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에 대하여


1. 

며칠동안 미세먼지가 최악이었다. 고들 얘기한다. 사실 미세먼지 대책으로 온 나라에 공포가 떠돌고 있고, 이런 불안함은 예전의 신종플루나 메르스 때처럼 공포를 통한 어떤 '단결'을 유도했다. 


요즘은 다들 만나면 미세먼지 이야기를 했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섰다. 공기청정기를 샀다거나 어떤 공기청정기가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나도 그래서인지 두통이 평소보다 조금 심한 것 같았고 목이 칼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딱히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마스크가 영 불편해서 잘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날아온다는 그 믿음에 대해서나, 미세먼지의 정체에 대해서 더 관심을 보이는 편이다. 내 건강의 문제야, 마스크로 해결될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1-1.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주범이 중국이라는 믿음은 여름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들면 죽는다고 여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낭설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이나 언론이 최악의 중국발 미세먼지를 운운하는 기사에서 위성사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 위성사진이 아닌 경우도 많고, 애초에 먼지 농도는 위성사진으로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시간대별로 먼지 농도의 위성사진을 찍어서 중국의 미세먼지가 한반도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하지만 실제로 한시간 전의 그 먼지가 지금 이곳의 이 먼지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정황에 대해서도 얘기하더라만. 중국이 동해안 지역에 화력발전소와 중공업 공장단지, 쓰레기 소각장을 대규모로 건설하면서 그 유해물질이 한반도로 유입되고 있다는 주장.


그러나 중국은 오히려 엄격한 환경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수도 부근의 도시들에서뿐이 아니라 문제라는 중국 동해안, 한국의 황해 부근의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강력한 환경규제로 인해 생산량의 감축이 일어나고 산업 구조가 재편되며 중국의 산업을 후방에 두고 있는 한국의 산업들에도 영향이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성의 미세먼지 배출량은 감소하고 있다. 베이징을 비롯한 화베이 지방은? 더 엄격한 규제에 의해 더 많이 감소하고 있지.


1-2.

한국의 오염물질 배출량은 정말 줄어들었을까? 중국이야 예의 그 대륙의 기상을 잔뜩 발휘한 엄격한 조치로 (겨울엔 기숙사에 난방도 틀어주지 않는다는 유학생의 이야기를 전해듣기도 했다) 화끈한 저감을 이뤄내기도 하지만 한국은 공포에 떠는 것 만큼의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 화내고 마스크 사재기나 하고 있지.


중국 공업지대의 오염물질 배출량이 줄어드는 동안 한국은 화력발전소를 더 지었고, 남동임해 지역을 중심으로 오염물질 배출량은 더욱 늘어났다. 당진을 중심으로 화력발전소와 제철소, 공업단지가 밀집한 지역의 미세먼지 농도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경이다. 


공기청정기를 돌리기 위해 소모하는 전기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다. 공기청정기를 사서 배달시킨 택배 차량은 디젤 차량이겠지. 공기청정기와 마스크를 만드는 공장은 중국에 있다. 중국이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한국의 미세먼지가 심해진다며?


1-3.

다 떠나서 한국의 미세먼지가 정말 '중국발'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들이 중국에 화를 낼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의 산업 발달은 '저렴한 비용'을 기반으로 한다.  인건비가 싸고 무엇보다 환경규제가 약해서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 진출을 시도하면서 중국의 고도 산업 성장이 가능했다. 7~80년대 한국이 싼 인건비와 저렴한 환경규제로 대기업의 생산기지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거기에는 한국 기업, 한국 소비자의 지분도 상당하다. "앞으로의 세계는 중국이 주도할 것이다"같은 고리타분한 조언이 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하며 당시의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주입됐다. 중국으로의 사업 진출이 활발해지던 시기의 얘기다. 말인즉슨, 중국의 산업을 지탱하는데 한국의 소비도 한 몫하고 있다는 얘기다. 중국으로 이식된 수많은 한국 기업.


다시 말하면 한반도에서 발생했어야 할 수많은 오염물질이 중국에서 발생해서 한국으로 다시 건너오고 있는 셈이라는 말이다. 화를 내야 할 것은 오히려 중국정부와 중국의 인민들일 수 있다. "왜 너희나라에 뿌려야 할 똥을 우리나라에 헐값에 팔아넘겼냐"고.


2.

애초에 '미세먼지'라는 용어 자체도 이해가지 않는 측면이 많다. 어떤 물질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미세한 입자의 오염물질을 미세먼지라고 통칭하면서 오해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진단과 규명, 원인분석과 해결책 마련도 어려워지는 일이다. 


그 효과는 오직 공포를 더 쉽고 빠르게 확산시킬 때만 용이하다. 난 여전히 미세먼지가 뭔지 알 수 없다. 


미세먼지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면. 그래서 재난을 선포해야 한고 정부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표할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해야 할 일은 화를내고 공포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유시민의 뻔뻔함에 대하여

유시민 “로마시대 검투사 경기보듯..뽑아놓고 잔인하다”



처지도 그렇고 깜냥도 그렇고. 그저 말이나 보태면서 스스로 위안삼는 글같은 것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유시민 이 자는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남의 속 뒤집는 재주는 하늘에서 내는 것일까.


"문재인과 노무현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다"같은 말을 어떻게 저렇게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할 수가 있나. 솔방울로 수류탄이라도 만드신 건가. 근본적으로 권력자를 똑같이 보아선 안된다고 언론을 탓한다. 어불성설이다. '권력'은 인격이 아니다. 선한 권력과 악한 권력이란 있을 수 없다. 권력이란 '위정'과 '피정'(被政)의 역학에서 발생한다. 정치의 자리에 인격을 끼워넣는 순간 정치는 도그마의 종교로 변질된다. '그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의 정치는 옳다' 같은 어리석은 말을 내뱉게 되는 것. 대통령을 뽑아놓고 왜 그를 지지하지 않느냐는 말을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심지어 지식인이고 저술가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까. 박근혜는 남의 나라 국민들이 뽑았나.


유시민은 '이명박이 감옥에 있는데 왜 아무도 이명박을 신경쓰지 않느냐'고 묻는다. 감옥에 있는 그에게 왜 신경을 써야 하는가. 지금 내 삶에 직결되는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문재인으로 대변되는 '권력'이다. 그들에 대한 비판과 감시가 언론의 역할이다. 박근혜가 감옥에 가면 항문검사를 할지 안할지, 이명박이 명절에 어떤 특식을 원했는지를 낄낄거리는 것이야말로 언론의 기능에서 한참을 벗어난 저열함이다. 도대체 왜 '우리편을 들지 않으면 옳지 않다'는 신념을 강변하는가. 그것은 차라리 전도의 영역이다. 요즘은 전도도 그런식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유행어는 이명박 시절이 아니라 김대중 - 노무현 정부에서 파생됐다. IMF를 지나 아무나 신용카드를 만들던 금융자본 비대화의 시대. 돈이 삶의 전부라고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벌라고 정부가 강변하던 시대. 사기여도 좋으니 돈을 벌라던 말이 황우석과 심형래와 용산참사와 쌍용차 사태를 만들었다. 유시민은 "박근혜가 박정희의 고도성장 신화를 부추겼다"고 하지만 고도성장을 위해 다이나믹 코리아를 외치고 스크린쿼터를 없애고 광우병걸린 쇠고기를 들여오면서까지 한-미 FTA를 추진했던 것도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왜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가. 그러면서 왜 문재인을 욕하는 뉴스가 가짜뉴스라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나.


이 정부의 국정수행 능력은 바닥이다. 대부분 산업의 지표는 최악을 가리키고 있다. 특히 한국경제를 지탱해오던 주요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건설 경기는 역대 최악의 수준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하겠다고 변죽을 울렸지만 정작 최저임금 인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사노위는 노동자를 포위하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다. 눈속임이다. 양두구육 같은 사자성어를 배우기에 적합한 사례일까. 산업정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제시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한다고 볼멘 소리를 낸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현재의 정책이 결국엔 실패를 만들 것이라고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하고 사회적 투자와 공적 서비스의 확충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나온 것이 광주형 일자리와 삼성 바이오의 분식회계 눈감아주기와 한국GM의 법인분리다. 경제적 정의도 원칙도 자기들의 말에 대한 책임도 없는 이들이 '선한 권력'이기 때문에 어떤 비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어떻게 전 장관이면서 자칭 지식인이고 전대통령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공적 자리에서 할 수 있나.


멍청이 아니면 사기꾼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지금 굴뚝 위의 노동자들에게, 전광판 위의 택시 노동자에게,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어버린 그 청년의 부모와 친구들에게 말해보라. 이 정부의 산업-경제-노동 정책이 향하는 곳은 당신이 그토록 혐오해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사람들의 지탄을 계속 받아야 한다는 이명박의 정부가 향하던 곳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보다 차라리 이명박같은 괴물을 호출한 괴물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상가임대차 보호법 개정을 반대하고 한미FTA를 추진하고 당내 여성주의자들에게 해일 앞에서 조개나 줍고 있다며 비난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유시민과 유시민의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억울한가. 노무현이 죽었다고? 그래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인가? 그 복수와 양친을 모두 정적의 총탄에 잃은 박근혜가 다짐하는 복수는 얼마나, 왜 다른가.


유시민의 기사를 읽은 비슷한 시간에 굴뚝 위에 400일이 넘게 올라있는 노동자의 글을 읽었다. 세계 최장 고공농성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언론의 수많은 기사에 정작 정권을 비판하고 노동관계 악법을 철폐하라는 절절한 요구는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는 개탄. 도대체 누가 억울하고 누가 슬퍼야 하는가.


콜로세움이라고 했나. 잔인하다고 했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 누구이고, 그걸 보면서 '보는 내가 다 아프네' 수준의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잔인한 사람은 누구인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모처럼 정치 이야기.

어제는 누가 정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 고난도의 의사활동이 아니냐고 묻길래

정치는 인간이 가장 여상스럽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깃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 것. 정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 것.


