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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올해의 영화/음반 결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2019년 결산.

의미도 없는 결산인데 순위 같은 건 당연히 없습니다. 

가나다 순으로 정렬할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서. 

그저 먼저 생각난 순서입니다. 먼저 생각난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죠.  

 

 

 

 

<하이 라이프> – 클레르 드니

 

 

우주의 끝, 해왕성까지 가서 고작 아버지를 찾아낸 <애드 아스트라>보다는 어딘지도 모를 철저한 고립 속에서 서로 다른 우주를 공유하고 그것이 관계 맺으며 공존하는 삶을 ‘견뎌내는’ <아이 라이프>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냉장고처럼 생긴 우주선, 섹스는커녕 어떤 관계맺기조차 금지된 밀폐공간에서, 서로를 도구로만 인식하도록 강요하는 ‘질서’와 그 질서의 고통이 주는 ‘최후의 유혹’마저 견뎌내고 우리는 서로에게 충실하고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어쩌면 ‘우주선’과 우주선의 주인‘, 그러니까 일종의 신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터부‘를 지켜내는 일이 아닐까. 몬테와 윌로가 건너간 사건 지평선 너머는 더 행복한 우주였으면 좋겠다. 

클레르 드니의 영화를 몰랐는데, 어쩌다 주워들은 이름과 이 영화로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의 영화들을 차근차근 찾아봐야지.

 

 

<벌새> - 김보라

 

모든 것은 모두에게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기억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응시’일 뿐이다. 확실한 실체라는 것은 어차피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고 그 ‘봄’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벌새>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고작 중2짜리 여자애’의 우주가 가장 거대한 우주가 되는 서사라는 점이다. 외계생명의 침공에서 지구쯤은 구해줘야, 못해도 테러리스트들의 핵공격에서 인구 1천만의 도시쯤은 구해줘야 성립되는 줄 알았던 ‘영웅서사’가 (생각해보니 영웅의 ‘웅’자는 수컷 웅자구나) 가장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이야기에서 구현된다는 것. 단절과 죽음, 불안은 성수대교의 붕괴와 김일성의 죽음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은 사실 다르지 않으며 서로 통하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영지 선생님’을 떠올려 봤다. 그래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 순간들이 있었다.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말해주던 선생님, 천천히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들, 책을 주고 영화를 보여주던 선배들. 좋아한다고 신뢰한다고 말해주던 후배들. 모두가 영지선생님이었을테다.   

 

  <엑시트> - 이상근

 

엑시트만 보면 행안부 재난안전관리본부의 안전지침을 모두 알 수 있다. 좀 웃긴 얘기지만, ‘따따따 따아 따아 따따따따’를 온갖 안전교육이 알려줘 봤자 용남과 의주가 간절하게 외치는 한컷의 힘을 이길 수 없다. 

두시간 동안 불쾌한 장면 하나 없이, 억지스럽거나 과잉된 감정 없이 재난을 ‘그럴싸하게 있을법한’ 재주로 극복해가는 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전개된다. 올 해의 오락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임윤아. 가장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의 화신. 미의 정언명령. 아이돌 출신 배우 중 가장 발군의 연기력과 관객동원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음.   

 

<암전> - 김진원

 

장르에 대한 애정, 어쩌면 영화나, 이야기. 어쨌든 창작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모두에게 도사리는 공포. 그런 것들이 싫지 않고 다소 뻔하고 흔한 괴담 스토리를 싫어하지 않아서. (난 초등학교 때 우리학교 지하창고에 유관순 누나가 한 발엔 양말을 한 발엔 버선을 신고 있는 걸 실제로 봤다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특히 특출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광기는 필수적인 요소다. 차라리 보편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삶의 모든 일이라는 것이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는 창작자이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일말의 광기는 필수다. 

장르영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억지스럽지않게 욕심내지 않고 영화를 만들면 아마 <암전>이 나오는 것 같다. 쓸데없는 공포의 효과를 넣지 않고, 과장스러운 괴기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공포란 원래 높은 볼륨에서 오는 게 아니다.  

(서예지라는 배우는 참 흥미롭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선 어쩜 이렇게 잘하나 싶다가도 어떤 작품에선 또 너무 엉망진창이기도 해서. 작품을 타는 배우란 어떤 의미인가. 이 영화에선 대단히 잘해서 깜짝 놀란 쪽.) 

 

<어벤져스 앤드게임> - 마블

 

감독이름 보다. MCU의 일단락인 이 영화는 마블의 모든 사람들과 그 영화를 10년동안 지켜 본 우리가 만들어낸 영화다. 마블의 영화를 사랑해 온 모두에게 어벤져스가 전하는 가장 행복한 작별인사.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어벤져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사실 그동안 견지해온 공식입장이라면 헐크나 스파이더맨을 이야기해야겠지만 실은 아이언맨이 가장 좋아”라고 대답했다. 아이언맨, 3000만큼 사랑해.  

 

<어쩌다 룸메이트> - 소륜

 

현지 제목은 <초시공동거>. 2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싸구려 맨션에 살던 두 주인공의 집이 갑자기 한 공간으로 포개진다. 누가 문을 여는 지에 따라 바깥세상은 비 내리는 2018년이다가, 해가 쨍쨍한 1999년이 되기도 한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이 한 공간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사실 매우 허술한 플롯이고, 온갖 타임슬립 드라마들에서 한번씩은 봤던 설정들이지만, 매우매우 귀여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후 가장 흐뭇하게 본 타임글립 영화였다. 적당한 오글오글. 적당한 몽글몽글. 흔들리는 98년에서 니 아이폰 벨소리가 들려온 거야.  

 

<미성년> - 김윤석

 

일종의 ‘캐릭터 쇼’ 같다. 영화 전체의 짜임새 있는 플롯보다는 인물들의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힘. 그건 캐릭터 하나하나에게 영화가 쏟는 애정의 힘이 근원이겠다. 어느 캐릭터도 밉지 않다. 범인도 없다. (김윤석이 연기하는 아빠가 그나마 그에 가깝겠지만, 실은 이 영화 전체에서 아빠는 별로 중요한 역할이 아니다.) 영화 평이 대부분 ‘배우’의 연기를 상찬하는 내용으로 가득한데, 당연히 좋은 배우들 (염정아 언니야 늘 그랬듯 대단하지만 문득 새로운 발견은 김소진. 최근 몇 년간 드문드문 발견돼 화제가 된 ‘어리지 않은 여성배우’의 다음 차례는 이제 김소진의 차례일 듯)의 연기가 돋보이지만, 그보다는 그 배우들이 연기해낸 캐릭터 자체가 갖는 힘이기도 하겠다. 그를 표현하는데는 배우출신 감독의 좋은 연기 디렉팅도 있었을 것 같고. 

영화는 오롯이 여성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다. 그건 그동안 마초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여성혐오적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전력도 있는) 커리어를 만들어온 김윤석의 반성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의 영화라기 보다는 마초 남성의 노력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무튼 재능많고 잘하는 ‘영화인’ 김윤석의 성공적인 장편 데뷔작. 

 

 

<가버나움> - 나딘 라바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하며 회개를 말씀하셨지만,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 예언했고 가버나움은 멸망했다. 

