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리뷰 - 내 이름은 말랄라

<내 이름은 말랄라> : 상식에 대한 공격에 대처하는 자세 


“저의 목소리는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는 매일 커지고 있습니다.” - 말랄라 유사프자이


# 상식

2012년 파키스탄 스와트 밸리에서 열다섯 살의 말랄라가 총에 맞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 말랄라에게 “네 이름이 말랄라냐”고 물었고 말랄라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곧바로 총을 쐈다. 말랄라는 왼쪽 머리와 목에 총상을 입었다. 말랄라를 쏜 남자들은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 소속이었다. 사건 직후 파키스탄 탈레반은 성명을 발표해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여성이 세속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율법에 어긋나는 세속주의를 설파하면 누구든지 우리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말랄라가 사는 파키스탄 스와트 밸리는 2009년부터 탈레반이 점령하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 율법을 들먹이며 여성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했다. 말랄라는 ‘굴 마카이’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탈레반이 저지르는 만행을 고발했다.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었다. 탈레반은 말랄라가 계속 글을 쓰면 그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가족들도 죽이겠다고했다. 그러나 말랄라는 협박에 질려 글쓰기를 그만두는 대신 실명을 공개하고 BBC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결국 그녀는 탈레반이 쏜 총에 맞았다.

201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일흔 살 노인 백남기가 쓰러졌다. 수만의 사람이 몰려있는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다. 경찰 살수차는 백남기를 조준해 10기압의 물포를 직사했다. 10기압의 물포는 시속 160KM로 날아오는 야구공에 얻어맞거나 100m 높이에서 떨어진 물풍선에 직격되는 것과 똑같은 충격이다. 백남기는 두개골이 골절돼 뇌가 손상되는 중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다. 경찰은 사건 이후 지금까지 물포 직사가 적법한 절차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과격한 시위”가 문제라는 것이다.

백남기는 전남 보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백남기가 서울까지 올라온 2015년 11월 14일은 서울에서 ‘민중총궐기’ 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농사꾼 백남기는 한없이 떨어지는 쌂값으로 농민들이 얼마나 힘겨워지는지를 알리고자 상경했다. 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에서 추곡수매가 21만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백남기가 쓰러지던 2015년 말 당시 쌀값은 한가마에 12만원이었다. 개사료 80Kg보다도 싼 값이다. 수백만 톤의 쌀이 남아돈다며 쌀을 개사료보다 싼값으로 취급하던 정부는 3만톤의 쌀을 수입해왔다. 쌀 수입량을 더 늘리겠다는 입장도 내놨다. 애초에 약속했던 쌀값 인상문제는 언급도 없었다. 백남기는 지금의 쌀값으로는 농사지어 살아갈 수 없다는, 정부가 약속을 지켜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지켜야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했다. 백남기는 결국 정부가 쏜 물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다.

# 웃을 수도 없는

말랄라는 총에 맞은 직후 영국으로 이송돼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깨어난 후에도 그녀는 탈레반의 억압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여성과 어린이들의 현실을 알려내는 활동을 이어간다. 그 활동으로 2014년에는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그러나 말랄라의 가장 큰 고민은 물리 시험과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교 숙제다. 카메라는 인권활동가 말랄라의 활동과 꼭 같은 분량으로 말랄라의 쉽지 않은 학교생활을 비춘다. 영어단어를 외우고 61점짜리 물리 시험지를 감추고 파키스탄의 친구들에게 “영국 애들은 공부를 엄청 잘한다”고 하소연하는 평범한 17살 고교생 말랄라의 모습이다. 그건 말랄라의 목숨까지 앗아갈 뻔 했던 그녀의 주장이 사실 얼마나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공부를 하는 일이, 숙제하기 싫어서 몸을 베베 꼬는 일이, 책을 읽고 시험을 보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일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그 일상을 보고 있자면 총에 맞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주장이란 게 ‘고작’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바람이라는 게 허망할만큼 웃긴다.