암튼 이실직고하자면, 다른 용도로 쓴 글이었지만 애초의 용도는 폐기됐다. 들인 시간이 있어 버리기는 아까우니 여기라도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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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뉴욕 타임스는 ‘정치적 올바름의 패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올바름의 패배’라는 말은 자가당착이다. 트럼프를 선택한 이들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졌다. 소수자 인권을 옹호하고 의료혜택의 범위를 넓히고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진보-좌파가 선점했기 때문에 생긴 관념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주민보다는 자국민의 권익을 우선하고 시장을 활성화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의 정치적 선택이 올바르지 않다고 믿는 정치 주체가 어디 있겠나. 애초에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비근한 예로 워마드의 정치를 들 수 있다. 워마드에게 정치란 남성으로부터 권력을 앗아오는 일이다. 일부 언론에선 ‘남성혐오집단’라고까지 부르는 워마드는 여성인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남성이 모든 권력을 쥐고 여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워마드는 그 인식 위에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운동과 정치를 한다. “좋은 한남은 재기한 한남뿐”이라는 구호가 그녀들이 추구하는 올바름을 지시한다. 그녀들 역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흔히 속칭하는 ‘문빠’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들에게 올바른 정치는 문재인 혹은 노무현으로 대변되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통치를 지속하는 일이다. 이들이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민주당만이 올바른 정치주체이고 다른 세력들은 적폐이거나 ‘정알못’(정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이 문빠들에게 인권 감수성이 없고 노동을 천시한다고 아무리 쏘아붙여봤자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범주란 이토록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 중 가장 무겁고 강한 힘을 지닌 것은 올바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하지만 신념이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의심에서 출발하지만 애초부터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신념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신념은 강한 동력을 낳는다. 따라서 신념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는 건 언제나 혁명이나 종교 같은 ‘일방향’의 운동이다. 옳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고, 옳기 때문에 굽힘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운동. 반면 정치의 영역에서 올바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다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올바름’이란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 쓰는 말이지 ‘다방향’의 운동인 정치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본질이란 제각각의 주체가 물고 뜯고 싸우고 화해하며 각자의 삶을 증명하고 견주는 투쟁이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지 묻고 답하며 끊임없이 삶과 살을 맞대고 부비는 일. 따라서 정치에서 어떤 올바름은 어떤 곳에선 필연적으로 그르다. 어차피 ‘올바름’이란 인식의 문제다. 어디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은 가변하게 마련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허위 개념의 문제는 ‘올바름’ 바깥을 상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 올바름은 의심과 사유의 언어가 아니기에 자신의 올바름이 성립하는 순간 그 바깥을 사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정치에 사유 대신 신념이 스미는 순간, 정치는 종교로 변한다. 세상의 모든 모순을 남성의 젠더권력에서 찾으려는 워마드의 인식은 여성을 억압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의 교차를 외면하는 오류를 배태한다. 이 외면은 결국 그녀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여성의 해방에서도 멀어지는 결과를 만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억압의 기재가 젠더문제에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롭다. (조악한 예일 수 있지만) 여성 고용주의 갑질에 핍박받는 여성 노동자는 상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투쟁할 수 없을까? 여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워마드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일까?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올바름을 강변하는 태도가 다른 이들의 인권을 짓밟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국에서 생명을 위협받아 한국으로 온 예멘의 난민들을 남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사지로 몰아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논리적으로 마땅히 의심하고 고민해야 할 오류들에 대해 적어도 오늘까지의 워마드는 대응하지 않고 있다. 올바름에 대한 신념화가 오류를 수정할 기회마저 앗아간 셈이다. 


(워마드는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을 PC(political correctness)충이라고 조롱한다.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행동하면서 상대의 옳음을 조롱하는 촌극.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혁명가 레닌이다. 혁명가였던 레닌은 혁명의 성공 이후 정치가가 됐고, 정치에서 올곧은 ‘올바름’이란 개념은 성립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생디칼리즘을 비롯한 급진적인 좌익운동과 최악으로 치달은 러시아의 경제 상황, 다양한 욕망과 요구, 상황. 대치되는 입장. 그가 ‘믿었던’ 올바름에 대한 강박만으로는 현실 세계를 헤쳐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된 것. 레닌은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에서 극좌파들의 순수한 정치(말이 좋아 순수한 정치지, 레닌은 이를 비현실적인 근본주의라고 말한다. 책 제목부터 좌익 소아병이다.)를 비판하며 처음 ‘정치적 올바름’이란 표현을 썼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일부 활동가들이 내세운 구호는 “타협 없이 우회 없이 전진하자”였다. 어떠한 타협과 절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수사로 포장된 교조주의를 레닌은 ‘좌익소아병’이라고 일갈했다. 


세계는 단편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정치는 수많은 삶과 욕망이 뒤엉켜 교차하는 유기체와 같다. 그래서 복잡한 사건들의 뒤엄킴을 한 번에 해결해줄 올바른 법정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애초에 이 난국을 타개할 전가의 보도 같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환상이다. 레닌의 일갈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유아적 발상에 불과하다. 혁명이나 종교. 사탄이나 적을 상정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은 내재화된 신념을 동력으로 삼는다. “오직 이것만이 옳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필연적으로 적대의 정치를 양산한다. 올바름의 여집합은 곧 올바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무찌르는 단순한 적대 행위가 정치일 수는 없다. 정치란 말했듯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많은 것들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애당초 올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단정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그렇다고 신념화 한) 언어는 마치 무균실의 언어와도 같다.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은 변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역동성보다는 자기의 결벽을 과시하는 정체의 언어로 기능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의 우아한 세계에 남아있기 위한 비겁한 액세서리. 외부의 균으로부터 나의 언어를 공고히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덫에 걸린 언어는 살과 살을 비벼 삶과 삶을 바꾸는 실재의 언어일 수 없다. 상충하는 가치, 가변하는 정의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균실에 갇힌 이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워마드의 운동은 정말 여성의 해방이라는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까. 문빠들의 정치가 그들의 말처럼 사람이 우선인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워마드가 세계의 모든 모순을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억압이라는 단순한 인식으로 환원하면 돌아오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진 여성주의 운동의 한계다. 문빠들이 민주당의 집권으로 정치의 모든 것을 환원하려 하면 맞닥뜨리게 될 것은 거대한 괴물이 돼버린 자신들의 모습이다. 변하는 것은 없이 신념화된 올바름을 경전처럼 외우는 도그마에 빠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올바름의 강박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질문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세계를 변화시킬 전복적 상상을 시도하는 일이다. 정치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올바른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상정하는 일은 그리고 그 주박에 갇히는 일은 가능성을 거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정치란 무균실 바깥을 상상하고 그 경계를 넘는 일이다. 가능성을 점지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오류와 실패를 긍정하는 일이다. 오류와 실패에서 다시 새로운 상상과 가능성을 담지 하는 일이다. 정치란 그렇게 그저 살을 부비며 삶을 부닥쳐 살아가는 일이다.  



613 지방선거 후기


1. 
신지예 후보와 녹색당에 표를 던지기 위해서였다. 사실 다른 선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공보물을 읽고 인터넷에 후보자 이름을 검색해보는 정도. 민주당에 단 한표도 주지 않는 선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간 했으나 별로 대단한 다짐은 아니었다.


1-1.
우리동네에선 지지정당인 녹색당을 찍을 수 있는 표가 단 2표 뿐이다. 주요 약력이 노무현과 문재인, 박원순인 사람들은 주로 '청년'이나 '서민' 같은 표어을 썼지만 그들의 정책에는 개발과 투기뿐이다. 인지부조화.


2. 
민주당을 찍지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무엇보다 궁중족발 때문이다. 궁중족발은 서울시장 후보들의 선거전이 한창이던 지난 4일 새벽에 지게차를 동원한 철거용역들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과저에서 활동가들은 부상을 입었다. 궁중족발 사장 내외는 갈 곳을 잃었다. 삶을 잃은 거다.


이 상황에 궁중족발로 향한 서울시장 후보는 신지예 뿐이었다. 김문수는 그때도 서울 곳곳을 재개발 하겠다는 정신나간 소리나 하고 있었다. 민주당과 박원순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안철수는 뭐. 굳이.

늘 그렇듯이 민주당에 화가 나는 것은 그들이 주댕이만 그럴싸하게 나불거리기 때문이다. 사기를 치기 때문이다. 김문수는 차라리 그런 사기는 안치잖아. 그냥 순수하게 개새끼지.


박원순은 지난 해 궁중족발 사장님이 철거용역에 의해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나자, "그런 사태가 다시는 있어선 안된다"며 "철거현장 인권지킴이단"같은 걸 만들었다. 도대체 그 인권지킴이들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나. 지게차가 난입하고 활동가들이 다치고 쓰러질 때, 그걸 방조하던 경찰과 공무원들은 그 인권지킴이들과 일면식이 없어서 그런 짓을 한 건가? 하다못해 박원순은 후보이면서 왜 와서 단 한마디라도 그들을 위로하지 못했나? 그는 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현직 서울시장을 또 시장으로 뽑아야 할 이유가 뭔가. 옥바라지 골목에서도 그랬고 장위동에서도 그랬다. 그 번지르르하고 기름기 낀 말 말고 정말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나.


2-1.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과 부동산 대책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가장 화가 났던 건 TV에 나온 유시민이 "젠트리피케이션은 답이 없다. 어쩔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봤을 때다. 개새끼. 열린우리당의 국회의원 유시민은 노무현 정부당시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던 주택임대차 보호법과 상가임대차 보호법을 "시정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이라며 반대했다. 그 새끼는 임대료 인상 상한선을 없애야 집주인과 건물주들이 임대 사업에 매력을 느껴 공급이 활발해지면서 시장이 호조를 띌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꼴이다. 임대차보호법은 임대차 관계에서 임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나 다름없다. 그래 놓고선 이제와서 한다는 말들이란 게 건물주들이 양심적이길 바라는 것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다느니. 시장이라는 자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 당의 젊은 정치인들은 개발, 뉴타운, 뉴딜 같은 말을 정책 구호의 가운데 자리에 놓고 있다.찍어주고 싶겠나. 차라리 자유당애들은 그런 눈에 빤한 거짓부렁은 안한다니까. 그러니 문빠라면 남경필을 찍으세요... 으응??


3.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 근처에는 민중당의 선거 펼침막이 붙어있다. "자유한국당에 단 한석도 주지 맙시다". 얼마전에 화제가 됐던 부산지역 민중당 후보의 영상에는 자유한국당사 앞에 압정을 뿌리는 퍼포먼스가 담겨있었다. 뭐하는 짓인가. 정당의 선거운동이 자기의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정당을 파괴하는 것이 목표라는 건 참 치졸하고 지질하다.


십분 이해해서 반민주 반통일 세력인 자유한국당이 남한사회의 주요 모순이라고 치더라도, 그 앞에 압정을 뿌리는 식의 행동이 어떤 정치적이고 실질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나. 그게 선거국면의 진보정당이 할 수 있는 투쟁인가. 어린애 장난같은 퍼포먼스로 얻을 수 있는 건 대중의 지지와 운동의 성과가 아니라 한순간의 웃음뿐이다. 순간의 유쾌함과 성과를 혼동해선 안된다. 심지어 난 그게 유쾌하거나 웃기지도 않았다. 적에게도 예의라는 것을 보일 필요는 있다. 천박한 싸움으로는 귀한 승리를 만들지 못한다.


더욱이 민중당의 당대변인과 후원회 사무국장이라는 이들이 매일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에서 이 사건을 별 일 아니라고 치부하면서 "댓글에서 이를 비판하는 내용들은 다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는 놀랍기까지 했다. 지독할 정도의 자기완결성. "우리가 틀렸다"거나 "실수였다, 사려깊지 못했다"는 말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다. 정당이라면, 운동하는 진보정당이라면 더더욱.