베이루트. 빈곤과 착취, 폭력이 버무려진 가버나움. 실은 거기 뿐일까. 가버나움이. 12살(로 추정되는) 자인의 삶은 어쩌면 예수의 삶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질 수 있는 것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려는 삶. 무거운 타인을 조악한 수레에 싣고 기꺼기 걸어가려는 삶. 그리고 마침내 그 벽에서 ‘자기가 태어난 이유’에 대해 묻는 과정.

예수의 삶은 성자의 삶이라기 보다는 인간적 삶의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12살로 추정되는 자인의 삶이라는 것이 실은 가버나움에 사는 우리가 복원해야 할 인간적 삶의 근원 아닐까. 이대로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가버나움도 멸망하는 것은 아닐까. 

 

<얼굴들> - 이강현

 

<얼굴들>은 가장 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극적이지 않으니 서사에는 개연성이 없고, 갈등의 고조와 절정이나 해소가 없고 원인과 결과도 없다. 아니다, 없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얼굴들에는 저마다의 서사와 개연성과 목소리와 절정과 분노와 슬픔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것. 여백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왜 다를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들의 중첩을 이야기라고만 여긴다면 <얼굴들>은 최악의 영화다. 다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의 통창 너머 길 건너에서 걸어가고 있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남자의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구기지 않고 그 얼굴 자체를 보거나, 그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 공간에 실은 무엇이든 있을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얼굴들>은 근래 나온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극적인 영화일 수 있겠다.

<지구 최후의 밤> - 비간

 

올해 어떤 영화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는데, ‘영화’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마 <지구 최후의 밤>이 될 것 같다. 영화가 나타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특히 케이블카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장면.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이나 타르코프스키 같은 거장들에 대한 존경과 오마쥬가 가득하다. 동시에 2010년대를 살며 그들의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 감독 (비간 감독은 무려 나보다 어리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영화다. 세련된 고풍스러움?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사를 쉽게 보여주지 않고, 영화 속 흐름은 종종 뒤틀리고 왜곡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환상적이며 몽환적이고 그래서 아름답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끝판 왕.

(그리고 탕웨이가 나온다. 무려 탕웨이. 아름다움의 끝판왕.)  

 

써놓고 보니, 올해 영화제에서 본 영화는 하나도 없고, 그래서 단편영화도 하나 없네. 내년엔 더 성실하게 영화를 봐야겠다는 다짐. 

음반 결산도 하려 했는데, 여기까지 쓰는 데만 2시간 걸렸다. 음반결산은 나중에 다시 해야지. 일단 리스트만 공개



++ 커밍순

 

천용성

아이유

갈란트

빌리 아일리시

애이브릴 라빈

이센스

태연

잠비나이

보울스

톰 요크

 

 

 

 

 

 

가벼운 우울만 남아있네


기분이나 마음이라는 것이 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냥. 그렇게 자꾸 다짐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된다. 

가벼운 우울만 남아있네. 

술을 마시거나 운동을 하거나 몸을 혹사시키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무엇이든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깨끗하게 하고 빨래를 돌리며 커피를 내렸다. 자리에 앉아 되는대로 이것저것을 쓰고 있다. 연필을 깎았고, 새 공책을 열었다. 블로그에도 무언가를 주저리주저리 써내리고 있지만 딱히 기분이 나아지진 않는다. 

누워서 음악을 들었다. 이상은을 들었고 못이나 스왈로우, 이소라를 들었다. 가만 돌이켜보니 어느 시절에 즐겨 들었던 플레이리스트였다. 기분이 문득 더 나빠져서 치웠다. 비투비를 들었지만 마음에 닿지는 않았다. 

다시는 울지 않으리.

누군가를 생각했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돈이나 집,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읽을 책과 만날 사람, 볼 영화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다만 살아가는 일이란 그런 것들의 종합이겠구나. 그래서 별 것 아니겠구나. 살면 또 살아지는 일이다. 하루씩 하루씩. 뭐 ㄱ렇게 대단한 하루가 있겠나. 다 별 거 아니다. 

제일 좋은 건 이상은의 노래다. 





190315


퇴근길.


그 때 아마 "마음이 쓰인다." 고 말했다.
"마음을 쓴다"고 하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후배의 기사를 고쳐주면서는
"피동형 문장은 되도록이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단다."고 말했다.

 
아, 다시 말할 수 있게 된다면 "마음을 쓰지 않는다" 고 해야겠다.
피동형 문장은 되도록이면 쓰지 말아야한다.

주어도 목적도 불분명해서 마음의 방향도 이유도 알 수 없게 되는 말들.

그저 변명이 되는 문장.

 
올바른 언어생활. 건강한 정신상태.


미세먼지에 대하여


1. 

며칠동안 미세먼지가 최악이었다. 고들 얘기한다. 사실 미세먼지 대책으로 온 나라에 공포가 떠돌고 있고, 이런 불안함은 예전의 신종플루나 메르스 때처럼 공포를 통한 어떤 '단결'을 유도했다. 


요즘은 다들 만나면 미세먼지 이야기를 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섰다. 공기청정기를 샀다거나 어떤 공기청정기가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나도 그래서인지 두통이 평소보다 조금 심한 것 같았고 목이 칼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딱히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마스크가 영 불편해서 잘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날아온다는 그 믿음에 대해서나, 미세먼지의 정체에 대해서 더 관심을 보이는 편이다. 내 건강의 문제야, 마스크로 해결될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1-1.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주범이 중국이라는 믿음은 여름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들면 죽는다고 여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낭설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이나 언론이 최악의 중국발 미세먼지를 운운하는 기사에서 위성사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 위성사진이 아닌 경우도 많고, 애초에 먼지 농도는 위성사진으로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시간대별로 먼지 농도의 위성사진을 찍어서 중국의 미세먼지가 한반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하지만 실제로 한시간 전의 그 먼지가 지금 이곳의 이 먼지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정황에 대해서도 얘기하더라만. 중국이 동해안 지역에 화력발전소와 중공업 공장단지, 쓰레기 소각장을 대규모로 건설하면서 그 유해물질이 한반도로 유입되고 있다는 주장.


그러나 중국은 오히려 엄격한 환경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수도 부근의 도시들에서뿐이 아니라 문제라는 중국 동해안, 한국의 황해 부근의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강력한 환경규제로 인해 생산량의 감축이 일어나고 산업 구조가 재편되며 중국의 산업을 후방에 두고 있는 한국의 산업들에도 영향이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성의 미세먼지 배출량은 감소하고 있다. 베이징을 비롯한 화베이 지방은? 더 엄격한 규제에 의해 더 많이 감소하고 있지.


1-2.

한국의 오염물질 배출량은 정말 줄어들었을까? 중국이야 예의 그 대륙의 기상을 잔뜩 발휘한 엄격한 조치로 (겨울엔 기숙사에 난방도 틀어주지 않는다는 유학생의 이야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화끈한 저감을 이뤄내기도 하지만 한국은 공포에 떠는 것 만큼의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 화내고 마스크 사재기나 하고 있지.


중국 공업지대의 오염물질 배출량이 줄어드는 동안 한국은 화력발전소를 더 지었고, 남동임해 지역을 중심으로 오염물질 배출량은 더욱 늘어났다. 당진을 중심으로 화력발전소와 제철소, 공업단지가 밀집한 지역의 미세먼지 농도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경이다. 


