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올해의 영화/음반 결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2019년 결산.

의미도 없는 결산인데 순위 같은 건 당연히 없습니다. 

가나다 순으로 정렬할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서. 

그저 먼저 생각난 순서입니다. 먼저 생각난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죠.  

 

 

 

 

<하이 라이프> – 클레르 드니

 

 

우주의 끝, 해왕성까지 가서 고작 아버지를 찾아낸 <애드 아스트라>보다는 어딘지도 모를 철저한 고립 속에서 서로 다른 우주를 공유하고 그것이 관계 맺으며 공존하는 삶을 ‘견뎌내는’ <아이 라이프>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냉장고처럼 생긴 우주선, 섹스는커녕 어떤 관계맺기조차 금지된 밀폐공간에서, 서로를 도구로만 인식하도록 강요하는 ‘질서’와 그 질서의 고통이 주는 ‘최후의 유혹’마저 견뎌내고 우리는 서로에게 충실하고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어쩌면 ‘우주선’과 우주선의 주인‘, 그러니까 일종의 신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터부‘를 지켜내는 일이 아닐까. 몬테와 윌로가 건너간 사건 지평선 너머는 더 행복한 우주였으면 좋겠다. 

클레르 드니의 영화를 몰랐는데, 어쩌다 주워들은 이름과 이 영화로 그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의 영화들을 차근차근 찾아봐야지.

 

 

<벌새> - 김보라

 

모든 것은 모두에게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기억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응시’일 뿐이다. 확실한 실체라는 것은 어차피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고 그 ‘봄’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벌새>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고작 중2짜리 여자애’의 우주가 가장 거대한 우주가 되는 서사라는 점이다. 외계생명의 침공에서 지구쯤은 구해줘야, 못해도 테러리스트들의 핵공격에서 인구 1천만의 도시쯤은 구해줘야 성립되는 줄 알았던 ‘영웅서사’가 (생각해보니 영웅의 ‘웅’자는 수컷 웅자구나) 가장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이야기에서 구현된다는 것. 단절과 죽음, 불안은 성수대교의 붕괴와 김일성의 죽음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들은 사실 다르지 않으며 서로 통하고 이어진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영지 선생님’을 떠올려 봤다. 그래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 순간들이 있었다.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말해주던 선생님, 천천히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친구들, 책을 주고 영화를 보여주던 선배들. 좋아한다고 신뢰한다고 말해주던 후배들. 모두가 영지선생님이었을테다.   

 

  <엑시트> - 이상근

 

엑시트만 보면 행안부 재난안전관리본부의 안전지침을 모두 알 수 있다. 좀 웃긴 얘기지만, ‘따따따 따아 따아 따따따따’를 온갖 안전교육이 알려줘 봤자 용남과 의주가 간절하게 외치는 한컷의 힘을 이길 수 없다. 

두시간 동안 불쾌한 장면 하나 없이, 억지스럽거나 과잉된 감정 없이 재난을 ‘그럴싸하게 있을법한’ 재주로 극복해가는 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전개된다. 올 해의 오락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임윤아. 가장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의 화신. 미의 정언명령. 아이돌 출신 배우 중 가장 발군의 연기력과 관객동원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음.   

 

<암전> - 김진원

 

장르에 대한 애정, 어쩌면 영화나, 이야기. 어쨌든 창작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는 모두에게 도사리는 공포. 그런 것들이 싫지 않고 다소 뻔하고 흔한 괴담 스토리를 싫어하지 않아서. (난 초등학교 때 우리학교 지하창고에 유관순 누나가 한 발엔 양말을 한 발엔 버선을 신고 있는 걸 실제로 봤다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특히 특출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광기는 필수적인 요소다. 차라리 보편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삶의 모든 일이라는 것이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는 창작자이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일말의 광기는 필수다. 

장르영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억지스럽지않게 욕심내지 않고 영화를 만들면 아마 <암전>이 나오는 것 같다. 쓸데없는 공포의 효과를 넣지 않고, 과장스러운 괴기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공포스럽다. 공포란 원래 높은 볼륨에서 오는 게 아니다.  

(서예지라는 배우는 참 흥미롭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선 어쩜 이렇게 잘하나 싶다가도 어떤 작품에선 또 너무 엉망진창이기도 해서. 작품을 타는 배우란 어떤 의미인가. 이 영화에선 대단히 잘해서 깜짝 놀란 쪽.) 

 

<어벤져스 앤드게임> - 마블

 

감독이름 보다. MCU의 일단락인 이 영화는 마블의 모든 사람들과 그 영화를 10년동안 지켜 본 우리가 만들어낸 영화다. 마블의 영화를 사랑해 온 모두에게 어벤져스가 전하는 가장 행복한 작별인사.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어벤져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사실 그동안 견지해온 공식입장이라면 헐크나 스파이더맨을 이야기해야겠지만 실은 아이언맨이 가장 좋아”라고 대답했다. 아이언맨, 3000만큼 사랑해.  

 

<어쩌다 룸메이트> - 소륜

 

현지 제목은 <초시공동거>. 2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싸구려 맨션에 살던 두 주인공의 집이 갑자기 한 공간으로 포개진다. 누가 문을 여는 지에 따라 바깥세상은 비 내리는 2018년이다가, 해가 쨍쨍한 1999년이 되기도 한다.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이 한 공간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사실 매우 허술한 플롯이고, 온갖 타임슬립 드라마들에서 한번씩은 봤던 설정들이지만, 매우매우 귀여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영화. <사랑의 블랙홀>이후 가장 흐뭇하게 본 타임글립 영화였다. 적당한 오글오글. 적당한 몽글몽글. 흔들리는 98년에서 니 아이폰 벨소리가 들려온 거야.  

 

<미성년> - 김윤석

 

일종의 ‘캐릭터 쇼’ 같다. 영화 전체의 짜임새 있는 플롯보다는 인물들의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힘. 그건 캐릭터 하나하나에게 영화가 쏟는 애정의 힘이 근원이겠다. 어느 캐릭터도 밉지 않다. 범인도 없다. (김윤석이 연기하는 아빠가 그나마 그에 가깝겠지만, 실은 이 영화 전체에서 아빠는 별로 중요한 역할이 아니다.) 영화 평이 대부분 ‘배우’의 연기를 상찬하는 내용으로 가득한데, 당연히 좋은 배우들 (염정아 언니야 늘 그랬듯 대단하지만 문득 새로운 발견은 김소진. 최근 몇 년간 드문드문 발견돼 화제가 된 ‘어리지 않은 여성배우’의 다음 차례는 이제 김소진의 차례일 듯)의 연기가 돋보이지만, 그보다는 그 배우들이 연기해낸 캐릭터 자체가 갖는 힘이기도 하겠다. 그를 표현하는데는 배우출신 감독의 좋은 연기 디렉팅도 있었을 것 같고. 

영화는 오롯이 여성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다. 그건 그동안 마초 역할을 하면서 (실제로 여성혐오적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전력도 있는) 커리어를 만들어온 김윤석의 반성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의 영화라기 보다는 마초 남성의 노력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무튼 재능많고 잘하는 ‘영화인’ 김윤석의 성공적인 장편 데뷔작. 

 

 

<가버나움> - 나딘 라바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하며 회개를 말씀하셨지만,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 예언했고 가버나움은 멸망했다. 

베이루트. 빈곤과 착취, 폭력이 버무려진 가버나움. 실은 거기 뿐일까. 가버나움이. 12살(로 추정되는) 자인의 삶은 어쩌면 예수의 삶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질 수 있는 것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려는 삶. 무거운 타인을 조악한 수레에 싣고 기꺼기 걸어가려는 삶. 그리고 마침내 그 벽에서 ‘자기가 태어난 이유’에 대해 묻는 과정.

예수의 삶은 성자의 삶이라기 보다는 인간적 삶의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12살로 추정되는 자인의 삶이라는 것이 실은 가버나움에 사는 우리가 복원해야 할 인간적 삶의 근원 아닐까. 이대로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의 가버나움도 멸망하는 것은 아닐까. 

 

<얼굴들> - 이강현

 

<얼굴들>은 가장 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극적이지 않으니 서사에는 개연성이 없고, 갈등의 고조와 절정이나 해소가 없고 원인과 결과도 없다. 아니다, 없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얼굴들에는 저마다의 서사와 개연성과 목소리와 절정과 분노와 슬픔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것. 여백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왜 다를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들의 중첩을 이야기라고만 여긴다면 <얼굴들>은 최악의 영화다. 다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의 통창 너머 길 건너에서 걸어가고 있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남자의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구기지 않고 그 얼굴 자체를 보거나, 그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 공간에 실은 무엇이든 있을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얼굴들>은 근래 나온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극적인 영화일 수 있겠다.

<지구 최후의 밤> - 비간

 

올해 어떤 영화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는데, ‘영화’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 한다면 아마 <지구 최후의 밤>이 될 것 같다. 영화가 나타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특히 케이블카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남을 명장면.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이나 타르코프스키 같은 거장들에 대한 존경과 오마쥬가 가득하다. 동시에 2010년대를 살며 그들의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 감독 (비간 감독은 무려 나보다 어리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영화다. 세련된 고풍스러움?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사를 쉽게 보여주지 않고, 영화 속 흐름은 종종 뒤틀리고 왜곡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환상적이며 몽환적이고 그래서 아름답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의 끝판 왕.

(그리고 탕웨이가 나온다. 무려 탕웨이. 아름다움의 끝판왕.)  

 

써놓고 보니, 올해 영화제에서 본 영화는 하나도 없고, 그래서 단편영화도 하나 없네. 내년엔 더 성실하게 영화를 봐야겠다는 다짐. 