찾아보니 대부분의 민중당 후보들이 자유한국당에 의석을 주지 말자는 구호를 함께 쓰고 있었다. 중앙당 차원의 결정이었겠고, 지금 민중당 중앙이 어떤 노선으로 가는지 보여주는 일이다. 존재의 의미를 다른 곳에서 찾아선 안된다. 존재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안에서 찾는 것. 이거 그쪽에 있는 선배들이 옛날 고리쩍에 써놨던 문건에도 있는 말이다.


4.
이번 선거 최고의 장면은 신지예와 고은영이었다. 오늘 당장 녹색당의 영향은 미비할 것이고, 어쩌면 앞으로 수십년간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박해받을 것이고 에콜로지는 멸시와 천시, 괄시, 심지어 등한시 당할 것이지만 그런 건 원래 오래도록 하는 일이다. 난 녹색당의 모든 정책에 동의하지 않고 정치전력에도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꾸준히 응원하고 비판할 것이다. 그런 건 원래 오래도록 하는 일이다. 싸우고 삐지고 그래도 또 합의하고 논의하며 쟁명하고.


가끔 녹색당 강령을 읽는다. 마음을 빨래하는 기분으로.


"우리는 ‘녹색당’이라는 작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싹틔워 인류가 지구별의 뭇 생명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초록빛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는 작은 도토리 하나가 만드는 떡갈나무 혁명이며, 여러 무늬와 색깔을 가진 자유로운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우리는 지구별의 생명을 지키는 지구의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나침반이자 등대이며, 녹색전환의 씨앗을 심는 농부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함께, 공기의 순환이나 에너지의 흐름, 그리고 생명의 고동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지예와 고은영을 비롯한 모든 녹색당 후보들의 선전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아무말 아무말 아무말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아무말 아무말 아무말

“그래서 청년의 문제가 뭔데?” 물으면서 <아무말 큰잔치>를 시작했다. 청년 문제를 주제로 매달 15매의 원고를 써내라는 도무지 무리한 청탁을 받았고,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는 말로 첫 회 원고를 때웠다. 써놓고 보니 너무 아무말이나 지껄인 것 같아 내친김에 코너 이름도 <아무말 큰잔치>로 지었다. 지난 29호에서 시작했고 이 원고는 아마 40호에 실리게 될 테니, 1년 동안 그렇게 아무말이나 막, 그리고 잘 떠들어댔다. 아무튼, 지나 생각해보니 (실은 구색을 끼워 맞춰 보니) 코너 이름을 잘 지었구나 싶다.

애초의 기획의도였던 청년의 문제란 어쩌면 우리가 언어를 상실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아닐까. 400자의 트위터, 사진과 해시태그의 인스타의 세계에는 담을 수 없는 긴 이야기. 진지충의 오글거리는 이야기. 설명충의 따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

얼마 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자기의 ‘배우론’을 이야기하던 젊은 배우에게 면박을 주던 진행자들을 봤다. ‘오그라든’ 손발을 내밀면서 “혹시 아직 싸이월드 하세요?”라고 묻더라. 그러게, 싸이월드를 하던 때만 해도 우린 사이좋은 사람들과 함께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지금보다는 많이 나눴다. 삶이 어쩌고, 세계가 저쩌고. 내가 처음으로 PC통신이라는 걸 시작했을 땐 더 했다. 그때 파란 바탕의 ‘BBS’에서 만난 누나와 형들은 짤방 한 장, 3분 순삭되는 요약으로는 차마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떠들고 욕하고 싸우고 그랬던 것 같다. 원고지에 눌러쓴 주의와 주장을 투고하고 연애편지에 마음을 담던 시대는 더 진지하고 오글거렸겠지. 시대는 변하고 기술은 발달하고 거기에 맞춰 사람도 취향도 트렌드도 변해가겠지만 그 흐름의 방향을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언어를 잃어가는 과정’이겠다.

오글거린다는 말이 나온 게 언제더라. 그 말이 나온 후부터 우리는 진지한 이야기를 견딜 수 없게 된 것 같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가 된 이후 텍스트의 자리를 이미지가 차지하게 된 것 같다. 긴 글을 올리고 삭제당하지 않기 위해 올리던 ‘짤림방지용 사진’이 이제 긴 글을 대신한다. 스마트폰과 트위터가 등장하자 400자가 넘는 글은 길다며 읽지 않는다. 조금 진지한 글이 올라오면 ‘진지충’, 조금 긴 글이 올라오면 ‘설명충’이라는 놀림이 따라붙는다. 쿨과 담백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사유의 언어는 유실됐고 비디오와 스킵과 유동성의 세계에서 텍스트에 정주하며 행간을 비집는 상상력의 언어는 도태됐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언어는 상실했다.

저마다 힙스터가 되겠다고 하지만 정작 몰개성화하는 일이란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의 언어로 자기를 피력하지 못 하는 일이다. 수십 명이 같은 장소에 모여 비슷한 옷을 입고 모두 똑같이 급식체로 말하는 게 무슨 힙스터야. 타자를 혐오하는 일은 타인과 주고받는 언어가 사라진 일이다. 타인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리 없다. 생리휴가를 말했더니 군대나 가라고 말하는 빈약한 언어 말이다. 세계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그 단순한 논리에 끼워 맞추지 못한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광기도 마찬가지. 그의 언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선과 악만이 있고 우리 편이 무조건 좋은 편이라는 단순한 세계의 단순한 언어.
과거로 돌아가자, 스마트폰을 파괴해라, 옛날이 좋았어, 20대 이 ‘멍청한 개새끼’. 이런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러다이트 운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쿨과 담백, 편의와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위해 무엇을 버렸는지 상기해 볼 일이라는 거다.

우리는 ‘아무말’을 떠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무말’을 떠들어야 한다. 나는 청년의 문제는커녕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심지어 내 문제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떠들어야 한다. 나는 아무말을 떠들고 그걸 들은 당신은 내게 욕을 한 바가지씩 던져야 하고, 난 발끈해서 또 아무말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호작용이 쌓이고 쌓여야 우리는 서로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될 거다. 세계에 대해 질문하고 주장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3분 순삭을 위해 편집하고 잘라내는 자투리들에 실은 진실이 담길 수 있고, 400자로는 표현해낼 수 없는 더 진지하고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삶의 비밀 같은 게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진지하고 장황하고 느끼하고 오글거리는 아무말을 던져야 하고 그걸 견뎌내야 한다. 한없이 빈궁해지는 언어를 채우는 것만이 나와 당신과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아무도 자기를 잉여라고 부르거나 바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자기를 땡중이라고 부르는 스님들을 보면 대단한 고승대덕처럼 보이기도 했다. 요즘은 다들 자기를 한없이 가벼이 여기고 잉여라고 여기니까,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만으로라도 아무말을 내뱉으며 조금 더 진지해지고 조금 더 허세를 부려보자. 진지충이라고 불리면 어떻고, 오그라든다고 놀림 받으면 또 어떤가. 사실 요즘 같을 때라면 그게 바로 힙스터다.

모쪼록 쓸데없이 진지하고 괜히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졸고에도 1년이나 지면을 내준 워커스에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그 아무말을 읽으면서 작자에게 욕설 협박 메일 한 번 보내지 않은 선량한 독자 제현들껜 더 큰 감사의 말씀을. 우리 더 허세 부리고 더 진지하게 삽시다. 그럼 전 안티에이징과 보습에 바빠서 이만. 코 찡끗.




[워커스 40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죠?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죠?


박제. 철거되거나 주인이 이사 간 빈집 앞에 쌓인 쓰레기 무더기를 보면 가끔 박제들이 섞여 있다. 한때는 살아있었을, 그 이후에도 어느 부잣집 서재에서 자태를 뽐냈을. 하지만 버려진 박제는 흉물스럽다. 박제된 것들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이다. 썩어야 할 때 썩지 못한, 썩어서 새로운 것들의 시작으로 돌아가지 못한 흉물. 눈을 부릅뜨고 쓰레기더미 안에 처박힌 것들은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나요. 방부제를 아무리 발라도 시간은 흐른답니다.

# 1987

<1987>이 개봉하기 몇 년쯤 전이었던 어느 술자리에서, 왕년에 짱돌깨나 던지고 소주병에 신나 좀 부어봤다는 아저씨들과 함께 있었다. “우리가 86학번이야. 이한열이랑 동기라고.” 운동권 사투리를 (일부러 더) 구사하는 그들 사이에 앉아서 맞장구를 열심히 쳤다. “우와, 역시 선배님들.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맞장구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난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 난 투표도 안 하고 데모도 똑바로 못하는 ‘개새끼 20대’였다가, 지금은 N가지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불쌍하고 방황하는 30대가 됐다. 치열하고 뜨거웠고 가슴 벅찼던 그 거리에 나는 없었다. 난 그들이 만들어놓은 역사의 자장 안에서 태어나 그 역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의무를 지닌 청년으로 존재하다, 의무를 망각한 ‘20대 개새끼’가 되어 소주잔을 들고 맞장구나 칠 수밖에 없었다.

난 <1987>이 사실 꽤 불편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운집에서 어떤 이는 여전히 기억이 생생한 그날을 떠올렸겠고, 어떤 이는 그를 계승한 2016년의 겨울을 떠올렸을 테다. 그 연상이 눈물로 이어졌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연관 지어지지도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미지였다. 민주주의를 열망한 대중들, 함께하는 대중들이 엮어낸 승리, 역사의 발전. 많은 사람들이 그 날의 승리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민주주의의 사회에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박제’라는 말을 떠올렸다. 가슴 벅찬 영광의 시절이라는 이미지는 87년 이후의 불민한 민주화를 망각시킨다. 스크린은 단면이다. 관객은 감독이 전시하는 스크린 한 면만을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87년을 상찬하고 그 감격과 영광을 재현하는 서사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시하는 감독의 세계는 어쩌면 너무 조악했다. 감독은 그날의 역사에서 스크린에 보여줄 만큼에만 방부제를 발라 관객들에게 배달했다. 역사를 박제시키는 일.

어쩌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도 박제의 작업에 동참했다. 역사를 박제하는 일이란 과거의 축적이 주조한 현재를 함께 박제하는 일이다. 오늘과 어제를 분절하는 일. 나를 앞으로도 계속 ‘20대 개새끼’나 N포의 30대로 치하는 일. 나를 그 기분 더러웠던 술자리에 계속 남아있게 하는 일. 결국, 방부제를 치덕치덕 발라 어느 골방에 전시해 두었다가 귀찮아지면 버리고 떠나는. 박제된 과거는 내일을 빚지 못한다. 오늘을 살면서 과거에 붙잡힌 망령으로 살 수밖에.

