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11. 14:39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1.
며칠동안 미세먼지가 최악이었다. 고들 얘기한다. 사실 미세먼지 대책으로 온 나라에 공포가 떠돌고 있고, 이런 불안함은 예전의 신종플루나 메르스 때처럼 공포를 통한 어떤 '단결'을 유도했다.
요즘은 다들 만나면 미세먼지 이야기를 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섰다. 공기청정기를 샀다거나 어떤 공기청정기가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나도 그래서인지 두통이 평소보다 조금 심한 것 같았고 목이 칼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딱히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마스크가 영 불편해서 잘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날아온다는 그 믿음에 대해서나, 미세먼지의 정체에 대해서 더 관심을 보이는 편이다. 내 건강의 문제야, 마스크로 해결될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1-1.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주범이 중국이라는 믿음은 여름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들면 죽는다고 여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낭설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이나 언론이 최악의 중국발 미세먼지를 운운하는 기사에서 위성사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 위성사진이 아닌 경우도 많고, 애초에 먼지 농도는 위성사진으로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시간대별로 먼지 농도의 위성사진을 찍어서 중국의 미세먼지가 한반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하지만 실제로 한시간 전의 그 먼지가 지금 이곳의 이 먼지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정황에 대해서도 얘기하더라만. 중국이 동해안 지역에 화력발전소와 중공업 공장단지, 쓰레기 소각장을 대규모로 건설하면서 그 유해물질이 한반도로 유입되고 있다는 주장.
그러나 중국은 오히려 엄격한 환경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수도 부근의 도시들에서뿐이 아니라 문제라는 중국 동해안, 한국의 황해 부근의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강력한 환경규제로 인해 생산량의 감축이 일어나고 산업 구조가 재편되며 중국의 산업을 후방에 두고 있는 한국의 산업들에도 영향이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성의 미세먼지 배출량은 감소하고 있다. 베이징을 비롯한 화베이 지방은? 더 엄격한 규제에 의해 더 많이 감소하고 있지.
1-2.
한국의 오염물질 배출량은 정말 줄어들었을까? 중국이야 예의 그 대륙의 기상을 잔뜩 발휘한 엄격한 조치로 (겨울엔 기숙사에 난방도 틀어주지 않는다는 유학생의 이야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화끈한 저감을 이뤄내기도 하지만 한국은 공포에 떠는 것 만큼의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 화내고 마스크 사재기나 하고 있지.
중국 공업지대의 오염물질 배출량이 줄어드는 동안 한국은 화력발전소를 더 지었고, 남동임해 지역을 중심으로 오염물질 배출량은 더욱 늘어났다. 당진을 중심으로 화력발전소와 제철소, 공업단지가 밀집한 지역의 미세먼지 농도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경이다.
공기청정기를 돌리기 위해 소모하는 전기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다. 공기청정기를 사서 배달시킨 택배 차량은 디젤 차량이겠지. 공기청정기와 마스크를 만드는 공장은 중국에 있다. 중국이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한국의 미세먼지가 심해진다며?
1-3.
다 떠나서 한국의 미세먼지가 정말 '중국발'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들이 중국에 화를 낼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의 산업 발달은 '저렴한 비용'을 기반으로 한다. 인건비가 싸고 무엇보다 환경규제가 약해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 진출을 시도하면서 중국의 고도 산업 성장이 가능했다. 7~80년대 한국이 싼 인건비와 저렴한 환경규제로 대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거기에는 한국 기업, 한국 소비자의 지분도 상당하다. "앞으로의 세계는 중국이 주도할 것이다"같은 고리타분한 조언이 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며 당시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주입됐다. 중국으로의 사업 진출이 활발해지던 시기의 얘기다. 말인즉슨, 중국의 산업을 지탱하는데 한국의 소비도 한 몫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국으로 이식된 수많은 한국 기업.
다시 말하면 한반도에서 발생했어야 할 수많은 오염물질이 중국에서 발생해서 한국으로 다시 건너오고 있는 셈이라는 말이다. 화를 내야 할 것은 오히려 중국정부와 중국의 인민들일 수 있다. "왜 너희나라에 뿌려야 할 똥을 우리나라에 헐값에 팔아넘겼냐"고.
2.
애초에 '미세먼지'라는 용어 자체도 이해가지 않는 측면이 많다. 어떤 물질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미세한 입자의 오염물질을 미세먼지라고 통칭하면서 오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진단과 규명, 원인분석과 해결책 마련도 어려워지는 일이다.
