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후 가장 폼나는 언니들 - 왕자가 된 소녀들

해방 이후 가장 폼나는 언니들 이야기 - 왕자가 된 소녀들 


작년 이맘쯤 9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던 어느 드라마의 인기는 그 시절, 우리가 그토록 열광했던 ‘오빠들’의 기억을 소환했다. 이른바 팬질, 그러니까 일명 ‘빠순이’로 불리던 소녀들의 오빠를 향한 불타는 애정에 그녀들의 부모는 속을 끓여야 했다. 오빠들 집 앞에서 며칠이고 노숙하는 일은 기본이요, 오빠들의 공연을 보기위해 학교를 탈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자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조퇴금지령을 내리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요즘 것들’을 타박하던 그 부모들에게도 조용필 오빠나 나훈아 오빠를 쫓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조용필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은 조용필이 “기도하는~”하며 노래를 시작하면 절로 따르는 소녀들의 비명소리가 애초부터 노래의 일부분인줄 알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용필오빠를 따라다니던 소녀들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속깨나 썩었을 테다. 


그러나 그녀들도 실은. 

     

# “팬레터는 전부 혈서야”


한국전쟁 직후 50년대, 여성국극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꽃 같은 외모의 도령이나 왕자는 물론, 텁석부리 장한이나 근엄한 왕까지 모든 배역을 여성들이 맡아 연기했던 여성국극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배우들에게 온갖 음식을 해 나르는 일은 기본이었고, 어느 누구는 국극 단체를 만들어 운영하겠다며 2억이 넘는 돈을 바람처럼 날려버렸다고도 한다. 배우들의 옆에 꼭 붙어 온갖 잔심부름과 수발을 해주는 팬들도 있었다. 특히 임춘앵이나 조금앵 같은 인기배우들의 인기는 엄청났는데, 팬들의 부탁으로 남장을 하고 가상 결혼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국극배우 조금앵 선생은 당시의 인기를 회상하며 “팬레터는 전부 혈서”였다고 말하니 그 열광의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유로운 연애는커녕 여성들의 문 밖 출입조차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던 전통적 유교사회는 해방과 전쟁을 지나며 빠른 속도로 자유주의 풍조를 유입했다.(정비석의 ‘자유부인’같은 소설이 연재되고 논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당시의 시대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전통적 여성상과 서구의 자유로운 여성상이 교차하던 시절, 여성들만이 무대에 올라  남성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기존관념의 전복이었다. 거기다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배우들의 자태가 그토록 멋졌음에야. 새로운 시대, 보다 나은 삶을 꿈꾸던 소녀들이 당당히 집을 나와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당당히 사람들의 열광을 얻어낸 국극 배우들에게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여자기 때문에”


절정이던 국극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은 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아이러니하게 ‘전통문화 보존사업’이 시작되며 국극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판소리나 창극 같은 공연예술들이 ‘무형문화재’라는 이름을 얻으며 정부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으나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국극만은 제외됐다. 


심지어 국극은 “문화예술계에 씻을 수 없는 죄과를 지었다”거나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창극”이라는 비난을 받아야했다. 국극이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당시 국극 무대의 연출과 안무를 맡았던 이들은 점차 국극 무대에 발길을 끊었고 나중에는 자신이 국극을 만들었었다는 사실도 숨기곤 했다. 배우들은 요정에서 벌어지는 ‘기생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하나 둘 무대를 떠나야했다. 국극 최고의 스타였던 임춘앵도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975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느덧 고희를 훌쩍 넘긴 국극배우들의 자조처럼 “여자기 때문에”받아야 했던 수모였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국극이 ‘사이비예술’로 치부되며 전통문화 보존사업에서 제외된 것도, 배우들이 결혼이나 임신, 출산의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국극이 “여자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화예술계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쳐 여전히 강성했던 남성중심의 사고체계는 남자를 배제한 무대에서 남자를 연기하면서 남자보다 인기있는 그녀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새로 들어선 권위주의 군사정부에선 더더욱. 여성국극은 어느새 “여자들만의 기괴하고 기형적인 사이비 예술”이 됐다. 


영화 속 국극배우들의 회고는 남성중심의 한국사회가 어떻게 여성들의 문화활동과 노력을 거세해 나갔는지 명백히 진술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배우’보다 ‘여배우’로 호칭되는 이들과 ‘남성들이 바라봐주는 대상으로서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으로 대변되는 문화예술계 여성들의 지위로 귀결됐다.

  

# 왕자로 사는 것, 소녀로 사는 것


영화의 제목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우들은 제목처럼 왕자가 됐지만 본질은 분명 소녀, 여성이었다. 그녀들은 무대 위에서 뽐내는 남성성과 여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서 혼란을 겪기도 하고, 상대 배우나 팬들과의 묘한 감정에서도 혼란을 느낀다. (여성스타들과 여성팬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감정과 관계의 모습들은 어느 퀴어 영화나 드라마보다 흥미로운 모습이다. 영화 속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마음과 눈이 맞은 이들은 한국을 떠나 지금도 친구처럼 연인처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결혼이나 출산처럼 여성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진 의무(?)에 굴복하기도 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극복하거나 혹은 실패하는 과정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임신으로 무대를 떠나야했던 배우가 일흔이 훌쩍 넘어서야 뱉은 “결혼이 잘못이었다”는 회고는 여성으로서, 배우로서 순탄치 않은 삶을 그대로 견뎌온 그녀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나이 들어도 늙지 않는 언니들


영화에 등장하는 국극 배우들은 대부분 고희를 훌쩍 넘겼다. 무대 위에선 여전히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내고 역동적인 몸짓을 보이지만 무대 뒤에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짚어가며 걷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최연소 배우는 67세의 인간문화재 이옥천 명창이다. 그녀는 여전히 선생님과 언니들에겐 막내다. 쇠락한 인기는 국극계의 고령화를 불러왔다. 현재 국극보존회를 중심으로 국극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그저 국극이 좋았던 그 ‘언니’들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늙지 않았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우직한 목소리로 무대를 호령하는 조금앵 선생이나 지금도 다섯 개의 개인 팬클럽을 보유한 박미숙 선생은 그 때처럼 무대 위에서 노는 것이 좋다. 국극 배우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 사재 2억원을 바람처럼 날려버리고도 아깝지 않았던 왕년의 소녀팬들도 여전히 ‘언니들’곁에 머물고 있다. 


수많은 팬들이 몰려들었던 그 시절 같은 국극의 영화는 어쩌면 다시는 없을지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어느 동사무소의 조그만 경로잔치 같은 무대만이 국극에게 허용될 수도 있다.(실제로 영화에는 동사무소 경로잔치에서 조금앵 선생 같은 국극계 최고의 배우들과 인간문화재 이옥천 명창이 공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이든 배우들이 모두 세상을 등지고 국극의 명맥이 끊어질 수도 있다. 


(대단히 안타깝다는 마음을 전제하면서)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떨까. 다만 이어졌으면 하는 것은 왕자를 기다리도록 강요된 지위와 역할을 과감히 걷어차 버리고 제 발로 왕자가 되어버린 그 언니들의 자유로움과 당당함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화려했던 지난 날을 호출하고 아쉬워하는 추억담이 아니다. 그 멋있던 국극하는 언니들이 영화를 통해 부른 것은 지난 날, 영광의 시절을 살던 자신들이 아니다. 이제 다시 자유로운 모습으로 자신들을 닮을 ‘왕자가 될 소녀들’. 


생명이 흐르는 강 - 모래가 흐르는 강



지율스님은 지난 2004년,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 터널공사로부터 천성산의 꼬리치레 도롱뇽을 지키기 위해 모든 곡기를 끊었다. 지율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도 정부는 터널공사를 강행했다. 지율스님과 환경운동단체들이 낸 공사금지 가처분 소송도 대법원에 의해 최종 각하, 기각됐다.  


제주 강정마을에서는 매일같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폭 1.2Km의 한 덩어리 바위로 이뤄진 구럼비 바위에는 폭약이 설치되고 연산호군락지에는 콘크리트 덩어리가 쏟아진다. 강정 앞바다를 제 집으로 삼은 세계적 희귀어종 남방큰돌고래와 붉은발말똥게는 졸지에 집을 잃고 있다. 강정마을을 지키려는 평화활동가들은 몸으로 트럭을 막아 세우며 싸우고 있지만 해군기지 공사는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던 새만금 간척사업과 부안의 핵폐기장 건설사업, 밀양의 농지들을 관통하는 고압 송전탑 건설 사업들도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형태를 띠고 저마다 다른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그 속내는 같다. (어떤 것들은 인간도 포함한) 생명의 희생을 딛고 선 것. 그리고 2008년, 22조원의 예산을 들인 지난정부 최대의 국책사업, ‘4대강 정비 사업’이 착공했다.


# 모래가 흐르지 않는 강


4대강사업 착공식 소식을 들은 지율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낙동강으로 향했다. 스님은 물길을 따라 걸으며 공사현장과 변하는 강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스님은 그 순간을 “수해 예방, 수자원 확보, 경제 발전 등 정부의 화려한 구호와는 정반대로 내 눈이 보고 있는 것은 무너지고 파괴되는 섬뜩한 국토의 모습이었다”고 기억한다. 


2009년에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상류, 영주에 댐공사가 시작된다. 댐건설로 내성천의 원앙, 먹황새, 수달은 사라져간다. 스스로 흘러 강을 정화하고 수 Km의 백사장을 만들었던 모래들도 사라지고 있다. 소백산 줄기부터 흐르고 흘러 내성천까지 온 고운 모래는 영주댐에 가로막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반면 남산을 6개나 쌓을 수 있을 만큼의 모래를 파낸 낙동강에 엄청난 빈공간이 생기면서 빨라진 물살은 내성천의 모래를 기하급수적으로 쓸어가고 있다.  


내성천의 모래는 야생동물들의 삶터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흐르는 강물을 스스로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고운 모래 사이사이에 있는 미생물들은 번식하며 오염물질을 분해한다. 내성천이 모래를 받아들이고 품고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낙동강은 두께 22미터짜리 정수필터를 갖는 셈이다.


사라지는 것은 모래뿐이 아니다. 영주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을 젖줄삼아 땅을 일구며 살아온 마을의 일상이 통째로 사라진다. 지율스님이 영주댐 수몰지구로 들어서자마자 만난 것은 한 평생을 같은 마을에서 살아온 할머니의 감자밭이었다. 채 다 자라기도 전에 중장비에 헤집어져 드러난 감자. 어서 이주하라는 경고였다.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당산나무도 팔다리가 잘린 채 어딘가로 실려 갔다. 


지율스님의 눈길은 내성천변의 모래 한 알, 호미자국보다 커다란 바퀴자국이 더 많은 감자밭, 곧 사라질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얼굴, 60년간 땅을 일구며 살아온 노파의 주름살을 모두 담아낸다. 그것은 모두 강과 함께 살아온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며 역사다. 그리고 동시에 댐이 물길을 막으면 곧바로 사라져버릴 것들이다. 

 

# 강을 바라보는 우직하고 겸손한 시선


<모래가 흐르는 강>은 수려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스님이 직접 가정용 카메라로 찍은 영상은 대부분 투박하고 이야기는 정돈되지 않은 채 혼란스럽게 펼쳐진다. 고저가 없는 편집은 긴장감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흥행한 다른 다큐 영화들처럼 기발한 아이디어나 톡톡 튀는 내레이션도 없다. 그러나 <모래가 흐르는 강>은 어느 다큐멘터리보다 성실하며 그 성실함을 기반삼은 묵직한 설득력을 지닌다.


스님은 전화번호부 몇 개를 겹쳐놓은 두께의 환경영향평가서를 직접 검토해 환경영향평가가 얼마나 엉성하게 이뤄졌는지를 찾아내고 영주댐 건설과 4대강사업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무엇보다 4년여의 시간동안 꼼꼼하게 기록된 내성천의 모습이 다큐멘터리 최고의 미덕은 묵묵히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화는 4대강 사업이 누구의 잘못인지 드러내며 ‘범인’을 타박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입, 카메라는 공사장 바리케이드에 새겨진 특정기업의 로고를 꽤 오랜 시간 주목하지만 그 기업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대부분의 공사를 주도하며 한국사회 자본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이다. 그 장면은 어느 기업에 대한 비판보다는 ‘자본’ 자체에 대한 응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스님은 차라리 강바닥을 헤집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는 이 사태는 사회전체의 동조 혹은 묵인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동조 혹은 묵인의 실체가 생명과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필부필부의 어리석음이든, 개발이익을 기대하는 이기심이든, 무기력함과 패배감에 잠식당한 체념이든.


만듦새가 투박한 만큼 영화와 스님의 ‘진심’은 더 우직하게 다가선다. 화면을 통해 보인 것은 화려하고 현란한 기교가 아니라 피사체를 아끼고 염려하는 마음이다. 대상의 실체를 완벽히 이해하고 분석하겠다는 야심이 아니라 그 단면을 진심으로 바라보겠다는 겸손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그대로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맞닿는다. 화려하게 꾸며내고 만들어내는 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두어 스스로 생명을 잉태하는 아름다운 강. (영화 중반부, 정부의 대규모 식수사업을 알리는 뉴스와 벌목현장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은 다소 뜬금없지만 동시에 영화의 장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마 카메라를 든 감독이 진리 앞에서 겸허해지는 스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 강은 흘러, 다시


제주 강정마을에서 구럼비 바위를 지키는 송강호 박사는 다큐영화 ‘잼 다큐 강정’에서 “인도네시아 바다에 있는데 형광등 하나가 떠내려 와 건져보니, 번개표 형광등이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대로 세계가 분절돼 있지 않다는 깨달음이다. 집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흘러 그대로 먼 바다의 파도가 되기도 하며 에베레스트 꼭대기에서 녹은 얼음물도 흐르고 흘러 어느 마을, 어느 집 화장실의 뒷물이 된다. 그렇게 세계는 이어져 있다.