# 2018

그 아재들을 가장 많이 만난 건 지난 겨울의 광화문이었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그들은 ‘씨XX’, ‘병XX’, ‘닭대가리’를 연신 외쳐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그들은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유력한 대선후보를 향하는 모든 비판에 일일이 날을 세웠다. “이제 민주진보 정부가 탄생했으니 잠자코 기다리면 다 좋아질 거”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여성과 인권을 이야기하면 프로불편러가 됐고 노동을 이야기하면 노동적폐, 수구좌파가 됐다. 대의제 이후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 철모르는 ‘정알못’이라고 불렀다. 박제된 과거, 호헌을 철폐하고 직선제를 쟁취하던 시절에 방부제를 바른 채 그 다음의 것들은 모두 망각해버린 듯. 감격과 영광의 덧칠 앞에서 오늘의 비극은 중요하지 않다. 아직 감옥에 있는 한상균도, 굴뚝 위의 노동자들도 중요하지 않다. 그보단 영광의 시절을 재현하며 자아도취에 빠지거나, 그 영광의 시절에 적이었던 이들을 굳이 끄집어내며 자기연민에 빠진다. 하지만 오늘은 2018년이다.

2018년은 1987년을 딛고 있다. 87년의 성과, 과오, 한계가 뒤섞여 자라다 시간이 지나 땅에 떨어지고 썩어서 2018년의 거름이 된다. 2018년도 또 썩어서 후일의 거름이 되겠지. 역사는 분절돼 있지 않고 흐르고 썩고 다시 태어나는 생태계 같은 거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에 방부제를 치덕치덕 발라 박제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 주인공 강백호는 감독에게 영광의 시절을 물으며 말했다. “내 영광의 시절은 바로 지금”이라고. 내 영광의 시절은 어쩌면 지금이거나 아니면 나중이거나. 어쨌든 1987년은 아니다. 당신들 영광의 시절을 전시하느라 나의 시간과 역사를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워커스 39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연애편지 잘 쓰는 법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연애편지 잘 쓰는 법



모든 말과 글은 사실 모종의 연애편지다. 내 마음을 너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또는 네 마음을 얻고 싶어서. 그래서 대부분의 글은 사랑을 과장하고 나를 부풀린다. 모든 연애편지가 그렇듯이. 어느 때는 위악을 떨기도 하고 저주와 증오의 말만 늘어놓기도 한다. 원래 연서라는 게 그렇지 않나. 한없이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오롯이 자기를 드높이고 싶은 허망 사이의 애절한 줄타기.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어요. 당신을 설득하고 싶어요.

근래에 쓴 글 중에 가장 많은 오해의 소지를 남겼던 건 지난 호 《워커스》의 아무말 큰잔치다.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라는 제목이었다. 글을 쓴 애초의 목적은 어딘가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한 지적이었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또 다른 혐오가 실행되는 일, 그 혐오가 폭력을 발생시키는 일, 그 혐오와 폭력에 대한 비판을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는 일에 대한 지적. 그 글이 본래의 의도대로 여러 독자에게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글의 첫 독자로서 분명한 문제를 발견하고 반성해야 했다. 과한 감정, 비아냥, 충실하지 않았던 설명, 왜곡의 여지를 남겨둔 비유와 수사들. 무엇보다 진지하고 본격적이지 않았던 생각. 의도가 선했다고 변명할지언정, 몇 줄 되지 않는 글에서 내 ‘선한 의도’를 읽어달라고 (글쓴이가 직접) 사정하는 것은 얼마나 꼴사나운 일일까. (사실 지금의 이 비루한 고백도) 마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넌 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느냐고 징징거리던 스무 살 언저리의 연애편지처럼. 그때도 난 유려한 말로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데 집중하고 과잉된 감정의 언어로 내 사랑을 과시하려는 데 몰두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연서를 쓰면서도 난 그녀를 맨 먼저 생각하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말과 글이 범람하는 시대다. 하루에 인터넷에 유통되는 정보량이 제타바이트 단위를 가뿐히 넘어선다. 제타바이트라니. 그러나 이 수많은 말과 글은 발신자가 의도한 본래의 목적대로 수신자에게 가 닿았을까. 마음이 전달돼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충실한 설명으로 누구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었을까. 집회 현장에서의 그 수많은 발언은 그들이 말하는 ‘동지’들에게 가 닿았을까, 아니면 거리를 지나는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온라인에 범람하는 수많은 말의 편린은 또 어떤가. 누군가를 조롱하려는 목적, 아님 말고 식의 유언비어.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 제 눈에만 맞는 안경을 쓰고 보는 확증편향. 기사라고 해서 다를까. 오프라인에서 우리가 지금 서로 주고받는 말은 또 얼마나 다르겠나. 그저 모두 나를 과시하는 말, 너에 대한 감정이 과잉된 말, 조악한 은유와 비유, 애초의 목적을 망각한 비아냥. 이런 것들로 정말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까. 누구도 설득할 수 없는 말과 글은 무슨 의미일까. 그야말로 아무말 큰잔치.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중략)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따르면 우리는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독창적인 비유와 은유,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는 사실 화자의 의도를 왜곡할 뿐이다. 사실에 충실한 묘사를 위해서 대상을 성실하고 솔직하게 관찰하는 것, 나의 감정을 강변하는 표현보다 대상을 올곧게 그려내는 표현을 찾는 것. 좋은 말과 글이란 그런 것일 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연애편지도 그렇게 쓰이겠지.

그럼에도 ‘사실’과 ‘진실’에 도달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말하고 쓰는 이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듣는 이에게 온전히 전달하기도 어렵다. 사실 마음을 전달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서로 다른 사람인걸. 지젝은 그래서 “수신자에게 온전히 도달하는 편지는 차라리 부치지 않은 편지”라고도 했다. 쓴 사람 본인이 아니고서는 편지의 내용이 타인에게 어차피 제대로 전달될 리 없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싶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고, 당신이 내 생각에 동조해주길 원한다. 설득하려 하고 설명하려 한다. 그렇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설명충.

다시, 모든 말과 글은 모종의 연애편지다. 당신의 마음을 얻고 싶고 내 마음을 당신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하는 일. 이해시키고 설득하려는 안간힘. 소통의 노력. 나를 부풀리지 않고 솔직하게 내보이는 일, 대상을 가감 없이 관찰하는 일, 그리고 사실에 충실한 묘사. 어차피 안될 것을 알지만 최선을 다해 당신의 마음을 건드리려고 하는 노력. 연애편지를 써야겠다. 어차피 난 설명충이니까. 성실하게 관찰하고 진지하게 고민해서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마음을 다해. 스무 살 때보단 좋은 편지를 써야지.


[워커스 38호]



[워커스_추가기고] 그 세계 바깥의 페미니즘

[워커스_추가기고] 그 세계 바깥의 페미니즘



‘쇼타로 컴플렉스’와 ‘로리타 콤플렉스’는 다른 것이냐는 주제를 두고 한동안 온라인이 시끄러웠다. 어느 방송에서 한 여성철학자가 쇼타콤과 로리콤을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젠더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대상이 되는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를 기반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로리콤이나 아동성애 같은 심각한 주제는 물론 데이트 비용 부담,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부의 존재 같은 이제 꺼내기도 지겨운 케케묵은 이야기들까지. 젠더 권력에 대해, 사회적 맥락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으면 어정쩡한 ‘이퀄리즘’따위에 빠지기 십상이다. “밥값 더치페이도 안하는 메갈들” 같은 빻은 소리나 하게 되겠지.


# 바야흐로 ‘페미니즘 리부트’


근래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는 비약적인 양적 확장을 이뤘다. 이제 사회 곳곳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 양적확장이 곧 질적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온라인 공간’에서만큼은 그렇게 보인다. (페미니즘 논의의 확장에 SNS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의 역할은 막중했다. 운동의 주요 전선은 여전히 라인 위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온라인상에서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갈등과 대립이 불러온 폭력과 차별에 대한 논란은 페미니즘 운동 전체에서도 매우 높은 의미량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건 ‘권력’과 ‘젠더권력’을 혼동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소수자에 대한 페미니즘 일각의 배척이다. ‘쓰까페미(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부르는 말)’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대립. 


최근엔 한 학자가 학회에서 논문발표를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레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주로 그 학자의 발표를 반대하며 학회를 ‘압박’했다. 그 학자가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를 조장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들이 말하는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란 게이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나 트랜스젠더들의 성별정체성을 옹호하는 일이었다. ‘압박’이 이뤄졌고 ‘권력’이 작동했다. 이것은 기울어진 ‘젠더권력’이라는 사회적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할 일일까. 아니면 ‘권력’을 통한 억압이라는 기성의 구조가 외피를 바꿔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일일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연예인 지망생의 SNS도 최근의 화제였다. (그 연예인 지망생은 이런저런 사건들로 데뷔 전임에도 매우 유명하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받았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내용인즉슨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 그녀는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 하는 이들에게 “넌 여성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발언이다. “나의 운동에서 당신들을 배제하겠다”는 발언이기도 하다. 존재를 단정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것을 어떤 이름이든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발화의 형태가 온건하든 급진적이든, 운동의 요체는 소외된 주체를 복원하는 일에 있다. 그것은 나의 운동이 다른 무엇을 소외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하다. ‘젠더권력’의 불공평함을 바로 잡기 위해 또 다른 ‘권력’으로 폭력과 차별, 착취와 억압을 허용하는 것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게 제대로 ‘젠더권력’의 불공평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지정성별 남성의 이성애자이고 뚱뚱하고 지성 피부에 탈모가 온 남성이다. 난 남성으로서 젠더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학벌이 없는 흙수저 노동자로서 이 사회의 계급구성의 하단부에 놓여있다. 난 이성애자로서 주류에 있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로서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선 배제되고 있다. 내 다양한 정체성들은 서로 어떤 것들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소외를 이중으로 가속시키기도 하고 중화시키기도 한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킴벌리 크랜쇼는 ‘교차로에서의 교통사고’를 예로 들었다. 교통사고가 교차로에서 일어날 경우, 사고는 오직 한 방향에서 온 차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 때로는 모든 방향에서 오는 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 사고는 더욱 커진다. 사고의 수습방법도 다양해지고 책임추궁의 방식도 달라진다. 페미니즘 운동뿐이 아니라 모든 운동은 사실 서로의 관계, 그리고 주체들의 배치에 따라 생성될 수밖에 없다. 굳이 운동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존재하는 모든 일이란 타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억압된 여성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에서 자기의 억압을 인식하듯, 소외된 노동자가 배제된 장애인에게서 자기의 소외를 발견하듯. 이 모든 것들은 관계를 맺고 있고 어느 하나만이 자기의 정체성일 수는 없다.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이 어떤 배치를 이루고 어떤 기재와, 어떤 욕망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삶의 양식도, 그 삶의 양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도 발생한다. 


