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대학에선 두꺼운 철학책을 끼고 앉아 사랑이니 삶이니 실존이니 하는 말을 지껄이고 싶었다. 어릴 때 본 드라마에 나온 형들은 그랬다. <우리들의 천국>이나 <카이스트> 같은 드라마. 나이를 더 먹고 취직을 하면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의가 넘치는 신입사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야근 중에 눈 맞은 직장동료와 시작한 불 같은 연애 같은 것도 상상했다. <미스터큐> 같은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이 꼭 있었다. 그런 장면에서 여배우는 주로 김희선이었다. 꿈이 참 컸다. 난 장동건이나 김민종이 아닌데.

생각해보면 한 20년쯤 전, 드라마엔 캔디들이 참 숱하게 나왔다. 그런 드라마의 캔디는 자고로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대충 때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하라”는 대사를 날려주는 게 자고로 모든 드라마 속 신데렐라, 캔디의 첫 대사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 역도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드라마 속의 대학에도 삶이나 실존, 사랑, 낭만 같은 오글거리는 말보다 알바와 최저임금과 등록금, 취업난 같은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캔디들은 이제는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돈보다 꿈과 사랑을 택하던 대학생들은 꿈과 사랑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예전엔 직장에서 야근하다 눈 맞는 커플의 가장 큰 방해가 ‘연적’이었지만 지금은 ‘신분’이다. 남자 주인공은 주로 정규직, 여자 주인공은 비정규직이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드라마 주인공들과 달리,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하고 취직해야 하는 신자유주의형 주인공들이 갖는 삶의 태도 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드라마.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CJ E&M의 예능채널인 tvN에서 드라마를 만들던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라마 <혼술남녀>의 종방연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이한빛 PD가 만들던 <혼술남녀>는 노량진 고시학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친구가 없고 돈이 없고, 시간과 여유가 없어 홀로 술을 마시는 ‘혼술족’들의 이야기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는 그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려 한다고 드라마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한빛 PD의 일은 위로와 공감이 아니었다. 이한빛 PD는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하면서 촬영 중간에 촬영팀에게 계약파기를 알리고 계약금을 환수 받는 일을 담당했다. 드라마 현장의 계약직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 하는 일이다. 이한빛 PD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일에 대해 선임 PD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욕설이었다. 이후 그에게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이 강요됐다. 선임의 눈 밖에 난 그에게 인격적인 모독과 집단 괴롭힘도 뒤따랐다. 이한빛 PD의 유가족들은 CJ E&M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이한빛 PD가 사망한 이후 회사는 유가족에게 “이한빛 PD가 불성실했고 비정규직을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사건은 6개월 가까이 은폐됐고 4월이 돼서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랐다.

기륭전자, 서울대 점거 농성장, KTX 해고 승무원, 416 연대. 이한빛 PD가 1년차 월급을 쪼개 돈을 보낸 곳들이다. 신출내기 드라마 PD는 아마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나보다. 마음과 힘을 모아 더 좋은 세상, 따듯한 마음을 그리는 그런 드라마. 돈 보다는 사랑이 중하고 삶에는 희망이 남아있는 그런 드라마. 외로운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드라마. 그러나 세상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정리해고, 계약직, 욕설과 따돌림. 어딜 봐도 드라마 같지 않던 현장에서 그는 조금씩 죽어간 셈이다. 차라리 그보단 이제 드라마조차 더 이상 따듯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정한 세상의 삶이야말로 드라마처럼 사는 일일까.

#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은 ‘사이다 같은 드라마’라고 호평 받았다. 말단 사원들이 재벌기업의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몇 해 전 크게 히트한 <미생>은 비정규직 노동자 들에게 ‘장그래’라는 대명사를 만들어줬다. 그 드라마들을 꼬박꼬박 챙겨봤지만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경리부 말단직원들이 대기업의 분식회계를 밝혀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고,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견뎌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 드라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고다르가 말하길,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했다. 영화란 현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만드는 이가 그리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을 막무가내로 해고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PD가 죽어나가는 세계에 사는 이들이 그려낸 현실을 구태여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희망 같은 걸 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쩐지 자꾸 옛날 드라마만 찾아보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서울의 달>을 유료 결제했다. 홍식이는 비참한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부여잡을 수 있었는데.


[워커스 30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청년문제 같은 건 없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청년문제 같은 건 없다"



답답한 마음에 “그래서 도대체 청년의 문제가 뭔데?” 라고 물었더니 “선배가 겪는 문제가 바로 청년 문제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딱히 반박할 말도 없으니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다. ‘청년문제’를 주제로 (무려 원고지 15매에 달하는, 무려 신박한 문체로) 글을 써내라는 무리한 청탁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청년의 문제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싫었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워커스>가 규정하고 있는, 또는 이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청년’이 무엇인지, 창간 당시부터 ‘청년’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갖은 기획과 꼭지를 생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겠다. 도대체 왜. 청년이 도대체 뭐라고.


청년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다. 이 모호한 의미 규정 때문인지 정부와 지자체가 규정하는 청년 세대의 기준은 제멋대로다. 19대 국회는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처음에 청년을 만 19세에서 만 29세로 규정했다가 30대 구직자들을 소외한다는 지적에 만 34세까지로 상향 조정했다. 정부의 청년전용창업자금 지원은 만 39세 이하만 받을 수 있다. 서울시의 청년보장제도는 만 19세에서 29세가 수혜 대상이지만 성남시의 청년배당 대상자는 만 19세에서 24세까지다. 정치권의 청년규정도 제각각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청년 비례대표를 뽑을 때 청년의 기준이 정해졌는데 새누리당은 35세 미만, 새정치민주연합은 45세 미만이었다. 만 31세의 성남시민인 나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받을 수 없지만 정부의 청년창업자금 지원은 받을 수 있다. 서울은 성남보다 공기가 좋지 않아서 신체적, 정신적 성장과 무르익음이 더딘 것일까.


<워커스> 창간 초기에 ‘청년 패널’이란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2~30대 비슷한 연령의 몇몇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취업, 빈곤, 연애와 성, 가정과 가족의 문제 등등 이른바 ‘청년 문제’로 손쉽게 언급되는 주제의 대담을 하는 기획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기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매 호의 기사에선 대담을 진행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기자가 뭔가 대단한 대화라도 오고가고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과장했지만, 이제와 고백하건대 그거 죄다 ‘뻥’이었다. (독자 제현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매주 도무지 하나로 그러모아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됐다. 뉴스가 제공하고 드라마와 영화가 포장한 ‘청년 세대’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청년 세대는 죄다 가난하고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알바에 시달리고 그 알바 업주는 악덕업주라는 설정. 그럼에도 미래의 꿈과 희망에 열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클리셰, 지독한 가난함에도 끈끈하게 이어지는 사랑과 그 사랑마저 극복하지 못할 고단한 삶이라는 진부한 러브라인까지. ‘청년 세대’라는 허상을 만들고 그들이 사는 허구의 세상을 구획하는 일이었다. 거짓부렁의 글을 돈 주고 사 읽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의 관심과 호명은 거개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변명도 얹고 싶다. 대상을 짜맞추고 거기서 자기만족을 얻는 일. 무례한 고나리질과 의미 없는 꼰대질.