공기청정기를 돌리기 위해 소모하는 전기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다. 공기청정기를 사서 배달시킨 택배 차량은 디젤 차량이겠지. 공기청정기와 마스크를 만드는 공장은 중국에 있다. 중국이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한국의 미세먼지가 심해진다며?


1-3.

다 떠나서 한국의 미세먼지가 정말 '중국발'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들이 중국에 화를 낼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의 산업 발달은 '저렴한 비용'을 기반으로 한다.  인건비가 싸고 무엇보다 환경규제가 약해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 진출을 시도하면서 중국의 고도 산업 성장이 가능했다. 7~80년대 한국이 싼 인건비와 저렴한 환경규제로 대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거기에는 한국 기업, 한국 소비자의 지분도 상당하다. "앞으로의 세계는 중국이 주도할 것이다"같은 고리타분한 조언이 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며 당시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주입됐다. 중국으로의 사업 진출이 활발해지던 시기의 얘기다. 말인즉슨, 중국의 산업을 지탱하는데 한국의 소비도 한 몫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국으로 이식된 수많은 한국 기업.


다시 말하면 한반도에서 발생했어야 할 수많은 오염물질이 중국에서 발생해서 한국으로 다시 건너오고 있는 셈이라는 말이다. 화를 내야 할 것은 오히려 중국정부와 중국의 인민들일 수 있다. "왜 너희나라에 뿌려야 할 똥을 우리나라에 헐값에 팔아넘겼냐"고.


2.

애초에 '미세먼지'라는 용어 자체도 이해가지 않는 측면이 많다. 어떤 물질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미세한 입자의 오염물질을 미세먼지라고 통칭하면서 오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진단과 규명, 원인분석과 해결책 마련도 어려워지는 일이다. 


그 효과는 오직 공포를 더 쉽고 빠르게 확산시킬 때만 용이하다. 난 여전히 미세먼지가 뭔지 알 수 없다. 


미세먼지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면. 그래서 재난을 선포해야 한고 정부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표할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해야 할 일은 화를내고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딸에 대하여> - 그 벽에는 작은 문을 내고자

"왜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영화 잘만들기로 유명한 어느 감독의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였다. 영화적 만듦새, 형식미, 유려함. 완성도라고 부르는 그것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는 중이었지만 내 관심은 그보단 '이유'였다.


우리는 왜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까. 영화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우리는 왜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일까. 목적이 없는 이야기.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그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 유려함을 뽐내는 것이라면 도대체 왜 우리는 그 고통을 견뎌가면서 이야기를 짓고 읽는 것일까. 


# 김혜진


문학이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다. 얼음을 깨는 것.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변화하는 것.  더 나아짐을 상상하는 것. 더 나아지기 위해 자기와 세계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둡고 캄캄하고 아무 것도 없어서 그저 빠져 죽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우물 속에서 단 한모금이라도 물을 길어올리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문학과 이야기의 본령이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다. 분명히 그것이다. 희망과 변화, 상상과 운동이 없는 문학이나 영화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혜진의 소설을 읽고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중앙역>을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단어를 갖다붙여도 사치스러울 것 같은 삶. 우리는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사실 구원따위가 다 뭐람. 그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음으로 지금의 다음 순간 정도를 살아낼 수 있는 그런 역동. 


삶을 살아가는 것, 나아가게 하는 힘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그것이 오직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중앙역>에서 읽어내는 것은 희망이어야 옳다. 


아주 오랜만에 집어든 소설이 <중앙역>이어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부여잡고 앉아 밤새도록 꾸역꾸역 읽었다. 김혜진의 소설은 '진짜'라는 생각이 든다. 리얼함이나 깊은 취재를 말한다기 보다는 '진심'이라는 느낌에 가깝다. 고통을 전시하는 것으로 연민하거나 과장과 과잉으로 꾸미지도 않는다. 솔직한 문장, 정직한 마음.  


# 딸에 대하여


어쩌면 이해는 '문을 내는 것' 정도일지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타자라는 것은 곧 벽이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언젠가 엄마에게 "우린 남이니까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벽을 확인했지만 문을 낼 생각 따위는 해보지도 않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말이었다. 


사실 엄마는 '벽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타자성이니 어쩌니. 하지만 엄마는 계속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저 노력하는 것만으로,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서로에게 다가가고 더 가까워지고 조금이라도 더 알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겪고 견뎌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런 기적이 오기도 전에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지 않니. 그건 거짓말이니까. 내 딸을 포기하는 거니까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 놓아 버리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하여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 나는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인지, 너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인지. 그 벽에는 작은 문을 내고자.


# 여성의 노동


소설 속의 여성들은 모두 '누군가를 위한' 노동을 한다. 레인은 '가끔 죽을 것만큼 힘든' 자기의 노동으로 그린의 생활비를 충당한다. 젠은 젊은 날에는 외국에서 해외 입양된 이들을 위해, 나이들어서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돈과 힘을 썼다. 그린은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동료들을 위해 돈벌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화자는, 젊어서는 초등학교의 교사로, 학원버스 운전기사로, 구내식당의 노동자로, 지금은 요양병원의 돌봄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여성들의 노동은 자기의 것을 향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한 것으로 존재하며 그래서 '주변부'의 노동으로 치부된다. 여성들의 노동을 주변의 노동으로 취급하며 그를 딛고서 사회는 성장했다.   


그래서 나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이 그동안 '남성들이 해오던 노동의 인식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길 바란다. 누군가의 희생을 양분삼는 노동. 내 아이를 누군가는 돌봐주어야 하고 내가 일하기 위해 누군가는 밥을, 빨래를, 청소를 해줘야 하는 노동. 주변의 노동으로 취급되는 이 돌봄노동을 딛고서야 '공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이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 역할을 맞바꾸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인식 지평을 넓히고 모두가 서로를 돌보고 모두가 서로에게 복무하며 모두가 공적인 영역에서 일하고 모두가 사적인 책임을 지는 새로운 노동모델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꿈 같은 소리'라는 핀잔을 듣곤 했다. 하지만 소설의 화자가 딸을 이야기를 포기 하지 않는 것처럼, 젠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주었던 것처럼, 레인의 손에 난 상처에 눈길을 주고 따듯했던 말과 위로를 마음에 담아둔 것처럼. 꾸준히 꾸준히. 삶은 그렇게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며 나아가는 것이겠고, 우리의 삶과 투쟁, 운동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과 세계와 나를 가로막는 벽에 아주 작은 문을 내고 싶다는 마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사소한 노력.


이 포스팅을 쓰고 있는 날은 여성의 날이었고, 백년보다 더 오래 전부터 여성노동자들이 쌓아 올려온 것들은 그렇게 사소하고 작고 하지만 끈질겨서 위대한 것들이었음을 믿고 있다. 



덧,

광화문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사거리에서 어떤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에게 작은 메모와 노란 장미를 나눠주고 있다. 모처럼 햇빛이 좋은 날 꽃을 들고, 거리를 걸으며, 세상에 주눅들지 않는 여성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단상



1.

SNS를 없앴더니 독서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사실 그보다는 최근에 읽은 <세 여자> 때문이다. 허정숙과 주세죽과 고명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코를 박고 책을 읽다 내릴 지하철 역을 지나치기도 했다. 허정숙과 주세죽과 고명자. 그 이름들을 자꾸자꾸 생각했다. 이따금 박헌영과 김단야 같은 이름도 곱씹었다. 