그 효과는 오직 공포를 더 쉽고 빠르게 확산시킬 때만 용이하다. 난 여전히 미세먼지가 뭔지 알 수 없다.
미세먼지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면. 그래서 재난을 선포해야 한고 정부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표할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해야 할 일은 화를내고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2018. 12. 26. 20:39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처지도 그렇고 깜냥도 그렇고. 그저 말이나 보태면서 스스로 위안삼는 글같은 것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유시민 이 자는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남의 속 뒤집는 재주는 하늘에서 내는 것일까.
"문재인과 노무현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다"같은 말을 어떻게 저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할 수가 있나. 솔방울로 수류탄이라도 만드신 건가. 근본적으로 권력자를 똑같이 보아선 안된다고 언론을 탓한다. 어불성설이다. '권력'은 인격이 아니다. 선한 권력과 악한 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 권력이란 '위정'과 '피정'(被政)의 역학에서 발생한다. 정치의 자리에 인격을 끼워넣는 순간 정치는 도그마의 종교로 변질된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의 정치는 옳다' 같은 어리석은 말을 내뱉게 되는 것. 대통령을 뽑아놓고 왜 그를 지지하지 않느냐는 말을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심지어 지식인이고 저술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까. 박근혜는 남의 나라 국민들이 뽑았나.
유시민은 '이명박이 감옥에 있는데 왜 아무도 이명박을 신경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감옥에 있는 그에게 왜 신경을 써야 하는가. 지금 내 삶에 직결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문재인으로 대변되는 '권력'이다. 그들에 대한 비판과 감시가 언론의 역할이다. 박근혜가 감옥에 가면 항문검사를 할지 안할지, 이명박이 명절에 어떤 특식을 원했는지를 낄낄거리는 것이야말로 언론의 기능에서 한참을 벗어난 저열함이다. 도대체 왜 '우리편을 들지 않으면 옳지 않다'는 신념을 강변하는가. 그것은 차라리 전도의 영역이다. 요즘은 전도도 그런식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유행어는 이명박 시절이 아니라 김대중 - 노무현 정부에서 파생됐다. IMF를 지나 아무나 신용카드를 만들던 금융자본 비대화의 시대. 돈이 삶의 전부라고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벌라고 정부가 강변하던 시대. 사기여도 좋으니 돈을 벌라던 말이 황우석과 심형래와 용산참사와 쌍용차 사태를 만들었다. 유시민은 "박근혜가 박정희의 고도성장 신화를 부추겼다"고 하지만 고도성장을 위해 다이나믹 코리아를 외치고 스크린쿼터를 없애고 광우병걸린 쇠고기를 들여오면서까지 한-미 FTA를 추진했던 것도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가. 그러면서 왜 문재인을 욕하는 뉴스가 가짜뉴스라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나.
이 정부의 국정수행 능력은 바닥이다. 대부분 산업의 지표는 최악을 가리키고 있다. 특히 한국경제를 지탱해오던 주요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건설 경기는 역대 최악의 수준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하겠다고 변죽을 울렸지만 정작 최저임금 인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사노위는 노동자를 포위하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다. 눈속임이다. 양두구육 같은 사자성어를 배우기에 적합한 사례일까. 산업정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제시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한다고 볼멘 소리를 낸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현재의 정책이 결국엔 실패를 만들 것이라고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하고 사회적 투자와 공적 서비스의 확충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나온 것이 광주형 일자리와 삼성 바이오의 분식회계 눈감아주기와 한국GM의 법인분리다. 경제적 정의도 원칙도 자기들의 말에 대한 책임도 없는 이들이 '선한 권력'이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전 장관이면서 자칭 지식인이고 전대통령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공적 자리에서 할 수 있나.
멍청이 아니면 사기꾼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지금 굴뚝 위의 노동자들에게, 전광판 위의 택시 노동자에게,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어버린 그 청년의 부모와 친구들에게 말해보라. 이 정부의 산업-경제-노동 정책이 향하는 곳은 당신이 그토록 혐오해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사람들의 지탄을 계속 받아야 한다는 이명박의 정부가 향하던 곳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보다 차라리 이명박같은 괴물을 호출한 괴물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상가임대차 보호법 개정을 반대하고 한미FTA를 추진하고 당내 여성주의자들에게 해일 앞에서 조개나 줍고 있다며 비난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유시민과 유시민의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가. 노무현이 죽었다고? 그래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인가? 그 복수와 양친을 모두 정적의 총탄에 잃은 박근혜가 다짐하는 복수는 얼마나, 왜 다른가.