이건 ‘청년’이라는 개념 범주를 묻기 이전에 ‘청년 세대’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이를 규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정말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세대의 범주를 상정해놓고 문제를 만들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끼워 맞추다보니 ‘청년’이라는 세대는 호명의 순간부터 대상화된다. “너희는 이런 세대고, 이런 아픔을 겪고 있을 거야 맞지?” 체제는 젠더, 인종, 세대, 국가 같은 것들로 노동력을 구획하고 통제한다. 2017년을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취업하기 어려운 건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따른 문제고 삶이 피폐해지는 건 고도화된 신자유주의가 추동한 경쟁 때문이다. 그들이 그 세대여서 그런 게 아니다. 청년들이 만 39세를 넘어서는 순간 ‘뿅’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은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 제각각의 삶, 저마다의 어려움, 저마다의 고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의 주름에 새긴 고통의 종류와 양과 질은 다 다르다. 그것들을 고작 ‘세대’의 이름으로 뭉뚱그리는 일은 너무 안일하고 불온하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달관 세대 등등등 등등등.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수많은 말과 말의 잔치가 포섭할 수 있는 ‘청년’은 없다. 세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다. 특정 연령대를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가난한 청년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문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아니라 불량한 일자리, 불안한 고용이 문제다. 29세의 미취업이 49세의 실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건 아니다. 미래세대라고? 49세에겐 미래가 없냐고. 굳이 일부러 노력해서 ‘청년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워커스>는 안일한 세대론이 담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은폐하고 있는 너머의 것들을 들춰내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젊은 피’를 운운하며 떡고물 던져주듯 젊은 이들의 표를 구걸하거나 강탈하는 정치권의 속내, 88만원이니 청년의 대변자니 하는 세대론 장사치들의 꿍심 같은 것. 오늘 ‘청년 세대의 문제’를 운운하는 건 피시방에서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부디 담당기자는 다음 원고청탁에선 더 신박한 주제의 원고를 청탁해주길 바란다.[워커스 29호]

오랜만에 정치 얘기

1. 



식당주인이 애초에 밥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항의하러 찾아간 거라고. 이게 그렇게 이해가 안될까. 어떻게든 감싸주고 싶다면 일단 무엇을 잘못했는지부터 인정하고 시작하는 게 상책. 그게 그렇게 어렵나. 

2. 
386, 깨시민, 노빠, 친문.. 뭐 등등등 등등등. 그들을 어떻게 호칭하든가 어쨌든. 그들은 진보, 인권, 민주주의같은 구호를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삶의 행태는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여성을 혐오하고 노동을 소외한다. 생태를 외면하고 지역엔 무관심하다. 구호는 혁명을 외치지만 삶은 속물적이다. 촛불을 들고 정권을 타도하자고 구태의연한 구호를 외치고선 그 선언적 살풀이가 끝나면 어느 곳에 모여앉아 여성을 혐오하고 성소수자를 비하하며 주식과 부동산 정보를 탐닉하는 그들. 

 아니라고 발뺌하지 마라. 부안, 대추리, 새만금, 대우차, 한미 FTA, 이라크 파병, 김선일, 허세욱, 배달호, 전용철, 이경해.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 이름들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대통령은 이명박이나 박근혜와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착한 FTA", "좌파신자유주의" 같은 말장난은 입으로는 이상을 지껄이면서 삶은 저들과 똑같이 속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분열증을 증거할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토록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건 그들의 정치적 오류보다는 그 분열적 태도가 역하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3. 
이건 그저 유령들의 싸움이다. 박정희의 관과 노무현의 관을 짊어진 사람들의 싸움이다. 신화 속 영웅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일단 영웅을 신화 속의 인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후일 또다시 영웅으로 소비돼야 할 사람들. 그래서 정치판에 정작 정치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지겹도록 끊임없이 제기되는 갖은 음모론도 같은 맥락이다. 

 대의제 정치는 정치의 자리에 정치보다 인격신을 만들어 끼워넣는다. 이런 부분에서 스스로 '진보정당'을 자처하고 있는 곳들과 거기에 서식하는 '진보 정치인'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권력의지 같은 피씨방에서 디스크 조각모음하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데 어디에 진보가 들어갈 수 있나. 

 정치는 삶을 행복하게 할 질문의 축적이다. 진정한 영웅,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초인을 뽑는 천하제일무술대회가 아니라. 게이가 핍박받고 장애인이 불편하고 난방을 하지 못해 얼어죽고 공장에선 노동자가 쫓겨나고 도롱뇽과 도마뱀이 죽어가는 곳에 필요한 것이 정치다. 정치란 권좌가 아니라 일상이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 노동자와 친한(親努)정치는 도덕적 인격이 아니라 질문의 축적이 이루어낸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박정희의 유령이 출몰하는 건 구태정치의 과거 잔재들 때문보다는 이 분열증의 사회가 자초한 것에 가깝다. 속물적 삶.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맹목적 구호. 삶의 가치, 인간적 삶에 대한 희구같은 말이 이미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이 유령을 내쫓자고 저 유령을 들여오는 셈. 해야 할 일은 먼저 인간적 삶을 복원하는 일이다. 

약자와 함께 하는 삶, 빼앗는 것보다 나누어 잘 사는 일, 삶에 희망을 드리우는 말과 노래. 누군가의 삶을 앞에두고 감히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는 일. 그러니까 삶과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를 전복하는 일.





민중총궐기 참석 후기

주말이 지났지만 100만의 여파는 아직 사그라들질 않는듯 보인다. 그동안 억압당한, 혹은 스스로 억제해온 분노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100만의 집결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억압당한 분노의 표출이었다면 평화시위의 프레임은 스스로 억압해온 분노의 관성이다. 저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으니 폭력만은 안된다는 말, 아이와 노인, 여성들도 함께 하고 있으니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 문법이니 규칙이니 전략이니 하는 말들이 그 관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건 사실 전복의 상상력이 부재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제도와 법이라는 거대한 아버지를 정점에 둔 일종의 오이디푸스 삼각형.

선거와 법치주의 같은 현대 민주주의 제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법치주의는 법의 지배 보다는 법에의한 지배에 가깝다. 그보다는 법 자체가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한다.모든 법을 부정하는 아노미를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좀 그런 걸 지향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좀 더 아나키적으로) 법이나 선거제도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종종 쓰는 표현이지만 주인집 허락을 받아, 주인집 망치를 빌려, 주인집을 부술 수는 없다. (주인집 망치를 '빼앗아' 주인집을 부수는 일과는 다르다.)

아버지, 주인집, 제도, 법 같은 것들을 살해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 죄의식이란 강력한 삼각형의 강박이 날조한 것이기 십상인 때문이다. 그 콤플렉스 안에서 발생한 저항은 저항이라기 보단 순응에 가깝다. 전복과 탈주의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삼각형의 정점만을 갈아치운 채 우리는 여전히 갇혀있게 된다.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권이 저렇듯 개수작을 부리는 건 그 징후다.