신수정 교수의 추천사처럼, 소설가 조선희는 영웅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여자들이 20세기에, 이 땅에, 살아있었다는 것만을 말해주었을 뿐이고, 그것만으로 단지 충분히 설레고 벅차기도 했다. 


 



2.

조계사 앞을 지나고 있을 때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어떤 사람을 봤다. 강아지가 조계사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는 목줄을 급하게 당기며 "들어가면 안돼, 지옥간다"라고 말했다. 순간 지옥에 들어와 있는 줄 알았다. 사바하.


3.

최근 이직을 결정했는데,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누가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니"라고 격려했지만, "고생을 굳이 돈주고 사게 생겨서 걱정"이라고 답했다. 


3-1.

최근 주변에 이직과 퇴직, 창업, 업종변화 뭐 이런 일이 잦다. 서른 중후반. 삶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판단'과 '결정'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이제야 비로소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 아니겠냐고. 바야흐로 '전환'과 '승부'의 시기다. 우리 모두 힘을 내요. 슈퍼파워까진 아니어도..


4.

요즘 가장 재미있는 드라마는 <불량사제>와 <트랩>이다. 특히 <불량사제>는 모처럼 본방 날짜를 기다리며 챙겨보는 드라마다. 이하늬는 홍길동에서 장녹수 역할할 때부터 '어머, 이 언니 뭐람?' 싶었는데, 최근의 연기들에서는 독보적인 매력을 뿜뿜하고 있다. 김남길이야 뭐. 원래 멋있었지. 

<트랩>은 좋은 극본과 좋은 화면의 영화같은 드라마다. 오씨엔이 만드는 장르물은 늘 좋은 캐스팅의 여성 캐릭터를 굳이 쓸데없이 소모시키는 악덕이 있는데, <트랩>에서도 그런 기미가 보이긴 하지만 아직까진 용서 가능한 범위다. 하지만 이서진을 끼얹은 실책에 대해선 어떻게 만회할 건지 모르겠다. 그 좋은 캐릭터를 이서진이 삼시세끼에 나온 것처럼 혹은 다모에 나온 것처럼 혹은 왕초에 나왔을 때처럼 (다 똑같으니 어차피 어디든 뭐) 연기하면 짜증이 막 나기도 한다. 


5.

작금의 배경음악은 장고 맥크로이. 봄이 살랑살랑 올랑말랑 하면 적당히 섹시한 남자의 노래를 



<얼굴들> -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야기





# 극적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 놀라운 시간, 기억하고 싶은 것들, 잊히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을 극적인 순간이라고 부른 다면 영화의 순간이란 일상과는 가장 배치되는 것이다. 


어제 퇴근 길, 지하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사람.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 오늘 점심시간 담배를 산 가게의 주인 아저씨의 얼굴과 목소리. 십수년 전 들었던 교양수업 강의실 건너건너 자리에 앉아있던 어느 과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얼굴. 전혀 극적이지 않은 그런 것들을 그러모은다고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될 수 없다고 그것들에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야기가 있으니 영화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얼굴들>은 가장 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극적이지 않으니 서사에는 개연성이 없고, 갈등의 고조와 절정이나 해소가 없고 원인과 결과도 없다. 아니다, 없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얼굴들에는 저마다의 서사와 개연성과 목소리와 절정과 분노와 슬픔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것. 여백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삶의 순간들이란 모든 곳에서 극적이고 모든 곳에서 극적이지 않다. 내가 평화롭고 안온하게 보낸 어느 순간이, 혹은 평화롭고 안온하다고 여겼던 어느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삶이 뒤흔들리는 순간일 수도 있고 실은 그 어느 누군가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얼굴들>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고 어떤 이야기도 없었지만 혜진은 아마 회사동료들과 식사를 마치고 어색하고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을테다. 그 순간 마치 인생극장의 이휘재처럼 '그래, 결심했어'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문득 "나가죠" 라고 말하는 순간에, 어쩌면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할지, 물을 먹고 밥을 먹어야 할지를 떠드는 순간에, 테이블 위 네명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 그녀는 회사를 나가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순간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은 얼굴들에서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 있는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다. 잊히는 얼굴들이고 굳이 기억하지 않는 얼굴들이다. 그보다는 영화의 인물이라고 보이지 않으니 주인공이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는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제공하지 않는다. 인물이 없으니 갈등이 없다. 갈등이 구체화되는 사건도 없다. 사건이 없으니 서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고 심지어 관객은 거기에 감응하고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사실 모든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야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면 늘 '사람'이나 '사건'의 돌출을 떠올린다. 누구의 이야기, 어떤 이야기,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 그런 것들은 극적인 요소다. "개가 사람을 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무는 일"에 천착하는 태도. 사실 상징과 은유, 메타포란 얼마나 작위적인 일인가. 고작 기호와 돌출된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겠다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오만일지도.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왜 다를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들의 중첩을 이야기라고만 여긴다면 <얼굴들>은 최악의 영화다. 다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의 통창 너머 길 건너에서 걸어가고 있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남자의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구기지 않고 그 얼굴 자체를 보거나, 그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 공간에 실은 무엇이든 있을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얼굴들>은 근래 나온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극적인 영화일 수 있겠다.


덧,

혜진이 지영과 함께 (영화에는 이 둘의 관계가 안나와서 영화를 보는 한동안은 혜진의 새 썸녀가 아니었을까, 기선과는 그래서 헤어졌을까..를 생각했지만 그게 뭐 무슨 상관이야)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장면이 좋았다. 예쁘지도 요즘 유행이라는 그 흔한 벽화도 없는 골목. 빈 사무실, 공사현장. 뭐 그런 것들. 무엇이 있겠지만 내게 굳이 설명해주지 않는 그 공간들. 


초행을 볼 때도 생각했지만 김새벽은 정말 멋있는 배우다. 









  




190226




퇴근길. 늘 하루가 길다.

세여자



조선희의 세여자를 읽고 있다.

이다지도 뜨거운 삶이라니.
이다지도 허무하고 추운 삶이라니.

항해






오늘은 종일 이 노래를 듣고 있다.


+
이제 더 찾을 것도 없는 방황의 날은 끝나고 
아침 파도는 밀려와 발 아래 하얀 거품으로


단상


1.


SNS


페이스북을 닫았다. 몇년동안 써놓은 글이나 저장해둔 사진들은 잘 백업했다. 내 글은 다 지우고 계정만 남겨놓은 채 몰래 몰래 남의 얘기는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그건 안되더라. 9년동안 쓴 수천 개의 포스트를 하나씩 일일이 지울 노력을 할 수 있다면 다르겠지만, 그런 노력씩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SNS에서 내 얘기를 하는 걸 일종의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쩗고 간결한 문장으로 유동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연습. 적재와 적소에서 적절한 글을 쓰는 연습. )사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기 보다는 그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중에 끼워맞춘 셈이다. 실제로는 재미있어서 했다. 따봉 많이 받고 싶은 관종짓이지 뭐.)


어느 날부턴가 선후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SNS에 쓰는 것 같은 글밖엔 못쓰게 돼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 몇년간은 실제로 말과 글이 대부분 SNS로 유통됐으니 그런 것들을 구분지을 일도 잘 없었고, SNS 말고는 글을 쓰는 일도 잘 없었다. 