그러나 말랄라의 그 평범한 바람조차 ‘수치’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되면 마냥 웃고있을 수만도 없다. 파키스탄 옵서버(Pakistan Observer)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정치적인 결정이고, 서방세력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말랄라는 서방세력이 원하는 것을 판매하는 평범하고 쓸모없는 소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어떤 이들은 말랄라의 투쟁이 서방세력의 정교한 음모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며, 말랄라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SNS에는 ‘말랄라드라마’(#MalalaDrama)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파키스탄인 일부는 말랄라가 파키스탄에 서구적 가치를 주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담아 ‘말랄라드라마’ 해시태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남기는 쓰러진 후 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1년 가까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백남기는 2016년 9월 25일 끝내 숨을 거뒀다. 경찰의 공권력 집행으로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언론은 백남기의 학생운동, 농민운동 경력을 제시하며 그가 불법 과격시위를 했기 때문에 물포 직격 살수는 불가피한 공권력 집행이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학생운동, 농민운동 경력이 있는 ‘평범하지 않은’ 농민이었다던 백남기가 그 날 주장했던 건 ‘공약 이행’이었다. 쌀이 남아돈다고 쌀값을 후려치더니 굳이 쌀을 또 수입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약속을 지키라는 ‘과격한’ 주장 때문에 일흔살 노인에게 물대포를 직접 쐈다는 경찰당국의 해명은 허망할만큼 웃긴다.

백남기의 사망 이후 벌어진 상황은 억지로도 웃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다. 병원 측은 백남기의 사망을 발표하면서 그가 ‘병사’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그의 사망원인을 규명하겠다며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나섰다. 어떤 이들은 백남기가 사망한 것은 가족들이 그의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며 유가족들을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로 고발한 사람들도 있다. 백남기가 경찰의 물포가 아닌 시위대에게 맞아 사망한 것이라는 음모론도 나왔다. 물포에 맞아 정신을 잃은 노인에게 경찰이 20초가 넘도록 물포를 ‘조준 사격’한 장면은 온 국민이 다 봤다.

# 놀랍도록 닮아있다

가끔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놀라울만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땅의 모습과 닮아있는 다큐멘터리나 영화가 있다. 그건 세상을 살아가는 군상의 모습이, 그들의 욕망이, 그에 대한 분노가, 그럼에도 명확한 한계가, 극복하지 못한 오류가 닮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학교에 가고 싶었던 말랄라와 농사를 지어 먹고살고 싶었던 백남기는 똑같이 그들의 땅을 ‘지배’하는 욕망과 한계와 오류에게 공격당했다. 무섭도록 닮아있는 공격이다.

말랄라는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가 총에 맞았고, 백남기는 “함께 먹고살자”고 말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말랄라를 공격한 탈레반은 ‘테러 집단’으로 불린다. 그들이 전통이고 신념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 폭력이고 억압이라는 것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 백남기를 공격한 이들에게도 전통과 신념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은 그 전통과 신념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 남은 이들의 몫

말랄라는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한 명의 아이, 한 명의 선생님, 한 권의 책, 한 개의 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학교에 가고 시험을 보고 책을 읽고 가끔 숙제를 빼먹고 UN에서 연설을 하면서 산다. 그렇게 일상을 지켜내는 것으로 자기의 바람이 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당연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백남기는 끝내 살아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말랄라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일상과 바람을 증명하지 못하게 됐다. 그렇다면 여든 여덟번의 손길로 벼를 키워내는 농부의 삶이 비루해지지 않아야 한다 말하고,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에 살인적인 물포가 돌아오는 일에 화를 내는 일, 백남기의 목소리는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이며, 그들의 목소리는 매일 더 커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백남기가 쓰러진 민중총궐기는 올해에도 진행된다. 11월 12일.

요즘 본 몇편

1. 아수라


20년 동안 본 정우성 중 가장 안멋있음.
멋진 배우들로 멋진 장면을 만든다고 멋진 영화가 나오는 건 아니다.
영화는 현실을 짚고 딛고 지적하지만 늘 그 너머의 것을 봐야한다.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으로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척 가장하는 건 비윤리적이다.
사실 이 영화가 현실의 통증을 정말로 보려했는지도 알 수 없다.
주지훈이 수훈갑. 하지만 이번에도 망했어요. 다섯손가락 같은 거나 찍더니.
잘나가는 무비스타로 언제쯤 돌아올 겁니까. 엉엉엉.