100만의 사람이 모이면 100만의 욕망이 분출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욕망의 분출을 긍정하는 일이다. 혁명은 욕망의 분출에서 시작한다. 욕망은 그저 결핍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산되고 또 생산하는 일이다. 평화라는 말에 욕망을 가두지 말자. 평화는 고착된 상태가 아니라 추구하고 지향되는 과정이다. 평화를 지향하는 상상, 탈주를 도모하는 용기. 필요한 건 오직 그런 것들 뿐이다.


+

이번 민중총궐기의 브금은 <청년폭도맹진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 그 누구라더냐 
저 철옹성을 쳐부수고져 힘차게 맹진하노라 
 짓밟힌 자들의 처절한복수리로다 
주먹 불끈쥐고 일어설 때 

화염 속에 불타오르는 저 철옹성의 끝을 보리라






농사꾼_이야기


농사꾼_이야기


0.

초등학생 때, 대기업 총수들의 자서전이 유행처럼 출판됐다. 지금이야 그게 재벌의 정계 진출을 위한 떡밥, 기업을 사유화하기 위한 신화화의 수작이라며 비아냥거릴 만큼 머리가 굵었지만 그땐 그 ‘성공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참 꼼꼼히도 읽었다. 


그 자서전들의 내용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재벌 회장은 어린 시절 밥 먹듯 서울로 가출했다.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가출할 때마다 그를 찾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흘린 땀만큼 반드시 돌려주는 게 땅이다.” 


어린 나이에 그 말이 왜 그리 인상적이었는지 이후로 재벌 회장보다는 농부를 동경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솔직한 노동을 하고 딱 그만큼의 대가를 거둬들이는 사람들. 생명을 키워 내고, 밥을 만들고, 키워 낸 삶이 다시 죽어 새로운 생명이 되는 세계의 순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


1.

실제로 농부를 처음 본 건 스무살무렵이다. 그 때 그는 서른 다섯이었고 어릴 적 떠났던 고향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요리사였다던 그는 아마 고단한 서울살이를 견디지 못했으리라. 논과 밭을 오가는 트럭 안에서, 

둘이서만 몰래 빠져나가 차가운 커피를 놓고 낄낄거리던 읍내의 종묘사에서, 낚시대보다는 소주잔과 삶은 돼지고기에 더 집중하던 밤의 저수지에서 그는 늘 힘겨워했다. 바닥을 친 줄 알았더니 더 내려가던 나락값과 말라버린 고추모종과 빚을 갚기 위해 더 빚을 내야 하는 상황과 커가는 아이와 한미 FTA와 아무나 보고 막 짖어대는 그 놈의 강아지 새끼와 기타등등 기타등등.


우리는 만나면 늘 술에 취하는 중이거나 가까스로 술에서 깨는 중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상태였는데,

“가능하다면 농사를 짓고 싶다”는 내 말에 그가 절대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때에 우리가 술에 취하는 중이었는지 깨는 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그는 농사같은 거 짓지 말라고 했다. 환상을 갖지도 말라고 했다.


1-1.

대학을 졸업하고 더이상 농활을 가지 않게 됐을 때도 종종 그를 찾아갔다. 어느 때엔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렵다며 그 앞에서 훌쩍대기도 했다. 데모하러 상경 한 번 하지 않는다며 그를 타박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곧잘 발끈해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론은 늘 건배였다. 별 수 있나 뭐. (둘 다 씩씩거리는 걸 그치진 않았다.) 성실하게 농사를 짓다 결국 생활에 실패한 그의 형제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한숨을 쉬기도 했고, 잔뜩 늘어난 그의 빚을 걱정하기도 했다. 부끄런 고백이지만 그의 집 인근에 원전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난 처음으로 원전이 들어서는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가 받을 보상금이 그의 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일지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꽤 오랜시간 함께 술을 먹었고 고기도 먹었고 나이도 먹었다. 


그 날은 전 날 청보리밭 축제를 가자는 그와 집에 앉아서 술이나 먹자는 내 이죽거림이 길어지고 결국 그가 토라져서 샐쭉샐쭉 술을 잔뜩 먹은 다음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현관문 넘어로 (거실에서 내가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로 뚫린 현관문을 열어 놓았었다!! 무려 배를 드러내놓고 자고 있었는데!!) 비닐 하우스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아, 술 진짜 많이 먹었는데. 아침나절 하우스 앞에 앉아서 해장술을 홀짝 거리는데 그가 “이제사 농사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농사도 세상도 차근차근 한 평씩 지어야 한다는 걸 나이들고 농사를 짓다보니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삶을 짓는 일이 농사를 짓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걸, 20년 가까이 농사를 짓고 마흔이 훨씬 넘어서야 이제 가까스로 조금 알겠다고. 한 평씩 한 평씩 차근 차근. ‘이 형이 나만 놔두고 어른이 됐나’하는 서운함에 “그게 신상 복분자 말뚝이 나올때마다 사재기해서 말뚝만 만 개를 가진 남자가 할 말은 아니”라고 이죽거리긴 했다. 


2.

생각해보니 내 할아버지도 농사를 지었었다. 꽤 길었던 고시생활을 마친 막내 삼촌이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평생을 미장이, 목수, 노가다로 살았던 할아버지는 그린벨트 안에 있는 땅을 조금 빌려서 고추와 깨, 감자, 옥수수 따위를 심었다. 주말이면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고모네 식구들과 신혼인 삼촌 가족까지 다 모여서 그 밭에서 일을 했다. (물론 난 원두막에 앉아 삶은 감자를 까먹고 낮잠을 잤다. 본 투 비 배짱이) 드라마에 나올 법한 고부갈등 에피소드가 하루 걸러 두번 씩 발생하는 우리집 가정사에서 가장 화목했던 시절이다. 음식과 식재료에 대한 고나리질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나와 그 재능을 내게 물려준 엄마는 할아버지의 밭에서 나는 채소들을 좋아했다. 


연이은 사업실패와 가난함에 허덕였던 할아버지는 밭고랑 사이에 난 풀이름 하나 모르는 것이 없었고 감자 한 알도 허투로 다루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당시닝 끔찍히도 아끼는 맏손자를 밭에 데리고 나가 풀이름을 알려주고 감자를 캐고 원두막을 같이 고치기를 좋아하셨다. 그럴 때엔 일생을 성공보단 실패가 많았던 나이든 남자의 의기소침이 사라졌다.   나이 들어서도 호두알만한 호박 반지를 끼고 다닐만큼 멋내기를 좋아하고 허영끼가 적지 않은 할머니도 밭에서 일하기를 좋아하셨다. 당신이 기른 배추며 고추로 겉절이라도 담근 날이면 전화통에 불이나도록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말 열심히 밭을 일궜고 딱 그만큼 거둬들였다. 그리고 딱 그만큼 당신들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했고 행복해 했다. 삼촌이 돈을 벌어 신도시의 좋은 아파트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사갔을 때 즈음, 그러니까 더이상 밭일을 하지 않게 됐을 즈음 할머니 할아버지는 쇠약해졌다.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어느 명절날, 난 “흙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동의를 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3.

그리고 백남기. 