레디컬 페미니즘이 의미 있었던 지난 세기는 페미니즘이 ‘조개 줍는 소리’로 치부되던 당시의 운동에 저항하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8~90년대를 관통하며 레디컬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이 고유의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남성이 전유하던 운동의 부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다. 노동이 해방되면 여성도 해방된다던 당시 꼰대 아재들의 주장과 ‘자궁달린 여자만 여자’라며 ‘당신이 아닌 자들’을 배제하는 지금의 주장은 얼마나 다른가. 세상을 단 하나의 책으로 이해하고 단 하나의 창으로 관찰할 순 없다. 한국사회, 아니 사실은 이 세계 전체가 기울어진 젠더권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오직 그것만이 문제고 나머지는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XX염색체와 자궁을 가진 존재들만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이고 나머지는 다 배부르고 편한 소리 늘어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니터 바깥으로 


고백하자면, 이건 다시 쓰는 원고다. 수정이 늦어 원래 썼던 원고가 이번호 <워커스>에 실렸다. 이 글은 아마 인터넷을 통해서만 유통될 테다. 난 수정되지 않은 지난 원고에서 “여성주의는 따듯한 마음과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여성주의만 진짜 여성주의라고 광광우럭 하는 꼴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으면 생존조차도 힘에 부쳐야했던 여성에 관해 사유해 본적도 없는 속편하고 배부른 한남충의 ‘진짜 페미’인정 운운. 뭐 그런 거. 진의가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 한계를 극복해 더 많은 이해와 연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그러면서 종종 칭찬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고. 


내가 하려는 노력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 바깥을 끊임없이 살피려는 노력이다. 젠더권력을 날 때부터 가져서 실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삶을 애써 보려하는 노력. 거기서 나의 폭력을 떠올리고 당신이 받았던 억압을 상기하려는 노력. 내 삶의 모순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고 당신의 싸움에 함께 연대하려는 노력. 그렇게 나와 당신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며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실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음을 깨닫는 노력. 그렇지만 당신의 존재와 나의 존재는 특수성을 지니며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노력. 내가 생각하는 노력은 그런 것이다. 그저 페미니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혹은 운동은 바깥을 향해야 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든 그 바깥에도 고통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고통이 또 다른 폭력과 차별과 착취를 용인해주는 자유이용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창의 모양에 따라 세계는 달리 보이지만 진짜 세상은 창으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많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다못해 창문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했듯 '넷페미’는 지금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전선이다. 수없이 많은 주의와 주장, 말과 글, 이미지가 온라인을 떠돈다. 사회적 조류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실제 세계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넷페미의 운동과 투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서 유통되는 모든 것들이 정말 모든 것은 아닐 수 있다. ‘온라인의 언니들’ 덕분에 코르셋을 벗었다지만, 하지만 정말 당신은 정말 코르셋을 벗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맘에 들고 편한 코르셋으로 갈아입은 것은 아닌지.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그건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최근에 목격한 몇 가지 일로 혼란스러워졌다.

 

#1

그리 친하지 않은 지인 A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얼마 전 공중화장실에 적힌 낙서에서 어느 전화번호를 발견했다. 화장실 담벼락의 낙서가 가질법한 악덕에 매우 충실한 낙서다. 번호의 주인은 남성일 것으로 추정됐다. 그녀는 그 전화번호를 저장했고 저장된 전화번호는 번호 주인의 SNS계정으로 이어졌다. A는 그 SNS 계정의 화면을 갈무리해 자신의 SNS에 공개했다. 번호 주인의 SNS를 공개하면서 A는 그를 ‘몰카범’으로 지칭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가 몰카범이 아닐 가능성, 그 번호의 주인이 그의 신상을 파악한 이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피해자가 될 가능성에 대해 지적하자 그녀는 “그에게 해명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몰카 범죄는 나쁘다.

 

#2

한서희라는 연예인 지망생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유명해졌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자신의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던 것 같다. 한 씨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트랜스남성(FTM)이 보낸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왜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고 굳이 답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가끔 SNS는 인생의 낭비다.

 

#3

지인 B가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SNS에 썼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다른 여성이 ‘여자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지하철에서 화장을 해선 안 된다고 면박을 주었고 그 면박은 다른 승객들이 ‘남 이사 어디서 화장을 하든 무슨 상관이냐’며 제지하고 나서면서 멈췄다는 일화. 댓글에서 다른 지인 C는 화장을 할 때 나는 냄새가 불편하니 공중의 공간에서 화장을 하는 건 지양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놨다.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구조적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있었다. “모두 화장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이 나려던 찰나, 새로운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남 아재들이 등산복 입고 막걸리 냄새를 피우는 건 어쩔 거냐”는 요지의. “화장에서 무슨 냄새가 나냐”고 묻는 댓글도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역시 SNS는 가끔보다 더 자주 인생의 낭비인 것 같다.

 

# 그게 정말 여성주의인가요?

 

여성주의를 ‘따듯한 마음’이나 ‘위로의 말’ 같은 걸로 정의했었다. 물론 학술적으로도, 또 운동적으로도 정확한 정의는 아니겠다. 다만 여성주의 텍스트들을 읽고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지위를 발견하고, 차별받는 장애인들로부터 배제된 여성의 존재를 인식하는. 그렇기 때문에 시혜나 연민이 아니라 손을 내고 연대함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여성주의의 본질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여 여성주의 운동은 모든 폭력과 차별과 배제에 저항하며 소수자에 연대하고 어떤 존재도 지워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 여러 논쟁들을 보면서 어쩌면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궁과 유방을 달고 태어난 여성만을 챙기는 것이 여성주의라는 주장, 세상의 모든 문제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단편적인 시선. 저항을 빙자한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생산해내는 지긋지긋한 악순환.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는 어떤 언어도 배우지 않은 상태고 가장 위험한 존재는 단 한권의 책만을 읽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내가 도무지 뭘 모르기 때문일까. 정말 그게 여성주의 인가요?

 

사실 ‘진짜 여성’을 운운하는 건 ‘진짜 남자’를 빙자하는 남근주의의 거울상에 불과하다.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남성에 의한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라면 다른 이들의 ‘존재의 확인’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조롱하고 재단할 수는 없다. 아주 간단한 논리. 누구도 때릴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려면 당신도 누구를 때리면 안 된다. “쟤가 날 때리는 건 싫지만, 내가 널 때리는 건 상관없어. 넌 맞아도 싸니까.”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김치녀를 욕하면서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한남충과 다를 건 뭔가. 피해는 다른 피해를 양산할 수 있는 면죄부가 아니다.

 

사실 이번 원고를 쓰기 시작할 때는 조금 화가 나 있어서 “페미니즘을 자처하기 위한 이들은 시험이라도 봐라”같은 뻘소리를 지껄여볼까 생각도 했다. 990점 만점의 페미니즘 시험에서 850점을 넘지 못하면 SNS에 관련 포스팅을 못하게 하는 법조항이라도 만들자는 아무말 큰잔치. 하지만 조건이 붙은 권리는 권리가 아니다. 아주 피곤하고 복잡한 일이지만 인권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속시원하자고, 불편하다고 멋대로 괴롭히고 죽이면 안 된다. 운동의 역사는 그 다짐을 공고히 해온 논의의 축적이다. 나도 그래서 시험보자는 얘기 결국 안했잖아.

 

당신들이 페이스북 안에서 그린 여성주의가 정말 여성주의인지 모니터 밖의 세상을 보라.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당신의 삶은 '스튜핏'하지 않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당신의 삶은 '스튜핏'하지 않다.


‘스튜삣’ 소리에 들고 있던 치킨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야밤에 혼자 1+1 두 마리 치킨을 먹으면서 다음 달 월세를 걱정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통장에 얼마가 남았는지 걱정하면서, 동시에 얼마는 남았으니 치킨은 1마리보다 2마리를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고독한 뚱땡이의 길.

엄마는 늘 말했다.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서 언제 집사고 언제 장가갈래?” 사실 내가 장가를 못가는 건 비단 집이 없고, 돈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설명하기 너무 구차해서 앞으로 아껴 쓰겠다고 대답했다. 결혼은 뭐 혼자서 하나.

월세방을 구하러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한 선배가 “이 김에 대출을 받아 집을 사거나 좀 큰 전세를 얻으라”고 했다. “열심히 일하면서 차근차근 갚으면 대출금은 금세 갚을 수 있다”면서. 대출금을 갚기는커녕 대출을 받기도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순진하고 해맑은 사람이라고 (좋게좋게)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좀 짜증이 났던 건 이제 지난 일이니까 뭐.

‘스튜핏’과 ‘그레잇’이 유행이다. 사람들이 보내온 영수증으로 재무상담을 해주는 팟캐스트 <김생민의 영수증>은 그 인기에 힘입어 공중파 방송까지 진출했다. 스튜핏과 그레잇이라는 유행어를 배출한 이 방송은 근래 가장 핫한 프로그램이다. 20여 년의 방송 생활 동안 근검절약과 저축, 재테크의 달인이라는 이미지를 쌓아온 김생민은 커피를 마시지 말고, 야식을 먹지 말고, 가죽점퍼를 사지 말고 그 돈을 모아 저축을 하라고 말한다. 차근차근 성실하게 내일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삶을 예찬한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대신 작은 성취를 이루고 다시 조금 더 큰 목표를 설정하는 순리의 삶을 권장한다.

“우리는 ABCDEF로 F에 도착하기 위한 과정을 밟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해요. 0.01%의 친구들이 A라는 행위를 하고 F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에 접근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마치 계단을 밟듯 차근차근 가야 우리의 열매를 지킬 수 있고 수확이 지속 가능합니다.”

김생민은 영수증을 보내오는 사연 신청자들에게 조금씩 노력하면 목표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칭찬한다. 눈앞의 작은 목표를 실천하면서 큰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는 설득이다. 사람들은 그런 김생민의 격려와 위로, 위트있는 설득에 열광한다. 실제로 그는 길었던 무명의 시절을 딛고 타워팰리스를 산, 살아있는 재테크의 증거물 아닌가. SNS에는 김생민의 격려와 질타에 감응한 이들의 고백이 수두룩하다. 고독한 뚱땡이의 길을 걷고 있던 나도 들고 있던 4개의 닭다리를 보면서 ‘나 혼자 먹는 야식에 왜 닭다리가 4개나 필요한가’라고 자괴해 버렸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노력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걸까? 닭다리 4개를 포기하면 난 월세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 이번 겨울을 조금만 더 춥게 지내면 난 장가를 갈 수 있나. 고양이 치약을 사지 않으면 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 그건 ‘뽕’이잖아

이 방송이 유행한 후 한 언론은 <김생민의 ‘절실함’이 2017년에 빛을 발한 이유>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어쩌면 ‘이번 생은 망했다’는 비관이 팽배한 시대가 가고, 성실이 미덕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돌아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헬조선, 비정규직, 탈조선의 정서가 지배하던 시대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노력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땀과 인내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희망의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김생민 현상은 그 전조와도 같다는 것. 희망과 노력, 땀과 인내라는 말은 참 아름답다. 근면하고 성실하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고 힘을 내고. 아침이면 택시 대신 지하철을 타기 위해 1시간을 일찍 일어나고. 음. 어디서 많이 보던 얘기인 것 같은데.