유시민의 기사를 읽은 비슷한 시간에 굴뚝 위에 400일이 넘게 올라있는 노동자의 글을 읽었다. 세계 최장 고공농성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언론의 수많은 기사에 정작 정권을 비판하고 노동관계 악법을 철폐하라는 절절한 요구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는 개탄. 도대체 누가 억울하고 누가 슬퍼야 하는가.
콜로세움이라고 했나. 잔인하다고 했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누구이고, 그걸 보면서 '보는 내가 다 아프네' 수준의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잔인한 사람은 누구인가.
2018. 8. 22. 10:45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모처럼 정치 이야기.
어제는 누가 정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 고난도의 의사활동이 아니냐고 묻길래
정치는 인간이 가장 여상스럽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깃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 것. 정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 것.
암튼 이실직고하자면, 다른 용도로 쓴 글이었지만 애초의 용도는 폐기됐다. 들인 시간이 있어 버리기는 아까우니 여기라도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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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뉴욕 타임스는 ‘정치적 올바름의 패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올바름의 패배’라는 말은 자가당착이다. 트럼프를 선택한 이들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졌다. 소수자 인권을 옹호하고 의료혜택의 범위를 넓히고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진보-좌파가 선점했기 때문에 생긴 관념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주민보다는 자국민의 권익을 우선하고 시장을 활성화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의 정치적 선택이 올바르지 않다고 믿는 정치 주체가 어디 있겠나. 애초에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비근한 예로 워마드의 정치를 들 수 있다. 워마드에게 정치란 남성으로부터 권력을 앗아오는 일이다. 일부 언론에선 ‘남성혐오집단’라고까지 부르는 워마드는 여성인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남성이 모든 권력을 쥐고 여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워마드는 그 인식 위에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운동과 정치를 한다. “좋은 한남은 재기한 한남뿐”이라는 구호가 그녀들이 추구하는 올바름을 지시한다. 그녀들 역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흔히 속칭하는 ‘문빠’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들에게 올바른 정치는 문재인 혹은 노무현으로 대변되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통치를 지속하는 일이다. 이들이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민주당만이 올바른 정치주체이고 다른 세력들은 적폐이거나 ‘정알못’(정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이 문빠들에게 인권 감수성이 없고 노동을 천시한다고 아무리 쏘아붙여봤자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범주란 이토록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 중 가장 무겁고 강한 힘을 지닌 것은 올바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하지만 신념이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의심에서 출발하지만 애초부터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신념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신념은 강한 동력을 낳는다. 따라서 신념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는 건 언제나 혁명이나 종교 같은 ‘일방향’의 운동이다. 옳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고, 옳기 때문에 굽힘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운동. 반면 정치의 영역에서 올바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다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올바름’이란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 쓰는 말이지 ‘다방향’의 운동인 정치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본질이란 제각각의 주체가 물고 뜯고 싸우고 화해하며 각자의 삶을 증명하고 견주는 투쟁이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지 묻고 답하며 끊임없이 삶과 살을 맞대고 부비는 일. 따라서 정치에서 어떤 올바름은 어떤 곳에선 필연적으로 그르다. 어차피 ‘올바름’이란 인식의 문제다. 어디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은 가변하게 마련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허위 개념의 문제는 ‘올바름’ 바깥을 상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 올바름은 의심과 사유의 언어가 아니기에 자신의 올바름이 성립하는 순간 그 바깥을 사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정치에 사유 대신 신념이 스미는 순간, 정치는 종교로 변한다. 세상의 모든 모순을 남성의 젠더권력에서 찾으려는 워마드의 인식은 여성을 억압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의 교차를 외면하는 오류를 배태한다. 이 외면은 결국 그녀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여성의 해방에서도 멀어지는 결과를 만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억압의 기재가 젠더문제에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롭다. (조악한 예일 수 있지만) 여성 고용주의 갑질에 핍박받는 여성 노동자는 상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투쟁할 수 없을까? 여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워마드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일까?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올바름을 강변하는 태도가 다른 이들의 인권을 짓밟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국에서 생명을 위협받아 한국으로 온 예멘의 난민들을 남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사지로 몰아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논리적으로 마땅히 의심하고 고민해야 할 오류들에 대해 적어도 오늘까지의 워마드는 대응하지 않고 있다. 올바름에 대한 신념화가 오류를 수정할 기회마저 앗아간 셈이다.