백남기 씨는 포도밭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다. 유신 정권에 학교에서 제적된 후, 오갈 곳이 없어 수녀원과 수도원 등을 돌아다니며 날품팔이를 하고 인천 포도밭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1980년 세 번째로 제적된 이후에는 아예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5.18 유공자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보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사라져 가는 우리 밀에 관심을 두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밀이 사라지고 미국산 방부제 밀가루가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일을 듣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한 알 한 알 우리 밀 종자를 모으고 다녔을 농사꾼 백남기의 발걸음.


그는 자신을 추방한 이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된 나라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울분이나 지난날의 업적 대신 지금의 삶을 꾸준히 이야기했다. 그는 “농민이 편하게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살았다. 백남기는 거짓된 세상에서도 꾸준히 삶의 소중함을 지켜 냈다. 유신 독재와 계엄과 신자유주의의 풍파에 맞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나 하나 한 평씩, 한 뼘씩. 백남기의 삶의 방식은 농사꾼의 방식이었다. 하나씩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잡초를 뽑았다. 비가 오기를 기다렸고 비가 내리면 감사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가 많이 난다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뿌리지 않은 씨앗에서는 싹이 나지 않는 당연한 삶. 여든 여덟번 손길을 준 벼에서만 나락이 쏟아지는 일. 범사에 감사하며 삼라만상 앞에 겸손해지는 일. 백남기가 그런지 어떻게 아냐고. 원래 농사꾼의 방식은 그런 거다. 생명과 먹을 것과 탄생과 소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삶이란 그런 거다. 


4.

왜 갑자기 이렇게 길고 두서없는 글을 주절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 특별히 하고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고. 삶을 살아가는 일이 곧 농사를 짓는 것 같다라는, 한 평씩 한 뼘씩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어제 장례식장 앞에 앉아 있다가 그렇게 농사꾼의 삶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삶을 그리다가. 내 농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난 씨도 뿌리지 않고 수확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비가 온다고 투덜거리고 해가 난다고 볼맨소리를 하지는 않았는지. 뭐 그런.


암튼, 공사말고 농사짓자. 씨 뿌려야 밥나오지.

테러방지법 단상

파놉티콘 
파놉티콘을 처음 발명한건 밴담이다. 무려 200년 전. 간수 혼자서도 죄수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효율적 감옥 시스템이 파놉티콘이다. 파놉티콘이 감옥 뿐 아니라 학교, 군대, 병원, 나아가선 사회 전체에서 권력의 감시체제로 작용한다고 지적한 것은 푸코다. 그건 한 40년쯤 전이다. 파놉티콘의 '통제'에 놓인 사회에서 개인들은 분리되고 돌출된 개인은 중앙의 감시자에게 쉽게 노출된다. 쉽게 계측되고 검증된다. 피감시자들은 잠재적으로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가시성의 체제 하에서 매 순간 감시 받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억압하게 된다. 덕분에 권력은, 감시를 통해 생명을 가두거나, 제거하거나, 억압하지 않고서도 개인의 신체와 행동에 훈육효과를 발생시키게 된다. 아, 지금은 2016년이다. 

# 테러방지법 
국가정보기관이 합법적으로 모든 국민들을 감시하고 감청할 수 있게 해주는 법안. 국정원은 이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다. 모든 국민은 잠재적 테러 용의자. 감시와 통제, 처벌은 용이해졌고 권력은 쉽게 돌출된 개인을 제거할 수 있게 됐다. 권력은 저항을 압도하고 체제는 공고해졌다. 몇년 지나면 오가작통법 같은 것도 부활시킬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만세. 아, 하일 박근혜. 뭐 이런 걸로 해야 하나. 

# 필리버스터 
김광진의 필리버스터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록을 넘어섰다고. 내 생전에 필리버스터를 생으로 보게 되다니. 이 나라의 버라이어티함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이나 샌더스의 필리버스터가 유명하고 간지도 나지만 사실 필리버스터가 일어나는 국회는 결국 후진 정치라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필리버스터가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진 모르겠으나 이게 이뤄지는 동안 온 나라의 모든 이슈는 여기에 빨아먹히게 될 거다. 그리고 3개 야당들의 합심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고. 여러가지 우려가 많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여의도에서 목이 터지고 다리가 퉁퉁 부을 국회의원들을 응원하는 일이다. 그래, 일단 막고 보자. 

 # 은수미 
은수미 의원의 필리버스터가 9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곳곳에서 은수미 의원을 칭찬하거나 격려하는 기사와 댓글들이 나오는데 많은 글이 '50대의 연약한 여성의원'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이고 체구가 왜소하고 50대라서 그녀가 더욱 대단하다고 하는 건 여성이고 체구가 왜소하고 50대인 사람에겐 본래 한계가 있다고 단정하는 셈이다. 이런 이야기에서조차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그 치졸함이 지겹다. 공천 어쩌구 하는 발언이 나왔고, 은수미 의원은 공천을 바라서 행동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래도 은수미 의원이 우리동네에서 공천을 받았으면 좋겠고 선전을 펼치고 당선됐으면 좋겠다. 은수미 의원은 사노맹 활동으로 91년 수감됐고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사노맹을 탈퇴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가 주류정치에 입문하면서 많은 말이 있었고 나도 그게 마뜩치 않았지만 의정활동에서 그녀가 쌍용의 해고노동자들에, 삼성의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강정에 보인 열의를 계속 지켜봤다. 그녀는 이 망할 국회에서 몇 안되는 쓸만한 의원이었고 다음 의정활동이 그만큼 더 기대되는 정치인이다.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여야의 지도부가 만날테지만 이 유능하고 의지높은 의원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철수 너 말이야 너. '정권교체'가 진심이라면 말이다. 

덧, 정말로 은수미 의원 지역사무소에 박카스라도 하나 놓아드려야겠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몇가지 단상


'위안부' 문제에 대한 몇가지 단상
 
1.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타결 이후 이에대한 비판과 비난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모든 논의가 민족주의라는 다분히 감정적인 거대담론에 흡수되고 있다. 더구나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위 '진보' 내지 '개혁'진영에서는 반 박근혜 정서를 기반으로 민주대 반민주의 정치 구도까지 짜내고 있다. 표면으로만 보면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 시대 일본과의 문제고, 이를 졸속으로 합의해버린 현 정권에대한 당연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정도의 단조로운 논의와 투쟁은 결국 본질이거나 외면해선 안되는 영역까지도 은폐해버리는 기능을 한다. 

2. 
'순결한 소녀'가 짐승같은 왜놈 군인들에게 짓밟힌 사실에 대한 분노.라는 이미지가 '자발적 성판매'와 '인신매매'라는 극단적인 대립 구도를 낳지만 이는 기실 '여성의 순결'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시선이라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위안부 문제는 본질적으로 전시 성폭력의 문제다. '순결'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가 순결한 소녀의 삶을 짓밟았다는 또다른 가부장적 억압이다. 이같은 가부장적 억압의 시각은 한국 남성이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성폭력, 라이따이한과 코피노들에 대한 외면으로 귀결된다. 그 지긋지긋한 변명, "걔들은 원래 매춘부잖아"로. 