음반 결산도 하려 했는데, 여기까지 쓰는 데만 2시간 걸렸다. 음반결산은 나중에 다시 해야지. 일단 리스트만 공개



++ 커밍순

 

천용성

아이유

갈란트

빌리 아일리시

애이브릴 라빈

이센스

태연

잠비나이

보울스

톰 요크

 

 

 

 

 

 

<딸에 대하여> - 그 벽에는 작은 문을 내고자

"왜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영화 잘만들기로 유명한 어느 감독의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였다. 영화적 만듦새, 형식미, 유려함. 완성도라고 부르는 그것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는 중이었지만 내 관심은 그보단 '이유'였다.


우리는 왜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까. 영화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우리는 왜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일까. 목적이 없는 이야기.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그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 유려함을 뽐내는 것이라면 도대체 왜 우리는 그 고통을 견뎌가면서 이야기를 짓고 읽는 것일까. 


# 김혜진


문학이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다. 얼음을 깨는 것.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것. 그러니까 변화하는 것.  더 나아짐을 상상하는 것. 더 나아지기 위해 자기와 세계를 관찰하고 탐구하는 것.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둡고 캄캄하고 아무 것도 없어서 그저 빠져 죽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우물 속에서 단 한모금이라도 물을 길어올리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문학과 이야기의 본령이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다. 분명히 그것이다. 희망과 변화, 상상과 운동이 없는 문학이나 영화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혜진의 소설을 읽고 "희망적"이라고 말했다. <중앙역>을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단어를 갖다붙여도 사치스러울 것 같은 삶. 우리는 어디까지 비참해질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사실 구원따위가 다 뭐람. 그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음으로 지금의 다음 순간 정도를 살아낼 수 있는 그런 역동. 


삶을 살아가는 것, 나아가게 하는 힘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그것이 오직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중앙역>에서 읽어내는 것은 희망이어야 옳다. 


아주 오랜만에 집어든 소설이 <중앙역>이어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부여잡고 앉아 밤새도록 꾸역꾸역 읽었다. 김혜진의 소설은 '진짜'라는 생각이 든다. 리얼함이나 깊은 취재를 말한다기 보다는 '진심'이라는 느낌에 가깝다. 고통을 전시하는 것으로 연민하거나 과장과 과잉으로 꾸미지도 않는다. 솔직한 문장, 정직한 마음.  


# 딸에 대하여


어쩌면 이해는 '문을 내는 것' 정도일지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타자라는 것은 곧 벽이다. 절대 넘을 수 없는 벽. 언젠가 엄마에게 "우린 남이니까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벽을 확인했지만 문을 낼 생각 따위는 해보지도 않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말이었다. 


사실 엄마는 '벽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타자성이니 어쩌니. 하지만 엄마는 계속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저 노력하는 것만으로,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서로에게 다가가고 더 가까워지고 조금이라도 더 알고 서로를 변화시키고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겪고 견뎌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런 기적이 오기도 전에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 순 없지 않니. 그건 거짓말이니까. 내 딸을 포기하는 거니까 떳떳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내 딸의 삶을 내가 놓아 버리는 거니까.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잖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하여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 나는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인지, 너에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인지. 그 벽에는 작은 문을 내고자.


# 여성의 노동


소설 속의 여성들은 모두 '누군가를 위한' 노동을 한다. 레인은 '가끔 죽을 것만큼 힘든' 자기의 노동으로 그린의 생활비를 충당한다. 젠은 젊은 날에는 외국에서 해외 입양된 이들을 위해, 나이들어서는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돈과 힘을 썼다. 그린은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한 동료들을 위해 돈벌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화자는, 젊어서는 초등학교의 교사로, 학원버스 운전기사로, 구내식당의 노동자로, 지금은 요양병원의 돌봄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여성들의 노동은 자기의 것을 향하지 않고 누군가를 위한 것으로 존재하며 그래서 '주변부'의 노동으로 치부된다. 여성들의 노동을 주변의 노동으로 취급하며 그를 딛고서 사회는 성장했다.   


그래서 나는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이 그동안 '남성들이 해오던 노동의 인식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길 바란다. 누군가의 희생을 양분삼는 노동. 내 아이를 누군가는 돌봐주어야 하고 내가 일하기 위해 누군가는 밥을, 빨래를, 청소를 해줘야 하는 노동. 주변의 노동으로 취급되는 이 돌봄노동을 딛고서야 '공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이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 역할을 맞바꾸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인식 지평을 넓히고 모두가 서로를 돌보고 모두가 서로에게 복무하며 모두가 공적인 영역에서 일하고 모두가 사적인 책임을 지는 새로운 노동모델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꿈 같은 소리'라는 핀잔을 듣곤 했다. 하지만 소설의 화자가 딸을 이야기를 포기 하지 않는 것처럼, 젠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주었던 것처럼, 레인의 손에 난 상처에 눈길을 주고 따듯했던 말과 위로를 마음에 담아둔 것처럼. 꾸준히 꾸준히. 삶은 그렇게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며 나아가는 것이겠고, 우리의 삶과 투쟁, 운동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당신과 세계와 나를 가로막는 벽에 아주 작은 문을 내고 싶다는 마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사소한 노력.


이 포스팅을 쓰고 있는 날은 여성의 날이었고, 백년보다 더 오래 전부터 여성노동자들이 쌓아 올려온 것들은 그렇게 사소하고 작고 하지만 끈질겨서 위대한 것들이었음을 믿고 있다. 



덧,

광화문의 한 카페에 앉아 있다. 사거리에서 어떤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거리를 지나는 여성들에게 작은 메모와 노란 장미를 나눠주고 있다. 모처럼 햇빛이 좋은 날 꽃을 들고, 거리를 걸으며, 세상에 주눅들지 않는 여성들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얼굴들> -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야기





# 극적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 놀라운 시간, 기억하고 싶은 것들, 잊히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을 극적인 순간이라고 부른 다면 영화의 순간이란 일상과는 가장 배치되는 것이다. 


어제 퇴근 길, 지하철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사람.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사람의 얼굴. 오늘 점심시간 담배를 산 가게의 주인 아저씨의 얼굴과 목소리. 십수년 전 들었던 교양수업 강의실 건너건너 자리에 앉아있던 어느 과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얼굴. 전혀 극적이지 않은 그런 것들을 그러모은다고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가 될 수 없다고 그것들에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야기가 있으니 영화도 될 수 있는 것이지. 


<얼굴들>은 가장 극적이지 않은 영화다. 극적이지 않으니 서사에는 개연성이 없고, 갈등의 고조와 절정이나 해소가 없고 원인과 결과도 없다. 아니다, 없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얼굴들에는 저마다의 서사와 개연성과 목소리와 절정과 분노와 슬픔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보여주는 것. 여백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삶의 순간들이란 모든 곳에서 극적이고 모든 곳에서 극적이지 않다. 내가 평화롭고 안온하게 보낸 어느 순간이, 혹은 평화롭고 안온하다고 여겼던 어느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삶이 뒤흔들리는 순간일 수도 있고 실은 그 어느 누군가가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얼굴들>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고 어떤 이야기도 없었지만 혜진은 아마 회사동료들과 식사를 마치고 어색하고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 이미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을테다. 그 순간 마치 인생극장의 이휘재처럼 '그래, 결심했어'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문득 "나가죠" 라고 말하는 순간에, 어쩌면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할지, 물을 먹고 밥을 먹어야 할지를 떠드는 순간에, 테이블 위 네명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 그녀는 회사를 나가게 될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순간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은 얼굴들에서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 있는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다. 잊히는 얼굴들이고 굳이 기억하지 않는 얼굴들이다. 그보다는 영화의 인물이라고 보이지 않으니 주인공이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는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제공하지 않는다. 인물이 없으니 갈등이 없다. 갈등이 구체화되는 사건도 없다. 사건이 없으니 서사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고 심지어 관객은 거기에 감응하고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사실 모든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이야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면 늘 '사람'이나 '사건'의 돌출을 떠올린다. 누구의 이야기, 어떤 이야기,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 그런 것들은 극적인 요소다. "개가 사람을 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무는 일"에 천착하는 태도. 사실 상징과 은유, 메타포란 얼마나 작위적인 일인가. 고작 기호와 돌출된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겠다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오만일지도.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왜 다를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들의 중첩을 이야기라고만 여긴다면 <얼굴들>은 최악의 영화다. 다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의 통창 너머 길 건너에서 걸어가고 있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그 남자의 삶을 함부로 말하거나 구기지 않고 그 얼굴 자체를 보거나, 그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 공간에 실은 무엇이든 있을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얼굴들>은 근래 나온 영화 중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극적인 영화일 수 있겠다.


덧,

혜진이 지영과 함께 (영화에는 이 둘의 관계가 안나와서 영화를 보는 한동안은 혜진의 새 썸녀가 아니었을까, 기선과는 그래서 헤어졌을까..를 생각했지만 그게 뭐 무슨 상관이야)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장면이 좋았다. 예쁘지도 요즘 유행이라는 그 흔한 벽화도 없는 골목. 빈 사무실, 공사현장. 뭐 그런 것들. 무엇이 있겠지만 내게 굳이 설명해주지 않는 그 공간들. 


초행을 볼 때도 생각했지만 김새벽은 정말 멋있는 배우다. 









  




세여자



조선희의 세여자를 읽고 있다.

이다지도 뜨거운 삶이라니.
이다지도 허무하고 추운 삶이라니.

항해






오늘은 종일 이 노래를 듣고 있다.