지율스님이 마을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는 트럭에 헤집어진 감자를 다시금 밭에 심는다. 할머니는 스님에게 바람이 불면 꽃도 떨어지고 타는 불도 연기처럼 사라지듯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게 자연히 나고 사라지는 자연의 일부라고 말했다. 삼라만상은 결국 상호부조하고 사라지며 다시 순환하는 대자연의 일부라는 이야기, 생명을 심고 거두며 다시 돌려주는 땅에서 보낸 오랜 세월이 준 지혜.


불교경전인 법구경은 “자연을 이용하기를 꿀벌이 꽃가루를 채집하듯이 하라”고 가르친다. “꿀벌은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를 다치는 일이 없듯이 사람도 자연을 이용할 때 자연의 풍요로움이나 아름다움을 오염시켜서도 안 되며, 자연에게서 회복할 수 있는 자생력과 활력소를 빼앗아서도 안 된다”며. 그것은 인간은 결국 자연의 품에서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자연과 생태를 훼손하는 일이란 결국 제가 제 목을 죄는 어리석음이라는 가르침, 더 많은 꽃가루를 얻으려는 욕심으로 함부로 꽃을 대한 벌은 다시는 꽃가루를 얻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내성천에 들어선 스님은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흐르는 물과 모래는 천천히 스님의 발을 덮고 이내 스님의 발은 내성천 모래 속에 파묻힌다. 그것은 마치 인간은,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강과 모래의 품에서 그를 딛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4대강사업, 개발자본, 부실한 환경영향평가, 황폐해진 강변, 사라지는 마을. 1시간 30분 동안 보이는 것은 가슴 아픈 장면들에도 영화를 보고난 후 희망을 품은 것은 그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었다. 그래도 다시 우리의 발을 품어주는 맑은 물과 고운 모래. 


영화는 강에 기대 사는 ‘우리’가 다시 강을 찾아가는 일이 다시 강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강은 물리적 존재로서의 내성천과 낙동강을 향하는 발걸음 뿐 아니라 생명의 탯줄로서 존재하는 강을 깨닫고 느끼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스님은 모래가 흐르는 강이 우리 곁에 있었음을 알았고, 그 모래가 흐르는 강은 다시 스스로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가 걸었던 아름다운 강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의 전염, 그것이 스님과 강이 지닌 희망의 씨앗이며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삶과 미래를 희망에 가까운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동력이고 근거가 될 테다. 



요즘 본 영화들

 

 

 

끝과 시작

 

오감도를 그다지 재밌게 보지는 않았다. 민규동 감독들의 전작들도 어딘가는 늘 아쉬웠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다분히 오바스럽다고 느껴졌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그저 예쁘기만 했다. 결국 민규동의 최고작은 언제까지나 여고괴담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했드랬다.

 

그래서 오감도의 에피소드 중 하나였던 끝과 시작에도 그닥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마치 액자식 구성인 '양' (그렇다 액자식 구성인체 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액자식 구성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 인물들의 인과가 말그대로 끝과 시작이 베베 꼬여들어서는. 마치 뫼비우스처럼, 그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니 그보단 차라리 끝이 곧 시작이 될 수 있고 어느 시작은 끝에서 비롯됐음을 자연스레 이르는. 그래서 삶의 모형이란 마치 계단 모양의 꺾은선 그래프가 아니라 둥글고 원만해서 그 수식의 정리조차 어려운 연속의 그래프라는 그런.

 

물을 주면 식물이 자라는 카드나, 마술, 유령, 환상 같은 소재들이 눈에 띈다.

다만 김효진과 엄정화의 사랑은 너무 눈에 보이게 숨겨놓아 밋밋하다는 느낌도 든다.

황정민과 김효진의 정사장면은 엄청 섹시하다. 김효진이 엄정화 머리 감겨주는 장면도.

 

 

 

 

링컨

 

영화는 전형적인 스필버그 영화다. 위인은 다분히 신성화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공상과학에 대한 스필버그의 상상력은 대단하겠지만 그가 발휘하는 영화적 상상력은 언제나 아쉽다. 다만,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재밌다.

 

그렇게 링컨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영화다.

노예해방을 이끌어낸 인간적인 대통령, 정치가로서의 링컨과 아버지, 남편으로서 괴로워하는 노년 남성으로서의 링컨을 적절히 조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링컨을 덜 위대하게 그리지는 않는다. 영화는 그의 노예해방 정책이나 남북전쟁의 숨은 의도 같은 논란거리 많은 이야기들은 피해간다. 아니 피해간다기 보다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 그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사실 링컨은 그런 뒷 이야기들을 하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스토리도 많고 멋진 정치가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긴 러닝타임에, 품 안에 숨겨놓은 비수같은 장치도 없는 영화가 재미있을 수 있는 공의 가장 많은 부분은 링컨을 연기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가지고 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어쨌건 "내가 나오는 영화를 안보면 너희만 손해"라는 포스를 풀풀 풍겨주고 있고, 실제로 그의 영화를 보고 영화가 못마땅한 적은 있어도 (사실 거의 없다.. 라스트 모히칸이나 나인 정도..?) 그가 못마땅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심지어 잘생겼어.

 

 

 

장고

 

피가튀고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 묘하게 웃기기까지 한 서부극.은 아마 지구에서 타란티노가 가장 잘 만들 수 있을 테다.

 

제이미 폭스가 영화에서 몇 명의 백인이나 죽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진짜 엄청 많이 죽인다) 그가 죽이는 흑인은 단 한 명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디카프리오의 집사를 연기한 사무엘 잭슨을 죽이는데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일테다. 영화의 와꾸는 결국 노예제도에 핍박받는 흑인들이 백인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내용인데, 영화의 가장 큰 악당은 백인 노예상들이 아니라 그 밑에서 호의호식(도 채 못하면서 오히려 제 동족들을 더욱 악랄하게 핍박하는) 흑인집사 사무엘 잭슨이다.

 

그밖에도 장고의 여정에 얼핏 보이는 모습들은 채찍맞는 노예 옆에서 행복하게 놀고있는 다른 흑인 노예들이 비춰지는데 사실 그게 타란티노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호함일테다. 더구나 주인공 장고 자체도 노예제도나 인권, 자유 이런 것 대승적인 것들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랑하는 아내를 구해서 함께 살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장고는 영웅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장고의 유럽인 백인 친구가 노예제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뒤마가 흑인이었든 백인이었든 어쨌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칠갑과 통쾌함이다. 백미는 장고가 디카프리오의 저ㅐㄱ에서 벌이는 수십대 일의 총격전 장면. 오우삼 영화의 주윤발은 저리가라다. 역시 액션씬은 흑형들 간지가.

 

 

 

전설의 주먹

 

힐링캠프에 나온 강우석이 이번 영화가 투캅스나 공공의 적보다 재미가 없다면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꾸역꾸역 봤는데, 결국.

 

강우석은 이대로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말라.

뭐 더 할 말도 없다. 굳이 끄적거리는 건 '강우석 이제 영화 만들지 말라'를 강조하고 싶어서. 

 

아, 이요원은 이런 영화에 발 좀 담그지 않았으면.

다른 좋은 배우들이야 강우석 영화를 찍고 강제규 영화를 찍어도 계속 좋은 배우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이요원은 어쩐지 더 좋은 영화와 드라마에만 계속 나와야 할 것 같단 말이지.

 

 

 

모래가 흐르는 강

 

천성산 도롱뇽을 지키려던 지율스님의 노력과 강정마을의 구럼비를 지키려는 주민들의 싸움, 허물어지는 생명을 지키고자 열반하신 문수스님의 소신공양도 사실은 모두 다 같은 궤적을 그리는 일일테다. 인간은 불과 바람과 꽃처럼 모든 자연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들과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것을 그대로 돌려받게 되는 것이 우주의 이치일 것이라는.

 

스스로 모래를 흘려 다시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강의 모습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라는. 흐르는 것이 이치라면 억지로 고이게 만들어 썩게 한 물은 결국 다시 인간을, 우리를 썩게 할 것이라는.

 

4대강사업을 다룬 첫 번째 다큐멘터리를 지율스님이 만들어주셔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정권이니 자본이니 토건이니 하는 말들(그게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보다는 자연과 사람, 모든 생명들이 서로를 기대고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불교적 이치가 영화에는 한가득.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모닥불을 태우며 스님과 어느 할머니가 나누던 대화. 흙을 밟고 강을 보며 살아온 긴 세월의 지혜는 어느 고승대덕의 깨달음 만큼이나 현숙할 수밖에 없더라는.

 

 

 

 

 

 

들국화 공연 후기 - 다시 행진, 다시 앞으로

 

 

 

언젠가 학생회실에서 들국화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 친구가 말했다. "역시 옛날 가수, 옛날 노래가 좋아"

 

우리세대에게 들국화는 옛날 가수, 옛날 노래였다. 우리는 들국화가 팀을 결성한 이후에 태어났고, 들국화가 해체한 이후에나 음반가게를 기웃거릴만큼 머리가 커졌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 위대한 노래라는 것은 그 노래를 따라부르는 우리세대의 가수들이 한 말로 이해했다. 들국화가 위대한 밴드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100대 명반 1위에 들국화의 첫번째 앨범이 이견없이 올라가는 것을보면서도 그랬다. "역시 들국화는 위대한 밴드였나보군"

 

전인권 아저씨에 대한 인상은 더했다. 사자머리 산발한 약쟁이. 어느 결의 겉멋이었을까, 다른 이유였을까 난 또래 친구들보다는 그이를 더 좋아했지만, 그 호감이 진짜 위대한 보컬리스트로서 그를 사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사실 난 전인권의 라이브 무대를 제대로 본 적도 딱히 없었다.

 

(2003년 즈음 나온 인권 아저씨의 솔로앨범으로 그에 대한 사랑이 얼마간 커지긴 했지만) '들국화'를 처음으로 본 건 지난 여름 제주도였다. 강정평화대행진에 노래를 부르러 온 들국화, 그리고 전인권이 "The road is long~"하고 노래를 시작한 순간 들국화에 대한 다소 모호하고 다소는 티미했던 애정은 진짜가 됐다. 써놓고 보니 정말로 이렇게 유치한 표현이 없지만, 정말 그랬다. 조금 더 과장하자면, 마치 노래라는 것을 처음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달이 지난 쌈싸페에서는 더 했다. 그렇게 줄줄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따라 부른 공연이 있었나 싶었다. 과거에 젠체하느라 그것만이 내세상이이나 걱정말아요 그대 같은 노래들로 이런 저런 말들을 지껄였던 일들이 순간 부끄러웠다. 어느 순간, 들국화는 내게도 '옛날'이 아니게됐다.

 

# 따라가지 않고 '지나'가는

 

들국화는 신곡을 불렀다. 아직 앨범은 나오지 않았고 편곡 작업은 조금 남았겠지만.

그것만이 내세상이나 제발, 가장 좋아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연주하는 들국화는 참말로 멋졌지만 이 날의 백미는 역시 신곡이었다.

 

멜로디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건 아마 미련하고 둔한 내 귀의 문제일테고.

다만 아릿하게 계속 남는건 그 노래의 노랫말,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르던 아저씨들의 그 표정.

앞서간 이의 발길, 하늘의 별 빛. 을 '지나서'계속 걷겠다는.

그동안 잠자던 "노래야 깨어나라"는.

 

앞선이의 발길과 하늘의 지표를 따라 걷지 않고 그것마저 지나 걸어야 새벽이 다시 밝을 것이란 그 말이 어쩐지 그렇게 감격스럽고 고마워서. 아니 그보단 따라 걷는 것보단 당연히 지나 걷겠다는 그 표정이. 그렇게 노래든 별이든 꿈이든 찾아서 계속계속 꾸역꾸역. 그럼 다시 새벽이 아침이 올거라는 위로, 다짐, 자조. 그런 말들로 표현 안되는 그 것. 차라리 가르침, 조언. 살아봤으니, 살아가고 있으니 해 줄 수 있는 그런 말들, 노래들. 울렁울렁.

 

새 노래를 부르면서 드럼을 두들겨 패던 주찬권 아저씨의 모습이, 의자에서 일어나 목청껏 소리지르는 나이들었지만 젊은 그 가수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감격스럽고 고마웠다. 결코 답보하거나 퇴보하지 않겠다는. 연말에 수만명 채우는 공연장에서 노래할테니 꼭 와달라는 그 말이.

 

누가 한 광고멘트 였더라,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 김장훈

 

이 날은 마침 미국으로 떠나는 김장훈에게 들국화 형들이 해주는 송별무대. 걱정말아요 그대를 같이 부르며 눈물을 흘리더라.

 

사실 팬이라고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는데, "새로운 꿈을 꾸겠다"며 소리지르는 김장훈을 보고 있자니, 그간 한 구시렁이 되려 미안해지더라. (며칠 후 두드림을 보고서는 그런 맘이 좀 누그러들기도 했다...하여간.)  저렇게 노래를 부르고 새로운 꿈을 외치는 가수에게 무슨 말이 얼마가 더 필요해서. 내가 살아온만치 노래한 그에게 노래가 어쩌니 하는 말은 또 얼마나 오만할까. 그저 좋아하고 듣고 보면 될 것을. 뭐, 그런 마음이 들게하는 노래.