3. 
위안부 문제에 대한 편협한 시각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연구 자체를 호도할 우려도 있다. 실제로 위안부 모집통로는 다양했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일본군이 주도적이거나 밀접하게 관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대한 면밀하고 구조적인 파악과 연구가 완료되기 전에 민족주의적 감정과 논리없는 일반화, 순결 이미지에 대한 추앙이 선행하면 일본군과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구조를 올바르게 규명할 수 없게된다. 이를테면 식민지배 시절 조선인 포주나 자본가에 대한. 악마화 할 대상을 일원화하고 그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내기는 쉽다. 하지만 제대로된 분노를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잘잘못을 따지는 일부터 해야한다. 

4. 
여성의 성판매에 대한 입장도 분명해야 한다. 사회일반이 성노동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 성노동자를 범죄자 내지는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가운데 위안부 피해 사례를 면밀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정확하지 않은 사례지만 콩고에서 전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식량조달을 위해 자발적 성판매를 하는 일.도 있다. 이를 '매춘'이라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로 규정하면 정작 피해자의 실상과 경험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피해여성 제각각의 사례와 위안부 피해 과정을 단순하게 일반화 하면 현재의 성노동자는 물론이고 당시의 피해여성들에 대한 이해도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4-1. 
전시 성폭력의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베트남에선 한국 남성들이 가해자다. 전시 성폭력의 문제는 국제적 연대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문제로 확장돼야 함이 옳다. 한국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국제 사회의 압력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고. 그러나 편협한 민족주의 시각, 뒤떨어진 가부장적 시각으로는 국제연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이는 사실 독도와 야스쿠니 같은 일본과 얽혀있는 많은 문제들에서도 같은. 

5. 
현재 야권에서 만들고 있는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이라는 구도 역시 마뜩치 않다. 사실 이 모든 논의를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는 건 이 지점이다. 위에서 지적한 모든 복잡다난한 논의와 고민거리들을 다 재쳐두고, 분노와 당위가 수렴돼야하는 지점은 고작 박근혜나 정권 따위가 아니다. 이는 생존 피해자를 중심에 놓은 사고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도 아니다. 민족주의 담론은 결국 대중적 감정의 문제고, 사람들을 추동해내기에 가장 좋은 미끼다. 결국 물 만난 김에 노 젓는 금배지 장사들의 장삿 속. (그러고 이기기라도 하면 다행이게. 어차피 질 거면서.) 

6. 
일본에서 우익정권이 집권하며 민족주의 정서가 강해진 것에 대한 효과로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 역시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쟤가 똥먹는다고 따라 똥먹지는 말자. 

7. 박유하 교수의 책을 읽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선 우익적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학문의 영역에서 이뤄져야 할 토론을 법정공방으로 옮겨가거나, 이론과 지성의 기반 없이 이뤄진 감정적 '비난', 그리고 마녀사냥. 이런 건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싶은.


절집 이야기

1. 

부처님의 제자 중에 제바달다라는 남자가 있었다. 본래 부처님의 사촌형제인데 석가집안에서 일종의 에이스였던 거다. 인품좋고 인물좋고 똑똑한. 여시아문을 말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해 경전을 작성한 아난존자의 친 형이기도 하다. (불경에 보면 아난존자의 미친 꽃미남 외모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니 제바달다도 엄청 꽃미남이었을 거다)


부처님이 성불이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제바달다도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는데 출가 이후에도 그 빼어난 재능으로 종단의 에이스로 거듭났다.


그러다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악행을 저지르다못해 제 스스로 부처를 자처하고 종국에는 부처님을 해하려 하다가 지옥에 떨어졌다. 제바달다가 떨어진 지옥이 유명한 무간지옥이다. 고통만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최악의 지옥.


하지만 중요한 건 악인 제바달다가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거다.

부처님은 후일 제바달다의 이야기를 설법하시며 그 역시 성불할 수 있으며 수행을 쌓아 먼 훗날엔 천왕여래로 성불할 거라고 했다.


악인 제바달다의 이야기는 부처님이 축생 용녀의 성불을 약속한 이야기와 함께 전해지는데, 어떤 악행을 지었더라도, 어떤 존재일지라도,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모두의 마음엔 불성이 있으며 수행하고 마음을 닦으면 성불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래서 절집에선 함부로 사람을 내칠 수 없다. 부처를 해치려하고 오역죄를 저지른 악인에게도 부처님 집은 문을 열어준다. "성불 하세요" 하면서.



2. 

어떤 종교든 마찬가지지만 불교는 기복신앙이 아니다. 돈을 내고 기도하고 절을 한다고 내세의 행복, 현세의 행운을 약속받고 싶은 마음은 종교의 미덕을 갉아먹는 일이다. (기복신앙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또 다음에 할 기회가 있겠다. 기복의 마음과 태도 전반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불교는 차라리 철학에 가깝다. 그래서 불자의 수행은 절집 문을 지키는 게 아니라 절집에 담긴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다


쓰다보니 제바달다와 달리 진짜 종단의 에이스 수제자였던 수보리 존자의 이야기도 생각났다.

부처님이 천계에서 설법을 마치시고 지상으로 귀환하실 때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을 마중하러 나갔다. 지금 공항에 마중나가는 거랑 비슷하게ㅋ 하늘에서 오시는 거니만큼 높은 산 꼭대기로 내려오셨는데 제자들의 팬심에 가장 정상에서 가장 먼저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수보리 존자는 1등 경쟁엔 관심 없었지만 그래도 마중은 나가려고 뒤늦게 길을 나섰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내가 맞이하려는 건 무엇인가. 부처님의 몸인가 부처님의 법인가'


이 질문이 '공'사상의 핵심이라고 한다. 이를 깨달은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제자들 중 해공제일이라고 불리게 된다.

여튼 산꼭대기에서 부처님 맞이 1등 로얄석을 차지한 비구니에게 부처님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나를 제일 처음 만난 건 네가 아니라 수보리다. 그가 오직 나의 실체를 맞이했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래도 고생했는데 칭찬이라도 먼저 한마디 해주시지.ㅋ


아무튼 절집을 문간을 지키는 것과 자비와 사랑, 존중을 설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을 보는 것. 어느게 불자의 공부인지는.



3. 

종교계에서 정치적으로 보수의 색채를 띄는 건 공부가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수님은 노예노동과 빈부격차를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고 부처님은 전인도의 평화체제 구축과 신분제 철폐 활동가였다.



우리 공부 열심히 하고 성불합시다 신도님들.

통합진보당 해산 단상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데,

8대 1이라니 이런 시부럴 노친네들이 단체로 망령이 들었나. 하는 생각과 성향이니 판결경향이니 임명주체니 하는 오만가지 것들로 뭐라도 분석해보겠다던 기사가 무슨 의미였나 싶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뽑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나라엔 원래 그리 거창한 민주주의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회는 자본과 권력과 군홧발로 살떨리는 독재가 가능한 시기도 아니다. 언제고 분명 치떨리게 부그러워질거다. 하지만 그래도 시부럴 노친네들이 단체로 망령이 들었나.


통합진보당에도 하고싶은 말. 


진보정당의 꿈만 30여년이다. 노동자 국회의원 한 명만 있어도 나라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었다. 지금 그 노동자와 농민, 진보정치의 이름은 어디로 갔나. 누구의 책임을 말하기 전에 그 쌓아왔던 시간과 거기에 묻힌 눈물과 피들을 명확히 기억했으면 좋겠다. 


