싶지만 그래도 술집 유랑기는 꼭 쓰겠단 다짐을 쭉 해오긴 했다. 정말이다.

'연간'을 빙자해 게으름을 포장하려 했지만 2편이 올라온지 벌써 2년이네.ㅋ 하지만 어쨌든, 3편.





고갈비집, 전봇대집, 봇대집, 간판없는 집 등등등. 저마다 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이 집의 진짜 이름은 '와사등'이라고 한다. 그래봤자 이 이름도 전해지는 이름이다. 주인 할머니도 이름에는 크게 연연치 않는 모양새다. 언젠가 진짜 이름을 물었더니 할머니도 "니 맘대로 부르라"하셨다. 종종 이곳을 찾는 친구들과는 고갈비집, 내지는 '카드되는 막걸리집'으로 통한다. 처음 여길 찾은 친구들은 외관만 보고 카드 결제가 안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능숙하게 카드를 긁는 주인 할머니가 인상적이었나 보다.ㅋ


60년째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해오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그 기억도 저마다다. 60년대, 산업화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겐 고된 하루의 끄트머리에 찾는 대폿집으로. 7,80년대 거리의 뜨거움을 견뎌낸 이들에겐 숨죽여 부르던 노래가 새겨진 곳으로, 낙원상가의 가난하지만 즐거운 예술가들에겐 그들만의 아지트로, 나같은 애늙은이 한량들에겐 아버지와 형들의 이야기 속 그곳으로. 뭐 저마다. 제각각. 제 맘대로.





고갈비는 본래 잘 구워낸 고등어를 일컫는 말이지만, 고등어가 뭔지도 모르던 서울의 촌놈들은 고등어와 비슷하게 생긴 이면수어를 고갈비라고 부른다.(고 바닷가 출신 외할머니가 어릴 때 말씀해 주셨다) 고갈비집이란 이름에 걸맞게 가게에 들어가면 인원수에 맞춰 적당히 고갈비로 불리는 이면수와 막걸리를 내어주신다. 맛은 뭐 그냥 이면수어 맛이다. 바닷가에선 그냥 버리는 생선이라는데 이면수가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겠나. 막걸리도 사실 그냥 그렇다. 워낙에 막걸리를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사이다 풀어놓은 듯 달달하기만 한 막걸리가 그저 그렇다.만.


그래도 누군가 '술집'을 묻는다면 아마 1번으로 대답할 곳은 여기겠다. 그 이유는 아마 내가 생각하는 술집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양이기 때문도 있을 것이고, 종로 서울 한복판이라는 지리적 이점도 있을 것이고, 스무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여기서 몰래 마시던 술맛의 알싸함도 있겠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을 때도 여길 찾았고, 처음으로 데모에 따라나왔다가 똘망똘망 되바라진 질문을 던지던 후배들에게 잘난 체 설교하던 곳도 여기였다. 화장실엔 토악질의 기억이, 덧쓰이다 못해 이제는 읽지도 못할 낙서들 어디 사이에는 어느 부끄런 고백이 남아있기도 하다.


(어느 날, 술을 마실 때 내가 여길 가자고 하면 제가 그 쪽을 되게 맘에 들어하고 있다는 뜻임미다.ㅋ)



홍상수의 영화에도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여기가 눈에 익은 이들도 많다.


북촌방향에서 유준상이 혼자 술을 마시던 가게, 오 수정에서 이은주가 술을 마시던 곳이 여기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이 없다. 감독 중에서 가장 술마시고 싶게 만드는, 그래서 아무래도 본인이 술을 가장 좋아할 것 같은 감독도 홍상수라고 생각하는데. 그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인정받은 술집이라는 거다.ㅋ 





몇 년 전이더라 불이 나서 문 앞의 전봇대는 없어졌다. 화재 이후 공사를 해서 입구만은 넓고 훤해졌다. 

막걸리를 담아내던 양푼도 좀 깨끗해진 것 같고, 막걸리 맛도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다고 한다.