'3줄이 넘어가는 글은 읽지 않는 사람들'을 욕하면서 '하지만 3줄의 글로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연습'을 하려 했던 것인데, 어느샌가 3줄 이상의 글은 쓰지 못하는 사람이 돼 버린 느낌이었달까. 


더 길고 친절하며 스킵하지 않고 끈질기고 진지한 글을 쓰는 연습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SNS에서 빠져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다시 연필로 종이에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적고, 메모를 꼼꼼히 하고. 


2.


여기도 초소  


얼마 전엔 어느 전문지 기자가 익명으로 쓴 글을 읽었다. 내용인즉슨 '스스로 주제파악을 하자'였는데, 전문지나 지방지, 인터넷 언론의 기자들은 선발과 수련의 과정이 종합 일간지나 방송국 기자들만큼 혹독하지는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옳은 말이지만, 주제 파악과 자학 혹은 자기연민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몇 달 전부터 전문지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세계와 사람들, 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와 그저 대상화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요즘에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 개인의 욕망, 개인의 상황, 처지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 어느 기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취재하는 일은 처음인데, 늘 기업이나 자본이라는 것은 사람보다 이윤을 앞세우고, 그 구조적인 이기심이 사람을 배제하는 결과를 만든다고 여겨왔다. 큰 틀에서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 구조를 만드는 것 역시 사람이며 그 구조를 지탱하고 복무하는 것은 사람, 노동이라는 생각을 이제야 하고 있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


전문지 기자의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앞서 언급한 그 익명의 글과는 또 다른 어느 전문지 기자의 마찬가지로 익명의 글에서 '사회적 감시같은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도 봤다. 기업의 이윤이나 국한된 분야의 이야기에만 천착하는 전문지 기자의 글에도 사회적 의미와 책무가 있지는 않을까. 내가 서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 의미와 책무를 찾는 일. 서 있는 모든 곳이 전선이고 초소일 수 있지 않을까. 


3.


자격심


이전 직장을 같이 다니던 어느 기자가 있는데, 그 회사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그를 참 싫어했다. 무시하기도 하고. 지금도 나는 그의 세계관이나 문장, 취재방식 어느 것에도 동의라지 않는다. 


그를 그토록 인정하지도 않고 싫어해서 오히려 그의 이후 행보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게 많았다. 그가 생각보다 안망하고 (난 그가 금세 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잘 지내는데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삶이 잘 풀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현상을 개탄하거나 낄낄거리며 비웃곤 했다. 


문득 그런 것들이 나의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혹은 부러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매우 솔직하지 못한데다 너무 지질한 일. 타인의 얼굴에서는 나를 비춰 톺아볼 수 있는 일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거기서 내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싫어서 아마 지질하고 솔직하지 못했을까. 


내 얼굴을 그대로 들여다볼 일이다. 열심히 나를 연마하면 될 일이다.


4.


다이어트


다음 급여가 나오면 헬스클럽에 등록할 예정이다. 살을 빼고 건강해지기로 했다. 건강한 생각은 우선 건강한 몸에 있고, 둘 모두는 건강한 지갑에 달려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지갑도 건강해지겠다. 엥겔지수를 낮출 필요가 있어.


5.


다이어트2


몸의 살 뿐 아니라 관계에 찐 살도 좀 줄여야 한다. 의미없이 먹는 야식같은 관계들이 있다. 맺고 있는 관계들을 하나 하나 소중히 여기고 싶다. 그러려면 군더더기 같은 관계, 의미없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셀룰라이트 같은 관계들도 빼내야 하겠다.


   

유시민의 뻔뻔함에 대하여

유시민 “로마시대 검투사 경기보듯..뽑아놓고 잔인하다”



처지도 그렇고 깜냥도 그렇고. 그저 말이나 보태면서 스스로 위안삼는 글같은 것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유시민 이 자는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남의 속 뒤집는 재주는 하늘에서 내는 것일까.


"문재인과 노무현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다"같은 말을 어떻게 저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할 수가 있나. 솔방울로 수류탄이라도 만드신 건가. 근본적으로 권력자를 똑같이 보아선 안된다고 언론을 탓한다. 어불성설이다. '권력'은 인격이 아니다. 선한 권력과 악한 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 권력이란 '위정'과 '피정'(被政)의 역학에서 발생한다. 정치의 자리에 인격을 끼워넣는 순간 정치는 도그마의 종교로 변질된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의 정치는 옳다' 같은 어리석은 말을 내뱉게 되는 것. 대통령을 뽑아놓고 왜 그를 지지하지 않느냐는 말을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심지어 지식인이고 저술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까. 박근혜는 남의 나라 국민들이 뽑았나.


유시민은 '이명박이 감옥에 있는데 왜 아무도 이명박을 신경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감옥에 있는 그에게 왜 신경을 써야 하는가. 지금 내 삶에 직결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문재인으로 대변되는 '권력'이다. 그들에 대한 비판과 감시가 언론의 역할이다. 박근혜가 감옥에 가면 항문검사를 할지 안할지, 이명박이 명절에 어떤 특식을 원했는지를 낄낄거리는 것이야말로 언론의 기능에서 한참을 벗어난 저열함이다. 도대체 왜 '우리편을 들지 않으면 옳지 않다'는 신념을 강변하는가. 그것은 차라리 전도의 영역이다. 요즘은 전도도 그런식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유행어는 이명박 시절이 아니라 김대중 - 노무현 정부에서 파생됐다. IMF를 지나 아무나 신용카드를 만들던 금융자본 비대화의 시대. 돈이 삶의 전부라고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벌라고 정부가 강변하던 시대. 사기여도 좋으니 돈을 벌라던 말이 황우석과 심형래와 용산참사와 쌍용차 사태를 만들었다. 유시민은 "박근혜가 박정희의 고도성장 신화를 부추겼다"고 하지만 고도성장을 위해 다이나믹 코리아를 외치고 스크린쿼터를 없애고 광우병걸린 쇠고기를 들여오면서까지 한-미 FTA를 추진했던 것도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가. 그러면서 왜 문재인을 욕하는 뉴스가 가짜뉴스라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나.


이 정부의 국정수행 능력은 바닥이다. 대부분 산업의 지표는 최악을 가리키고 있다. 특히 한국경제를 지탱해오던 주요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건설 경기는 역대 최악의 수준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하겠다고 변죽을 울렸지만 정작 최저임금 인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사노위는 노동자를 포위하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다. 눈속임이다. 양두구육 같은 사자성어를 배우기에 적합한 사례일까. 산업정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제시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한다고 볼멘 소리를 낸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현재의 정책이 결국엔 실패를 만들 것이라고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하고 사회적 투자와 공적 서비스의 확충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나온 것이 광주형 일자리와 삼성 바이오의 분식회계 눈감아주기와 한국GM의 법인분리다. 경제적 정의도 원칙도 자기들의 말에 대한 책임도 없는 이들이 '선한 권력'이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전 장관이면서 자칭 지식인이고 전대통령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공적 자리에서 할 수 있나.