지금 자기들이 흘리는 피눈물 말고.

첫 생중계 리포트, 그리고 흑역사




1. 
첫 생중계였고 하지말라는 실수는 골라서 다 했고 화면에 비친 나는 참 못났다...;;; 에잉. 

2. 
이틀 취재하는 동안 기분이 참 좋았다. 어느 정당이나 개인에 우리의 삶을 위탁 혹은 의탁하는 정치 너머의 것을 우리는 늘 상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상상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우리의 질문, 우리의 삶을 개척하고 바꾸는 우리의 행동. 그게 정치의 본질이고 민주주의의 요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중계가 끝나고서야 앵커맨트를 들었지만, "감동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직접민주주의의 현장". 정말 그랬다. 이틀간 본 삼척은. 

3.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좋은 기사를 만들고 싶었다. 보탬이 된다거나, 혹은 이 역사의 순간에 한 발 끼어들고 싶은 그런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이 이야기를 잘 전하고 싶었다. 그 숱한 술자리에서 내 꼰대같은 '상상력'이야기를 들어줬던 친구들에게, 허무맹랑하다며 비웃던 사람들에게, 스스로 삶의 정치를 일궈가는 사람들에게 모두 이 이야기가 정확하고 또 아름답게 전달될 수 있길 바랐다. 결국 바람만큼 잘 되진 않았지만. 내가 못나게 나와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꼭.ㅋ 

4. 
어제밤 올라오는 차 안에서는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진심을 다해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지 잘하고 싶었던 기사를 잘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오히려 그 자책감이 주는 안도감이었다. 무언가 진심을 다해 잘하고 싶었던, 온 마음을 쏟았던 일.이라는 게 생각해보니 참 오랜만인 것 같아서. 

5. 
어제 9시 방송을 마치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 최종 결과를 확인했다. 예상했던 결과지만 삼척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원전이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다. 삼척 주민들 중 일부는 어쩌면 원전이 건설되고 그로인해 지급되는 보상금을 받고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원전건설이 에너지 정책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를 잘못된 생각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삶을 살아가는 당사자들이 싸우고 울고 모여서 떠들고 합심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 그리고 서로가 감내해야하고 이해해야하는 그 과정의 소중함에 대해서만 말 할 것이다. 

6. 
아버지의 고향은 삼척이고, 덕분에 내 본적도 삼척이다. 취재할 때 좀 가까워져 보자고 삼척시장에게 그 얘길 했더니 "그럼 성기자도 삼척의 아들이네"라고 말한다. 그 땐 그 양반 참 정치적이네. 라고 생각했는데.ㅋ 

7. 
이 영상은 어쩌면 두고두고 흑역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부끄러움보다 저 현장에 내가 있었다고, 그 과정들을 내가 다 라이브로 지켜봤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그리고 몇몇에게 좀 씹히고 놀림받다보면, 나중에는 더 잘하겠지...으응??ㅋ




단상


“친구들이랑 춤추며 살아왔어, 후회하지 않아” 

1. 
이송 감독의 영화 중 가장 마음이 갔던 건 남쪽으로 간다. 였다. 그래, 난 춤추면서 잘 살거다. 

2. 
하지만 이러쿵 저러쿵 함부로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그저 앞으로도 쭉 영화들을 엿보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살거다. 

3. 
시가 되지 않는 말들만 주머니에 넘쳤다. 고 어느 시인이 그랬는데, 아니다. 주머니에 넘쳤던 말들은 사실 모두 시고 노래였다. 그 가락에 덩실덩실 춤추면서 잘 살거다. 

4. 
바쁘다 갑자기 일거리가 사라져서 여기저기 기웃기웃 노닥거리다 이렇게 쓸데없는 블로그질이나. 덩실덩실 춤추면서 블로그질..으응??ㅋ 내 뒤에서 국장이 내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ㅋ


교육감선거 단상

1.

영화 '잼 다큐 강정'에서 송강호 박사는 인도네시아의 한 해변에 떠내려온 번개표 형광들을 발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계는 멀리 있는 듯,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분절되지 않고 연결돼 있다.


2.

세월호 참사이후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청해진 해운은 물론 해경을 비롯한 관료사회, 나아가 정권까지 그 분노의 화살이 몰아친다. 잊지않겠다고,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당연한 일이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하고, 사회와 세상을 이렇게 방치한 책임을 우리도 나눠가져야 한다. 그러나.


3. 

가끔 무엇을 잊지 않고 무엇에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조금은 뜨듯미지근한 내 마음이나 행동들도 그래서다. 세월호 참사의 주범은 고작 박근혜정권이나 관료주의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박근혜정권을 만들어낸 힘, 관료주의를 유지시켜주는 힘. 생명보단 이윤을 더 중히 여기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 힘에 대한 근원적 질문 없이 이어지는 애도와 분노, 슬픔은 그저 알리바이를 만들고 오늘의 무력함과 상실감을 외면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4.

다시 세월호 참사를 맞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먼저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로 주조한 미래에 우리의 아이들이 살 수 있게 해야한다. 경쟁보단 우정, 이윤보단 생명, 체념보단 저항, 걸스데이보단 그래도 소녀시대 같은 언어들.


5.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 저 짤방을 보고 식겁했다. 고승덕이 알려주는 공부법이란 제목으로 떠돌던데,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가 반찬먹는 시간도 아까워 비빔밥을 만들어먹고 하루 17시간을 공부만 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니까. 그 고승덕은 현재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출마해 꽤나 선전하고 있다.


6.

고승덕이 선전하는 이유는 아마 하버드니 최연소 3시 패스니 하는 그의 쟁쟁한 스펙들 때문이겠다. 교육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그야말로 교육의 승리자. (같은 보수 후보인 문용린 현 교육감은 지난 선거 유세에서 서한샘, 강성태 같은 사교육 업자들을 불러놓고 "조용히 공부 잘 시켜 서울대 보내는게 교육의 본령"이라는 발언도 했다.)


7.

그러나 경쟁자를 떠올리며 잠을 줄이고 고통을 이겨내 공부하는 세상을 방관하는 것은 세월호의 아이들을 잊지 않는 것도 가만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한참 동떨어진 이야기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아마 규제를 줄여서라도 화물을 더 싣고, 책임감을 줄여서라도 비정규직 선원들을 뽑고, 업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구조를 조금 늦출 수도 있는 어른이 될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처럼.


8.

고작 대통령 따위, 도지사, 시장 따위 누가되든 상관할바 없다. (사실 정몽즙이 시장이 되는게 좀 끔찍해서 투표를 할 생각이지만) 그러나 교육감에게 주어진 권한은 이 사회 교육정책의 기조를 좌우지 할 수 있는 어마무시한 것이다. 전북과 경기같은 지역에서 (미약하고 성에차진 않지만) 교육개혁의 발화점들이 보이는 것이 그 증거겠다.

굳이 그람시를 들먹이지 않더라고 교육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서는 세계의 헤게모니를 어찌할 방법은 없어보인다. 더구나 멀끔하고 간지나는 진보교육감이 들어선다면 그곳을 진지삼아 영역을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겠고.