(워마드는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을 PC(political correctness)충이라고 조롱한다.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행동하면서 상대의 옳음을 조롱하는 촌극.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혁명가 레닌이다. 혁명가였던 레닌은 혁명의 성공 이후 정치가가 됐고, 정치에서 올곧은 ‘올바름’이란 개념은 성립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생디칼리즘을 비롯한 급진적인 좌익운동과 최악으로 치달은 러시아의 경제 상황, 다양한 욕망과 요구, 상황. 대치되는 입장. 그가 ‘믿었던’ 올바름에 대한 강박만으로는 현실 세계를 헤쳐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된 것. 레닌은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에서 극좌파들의 순수한 정치(말이 좋아 순수한 정치지, 레닌은 이를 비현실적인 근본주의라고 말한다. 책 제목부터 좌익 소아병이다.)를 비판하며 처음 ‘정치적 올바름’이란 표현을 썼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일부 활동가들이 내세운 구호는 “타협 없이 우회 없이 전진하자”였다. 어떠한 타협과 절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수사로 포장된 교조주의를 레닌은 ‘좌익소아병’이라고 일갈했다.
세계는 단편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정치는 수많은 삶과 욕망이 뒤엉켜 교차하는 유기체와 같다. 그래서 복잡한 사건들의 뒤엄킴을 한 번에 해결해줄 올바른 법정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애초에 이 난국을 타개할 전가의 보도 같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환상이다. 레닌의 일갈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유아적 발상에 불과하다. 혁명이나 종교. 사탄이나 적을 상정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은 내재화된 신념을 동력으로 삼는다. “오직 이것만이 옳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필연적으로 적대의 정치를 양산한다. 올바름의 여집합은 곧 올바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무찌르는 단순한 적대 행위가 정치일 수는 없다. 정치란 말했듯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많은 것들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애당초 올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단정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그렇다고 신념화 한) 언어는 마치 무균실의 언어와도 같다.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은 변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역동성보다는 자기의 결벽을 과시하는 정체의 언어로 기능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의 우아한 세계에 남아있기 위한 비겁한 액세서리. 외부의 균으로부터 나의 언어를 공고히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덫에 걸린 언어는 살과 살을 비벼 삶과 삶을 바꾸는 실재의 언어일 수 없다. 상충하는 가치, 가변하는 정의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균실에 갇힌 이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워마드의 운동은 정말 여성의 해방이라는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까. 문빠들의 정치가 그들의 말처럼 사람이 우선인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워마드가 세계의 모든 모순을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억압이라는 단순한 인식으로 환원하면 돌아오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진 여성주의 운동의 한계다. 문빠들이 민주당의 집권으로 정치의 모든 것을 환원하려 하면 맞닥뜨리게 될 것은 거대한 괴물이 돼버린 자신들의 모습이다. 변하는 것은 없이 신념화된 올바름을 경전처럼 외우는 도그마에 빠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올바름의 강박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질문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세계를 변화시킬 전복적 상상을 시도하는 일이다. 정치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올바른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상정하는 일은 그리고 그 주박에 갇히는 일은 가능성을 거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정치란 무균실 바깥을 상상하고 그 경계를 넘는 일이다. 가능성을 점지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오류와 실패를 긍정하는 일이다. 오류와 실패에서 다시 새로운 상상과 가능성을 담지 하는 일이다. 정치란 그렇게 그저 살을 부비며 삶을 부닥쳐 살아가는 일이다.
2018. 6. 14. 00:55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1.
신지예 후보와 녹색당에 표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사실 다른 선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공보물을 읽고 인터넷에 후보자 이름을 검색해보는 정도. 민주당에 단 한표도 주지 않는 선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간 했으나 별로 대단한 다짐은 아니었다.
1-1.
우리동네에선 지지정당인 녹색당을 찍을 수 있는 표가 단 2표 뿐이다. 주요 약력이 노무현과 문재인, 박원순인 사람들은 주로 '청년'이나 '서민' 같은 표어을 썼지만 그들의 정책에는 개발과 투기뿐이다. 인지부조화.
2.