멍청이 아니면 사기꾼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지금 굴뚝 위의 노동자들에게, 전광판 위의 택시 노동자에게,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어버린 그 청년의 부모와 친구들에게 말해보라. 이 정부의 산업-경제-노동 정책이 향하는 곳은 당신이 그토록 혐오해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사람들의 지탄을 계속 받아야 한다는 이명박의 정부가 향하던 곳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보다 차라리 이명박같은 괴물을 호출한 괴물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상가임대차 보호법 개정을 반대하고 한미FTA를 추진하고 당내 여성주의자들에게 해일 앞에서 조개나 줍고 있다며 비난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유시민과 유시민의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가. 노무현이 죽었다고? 그래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인가? 그 복수와 양친을 모두 정적의 총탄에 잃은 박근혜가 다짐하는 복수는 얼마나, 왜 다른가.


유시민의 기사를 읽은 비슷한 시간에 굴뚝 위에 400일이 넘게 올라있는 노동자의 글을 읽었다. 세계 최장 고공농성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언론의 수많은 기사에 정작 정권을 비판하고 노동관계 악법을 철폐하라는 절절한 요구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는 개탄. 도대체 누가 억울하고 누가 슬퍼야 하는가.


콜로세움이라고 했나. 잔인하다고 했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누구이고, 그걸 보면서 '보는 내가 다 아프네' 수준의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잔인한 사람은 누구인가.


단상

1.

이태원 한복판엔 '서울펍'이 있었다. 거길 많이 좋아하진 않았다. 시끄럽고 번잡해서. 그래도 종종 서울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낄낄거리면서 놀았다. 이태원은 그런 동네지. 서울펍은 이태원에 거의 처음으로 생긴 '펍'이라고 했다. 94년이라던가, 95년이라고 했나. 암튼 병맥주를 든 외국인이 포켓볼을 치면서 하이 파이브를 하는 장면을 TV말고 실제로 처음 본 건 서울펍이었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는 장소라 최근엔 '태양의 후예'를 이곳에서 찍기도 했다.


얼마 전 서울펍 자리에 공사가 한창이길래 내부수리를 하는 줄 알았다. 좀 낡긴 했었어. 의자가 좀 편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쳤다. 공사가 끝나면 한 번쯤 또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얼마 후에 서울펍이 있던 자리에 '이바돔 감자탕'이 들어온다는 안내 현수막이 걸렸다. 이바돔 감자탕이라니.


이바돔 감자탕이라니. 뭐랄까. 책을 좋아한다던 그녀가 가방에서 김난도의 베스트셀러나 원태연의 시집을 꺼냈을 때 느꼈던 그 기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옥장판 카달로그를 내밀 때 느낄 수 있는 기분. 그런 거.


어제는 마침 그런 얘기를 했다. 이태원에 많던 LGBT바들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 다들 높아가는 임대료 문제가 가장 컸을 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난 그보다는 문화의 소비층이 더 편협해져 가는 것은 아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클럽이나 라운지바 같은 곳들이 이태원 곳곳, 골목골목에 들어서 있다. 주말 저녁이면 거리를 꽉 채우고 있는 사람들. 거기서 몰개성을 발견하는 것이 어쩌면 오만하거나 꼰대같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사라진 서울펍과 LGBT바들 대신에 클럽과 이바돔 감자탕과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들어서는 것. '레시피는 중요하지 않고 사람들이 무엇을 구매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요식업자가 지배한 거리. 그런 것들에서 우리의 취향은 오직 '소비'로 편협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1-1.

사실 몰개성의 척도는 맛없는 음식과 재미없는 영화와 구린 음악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바돔 감자탕은 정말 더럽게 맛없다. 이걸 증명하려고 어제 굳이 그 이바돔 감자탕에가서 술을 마셨다.


감각은 단련되는 것이고 지성은 쌓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면 덜 아는 것이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단련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롭고 맛있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야 한다. 탐미(耽美)와 구지(求知)는 차라리 인간의 본질적 의무다.


취향의 편협함, 지적 태만, 감각의 퇴행이 가져올 것은 어리석은 폭력이다.


어제 LGBT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난 "어쩌면 혐오범죄가 더 두려운 거리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몰개성한 환락의 도시는 다양에 대한 혐오와 배제 폭력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바돔 감자탕 같은 걸 맛있다고 먹으면서 살면 오래동안 육수를 내고 시래기를 삶고 좋은 고기와 향긋한 들깨를 쓰는 감자탕에게 맛없다는 폭력을 일삼겠지. 그런 거다. 다.


1-2. 

이태원을 비롯해 홍대나 신촌, 서촌, 종로통, 을지로에 종종 가던 단골 술집들이 자꾸 문을 닫고 그 일대엔 이바돔 감자탕 같은 것들이 자꾸 문을 여니까 짜증이나서 하는 얘기다. 세상은 빨리 돌아가지만 더 복잡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바돔 감자탕을 먹고 나와 화가 잔뜩나고 술도 잔뜩 취해서는 "모두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싶어." 라고 말했다. 일행이 무슨말이냐고 물었다. "안경은 눈 나쁜 사람이 쓰는 거니까."


2.

그래도 어제 엘지가 두산을 이겨서 다행이다. 차우찬이 멋지게 완투승을 거둬서 다행이다. 한 시즌에 특정팀에게 전패하는 수모를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두산이 끝까지 봐주지 않고 경기해줘서 다행이다. 난 사실 마지막 경기니까 두산이 이웃집 애들 불쌍하다고 봐주면 그것대로 또 싫을 것 같았는데.


야구를 못할 수 있고, 꼴찌팀을 응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야구의 매력이 뭐관대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야구를 보느냐고 묻는다면 '오직 야구만이 다른 선수가 아니라 공과 겨루는 스포츠'라고 대답했다. 야구는 공보다 빨리 베이스에 도착하는 스포츠다. 상대가 아무리 빨라봤자 난 공보다만 빠르면 된다. 그래서 야구는 올곧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야구장 위엔 스무 개의 경기가 있다. 사실 덕아웃고 불펜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을 더 많은 경기가 있다. 그래서 경기에서 지더라도 이긴 것 같은 순간이 있다. 10점 차, 20점 차로 지더라도 단 한개의 안타가 승리가 되는 순간. 마찬가지로 143번의 패배에도 단 한 번의 승리가 이번 시즌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순간.


엘지가 두산에게 시즌내내 패배했을 때 화가났다기 보다는 그 수많은 운동과 경기에서 각자의 싸움에서마저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 화가 났다. 그까짓 포스트시즌 못나가면 어떠냐. 그래봤자 공놀이인데. 하지만 삶을 걸고 하는 경기에서 저녀석과의 싸움이 아니라 공과 하는 내 싸움에서 지는 것이 당연해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할 일.


2-1.

하지만 양상문의 모가지는 따겠어요. 한 시즌 지나니 잊은 줄 알았지 이놈아. 다음 FA에서 박용택에게 최고대우를 약속하고 최정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면 용서해주마.


3.

아침마다 같은 지하철을 탄다. 7시 55분에 석계역을 지나는 응암순환 6호선의 8번칸. 그래서 거의 매일 아침 같은 사람들을 본다. 아침마다 스마트폰으로 예능프로그램을 보는 거대한 백팩을 맨 아저씨.