오래된 가게들의 오래된 단골들은 이런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하다. 그건 기억 속의 '원형'을 혼자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겠다. 


시간이 만든 주름 틈새에 켜켜이 쌓인 사연들은 저마다. 

그 주름을 가로지르는 또 한 번의 시간들이 새롭게 쌓은 또 저마다의 이야기.

그렇게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오래된 장소들을 만들고 쌓이고.


다만 그 주름 어느 한 귀퉁이에 내 이야기와 시간과 노래가 남았다면, 그깟 욕심이야 뭐.


비가 아직도 추적추적 오는데, 술을 마시러 가야겠다.


+

사진은 죄다 어디서 훔쳐온 겁니다. 

술 마시느라 바빠서 사진을 찍은 적이 없슴니다.ㅋ


++

이제 유랑기를 꼬박꼬박 올리겠습니다.

4편은 와사등 길건너 파고다 공원 옆에 유진식당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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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술집의 기본 정보 메뉴판입니다. 

위치정보는.. 검색하면 나와요.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2 - 서교동, 묘한술책

술집유랑기를 써봐야지.란 마음을 먹고 첫 번째로 포스팅한지 1년이 넘었으니 이 게으른 연재는 연간인 것으로...ㅎ


어쨌든 2편 시작.



어느 날인가 여지없이 할랑할랑 술마실 집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2010년의 가을 쯤이었던 것 같다. (2009년일 수도 있고) 세상 모든 일에 까칠한 편이지만 술 마실 집을 고르는데는 특히 그 까칠함을 배로 발휘하는 더러운 성질을 보유했기 때문에 엉덩이 붙일 자리를 찾기 위해 한두시간쯤 길바닥을 헤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는 그 날도 일행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기억에, 묘한술책은 조금 촌스럽고 무성의한 꼬마전구 같은 것들로 창문을 칭칭 감아놓고 쪼그만 간판만 하나 겨우 붙여놓은 채 골목안에 숨어있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유명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애정이 식어버리는 변태적 마이너 감수성의 소유자인 '우리'(나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다..끼리끼리라고 하지않나)는 골목 안에, 그것도 이층에, 굉장히 작게, 심지어 어두컴컴하게, 남들은 잘 안갈 것 같은 분위기인 그곳을 굉장히 맘에 들어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것들은 다분한 오덕의 냄새, 만화책, 내 엉덩이엔 너무 작아보이는 의자들, 그리고 묘하게 눈에 띄던 체게바라.같은 이름.




언젠가 꼭 소개하고 싶지만 없어져서 아쉬운 '작은상자'같은 가게를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분명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뭔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손님이 들어왔어도 과한친절을 보이지 않고 자기 자리의 술자리를 지켜내려 노력하는 주인의 모습..이랄까..ㅋ


건네준 메뉴판도 좋았다. 그러니까 세트이름 같은 아이디어를 말함인데, 국산맥주 세트인 자랑스런 한국인이나 볼셰비키 메롱메롱(은 보드카 세트였던가), 먹고 죽자는 세트인 모태꽐라..뭐 이런 이름들. 내가 또 이런 소소한 아이디어에 홀딱 반하는 디테일한 남자임..ㅋ


여하간, 첫 방문에 매우 호감이었던 이 곳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찾으려했을 때, 묘한 술책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엔 무슨 네일샵인가가 들어서 있더라. 그리하여 그날 밤의 묘한 술책은 우라시마 타로가 다녀온 용궁이었던 것인가, 내가 육관대사를 만난 구운몽의 성진이 된 것인가, 이 허망한 인생은 꿈인지 나비가 나인지 하여튼 뭐. 그렇게 "묘한술책이라는 괜찮은 곳을 찾았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인지 그날 밤이 꿈이었던 것인지..."같은 신비로운 체험 수기를 둘러대기 수 차례, 기어이 어느 길모퉁이에서 묘한술책을 다시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불까지 꺼져있는 이 작은 간판을 매의 눈으로 집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당연히 그날도 어둑한 밤, "지훈이가 술집은 잘 찾음"같은 '묘한'펌프질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눈알을 굴리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그 작은 간판을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심지어 너무 늦은 시간이었던 탓인지 간판은 불이 꺼져 어두웠다. 게다가 난 양쪽 눈 모두 근시, 난시, 원시를 패스해 값비싼 초고굴절비구면 렌즈를 착용한 환자의 안구를 보유한 남자인데.