민주당을 찍지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무엇보다 궁중족발 때문이다. 궁중족발은 서울시장 후보들의 선거전이 한창이던 지난 4일 새벽에 지게차를 동원한 철거용역들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과저에서 활동가들은 부상을 입었다. 궁중족발 사장 내외는 갈 곳을 잃었다. 삶을 잃은 거다.
이 상황에 궁중족발로 향한 서울시장 후보는 신지예 뿐이었다. 김문수는 그때도 서울 곳곳을 재개발 하겠다는 정신나간 소리나 하고 있었다. 민주당과 박원순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안철수는 뭐. 굳이.
늘 그렇듯이 민주당에 화가 나는 것은 그들이 주댕이만 그럴싸하게 나불거리기 때문이다. 사기를 치기 때문이다. 김문수는 차라리 그런 사기는 안치잖아. 그냥 순수하게 개새끼지.
박원순은 지난 해 궁중족발 사장님이 철거용역에 의해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나자, "그런 사태가 다시는 있어선 안된다"며 "철거현장 인권지킴이단"같은 걸 만들었다. 도대체 그 인권지킴이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나. 지게차가 난입하고 활동가들이 다치고 쓰러질 때, 그걸 방조하던 경찰과 공무원들은 그 인권지킴이들과 일면식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한 건가? 하다못해 박원순은 후보이면서 왜 와서 단 한마디라도 그들을 위로하지 못했나? 그는 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직 서울시장을 또 시장으로 뽑아야 할 이유가 뭔가. 옥바라지 골목에서도 그랬고 장위동에서도 그랬다. 그 번지르르하고 기름기 낀 말 말고 정말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나.
2-1.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과 부동산 대책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가장 화가 났던 건 TV에 나온 유시민이 "젠트리피케이션은 답이 없다. 어쩔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봤을 때다. 개새끼. 열린우리당의 국회의원 유시민은 노무현 정부당시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던 주택임대차 보호법과 상가임대차 보호법을 "시정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이라며 반대했다. 그 새끼는 임대료 인상 상한선을 없애야 집주인과 건물주들이 임대 사업에 매력을 느껴 공급이 활발해지면서 시장이 호조를 띌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꼴이다. 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 관계에서 임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나 다름없다. 그래 놓고선 이제와서 한다는 말들이란 게 건물주들이 양심적이길 바라는 것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느니. 시장이라는 자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 당의 젊은 정치인들은 개발, 뉴타운, 뉴딜 같은 말을 정책 구호의 가운데 자리에 놓고 있다.찍어주고 싶겠나. 차라리 자유당애들은 그런 눈에 빤한 거짓부렁은 안한다니까. 그러니 문빠라면 남경필을 찍으세요... 으응??
3.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민중당의 선거 펼침막이 붙어있다. "자유한국당에 단 한석도 주지 맙시다". 얼마전에 화제가 됐던 부산지역 민중당 후보의 영상에는 자유한국당사 앞에 압정을 뿌리는 퍼포먼스가 담겨있었다. 뭐하는 짓인가. 정당의 선거운동이 자기의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정당을 파괴하는 것이 목표라는 건 참 치졸하고 지질하다.
십분 이해해서 반민주 반통일 세력인 자유한국당이 남한사회의 주요 모순이라고 치더라도, 그 앞에 압정을 뿌리는 식의 행동이 어떤 정치적이고 실질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나. 그게 선거국면의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투쟁인가. 어린애 장난같은 퍼포먼스로 얻을 수 있는 건 대중의 지지와 운동의 성과가 아니라 한순간의 웃음뿐이다. 순간의 유쾌함과 성과를 혼동해선 안된다. 심지어 난 그게 유쾌하거나 웃기지도 않았다. 적에게도 예의라는 것을 보일 필요는 있다. 천박한 싸움으로는 귀한 승리를 만들지 못한다.
더욱이 민중당의 당대변인과 후원회 사무국장이라는 이들이 매일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에서 이 사건을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하면서 "댓글에서 이를 비판하는 내용들은 다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는 놀랍기까지 했다. 지독할 정도의 자기완결성. "우리가 틀렸다"거나 "실수였다, 사려깊지 못했다"는 말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다. 정당이라면, 운동하는 진보정당이라면 더더욱.