 

# 들국화에 대한 부채

 

그날 아침 김장훈은 자기 SNS에 들국화 공연 출연 소식을 알렸고, 김장훈 팬들이 공연장 곳곳을 찾았다. 김장훈은 "인권이 형"에게 생색을 있는대로 내면서 자기 팬들을 들국화에게 분양하겠다고.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김장훈이 팬들을 들국화에게 소개하는 것은 분양이 아니라 상환이겠다. 들국화가 다져놓은 땅에서 노래부르고 들으며 살아온 이들이 그 열매이거나 줄기와 같은 김장훈에게 찾아들었고 들국화를 토대로 자란 김장훈이 다시 어딘가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그러니까 김장훈은, 아니 그보다 거의 대부분의 노래부르는 이들은 들국화에게 종자를 분양받아 자기의 꽃과 열매를 틔웠고 그걸 다시 들국화에게 돌려주는 것은 분양이 아니라 상환이겠다고.

 

그렇게 우리들은,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거나 듣는 우리들은 모두 들국화에 대한 얼마간의 부채는 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들국화가 더욱 위대한 이유는 그 이자붙은 상환액으로 과거를 보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자를 만들기 위해 다시 새로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있다는 것.

 

들국화, 그들은 그렇게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받았을 종자를 상환하며 그들을 지나 또 걷고 있다.

내 노래를 아냐고,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덧,

들국화를 보면 비틀즈가 생각난다. 들국화 1집앨범 커버는 묘하게 비틀즈 앨범을 오마쥬한 것처럼 보이기도.

언젠가 런던시민 수만명이 헤이쥬드를 떼창하는 장면을 봤다. 수상이고 축구선수고 가리지 않고 죄다 헤이쥬드를 외치더라. 언젠가 시청광장에 모인 수만명의 한국사람들이 그들의 노래를 떼창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 노래는 과거의 그것이 아니어도 좋겠다. 그들은 언제건 현역이니 아직 그들의 최고 히트곡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에 대한 이 두근두근한 팬심이 몇 배쯤은 증폭되겠다.

 

 

 

 

보통사람들의 삶으로 엮어가는 일상의 역사 - 웰랑, 뜨레이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왕의 이름을 외는 일이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은 선조 때, 삼국통일은 문무왕이. 하는 식이다. 역사책은 임진왜란 당시 남산 밑에 살던 개똥이네 집이 어떤 봉변을 당했는지, 삼국통일로 인해 의주 살던 말똥이가 어떤 경위로 당나라 사람이 돼버렸는지 같은 사연은 기록하지 않는다.

 

80년 5월의 광주나 70년대의 캄보디아 내전도 그렇게 기록됐다. 역사책은 전두환 신구부의 정치적 의도나 크메르 루즈와 친미 정권의 대립을 ‘기록’했다. 그러나 광주와 캄보디아의 ‘기억’은 어떻게 남았을까. 80년 광주의 주민들은 새로운 군부가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의 요직을 차지해 갔는지 일일이 꿰뚫고 있지 않았지만 국가가 어떻게 사람들을 억압했고 그들은 이에 어떤 방식으로 저항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농부들은 크메르 루즈와 친미정권 사이의 국제적 역학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있지는 않아도 전쟁과 폭력이 새긴 상흔이 자신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

 

역사란 그렇다, 역사책이 아니라. 역사란 결국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이 켜켜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 내란, 쿠데타, 학살, 기타 등등. 역사교과서의 굵은 글씨들은 그 일상의 축적이 낳은 효과이거나 혹은 성과일 뿐.

 

김태일 감독은 2010년, 다큐멘터리 ‘오월애’를 통해 80년에도,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잡아냈다. 거창하고 위대한 역사로서의 광주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날들의 광주를 살갗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2년 후 감독은 다시 ‘살갗에 남은 기억’을 더듬으려 캄보디아로 향했다. <웰랑 뜨레이>

 

# 기록되지 않은, 그러나 실체에 가장 가까운

 

김태일 감독은 ‘오월애’를 시작으로 ‘세계 민중사 10부작’을 기획하고 있다. <웰랑 뜨레이>는 10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김태일 감독이 규정하는 민중사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민중’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만들어낸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역사가 의미하는 것이 시대가 움직여온 기록이라면 시대를 움직여온 ‘민중’이야말로 역사의 주체일 것이다. ‘민중’이나 ‘주체’라는 다소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결국 할머니가 어린 손주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와 할아버지의 패인 주름에 간직된 사연들이 곧 역사라는 가장 근원적인 인식이다.

 

김태일 감독은 내전 이후 캄보디아 민중들의 삶을 담아내고자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캄보디아 프농족 뜨레이 가족을 찾는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캄보디아 내전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보인다. 그보다는 차라리 뜨레이 가족의 일상을 묵묵히 담아내거나 그들과 함께 하려는 감독 가족(이후부터는 김태일 가족의 아들 이름을 따 ‘상구네’로 통칭)의 고역을 담아내려 애쓴다.

 

카메라는 영화 내내 뜨레이 가족의 일상, 고된 노동을 따라간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상구네 가족도 뜨레이 가족의 고된 노동에 동참한다. 카메라는 (혹은 카메라를 들쳐 맨 상구네 가족은) 뜨레이 가족의 일상적 노동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힘겨운지, 그 힘겨운 노동에도 뜨레이 가족이 얼마나 궁핍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럼에도 이들이 어떻게 자연과 땅과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는지를 목격하고 함께한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내전 이후 캄보디아 민중의 삶을 재조명 한다’는 기획의도가 무색할 지경이다. (과장을 조금 포함해)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의 작법을 따르자면, 사전 취재를 통해 내전을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일상을 ‘적당히’ 촬영한 후, 내전을 회고하는 그들의 인터뷰를 감동적으로 ‘뽑아내’고 내전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그럴듯한’ 내레이션을 덧붙여 편집한다. 당시 사건의 자료영상 따위가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웰랑 뜨레이>는 이 일반적인 작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건 아마 ‘민중사’를 이해하는 감독의 인식 때문일 테다.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김태일 감독은 “민중의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이 ‘역사적 사건’과 뗄 수 없는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록에 담기지 않은 이들, 역사적 사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금 역사를 구성하고 싶은”의도다.

 

뜨레이 가족은 상구네가 처음 찾아왔을 때 상구네를 경계한다. 상구네가 예수교를 전도하러 온 선교사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뜨레이 가족은 내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도 기꺼워하지 않는다. 자급자족이 점차 힘겨워지지만 벼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식민지 시절의 선교인들에게, 내전 당시의 양측 군인들에게, 독재정권의 권력에, 신자유주의 파고에 이들이 위축되고 배제돼온 역사를 증언하는 일들이다.

 

# 그들과 직면하기

 

<웰랑 뜨레이>가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들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상구네 가족의 적극성에 있다. 다수의 다큐들이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장 루슈 이후 작가가 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상황을 촉발하는 시네마베리테가 다큐의 제작방식으로 주창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많은 다큐는 ‘관찰자’로서의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성’과 ‘순수성’을 담보하려 한다.

 

그러나 <웰랑 뜨레이>는 관찰자의 위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영화의 반절은 차라리 영화 스태프인 상구네 가족을 담고 있다. (<웰랑 뜨레이>의 촬영감독과 조연출은 김태일 감독의 부인인 주로미 감독, 촬영보조는 김 감독의 아들인 김상구 군이다. 김 감독은 “오래도록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는 방식은 가족과 함께 ‘가내수공업’방식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외부인’이자 영화 스텝으로서 뜨레이 가족을 바라보는 상구네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프농족 뜨레이 가족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상구네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 이는 상황을 촉발하고 개입하긴 하나 여전히 관찰자의 지점에 머무르는 시네마베리테에서도 한 걸음 더 나가는 방식이다.

 

이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작업방식과 시선은 감독이 그려내고 싶었던 민중사, 즉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다 실체적으로 잡아낸다. 피상적이고 의례적인 말들을 카메라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직접 살갗을 맞댐으로 그들의 이야기 (He’s Story)를 몸에 직접 기억하는 일. 이를 통해 <웰랑 뜨레이>는 역사와 시대를 사건으로 분절시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역사와 이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의 실재하는 삶을 직면한다.

 

# “웰랑(안녕), 상구네”

 

캄보디아에 갔을 때 중학교 1학년이던 상구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다. 김태일 감독은 캄보디아에서 보낸 6개월(김태일, 주로미 감독은 8개월)이 아이들에게 변화를 주었다 말했다. 캄보디아를 다녀온 상구는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이 더욱 성숙해지고 자립심이 강해졌다고 한다.

 

영화 속 프농족은 가난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삶에 자부심을 갖고 살며 노동의 가치를 존중한다. 땅을 사랑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긴다. 자본이 침식해 땅이 외지인에 팔려나가고 삶의 터전이 관광지로 변해가며 흉작이 이어져도 이들은 새로이 벼이삭을 심는다.

 

김태일 감독은 아이들에게 이런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경쟁과 승리만을 강요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이 알려주지 못하는 것들을 프농족과 함께한 일상에서, 그들의 역사와 노동에서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김태일 감독은 민중사 3부인 팔레스타인도 가족들과 함께 찾을 예정이다. (영화 속 중학생 상구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며 아버지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지만, 지금은 다행히 “다음 번 촬영도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세계사적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아이들이 앞으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더 잘 고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김태일 감독의 민중사 10부작은 앞으로도 계속 고통 받았고 소외됐고 희생당하면서 묵묵히 역사를 쌓아올린 민중들을 찾아 나선다. 역사책을 기록하는 높은 곳의 펜이 아니라 노동하고 울고 때론 웃으며 그럼에도 삶을 지속시키는 낮은 곳 사람들의 호미질에 주목할 것이다. 거기에는 점차 더욱 성숙해질 그의 아이들과 아내가 늘 함께 하며 감독 스스로도 10부작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로 성장할 것이다.

 

완성까지 20년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의 상구네 가족이 기대된다. 세계 곳곳 민중들의 삶을 지켜보고 관계 맺으며 성장할 아이들도, 그 아이들의 성장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더욱 성숙해질 감독 부부도. 그러니까 <웰랑 뜨레이>는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도 같다.

 

세계와, 역사와, 삶과 그러니까 결국 모든 살아가는 일과 나누는 이야기들의 시작인사.

“웰랑(안녕), 상구네”




요즘 본 영화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의 영화들은 갈수록 '이야기'에 천착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시간이나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일은 예사고(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날짜나 계절, 시간의 방향을 먼저 파악하려고 신경쓰게된다.) 어느 결에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어디까지가 꿈인지도 분간키 어렵다. 아무래도 이야기보다는 '캐릭터' 그 자체에 집중하게되는데, 특별한 대사나 콘티없이 캐릭터와 상황을 주고 영화를 완성하는 작업방식도 이를 구현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해원'에서도 그녀가 꾼 꿈이 어디까지인지, 그녀가 언급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은 집요하게 반복되는 구조 혹은 등장인물의 '일관성'에 있겠다. 해원은 유부남을 만나는 언니를 미쳤다고 표현하면서 정작 자신은 유부남을 사랑하거나.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며 이선균의속물근성을 비난하는 동시에 자신은 결혼상대로 적합한 미국교수에 호감을 표현한다. 말인즉슨, 해원은 누구의 딸도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원하지만 결국 누구의 딸로밖에 살 수 없다. 이런 이야기는 카메오 출연한 제인버킨과의 에피소드나 영화시작에 등장한 엄마와의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이 반복되는 구조의 에피소드들이 꿈인지 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원이 결국 누구의 딸로 존재할 수밖엔 없다는 이야기를 구축하고 있는 것.


어느 드라마나 영화의 조연으로 눈에 익은 정은채는 홍상수가 새로 발견한 여배우가 되는 듯. 정유미나 송선미에 이은. 옥희의 영화즈음부터 등장한 이선균은 그동안 홍상수 영화에 등장한 모든 남자배우를 통틀어 가장 잘생겼지만 아무래도 홍상수 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는 유준상인듯. 안느송 부를 때부터 알아봤다니.


덧1. 무엇보다 이번 영화를 보고서도 술을 마셨다. 영시 홍상수 영화는 술부르는 영화. 참이슬은 뭐하나 홍상수 섭외 안하고. 홍상수가 참이슬 광고만드면 매출량 급증을 장담합니다. 진심임.


덧2. 서촌일대, 그러니까 사직동 그 가게를 위시한 그 일대는 요즘의 내 워너비 플레이스. 사직동 그 가게 엄청 좋다니까... 주변의 맛집 리스트도 하나 둘 씩 쌓여가고 있슴니다..ㅎ






신세계


박훈정 감독이 각본을 썼던 부당거래나 악마를 보았다, 혹은 장편 데뷔작인 혈투는 모두 신선하고 새로운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이미 뻔한 내용을 어떻게 '재미있게'(재미있게는 치밀하다와도 다르다) 짜맞추느냐에 방점을 찍었던 작품들. 신세계는 노골적으로 무간도의 설정을 가져오고 저수지의 개, 흑사회, 심지어 대부까지 온갖 조폭영화의 재미있는 점들을 다 끌어다가 한국이라는 공간에 우겨넣는 영화다. 대부분 이런 경우엔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돼서 눈뜨고 못볼 두시간을 만들기가 십상이지만 차라리 이 노골적인 '참조'(표절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까지 가져오면)는 재미를 쌓아내는데 적절한 역할을 한다. 


감독은 감독이 재밌게 보고 자란 느와르 영화들을 켜켜이 쌓아내면서 '장르영화' 자체에 대한 오마쥬를 하고 싶었던 듯 보인다. 당연히 양복입고 간지나는 형들이 나와서 쌈박질하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신세계는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황정민과 최민식의 좋은 연기는 이런 장르영화의 매력을 한껏 증폭시킨다. 그리고 나는 이런 느와르 매우 좋아한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86년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2002년 무간도까지 발표된 홍콩느와르 전편을 3박4일간 훑은 경력도 있는 남자임.)