불꺼진 간판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스무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묘한술책을 찾았다. 내가 스무시간동안 묘한술책가서 술마실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진짜다.. 그 땐 그런 초잉여킹 시절이었다.) 



묘한술책은 스페셜한 위크엔드를 더욱 엣지있게 보낼 수있게끔 보다 인텔리전스하고 아방가르드하게 리뉴얼돼있었고  이 인테리어는 그 어떤 미셀러니도 놓치지 않을만큼 센서티브하고 트렌디했다. 아키하바라 본토에서 건너온 듯한 피규어들과 브릿팝의 시크한 멜로디들이 내츄럴하게 콜라보레이트 되면서 페르시안 고양이의 엘레강스하고 시크한 워킹이 조화를 이룬 파티피플의 핫플레이스로 탈바꿈 돼 있었다....(는 보그병신체를 좀 써보고 싶었지만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니 일단 패스ㅋ)

묘한술책에 들었을 때, 벽엔 여전히 체게바라가 적혀있었고, 주인 내외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으나 거북한 친절을 내세우며 과하게 맞이하지는 않는 매력을 뿜어냈으며, 한켠엔 커트코베인과 인코그니토의 브로마이드, 쌓여있는 책들과 피규어, 은은한 담배냄새, 그리고 고양이 수 마리(아직도 고양이가 정확히 몇 마리인지 모르겠다... 볼 때마다 걔가 걔같고...;;)





묘한술책에 가면 늘 국산맥주세트를 먹게된다. 내가 가난해서 그런게 아니다. 난 원래 국산맥주를 좋아한다. 엉엉엉.
여하튼 맥주를 시켜놓고 흥아흥아 놀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손님이 없으면 리퀘스트 페이뻐를 적어 주인언니에게 전달하면 주인언니 뜻대로 이런저런 것들을 골라서 틀어주시기도 했다. (손님이 없고 주인언니 기분이 상쾌해 보여야 한다. 한 번은 손님 많다고 거절당한 적도 있다. 무지 민망했다) 종종 함께 가는 선배 김 모 씨는 듀스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는 막장 진상을 부렸으나 약간, 아주 약간 귀여워서 주인언니의 용서를 받고 지금도 그를 볼때면 그 댄스를 이야기하곤 하시더라.

묘한술책에 묘한 호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언젠가 주인언니가 우리 자리에 오셔서 서명지를 내민적이 있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 서명지였는데, 그 때가 마침 강정마을에 있다가 올라온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당시에 여기저기 술집에서는 삼성카드 받지 않는 불매운동도 막 일어나고 그럴 때였는데. 어쩐지 강정의 노력이 멀리 서울에서도 그것도 이렇게 일상적인 곳에 퍼져가고 있다는 마음이 들어 고맙고 좋고 흐뭇하고 그랬다. 더 자주 와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찍어둔 사진이 있나 뒤적거려보는데, 묘한술책은 아주 한정적인 사람들하고만 함께 갔던 것 같아. 그건 마치 서랍안에 숨겨놓은 내 필살 아이템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몰래 보여주는 그런 느낌. 사실 알고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말이지. 그러니까 묘한술책은 내 비장의 장소.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집인데 말이지.ㅋ

어느 날인가 또 묘한술책에 같이 가는 친구가 새로 생긴다면 좋겠어.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테마별로 사람별로, 날씨별로 가게되는 공간이 달라지는데 말이지. 이를테면 비가 주륵주륵 오는 날, 후배들과 함께 있다면 광장시장으로 가게되고 맘이 있는 그녀와 함께 있다면 고즈넉한 전통주 가게로 가는 것처럼 말이지. 묘한술책은 아마 더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와 함께가는 곳.이란 느낌적인 느낌임니다. 어쩐지 긴밀하거든 거기는.