+
이제 더 찾을 것도 없는 방황의 날은 끝나고 
아침 파도는 밀려와 발 아래 하얀 거품으로


초행 - 그런 것들과 싸우며 사는 거지



두려움은 낯선 것들에서 오는 법이다. 가보지 않은 길.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지금. 다가올 것, 알 수 없는 것,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게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이란 어쩌면 '기대'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렇다. 어차피 슬픈 예감이란 틀리는 적이 없다.


안온함은 익숙함에서 오는 법이다. 벽지에 묻은 때와 장판의 무늬까지 눈에 익은 오래 산 집. 내 손길의 흔적이 묻지 않은 곳은 단 한군데도 없는 물건들. 내 손길과 눈길이 익숙한 사람의 체온 같은.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집은 사는 곳(住) 보다는 사는 것(買)이 돼버렸고 물건들의 수명은, 그러니까 핸드폰 같은 것도 약정 2년이 지나면 바꾸는 게 당연해졌다. 사람이야 뭐. 피상적 관계, 파편화, 이런 말들이 시덥잖아진 건 이런 말들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이니까. 


# 집, 차, 길


동거중인 수현과 지영은 더 싼 집을 찾아 서울 외곽으로 이사를 준비 중이다. "우리가 이 동네에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지영의 물음에 수현은 "아니"라고 답했다. 지영의 모친은 이사를 다니면서 시세차익을 남겨 돈을 번다. 이사가 지긋지긋하다는 가족들의 말에 "이렇게라도 하니까 이만큼 산다"고 답한다. 가족들은 수긍한다. 수현의 부친이 사는 집은 허름하다 못해 을씨년스럽다. 저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정도. 그 집에 사람이 사는 모습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집이란 정착의 공간이다. 삶의 익숙함을 만들어내고, 내일의 삶이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집이라는 공간의 전제다. 그러나 지영과 수현은 물론 영화 속 누구도 집에 정착하지 못한다. 누구에겐들 그렇지 않을까 집이 정주보다는 탁족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 


집이 안온함의 공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삶의 모든 순간에서 우리에게 편안함이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지영과 수현이 가장 오랜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차 안이다. 그러나 차란 결국 이동과 부유를 위한 도구다. 길 위에서 어딘가로, 또 낯설고 두려운 곳으로 향하는 것.  


영화 속 네비게이션도 없는 차안에서 그들은 언제나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고 길을 잘못들어선다. "여기는 나도 처음 와보니까"라고 말하면서. 살면서 어느 공간인들 초행이 아닐까. 어느 시간인들 처음이 아닐까. 매 순간 우리는 두렵고 모르고. 어느 드라마 제목이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 연애, 결혼, 출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게 대단해 보이지만,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연애와 결혼, 거기에 따르는 돈벌이 같은 뻔한 요소들로 이뤄진 지루한 클리셰에 불과할지 모른다. "순서대로 좀 하자 순서대로". 


결혼하고 애 낳고 애 키우기 위해 돈벌고 시세차익 남겨 집 옮겨가면서 삶의 '안정'을 만들고. 그런데 그 익숙한 클리셰의 나열은 정말 안정이고 안온함일까. 불안감을 시시각각 맞이해야 하는 안온함이 어디있어. 


가족, 가정. 안온함과 편안함의 상징같은 그곳마저 수현과 지영에겐 두렵고 낯선 곳이다. 모르겠어. 라고 말해버리고,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고, 자리를 피해버려야 하는 곳. 


수현의 모친이 "결혼은 살아보고 이 사람이랑 평생 살 수 있겠다 싶으면 해."라고 말하자 지영은 "살아보고도 모르겠으면요?라고 되묻는다. 수현의 모친은 대답해주지 못하고. 영화는 대답대신 지긋지긋하게 맞이하는 똑같은 두려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게, 지긋지긋. 낯선 것이 두려워 익숙한 것을 찾는데 그것이 안온함보다는 지긋지긋함이면 어쩌지. 안락함이란 어쩌면 지긋지긋함의 이음동의어.


# 그런 것들과 싸우면서 사는 거지. 


매순간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부유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결국 사는 것일까.


자기 엄마같은 엄마가 될까봐 아이를 낳기 두렵다는 지영에서 수현은 "그러지 않기 위해 싸우면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 무서워죽겠으면서 임마.


집을 옮겨다녀야 하고, 관계는 피상적으로 변하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는 일상이라는 것은 왜 사라진 것일까를 생각했지만 어쩌면 실은 그런 것은 사라진 게 아니라 원래 없는 것이 아닐까. 삶이란 늘 어디에서 어딘가로 부유하는 것이고 매 순간이 낯선 것이라 늘 두려움에 떨어야 하고 수현의 말처럼 우리는 매순간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한다. 삶이 고달픈 건 그 때문일까. 매순간이 낯설고 두렵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맞이하는 매순간이 지긋지긋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느 곳이라고 초행이 아닐까.


어차피 삶이 그런 것이라면 늘 낯선 두려움이 지긋지긋하게 벌어지는 이곳을 긍정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 아닐까. 두려움을 아주 잠깐이라도 설렘과 기대로 바꿀 수 있는 순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2016년 겨울의 광장이다. 광장에 선 지영과 수현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걷는다. "다들 반대쪽으로 가는 것 같아." 하지만 방향을 바꾸자 이번엔 다들 자기들이 원래 가던 쪽으로 가는 것 같다. 초행길. 


그 때의 광장은 그랬다. 다들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어디로 갔고 어떻게 무엇인가를 해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그말인즉슨 어디로 가야만할지 몰랐다. 낯설었지만 또 두렵기도 했지만 조금, 아주 조금 설레고 기대하기도 했다. 


자기의 두려움을 모르겠다고 흘려버리지 않고, 무섭다고 긍정했을 때야 비로소. 


# 조현철


드라마 아르곤이나 마스터에서 조현철을 처음 봤을 때 독특하고 재밌는 목소리나 톤의 배우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쉽게 눈에 들어온 건 매드클라운을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둘이 형제라는 기사를 나중에야 봤다. 


눈에 확 들어오지만 자연스럽고 몰입시키지만 과하지 않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오래 두고보고 싶은 좋은 배우. 지난 번에 올해 최악의 영화 변산을 보면서 조현철 배우가 박정민 대신 캐스팅 됐으면 좋지 않았을 까 생각했는데, 특별출연하고 어쩌면 랩도 만들어준 게 아닐까 싶었던 매드클라운이 영화 속 랩을 대신 해주면 재밌었겠다 싶어서.ㅋ 변산의 수많은 악덕 중의 최고봉은 그 오글거리고 못하는 랩이었거든. 하지만 박정민은 좋아합니다. 








중앙역 -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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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젤 밑바닥인 거 같지? 아냐. 바닥같은 건 없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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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눈을 감고 날 꼭 끌어안는다. 어떻게든 이 행위에 집중하려 애쓰지만 시커먼 건물의 그림자나 길 위에 널브러진 캔, 구겨진 종이나 담배꽁초 따위에 수시로 마음이 상한다. 벌거벗은 몸뚱이만 남은 사랑이 실은 이런 끔찍한 모습일 수 있다는 게 속상하다. 이 감정이 우리를 얼마나 더 구차하게 만들 수 있나.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몸을 비비고 움직이는 걸 멈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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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여자가 있었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걸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주먹 크기 만한 덩어리를 굴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다할게 만들 수 있었다. 기대와 가능성 따위는 쉽게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지자 그것들은 쉽게 허물어졌다. 여전히 그런 걸 희망이라 부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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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그런 말을 내뱉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게 내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버릴 말들을 함부로 지껄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순간엔 또 나는 기어이 말하고 만다. 이젠 너무 많이 말한 탓에 닳고 바라고 헤진 말들을. 더 이상 여자와 내게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말들을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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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묻고 싶어진다. 사는 게 고통스러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삶이 아니라 죽지 않고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내가 얼마나 더 구차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없다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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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가늠해본다. 한때 환한 등대 아래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있다. 그곳에 닿으려고 악착같이 매달렸던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역사의 불빛 대신 그것을 단단히 움켜쥔 거대한 어둠을 본다. 더는 그것의 깊이와 너비를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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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바닥이라고 누가 그러든. 바닥이 더 깊은 곳에 있다면, 지금 있는 여기가 바닥이 아니라면, 그럼 여기서 지금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것을 여전히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는 몸을 비비고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희망이라고 부르든, 그것이 멈춰버리면, 그저 거대한 어둠. 


밤새도록 책을 읽은 게 얼마만이지. 그 눅눅하고 오갈데 없는 못난 사랑 얘기에 눈이고 마음이고 빼앗겨서는. 



 

머나먼 나라 - 사랑한다구요 젠장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머나먼 나라>다.


이 가난한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눈부신 햇살이 가득하고 졸음같은 풍요로움이 깃들어 따듯하고 유쾌하며 모든 사랑과 모든 평화가 있는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꿈꾸던 소년들의 이야기.


드라마의 배경은 후암동 언덕배기의 골목이다. 지금은 그 골목의 달동네 마을도 사라졌다. 졸음같은 풍요와 모든 평화와 사랑을 꿈꾸던 소년들의 머나먼 나라는 여전히 어쩌면 앞으로도 없다.


골치아픈 생각들을 하고나선 비관적인 이야기를 떠올리다 문득 이 드라마가 생각났다. 주인공들이 세상을 등지는 비극적인 결말에도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는 분명 '희망'이다. 골목길의 끝에 있을 머나먼 나라. 그건 긍정의 힘이니, 힐링이니 하는 싸구려 진통제와는 다른 희망이다. 오늘의 고통을 직시하는 삶. 그 고통을 딛고서야 저 너머의 머나먼 나라를 응시할 수 있다는 희망.


그래서 삶의 희망에 관해 알량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은 너무 무모하고 오만하다. 삶의 무게를 긍정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위로따위 실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그저 할 일은 내 골목길 끝의 머나먼 나라를 그리는 일이다.