말한 것처럼 아이디어가 번뜩거리거나 기가막힌 액션씬, 입체적인 캐릭터가 돋보이는 영화는 아니다. (기껏해야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이 가장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일 수 있는데 캐릭터를 십분 살려내는 서사구조도 아니고 이를 받쳐주는 주변인물도 없다) 치밀하고 긴박감 넘치는 새로운 느와르를 기대했다면 빵점짜리 영화, 진부하더라도 간지나는 느와르 영화를 기대했다면 90점 이상. 


근데 그냥 이 영화는 원래 진부하더라도 간지나는 영화.가 목표인 영화다.






스토커


박찬욱의 영화는 대체로 얄밉다. 이 똑똑한 영화광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미장센으로 가득차 있다. 거기다 늘상 고전영화들을 탐닉하며 얻어온 고풍스런 장치들이 영화 곳곳에. (예전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이 늘어놓은 고전영화 예찬이 아직도 귀에 웅웅거린다.) 이건 질시, 경외, 경탄 같은 감정들이 복합된 것일텐데 그래서 박찬욱의 영화들을 마냥 고운 눈으로 봐주기 싫어진다. 뭐라도 하나 흠집내고 싶어. 아마 맨날 전교 1등만하고 싸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긴데다 밴드부 보컬에 학생회장까지 하는 인기많은 선배가 사실은 게이라더라는 헛소문을 내는 마음 같은 것. 일까..ㅋ


스토커는 대단한 주제의식 같은 건 없다. 그보다는 숙녀가 되기 직전의 소녀. 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존재에 대한 탐구, 집착, 관찰. 근친상간이라는 관계설정과 살인으로 만들어진 상황설정까지. 성적욕구를 자극하는 모든 요소가 총망라한. 이 미친것같은 상황과 관계들은 그래서 더욱 환상적이다. 심지어 소녀 인디아를 연기한 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엄청 예쁘다. 니콜 키드먼도 당연히 예쁘고 섹시하다. 모든 박찬욱 영화에서 그렇듯 배경이 되는 공간은 (박찬욱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색'이라는 생각도 한다 올드보이 벽지같은.) 몽환적이고 무섭다. 집이 이렇게까지 낮설고 두려운 곳이 되다니.


영화의 첫대사, 그러니까 구두는 삼촌에게 벨트는 아버지에게, 블라우스는 어머니에게 받았다는 대사는 소녀가 아직 완전히 독립적인 숙녀가 되지는 못했다는 뜻이겠지만, 그 소녀는 엽총을 들고 보안관을 쏴죽인다. 아마 이게 이 영화의 줄거리.겠지.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박찬욱의 연출, 여배우들의 자태, 각본가의 유명세. (각본은 석호필로 유명한 엔트워스 밀러가 썼다고). 올 해들어 본 가장 섹시한 영화지만, 노출씬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엉뚱한 마음품고 극장으로 달려갈 뭇 남성들에게 미리 밝혀둠미다.






가족의 나라


디어평양을 만든 양영희 감독의 첫 극영화다. 디어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봤다면 이 영화가 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겠고, 그래서 영화의 말미에 감독의 자전적 캐릭터인 리애에게 성호가 해주는 "넌 누구의 인생도 아닌 너의 인생을 살라" 는 말의 울림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전작 다큐들에서도 그런 것처럼 양영희 감독은 가족을 갈라놓은 북송사업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그보다는 이념같은 모호한 것들이 강요하는 것들에 반감을 표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영화에서 가장 적대적인 캐릭터인 '양 동지' 역시 자곧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거나 그 양 동지가 "그런 나라에 나도 당신 오빠도 살고 있다"는 대사를 토해내면서 시대를 향한 시선이 적대보다는 연민에 가까워진다.


다큐 영화를 찍어온 감독인 탓인지, 영화는 거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지고 호흡도 차분하다. 감정의 격변이나 클라이막스도 없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더 큰 감정의 파고를 불러일으킨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그건 감독의 의도 여부와 상관 없이 원래 그런 것인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 사실은 가장 격렬한 말이다. 






굿바이 홈런


잘만들고 좋은 다큐는 아니다. 결국 생활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야구 못하는 고교야구 선수들의 적막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지도 못했고, "그런 건 난 몰라요" 꿈만 꾸는 마운드의 낭만만 파고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어정쩡한 포지션. 그게 참.


야구를 미친듯이 좋아하지도 않지만 안타를 치고싶고, 야구를 당장이라도 그만두고싶지만 이거 하길 잘했다고 말하는 그 열일곱살들. 남들보다 일찍 현실을 알아버린 피로함과 남들보다 더 큰 순수와 열정을 품고있는 열일곱의 앳된 얼굴들. 그 어정쩡한 처지의 아이들을 그대로 담고있는 것처럼.


사실, 이런 감수성이 고팠다. 질질짜고 찌질해도 괜찮을 감수성. 그래서 얘네가 안타치고 1루베이스를 밟을 때마다 울컥울컥.ㅋ






남자사용설명서


정말 시간과 문화상품권이 남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을 제목이었지만 말이지.


제목을 보며 떠올렸던 걱정은 좀 쓸데없는 걱정(어떤 걱정인지는 제목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해보자)이었고 생각보다는 건강한 영화였다. 본격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었고 적당한 성과도 있다. 웃기다는 말이다. 영화속 이원종처럼 아방가르드하고 유치한 웃음을 웃음으로 만들거나 뒤틀줄 아는. 


온갖 처세와 '여성'에 대한 불쾌한 선입견이 판을치는 현실에 대한 뒤틀린 숟가락 얹기. 쯤일까. 


이시영은 단연 돋보이는. 이 언니 권투 시작할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한다면 하는 언니임. 다만, '흔녀'로 등장하기엔 너무 예쁘다는게 흠. 오정세는 정말 엄청 찌질해서 탑스타처럼 보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뭐 탑스타라고 찌질하지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뭐가 다르겠어. 박영규나 이원종이 좀 거슬렸지만, 뭐 그건 그런대로 넘어가고. 


그러나 역시 중요한건 제목짓기와 포스터 사진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천하장사 마돈나, 김씨표류기에 이은 '제목에 속았어' 시리즈 3탄. 쯤.. 남자사용설명서가 뭐람.



요즘 본 영화들 단상



- 베를린
류승완은 액션영화의 극의를 향해가고 있구나. 조금 뻔한 설정과 스토리지만 그건 나쁜 의미라기보다는 차라리 첩보액션 장르영화의 공식과 매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 

무엇보다 액션이 발군. 많이 얘기하는 것처럼 본 시리즈가 생각난다. 정두홍이 누구보다 신났겠더라. 

캐릭터의 혜택을 가장 받은 배우는 류승범, 가장 눈길이 가는 배우는 전지현. 외모때문이 아님. 

전지현은 좋은 배우가 돼가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 

- 남쪽으로 튀어
임순례의 연출과 김윤석의 연기력이야 두 말 필요없으니 재미있는 영화가 나오는건 당연하겠다. 그러나 김윤석이 분한 주인공은 그다지 흥미롭지도 새롭지도 않은 그냥 왕년의 '한국' 운동권이고, 다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 아나키즘이 저항보다는 '억지'로 소비되는 모양. 최해갑이라는 인물은 모든 권위에서 탈주하고 싶어한다기 보다는 그냥 갑질하는 꼰대로 보여. 때문에 와이키키나 세친구에서 보였던 흥미나 아릿함도 없다. 

조금 더 얘기하자면 사실 영화가 하고싶었던 얘기가 뭔지 잘 모르겠는. 


신경쓰지 않으려해도 제작과정에서 발생한 마찰이 기억나게 되더라. 임순례 감독이 어느 곳에선가 "다 만들어진영화에 감독이름이 필요해 이름만 빌려준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소만. 믿거나 말거나. (난 임순례 감독이 아무리 화가 많이 나도 공식석상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할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자기이름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성에차지 않는 것만큼 화나는 일이 어디있을까.) 


- 더 헌트
지혜로워야 한다거나 그럴 수 있다는 강박이 인간을 얼마나 어리석게 만드는가. 혹은 인간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어설픈 정신분석 상식을 들먹이며 "충격때문에 네 무의식이 기억을 지운거야"라고 말할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객석에선 실제로 한숨을 내쉬거나 신음을 뱉는 관객들이) 그건 실수라기 보다는 게으름이다. 원하는대로 사건을 해결해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하는. 그건 분노보다는 차라리 즐거움이었다. 꼼짝못할 곳까지 사냥감을 몰아놓고 정확히 조준해 총을 쏘아버리는. 거기서 이성의 역할은 없다. 

마지막까지도 이성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사실 그게 실체기도 하고. 

메스미켈센이 멋있다. 고독한 중년 꽃미남. 남우주연상은 아무나 받는게 아니다.

-우묵배미의 사랑
"아, 사는거 참"


어느 누구든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해야하고, 마음을 기대야하고, 자기 존재를 가져야한다. 

그 형태가 불륜이거나 섹스이거나 집착이거나 이도저도 아니거나. 어쨌든 그렇게 살아야한다. 


90년이라는 기가막힌 시대적 배경은 그렇게 살아갈 마을 혹은 마음을 침식당한 시절이다. 20년도 더 지난 영화의 여성들이 갖는 그 수동적인 태도와 남성들의 성폭력적인 모습이 불편하다가 이내 "그게 사실인걸". 저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렇게들 자기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하려고 한다. 다만 존재감을 지워버리는 시대.의 시작. 


사실 영화 얘기를 이렇게 주절거리는건 다시 본 이 영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시골도 도시도 아닌 어느 '주변도시'. 그곳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도 뜨내기도 아닌 주변인들. 그건 사실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보이는 이들. 그 우묵배미와 우묵배미의 사랑들은 지금도 여전히, 어쩌면 앞으로도.

장선우의 영화들은 (그러니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 '거짓말' 같은) 사춘기때 친구들과 몰래보며 키득거리던 야한영화.라는 이미지였는데. '접속'이 나오기 전까지 90년대의 한국영화들은 참 볼품없다고 생각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올 해에는 장선우와 배창호, 이명세를 다시 찾아봐야 하겠다.

덧,
이 모든 영화들이 '문라이즈 킹덤'의 매진으로 인한 예기치 못한 관람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오늘은 기어이 문라이즈 킹덤을 봐야겠다. 효도르와 김보성의 '영웅'도 꼭 영화관에서 봐야지.ㅋ

2012 올 해의 음반



올 해도 어김없이 세금결산 대신 음반 결산.

돌이켜보니 작년에 비해서 기억하고 싶은 음반이 많지않다.

그건 아무래도 작년에 비해 음악듣고 흥아흥아 놀아재낄 시간이 적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작년에 비해 좋은 음반이 상대적으로 좀 적었던 탓인 것 같기도. 여튼.

언제나 그랬듯 내맘대로. 순위도, 근거도, 독자도, 상관도 없는 음반 결산 시작.



# 강허달림 - 넌 나의 바다





아마 지금 한국에서 한국말로 노래하는 여성보컬 중에는 이 언니가 1등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매끄러운 은쟁반에 굴러가는 옥구슬만 먹고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 같은 게 좋을 때도 가끔 있지만,

이렇게 묵직한 소리가 날아와 박히는 순간이 '진짜'다. 그걸 진심이니 하는 조악한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해서 무척 안타깝다. 그 눈물나게 위로되고 아프고 씩씩한 소리들에 어울리는 더욱 좋은 말들이 있을텐데.


이 2집앨범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인 1집앨범과 '독백'Ep만큼 달고 살지는 않았다. 예전에도 한 번 했던 말이지만, 같이 찌질거려주던 누이에서 이제 궁둥이 툭툭 두들겨주는 막내이모로 포지션을 바꾼 것 같아서. 아직 찌질한 누나가 더 고픈가보다. 여전히 전작들이 더 좋긴하다는 말이다. 신보보다 과거의 작품이 좋다는 말만큼 예술가에게 실례되는 말이 또 있겠냐만, 그건 전적으로 내 취향의, 마음의 문제. 


'꼭 안아 주세요', '아무도 모르고', '그리되기를' 같은 트랙은 강허달림이 얼마나 좋은 보컬이며 창작자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넘버라고 생각한다.  '멈춰버린 세상'은 용산참사를 노래한 트랙이다. 본인에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노래하는 가수라거나 페미니스트 가수라는 수식이 붙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반기지 않는 것 같지만, 난 좋은 노래는 좋은 눈과 마음.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강허달림이 짱이란 뜻이다.ㅋ 


여름, 두 개의 문이 개봉하고 다시 열린 용산참사 추모집회에서 조용히 뒷켠에 섰다 인터뷰도 발언도 없이 가버린 그녀를 목격한 건 내 자랑.ㅋ



# 강아솔 - 당신이 놓고왔던 짧은 기억




기타치면서 고운 목소리로 노래부르는 (좀 흔한) 여성 싱어송라이터.일 것 같았다.

이름도 그렇잖아, 아솔. 적당히 곱고 예쁜 목소리로 샤랄라한 멜로디를 부르다 외모가 화제가 돼서 여신으로 불리게 될. 그런. 뭐 그러다 어느 밴드의 누구랑 연애한다더라. 그러다 라디오에도 출연한다더라. 뭐 그런. 좀 뻔한.


그런 얘기들에 지겨워하고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되는 목소리와 멜로디들이 쏟아지는데, 대단한 음악적 성취라도 있는 양 포장'하는' 레이블이나 방송들이. 그래서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소개되는 이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사실 '여성' 싱어송라이터는 또 뭐야)


그런데, 강아솔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건 뭐. 제가 완전히 잘못했습니다.