2. 고산자


강우석의 악덕은 크게 두 가지다. (잘게 쪼개면 더 많다는 말.)
하나는 영화를 겁내 못만든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 영화를 계속 만든다는 거다.
다른 작가와 감독에게 갔으면 더 좋은 영화가 됐을 소재와 배우들을 가져다가 엉망진창 지랄염병을 만들어 놓는다. 지난 번에 '전설의 주먹'이 재미 없으면 다시는 영화를 안만든다기에 쌩돈 내고 그 영화라 부르기에 민망한 두 시간짜리 동영상을 다 봤는데. 그거 보고 이제 강우석은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안심했는데.

암튼 이번에도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라는 꽤 괜찮아보이는 소재를 들고선 영화라 부르기에 민망한 두시간짜리 동영상을 만들었다. 차승원이 이렇게까지 지루해보일 줄이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니 그냥 탐관오리와 왜적들만 들들 볶아서는.. 감독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신 거라고 봅니다 전.

눈에 띄는 건 전국팔도 경치와 남지현. 한국에는 가볼 땅이 아직도 저렇게 많다. 해외여행은 당분간 포기. 내 우산도를 꼭 가보아야겠소. 남지현은 또래의 배우들, 그러니까 심은경이나 박은빈에 비해 성장이 좀 더딘 편인 것 같. 그래도 이 영화에서 신동미와 함께 가장 영리하게 연기하고 있는 배우. 아재들보다 낫다.


3. 그림자들의 섬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노동은 한 번도 빛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노동자들이 빛의 구역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배를 만들었고 그 배를 팔아서 이 나라는 돈을 벌었지만 정작 배를 만든 사람들은 그 배의 거대한 그림자 안에만 있었다.

노동운동의 이미지는 늘 그랬다. 피, 붉은 머리띠, 눈물, 억울함, 결연한 의지, 강고한 투쟁, 죽음, 죽음. 하지만 노동자는 사실 일하고 월급받아 밥을 먹고, 삶을 지탱하고 성취를 이루고 가끔 좌절해도 다시 살아남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 자체로 삶에 빛을 받는 사람들이고. 삶의 주체여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김주익이나 곽재규 최강서, 김진숙.

'사람'에 대한 조명이라는 점에서 인터뷰가 끌고가는 서사의 방식이 매우 적절했다. 굳이 분노하게 하려는 프로파간다가 아니어서 좋았던 건 그들이 일상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모두의 일상이고 사람은 모두 노동자라는 이 단순한 사실이, 그림자의 섬에 갇혀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려는 당연한 노력이.

다큐리뷰 - 노라 노, 역사란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란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 다큐 <노라 노>




은행이나 미용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그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는 건 패션 잡지다. ‘보그 병신체’는 패션잡지의 글들이 온통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로 이뤄져 있음을 비꼬는 말이지만 사실 어쩔 수 없다. 패션지가 소개하는 대부분의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외국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파리와 밀라노의 최신 트랜드, 현지 디자이너들의 의도를 전달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쓰는 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일까. (물론 쓸데없이 과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오히려 아쉬운 건 온통 외국에서 온 디자인뿐이라는 점이다. 디자인, 미적기준, 실용성 같은 개념이 실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면 한국의 디자인이란 한국의 디자이너가 가장 잘 구현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다.



코코샤넬,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디자이너들은 비단 패션뿐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 트렌드를 선도했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다. 디자이너들은 물론 ‘패피’들도 그 전설같은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토양 위에서 옷을 만들고 입지만 그 전설들과 동시대에, 같은 선상에서 옷을 만들었던 한국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않는다. 시작과 역사, 그리고 현재. <노라 노>는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노라 노의 삶과 역사를 조망한다. 하지만 그건 낡아빠진 과거의 영웅담이나 존경하는 디자이너에 대한 단순한 오마쥬는 아니다.   