며칠 전엔 그 아저씨와 싸웠다. 내릴 역을 지나쳤는지 그 만원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말치며 허둥지둥 내리더라. 사실 그 아저씨는 늘 그런 편이다. 그 커다란 백팩을 매고 두 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내릴 때마다 사람들을 밀고 지나간다. 그 날은 전 날 예능이 무척이나 재밌었는지 키득키득 새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기어코 내릴 역을 지나친 것 같았다. 사람들을 밀치며 (사실 밀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기의 갈길을 뚜벅뚜벅 걸었고 사람들이 밀려나간 거지. 이게 더 나브다고 말하는 거다. 사람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더라. 숨도 안쉬어지는 만원 지하철인데.) 기어코 내린 그는 자기에게 밀려서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사이에 넘어진 대단히 위험한 상황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두리번 거리더니 이내 다시 지하철에 탔다. 착각한 거지.


그가 다시 탔을 때, 그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항의를 했다. "무례하고 위험한 행동을 했다. 보여지는 연배에 비해 굉장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다시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면 결단코 좌시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의 짧은 욕설. 짧은 순간이었지만 4가지 정도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의없게 , "네, 네 ,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이어폰을 다시 꼈다.


내심 사람들이 같이 분노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침의 피로란 그런 것인가. 아침의 지하철은 질서와 예의, 안전 같은 것들이 철저히 무시되는 공간이지만 그 무시가 또 다른 질서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 이 지하철이 향하는 곳은 어쩌면 응암역만은 아니겠다. 라고 생각했다.


4.

미스터 선샤인을 열심히 봤다. 하지만 드라마는 엉망진창이었고, 김은숙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영역으로의 도전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 스스로 지닌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만을 확인한 드라마. 라고 평가하겠다. 이 얘기도 쓰고 싶었는데, 앞에 분량이 너무 길다.. 피곤하기도 하고. 그건 다음 기회에. 투 비 콘티뉴.


4-1. 

하지만 김민정 누나는 엄청 예쁘다. 드라마는 김민정 누나를 캐스팅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었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모처럼 정치 이야기.

어제는 누가 정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 고난도의 의사활동이 아니냐고 묻길래

정치는 인간이 가장 여상스럽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깃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 것. 정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 것.


암튼 이실직고하자면, 다른 용도로 쓴 글이었지만 애초의 용도는 폐기됐다. 들인 시간이 있어 버리기는 아까우니 여기라도 끄적끄적.



++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뉴욕 타임스는 ‘정치적 올바름의 패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올바름의 패배’라는 말은 자가당착이다. 트럼프를 선택한 이들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졌다. 소수자 인권을 옹호하고 의료혜택의 범위를 넓히고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진보-좌파가 선점했기 때문에 생긴 관념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주민보다는 자국민의 권익을 우선하고 시장을 활성화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의 정치적 선택이 올바르지 않다고 믿는 정치 주체가 어디 있겠나. 애초에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비근한 예로 워마드의 정치를 들 수 있다. 워마드에게 정치란 남성으로부터 권력을 앗아오는 일이다. 일부 언론에선 ‘남성혐오집단’라고까지 부르는 워마드는 여성인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남성이 모든 권력을 쥐고 여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워마드는 그 인식 위에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운동과 정치를 한다. “좋은 한남은 재기한 한남뿐”이라는 구호가 그녀들이 추구하는 올바름을 지시한다. 그녀들 역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흔히 속칭하는 ‘문빠’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들에게 올바른 정치는 문재인 혹은 노무현으로 대변되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통치를 지속하는 일이다. 이들이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민주당만이 올바른 정치주체이고 다른 세력들은 적폐이거나 ‘정알못’(정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이 문빠들에게 인권 감수성이 없고 노동을 천시한다고 아무리 쏘아붙여봤자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범주란 이토록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 중 가장 무겁고 강한 힘을 지닌 것은 올바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하지만 신념이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의심에서 출발하지만 애초부터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신념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신념은 강한 동력을 낳는다. 따라서 신념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는 건 언제나 혁명이나 종교 같은 ‘일방향’의 운동이다. 옳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고, 옳기 때문에 굽힘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운동. 반면 정치의 영역에서 올바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다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올바름’이란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 쓰는 말이지 ‘다방향’의 운동인 정치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본질이란 제각각의 주체가 물고 뜯고 싸우고 화해하며 각자의 삶을 증명하고 견주는 투쟁이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지 묻고 답하며 끊임없이 삶과 살을 맞대고 부비는 일. 따라서 정치에서 어떤 올바름은 어떤 곳에선 필연적으로 그르다. 어차피 ‘올바름’이란 인식의 문제다. 어디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은 가변하게 마련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허위 개념의 문제는 ‘올바름’ 바깥을 상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 올바름은 의심과 사유의 언어가 아니기에 자신의 올바름이 성립하는 순간 그 바깥을 사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정치에 사유 대신 신념이 스미는 순간, 정치는 종교로 변한다. 세상의 모든 모순을 남성의 젠더권력에서 찾으려는 워마드의 인식은 여성을 억압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의 교차를 외면하는 오류를 배태한다. 이 외면은 결국 그녀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여성의 해방에서도 멀어지는 결과를 만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억압의 기재가 젠더문제에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롭다. (조악한 예일 수 있지만) 여성 고용주의 갑질에 핍박받는 여성 노동자는 상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투쟁할 수 없을까? 여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워마드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일까?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올바름을 강변하는 태도가 다른 이들의 인권을 짓밟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국에서 생명을 위협받아 한국으로 온 예멘의 난민들을 남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사지로 몰아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논리적으로 마땅히 의심하고 고민해야 할 오류들에 대해 적어도 오늘까지의 워마드는 대응하지 않고 있다. 올바름에 대한 신념화가 오류를 수정할 기회마저 앗아간 셈이다. 


(워마드는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을 PC(political correctness)충이라고 조롱한다.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행동하면서 상대의 옳음을 조롱하는 촌극.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혁명가 레닌이다. 혁명가였던 레닌은 혁명의 성공 이후 정치가가 됐고, 정치에서 올곧은 ‘올바름’이란 개념은 성립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생디칼리즘을 비롯한 급진적인 좌익운동과 최악으로 치달은 러시아의 경제 상황, 다양한 욕망과 요구, 상황. 대치되는 입장. 그가 ‘믿었던’ 올바름에 대한 강박만으로는 현실 세계를 헤쳐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된 것. 레닌은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에서 극좌파들의 순수한 정치(말이 좋아 순수한 정치지, 레닌은 이를 비현실적인 근본주의라고 말한다. 책 제목부터 좌익 소아병이다.)를 비판하며 처음 ‘정치적 올바름’이란 표현을 썼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일부 활동가들이 내세운 구호는 “타협 없이 우회 없이 전진하자”였다. 어떠한 타협과 절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수사로 포장된 교조주의를 레닌은 ‘좌익소아병’이라고 일갈했다. 