"4년 전 5월" 하고 부르는 그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 

"이 노래가 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오"하는 마음 씀씀이.


제 2의 OO 같은 말들이 아까운. 오래동안 노래부르고 듣고싶은 가수의 탄생.


(와우북페에 강아솔이 출연해서 꾸역꾸역 보러갔는데, 장래희망은 래퍼라고했다. 헐 대박. 근데 랩도 잘해. 이건 뭐. 못하는게 뭐임. 근데 얼굴도 예뻐. 엉엉엉)



# 정태춘 박은옥 -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선언의 결기나 혁명에의 꿈. 같은 것들이 민중가요라면 정태춘의 노래는 민중가요가 아니다.

다만 나약한 삶에 대한 위무, 미욱한 인간에 대한 응시와 절망. 역시 민중가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정태춘이야말로 민중가수다. 그런데 사실 이런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팔뚝질과 격렬한 언어만이 시대를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시내버스와 고속전철, 서울역 이 씨에 대한 회한은 그대로 시대다. 마찬가지로 하룻밤 사랑이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같은 노래들도 시대의 반영이다. 민중가요라는 말 자체는 얼마나 어이없고 부질없는가.


정태춘과 박은옥의 노래들은 관조하고 위무하며 동시에 절망하거나 연민한다. 이건 어느 날들처럼 노래를 불러 분노하고 선동하고 다짐하는 대신 차라리 증언하고 있다. 시대를, 세상을, 사람을. 그래서 그들의 노래는 위로고 응원이다. 절망해주기 때문에 함게 희망일 수 있다는 메시지기 때문이다. 어설픈 낙관이 아니라 함께 절망해주는. 그걸 그대로 지켜보고있다고 증언해주는. 정태춘의 목소리는 외롭지만 감사하다.


이런 노래가 다시 불리워지지 않을까 무섭다.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아무도 손 흔들지 않는 등대 아래, 하얀 돛배 닻을 올리고 있을까"



# 여러 명 - Reborn 산울림




2011년의 들국화 트리뷰트에 이어, 2012년에는 산울림.

(2013년에는 어떤 전설에 대한 트리뷰트가 이어질 것인가ㅋ)


들국화가 놓쳐버린 시기에 존재했던 전설.의 위용이라면,(재결성해 더욱 위대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지만 그것과 이건 또 다른 문제고 음악) 산울림은 꾸준히 지금껏 오래도록 이어오는 전설. 그러니까 들국화가 비틀즈 같았다면 산울림은 롤링스톤즈 같았달까.ㅋ (김창익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산울림이라는 이름의 밴드는 없어졌지만, 김창완밴드는 그대로 산울림의 궤를 이어가는 또 다른)


여하간, 산울림의 노래는 그대로 '한 마디 말이 노래가되고 시가되는'.


NY물고기가 부른 '독백'이 가장먼저 귀에 들어오는 트랙.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르는 '조금만 기다려요'는 그대로 너무 산울림스러워서.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무지개'나 킹스턴 루디스카의 '가지마오'는 그대로 자기들의 오리지널 넘버라고 해도 믿을만큼 신선하고 재미있는 헌정. 이진욱의 '나 어떡해'도 마찬가지. '나 어떡해'는 이렇게 변할 수 있을 줄 정말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창완밴드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산울림의 노래 중에 가장 애정하는 이 노래를 김창완밴드가이렇게 기깔나게 연주하는 것은 이 앨범이 지난 시대에 대한 존경심 따위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위대한 음악인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한다. 그렇게 산울림은 지속된다. 그래서 차라리 Reborn은 적당한 이름이 아닐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기는. 아직 그들은 죽지 않았다.



# 3호선 버터플라이 - Dreamtalk




3호선 버터플라이를 처음들은 건 2003년, <네 멋대로 해라>에 삽입된 '나비의 꿈'.


남상아의 보컬이나 성기완의 곡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사실 남상아같은 목소리를 갖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전생에 나라를 한 100번 쯤은 구했었나봐. 허클 팬들이 괜히 이소영이랑 비교를 하면서 찌질거렸던게 아닌거다. (음.. 작년 이맘때 허클 앨범 얘길 하면서 다시는 비교를 안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여하간 더욱 좋아진 것을 보면 아마 그게 완성은 아니었나보다. 멜로디는 더욱 정겹고 남상아의 보컬은 더 적절하다. '달이 뜨지않고 니가 뜨는 밤'처럼 더 슬프거나 '헤어지는 바로 오늘'처럼 더 묵직하다.


연주력이 어쩌고 하는 말은 내가 할 수 있을만한 얘기가 아니니 차치하고 다만 이런저런 노이즈를 가장한 사운드들이 매우 흥미롭게 반복돼 더 좋았다는 말 정도만. 사운드와 소음을 가르는 기준, 그게 연주력이겠지. 아마. 이런저런 의미부여 없이 가장 좋은 음악을 가장 적절히 해내는 밴드.라고 하면 올해는 단연 아마 이 밴드가 아닐까.



# 박지윤 - 나무가 되는 꿈





박지윤의 음악을 이야기함에 있어 늘 언급되는 JYP나 성인식의 이미지들은 이제 그녀에 대한 무례일 것이다. (아마)

그 시절의 아픔을 딛고 이제는 성숙한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난. 같은 표현들로 치부하기에 박지윤은 훌륭한 보컬이고 이 앨범은 그 훌륭한 뮤지션의 수작이다.


거의 가성을 사용하지만 그 소리가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난 가성을 쓰는 노래들이 대부분 버겁다. 그래서 조관우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잘) 그녀의 음색은 기타뜯는 소리, 올갠소리와 무척 잘 어울린다. 특별한 고조 없이 무난하고 평이하게 이어지는 멜로디도 좋다. 


'좋은 친구들'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보인 지난 앨범과 달리 이번 앨범은 그녀의 심지에 좋은 친구들이 얹어진 듯한 느낌이다. 마치 이상은이 담다디를 부르고 춤을 추던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다 이제는 그 시절을 말하며 탬버린 들고 담다디를 불러주는 것 처럼, 그녀도 어느 날인가 기타치며 성인식을 불러줄 수 있을 것 같다.



#  여러 명 - 블루스, The 블루스

 



블루스 앨범. 같은게 있을리 없다. 블루스라고 말하면 R&B를 떠올리는 이 땅에 말이다.

기껏해야 신촌블루스 정도가 대중들이 기억하는 블루스일까.


블루스는 재즈와 로큰롤의 기반이 되는 음악이고 좋은 로큰롤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습 공부해야 하는 음악. 이라고 음악 교과서 같은데 보면 나온다. 지난 시즌 탑밴드에서 신대철은 자기 제자들에게 블루스를 연주하게하는 과제를 주기도 했었다. 거기서 애들한테 근본없다고 쿠사리 엄청 주더라만. (그 신대철의 아버지 신중현이 한국 블루스 음악의 거두.라고 볼 수 있겠다. 미군부대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신중현의 음악은 블루스 기반이다)


여하간 이 블루스 컴필레이션은 그런면에서 신기하기도 소중하기도 한 음반이다. 강허달림이나 로다운, 림지훈 같이 꾸준히 블루스 연주를 지속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한번에 듣기가 어디 쉬운가. 거기에 조이엄이나 강산에, 깜악귀 같은 이들까지도. 


더 블루스엔 갖가지 블루스가 다 들었다. 엄인호의 신촌블루스와 채수영의 저스트블루스에서 노래부르던 강허달림의 '그러면 돼'는 그야말로 한국의 블루스다. (강허달림의 1집 앨범엔 엄인호와 채수영의 연주가 몽창 들어있다. 그야말로 한국의 블루스 디바) 제일 좋아하는 곡은 김대중의 '300/30'과 림지훈의 '좋아서 우는 겁니다'.


'300/30'은 300에 30짜리 월세를 구하러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는 청년빈곤층의 이야기. 옥탑방에 앉아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 같다고 얼버무리는 해학이 좋다. 사실 블루스야말로 흑인들의 애환을 노래하던 음악 아닌가.ㅋ

'좋아서 우는 겁니다'는 마치 60년대 대포집에 젓가락 두들기는 취객의 연주같다. 블루스가 부루스로 발음되며 불리던 노래처럼. 


여튼, 이런 음반이 발매되는 것은 이제 좀 더 많은 노래들이 더 쉽게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한다. 소모는 소리 정말이지 너무 지겹잖아.


# 김장훈 - Adieu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가수는 김장훈이다. 

난 정말로 김장훈이 한국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보컬 3위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지난가을, 싸이와의 시덥잖은 소동과 SNS를 통해 보여지는 그의 창피한 모습에 이 앨범이 가려지는게 좀 안타깝다.

실제로 그의 노래는 한동안 별로였다. 8단고음이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말을 하고 자기변명적 스토리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태도나 별로 아름다워보이지 않는 기부와 선행, 독도. 그놈의 독도. 그런 것들이 그의노래에 전부 반영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앨범을 내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하게(?) 좋았던 그의 이번 앨범이 안타깝다. (물론 몇몇 트랙은 그 맘에 안드는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아니꼽다) 어느 시점부터 히트곡도 딱히 없고, 공연은 볼거리 이벤트용으로 취급받았던 그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독도니 기부천사니 하는 말로 칭찬이나 받는 것이 만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노래가 슬프지 않아 떠난다던 그 절박함은 어디로 갔나. 싶었던.


이번 앨범에 실린 곡들은 대부분 좋다. '그림자'나 '너를 모른다'같은 곡들은 그의 슬픈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좋은 노래다. 이름이 아직 생소한 작곡가들의 곡이지만 좋은 곡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이들인 듯 했다. 'Someday'나 'Way You Are'같은 빠른 곡들도. 적절한 연출로 공연에서 좋은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 사랑이 뭔데'같은 곡은 대중적인 히트를 노릴만한 곡이라는 생각도. 어느 히트한 드라마의 OST같은 느낌도 나면서 말이다. 아.. 말 할 수록 아깝고 안타까워.


결국 지금 김장훈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형. 김장훈에게 스마트폰을 뺐고 다시 '노래만불렀지'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형님. 인권이 형은 요즘 바쁘신가.(말이 나와서 말인데, 랩버전으로 다시 실린 노래만 불렀지는 그게 뭔가. 그 구구절절한 자기변명과 느끼한 자기연민. 내 노래만 불렀지를 돌려줘)



#  No Control - No Control




인디 펑크 락밴드란 이런 것이다.

그들은 자립음악생산가협동조합의 멤버인데, 이 조합의 대표로 회기동단편선과 무키무키만만수가 거론되는 것에 반대한다. 최고는 단연 이들이다. 


'사장님 개새끼'같은 넘버가 비교적 가장 유명한데, 이들의 음악은 이 곡으로 대표되는 역동성이 있다. 장르의 경계나 연주의 숙련도 같은거야 내가 말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넘어가고 시원하고 통쾌한 거칠고 날것같은 소리. 조선펑크를 부르짖던 노브레인이 돌아온 것 같았다.(지금의 그 완전 별로 노브레인을 말하는게 아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게 바로 '인디(펜던트)'다.



+

그 밖에도 윤영배나 로다운, 9와 숫자들, (외국인으로는 유일한)글렌 한사드 같은 앨범들이 좋았지만 지쳐서 더 못쓰겠다. 패스. 


++

콜드플레이, 킨, 시규어 로스 심지어 스매싱펌킨스까지 엄청난 팀들이 앨범을 냈지만 패스. 위대한 밴드는 언제나 기대를 넘어야 하니까요. 시규어로스는 애매하고 아깝고 좋았지만.. 음 좋아하니까 탈락. 같은애정어린 마음이라능..엉엉엉







강아솔 - 그대에게



최후의 제국, 막다른 자본주의의 경고

<최후의 제국>, 막다른 자본주의의 경고

- 이미 지나가버린,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1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 선거가 16일 남았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화두는 역시 ‘경제민주화’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조차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한다. 민주통합당은 스스로를 ‘서민’정당이라고 변설한다. 문재인 후보는 “경제력집중의 폐해를 시정하여 헌법정신과 공동체 가치 구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쌍용자동차와 현대자동차, 유성기업에 이어 전북의 버스노동자들이 고공 농성에 들어갔다. 전기가 끊긴 가정의 조손은 촛불을 켜고 자다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2
얼마 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민주당은 ‘의료개혁’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 오바마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했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에서 오바마는 “아들의 약값 450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눈물 흘리는 직장 잃은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는 “모든 어린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여전히 상위 1%가 전체 부의 43%를 차지하고 아이들 5명 중 1명이 밥을 굶고 있으며, 45명 중 1명은 모텔이나 자동차, 심지어 지하 배수구에서 생활하며 집 없이 살고 있다.

#3
중국의 시장경제는 덩샤오핑의 유명한 ‘흑묘백묘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양이는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 이야기는 “사회주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 싹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마오쩌둥의 ‘잡초론’을 누르고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시켰다. 흑묘백묘가 등장하고 30년,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사회가 됐다. 그러나 동시에 상위 1%가 전체 부의 41%를 차지하고 모유를 팔아서라도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도시빈민과 매일 밤 슈퍼카를 몰고 고급 클럽을 찾는 ‘소황제’들이 같은 도시에 공존하는 모순도 함께 찾아왔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일요일, 주말드라마와 개그콘서트의 단 꿈에 빠져있었다. 방바닥을 뒹굴 거리며 “500원!”을 외치는 코미디언을 보고 낄낄거리면서 다가올 월요일이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헤아리고 있을 때쯤, “당신이 가난한 것은 당신의 책임”이라 일갈하는 미국의 정치인을 봤다. 