드라마는 격정과 광기의 80년대가 끝나고 90년대가 스며든 골목길을 배경으로 했다. 쌓아둔 연탄이 사라진 것 말곤 달라진 것이 없다는 자조. 실패와 좌절의 90년대가 지나고 21세기가 스며든 오늘의 골목길이라고 다를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눈부신 햇살이 가득하고 졸음같은 풍요로움이 깃들어 따듯하고 유쾌하며 모든 사랑과 모든 평화가 있는 나라"를 꿈꿔야 한다. 사실 그것말곤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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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전시하면서 그저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것으로 현실을 운운하는 요즘의 드라마들은 실은 고통 포르노에 지나지 않는다.. 는 메모를 써놓았다. <나의 아저씨>같은 드라마. 누군가 쥐어주는 불민한 희망의 위로. 그건 사실 희망을 '쥐어줄 수 있는 그'에 대한 위로다. "사랑한다구요, 젠장"을 외치던 한수의 반짝거림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려운 근래의 TV 속.


하지만 그게 뭐 드라마 탓이겠나. 드라마와 영화는 반영의 현실인 법이다. 사랑한다구요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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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이제 2회를 봤을 뿐인데... 이 드라마는 48부작이다. 엉엉엉.

<위플래쉬> - 당신은 무엇에 순종하고 있는가

 

<위플래쉬> - 당신은 무엇에 순종하고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은 단언하건대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악의와 이상함으로 똘똘 뭉친 지휘자이자 교수인 플래처가 파놓은 치졸하고 저열한 함정에 걸려든 악의와 이상함으로 똘똘 뭉친 드러머이자 제자인 앤드류의 소름끼치는 화학작용. 이상하고 나쁜 놈들이 모여서 빚어낸 그 장면이 끔찍한 건 그 장면이 사뭇 감동스러워 보이는 까닭이다. <위플래쉬>가 흥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잔혹한 장면을 보면서 사제간의 정리(情理)’ 같은 말을 꺼냈다. “어쩌면 플래처 교수의 폭력적인 교육방식은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기 위한 필요악일지 모른다.”면서. (실제로 <위플래쉬> 개봉 당시에 한 SNS에서 본 감상평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감상평에 동조했다.) ‘사랑의 매훈육당한 스톨홀름 증후군 환자들의 사회.

 

<위플래쉬>는 세계에서 영화 시장이 가장 큰 북미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가장 흥행했다. 워낙에 잘 만들어진 영화기 때문에 평단의 찬사를 받는 것이야 이상할 것 없지만, 감독도 배우도 생소한 이 저예산 영화가 한국에서만 유독 흥행을 기록한 것은 의아한 일이다. <위플래쉬>는 저예산 영화로는 드물게 158만 관객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웠다. 국내 저예산 영화들이 관객수가 1만명만 동원해도 대박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위플래쉬>의 흥행 성공은 그야말로 초대박이다.

 

# 권위에 대한 굴종 - “당신들 친구 중엔 찰리 파커가 없잖아요

 

주인공 앤드류는 다분히 종속적인 사람이다. 그는 무엇에 도전하는 법이 없다. 앤드류는 왜 셰이퍼 대학에 다니느냐고 묻는 여자친구 니콜에게 셰이퍼가 최고의 음악학교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미식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사촌들에겐 그래봤자 3부 리그에서 뛰고 있으니 절대 NFL에 갈 수는 없다고 조롱한다. “평범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더라도 찰리 파커처럼 모두에게 회자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앤드류에게 가족들은 친구들이 널 기억해 줄 것이라고 조언하지만, 앤드류는 당신들 친구 중엔 찰리 파커가 없잖아요.”라고 답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앤드류의 답은 언제나 권위를 성취하는 것이다.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 셰이퍼에서도 플래처 교수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모든 학생들이 그가 지휘하는 밴드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 밴드를 거치면 뉴욕필하모닉이 있는 링컨 센터 무대로 직행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다. 하여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권위가 발생하는지 지켜보면 그 사회를 움직이는 욕망을 알 수 있게 된다. 폭언과 폭력이라는 플래처 교수의 교육법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가 실력성공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의 학생들은 두들겨 맞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도 플래처 교수 슬하에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성공으로 가는 첩경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 플래처를 견디면서 자기들도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권위로 치장한 폭력에 굴종하는 것은 또다른 폭력을 잉태한다는 단순한 인과. 그리고 폭력의 순환을 귄위라고 여기게 하는 사회.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런 상황은 정상이 아니며 그런 폭력과 그 폭력을 묵인하며 재생산하는 사회의 비정상성을 지적한다. 학교의 관계자는 플래처 교수의 옛제자가 자살한 사건을 앤드류에게 알려주며 플래처의 학대를 고발하도록 한다. 이 장면은 그동안 플래처와 앤드류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 관계가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던 영화적 시선을 환기해 관객들에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 결국 플래처의 교육이 교수직을 잃을 만큼 반사회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 ‘권위주의라는 권위

 

그런데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플래처 교수의 열정을 부러 애써 느낀다. 사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많은 수의 관객들은 (특히 한국의 관객들은) 플래처의 교육법 따위는 폭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을만큼 폭력적인 교육환경에서 자라온 피해자들이다. ‘사랑의 매같은 모순의 언어가 팽배한 교실에 살았고, 이름대신 성적으로 호명되는 삶을 살았다. 대학의 서열에 따라 인생의 등급이 낙인찍히고, 취업한 회사의 시가총액으로 인격의 경중을 가늠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런 이들이 플래처 교수의 교육법을 보면서 제자의 가능성을 위한 필요악의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끔찍한 일이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교육법으로 이전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남자를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플래처의 교육법에 열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말을 붙이며 사랑의 매’, ‘체벌’, ‘훈육같은 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너무 많다는 사실.

 

권위주의는 권위에 굴종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한국사회 (비단 한국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는 권위에 순종하며 언젠가는 자신이 권위를 갖게 되는 순간을 갈망하는 삶의 태도를 철이든다고 표현한다. 권위주의적 삶의 태도가 권위를 가진 셈이다.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기의 폭력을 고발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한 무대로 플래처는 큰 무대를 준비한다. 그리곤 앤드류에게 일부러 틀린 악보를 준다. 당황한 앤드류를 보면서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 플래처의 복수. 그런데 앤드류의 당황은 잠시. 앤드류는 플래처의 함정에서 오히려 자기가 연습했던 곡을 소신껏 연주해내며 상황을 이겨낸다. 그리고 앤드류와 플래쳐가 서로를 보며 짓는 미소. 플래처는 마치 자기의 가르침을 마침내 이해한 제자의 성장을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이고, 앤드류는 스승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챈 제자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졸한 사적 복수는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 앤드류로 인해 고매한 교육자의 뜻으로 격상된다.

 

앤드류와 플래처가 마침내 공명한 것이라고 해도 이는 앤드류가 플래처의 폭력적인 세계에 다시 빠져 들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래처의 권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는 그 무대 이후를 보여주지 않지만 어쩌면 그 날 이후 앤드류는 플래처에게 더 심한 학대를 당하는 학생으로, 그리고 주변에게 그 폭력을 전염시키는 가해자로 살아가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 전염

 

권위는 결국 사회적 합의에 의해 생성된다. 그 사회의 크기는 상관없다. 사회의 지향과 욕망에 따라 무엇을 좇느냐가 권위를 결정한다. 그래서 권위주의는 전염된다. 권위에 순종하는 것으로 자기의 욕망을 해소하려는 태도가 곧 권위주의기 때문이다. 권위에 가까이 다가가는 누구를 지켜보는 일. <위플래쉬>의 플래처는 그 권위주의의 전염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의 학생들이 조바심을 내도록 하고, 그들의 욕망을 단순화 시키고, 그 단순한 욕망이 촉발한 조바심 위에 군림한다. 권위는 강고해지고, 그의 권위에 굴종하는 문화는 다시 사회를 지탱하는 권위가 된다. 그리고 이내 그 권위는 주변을 전염시키고, 더욱 강력한 권위가 된다. 할 일은 순종밖에 남지 않는다.

 

고민해 볼 일이다. 당신이 순종하는 권위는 무엇인가. 당신의 플래처는 누구인가. 당신은 그를 참된 스승같은 말로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갖고 싶은 권위는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누구에게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가.

 

 

 

<곡성>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곡성>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작년 여름, <곡성>을 보고나온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놨다. 일광(황정민 분)과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의 굿판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일광과 외지인은 한패인지, 무명(천우희 분)은 마을의 수호신인지. <곡성>은 해체된 플롯의 영화다. 매 시퀀스는 놀라울만치 정교하지만 정작 시퀀스 간의 인과(因果)가 없어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못한다. 인과 대신 우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개연성대신 감독의 불친절한 생략이 이야기(의도적인) 구멍을 낸다. 이 구멍들은 영화 밖에서 다른 영화적 재미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구멍을 채우기 위한 해석을 내놓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각자의 근거를 들이밀었다. 영화는 이 논쟁들이 사그러질 때까지 계속된 셈이다. 감독은 이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비가 내리면 옷이 젖게 되듯 누군가의 불행도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행에 대해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이 영화가 애초에 납득과 이해, 설명의 범주 바깥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불가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 어디 한 번 이해해 보라고 관객들을 부추기는 영화다. 그 이해와 몰이해, 불가해와 억측, 추론과 합리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설과 언설의 중첩. <곡성>의 진짜 시작은 영화가 끝난 다음일지도 모른다. ‘현혹되지 말라는 무명의 말에 시험에 든 종구처럼 관객들은 <곡성>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험에 들게 된다. 답도 없는 시험.