그러니까 이 유랑기의 애초의 목적대로 유용한 정보를 드리자면, 묘한 술책으로 가서 그녀와 가까워지세요. 비싼 메뉴를 잔뜩 시키시구요, 결제는 일시불로. 물론 이론과 실제는 별개임니다.


덧,
며칠 전에 갔더니 어느 새 금연이 됐더라. 은은한 담배연기와 담배냄새는 사라졌어. 강호의 낭만이 땅에 떨어졌도다. 커트코베인도 체게바라도 모두 담배를 물고있는데 말이지. 금연을 하려면 차라리 이주일 사진을 걸어놓으라고. "국민여러분 꼭 담배 끊으세요" 엉엉엉

덧2,
사진은 여기저기 블로그에서 가져왔음니.. 맨 마지막은 정덤양과 함께 갔을 떄 찍으신..

덧3,
다시 읽어보니 너무 무성의하지만, 뭐 어쩔 수 없슴니다..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걸요..ㅋ
다음 3편은 연간이므로 내년 봄에나 나와야겠지만, 며칠 전 백수가 됐으므로 흥청망청 술마시다 며칠내로 올라올 수도 있슴니다..ㅋ

노래는 트래비스. 여기가 브릿팝의 시크한 멜로디들이 넘쳐나는 곳이다..ㅋ
 

Travis - Closer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1 - 신촌, 인간실격패 알고보니 부전승


블로그의 가장 큰 미덕은 알찬 정보의 손쉬운 전달이라는데
내 블로그는 그동안(고삐리때 쓰던 블로그인부터 싸이월드와 이글루스를 거치는 동안 내도록) 허랑방탕한 자학일기와 누구나 아는 시시껍절한 정치얘기, 되도않는 내 멋대로의 영화얘기가 주를 이뤘다. 그건 인터넷 클릭질 몇 번으로 얻을 수 있는 남의 얘기들이거나, 아니면 남이 관심없는 얘기들. 그래서 오랫동안 기획했던 정보전달의 글쓰기, 술집 유랑기.를 연재하기로 맘 먹었다.('오랜 기획'은 뻥이다.ㅋ 어제 술마시다 찍은 사진 몇 장에서 불현듯 떠오른 기획이라 얼마나 갈지는 나도 모른다.ㅋ)

이렇다할 전공지식도 없고, 그렇다고 어느 한분야에 대한 덕질도 변변치 못하여 할 수 있는거라곤 주야장창 찾아다니는 술집 유랑기뿐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술집 고르는 솜씨는 좀 매의 눈이다. 내가 추천하는 술집에서 시덥잖은 반응을 보인 사람은 거의 없다능. 이건 팩트다.ㅎ (사실 이것도 주변에 취향이 비슷한 사람만 모여 있어서 그런거임.ㅋ)

어쨌든 연재 그 첫번째의 영광을 차지한 곳은 신촌의 '인간실격패 알고보니 부전승'
오랫동안 단골로 발길을 하던 곳 중에서 심사숙고끝에 골라 연재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으나 말했다시피 어제 술먹다 찍은 사진때문에 급조된 기획이므로 그냥 어제 술마신 집부터 시작이다.ㅋ 그렇다고 마구잡이 함부로 골라 시작하는건 아니다. 여기 되게 좋다.



가게 전경이다.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는 그대로 두고 고개만 돌려 찍은 무성의한 사진이지만 사실 저게 가게의 전부다.