SBS의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이다. 화려한 조명과 불빛이 꺼지지 않는 건물. 번쩍이는 광고판과 그 광고가 팔아재낀 상품들, 사람들. 그야말로 ‘불야성’을 비추고 있는 화면이 가리키는 것은 ‘자본주의’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본주의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이래로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 최적화된 시스템인 양 군림했다. ‘사회주의’를 대표하던 소련이 무너지고서는 그 독주를 견제할만한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2008년 세계 자본주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고 자본주의의 병증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사회적 불평등은 100년 만에 최고조에 달했다”고 말했다.

<최후의 제국>에 등장한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129번 도로 변 모텔촌에 사는 사람들은 집이 없어 모텔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보증금 낼 돈이 없어 집을 잃었거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은행에 집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교회의 구호식품으로 연명한다. 그마저도 아무런 소스도 바르지 못한 파스타다. 하루 종일 일해서 번 돈은 대부분 모텔의 숙박비로 지출된다. 그러나 그런 일자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공장과 기업은 더욱 싼 인건비를 찾아 나라 밖으로 떠난다. 하루아침에 떠난 기업들이 남긴 것은 실직과 빈곤, 그리고 절망이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그들이 먹는 구호식품은 대부분 유통기한을 하루 남기고 폐기처분되기 직전인 음식들이다. 유통기한이 다 될 때까지 팔리지 않을 만큼 음식은 만들어지고 있지만 배를 곯는 이들도 있다. 음식을 먹을 사람도 있고 먹을 음식도 있지만 정작 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는 모순.

반면에 보험회사 CEO인 스티븐 마리아노는 1천만 달러짜리 집에 살면서 21만 달러짜리 승용차를 타고 출근한다. 12만 달러짜리 야구장 전용권으로 여가를 즐기고 상담 1회에 9백 달러를 받는 주치의를 두고 있다. 자산규모 6천5백억 원의 그의 보험회사는 금융위기의 불안감을 먹이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돈은 사람을 당당하고 독립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그 말은 곧 “돈이 없으면 사람은 당당하지도 독립적일수도 없다”는 말이다.

누구의 경제민주화 

CNN의 한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는 론 폴 하원의원에게 묻는다.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이 치료비가 비싸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론 폴 의원은 답했다. “그게 자유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죠.”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돈 없고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은 죽도록 내버려둬야 하나” 이번에는 론 폴 대신 론 폴의 지지자로 보이는 방청객들이 답했다. “그렇다”

얼마 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경제민주화’를 주창했었다. 그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히고 밤에는 아이들을 잠자리에 눕히고 안전하게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의료개혁’으로 대변되는 그의 경제민주화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올랜도 모텔촌에 사는 8살 세라는 아플 때 병원에 가지도, 배고플 때 배불리 먹지도 못한다. 그의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올랜도 모텔촌에 살고 있는 이들은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던 그가 우리로부터 무엇을 빼앗아 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화당의 조지부시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든 결국 다를 것이 없다. 

201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도 ‘경제민주화’가 화두다.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앞세운다. 서로 자신의 경제민주화가 ‘진짜’라고 우긴다. 어느 한 쪽의 경제민주화가 ‘진짜’라면 다른 한 쪽도 ‘진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경제민주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미래성장 동력에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적극 지원하겠지만, 시장지배력을 남용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의 경제민주화를 규정한다. “우리 헌법의 규범 내에서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도 국민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는 어쨌든 ‘시장경제체제’안에서 움직인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마찬가지다. 그는 “양극화 심화와 이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 새로운 성장과 변화를 막고 있으며 경제․지역․산업․기업 등 사회 전반으로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현상을 분석하면서 이 결과로 “시장경제질서의 근간 훼손되고 있다”고 밝힌다. 그의 경제민주화 역시 시장경제체제를 복원하는 일이다.

지금은 사퇴한 안철수 후보도 ‘정의로운 자본가’를 표방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한국사회가 그동안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착한 자본가’. 그가 1천5백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경제민주화의 적임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행처럼 번지는 ‘경제민주화’가 이 불안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재벌을 개혁하고 복잡한 금융공학을 동원해 부채를 탕감하겠다는 ‘법’과 ‘제도’가 공장에서 쫓겨나 철탑에 오르고 밥을 먹지 못하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1천5백억 원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빈곤을 구제할 수 있을까. 맑스는 “사회가 법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정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보호’, ‘금지’, ‘제한’, ‘강화’, ‘의무화’ 같은 말들이다. 오늘, 경제민주화의 주체는 ‘밥을 굶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밥을 남기고 있는 이들’인 것이다. 어쩌면 보호와 금지, 강화, 제한 같은 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밥을 남길 수 있는 권리’일지도.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오래된 미래


“한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것이 다른 농부에게 흉작을 초래하지 않는다.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이곳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공생의 사회인 것이다”

-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최후에 제국>에 등장하는 브록파 마을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Helena Norberg-Hodge)의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라다크’의 마을이다. 

브록파 마을에선 밭에 나가 일 하는 동안 아이들을 이웃이 돌봐준다. 특별히 누가 부탁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과 필요한 도움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마을의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라고 말한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특별한 제도가 마련돼 있는 것은 아니다. 이웃의 아이를 돌보지 않으면 일정한 규제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동육아를 권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함께 ‘공생’하고 있다. ‘무상보육’이나 ‘공동육아’ 같은 말들이 이념논쟁의 소재로 등장하고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이 수도의 시장까지 갈아치워 버리는 사회에선 낯선 풍경이다. 

산간마을, 척박한 토지의 브록파에는 풍족한 음식이 없다. 그러나 배를 곯는 어린아이도 없다. 그들은 잔치가 벌어지면 저마다 보리떡을 지어 나눠 먹는다. 한 덩이의 고기를 얻기 위해 한 마리의 소를 살처분 하는 이들과 하루에 한 끼 빈한한 식탁을 마주하기도 어려운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솔로몬제도의 아누타 섬은 인구 300명의 작은 섬이다. 이 곳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청소를 한다. 수업시간엔 졸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칠판을, 어떤 아이는 옆자리의 아이를 바라보는 풍경은 여느 나라의 학교와 다르지 않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돈을 주지 않아도 학교에 간다. 

어른들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아이를 입양해 키운다. 한 집 건너 한 명씩은 입양된 아이다. 그러나 아누타 섬의 주민들은 입양된 아이를 ‘특별히’ 취급하지 않는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함께 집을 짓는 아누타의 주민들에게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기 보다는 ‘우리의, 공동체의 아이’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브록파도 아누타도 척박한 곳이다. 농사를 짓기에도 험난한 땅이며 바다는 거칠다. 먹을 것은 풍요롭지 않다.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TV도 없다. 아누타 섬에 들어가기 위해 <최후의 제국>제작진은 이틀간 엔진도 없는 돛단배를 타야했다. 척박한 환경이 아마 끈끈한 공동체를 만들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를 지켜줘야 했을 테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의 세상이 팍팍한 땅과 높은 파도보다 척박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지나가버린,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1960년대 히피즘과 반전운동의 기수였던 조안 바에즈는 작년 월가점령에 참가해 노래를 불렀다. “Where's my apple pie?(내 사과파이는 어디에 있지?)”.

월가점령의 흐름은 다소 미약해지는 것 같지만 1930년대 미국 공산당들에 이어 처음으로 미국인들은 ‘사과파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경제민주화’라는 조금은 미심쩍은 말은 정치인들의 힘싸움에 전유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도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일만이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원시공동체 사회엔 그랬다. 커다란 몸집도 날카로운 발톱도 없던 인간들은 서로의 체온과 서로의 어께를 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 모든 것을 나눠야 했다. 그러나 그 때엔 한 구석에선 음식이 썩어 가는데도 한 구석에선 밥을 굶는 이가 발생하는 모순 같은 것은 없었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풍족하게 했다. 그러나 삶을 풍요롭게 하지는 않았다. 돈을 받기 위해 학교에 가는 미국아이들과 쌀부대로 만든 가방을 짊어지고 학교를 청소하는 아누타의 아이들 중 어느 쪽이 더욱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법과 제도가 공동육아를 지시하고 이에 반발하는 정치인들이 이념공세를 퍼붓지 않아도 브록파의 아이들은 공동체와 함께 자란다. 이웃집 엄마가 나눠주는 밥을 먹고 자란 아이는 아마 자라서 제 이웃집 아이에게 밥을 나눠줄 것이다. 공짜밥을 주기 싫다며 눈물 흘리며 자기 자리까지 내거는 어른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무엇을 나누어 갖게 될까.

녹색평론 발행인인 김종철 씨는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라도 ‘경제’에 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새로운 상식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300년간 화석연료·핵에너지에 기반을 둔 무한한 욕망 추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개념체계인 그동안의 경제개념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오랜 생활방식이었던 순환경제 시스템의 복구·재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wealth)’ 나라인 미국과 중국이 브록파와 아누타의 주민들보다 ‘잘 살고(Wellbeing)'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브록파와 아누타의 생활은 어쩌면 인류가 이미 지나온 길이다. 그건 신비롭게도 아직 남아있는 화석과도 같은 삶. 그러나 동시에 브록파와 아누타는 여전히 오지 않은 인류의 바라마지 않는 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 최후의 제국, 자본주의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금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지속한다면,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이기도 하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경고했다. 

“우리 자신의 본성, 우리 자신의 욕구가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중매체를 통한 선전이 아무리 광범위하고 끈질기게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밀어붙인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온전한 정신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본능적인 이해를 꺾지는 못한다” 

하이킥 - 숏다리 주제엔 원래 역습같은거 안돼요





“축이 되는 디딤 발이 흔들려서 킥이 정확하지 못하니까 공이 떠버리는 겁니다”


한 때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축구 해설가였던 신문선은 늘 ‘축’과 ‘디딤발’을 강조했다. 간과하기 쉽지만 정확하고 강한 킥을 위해서는 공을 때리는 발보다는 땅을 딛고 있는 디딤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강속구 투수에게 강한 어께만큼이나 튼실한 하체와 균형 감각이 더 중요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끝내 강력하지도, 정확하지도 못한 킥을 날린 채 끝을 맞았던 것도 축과 디딤 발이 튼실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드라마의 ‘킥’이 결국 멜로라인이라면 김병욱 감독이 구축한 하이킥의 세계의 멜로라인을 지탱해주는 축은 ‘해학’이다. 


해학이란 현실에 기반한 웃음이다. 비극적 현실에서 파생된 희극이다.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조언이야말로 해학의 본질을 꿰뚫는 경구다.  


그동안의 하이킥 시리즈는 오직 물질만을 숭앙하는 자본주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소외된 개인, 사랑조차 철저히 계급적인 세상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김병욱 감독의 정확한 ‘눈’이 디딤 발과 축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튼실한 축을 바탕으로 한 킥은 지붕을 뚫어버릴 듯 거침없는데다 정확했다. 높은 시청률과 스타탄생은 성공한 슈팅에 이은 일종의 세리모니였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도 그랬다. 2012년을 돈의 해로 규정한 이적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 혹은 ‘종속’돼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야기는 수 십 년간의 인간관계를 금전관계로 전복시키면서 시작했다. 가부장의 권위도 사실은 ‘금력’에 기반 하고 있었음을 폭로했다. 금력의 상실이 곧 권위의 상실로 이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던 내상은 급격한 스트레스에 부닥쳤다. 123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좋았던 유선의 ‘완경’ 에피소드도 경제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완성과, 이별, 새로운 삶에 대한 이미지들은 그냥 차치하더라도. 


그러나 갈등은 너무 쉽게 봉합됐다. 남한사회에 사업에 실패한 가정은 숱하겠지만, 복권당첨으로 재기의 기회를 잡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취업에 애를먹던 취업준비생이 용감하게 꿈과 희망을 담은 대기업에 지원해서 합격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현실적 난관’을 무시하고 말이다. 


숏다리들의 기습적 하이킥은 통쾌하겠지만, 사실 그 궤적이란 롱다리의 미들킥보다도 낮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이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을 멈춰야 했던 것처럼 짧은 다리들의 역습도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한다. 짧은 다리들의 하이킥이란 그저 통쾌함으로 건네는 위로가 최선이다.    


희망과 행복이란 절망과 불행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불행을 정확히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망조차 하지 못한 희망이란 거짓이고 불행해본 적 없다면 행복 할 수도 없다. 사실 희망과 절망, 행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이킥의 매력은 그 종이 한 장을 포착해 내는 지점에 있었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란 이름처럼 이번 시즌이 그 불행과 절망의 순간들을 가장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담을 수 있었을테지만, 절망은 방치됐고, 불행은 외면당했다. 현실이 거세된 그렇고 그런 가짜 희망극. 무책임한 ‘1년 후’ 혹은 ‘그들은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건 해피엔딩, 혹은 시청자들이 강요하는 ‘강박적 행복’에 대한 김병욱 감독의 신물이거나 납득이거나 항복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롱일 수도 있겠다. 사실 김병욱 감독의 전작들 중에는 해피엔딩이 아닌 작품이 없다. 김병욱 감독의 최고작이라 꼽고싶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도 마지막 회,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왔지만 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삶은 늘 죽음을 곁에 두는 것이며 죽음조차 일상인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붕킥의 세경도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삶, 물질, 풍요가 행복을 가늠하는 오직 한가지의 잣대가 아님을 김병욱 감독과 하이킥의 세계는 알고 있었고 행복과 불행은 총량의 법칙에 따라 움직임을, 마냥 행복할수만도, 마냥 불행할 수만도 없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절망에 대한 응시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행복을 탐구하는 모습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이킥의 주인공들은 늘 안주하지 않고 떠났다. 발전이란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삶, 관계로.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아무도 떠나지도, 상처받고 치유하지도, 변화하고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완성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겠지만, 사실 그런 삶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이제 끝났다.