찾아보니 대부분의 민중당 후보들이 자유한국당에 의석을 주지 말자는 구호를 함께 쓰고 있었다. 중앙당 차원의 결정이었겠고, 지금 민중당 중앙이 어떤 노선으로 가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존재의 의미를 다른 곳에서 찾아선 안된다. 존재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안에서 찾는 것. 이거 그쪽에 있는 선배들이 옛날 고리쩍에 써놨던 문건에도 있는 말이다.
4.
이번 선거 최고의 장면은 신지예와 고은영이었다. 오늘 당장 녹색당의 영향은 미비할 것이고, 어쩌면 앞으로 수십년간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박해받을 것이고 에콜로지는 멸시와 천시, 괄시, 심지어 등한시 당할 것이지만 그런 건 원래 오래도록 하는 일이다. 난 녹색당의 모든 정책에 동의하지 않고 정치전력에도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꾸준히 응원하고 비판할 것이다. 그런 건 원래 오래도록 하는 일이다. 싸우고 삐지고 그래도 또 합의하고 논의하며 쟁명하고.
가끔 녹색당 강령을 읽는다. 마음을 빨래하는 기분으로.
"우리는 ‘녹색당’이라는 작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싹틔워 인류가 지구별의 뭇 생명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초록빛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작은 도토리 하나가 만드는 떡갈나무 혁명이며, 여러 무늬와 색깔을 가진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지구별의 생명을 지키는 지구의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나침반이자 등대이며, 녹색전환의 씨앗을 심는 농부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함께, 공기의 순환이나 에너지의 흐름, 그리고 생명의 고동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2018. 5. 6. 18:41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2018. 5. 6. 18:39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2018. 5. 6. 18:36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2018. 5. 6. 18:34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쇼타로 컴플렉스’와 ‘로리타 콤플렉스’는 다른 것이냐는 주제를 두고 한동안 온라인이 시끄러웠다. 어느 방송에서 한 여성철학자가 쇼타콤과 로리콤을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젠더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대상이 되는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를 기반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로리콤이나 아동성애 같은 심각한 주제는 물론 데이트 비용 부담,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부의 존재 같은 이제 꺼내기도 지겨운 케케묵은 이야기들까지. 젠더 권력에 대해, 사회적 맥락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으면 어정쩡한 ‘이퀄리즘’따위에 빠지기 십상이다. “밥값 더치페이도 안하는 메갈들” 같은 빻은 소리나 하게 되겠지.
# 바야흐로 ‘페미니즘 리부트’
근래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는 비약적인 양적 확장을 이뤘다. 이제 사회 곳곳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 양적확장이 곧 질적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온라인 공간’에서만큼은 그렇게 보인다. (페미니즘 논의의 확장에 SNS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의 역할은 막중했다. 운동의 주요 전선은 여전히 라인 위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온라인상에서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갈등과 대립이 불러온 폭력과 차별에 대한 논란은 페미니즘 운동 전체에서도 매우 높은 의미량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건 ‘권력’과 ‘젠더권력’을 혼동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소수자에 대한 페미니즘 일각의 배척이다. ‘쓰까페미(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부르는 말)’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대립.
최근엔 한 학자가 학회에서 논문발표를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레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주로 그 학자의 발표를 반대하며 학회를 ‘압박’했다. 그 학자가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를 조장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들이 말하는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란 게이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나 트랜스젠더들의 성별정체성을 옹호하는 일이었다. ‘압박’이 이뤄졌고 ‘권력’이 작동했다. 이것은 기울어진 ‘젠더권력’이라는 사회적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할 일일까. 아니면 ‘권력’을 통한 억압이라는 기성의 구조가 외피를 바꿔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일일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연예인 지망생의 SNS도 최근의 화제였다. (그 연예인 지망생은 이런저런 사건들로 데뷔 전임에도 매우 유명하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받았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내용인즉슨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 그녀는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 하는 이들에게 “넌 여성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발언이다. “나의 운동에서 당신들을 배제하겠다”는 발언이기도 하다. 존재를 단정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것을 어떤 이름이든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발화의 형태가 온건하든 급진적이든, 운동의 요체는 소외된 주체를 복원하는 일에 있다. 그것은 나의 운동이 다른 무엇을 소외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하다. ‘젠더권력’의 불공평함을 바로 잡기 위해 또 다른 ‘권력’으로 폭력과 차별, 착취와 억압을 허용하는 것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게 제대로 ‘젠더권력’의 불공평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지정성별 남성의 이성애자이고 뚱뚱하고 지성 피부에 탈모가 온 남성이다. 