9.

그러니까 원순이형한테서만 희망을 찾지 말고(사실 그 형님은 거의 당선느낌이던데.. 과연 몽즙이 아들 ㅎㄷㄷ) 교육감 선거에서도 좀 희망을 찾아보자는 얘기. 조희연 검색 ㄱㄱㅆ

어른들이 어쩔 수 없는



1. 

난 학교로 대변되는 제도권 교육과 거기서 파생되는 폭력의 대물림을 꽤 혐오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거부한다거나 지금 일부에서 흘러나오는 말처럼 수학여행이고 학교고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분노를 갖지는 않는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만일 나중에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되더라도 학교는 꼭 보내고 싶다.


나와 내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며 참 많이도 얻어맞았다. 선생님이나 선배, 동급생에 의한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성적, 돈, 대학, 차별 같은 사실 어쩌면 주먹보다 더 아픈 것들로도 숱하게 얻어맞아야 했다. 그럼에도 나와 내 친구들은 건강하게 십대시절을 보냈다. 우리는 가끔 못된 짓을 하며 낄낄거리기도 했지만 돌이켜 후회하고 반성하는 법을 배웠고, 시험성적을 잘 받고 싶어서 커닝을 했지만 시험지 잘 보여주는 것보다 운동장에서 패스 잘 해주는 친구가 더 훌륭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2.

어른들은 언제나 경쟁하고 승리하고 이겼으면 짓밟는게 당연하고 넘어지고 패배한 놈 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너부터 잘 살라고 가르쳤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었다. 여기서 우리란 나와 내 친구들을 말하는게 아니다. 이 빌어먹고 씹어먹을 세상에서도 우정과 의리와 사랑을 알고 있는 모든 어린 친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배가 침몰하기 직전 어른들은 그들이 가르친대로, 저 혼자 살기위해 남들은 짓밟으라고 가르친 대로 행동했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믿지 않고 서로를 보듬고 앉아 남았다. "언니는 왜 구명조끼를 입지 않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승무원은 가장 나중에 구명조끼를 입는 것"이라며 어린 아이들을 살려내고 세상을 떠난 22살의 알바생이 그 배에서 사고에 책임을 표현한 유일한 선측 사람이다. 


내 학교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오직 그 것이다. 우리가 어른들의 세계와 언어를 믿지 않으며 우리를 보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 이루 다 열거하기 힘들만큼 역겨운 어른들의 작태가 더 증오스럽고 또 부끄럽다.



생명과 구조는 뒷전이고 사진찍기 바쁜 일부 정치인이나 제 밥그릇 찾겠다고 사망자의 보험금을 운운하는 기사까지 내보내는 몰지각한 기자 나부랭이들만을 탓하고자 하는건 아니다. 흔한 농담처럼 기자와 정자의 공통점은 '사람되기 어렵다'는 것이니까. 이건 어른들이 아이들과 사회에 동시에 저지른 죄악이다. 그래서 쉽게 분노해서도, 슬퍼해서도, 사죄해서도, 비통해해서도 안된다. 고작 그까짓 서푼짜리 양심의 가책으로 넘겨버린다면 언제고 이런 일은 다시 또 더 크게 발생할 것이다.


3.

뉴스를 통해 구조 소식을 지켜보던 어느 아이들에게 선생이라 불리는 작자가 "어차피 다 죽었을테니 신경끄고 공부하라"고 말했다는 아이의 트윗을 보고 얼마간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후관계를 떠나 한 생명 한 생명의 무사를 기원하고 어른들이 뿜어내는 독소같은 말을 믿지 않는 아이들의 힘이 세계와 세상을 지켜낼 것이다. 그 시절을 올곧고 건강하게 살아 어른들이 내뿜는 독마저 이겨낸 아이들의 우정과 의리와 사랑.


4.

그래서 난 학교교육을 다 없애자고, 수학여행 따위 없애버리자고 분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스민 어른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따위가 감히 어쩔 수 없는 힘을 어린 친구들은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친구와 가족과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을 잃거나 잊지 않았던 그/녀들에게 말한대로 어떤 사죄와 안타까움과 조의도 표하지 못하겠다. 다만 이미 어른이 돼버린듯 살아가지 않겠다는 다짐만. 나중에 아이와 함께 살아가게 되면 꼭 경쟁보다 우정을, 승리보다 사랑이란 말을 먼저 가르치겠다는 다짐만.

 

소치 단상


1. 

올림픽 소식따위 전혀 모른 채 지내다가 오늘 처음으로 Tv를 켰는데, 왠 해괴망측한 광고가 하나 보이더라. 김연아가 피겨하는 영상을 틀어놓고 "김연아는 개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고 씨부리는. 개인과 국가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혹은 개인보다 국가를 항상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2.

쇼트트랙 선수 김아랑이 준준결승에서 2위를 차지해 준결승에 진출한 직후 서럽게 우는 장면을 봤다. 은메달을 딴 심석희는 울먹거리며 "금메달을 못 따 죄송하다"고. 도대체 우리는 저 어린 선수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인지,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렇게 서러운 눈물을 보이는 건지. 세계에서 스케이트를 두 번째로 잘타는 선수가 됐는데 잘하지 못했다고 여기게 하는 사회라니. 


3.

말 나온김에. 안현수가 금메달을 따서 못마땅한 사람들이 많은가 보더라. 귀화한 러시아인이니가 무조건 빅토르라고 부르라고 하는 사람부터 빙상계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든 견디고 대한민국 국가대표직을 유지하는게 옳았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안현수의 금메달이 속시원하고 빙상연맹을 향한 빅엿이었다는 말도 많다. 그러나 오히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학연이니 혈연이니 하는 패거리주의의 피해를 '승리'에 그대로 투영해 해소하고 환호하는 (양쪽 모두의) 저열함에 있다. 국가주의와 일등주의가 만들어낸 비정상성이 스포츠를 스포츠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4.

사실 김연아를 추켜세우고 영웅시하는 것도 그녀가 '1등'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냉정한 기록경기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스포츠에 대고 기술의 정확도니 난이도니 하는 말을 들먹이며 그녀의 라이벌들을 매도하는 (특히 일본인의 경우에는) 일이야 말로 이를 방증하는 일 아닌가. 우리가 아름답지만 한국인이 아닌 것, 또는 한국인이지만 1등이 되지 못한 자에 대해 열광해 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5.

사실 소치 올림픽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었다. 러시아의 반동성애법이 얼마나 많은 인권활동가들과 동성애자들을 괴롭혔나. 그러나 정작 국내(주류언론 내지는 주류의 네티즌)에선 이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었다. 올림픽 정신따위 개나 줘버린건지. 그래놓고 세계인의 축제라느니 어쩌니. 내 무한도전을 돌려줘. 저번에는 별그대도 빼앗아가더니.


6.

언젠가도 말 한 적 있지만 스포츠는 우정과 상생, 협력과 상호발전을 위한 것이다. 땀흘리고 노력하고 이기고 지고 다시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런 가치들. 인류의 공존과 공영 같은. 작금의 올림픽, 월드컵. 쿠베르텡 할아버지가 보면 귓방맹이 맞을 짓거리들. 스포츠를 스포츠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어쩌면.