하이킥의 결말을 예측해본적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진 두 인물은 이적과 크리스탈이었다. 이적은 늘 그런 삶의 태도를 후회하고 환멸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가장 잘 관철한다. 크리스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 (젊고 예쁜 여자의 성적 매력이 대표적인데)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간다. 미국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아빠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자신의 기질적 특성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그녀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본성을 발각당하지 않았다) 난 그 둘이 결합할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합하는 것. 일종의 M&A 같은거다. 크리스탈은 자신의 미모와성적 매력을 팔고 이적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낭만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금전적 능력으로 젊고 예쁜 여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원시시대에 사냥 잘하던 남자가 애 잘 낳는 여자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적 가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의 낭만이란 그런 것.


지원이는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의사가 될 거라고. 그녀의 말대로 늘 재미없어하겠지만 적당히 재밌는 척 해주면서 그렇게 삶을 살아갈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계상이 걸은 길이기도 하다. 그 결핍감을 봉사활동이니 보건소근무니 하는 것들로 보충하겠지만, 그건 본질적인 건 아니니까. 그렇게 적당히 불행하고 적당히 윤택하고 적당히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원이 뛰쳐나가서 정말 르완다로 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아마 좌절할거야. 르완다 비자가 그리 쉽게 나오나..ㅋ 


종석이는 떠난 사랑에 좌절하고 적당한 성적에 명문대엔 지원했다 떨어지고 삼수해서 수도권 4년제 대학쯤에서 연애하고 술마시다 군대에 다녀오고 가끔 아이스하키를 보러가는 잘생긴 중소기업 직장인 쯤이 될거고, 진희는 언제까지고 골골거리면서 고시원을 전전하다 그럭저럭한 회사 비정규직 경리직원으로 살아가다 과장쯤 되는 남자랑 결혼할거라고 생각했다. 종석이 명문대에 지원하고, 진희가 꿈과 희망으로 대기업에 지원해보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한땐 나도 잘나갔지’를 주섬거리는 것이 짧은 다리들이 날릴 수 있는 역습의 궤적이다. 애초에 짧은 다리들에게 하이킥으로 경기를 역전하기란 불가능 한 일.


다만 희망이란 그렇게 수태날리는 숏다리들의 로우킥에 천하역사도 쓰러지는 법이란 사실이다. 본야스키의 로우킥이 최홍만과 밥샙을 자빠뜨렸던 것처럼. 그러나 어쩌다 날린 하이킥 한방에 들뜨다간 또, 자기가 그런 하이킥 날릴 수 있을거라고 믿고 로우킥 연습 안하다간, 밥 샙한테 신나게 두드려맞는다. 세상은 원래 롱다리들 편이다. 


덧,


- 시즌 시작할때는 오직 백진희 편이었으나 지금은 박하선도 좋아연.

- 이종석에 박하선, 크리스탈까지. 김병욱 감독이 신인배우 알아보는 눈은 정말 매의 눈입니다.


영화 <두 개의 문>, 용산참사의 소환장 - 무엇이 '용산'을 소환했나


영화 <두 개의 문>, 용산참사의 소환장
무엇이 '용산'을 소환했나



제작단체 - 연분홍치마
감독 - 김일란, 홍지유




# 서스펜스(Suspense)와 스릴러(Thriller)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차이는 ‘관객이 범인을 알고 있는지 여부’라고 하면 간단하겠다. 주인공이 범인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긴박감을 느끼는 것이 서스펜스라면, 관객과 주인공이 모두 미지의 대상에게 공포를 느끼는 장르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야마’(글의 얼개)를 잘 잡으라고 했던가, <두개의 문>을 보고 리뷰를 쓰라는 말을 듣자마자 떠올렸던 야마는 ‘서스펜스’였다. 심지어 영화관에 앉기도 전에.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국가의 학살극에 관객들의 공분을 일으키고, 범인은 정권이요 주인공은 ‘진실을 잊지 않는 여러분’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서스펜스. <두개의 문>이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라 기에 관객 모두 화내고 슬퍼하다 영화의 말미에는 “진실을 규명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겠다”는 결기어린 다짐이 샘솟는 그런 프로파간다를 지레 짐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범인을 알고 있다’ 영화 시작 전에 노트에 써 놓은 이 리뷰의 제목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글의 방향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서스펜스가 아니었다. 영화를 볼수록 ‘범인’을 알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법정은 범죄를 증명하기보다는 범인을 찾는 과정에 가까웠다. 폭력과 야만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경찰특공대들은 차라리 그것들에 몸을 내어준 숙주에 가까워보였다. 그들 역시 야만의 현장에 내던져졌다. 어떤 생명줄도 부여받지 못한 채. 스릴러다. 목숨을 노리는 살인마의 정체를 영화 속의 인물들도 영화 밖의 우리들도 모르고 있다. 스릴러 영화는 관객들에게 정체모를 살인마와 잔혹한 주검만을 쥐어준다. 구타가 있었는지 여부도, 시너가 얼마나 쌓여있었는지에 대한 판단도 본질이 아니다. 스릴러 영화의 본질은 오직 ‘누가’, ‘왜’

#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 울고 있는 내 친구여 / 아직까지도 슬퍼하진 말아주게
- 루시드 폴, 평범한 사람 中

그는 경동시장에서 장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가고, 가게를 청소하던 레아 호프집의 사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철거민이었고, 대책위원회의 고문이었고, 지금은 열사라고 불린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빚을 내 가게를 열었고, 하나하나 손때 묻혀 물건을 구입하고, 타일 한 장까지 직접 발라서 빚에도 불구하고 가게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평범한 사람이다.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덟 살 딸을 둔 아버지였고, 서른 한 살의 청년이었다. 무서워도 겁에 질린 티를 내서는 안 되는 경찰특공대였고, 망루까지 가는 길도 모른 채 등 떠밀려진 공무원이었다.

세상은 그들을 대척점에 놓고 대비시켜왔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면에선 같은 편이다. 야만의 땅에 내몰려졌다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황은 달랐지만 그들에게 역할과 상황을 준 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아마 이 스릴러의 살인마, 끝판 왕.





# 무엇을 보고 있었나

영화에 사용된 화면은 두 가지다. (영화 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뷰 영상들은 제외하고) 하나는 칼라TV를 비롯한 진보언론들의 영상이고 또 하나는 경찰의 채증 영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쉽게 보지 못했던 채증영상을 통해 보이는 현장이다. 두 영상을 각각 씨줄과 날줄이라고 한다면, 두 실이 엮어내는 천이 성기거나 어색하지 않다. 그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까닭이다.

경찰의 채증영상은 매우 흔들리고 혼란스럽다.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몰랐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염병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망루안의 사람들이 위대한 혁명을 바라는 투사나 사회의 전복을 바라는 폭도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잔인한 살인마도, 피도 눈물도 없는 전투기계도 아니었다. 그 순간 그 곳에서 철거민들과 경찰특공대 양쪽 모두는 겁에 질렸고, 상황을 강요받았다. 그 곳은 마치 서로 죽일 것만을 강요받던 콜로세움.

앵글 한 번 변하지 않는 인터뷰와 흔들리는 채증영상. 영화는 집요할 정도로 그 혼란과 공포, 잔인함에 관객을 반복해서 끌어들인다. 경찰특공대의 그 그악스러운 잔인함은 어쩌면 공포심의 발로였을까.

# 여러분 부~자 되세요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은 대부분 노예였다. 그들은 싸울 것을 강요받았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권력은 그 열광을 지배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럼 콜로세움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상대 검투사인가, 아니면 콜로세움 경기를 조장한 권력인가. 혹은 열광을 보내던 관객들인가.

2000년대 초반 한 신용카드 광고의 카피였던 “부~자 되세요”는 모델 김정은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카피는 온 나라의 주문이 됐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서로 부자가 되라고 말했다. IMF를 지나면서 신용카드를 비롯한 금융 자본의 비대화가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가 된 시점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뿐이고, 인격은 그저 '돈'으로 추정됐다. 돈이 곧 삶의 유일한 목표이고, 종교가 되어버린 것.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6명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책임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외면했다. 철거민들의 죽음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었고, 경찰의 죽음은 전문시위꾼 폭도들의 폭력 때문이 됐다. 이 외면과 전가의 무책임함에서 ‘대중’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로마의 권력자들은 콜로세움으로 대중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그 살인 유희에 열광을 보낸 것은 대중이다. 열광이 호출한 잔인함.

“부~자 되세요”라는 주문이 호출 한 것은 무엇일까.





# 두 개의 문 - 선택

영화에서 ‘두 개의 문’은 얼마나 성급하게 경찰이 투입됐고, 이들의 안전조차 보장되지 못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하지만, 관객들에겐 또 다른 메타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

감독들은 기획의도에서 “관객대중 스스로 어떤 위치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 스스로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진상규명과정이란 경찰이 망루를 때렸는지, 시너가 얼마나 쌓여있었는지, 경찰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판가름 하는 일이 아니다.(사건의 정황과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보다, 용산으로 대변되는 이 풍경의 호출에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 그건 가치의 전환이다. 인간적 삶에 대한 복원.

수전손택은 “꼭 강해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소환장

‘스릴러’말고 다른 것으로 다시 야마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다. <두 개의 문>은 결국 주인공의 활약으로 살인마를 잡고 모두 안도의 한 숨을 내쉬는 도식적인 스릴러가 아니다. 이건 스크린 안에만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차라리 ‘소환장’에 가깝다. 관객을 배심원이 아니라 공범자, 혹은 주범으로 법정에 소환하는 듯했다. 그건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알약과도 같다. 영화는 현상을 전달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빨간약을 집어 드는 순간, 네오는 해방군이 됐지만 우리는 피고가 될테다. 그러나 반성의 기회는 주어질 것 같다.

아직 용산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MB정권이 건재해서도, 당시 경찰청장이 총선에 출마해서도 아니다. 아직 우리가 미처 반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은 거기부터다.


# 덧

1. 조금 더 성실하고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싶다면 <두 개의 문> 배급위원이 되는 방법이 있다. 독립다큐멘터리의 제작환경에선 극장 개봉을 위한 최소한의 재정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다. 제작단체 ‘연분홍치마’에 메일(ypinks@gmail.com)을 보내 후원금 3만원을 약정하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영화를 볼 수 있다.

2. 아직 개봉하지 못한 <두 개의 문>을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기회는 ‘인디다큐페스티벌’이다. 3월 24일과 27일 인디다큐페스티벌 용산특별전에서 상영된다.(http://www.sidof.org)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65508&page=1

김장훈 꽃서트 공연후기 - 꼰대 아니고 어른


1.
오래간만의 공연이었다. 2년쯤됐을까.
그동안 공연에 뜸했던 까닭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다. 김장훈같은 대형가수(?)는 공연비가 비싸다.
아니다, 사실 팬심이 조금 줄었기 때문이다.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들이 아주 조금은 변하기도 했고, 왠지 김장훈의 노래가 예전하고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나기나 로망스같은 노래는 지금도 별로다. 기대했던 레터 투 김현식 앨범도 영 마뜩치 않았고.
그것도 아니다, 유달리 도드라지는 그의 정치적(?)행보가 더 큰 이유였겠다. 매번 노래보단 독도나 기부, 봉사, 부국강병같은 말로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일이 싫었다. 그건 여러가지 의미에서였는데, 그의 노래를 매우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노래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이 첫번째고(이게 정말 첫번째다), 둘째는 '국가'라는 허상에 천착하는 그의 태도가 싫었기 때문이다. '사노라면'을 부를 때 깔리는 애국가 전주나, 화면의 태극기도 영 싫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정치성향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이 얼마나 웃긴 일인지 알고 있지만, 그거야 '가수의 철학과 삶이 그의 노래에 고스란히 베는 법'이라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로 떼우고.
여튼 '꽤나 충성도 높은 팬으로 그에게 기대한 것이 컸기때문에 마뜩찮은 부분도 많았다.' 정도로 정리해두고. 한동안  그렇게 그의 공연에 잘 가지 않았다.

2.
꽃배달 사업의 런칭쇼를 겸하는 공연이라는건 공연장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친구가 알아서 예매까지 해뒀기 때문에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갔다. 잘 매치가 되지 않는 조합일것 같다. 김장훈과 사업이라니. 기억이 맞다면 돈에 대해선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무던하려고 했던 그였다. 싫어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무던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수억씩 적자를 보는 공연도 계속하고, 단 한번의 연출을 위해 수천씩의 장치비를 들이기도 했었다. 지하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쾌적 할 수 있도록 거액을 들여 공기청정기를 설치한 적도 있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늘 청소년들에겐 반값으로 티켓을 판매한다. 부러 돈을 가져다 버리진 않지만, 마찬가지로 자기 주머니에 돈을 채우는 일에 무던하려는 노력.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김장훈인데 사업 런칭쇼라니. "변했어"같은 생각이나 말따윈 떠올리지도 않았다. 그는 공연을 위해서라고 했다. 자기는 공연비를 조금이라도 낮춰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볼 수 있으면 하는데 혼자서만 공연비를 낮출 순 없으니 또다른 수익창출의 길을 열어두려는 것이라고 했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공연비를 낮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웃고 말았겠지만, 김장훈이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 판단이나, 과학적 근거. 이런거 아니다. 오로지 팬심이다.ㅋ

다만 든 생각은 '무던하려는 강박'같은게 보이지 않았달까. 표현이 웃기지만, 무던하려는 노력보단 정말로 무던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열심히 돈을 벌고 또 돈을 쓰고, 다시 노력해서 돈을 벌고. 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모습. 이건 아마 팬심 아닐거다.