지금은 사라진 신촌의 기찻길을 즐겨 찾는다. 이젠 많이 줄었지만 기찻길을 따라 늘어섰던 고깃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근처의 헌책방, '숨어있는 책'에서 남들이 20년전에나 읽었을 법한 책들을 사모으곤 한다.(사모을 뿐 읽지는 않는다는게 함정.ㅋ)


그 날도 그렇게 헌책방에서 시간을 떼우고 나서는 중이었다. 늘 뭐하는 곳인지 몰라 관심도 두지 않던 골목 한켠의 건물에 왠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명의는 이외수 선생이었는데 내용인즉슨

"세상엔 거지와 거장이 있다. 예전엔 거지도 거장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엔 거지만 있고 거장은 없다. 거장이 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거지의 단계를 지날 수밖에 없는데, 예전엔 이 아직 거장이 되지못한 거지에게 공술과 외상술을 주던 술집이 빈번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채 거장이 되지 못한 거지에게 술과 음식을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기형도나 고흐쯤으로 여기는 젊은 예술가를 빙자한 청년루저들이 봤으면 눈을 희번덕거렸을 그 글줄에 나도 눈을 희번덕거리다 가게로 들어섰다. 그게 이 곳과의 첫 조우.



뒷모습만 보이는 파마머리가 사장님이다. 저 테이블에도 뭔가 악기를 가져가서 연주해주시는 중이었다.



입구부터 시끌시끌하더니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별반 신경쓰지 않는다. 조금 지나서야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과 정체모를 악기를 두드리던 사장님이 나타나선 술은 알아서 꺼내 먹고, 안주는 그날 그날 가능한 안주 한가지만 있으니 먹으려면 먹고 말라면 말라고 한다. 영 마땅치 않으면 시켜 먹거나 사다 먹어도 되고,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그냥 앉아서 놀다가 가도 된단다.

이거 문자로 옮겨놓고나니 엄청 불친절하고 거만한 그림이 그려지지만 전혀 아니다. 저건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어투였고 불친절보단 '편할대로 거리낄 것 없이 놀다가세요'의 뉘앙스였다. 옳커니.


술을 마시고 있자니 사장님이 뭔가를 들고 다가와선 말을 건다. 그는 음악치료사로 일을 하는 뮤지션이고 이 공간은 낮엔 작업실로, 밤에는 술집이 되는 곳이란다. 그러면서 연주해주는 이름모를 악기. 네팔에서(티벳이었나) 건너왔다는 그 악기는 집에 손님이 오면 환영하는 의미로 연주해주는 악기란다. 그리고는 밥그릇 모양이지만 굉장한 소리를 내던 악기와, 가야금을 닮았지만 전혀 다른 소리가 나던 악기, 실로폰을 닮았지만 역시 전혀 다른 소리가 나는 악기까지 보여주고 연주해준다. 아주 신났다.(내가 신난건지, 사장님이 신난건지는 밝히지 않겠음ㅋ)


입구현판이다. 치밀한 스토킹짓으로 사장님 블로그를 찾아내서 말없이 훔쳐왔다.ㅋ 하지만 예상컨데 아마 사장님도 이 블로그를 발견해낼 것 같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응?


이런저런 텍스트가 여기저기에 붙어있다. 온갖 말들이 하고자 하는 단 한마디는 좀 더 편하게, 맘대로, 자유롭게.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규칙. 그것이 서로가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통제하고 재단하고 규격화시키려는 꼰대들의 규칙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비껴가려는, 사실 술도 그래서 마시는 거잖아. 일탈. 먹지말라니까 더 먹고 싶어지는게 술과 담배인건데. 어쩌면 이렇게 거창하게 일탈이니 자유니 하는 진부한 말들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공간은 아니구요"라고 그는 말할지 모르겠다(처음 갔을때 그가 한 말 그대로다.기대속에 들어왔다니 이렇게 말했다) 그냥 놀자고 만든 공간이지만, 사실 그 '그냥'이 중요한거 아닌가. '그냥'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그냥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상은 인간실격패를 주겠지만, 그건 사실 알고보면 부전승.ㅋ

다음 덤벼라, 계속 그냥 살아주마.ㅋ





같이 갔던 후배들. 초상권따위 난 몰라요.




++
아, 앞으로 이 연재엔 공간에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 노래를 하나씩 붙여줘야겠다.
(길게 주절거릴 것도 없이 오토플레이 시켜놓으면 페이지를 보자마자 노래가 나오겠지?ㅋ)

 
 

절룩거리네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