# 장밋빛 인생



라비앙 로즈(장밋빛 인생)은 한국의 1세대 디자이너 노라 노(본명 노명자)의 전시회 제목이다. 영화는 디자이너 서은영이 노라 노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노라 노의 삶을 반추한다. 서은영은 한국 보그에 실릴 노라 노 화보를 준비하면서, 관계자들에게 노라 노의 옷이 몇 십 년 전 보그 해외판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수출용 옷에는 태극마크가 박혀있었다고 설명한다. 최초의 ‘한류’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패션업계 종사자가 대부분이었던 현장의 사람들이 대부분 노라 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928년 경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유복한 유년을 보내며 고등학교까지 다녔지만,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곧 이혼했다.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집생활에 대한 거부였다. 젊은 이혼녀 노명자는 ‘노라’라는 이름을 짓고 디자이너가 됐다.  노라 노가 일을 시작한 1950년대 한국에는 패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런 시절에 옷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옷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대중문화의 향방을 좌우하는 삶. 한국에서 처음으로 패션쇼를 열었던 디자이너. 그녀의 인생은 영화처럼 화려했고 그만큼 풍파가 많았다. 가시가 많은 장미 빛깔 같은 인생.  


서은영은 노라 노의 패션이 어떻게 현대의 패션에 기반이 됐는지, 그녀의 패션이 50년이 지난 지금에 어떻게 재해석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한다. 그러나 노라 노는 서은영의 의도가 탐탁치 않다. ‘옷이 사람보다 앞에 나와선 안된다’는 노라 노의 디자인 철학이 노라 노의 디자인사(史)를 통해 한국의 패션을 재해석하고 싶었던 서은영의 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노라 노는 후배 디자이너들이 이름 붙이 ‘장밋빛 인생’이라는 전시회 제목도 마뜩치 않다. 그녀의 삶이 장밋빛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라 노는 자기의 삶에는 오류가 많았고 때로는 어리석기도 때로는 현명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 복잡한 세월을 그저 ‘장밋빛’같은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노라 노는 과거를 회상할 때는 당당하지만 선의로 자신의 전시회를 돕는 후배들과의 미팅에서는 자주 망설이고 당혹스러워하며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지 못해 낙담하는 표정을 짓는다.  


# 갈등과 욕망, 현역의 증거



그러나 갈등은 오히려 그녀가 과거에 박제된 존재가 아님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 갈등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정립한 디자인 철학,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그리고 여전히 지니고 있는 뚜렷한 욕망. 갈등은 본래 욕망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것이다. 욕망은 미래에 대한 희구, 삶에 대한 열정, 의지와 같은 의미다. 

노라 노는 맟춤옷 일색이던 의류업계에 최초로 ‘표준화된 기성복’을 도입했다. 그녀가 열었던 최초의 패션쇼에도 일반인들이 무대 위에 올랐다. ‘패션’, ‘의상’이라는 말이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에 누구나 예쁜 옷을 보편적으로 입을 수 있길 바랐다. 노라 노가 만든 기성복은 보다 저렴한 가격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려나갔고 의류시장의 양적, 질적 발전을 추동했다.

동년배인 앙드레 김이 화려한 자수와 하얀색으로 유명했다면 노라 노는 심플한 디자인의 검은색 옷을 주로 만들었다. 그건 그녀가 옷을 만들며 ‘일하는 여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여성 노동자였기에 일하는 여성들의 옷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의 디자인 철학이 어디에 기반하는지를 드러낸다.  

여전히 긴 속눈썹을 붙이고 머리를 단장하고 블랙톤의 롱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지금도 옷을 ‘짓는다’. 오랜 단골이 옷이 필요하다고 찾아오면 수다를 떨며 스케치북에 디자인을 그려나간다. 오랜 단골의 성품과 필요와 취향을 아는 그녀의 손에 골무와 바늘이 들리고 한땀 한땀 옷을 짓는다. 세월이 지나도록 그녀의 작업방식은 노동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완고한 철학과 원칙을 지켜내고 여전히 필드에 선 현역 디자이너. 


# 온당한 존경



그래서 그녀는 후배들의 상찬이 달갑지만은 않다. 여전히 진행형인 자신의 삶을 화려한 수사들로 치장해 회고하고 싶지 않았고 자기의 역사를 장밋빛이기만 했던 것처럼 포장해 훈계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화는 그런 그녀의 태도마저도 카메라에 담아냈다. 영화는 입지전적인 실존인물에 굴복해 마냥 미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나이들어도 늙지않은 노라 노에게 온당한 존경을 표한다.