 

# 불가해, 비이성, 그래서 뭣이 중헌디?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곡성>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인용되는 누가복음 24장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는 대목이다. 예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부터 믿지 못하고 예수의 손목에 난 못자국을 확인하고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 예수는 보고서야 믿는 도마를 꾸짖으며 보지 않고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도그마, 증명과 확인을 요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와 신앙을 뜻한다.

나홍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생겨나지 않으며 불가해한 영역, ‘그냥 그런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감독이 그 불가해의 세계를 위해 영화 곳곳에 구멍을 내 영화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적이고 치밀한 짜임새가 없는 이야기로 만든다. 그리고 종교를 끌어들인다. 그러니까 개연성을 찾지 말라, 세상은 원래 그렇게 이해가 애초에 불가능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종교적 도그마를 그 근거로 가져다 쓴 셈이다. ‘고작 보고 있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면서.

영화 속 모든 불행은 인물들이 의심을 시작하는 순간 찾아온다. 마치 도마가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은 순간. 종구가 외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외지인이 제거되었다고 믿을 때 딸은 낫는다. 일광으로부터 악마가 무명이었다는 설명을 들은 후부터 다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자신이 눈으로 본 것보다 귀로 전해들은 것에 확신을 가진 순간 파멸에 이른다. 성긴 플롯 사이 유려한 시퀀스의 함정을 걷어내면 이 영화는 의심하는 모든 인물에게 처벌을 가하는 이야기다. ‘믿지 아니하였으니 복은 없을 것이다.’

<곡성>은 인간을 불가해한 세계의 사생아 정도로 이해한다. 인간이 믿지 않고 의심하며 사유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곡성>에 나오는 이들은 (감독의 말대로라면 피해자들은) 이성을 갖춘 듯 착각하지만 실은 현혹 당했고, 아무 것도 모르고(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했다고 여겨서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한다. 누구를 향해 살을 날리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던 영화 속의 굿판을 빼내면 영화 속의 폭력은 비이성의 함정에 빠진 피해자들이 다시 가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속신앙, 기독교, 제노포비아, .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정보가 부족할 때 그 구멍을 채우는 것은 일종의 믿음이다. 누군가는 개인의 체험을 동원하고, 누군가는 철학적 명제를 빌려온다. 누구는 종교에 의탁하고 누구는 다른 개인에게 종속한다. 감독은 불가해의 세계를 던지고 그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여 구원을 받으라 종용한다.

 

# 시험, 인간을 믿는 일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거짓말이다. 세계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믿음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는 위로가 아니라 기만이기 때문이다. <곡성>은 결국 인간을 파괴했다. ‘인간적인 것들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 무기다. 종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불행의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려 의심할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버린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의 씨앗이 됐다. 그곳에서 생각하고 의문을 던지는 인간의 행위는 불행의 씨앗이다. <곡성>에서 인간은 미약한 존재라기보다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보인다. 무력한 당신에게 무력한 내가 던지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나.

어쩌면 이 영화는 영화와 세계, 인간과 희망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영화가 무력한 인간을 응시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무력한 인간이 섞여 살아가며 지향하는 다음 세계에 대한 제시가 없다면 영화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자기 운명을 바꿀 수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까닭은 뭘까. 우리는 그저 운좋게 줄을 잘 서서 구원을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누가복음 1장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자연의 목소리에서 자기 존재의 역능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된다. 예수는 요한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사실 예수는 저세상이나 하늘나라를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알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접할 수 있는 현실이라고 봤다.

세계는 물론 엉망진창이다. 감독의 말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인과도 없어 보인다. 여기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하다. 세계는 생각보다 더 더럽고 추악하다. 그러나 영화의 윤리적 태도란 그 파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안간힘이 돼야한다. 삶의 태도란 그 안에서 한 줄의 희망을 찾아 삶을 바꿔나갈 때 빛을 발하게 된다. 예수도 부처도, 어쩔 수 없으니 체념하고 살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시험에 들지 말지어다. 시험은 어쩌면 맹목을 권유하거나, 초월자에 대한 거스를 수 없음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역능, 삶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믿을 수 있냐는 물음이다. 시험에 현혹되지 말자. 문제를 잘 읽으면 답이 보이는 법.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수면의 과학> - 총천연색 꿈의 세계, 하지만 깨어나야 합니다

<수면의 과학> - 총천연색 꿈의 세계, 하지만 깨어나야 합니다

 

 

꿈의 세계. 현실에선 도통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들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개연성도 과학적 원리도, 자연의 섭리도 상관없다. 그저 바라는 것들이 총천연색으로, 때로는 폭력적일만큼 단편적인 색으로 나타난다.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나의 의지일 뿐이다. 미셸 공드리의 영화 <수면의 과학>은 총천연색 꿈의 세계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영화다. 그래서인지 영화엔 개연성이라곤 없다.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증세를 가진 남자의 동화다. 또한, 염세적이고 철없는 남자의 연애 방식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소심한 멕시코 아티스트 스테판은 꿈속에서는 ‘TV 스테판이라는 화려한 쇼의 활달한 진행자로 변신한다. 어려서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 속에 살아온 스테판은 심기일전해 파리로 날아온다. 아버지를 여의고 마법사와 연애 중인 프랑스인 어머니 크리스틴이 그에게 소개한 일자리는 달력 만드는 회사.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고 창의성이 희박한 일은 스테판에게 스트레스를 안길 뿐이다. 한편 스테판은 아파트 이웃의 아가씨 스테파니에게 끌리는 자신을 깨닫고 그녀에게 집착한다. 일과 연애감정이 배설하는 좌절은 기괴한 전조와 환상으로 변해 스테판의 꿈속에 등장한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테판의 혼돈스러운 꿈은 다시 그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내몬다. 스테파니는 신기한 장난감들- 심지어 독심술 기계와 타임머신을 포함한- 을 만들 줄 아는 재능있고 천진한 남자에게 호감을 품지만 그의 생떼와 위악에 지쳐간다.

 

# 꿈의 해석과 꿈의 구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꿈 해몽집인 줄 알고 읽기 시작한 적이 있다. 이내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책을 집어던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꿈의 해석이나 점쟁이의 꿈 해몽이나 꿈을 기호와 은유, 상징으로 대한다는 점에선 상통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다양성을 의미의 단일성으로 환원시킨다. 꿈의 이미지는 검열을 피해 변장하고 나타난 억압된 욕망이라는 것. 정신분석은 꿈을 개인적 무의식(프로이트)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집단적 무의식(칼 융)상징으로 읽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꿈은 욕망이나 상징을 표현하는 장치가 아니다. 미래를 예고하는 전조(前兆)도 아니다. 공드리는, 그러니까 스테판의 입을 빌린 공드리는 왜 굳이 꿈을 해석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꿈과 실제가 뒤섞이고 상상의 전조가 열리고 독심술과 타임머신이 가능한 현실이면 안되느냐 묻는다. 이 영화는 수면의 해석학이 아니라 수면의 과학이다. 물론 감독은 나도 프로이트 책 몇권쯤은 읽었다는 티를 초반부에 내고 싶어하지만, 이내 자기의 방식대로 나아가며 비과학적 수면의 세계가 얼마나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무의식의 터가 되는지 역설하려고 한다. 그게 수면의 과학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잡은 사랑이야말로 바로 이런 무질서한 모양새가 아니겠냐고 묻는다. 꿈을 해석하며 현실에 반영하고 싶어하고 몽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공드리는 마치 엄숙주의라고 비웃는듯하다. 공드리가 그리는 사랑의 세계는 그토록 엄숙한 현실의 세계에 있지 않다.

공드리의 영화에서 잠든 연인은 오래된 아이템이다. 그들은 잠만 자지 않고 꼭 꿈을 꾼다. 그러니까 꿈. 공드리를 뮤직비디오계의 발명가 자리로 만든 그 시절의 작품들에는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잠들고 꿈속을 헤매고 또 깨어났다. 꿈은 현실을 덮어 서로의 경계를 뒤섞어버리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관계의 맥락을 무너뜨리는 초절의 무기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자기와 타자의 관계마저 뒤섞어 버리는 초절의 무기. 그리고 이런 초현실적인 상상의 장면들은 대개 너무나 사랑스럽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그런 장면들은 여전하다. 꿈속에서 바위만하게 커지는 스테판의 손, (그 손은 첨단의 그래픽 기술이 아니라 그냥 커다란 소품으로 무작정 대체해버린다) 서투른 애니메이션 요소, 조악해 보이지만 그래서 그 빈틈으로 상상력을 초대한다. 1초 타임머신 기계와 독심술 기계처럼 말도 안 되는 장난감들이 등장한지만 그것들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면서 실제의 장면을 지배해버린다. 공간의 변환은 영화적이라기보단 연극적이다. 영화적 배경보다는 연극적 무대에 가깝게 장면이 배치된다. 음악과 미술, 색 모든 곳에서 경계를 허무려는 듯 기존의 것들에 상상의 기재를 덧씌운다. 영화라기보단 공드리의 두시간짜리 꿈에 초청받은 듯한 연출이다. 영화는 대단히 자유롭다.

 

# 언젠간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유롭다는 말은 일견 아름답고 상쾌하지만 실은 산만함과 무질서에 대한 유아적 욕망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스테판의 동료는 산만함은 생산성을 저해한다고 일갈한다. 사실 이 대사는 공드리가 주변으로부터 숱하게 들어왔을 말이지만 영화 속 스테판도, 그리고 그 인물이 자기의 분신이라고 말한 바 있는 공드리도 끝내 그 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가 유치하다고 지적해도 공드리는 스테판이 그랬던 것처럼 꿈의 세계는 본래 유아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러면 안되느냐고 되묻겠지.