사실 어쩌면 김생민의 ‘절실한 노력론’은 그냥 다시 새마을운동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얘기와도 크게 다르지 않고, 요즘 것들은 노력을 안 한다는 꼰대들의 얘기와도 맥이 통한다. 다만 이젠 포기마저 지긋지긋한 이들의 자기 위안이랄까. 일종의 ‘뽕’이다.

유수의 명문대를 나와서 굴지의 대기업에서 그럴듯한 연봉을 받는 한 친구의 얘기를 빌어보자. 대학을 졸업한 27살에 취업해 8년 동안 열심히 적금한 그 친구는 현재 통장에 4천만 원의 잔고가 있다고 했다. 4천만 원에 가까운 연봉으로 시작해 지금은 5천만 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다는 그는 술도 잘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차도 없고, 집도 없다. 가끔 맥주 두 캔을 사 들고 야구장에 (심지어 가장 싼 외야석에 앉는다) 가는 게 취미의 전부라는 친구는 ‘마흔 전에 자기 명의의 집을 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친구무리 중 가장 먼저 취업에 성공한 그가 ‘집을 사겠다’는 목표를 처음 얘기했을 때 우리는 모두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한 달에 200만 원을 저축하면 1년이면 2,500만 원이니까 10년만 모으면 3억 원, 대출을 조금 끼면 그래도 서울 변두리에 작은 아파트 하나는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8년이 지나 아등바등 4천만 원을 모은 그 친구는 여전히 집을 사는 게 목표하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김생민도 김생민의 방송을 듣는 이들도 커피값을 아끼고 택시비를 아껴서 집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다. 그건 그저 위로고 격려다. 그보다는 유희거나 자조일 수도 있고, 희망이나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뽕’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 외통수 같은 세상을 견뎌내기 위한 작은 마취제. 대마초도 못 피우게 하는 나라에서 이런 ‘뽕’은 참 잘도 권장한다.

# 우리 보통의 삶

재테크 노하우 전수라는 ‘뽕’의 기능 말고 사실 김생민이 진행하는 방송의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보통’이 무엇인지 던지는 질문의 기능이다. 김생민은 방송마다 “깊이 생각해보라”고 한다. 커피에 대해, 옷에 대해, 다이어트에 대해, 고양이 치약에 대해, 감자칩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것을 소비하는 것이 당신을 정말 행복하게 해주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김생민은 그런 사유를 ‘그런 소비는 당신의 말초신경을 잠시 자극해 쾌락을 줄 뿐 실은 행복이 아니’ 라는 결론으로 이끈다. 커피 마실 돈을 아껴서 저축하면 월세에서 반전세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고, 당장의 소비를 참으면 내일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삶의 행복을 ‘집을 사고 돈을 모아 결혼하고 노후를 풍족하게 보내는 것’이라 규정한 전제에서 가능하다. “언제 집사고 언제 결혼할래”라고 묻는 우리 엄마가 제시한 삶의 ‘정상성’과 같은 전제다. 이런 삶의 전제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서민이 그리는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기업에 다니며 10년을 숨만 쉬며 돈을 모아도 5천만 원을 모으기 힘든 세상에서, 그 고연봉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세상에서, 5천만 원으론 집을 사기는커녕 전셋값도 안 되는 세상에서 그런 삶의 지향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삶에서 오늘의 닭다리를 포기해 20년 후에도 있을지 없을지 모를 내 집 마련의 자금을 모으는 건 무슨 의미일까. 김생민에게 되묻고 싶다. 희망, 내 집 마련, 미래, 저축 같은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 보통의 삶은 모순된 욕망의 연속이다. 오늘의 닭다리를 외면하기 어렵지만 10년 후의 미래를 포기하기도 어렵다. YOLO가 유행하지만 그건 실은 되는대로 막 살라는 말에 가깝다. YOLO도 저축도 어려운 삶도 있다. 난 지난 《워커스》 기획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 사채시장과 장기판매 루트까지 알아봐야 하는 삶에 대해 쓰기도 했다. 다양한 삶의 양태는 다양한 욕망, 다양한 결핍, 다양한 행복을 의미한다. 그 욕망들은 모순되기도 하고 허황돼 보이기도, 때론 안타까울 정도로 절실해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것들에 어떻게 스튜핏과 그레잇을 외칠 수 있을까.

20년간 스타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근면과 성실을 무기삼아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김생민의 삶을 존경하고 또 응원한다. 그가 주는 위로와 격려로 내 얇은 지갑의 허전함을 잠시 달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차피 먹지도 못할 1+1의 치킨과 쓸데없을지 모르지만 큰맘 먹고 구입한 만년필이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음도 사실이다. 원래 야식과 선물의 의미는 길티플래져인 걸.

희망 같은 불온한 말로 서로를,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괜찮다. 미래 같은 불확실한 것 대신에 오늘의 즐거움을 따라도 괜찮다. 더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을 견뎌내도 좋다. 당신의 삶을 향해 “그레잇”이라 외치겠다. 그러니 갈팡질팡 아직 삶의 궤적을 정하지 못한 보통의 우리, 모순된 삶에 서로 “스튜핏”을 외치지도 말자. 우리의 삶은 고작 그런 것으로 어리석어지는 게 아니다.


[워커스 36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서울에서 집 구하는 이야기, 살면 또 삽니다만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서울에서 집 구하는 이야기, 살면 또 삽니다만


이사를 마쳤다. 땀과 먼지와 피로와 앞일에 대한 걱정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히고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짧았던 지방생활을 마치고 이사한 집은 석관동의 작은 옥탑방이다. 원래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40만원짜리 방이었는데, 주인아저씨를 잘 구슬려 보증금 700에 월세 30만원에 계약했다. 며칠 동안 혜리와 설현이 광고하는 앱을 주구장창 들여다봤다. 전국 모든 복덕방의 공적이라는 네이버의 <피터팬 카페>도 엄청 들락거렸다. 감히 500에 30으로 서울에서 방을 구하겠다고 나섰을 때 겪어야 했던 수모와 좌절, 체념과 납득과 극복의 대 서사시.

# 500에 30으로 한남동에 가보니

졸업한 학교가 있었던 한남동엔 아직도 친구들이 남아있다. 단골가게들도 여전하고.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던 곳도 한남동이라 이번에 집을 구하면서 처음 찾은 곳도 이곳이다. 방구하는 어플을 실행했다. 방이란 방은 “다 있다”는 혜리의 말을 굳게 믿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방 2칸을 검색했더니 결과는 ‘0’이었다. 이럴수가.

현대차 정 회장님과 삼성 이 회장님이 거주하시는 한남동은 대표적인 부촌으로 알려졌지만 남산자락에 위치한 고지대에다 워낙 오래된 동네라 싸고 허름한 집이 많다. 대학생 때는 그 틈새를 이용해 자취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한남동에 낡았지만 넓고 깨끗한 집에서 처음 자취를 시작했다. 이슬람 사원과 보광동 도깨비 시장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골목 산비탈 사이의 집들엔 이주노동자와 젊은 사회 초년생들과 소규모 공장들이 가득했다.

내가 찾던 허름한 집들은 한남동-보광동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 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동네엔 빈집들이 늘어났다. 이미 노인인 집주인들은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은 쪽과 재개발로 경제적 도움을 받길 기대하는 쪽으로 나뉘어 싸우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 대학생, 혹은 인근의 LGBT바나 유흥주점 종사자들로 구성된 세입자들은 집세를 올려주거나 떠난다. 십수년 전의 기억을 근거로 그럴듯한 집을 구해보려 했던 내 생각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는 철부지의 철없는 망상이었을까.

# 500에 30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강서구, 금천구, 양천구 같은 서울 서남부 지역은 서울에서 대표적으로 집세가 저렴한 지역이 . 그런 줄 알았다. ‘여기라면 그럴듯한 방에 살 수 있겠지’.

500에 30, 방 2칸의 조건에 기대보다 훨씬 많은 방이 나온다. ‘27개의 방이 있습니다’. 이제 신월동민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27개의 방 중 26개가 반지하 혹은 1층 같은 반지하, 또는 채광 좋은 반지하 내지는 습기 없는 반지하였다. 반지하에 살 순 없지.

‘반지하가 뭐 어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가정경제가 급격히 내리막길을 달려 집을 줄이고 줄이다 마침내 반지하까지 진출했던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등장한 바퀴벌레 무리가 식탁 밑을 유유자적 지나 내방으로 들어가는 걸 봤을 때도 ‘지구엔 원래 인류보다 바퀴벌레가 먼저 살기 시작했다’고 여기며 괜찮았다. 지나가던 초딩이 창문너머로 빤스만 입고 누워 코를 골던 나를 구경할 때나, 술 취한 아저씨가 거실 창문에 오줌을 갈길 때도 참을 수 있었다. 창문 앞에 주차한 트럭의 배기가스가 집안으로 들어올 때쯤이었나, 침대에 곰팡이가 슬어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던 때였나, 습기가 가득한 방에서 처음 가위를 눌렸을 때였던 것도 같고. 아무튼 그 언저리 언제쯤 ‘반지하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번듯하게 찍어놓은 사진, 기대보다 넓은 방, 생각지도 못한 옵션, 저렴한 월세. 반지하 방에 붙은 이 좋은 조건들은 다 ‘반지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다. 사람들도 알고 있는 거다. 반지하는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 반지하 방들에도 입주자들은 나타났다. 온갖 말로 세입자를 유혹하던 매물은 하나씩 계약종료의 딱지를 붙여 나갔다. 더 좋은 조건의 집을 구할 여유가 없는 사람, 그 방이라도 감지덕지 살 수밖에 없을 사람, 반지하의 그 ‘악덕’들을 감내하면서도 그 동네에 살아야 하는 사람, 혹은 반지하가 얼마나 살기 힘든지 아직 모르는 사람. 여러 이유가 있겠다만 반지하에도 사람은 산다. 가난이나 주거환경, 기본권 뭐 이런 말들을 떠올려봤지만 다 의미없는 말들이다. 그냥 그곳엔 사람이 살고 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하면서 분노할 일도 아니고 동정할 일도 아니다. 그냥 이 드넓은 서울 땅에 바퀴벌레와 곰팡이와 집안을 들여다보는 낯선 이들을 견뎌내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

# 사람이 산다

6년 전 처음 자취방을 구할 때 ‘보증금 50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500이 없어서 친구네 집에 얹혀 살거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번에 가까스로 얼마간의 보증금을 모아 (사실 빚을 내서) 집을 구하러 다니면서는 ‘보증금이 2천만원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보증금의 사전적 의미는 “어떻게 해도 모자란 돈”인 것인가.