영화는 노라 노의 젊은 시절을 재연 드라마의 형식으로 재구성하는데 이같은 방법은 자칫 대상에 대한 과한 상찬이나 대상화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재연 장면들은 이 온당한 존경의 표식을 위한 장치로만 작용한다.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것, 상투적이지 않으면서도 대상에 대한 객관성을 잃지 않는 것. 그건 “때로는 현명하기도 때로는 어리석기도 했다”던 노라 노의 삶의 궤적과도 상통한다.


# 역사는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는 신파의 요소를 최대한 배제했고 단순히 감상적으로만 노라 노를 그려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울컥거림이 시작된 건 최은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던 순간이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던, 그야말로 여배우의 얼굴. (그건 지금의 젊은 여배우들에게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감상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층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는 여든 다섯의 스타일리스트, 노라. 육십여년 쯤은 가볍게 뛰어넘어버린, 아니 그보다는 육십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가슴벅차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건 아마 '시간'이 세겨놓은 주름과 그 주름의 골마다 박힌 지혜와 어리석음, 그걸 고스란히 견뎌온 묵직한 삶의 아름다움이었을테다.

그리고 기어이 눈물이 흘렀던 장면은 노라 노가 스무살 남짓의 어린 디자이너 지망생들과 전시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기억은 전승되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순환의 과정. 그건 그 자체로 역사의 단면이다. 여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나이들었지만 낡지 않은 여자와 나이 들어도 결코 낡고 싶지 않을(혹은 낡지 않을) 여자들의 만남. 역사란 고루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가슴벅찬 것이며,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주조하는 것이라는 명징한 증명이다.


# 수퍼스타 노라 노



영화엔 간간히 아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당대의 여배우들. 그 얼굴들을 찾아내며 감탄하는 것도 노라 노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전시회의 메인 모델이 돼 준 노라 노의 페르소나 최은희와 엄앵란, 김지미, 문희, 윤복희 같은 얼굴들. 당시 노라 노의 옷을 입기 위해 의상실에서 몇 시간을 대기하고 무료로 패션쇼의 모델이 돼 준 노라 노의 친구들. ‘사회문제’였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도 노라 노의 작품이다. 윤복희와는 지금도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면 몸빼바지와 억센파마가 전부인 줄 아는 ‘엄마’에게 물어보자. “엄마, 노라 노를 알아요?” 어쩌면 우리는 몰랐던 그녀의 역사, 그녀의 삶, 그녀의 장밋빛 인생이 고스란히 드러날지도. 

요즘 본 몇편

1.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의 흥행은 실패했고 그 이유는 관객들의 '익숙함'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밀은 없다는 불균질의 영화다. 영화는 이 사회의 규칙에서 벗어난다. 손예진이 분한 연홍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신경쇠약증 환자다. 그러나 영화 속 사건의 본질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사건의 본질이 세상적 상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치 암투, 음모, 범죄가 영화의 줄기를 형성할 것 같았던 세상적 기준은 영화에서 여지없이 배제된다. 거의 조롱당하는 수준으로. 그건 연출과 편집에서도 드러난다. 벌써 등장한 VOD를 동원해 두 번 세 번쯤 보고나면 감독이 던져준 떡밥들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알 수 있다. 암튼 규칙을 위반한 탈주의 영화, 그러니까 선굵은 남자들의 정치드라마에서 탈주한 발칙한 영화다.


손예진은 현재 우리나라 30대 여배우 중 가장 독보적이다. 외모 뿐이 아니라 필모를 쌓아가는 테크트리가. 흥행과 비주얼과 영화적 가치 모두를 망라하는 그녀의 필모가 감탄스러울 따름. 이 영화에서도 손예진은 엄청나게 아름답지만 그녀가 연기한 연홍은 아름답지 않다. 연홍은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환자라니까. 근데 엄청 아름답다고.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영화를 보시라고요.