난 남성으로서 젠더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학벌이 없는 흙수저 노동자로서 이 사회의 계급구성의 하단부에 놓여있다. 난 이성애자로서 주류에 있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로서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선 배제되고 있다. 내 다양한 정체성들은 서로 어떤 것들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소외를 이중으로 가속시키기도 하고 중화시키기도 한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킴벌리 크랜쇼는 ‘교차로에서의 교통사고’를 예로 들었다. 교통사고가 교차로에서 일어날 경우, 사고는 오직 한 방향에서 온 차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 때로는 모든 방향에서 오는 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 사고는 더욱 커진다. 사고의 수습방법도 다양해지고 책임추궁의 방식도 달라진다. 페미니즘 운동뿐이 아니라 모든 운동은 사실 서로의 관계, 그리고 주체들의 배치에 따라 생성될 수밖에 없다. 굳이 운동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존재하는 모든 일이란 타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억압된 여성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에서 자기의 억압을 인식하듯, 소외된 노동자가 배제된 장애인에게서 자기의 소외를 발견하듯. 이 모든 것들은 관계를 맺고 있고 어느 하나만이 자기의 정체성일 수는 없다.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이 어떤 배치를 이루고 어떤 기재와, 어떤 욕망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삶의 양식도, 그 삶의 양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도 발생한다.
레디컬 페미니즘이 의미 있었던 지난 세기는 페미니즘이 ‘조개 줍는 소리’로 치부되던 당시의 운동에 저항하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8~90년대를 관통하며 레디컬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이 고유의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남성이 전유하던 운동의 부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다. 노동이 해방되면 여성도 해방된다던 당시 꼰대 아재들의 주장과 ‘자궁달린 여자만 여자’라며 ‘당신이 아닌 자들’을 배제하는 지금의 주장은 얼마나 다른가. 세상을 단 하나의 책으로 이해하고 단 하나의 창으로 관찰할 순 없다. 한국사회, 아니 사실은 이 세계 전체가 기울어진 젠더권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오직 그것만이 문제고 나머지는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XX염색체와 자궁을 가진 존재들만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이고 나머지는 다 배부르고 편한 소리 늘어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니터 바깥으로
고백하자면, 이건 다시 쓰는 원고다. 수정이 늦어 원래 썼던 원고가 이번호 <워커스>에 실렸다. 이 글은 아마 인터넷을 통해서만 유통될 테다. 난 수정되지 않은 지난 원고에서 “여성주의는 따듯한 마음과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여성주의만 진짜 여성주의라고 광광우럭 하는 꼴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으면 생존조차도 힘에 부쳐야했던 여성에 관해 사유해 본적도 없는 속편하고 배부른 한남충의 ‘진짜 페미’인정 운운. 뭐 그런 거. 진의가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 한계를 극복해 더 많은 이해와 연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그러면서 종종 칭찬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고.
내가 하려는 노력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 바깥을 끊임없이 살피려는 노력이다. 젠더권력을 날 때부터 가져서 실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삶을 애써 보려하는 노력. 거기서 나의 폭력을 떠올리고 당신이 받았던 억압을 상기하려는 노력. 내 삶의 모순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고 당신의 싸움에 함께 연대하려는 노력. 그렇게 나와 당신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며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실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음을 깨닫는 노력. 그렇지만 당신의 존재와 나의 존재는 특수성을 지니며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노력. 내가 생각하는 노력은 그런 것이다. 그저 페미니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혹은 운동은 바깥을 향해야 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든 그 바깥에도 고통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고통이 또 다른 폭력과 차별과 착취를 용인해주는 자유이용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창의 모양에 따라 세계는 달리 보이지만 진짜 세상은 창으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많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다못해 창문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했듯 '넷페미’는 지금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전선이다. 수없이 많은 주의와 주장, 말과 글, 이미지가 온라인을 떠돈다. 사회적 조류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실제 세계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넷페미의 운동과 투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서 유통되는 모든 것들이 정말 모든 것은 아닐 수 있다. ‘온라인의 언니들’ 덕분에 코르셋을 벗었다지만, 하지만 정말 당신은 정말 코르셋을 벗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맘에 들고 편한 코르셋으로 갈아입은 것은 아닌지.
2018. 5. 6. 18:31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2018. 5. 6. 18:28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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