세계는 단편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정치는 수많은 삶과 욕망이 뒤엉켜 교차하는 유기체와 같다. 그래서 복잡한 사건들의 뒤엄킴을 한 번에 해결해줄 올바른 법정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애초에 이 난국을 타개할 전가의 보도 같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환상이다. 레닌의 일갈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유아적 발상에 불과하다. 혁명이나 종교. 사탄이나 적을 상정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은 내재화된 신념을 동력으로 삼는다. “오직 이것만이 옳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필연적으로 적대의 정치를 양산한다. 올바름의 여집합은 곧 올바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무찌르는 단순한 적대 행위가 정치일 수는 없다. 정치란 말했듯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많은 것들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애당초 올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단정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그렇다고 신념화 한) 언어는 마치 무균실의 언어와도 같다.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은 변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역동성보다는 자기의 결벽을 과시하는 정체의 언어로 기능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의 우아한 세계에 남아있기 위한 비겁한 액세서리. 외부의 균으로부터 나의 언어를 공고히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덫에 걸린 언어는 살과 살을 비벼 삶과 삶을 바꾸는 실재의 언어일 수 없다. 상충하는 가치, 가변하는 정의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균실에 갇힌 이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워마드의 운동은 정말 여성의 해방이라는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까. 문빠들의 정치가 그들의 말처럼 사람이 우선인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워마드가 세계의 모든 모순을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억압이라는 단순한 인식으로 환원하면 돌아오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진 여성주의 운동의 한계다. 문빠들이 민주당의 집권으로 정치의 모든 것을 환원하려 하면 맞닥뜨리게 될 것은 거대한 괴물이 돼버린 자신들의 모습이다. 변하는 것은 없이 신념화된 올바름을 경전처럼 외우는 도그마에 빠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올바름의 강박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질문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세계를 변화시킬 전복적 상상을 시도하는 일이다. 정치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올바른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상정하는 일은 그리고 그 주박에 갇히는 일은 가능성을 거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정치란 무균실 바깥을 상상하고 그 경계를 넘는 일이다. 가능성을 점지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오류와 실패를 긍정하는 일이다. 오류와 실패에서 다시 새로운 상상과 가능성을 담지 하는 일이다. 정치란 그렇게 그저 살을 부비며 삶을 부닥쳐 살아가는 일이다.  



단상


1.

4월에 마지막 월급을 받았고 벌써 내일 모레면 입추니까, 여름 한철을 백수로 살았다. 모아둔 돈이 있어서 유유자적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가난에 찌들어서 여기저기 돈꾸러 다니는 비루한 계절이었다. 직장을 나올 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을 많이 다친 건지, 상황이 안좋아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면서 마음 바닥이 드러나자 마음에 담아뒀던 잔여물이 많았던 것도 알았다.  


며칠 전에 누가 추천해준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밤새워 다 읽어버리고 어쩐지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됐다. 개연성 있는 생각은 아니고 그냥 밤새워 책을 읽고 났더니 뭔가 하나를 해냈다는 느낌이 든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동안은 너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지. 영화도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책을 읽을 것.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열심히 볼 것. 짧더라도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쓸 것. 영화와 드라마, 책을 보고 감상을 남길 것. 연필로 종이에 뭐라도 적을 것. 글을 쓸 때 남의 글을 배끼지 않을 것. 배달음식을 먹지 않을 것.


2.

결국 글을 써서 먹고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살고 싶지만 요즘은 내가 쓰는 글이 부끄러워서 어디 내놓고 돈 달라고 하기가 어렵다. 들켜버렸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남의 말을 내 말처럼 '우라까이'해서 살았다. 농 반 진담 반으로 "우라까리를 해도 걸리지 않게 잘 포장하는 게 내가 가진 재주"라고 말했는데, 그런 재주는 애초에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배낀 자기는 알고, 원래 주인도 알고. 자꾸 하다보면 읽는 사람들도 알게 되겠다. 난 자꾸해서 읽는 사람들한테도 들킨 것 같고.


더 들키면 정말 큰일이겠다 싶어졌다. 애초에 내 깜냥 바깥의 이야기들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것들,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 누나들이나 형들이 하는 멋있는 얘기들을 배껴오는 일. 나도 멋있을 줄 알았지 뭐야. ~~에 따르면, ~~가 말하길 같은 문장이 많아지는 건 내가 가진 언어가 얼마나 빈약한지를 드러내는 좋은 척도겠다. 


할 수 있는 말을 할 것. 할 수 있는 말을 늘여갈 것. 모른다는 말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을 것. 모른다는 말 뒤에 숨지 않을 것.


2-1.

요전에 재밌게 읽은 책은 김혜진의 <중앙역>이다. 그 전에는 김금희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녀들은 모두 내 또래다. 기자사회에선 이제 비슷한 또래의 기자들이 이름을 조금씩 알려가고 있다. 좋은 시각과 마음을 토대로 좋은 문장으로 좋은 기사를 만든다. 전에는 '나도 기회만 오면', '나도 저런 여건과 자원이 있으면', '문장 자체는 내가 더 좋지 않아?' 같은 생각들을 했다. 맞다 다 질투였다. 


질투하지 말 것. 질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말 것.


3.

도통 많은 것들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요즘이지만 도통 관심을 끊을 수 없는 게 엘지트윈스다. 올 초에는 말도안되는 트레이드로 양상문의 모가지를 따버리고 싶다는 기도를 했는데, 시즌 초반에 성적이 잘 나오자 그런 저주는 한풀 꺾이기도 했다.


요즘 엘지는 선발 마운드가 무너지고 불펜은 이미 무너졌고 빠따는 무너지는 중이다. 오랜만에 박용택이 3할을 못치는 시즌을 볼 수도 있겠다. 양상문에 대한 저주를 다시금 퍼부어야 하나 싶다가도,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하며 수양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내가 금지어 감독의 엘지 시절도 견뎌냈는데. 


그래도 시즌 마치기 전에 두산한테 한 번이라도 이겨봤으면 좋겠다. 특정팀 상대 시즌 전패기록이 한국 프로야구사에 있기는 한 거야?


4.

재밌게 보고있는 드라마는 <라이프 온 마스>와 <미스터 선샤인> 미스터 선샤인은 이병헌과 김태리, 무엇보다 김민정 누나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구요.) 때문에 보고 있다. 김은숙의 드라마는 그 '인기'때문에 오히려 갈수록 더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캐릭터의 서사를 짓뭉개지 말아주세요. 그 와중에도 이병헌과 김민정의 매력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인데 그 중에서도 김민정. 극에 등장하는 이병헌의 매력이야 워낙에 입증된 것이니까 그렇다 해도, 이제 스크롤에 이름 두번째로 올라가는 여주의 자리에서 살짝 물러난 김민정이 보여주는 매력이 어마어마하다. 


실은 김민정은 아역때와 아역에서 갓 벗어난 때, 그러니까 <카이스트>나 <술의나라>같은 걸 찍을 때 이후론 마냥 선하고 사랑스러운 역할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늘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 있었고, 슬픈 구석이 있었고. <아일랜드>의 시연이나 <버스, 정류장>의 소희처럼. 이번 드라마에서도 그런데, 아비에게 팔려 외국 노인의 첩실로 살아야했던 재능도 사연도 많은 여인의 모습을 김은숙이 더 잘 그려주면 좋겠다. 김민정이 지금도 하드캐리하고 있다고요. 이 드라마 자체가 배우들의 하드캐리로 이뤄지고 있지만. 19세기의 조선에 망고빙수를 내놓는 성의와 고민없는 PPL을 보면 집필에 시간을 많이 쓰실 수 있을 것 같은데.


5.

더위 때문에 자꾸 가위에 눌린다. 땀에 절어서 깨곤 하는데, 며칠 전부터 그냥 에어컨을 켜고 자기로 결정했다. 전기료 아끼려다 장례치르면 그 돈이 더 비싸겠지. 하루종일 탄소와 똥만 배출하는 삶이 부끄럽지만 어쩌겠어요.

 


6.

잔나비. 요즘 제일 즐겨듣는 밴드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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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 남겨두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