3.
삶과 철학이 노래에 그대로 묻어나는 법이라고 위에서 말했었다. 어제는 왠지 그의 노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가 가창력의 절대 기준으로 삼고 있는 고음(아..8단 고음 드립은 정말 안 웃긴데..ㅋ)에의 의지를 버렸다는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더 크고 더 높은 소리를 원했다. 하지만, 억지부리지 않아 보였달까. 뭐 이런건 지극히 주관적인데다 합리적 근거같은게 있을 수 없는 영역이니까. 다만 그의 노래가 마구마구 슬프고 처절하지 않았지만,(이건 어느정도는 선곡의 문제기도 함. 꽃서트에서 부른 노래는 주로 신나고 발랄한 노래들이었) 계속 듣고 싶어질만치 재밌고 즐거웠다. 일테면 'I Love You'. 이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는 별로 신통치 않았는데, 이렇다할 고음도 클라이막스도 없는 이 노래가 참 좋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무엇보다 연출과 선곡이 좋았다.
"끝 곡은 언제나 늘 당연히 무조건 '노래만 불렀지'"라고 말했었는데, '노래만 불렀지'가 끝 곡이 아니라서 참 좋았다.
김연우 덕분에(?) 예전보다 더 유명해진 '나와 같다면'을 더 뒤로 배치하는 마음, '여행을 떠나요'나 '그대에게' 같은 노래를 앵콜로 부르면서 신나하던 장면, 그리고 그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르던 마지막 장면도. 어떤 강박을 지나온 듯한 느낌. 그래서일까 '내 사랑 내 곁에'는 더 슬펐고, '그대에게'는 더 신났고.

체코필과의 협연으로 만든 레터 투 김현식이 못마땅했던건 아마 '과잉'때문이었다. 그 앨범 내내그런게 느껴졌다. 과한 소리 과한 연주. '김현식 노래니까 더 잘해야 돼.'라고 생각했었던 걸까.

무튼 꽃서트의 노래들은 그랬다. 과잉하지 않는 노래. 적절했고, 힘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못나지 않았던.
꼰대같은 대충주의, 적당주의가 아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모욕같은거 당연히 절대 아니다. 최선을 다한 적당함. 이런거 얼마나 멋있나. 꼰대 아니고 어른. 앞으로 '형'말고 '아저씨'라고 부를까.ㅋ

5.
화면에 비친 김장훈의 얼굴이 자글거려서 좀 속상했다. 꽤나 시간이 지나갔음을 갑자기 알아버린 느낌. 하지만 나중에 잠깐 가까이서 얼굴을 봤는데, 잘생겼더라. 걱정은 패스. 하긴, 누가 누구 외모를 걱정하니.

사진은 정덤양. / 공연 당일에야, 덤양도 공연을 보러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역시 중국대륙을 뒤흔들었던 한류스타의 위엄이랄까.



6.

그 시간들과 사람들도 오랜만이었다. 자꾸 옛 일을 주절거리며 낄낄댔지만, 사실 그건 결코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때문에 가능했던 얘기다. 정말이지 세 얼간이들.ㅋ

2002년이나 2003년 어느 즈음의 대학로 모퉁이를 방황하던 건방진 청소년들은 지금, 처지를 비관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칼날을 갈고 있거나, 깨진 연애에 대한 슬픔을 개그소재로 삼거나, 서로에게 진심의 위로를 건낼만큼.의 지혜는 갖게됐다.

다시 10년쯤 지나서 또 오늘을 돌이켰을 때 낄낄거릴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다시 생겨서 좋았다. 오직 웃으면서 돌이킬 수 있는 시간과 공간들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고 그리워 하는 일이 욕망하는 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도 그들도 알고 있다는 것 역시 참 다행이다.


7.

노래는 좋았던 I Love You. 로 할까하다가,
역시 나와 같다면. 하지만 굳이 어쿠스틱 버전으로 올리는 이유는
'나 이 냥반 꽤 예전부터 좋아했음'을 티내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라는 것도 솔직하게 고백해두자.ㅋ




8.

김장훈의 꽃민정음

꽃배달 서비스가 서로 달아 가격과 서비스가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전차로 어린 백셩이 마음을 전하고자 홀뺴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능히 시러펴지 못할 노미 하니라
내 이를 어여삐녀겨
새로 꽃배달서비스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수비녀겨 날로쓰매
편안케 하고저 할 따라미니라

김장훈 꽃배달 '사랑'
http://www.janghoonflower.com
1644 - 0004


이건 팬심이다.ㅋ

신치림 - 모르는 번호






윤종신, 하림, 조정치가 합작한 신치림.
당연히 윤종신이 퓨로듀스하고 하림이 노래, 조정치가 연주할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림이 프로듀스했다고. 이 노래도 하림이 만들었다. 그래선지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의 느낌도 있고.
"나의 미련한 기억 속 추억이라 남아있는 건 헤어진 후에 제멋대로 쓰여진 다른 얘기" 같은 가사가.

뭐 일단, 소주 땡기네.
이제 윤종신이란 이름이 들어가기만 하면 기본적인 신뢰를 가져도 괜찮을 듯. 그게 예능이든 노래든. 어디서든 기본 이상을 해주는 사람이다. 다달이 곡을 내놓은 월간 윤종신 작업에서 보여진 성실함이 그 바탕이겠지. 며칠전에 티비에서 자기는 천재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또 그대로의 천재성.

감상포인트는 윤종신의 과잉된 연기와 조저치의 발연기를 가장한 자연스런 메소드 연기.
한라산 소주병과 사실 알고보면 각 일병정도에 안주도 식사용 뼈해장국 한그릇이 전부인데 무려 밤을 새워 뻗었다는 사실. 나 완전 예리한 남자다잉.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 가련하고 무식한 꼰대들의 영화




# 온통 나쁜놈

보통 건달영화는 명료한 선악의 대비를 통해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보여주거나, 아니면 악한이 될 수밖에 없었던 타락의 사정을 보여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악인의 압도적인 간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적 소임을 한다. 초록물고기가 두번째 같은 경우라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던 대부가 세번째 경우겠다.
그런데 이 영화엔 셋 다 없다. 타락의 과정도 없고 압도적인 간지도 없다. 선악의 대비 따위도 당연히 없다. 온통 처음부터 원래 나쁜 놈들뿐이다. 비리 세관원에 무식한 깡패다. 뭐 착한 놈이 있어야 타락의 과정도 있지.

비리세관에겐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줄줄이 달려있다. 뭐 먹고살게 있다고 애는 그렇게 낳아놨는지. 부수입이 짭짤한 곳으로 오기 위해 이천이나 찔러줬다. 찔러준 놈이 있으니 받아먹은 놈도 있겠지. 사이좋게 다 같이 챙겨먹어 놓고 책임은 혼자지란다. 온통 나쁜놈밖에 없다.의리에 죽고산다는 건달들도 마찬가지다. 걔넨 원래 사회가 내놓은 쓰레기, 깡패아닌가. 그래서 비리세관은 늘 자기는 건달 아니고 공무원 출신이라는 말로 자신을 그들과 분리한다.

그러고보면 딱히 나쁜놈이라고 할 것도 없다.그들은 다 나쁜놈이니까 동시에 다 착한놈이다. 선과 악은 다분히 상대적인거 아닌가.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면 안된다는 도덕법칙? 그런건 정글에선 통하지 않는 법이다. 나쁜놈들만 잔뜩 모여있는 곳, 그건 정글이다.

그래서 딱히 그 시절은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아니다. 그냥 그들의 전성시대. 그래서 지금도 나쁜놈들의 전성시대는 아니다. 좋은놈이 없는데 나쁜놈은 또 어딨나.그때나 지금이나 당하는 놈과 이기는 놈만 있을 뿐. 결국 이기는 놈 전성시대. 근데 이기는 놈이 전성시대인건 당연한 얘기잖아.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늘 니네만 전성시대'.


#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당신이 얼마나 아까운 인재인지, 얼마나 한스러운 삶을 살았고, 기회만 있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부귀영화를 누렸을지를 열변하시는 아버지. 어디어디의 누구누구를 알고, 어디에서 무슨 직함을 달고있는 누구와 어떤 친분이 있고, 티비에도 출연하셨고, 동종업계에선 얼만큼의 권위를 갖고 있는지를 항상 자랑하셔야 하는 아버지. 하다못해 어느 동네의 어느 음식이 맛있고, 어디로 가기 위해선 어느 길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것도 늘 알고계셔야 했던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마치 영화는 아버지를 보고서 만든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건 아마 우리 아버지들의 공통적인 허세고 꼰대스러움이겠죠. 그래서 특별히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요.

영화를 보면서 웃겼던 에피소드가 있어요. 주인공 최익현이 밥상에서 아들에게 영어 문장을 외게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났습니다. 앞으로는 영어가 살 길이라는 대사에서도요. 그건 마치 한 15년전 우리집 풍경이잖아요. 영어 책을 달달 외게하고 외우지 못하면 윽박지르며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당신과 제 모습말입니다. 더 웃긴건 당신의 예견대로 이제는 한문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도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됐어요.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안타까운건 같은 시대와 같은 상황에서 최익현은 마침내 승자가 됐어요. 아들은 검사가 됐고 손자의 돌잔치를 유람선에서 할 만큼 부도 쌓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역시 청탁은 이루어지고 그를 통해 아버지의 권위는 보여집니다. 하지만 내 아버지 당신은 권위 대신에 늙어가는 모습만 있군요. 아마 제가 최익현의 아들처럼 검사가 되지 못했기 때문일겁니다. 당신 말대로 일찌감치 공무원 시험을 봤어야 했나봅니다. 하지만 너무 서러워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이 역시 우리 아버지들의 공통적인 비극이니까요. 뭐, 검사 아들 둔 아버지가 얼마나 있겠어요.



# 최민식과 하정우

최민식은 연기를 잘한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늘 부담스럽다. 과잉돼있달까. 벌겋게 부릅뜬 눈으로 침튀겨가며 소리지르는 광기어린 연기가 매 순간에 적절한건 아니니까. 이 영화에서도 그는 훌륭한 연기를 펼치고 중년 남성의 허세와 꼰대기질을 드러내는데 그 특유의 과장과 과잉된 연기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더 일상적이고 더 소시민적이면서 더 나쁜놈같기도 하고 더 착한놈같기도한 더 찌질한 연기.
를 바랐다면 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가요.ㅋ 나 왠지 송강호라면 해냈을거 같은 기대를 했다면 명배우 최민식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요.ㅎ

하정우는 추격자부터 비스티보이즈와 황해까지, 매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지만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건 조금 어눌한그의 발음이나 발성때문일수도 있지만. 여하튼 심각하게 폼잡으며 주먹말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다 가진양 허세를 부리던 건달두목 역할엔 아주 적절했다. 그리고 최익현은 절대가질 수 없었던 일대종사의 위엄도(건달세계에만 국한된). 중국집에서 최민식 독대하던 장면은 정말 좋았다. 하지만 왠지 하정우의 한계를 확인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그보단 조연배우들의 연기가 더 눈에 들었다. 김성균이나 김혜은, 조진웅같은. 특히 김성균은 깜놀. 그 찢어진 눈을 더 찢어가거며 무게를 잡다가, 최익현을 파묻으며 낄낄거릴 때 연기라기보단 진짜로 최민식한테 불만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무사 무휼이야 뭐 워낙에.ㅋ

++
TV조선 자본이 투입됐다고 보지않겠다던 공지영은 좋은 영화 안보면 손해보는건 저 뿐이라는걸 모르나. 도가니에도 MBN자본 들어갔는데. 사실 이 영화가 그런 무식하고 가련한 꼰대들의 영화다.

재주소년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한 4~5년 전쯤엔 파스텔 뮤직 류의 음악이 (대)유행이었다.
요조로 대변됐던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소규모의 음악에 요조의 보컬이 차지했던 부분은 극히 미미하다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나 캐스커, 짙은, 에피톤 프로젝트, 한희정 등등의.
저이들의 음악을 한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을 수는 없지만 분명히 미묘한 유사성이 있다. 이른바 파스텔 류.랄까?ㅋ
이런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건 여심을 흔드는 노래.ㅋ 실제로 여신이라는 요조나 한희정은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더 많은 듯하다.ㅎ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남자들이야 그저 핫팬츠의 걸그룹에게 하악거리기나 하지 뭐.

여튼간에 재주소년은 그 파스텔 류의 선두에 서있던 팀이자 가장 좋아하는 팀.
왜냐고 묻거나 재주소년이 다른 이들하고 다른게 뭐냐 물으면 할말은 딱히.
얘넨 일부러 이런것 같지는 않아. 쯤?

일부러가 무슨 의미냐면
부드럽고 말캉말캉한 보컬에 간드러지는 가사로 작심하고 맘을(여심을) 녹여버리겠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음악을 싫어하진 않음. 난 그런 계산이 정교하다면 정교한만큼 하악거려주는 솔직한 남자임.) 얘들은 진짜로 말캉말캉하고 '간드러지는'이란 악의적 표현이 닿지 않는 서정이 있단 말이지. (만약 그게 일부러라면 앞서 밝힌대로 티나지 않을 만큼의 정교함에 또 박수를 보내겠어.)

어쨌든 내 베스트 넘버는 이 곡. 겨울의 첫 날이나 명륜동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 노래.


덧,
일찍 일어나겠다고 너무 일찍 자서 너무 일찍 일어난 관계로 랜덤플레이를 돌렸더니 이 노래가 나오길래,
신새벽에 남 몰래 쓰는 것처럼 포스팅하기.
민주주의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