2. 부산행

원래 좀비영화는 메타포 덩어리다. 좀비가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는지, 누구를 먹어치우는지, 어떻게 죽는지, 어떻게 감염되는지, 심지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까지 모두 현실을 반영하는 메타포가 된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흑인 좀비가 백인들을 먹어치우는 장면이 인종문제를 풍자한 거라고 분석되지만 사실 그건 엑스트라 배우 중에 가장 연기를 잘한 배우가 흑인이었던 게 이유다. 원래 감독에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여튼 좀비영화는 뭐든 덧씌우면 메타포가 된다.)


군복을 입은 좀비들이라든지, 좀비를 시위대라고 하는 방송이라든지, 오 필승 코리아에 달려드는 좀비떼라든지. 하여튼 한국형 좀비들이 등장하고 그것대로 한국의 현실을 풍자하는 소재가 된다.


그 풍자가 좀 아쉬울 정도로 단순하고 캐릭터들이 죄다 너무 직선이긴 하지만 오락영화, 그것도 수백억이 들어간 대규모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복잡함으로는 그 정도가 딱 좋다. 내러티브의 아쉬움은 마동석의 하드캐리와 정유미에 대한 사랑으로 얼마든지 극복가능하다. 연출과 편집은 매우 속도감 있고 기차라는 공간의 상상력이 주는 쫄깃한 쾌감도 상당하다.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의 질펀함을 기대했다면 적절치 않지만 그래도 연상호는 영화 정말 잘 만든다. VIP시사 이후 감독들이 모여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대며 "재밌다 씨발."을 외쳐댔다는 흘려들은 소문은 이유가 있는 일이다.


3. 터널

세월호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세월호의 기억에서 도무지 벗어나올 수 없고, 영화도 굳이 벗어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부분에서 세월호 사건이 매칭되고 김해숙 아줌마가 연기한 장관은 실소가 삐져나올 정도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영화의 만듦새나 배우의 연기를 이야기 하기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희망'을 갈구하게 되는데, 그건 아마 세월호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또 절망을 목격하게 된다면 도무지 견딜 수 없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은 시스템의 무능력과 잔인함 앞에 버려진 한 남자의 구조는 마땅히 실패하는 것이 개연성있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그가 결국엔 살아나길 바라게된다.


몇몇 장면들이 매우 좋거나 매우 거슬렸는데, 일테면 마지막 장면. 일상으로 돌아온 하정우가 다시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 트라우마마저 벗어내고 일상, 빛으로 복귀하는 듯한 그 장면은 완전히 사족이고 억지였지만 그래도, 가짜라도 그 희망이 진짜이길 바라는 한 순간이 간절했다.


4. 본 투 비 블루

실제의 쳇 베이커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또라이 약쟁이 범죄자다. 영화는 그의 인새을 적당히 윤색하고 허구를 가미하고 도려냈지만 그래도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또라이 약쟁이.


자기 재능에 지쳐 결국 약에 의존 자기의 삶을 파괴한 천재 뮤지션의 판타지.를 적당히 잘 따라가고 있다. 그냥 적당히.


그렇지만 나는 그런 판타지를 싫어하지 않는데다 쳇 베이커의 연주를 좋아하니가 전형적인 전기영화라도 참 좋은. 간간히 들리는 음악소리와 등장하는 이름들, 특히 마일드 데이비즈 같은 이름.


5. 우리들

화해하는 법을 언제부터 잊어버렸을까. 금을 밟으면 배제되고, 누군가의 고변만으로 배제가 그토록이나 쉬워지는 어른들의 세게의 룰을 언제부터 가르쳐 왔나. 아이들은 어쩜 그런 걸 또 이렇게 잘 배우나.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결국은 다투고 화해할 줄 모르고 멀어지다 결국 제가 더 외로워지는 어리석은 제로섬 게임 같은 세상.


라인 밖에 나란히 선 두 아이가 선 안쪽의 세상을 나란히 바라보면서, 힐끗 힐끗 서로의 시선을 경계하고 또 갈구하면서 마침내는 손을 내밀게 됐을까.