<수면의 과학>은 유아적이기 짝이 없는 스테판이 어머니를 떠나 다른 여자를 찾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이건 아이의 꿈이다. 스테판에게 스테파니는 현실원리를 대변한다. 그는 그녀를 통해서만 현실과 화해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실은 스테판은 스테파니를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테판에게 현실의 창구인 스테파니는 스테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을 강요하고 꿈의 세계를 부정하던 하버지. 그래서 스테판을 스테파니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사랑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그저 너는 나의 창의성을 칭찬해줘야 한다고 요구할 뿐이다. 어쩌면 스테파니에 대한 스테판의 사랑은 자기애의 연장일 뿐이다. 자기가 두려워하는 상상을 실재로 둔갑시켜놓고 스테판은 강박적으로 스테파니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떼를 쓴다. 토라진 아이처럼 울며 보채다 제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다 일을 그르치고, 이 모두는 스테파니를 지치게 한다. 스테판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벽에 부딪힌다. 스테판은 꿈을 꾸기 시작하고, 거기서만 골든 포니 보이를 타고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수면의 과학>이 자전적 영화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서 스테판은 감독처럼 창의성에 넘치는 어떤 인간 유형을 대표한다. 나이가 들어도 결코 늙지 않는 영원한 소년’. 영화를 찍기 전 공드리는 실제로 연인과 헤어졌다. <수면의 과학>은 연인에게 버림받은 공드리의 이야기다. 스테판의 입을 빌려 말하는. 그래서 영화의 세계는 공드리의 꿈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 한 편으로 남의 연애사를 유추한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지만 어쩌면 공드리의 연애는 스테판의 연애와 같지 않았을까?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창의적인 천재 감독의 사랑. 자기애의 연장에서 자기의 창의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타자성마저 거부해버린 유아적인 철부지의 사랑. 그래서 <수면의 과학>정말 이제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건가?”라고 애처롭게 저항하는 감독의 자문 같다.

꿈은 총천연색이고 아름답다. 백일몽. 코끼리가 나비를 타고 날아다닐 수도 있고, 기타를 타고 배기음을 뿜으며 질주할 수도 있다. 슬픔은 과장되기도 기쁨이 강물처럼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꿈은 깨어나야 하는 법. 사랑은 현실의 영역이다. 사실 영화도 마찬가지. 현실에선 슬픔도 기쁨도 끝이나게 마련이고 다른 존재와의 사랑은 잠에서 깨어난 현실에서만 가능하다. 영화는 머릿속에서 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 걸어 다른 이와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실 자기 안의 세계가 달콤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이 씁쓸하기 때문 아닌가. 공드리와 스테판이 현실에서 또다른 스테파니를 만난다면 그녀를 꿈의 세계로 초청하기보다 꿈 바깥으로 한 걸음 더 나오는 용기를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좋은 걸 우짜노 -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질 것들

좋은 걸 우짜노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질 것들

 

누구의 인생에나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데 내게만은 도무지 오지 않는다. 난 언제든 기회가 오면 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 모양인 건 도통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태어나면서부터 기회를 잡은 사람들을 본다. 흔히 금수저라고 부르는 사람들. 별다른 노력 없이 나보다 훨씬 앞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태어나기도 전에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있다. ‘재능’.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이미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금수저에겐 불공정하다며, 사회가 잘못됐다며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부어주겠지만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이들에겐 뭐라고 욕도 할 수 없다. 어떤 이들에겐 우연찮은 기회도 오는 것 같다. 인맥, 학연, 혈연.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기회는 나에게만은 오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월급쟁이고, 난 지방의 삼류대학을 나왔다. 그렇게 욕만 하거나 욕도 하지 못하다 어느새 삶은 아스라이 지나간다. 기회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 좋은 걸 우짜노

 

<아스라이>는 대구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청춘의 이야기다. 주인공 상호는 우연히 고등학교 후배의 부탁으로 영화의 제작 프로듀서를 맡은 뒤 영화에 빠져들었다. 고교졸업 직전 무작정 만든 영화가 우연치 않게 그럭저럭 인정받은 후, 서른이 다 되도록 안팔리는영화를 만들고 있다. 뒷걸음질에 쥐를 잡아 주인에게 칭찬을 들은 소는 아마 평생 뒷걸음질만 치게 될테다. 갈으라는 밭은 갈지 않고. 그러나 쥐를 잡는 재능은 소가 아니라 고양이에게 내리는 법이다. 다시는 칭찬을 받지 못한 상호도 영화판을 전전한다. 돈도 벌지 못하고 제 앞길도 찾지 못하면서, 계속 뒷걸음질치는 소처럼 미련하게. 그런 미련한 인생이 십여 년, 어느 날 술자리에서 영화를 함께 만들던 후배는 얄미운 충고를 던진다. “형은 영화 그만 만들어, 잘 찍지도 못하면서”. 상호는 여전히 미련스럽게 대답한다. “좋은 걸 우짜노, 그냥 해야지.”

 

상호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데서 멈추지 않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 못해 영화를 못만드는 것일까 자문하다 대학의 영화 동아리를 찾아갔지만 콤플렉스만 더 심해질 뿐이다. “타르코프스키 작품 중엔 어떤 걸 좋아해요?”. 도대체 타르코프스키는 어느 나라에서 뭐하는 사람인 걸까.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상호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고 지방에 살기때문에 서울에 집중된 문화적 수혜도 먼 얘기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재능이 없다. 그런 주제에 영화를 찍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만큼 영화를 좋아한다. 좀 덜 좋아하면 그만두기도 쉬울텐데.

 

총체적 난국을 미련하게 버텨내는 상호의 삶을 안쓰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자면 문득 떠오른다. ‘나도 무엇을 저렇게 좋아했는데’. 돈이 없거나 재능이 없어서, 여건이 좋지 않아서,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어느새 사라지고 잊힌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시를 쓰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축구를 하고 싶었고, 매일매일 치킨을 한마리씩 먹을 수 있는 치킨집을 운영하고 싶었는데. 그 때로 다시 돌아갈 기회만 있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이 있는데. 이제는 입 밖으로 발음하는 것조차 민망해진 이라는 단어가 내 생활의 한구석에 생생히 꿈틀거리던 때. 어쩌면 여전히, 아직도.

 

상호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금수저가 아니었고 이렇다 할 재능도 없었다. 재능있는 이들을 일발에 역전할 찬스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상호는 아직 거기에 남았고 돌아보니 당신과 나는 떠났다. 상호는 좋은 걸 우짜노라고 말했고 우리는 좋지만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했다. 그뿐이다.

 

#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진다

 

유행처럼 번지는 청년 세대라는 말은 얼마나 허망한가. 이 도시에선 서른 아홉 살까지 청춘이라는데, 저 도시에선 서른 살이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고 한다. 알량한 숫자놀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청춘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실 기회. 청춘은 꿈을 유예할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어느 날 이라는 단어가 생경하게 들리고 입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워진 날,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날, ‘좋은 걸 우짜노라고 말하기 보다 좋지만 어쩔 수 없잖아를 말하게 된 날 청춘은 끝난다. 삶과 꿈을 유예할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봄. 아직 뜨거운 성장의 여름도, 풍요로운 수확의 가을도 오지 않은 시작의 봄. 청춘이 시작의 의미라면 청춘의 시간엔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 아직 꿈을 품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은 시절. 봄에 시들어버린 꽃들이 썩어 여름의 열매에게 양분이 돼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시절. 돈도 없고 재능도 없으면서 여전히 꿈을 유예하는 상호는 그래서 청춘의 한복판을 살고 있다. 상호가 청춘을 살고 있는 것은 그가 아직 미련스럽게 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상호도 나이를 좀 더 먹으면 결국엔 영화 만들기를 포기할지 모른다. 재능없음에 절망하고, 가난에 무릎꿇고. 결국 어느 회사의 영업사원이 돼 넥타이로 목을 옥죄고 사장님들의 비위를 맞춘 대가로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혹은 갑자기 터진 대박에 유명한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겠다. 상호가 붙잡고 앉았던 청춘의 시절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 줄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꽃이 피었다고 봄이 아니듯, 꽃이 졌다고 봄이 아닌 것도 아니다. 봄은 봄이라고 부를 때야 비로소 봄이다. 청춘을 청춘이라고 부를 기회, 꿈을 부둥켜잡고 지질거리며 매달리다 꺽꺽 소리내 울 수 있는 그 기회의 시절만은 당신과 나와 상호에게 모두 있었다. 재능이나 재력따위로도 살 수 없던 그 기회의 시절. 우리가 흔히 기회라고 부르는 것들은 우리에게 영 오지 않지만, 우리가 기회인줄도 모르는 순간을 우리는 직접 만들 수 있다. 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아스라이 사라지듯 그 기회의 순간들도 우리 삶에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청춘은 청춘이라 부를 때야 비로소 청춘이다. 기회는 당신이 기회라고 불러야 비로소 기회다.

 

# 청춘의 클리셰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타르코프스키를 모르던 대구의 영화소년, 공모전에서 300번이나 탈락한 재능없는 영화감독, 안될 걸 알면서도 오기로 꿈을 부여잡고 청춘을 유예한 미련퉁이. 그리고 마침내 <아스라이>가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길고 짧은 30편의 영화를 만든 후 첫 개봉작이었다. 감독의 나이 서른 살이 되는 해였다.

 

김삼력 감독은 청춘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다. 푸르지도 않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는 내도록 흑백이다. 거무튀튀한 화면에서 상호는 내도록 울고 다치고 좌절한다. 푸른 빛, 쏟아지는 햇살,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죄다 청춘의 클리셰라고 주장하는 감독의 투박한 말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들린다. 그 투박함은 영화의 만듦새도 다소 투박하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 투박함의 열정이 김삼력과 상호를 여전히 대구의 독립영화 바닥에 놔두고 있는 것일테니 상관없다.  