초등학교 2학년, ‘슬기로운 생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인간의 기본적인 삶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배웠다. 가끔 살아가는 게 벅차거나 두렵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건 대단한 고난과 역경을 만났을 때가 아니다. 월세 내는 날이 다가올 때, 통장 잔고가 0에 가까운 월급 전야에 배가 고플 때, 한겨울에 가스가 끊겼을 때. 그런 사소해 보이는 일들을 대면하면 ‘세상 무엇도 내 삶을 응원해주지 않는다’는 냉정한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다음날 월급이 들어와 치느님을 영접하면 또 잊힐 것들이지만.)

여하튼 이번에 구한 집은 매우 마음에 든다. 채광이 좋고 습기도 없다. 너른 옥상을 마당처럼 쓸 수 있고 빨랫줄도 무려 3줄이나 있다. 여긴 한남동처럼 힙한 동네가 아니지만 인근의 대학가엔 예쁜 카페와 맛집이 꽤 있다. 여긴 습하고 어두운 반지하가 아니지만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옥탑이다. 30만원이라는 비교적 저렴한 월세지만 그 저렴한 월세를 위해 200만원이나 더 빚을 내야했다. 집은 늘 그렇듯 만족스럽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다음 월세날이 오면 난 또 ‘세상은 나를 응원하지 않는 것 같아’ 같은 생각이나 주억거리고 있겠고, 또 ‘2천만원만 더 있으면’ 같은 소리를 지껄이겠지. 그렇지만 분노할 일도 아니고 동정할 일도 아니다. 그냥 그곳에, 한남동이나 석관동이나 신월동이나. 반지하든 옥탑이든 루프탑이든. 그냥 사람이 산다.


[워커스 35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결국은 흔해빠진 먹는 이야기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결국은 흔해빠진 먹는 이야기

1.

며칠 전, 집에 동료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해먹었다. 메뉴는 조개 술찜과 토마토 파스타였다. 시장에서 조개를 한 봉지 샀다. 소금물에 담가 해감을 하고 조개껍데기에 묻은 펄을 칫솔로 일일이 닦아냈다. 마트에 가면 세척은 물론 해감까지 완벽히 해서 포장해 놓은 ‘상품’들이 널렸지만 굳이 펄이 묻은 조개를 샀다. 우리 고장에서 나는 토마토를 골라 몇 시간 동안 졸여 소스를 만들었다. 냄비 앞에 서 있는 몇 시간 동안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먹는 사람들은 내 이런 고생을 몰랐겠지.

가급적이면 패스트푸드나 외식 대신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 먹으려 노력한다. 직접 재배한 풀을 뜯어 밥상에 올리진 못하지만 되도록 가까운 곳에서 자란, 누가 어떻게 키웠는지 알 수 있는 풀과 고기를 쓴다.

회사 구내식당 벽에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남겼다는 경구가 붙어있다. ‘밥 한 그릇을 잘 먹으면 만 가지 일을 알게 된다.’ 먹는 일이란 결국 내가 자연에 의탁하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는, 밥 한 그릇은 결국 내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는 일이라는, 그러니까 일종의 생태주의 철학이다. 먹는 것을 생각하다 보면 공장에서 눈만 껌벅이다 죽어간 동물들에 생각이 미치게 되고, 산에서 채취한 나물의 성기고 거친 뿌리에 담긴 시간을 귀히 여기게 된다.

자본주의는 과정을 소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철저한 분업. 무엇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감춰두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노동이 어디에 어떻게 투여되고 어떤 결과물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온전히 자신을 이루던 삶을 쪼개, 삶을 이루는 많은 것들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 배달된다.

밥상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자란 풀이 누구의 손에서 가공돼 어떤 곳을 거쳐 판매되고 어떤 방식으로 조리돼 지금 내 앞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음식을 해 먹는 노력은 소외된 과정에 다시 집중하려는 노력이다. 내가 먹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내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사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어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밥상머리 교육’도 그런 의미였다. 농부가 여든여덟 번은 손길을 줘야 만들어진다는 쌀 한 톨의 이야기. ‘네가 먹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먹으렴.’

2.

수제 과자와 케이크를 파는 친구가 있다. 하루는 작업실에 놀러 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파티셰들은 죄다 우아하고 세련됐길래 걔도 그럴 줄 알았더니 밀가루 범벅에 손에는 화상 자국이 그득했다. 땀도 뻘뻘 흘리고. 가공된 이야기라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화 중 전설의 레전드는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민중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대꾸한 일이다. 사실 이 일화에서 팩트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계급이 부여한 삶의 조건이다. 딱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어도 귀족들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민중에게 ‘그럼 과자를 먹으라’고 말했을 테다. 그들에게 빵과 과자는 그저 하인들이 주방에서 들고 오는 것일 테니까.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존재는 의식을 규정한다. 어느 집에서 어떻게 태어나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랐냐에 따라 사람의 의식이 달라진다. 교과서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자유 의지를 갖추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삶의 조건이 의식과 언어를 집어삼킨다. 밥상머리는 그런 의미다. 삶의 결을 만들어 주는 일. 매일 마주하는 것들, 삶의 가장 근본인 ‘밥’ 앞에서 건져 올리는 의식과 언어.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권력자들이 뭔가 특별히 의도해서 ‘빵이 없으면 과자를’이라고 말한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났던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밥상머리엔 빵과 과자가 만들어지는 과정, 땀을 흘리며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븐에 손을 데는 과정, 노동이 생략되기 때문이다.

3.

‘밥하는 동네 아줌마’를 운운했던 국회의원이 있다. 삼성의 법무팀에서 일하던 변호사 출신인 그녀에게 밥 짓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먹을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외했고 먹을 것을 만드는 이들을 소외했다. 결국, 공산품처럼 예쁘게 플레이팅 된 파편만을 먹거리 전체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밥상머리엔 과정을 소외한 파편화된 세계만이 있다. 삼성 법무팀만 중요해 보이는,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마리 앙투아네트. 하여 그녀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실은 삶의 본질이고 그가 의존하고 있는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밥은 만든다고 하지 않는다. 밥은 ‘짓는다’고 한다. 짓는다는 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도록 새롭게 일으키는 몸짓이나 모습이다. ‘먹고살다’는 말은 한 단어다. 띄어 쓰지 않는다. 삶이란 먹는 일과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입을 벌려야 하고 무엇이든 입안에 채워 넣어야 한다는 말이다. 먹는 이야기는 결국 가장 흔해빠진 이야기지만 그만큼 삶의 근원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이야기다.


[워커스 33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힙스터의 언덕, 몰취향의 고원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힙스터의 언덕, 몰취향의 고원

1.
언제였더라. 한창 ‘썸’을 타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어쩐지 80년대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땐 눈에 콩깍지가 씌인 탓인지 ‘참 우아한 휴일을 보내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 음악을 틀어놓고 책장 청소를 하다 만화책을 한권 집어 들고 먼지구덩이 위에 벌러덩 누워 낄낄거리고 있는데 ‘굳이 솔직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음악 들으면서 책 읽고 있다”고 대답하다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혹은 ‘정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2.
어느 카페에 앉아 있는데 음악 선곡이 너무 대중없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라고 말하기엔 나오는 음악들이 너무 조야했고, 카페의 컨셉으로 이해하기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손님들의 취향에 맞춘 것이라기 여기기엔 손님은 내 일행들뿐이었고. 도대체 뭘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친구가 너무 손쉽게 답을 알려줬다. “멜론 인기차트 100”. 이런 빨간 맛.

3.
살며 가장 어이가 없었던 때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동영상을 영화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투덜거리고 있는데 눈물 콧물을 다 뺀 일행들이 내게 “재수없다”고 말했다.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한다느니, 어설프게 평론가인 척을 한다느니, 천만이 넘는 사람들을 다 바보로 여긴다느니, 영화를 판단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다 듣고 나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건, ‘이게 정말 재미있어?’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천만관객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든 감독이다. 그의 다른 천만관객 영화도 영화라고 부르긴 어렵다.)

얼마 전에 ‘힙스터 체크리스트’가 세간에 떠돌았다.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찰스 부코스키를 읽고, 강원도 양양에서 서핑을 즐기거나 대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야 힙스터다. 사람들은 경리단이나 해방촌 같은 ‘힙한 동네’에 몰려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케아에서 가구를 사고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아다니고 ‘평양냉면’과 ‘알리오 올리오’를 먹는다. 냉면에 가위질을 하면 안 된다고 면장질을 하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힙스터 체크리스트 같은 건 사실 언어도단이다. 힙스터의 본질은 ‘구분짓기’에 있다. 독보적이고 독특한 취향으로 자기를 타인과 구분짓는 것, 그러니까 자아와 주체의 확립이 힙스터의 의미라면 “이래야 힙스터”라는 힙스터 판독기에 편입되는 순간 그는 이미 힙스터가 아니다.

따져보면 사실 한국에 ‘취향’ 같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똑같이 머리를 빡빡 밀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강요받으며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노래를 들으며 똑같은 독재자를 찬양하며 사는 나라에 취향같은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취향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명확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학교 현관엔 현관문보다 큰 글씨로 단결과 통일이라고 적힌 액자가 붙어 있었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였다. 그걸 민주화라고 불러야하나, 아무튼 겨우겨우 대통령 욕을 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절이 왔을 때 ‘똘레랑스’란 말이 유행했다. 교과서에도 상대주의니 다양성이니 하는 말이 등장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같은 표어도 그때쯤 나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양’과 ‘취향’을 책으로 배운 탓일까. 사람들은 ‘단결’과 ‘통일’이 있던 자리에 ‘취향’과 ‘다양’을 채워놓고 똑같이 굴기 시작했다. 힙스터가 되기 위한 방법마저 남과 같아야 하는 세상이라니. 자아와 주체는 여전히 삭제돼 있다. 다름을 허용치 않던 폭력이 ‘다름’을 강변하는 야만으로 둔갑했다. 역시 마찬가지로 ‘타자성’에 대한 혐오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얼굴을 볼 수나 있을까.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언어생활에서 ‘다름’과 ‘틀림’을 도무지 구분하지 못한다.) 모두 똑같은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 한국사회엔 여전히 취향이 없다. 용산구와 마포구에만 힙스터 체크리스트에 충족하는 힙스터가 수만 명은 될 거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몰취향의 고장.

몰취향은 위험하다. 자기의 얼굴을 모르는 달걀귀신들만이 횡행하는 세계와 같다. 세계를 단조롭게 만들고 서로를 외면하다 결국 혐오하게 한다. 심지어 몰취향을 취향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알리바이마저 주어진다면 (혹은 스스로 획득한다면)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지금은 총체적 난국이다. 몰취향의 가짜 힙스터들이 몰린 자리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고 가난한 자영업자들은 쫓겨난다. “호모를 싫어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라는 말이 혐오를 정당화 한다. ‘취향’의 외피를 뒤집어 쓴 ‘몰취향’은 마침내 반지성주의를 잉태한다.