아, 이런 영화는 좀 봐줘야 한다. 내가 본건 요즘이지만 상반기에 개봉했을 테니, 2016 상반기 최고의 영화. 보고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다큐리뷰 - <모두를 위한 불평등 (Inequality For All) > '당신 눈 앞의 칼을 봐요'

<모두를 위한 불평등 (Inequality For All) > - 당신 앞의 칼을 봐요

 

 

미국에는 샌더스 열풍이 거세다. 출마 선언 당시 지지율 제로에 가깝던 샌더스가 대선이 남지 않은 시점에 거대 자본들의 후원을 받는 유력 후보 힐러리를 거의 따라잡더니 며칠 햄프셔 경선에선 기어이 힐러리를 앞질렀다.

 

기업들의 스폰인수퍼 받지 않는 샌더스는 일반 시민 지지자들의 후원금으로만 캠프를 운영한다. 지난 1월에만 2천만 달러를 모았다. 1인당 평균 기부액이 30달러가 안된다고 하니 수백만 명의 기부자가 샌더스를 대통령으로 지지한 셈이다.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샌더스에 대한 지지가 도드라진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란 말이 사멸하다시피 미국사회에서 수십년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나이든 정치인에게 미국의 젊은이들은 열광하는가.

 

# 불평등신자유주의의 종말 선고

 

<모두를 위한 불평등>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가 버클리에서 강의를 영화화 다큐멘터리다당시 강의의 제목은부와 빈곤’. 라이시는 미국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해 강조한다. 전후 생산 증대와 경기부양이 동시에 이뤄지던 시대를 지나1970년대 이후 미국사회는 소득 불균형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78 미국 남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4 8천달러였고 소득 상위 1% 계층의 평균 임금은 39 달러였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2010, 미국 남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3 3천달러로 줄어든데 비해 소득 상위 1% 소득은 배이상 증가해 110 달러에 이른다. 오늘 미국 최상위 부자 400명의 부는 미국 전체 인구 절반의 재산 총량보다 많다. 사회 전체 부의 99% 상위 1% 수퍼 부자들이 독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시대상이다.

 

미국 전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모았던 파워 복권의 당첨자는 당첨금을 받으면 일단 딸의 학자금 대출부터 상환하겠다고 말한다. 의료보험이 없이는 치솟는 병원비를 감당할 없는 미국 국민들은 아플자격 없다. 집이 없어 모텔이나 자동차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매카시즘의 시대를 겪으며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던 미국 사회가 샌더스에 열광하는 이런 불평등 사회에 기인한다. 2008 월가의 복잡한 금융공식을 무기로 이뤄진 국민 사기극이 탄로나며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월가 점령으로 이어졌고 월가 점령의 실패는 결국사회주의 기호를 호출했다.

 

사실 미국 뿐이 아니다. 영국에선 좌파인 코빈이  노동당의 당수로 당선됐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스의 시리자 모두 좌파다마치 우리 모두를 부유하게 것처럼 떠받들여지던 신자유주의의 파산선고. 미국 공화당의 지지율 1 후보 트럼프의 약진도 사실 별반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파탄을 원인으로 왼쪽에선 사회주의를 소환한 것처럼, 오른쪽에선 국가주의를 소환했을 따름. 일자리와 소득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똑같다.

 

생산수단의 공유 주장하지 않는 샌더스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단지 미국 민주당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정도의 스펙트럼이지만,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포지셔닝하고 있는 것뿐이다.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이상 체제의 불만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증상이 바로 버니 샌더스와 파시스트 트럼프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

 

지난 인기를 끌었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나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 같은 경제학자들. (피케티와 크루그먼이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미국을 비롯한 1세계 정치권의 변화가 지적하고 있는 모든 결론은신자유주의의 종말이다.

 

# 한국

 

소득 불균형, 1% 나라, 부익부 빈익빈의 사슬. 한국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재벌들이 곳같에 수백조의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을 동안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은 해고당했고, 서울 도심에선 일가족이 가난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고공농성이 일상처럼 이어지고 도심 곳곳에 세지도 못할만큼 농성천막이 세워져 있지만 정부는 쉽게 해고하고 적게 돈을 주는 법안을 만들었다.

 

샌더스 열풍을 호출한 월가 점령 시위.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촛불 시위가 이뤄졌지만 결과는 상이했다. 촛불은 결국 부가 편중된 세상을 뒤집어엎자가 아니라 먹거리와 이명박이라는 소박한 한국 중산층의 순응적인 욕망으로 수렴됐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해고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냉정하게 발길을 돌리던 시위대, 컨테이너 산성 앞에서 예비군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산성을 점령하고 넘어가려던 사람들을 점잖게 제지하던 모습, 중산층들의 순응주의는 촛불을 월가 점령과는 상이한 모습으로 조물했다. 결과 촛불은 실패했고,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점점 반동의 세월.