‘삶의 비밀’ - <세상의 모든 계절>

[영화리뷰]

 

삶의 비밀’ - <세상의 모든 계절>

 

성지훈

 

언제나 더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행복해지길 바라서 영원히 행복하지 못하고 부유한다. 고작 지나온 것들만을 뒤늦게 인식하는 존재에게 현재란 고작 쌓인 과거의 무덤일 뿐이고 미래란 유예된 과거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인식은 더디다. 그래서 고정된 상태로의 행복같은 건 없다. 행복이란 오직 지향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을 손에 쥐길 바라기 때문에 삶은 괴로워진다. 행복이란 것이 없다면 행복의 대립항으로서의 불행도 없다. 있지도 않은 것에 자기 삶을 우겨넣기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래서 어쨌거나 삶은 괴롭다. 그보다는 사실 삶이란 것은 행복이나 불행 같은 안일한 말 따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 “누구나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은 노부부 톰과 제리, 그리고 그들의 친구 메리의 이야기다. 톰과 제리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과 달리 매우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다. 남편 톰은 인자한 지질학자고 톰의 아내 제리는 상담치료사다. 그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한다. 그들은 능숙하게 요리를 하고 때때로 친구들을 불러 함께 식사한다. 주말엔 농장에서 정성스레 작물을 가꾸고 잘생기고 위트있는 변호사 아들이 연인과 함께 가끔 찾아온다. 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며, 학식이 풍부하다. 저녁 식탁의 대화에서 늘어가는 탄소배출량을 고민할만큼 정치적으로도 깨어있다. 그야말로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가정.

 

메리는 제리의 직장동료다. 제리가 일하는 병원의 비서직 사무원이다. 메리는 제리 부부와 달리 학식이 부족하고, 이혼했으며, 가난하고, 외롭다. 그래서인지 알콜 의존증도 있다. 거기다 무엇보다 너무 수다스럽다. 메리의 삶은 비참하고 불행한 삶이다. 누구의 삶을 감히 불행하다고, 비참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느냐만 메리의 삶만은 확실히 불행하며 비참하다. 메리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래서 메리가 밝은 전등 불빛에 달려드는 날벌레처럼 제리의 주변을 멤도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작은 질량의 사물은 더 큰 질량의 물체에 끌려간다는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던가. 제리는 자신의 환자를 대하듯이 메리를 받아준다. “Yes”라고 말해주며 메리의 끝없는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아마도 메리는 그들 곁에 있음으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나아가선 자신도 그들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은 메리도 알고 있다. 자신은 결코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문제는 메리가 톰과 제리의 아들 조에게 연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복한 가정에 편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면서 불거진다. 그 순간 언제까지고 메리를 안아줄 것 같았던 제리의 연민은 싸늘한 외면으로 변모한다. 마치 불길한 전염병을 만난 것처럼. 행복은 불행의 침범을 차단한다. 메리는 앞으로 더욱 외롭고 괴로워지겠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는 아무런 과장도 없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쓸쓸함을 표현해낸다. 메리는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있는 얼굴로. 아무런 대사가 없지만 메리는 마치 누구나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잖아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열매를, 겨울에는 소멸을.

 

<세상의 모든 계절>은 노부부 톰과 제리, 그들의 친구 메리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메리와 메리의 궁상을 지켜보는 우리, 그보다는 메리보다 더 궁상맞은 삶을 살고있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의 삶은 메리의 삶을 닮아있다. 늘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이 초래한 결핍에 집중하는.

 

영화는 행복의 상징과 같은 톰과 제리 부부보다는 그 주변에서 자기의 삶을 학대하는 이들의 편이다. 영화는 행복한 (혹은 행복한 것으로 여겨지는) 노부부를 제시하고 영화의 시선은 그들을 응시하며 부러워하는 이들의 자괴감과 궤를 맞춘다. 불면증 환자 자넷과 홀아비 뚱땡이 켄, 세상에서 무감한 로니, 그리고 메리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들을 지켜보기보다 이들이 되어 톰과 제리 부부를 지켜보게 한다.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 자체보다는 그걸 바라는 일에 집중하는 메리와 켄과 로니와 당신과 나.

 

비단 영화가 지시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은 늘 제리와 톰을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다. 그들의 주변을 맴돌고 그들 속으로 편입되길 바라지만 결코 그리 들어갈 수는 없다는 걸 실은 알고 있는 삶. 그래서 늘 부유하는 삶. 부유를 불행이라고 부르는 삶. 우리는 결핍된 것을 욕망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욕망은 욕망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욕망이 결핍을 초래한다. 삶을 생산하는 원동력인 욕망대신 욕망이 초래한 결핍에 집중하다보니 당신과 나의 삶은 때때로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자기의 삶을 부정하기 바빴던 메리처럼.

 

행복이라는 안일한 말로 치부했던 제리와 톰의 삶은 실은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일 따름이다. 애초에 행복이라는 거창한 말은 언어의 유희일 따름이다. 삶은 시간을 따라 변모하며, 매 순간의 욕망도 변모하기 때문에 고정된 개념의 행복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불행도 없다. 그저 순간 순간 자기 삶의 존재를 긍정하며 마주보며 웃는 것. 세상에 있는 모든 계절을 마주하고 괴로워하다, 웃다, 살아가다 사라지는 것. 삶의 의미란 고작 그런 것이다.

 

영화에서 제리 부부는 텃밭의 작물들을 소중히 가꾼다. 영화는 4계절의 하루씩을 보여주는 데 철마다 톰과 제리 부부가 텃밭을 가꾸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 부부의 삶은 욕심내지 않고 꾸준하고 차분하게 가꿔온 텃밭 같다. 때가 돼 씨를 뿌리고 잎을 가꾼 뒤 열매를 수확하면 식물은 죽는다.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열매를, 겨울에는 소멸을.

 

# 삶의 비밀

 

살다가 어쩌면 인생을 관통하는 한 줄의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고 산을 오르지만 실은 그런 건 없다. 미래엔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삶에는 해결같은 것이 없다. 삶의 비밀, 그리고 비극은 바로 그것이다.

 

머피의 법칙,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행과 불운은 모두 내 삶으로만 기어들어오려는 것 같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어젯밤 어느 술자리에서도 누가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불행 올림픽을 개최했지만 실은 그런 것도 없다. 삶의 비밀, 삶의 희극은 그런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삶을 계획하며 도무지 행복해지지 않는 삶의 우울증에 시달리지만 그건 어쩌면 봄에 열매를 바라서, 가을에 꽃을 바라서 그런 것일지 모를 일이다.

 

행복도 없고, 그래서 불행도 없고, 해법도 없고 해답도 없는 것이 삶이라 삶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 넓은 세계에서 누구 한 사람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존재는 먼지보다도 작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 먼지같은 삶에 주어진 찰나의 순간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더 거대한 것을 바라다 불행해질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자기 욕망에 솔직해질 것,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을 사랑할 것, 남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직시할 것, 나의 가능성을 상상할 것,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갈 것. 고작 이것이 삶의 진짜 비밀이다. ‘고작이것을 못해 불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까짓 것들을 고작이라 부르든 행복이라 부르든 그것은 상관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삶의 비밀을 주변에 널리 전염시키며 살아갈 것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화차> -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진짜’인가


 

<화차> -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진짜인가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한다. 그리곤 간단한 호구조사. 나이는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그렇게 서로 정보가 오가고 나면 우리는 그를 알았다고 말한다. 가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서류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주민등록증, 통장 사본, 여권, 졸업 증명서 같은. 그런 서류가 오간 후엔 그의 신원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어떤 누구를 알고 그의 신원을 확실하다고 말하는 데 필요한 것이 고작 그를 호명하는 기호들이다. 그런데 그런 기호들이야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일이다. 어려울 것이 없다. 세상은 기호 너머의 실체보다는 기호 자체를 규명하고 얻어내는 데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 당신은 누구인가

 

<화차>는 삶을 통째로 훔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선영과 문호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다. 결혼 전 문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에서 선영은 전화를 한 통 받고 홀연히 사라진다. 문호는 선영의 종적을 찾다 자신의 약혼녀 선영이 실은 경선이라는 이름의 전혀 다른 사람이며 실제 선영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문호가 전직 형사인 사촌 형 종근의 도움을 받아 선영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마치 그럴듯한 추리영화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시선은 물론 문호와 종근조차 선영의 종적을 잡아내는 추리게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그들 모두 경선(선영)을 자기가 원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그를 입증하려 노력한다.

 

문호는 사라진 선영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도대체 넌 누구야?”. 문호는 경선이 자신이 알던 선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전직 형사인 종근이 살인사건과의 연관을 의심하며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조언할 때에도 그는 형이 선영이를 아느냐고 화를 낸다. 끝까지 경선의 무죄를 믿고 그를 되찾으려는 순정남. 문호의 경선은 일상의 한 부분인 약혼녀 선영이다. 그래서 문호의 추적은 경선을 자신의 착한 약혼녀 선영으로 규정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종근의 경우는 경선이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임을 확신하고 그녀를 뒤쫓는다. 주인이 사라진 경선의 빈 집안을 탐색하던 종근은 지문 하나 남아있지 않은 집을 보고 요것 봐라라고 말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범죄현장을 목격한 형사의 시선이다. 영화 속 종근의 상상에서 경선은 잔혹한 살인범이다. 순정남 문호의 감정을 따라 경선의 무죄를 바라던 관객들은 종근의 냉소적인 시선을 따라 이번엔 경선을 동정의 여지가 없는 잔인한 살인범으로 인식하게 된다.