곧 타인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 “그건 틀렸어”라는 지적에 그것이 무엇이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이다. 지적 사유와 갈등과 토론과 쟁명이 사라진다. 자기 존재의 역능을 통해 타자의 얼굴을 보기보단 대화를 포기하고 타자를 외면하고 혐오해버린다. 그걸 타자성의 인정이라고 우긴다. (결과적으로 <국제시장>이나 <해운대>가 천만관객을 돌파한다.)

다시, 그 시절 내 썸녀는 정말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고 전시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 ‘조악한 욕망’에 홀랑 넘어가 눈에 하트를 그린 내 유치한 마음이다. 멜론 인기차트 100을 틀어놓고 기계적으로 커피를 내려주던 그 카페의 알바는 귀갓길에 어떤 음악을 들을까? <국제시장>의 감독은 다음 영화에서 또 천만관객을 넘길 수 있을까? 경리단 오르막길, 힙스터의 언덕은 자기들만을 고립시킨 몰취향의 달걀귀신들이 모인 고원은 아닐까.

[워커스 34호]


[워커스_아무말대잔치] 어떤 광기에 대하여

[워커스_아무말대잔치] 어떤 광기에 대하여


어떤 광기(狂氣)에 대해 생각해보자. 광기의 전제는 ‘무조건’이다.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서라도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유행가 가사야 다소 낭만처럼 보일 수 있겠다만 무조건이란 결국 비이성과 맹목의 의미다. 그러니까 ‘내가 널 만나려고 태평양을 건너는 건 이성이고 합리고 나발이고 신경쓰지 않는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의미. (사실 연인관계에서도 이렇게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관계는 낭만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단 하나로 일축한다. 하여 결국 폭력을 잉태한다. “길라임 씨가 내겐 송혜교고 전지현”이라고 여기던 분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선 집회에서 행하는 폭력을 보라. 광기의 결과는 결국 폭력이다.

이 광기는 그저 ‘적폐세력’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대상이 길라임 씨에서 ‘우리 이니’로 달라졌을 뿐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자 개인의 SNS 좌표를 찍어 화력을 집중하고, 구매력으로 언론사를 압박하거나 입맛에 맞지 않는 모든 비판을 가짜뉴스로 이해한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세상 모든 가치를 ‘우리 이니’로 일축해 버리는 폭력.

하지만 ‘그래서 문빠들은 안 돼’라고 말하는 당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당신의 일상에 스며든 맹목과 광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국뽕’에 젖어 든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면서, ‘문빠’들의 몰지각함을 욕하면서, 그러니까 황우석과 심형래와 노무현과 문재인, 이덕일, 환단고기, 두유 노 강남스타일을 욕하면서 당신이 던진 그 멸칭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무엇을 배제했는지. 또 당신은 그 욕설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뽕, 빠, 까

뽕, 빠, 까(집단적 광기, 아니 그보다는 광기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들엔 왜 하나같이 된소리가 쓰이는 걸까) 같은 단어들로 지칭되는 집단의 공통된 정서적 근간은 ‘상징적 타자’에게 자기의 욕망을 모두 투사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욕망도 비난도 자기 자신이 아닌 상징의 몫이 된다. 모든 집단 광기의 투사, 상징적 타자를 향한 돌팔매질은 나와 당신, 우리의 뱃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입신양명의 신화, 경제적 성공의 신화, 산업화와 근대화가 빚어낸 먹고사니즘의 신화 같은 괴물. 거기에 성숙하지 못한 정치제도와 반지성주의의 파토스가 양념처럼 버무려져 만들어낸 촌극. 결국 자기 내면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욕망과 배반의 꼭두각시놀음이 부끄러워 은폐하는 광기의 카니발 같은 것.

얼마 전 동네 학교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의 교사가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발언과 신체접촉을 한 사건이다. 취재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면 이 사건을 처음 제보한 학생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학교의 다른 잘못들도 보도하고 기사화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사건들에 대한 제보도 이어졌다.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소의 잡음은 덮자고 말하는 어른들과, 그런 어른들을 조롱하며 도리어 더 많은 학교의 잘못을 고발하고 성토하는 학생들의 대비. 학교라는 상징에 자기들의 욕망을 투여하는 어른들과 그 상징에서 얻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학교라는 상징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학생들의 대비. 학교의 ‘어른’들은 학교라는 상징이 자기의 명예라도 되는 양 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학교의 평판이 떨어지면 대학입시 성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면서 울먹거리던 그를 보면서 실소가 나왔다. 도대체 학교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과 대입결과의 상관관계를 연결지으려면 뇌 내엔 어떤 망상이 가득차야 하는 걸까. 제보를 해온 학생들은 해당 교사의 사소한 잘못을 들추느라 여념 없었다. 수학여행에 가서 그 교사만 다른 층에 묵었으니 특혜라거나, 그 교사만 생활지도가 유독 엄격했다거나 하는.

상징에 집착하면 본질을 잃게 된다. 이 학교의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은 학교의 명예에 집착하는 광기 어린 태도로 폭력을 만들었다. 그들의 언어 어디에도 피해자는 없다. (그들은 실제로 ‘사건을 명확하게 고발하고 나선 이가 없으니 피해자가 없는 셈’이라는 논리를 들고 오기도 했다. 끔찍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가해 교사라는 ‘악’의 상징에 집착하느라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발생한 젠더 권력의 격차,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저 ‘가해자’ 개인에게 모든 문제를 치환했다. 그래서 그 악을 치우고 나면 그 자리엔 또 무엇을 채워 넣게 될까.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떠난 자리에 문재인이 들어 무엇이 달라질까. 문재인이 떠난 자리에 다른 이를 채우면 또 무엇이 달라질까. 상징을 깃발처럼 올리고 그걸 빼앗고 찢겠다며 싸우는 동안 결국 웃는 건 누구일까. 깃발을 숭배하는 집단이 광기를 부리는 동안 배제되는 건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이다. 광기의 집단이 올린 깃발을 찢겠다고 덤비는 일은 오히려 광기가 짓밟은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은폐하는 일이다. 또 다른 광기. 랑시에르의 지적처럼 정치란, 또 삶과 투쟁이란 깃발과 상징들의 싸움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몫 없는 자들의 싸움이어야 한다. 깃발을 보며 미치지 말자. 당신이나 나나 몫이 없긴 마찬가지.


[워커스 32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2012년 대선에서 난 문재인을 찍었다. 그즈음 숱했던 술판에서 “문재인이 이명박이나 박근혜와 다를 게 뭐냐”고 말했다. FTA와 대추리, 비정규직법, 부안, 이라크 파병 등등등. 참여정부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만큼, 혹은 그보다 더 노동자와 농민, 민중들을 괴롭혔다. 그 때도 지금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문재인을 찍었다.

이번엔 좀 빠르게 고백하자면 난 심상정을 찍었다. (더구나 나 혼자 조용히 심상정을 찍는데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심상정을 찍자는 독려도 좀 했다.) 여전히 숱했던 술판에서 난 “심상정은 또 문재인과 다를 게 뭐냐”고 했다. 진보정치를 참칭하는 자유주의 정치, 페미니즘을 자처하면서 당내에 창궐하는 ‘한남충’들에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비겁함, 피와 눈물이 치열하게 쌓아올린 진보정당의 성과를 갉아먹은 기회주의. 그런 말을 했다. 이런 생각도 당분간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엔 심상정을 찍었다.

# 떡밥에 낚이지 마세요

당연하지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다고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새 대통령은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실상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직고용 정규직 전환보다는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은 그대로 둔 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중규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찾았을 때 이런 우려를 제기한 노동자에게 “한 번에 다 얻으려 하지 말라”고 답한 건 우려를 더 키운다. 인천공항공사가 ‘좋은일자리 TF’를 만들면서 자회사 설립을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정규직화, 노동중심 같은 말은 사실 떡밥이다. 떡밥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간 결과 비정규직 법안이 만들어졌고 대추리와 이라크엔 군대가 파병됐다. 떡밥에 낚이면 실상 우리의 삶은 저들의 정치에 포섭된다. 그 포섭은 저들의 알리바이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 늬들도 좋아했잖아.” 안타까운 건 아직도 자기들이 낚인지 모르는 어망 속의 물고기들이다.

정의당으로 표상되는 한국의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본래 진보 운동은 거개의 권력과 자본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함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적대함으로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에 진보와 정치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 그러나 진보정당은 진보보다는 정당에 방점을 찍음으로 공적 영역과 권력에 포섭됐다. 진보 ‘정당’의 정치는 새로운 것으로의 전복보다는 체제를 용인함으로 얻는 안정적 지위에 국한됐다. “사회적 합의가 용인하는 진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같은 거다. 중식이 밴드의 여성혐오 가사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김지연 성우 부당해고에 이은 당내 메갈리아 논쟁에 대처하는 정의당의 방식이 그랬다. ‘안정된 진보’의 떡밥에 낚이면 상상력과 자생성을 박탈당한다. 균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마침내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 그렇지만, 떡밥을 버리진 마세요

문재인이나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토록 지껄이면서도 정작 그들을 찍은 이유는 어쩌면 그게 ‘연대’의 본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대란 본질적으로 서로가 가진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2012년, 문재인은 쌍용차 해고자의 복직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연히 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노동 문제의 상징과 같던 쌍용차를 언급함으로 자신의 개혁 이미지를 공고히 하려 했을 뿐이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쌍용차의 해고노동자들이 일거에 복직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건 고작 대통령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적어도 노조가 박근혜 정부에서보단 조금 더 유리한 고지에서 투쟁하고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언급’의 힘은 딱 그만큼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을 위해 난 문재인을 찍을 수 있었다. 문재인은 표를 얻고 ‘우리’는 딱 그만큼을 얻는 거다. 이번 선거에서 심상정에게 표를 준 이유도 마찬가지다. 계속 열세였던 심상정이 TV토론에서 성소수자 문제에 자기의 1분을 할애하는 순간, 멀리서 찾아왔다는 성소수자 청년과 얼싸안던 그 순간 심상정의 지지율 그래프가 움직였다. 그렇지만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소수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심상정이 득표한 수만큼 혐오가 조금 ‘주춤’할 것이란 기대. 그녀에게 준 ‘표값’으로 내가 기대한 건 딱 그만큼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쿨하게 다시 헤어지는 것. 그게 연대의 본질이다.

정치인을 이용하는 건 그들을 논리적 모순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 표를 구하러 다닐 때와 이후의 말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말의 무기를 쥐고 그들을 다그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죽어도 그들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시혜와 권력의 크기를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저 애초부터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용할 거리들은 차고 넘친다. 낚시 바늘을 피해 떡밥을 야금야금 물어뜯을 방법은 많다. 난 낚이는 것은 싫지만 떡밥엔 찬성한다.


[워커스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