7.

그래서 소치에 가 있는 모든 선수들이 내지는 지금도 땀흘리며 노력하는 모든 운동선수들이 E1의 광고와는 정확히 반대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당신은 대한민국이 아니에요. 대한민국따위를 위해 당신이 있는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행복하고 당신이 즐거운게 최우선입니다. 


7-1. 

그러니까 이번 아시안 게임에 프로야구 선수들 너무 혹사시켜서 시즌 방해하지 말라고. 나라가 있어 니가 운동을 한다 같은 개소릴랑 저 멀리.             

단상


1.

강신주가 나온 힐링캠프를 찾아봤다. 흔히 '돌직구'로 표현되는 그의 화법이나(비단 그게 화법의 문제만은 아닐거라고 생각하긴 한다) '인문학 아이돌'로 불리는 그의 지위를 고려했을때 '힐링'을 주선한다는 예능프로그램으로서는 적절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난 강신주의 말들이 불편하기만 했다.


언젠가 강신주가 노숙자를 사회적으로 마비된 존재.라고 표현하면서 문제가 됐던 글도 그렇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던 강신주가 정말 노숙인들을 사회적으로 도태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을리 없다. 강신주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 "어차피 이 더러운 자본주의 세상, 이 악물고 강하게 버티는게 제일, 못하면 병신."쯤 아니었을까.


힐링캠프에서 강신주가 한 일이라곤 고민을 가진 사람들에게 번지르르한 말을 제거하고 욕망을 직시하라고 주문하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처녀 총각에게 "결혼이 하고 싶은 것이냐, 사랑이 하고 싶은 것이냐" 묻고, 자식에게 집착하는 아버지가 고민인 사람에게는 "아버지를 제거하고 싶은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사실 말인즉슨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이 그들에게 어떤 위로가, 아니 위로는 됐고, 그들의 삶에 어떤 도움이나 어떤 성찰의 계기가 됐을지 알 수 없다.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냐는거다.


사실 결혼이니 사랑이니, 자식과 아버지의 관계니 하는 문제들에 대한 모종의 답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문제를 올바르게 직시할 수 있는 눈이었을지, 아니면 그저 다시 얼마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한 순간의 위무였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강신주의 말처럼 이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 앞뒤가 꽉막힌 가부장제 사회는 아무리 정신똑바로 차린 강한 개인이라도 버텨내고 살아남기 힘든 구조다. 그렇다면 강신주의 주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직시하고 괴로워하란 주문이다. 저 많은 자기계발서들과 힐링멘토 사기꾼들이 던지는 말들이 말 머리 앞에 달린 당근조각이라면 강신주의 말은 그저 앞을 보고 달리라는 채찍질이다. 둘 모두 달리기만 할 뿐 도착할 곳도 알 수 없는 말의 입장에서는 갑갑한 노릇일 뿐이다. 그저 공허한 잘난 척.


강신주의 책들을 좋아했었다.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같은 경우는 학교 후배들에게 몇 권을 선물하기도 했었다. 그의 직접적인 언어는 다소 난해하고 모호했던 그 철학의 언어들을 삶에 가까운 곳으로 인도해주는 좋은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오는 강신주의 책들을 사서 읽을 것 같지는 않다. 운동권 쿨게이 같은 그의 세계가 갑갑하게 느껴질 뿐인 탓이다.


2.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왔다. 영화의 만듦새나 여타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할 수 없게하는 소재들이 있고 이 영화가 그렇다. 그래서 실화가 소재인 영화는 참 싫다. 언제가 됐든 이 영화를 보게 될 것을 알았고, 어찌다보니 개봉 첫 날에 극장에 앉아있게 됐다. 분노해야 할 곳은 분노스러웠고 슬퍼야 할 곳은 슬펐지만 감정이 흐르고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과 극장 문을 나설 때, 이 영화를에구구절절한 사연을 덧씌워 분노와 행동을 추동하려는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 더 그랬다. 영하가 마음과 사람을, 나아가선 사회와 세계를 움직일 수 있고 그러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힘이 아니라 영화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참 싫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휘발시켜버릴 만큼 비극적이고 화나는 회사와 사연,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는 이 세계도 참.


그나저나 김민선은 언제까지 연기못할거야.


3.

그래서(1번과 2번을 통틀어) 얼마전에 본 수상한 그녀가 참 좋았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으로 꼽은 심은경의 연기는 스무살 남짓의 여배우가 이렇게까지 잘하는건 반칙아닌가 싶은 (무슨 약을 드셨길래 이런 연기력을 보여주시나요) 생각마저 들게했다. 영화 속에서 사연과 사건은 섣불리 봉합되지 않았고 서로의 욕망과 한계는 여전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건 그러니까 아들 잘 키우기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이나, 그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와의 고부갈등, 그 가족들 저마다의 욕망 같은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섣불리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 속 성동일은 노인문제를 연구하는 교수로 나오지만 그도 마땅한 답을 내지 못했다. 결국 살아가며 견디고 또 가끔 넘기고 가끔 화해하며 버티는 것. 수학문제마냥 마땅한 답이 있는 일이라면, 교과서에 나오는 이상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영화고 인문학이고 있을 필요가 없지.


4.

블로그 유입경로를 살펴보면 '인간실격패 알고보니 부전승'이라는 술집을 검색해 들어온 인구가 가장 많다. 신촌 모처에 위치'했던'술집이고 좋아해서 몇 번 찾아가며 부정기적으로 연재하는 내 술집유랑기의 1번타자였던 곳인데. 없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술집은 곧 망한다는 속설이 다시 증명된 걸까 싶지만, 잘되서 다른 곳으로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로) 대신 그자리엔 살롱 노마드라는 비슷한 분위기의 술집이 들어섰더라. 노마드라는 이름만 보면 일단 혹하는 스타일이라 방문했더니 여기도 좋아. 단골이 된다면 유랑기의 6부나 7부쯤으로 써주겠어요.


5. 

엑스트라 출연했던 이송희일감독의 신작이 베를린에 초청받았단다. 내 스크린 데뷔는 국내보다 유럽에서 먼저. 월드스타라고 불러주시압..ㅋ 얼른 개봉해야 원근법을 무시하고 주인공이랑 똑같은 크기로 등장한 내 얼굴을 보러 갈텐데.


6.

전에 먹었던 알싸한 맛 오징어땅콩을 가는 곳마다 찾고 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단언컨대 시판되는 과자 중 최고의 맛이다. 이건 팩트다. (이게 팩트라면 엄청난 일이에요) 한남동 주변에서 알싸한 오땅을 파는 곳을 제보해 주신다면 후사하겠슴니다. 밤마다 매콤한 쌀로별만 우적거렸더니 입에서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아..


7.

계획하고 있는 여행을 떠나기 전 술집 유랑기 3부와 4부가 동시에 업데이트 될 예정임니다. 두둥.



    

 




오늘 집에 돌아오는데 이 노래가 귀에 꽃혀서 몇 번이고 돌려들었네. 괜히.
난 이제 노브레인이랑 안놀지만 그래도 조선훵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