 

종근의 시선을 따라 끔찍한 범죄자 경선을 추적하던 관객들의 시선은 경선의 시점으로 경선의 과거가 드러남으로써 다시 그녀를 연민하게 된다. 관객들은 그녀가 사채업자에게 지장을 억지로 찍히고 팔려갈 때, 술집 여자 차림을 하고 택시에서 내릴 때를 보면서 그 아픔과 분노를 직접 느끼게 된다. 경선은 산골 펜션에서 선영을 죽이고 피범벅이 된 채 자신을 때린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경험에서 자신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음 행동을 한다.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낄 시간도 두려움에 떨 여유도 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그 죄책감마저 억눌러야 하는 고단한 삶에 관객들이 느끼는 건 연민과 동정이다.

 

선영으로 변한 경선. 그 한 명에 대한 각자의 규정은 모두 다르다. 관객들도 문호의 마음을 따라, 종근의 관찰을 따라, 그리고 경선의 삶을 따라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어느 모습도 경선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관객들은 경선을 증오할 수도 연민할 수도 없다. 경선 자신이라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규정할 수 있을까.

 

# 무엇이 되기를 바라서

 

자아는 자신의 관념 안에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에 비친 얼굴로 구성된다. 그래서 오히려 무서운 것은 타인의 삶을 도둑질 해 살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사라지고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사칭하고 살아도 도무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세상이다. 타자의 존재를 타자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태도다.

 

자신의 실존이 무엇인지, 그녀가 경선인지 선영인지는 그녀 자신도, 그녀의 연인 문호도 알 수 없다. 마치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알 수 없었던 장자처럼. 그래서인지 경선도 나비를 보며 자신의 존재를 질문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욕망이 꾸역꾸역 몰려든 용산으로 그녀가 향한 이유는 함평의 나비 축제를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문호가 기억하는 선영(경선), 종근이 단정한 경선, 그리고 경선이 되고 싶었던 선영. 모두 경선이며 또한 경선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모두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 경선은 자신이 선영이길 바랐고 나중엔 자신이 선영인지 경선인지조차 혼동했다. 문호는 경선이 선영으로 머물러주길 바랐다. 경선이 아니라. 결국, 모두가 존재를 무엇으로, 제멋대로 규정하려 했고 결과는 그 대가를 치른 파국이었다.

 

# 대한민국의 가장 천박한 욕망이 몰려든 곳

 

영화의 원작 소설은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진 이후 불황기가 배경이다. 극단적 소비주의가 만들어낸 살풍경. 이같은 배경은 90년대 이후 한국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부자 되세요란 주문이 온 나라를 사로잡고, 주민등록번호에서 신용카드번호로 사람을 규정하는 수단이 옮아가던 시절. 경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건 사채 때문이다. 그리고 빚을 내라고 강요하고 경선의 불안한 삶에 위로의 손길 한 번 주지 않은 건 세상이다.

 

영화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원작소설만큼 사회적 문제에 비중을 두진 않는다.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 중 누가 모르겠는가.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빚은 얼마나 두려운지, 삶은 얼마나 외로운지. 영화는 굳이 이런 것들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감독은 용산역을 마지막 장면의 배경으로 택하면서 이 파국의 난장을 총체적으로 전시한다. 끊임없이 사람이 들고나는 곳, 무수한 욕망이 교차하는 곳, 백화점의 무수한 상품들이 즐비한 곳,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천박한 욕망이 밀려들어 잔인하게 타올랐던 곳.

 

당신이 당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세상이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기록이다. 자본이 부여한 신용, 국가가 부여한 일련번호 같은 것들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기억이다. 몸과 마음을 섞어 살을 부비고 말과 정을 나누며 누군가에게 남긴 흔적. 그러나 실은 이것 중 어느 것도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타인의 얼굴을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데 급급할 뿐인 관계도, 고작 기호에 불과한 숫자들도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인 보바리즘(Bovarysme)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될 때 심해진다. 강요당한 욕망이 더 나은 무엇으로의 도피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 타인에게 멋대로 투사한 자신의 욕망인지, 숫자놀음에 불과한 기호들인지, 세상에 떠밀린 안타까운 변명인지.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정말 진짜인가.

 

그래서 오늘 거대한 용산역에 있는 것 같은 우리는 모두 화차를 기다리고 있는 경선과 똑같은 셈이다. 아직 선영이 나타나지 않았을 따름. 그러니 선영이 나타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맡기 전에 내 옆의 경선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너 자체로 괜찮다는 아주 사소한 위로 한마디쯤 건네 보는 게 좋겠다.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시네마 달에 대한 사랑고백

 

1.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말에 한달음에 필름포럼으로 갔다. 그 땐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 맨 위층에 있었다. 옥상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오늘 볼 영화 포스터를 봤는데, 왠 사내놈들 둘이 홀랑 벗고 누워있는 거 아닌가. <후회하지 않아>였다. 그 때 그렇게 말했다.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권장하지는 않는다고. 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지금 생각하니 참 지랄같은 말이었는데, 저 부끄러운 얘기들을 이제 지랄맞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후회하지 않아>덕분이다. <후회하지 않아>를 추천했던 선배누나는 이후에도 여성영화제엘 데려가고 종종 퀴어영화를 추천해줬다. 그 영화들, 그 영화들을 보고 나와 떨었던 수다들이 켜켜이 쌓이며 호모포비아는 조금씩 치료됐던 것 같다. ‘마음의 준비라니. 진짜 지랄맞네. 부끄럽기 그지없다.

 

2.

핸드폰 액정 메인화면에 적어둔 문장을 바꿨다. 그 때까진 수 년간 우리민족끼리였는데. <애국자 게임>을 보고난 다음이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도서관에 가 책을 잔뜩 빌렸다. 이것 저것. 학교에서 선배들한테 받은 책들도 다시 꺼내 읽었다. 헌책방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종이가 누렇게 바랜 책들을 읽었다. <애국자 게임>을 보고 핸드폰의 문구를 바꾸기까지 1년 반 남짓이 걸린 것 같다. 그렇지만 핸드폰의 문장을 바꾼 건 <애국자 게임>을 보고난 다음이다.

 

3.

세상은 그들을 대척점에 놓고 대비시켜왔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면에선 같은 편이다. 야만의 땅에 내몰려졌다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황은 달랐지만 그들에게 역할과 상황을 준 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아마 이 스릴러의 살인마, 끝판 왕.”

 

<두 개의 문>이 개봉했을 때 이런 문장이 들어간 리뷰기사를 썼다. 기사의 야마는 경찰과 철거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에서 탈피해 관객 스스로 시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두 개의 문 중에서. 고백하건대 그 기사는 리뷰보다는 차라리 반성문에 가까웠다. 증오와 적대로 알리바이를 마련하려던 비겁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4.

영화를 보고나면 때때로 그런 순간들이 있다. 뒷골이 시큰하거나, 가슴이 답답한. 무언가를 막 적고 싶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마구 떠들고 싶은. 새로운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좋은 영화란 내게 새로운 질문을 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폭력, 사랑, , 나이듦, 가난, 연민, 착취, 노래, 예술. 뭐 그런 것들. 무엇이든 우리가 딛고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에 대해. 인간적 삶의 복원에 대해. 좋은 영화와 좋은 책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우리의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신박한 상상력이고 노련한 길잡이다.

 

5.

<애국자 게임><두 개의 문>은 시네마 달에서 만든 영화다. (<후회하지 않아>는 아니다. 하지만 이후에 찍은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시네마 달이 제작했으니까, 대충 넘어가자.) 말이 너무 길어질까 적지 않았지만 <레드마리아>, <상계동 올림픽>, <버스를 타자>, <거미의 땅>, <송환>, <노라노> 등등등. 등등등. 내 삶을 조금씩 변화시켜온 시네마 달의 영화들은 많다.

 

이건 그저 시네마 달의 영화를 좋아하고 시네마 달의 영화들을 삶에 덕지덕지 붙여 온 팬의 팬심 고백 같은 거다. 시네마 달의 영화가 없었다면 단언컨대 내 삶은 지금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을 거다. 분명히.

 

6.

시네마 달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블랙리스트, 지원배제 뭐 이런 말들이 등장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로 시네마 달을 지켜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나로선 시네마 달이 사라지면 좋은 영화를 만나게 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게 될 거란 아쉬움이 가장 크다. 시네마 달의 영화들은 대부분’ (사실 별로 안좋아했던 영화들도 좀 있다..)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책을 읽게 했고 수다를 떨게 했고 술을 마시게 했고.

 

다행히 나처럼 시네마 달과 시네마 달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네마 달을 지켜내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스토리 펀딩도 이어지고 영화 상영회도 한다. 스토리펀딩은 한겨레 21의 인터뷰와 박주민 의원의 글이 연재 됐더라. 모두 시네마 달에 대한 애정과 고운마음이 잘 보이는 좋은 글들이었다. 없는 형편에 조금 후원도 했다.

 

다들 자기 재주를 보태 시네마 달을 지켜내겠다고 나섰으니 나도 내 재주를 보태야겠다. 내 재주가 별거 있나. 영화보고 술 먹는 거지. 주말엔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를 봐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시네마 달이 지금껏 만들어온 영화들에 고마움을 고백하고 앞으로도 계속해 만들 영화들을 응원하는 일.


 



+

혹시 주말에 인디스페이스에 가실 분이 계시다면. 추천 영화는 <투 올드 힙합 키즈><그림자들의 섬>, <잡식가족의 딜레마>. 특히 <투 올드 힙합 키즈>엔 어느새 스타가 되어 무려 해피투게더와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지조가 나옵니다. 무려 주인공.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