 

미국에서 부는 샌더스 열풍의 여파로 한국에서도한국의 샌더스 자처하는 정치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주자가착한 부자 흉내내고 있는 철새 정치인 아이러니가 아니다. 촛불에서 드러난 한국 민중들의 순응주의와 어긋난 겨냥의 발로

 

사실 샌더스와 시리자, 코빈 어떤 맥거핀에 불과하다. 극단에 달한 사회적 불평들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담지하는. 샌더스가 당선이 된다고 미국 사회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저 민중들이 분노했음을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불평등 지수로는 어디 내놔도 뒤질 같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맥거핀의 출현조차 요원하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라이시는 문제를 방에 있는 마법의 총알은 없다 말한다. 정치인 뽑아서, 대통령 뽑아서 사회 문제가 방에 해결되진 않는 다는 것이다.그말인즉슨 대통령 때문에, 정치인들 , 정당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고작 그까짓 때문에 사회가 이렇게 어긋나고 있는 아니라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분노의 방향이다. 라이시는 다시 말한다. “정치는 저기 어디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고. 경제를 만들고 경제에서 살아가고 지탱하는 것은 정치인이나 1% 부자들이 아니라 99% 당신, 그리고 나다.

  

# 그래도 역사는 변혁의 편입니다

 

시민권, 투표권, 환경보호법, 특히 환경보호법은 닉슨 정부 만들어졌어요 닉슨이 서명한 법이에요. 역사는 언제나 사회를 변혁하려는 이들의 편입니다.” – 영화

 

70년대 이후로 장장 30여년을 군림한 신자유주의에 균열이 발견되기 시작한 어쩌면 2011년의 월가 점령 시위였다. 더이상 이렇게 없다던 미국의 청년들이 몰려들었던 그날. 때쯤 한국에서도 촛불시위와 한미FTA 반대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월가 점령운동도 촛불시위도 모두 실패했다. 한국에는 친기업 보수 정권이 들어섰고 노동자들은 계속해고되고 죽어갔다. 미국은 도시빈민이 급증했고 의료보험과 교육비의 부담은 계층간의 격차를 실감하게 했다.

 

그러나 실패를 토대로 변화들. 대공황 시기 이후로 미국 민중들이 처음 경제를 입에 올렸던 이후 5년이 지나 거대 자본의 후원을 받지 않는 사회주의자 대선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주된 공약은 일반 의료보험과 교육비 문제 해결이다. 불평들의 씨앗을 자르겠다는 이야기. 그가 당선이 되더라도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자기의 바람이 무엇인지 직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촛불은 실패했지만노동운동이 거의 지리멸렬하게 끝난 지점에서 희망버스가 나왔다는 , 비록 실패했지만 한미FTA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컸다는 ,그건 한국 사회 주체 변화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여기에 바로 '희망' 있겠다. 매우 작고 미미하지만, 거기에 희망을 수밖에 없다. 과거엔 한진중공업의 85 크레인에서 2명의 노동자가 죽었지만 해고 문제를 해결 못했다. 그러나 김진숙은 살아서 크레인을 내려왔다. 대추리에 군인들을 보내 원주민들을 포박했지만 지금 제주 강정에서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앞서서 정권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으로 모든 것을 수렴하려는 태도를 비판했지만 여기엔 이렇게 차이롸 주름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영원회귀란 똑같은 사건이 영구적으로 재현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무수히 반복되는 전복과 봉합, 그렇게 봉합을 뜯어내며 새롭고 작은 균열을 켜켜이 쌓아가는 .

 

역사는 라이시의 말처럼 변혁의 편이다. 희망을 믿고 변주를 이해하는 . 다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직시해야 것은 우리의 욕망, 그리고 오늘 우리가 서있는 곳의 얼굴이다.

 

다시 들뢰즈가 말하길"욕망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 욕망은 자체로, 저도 모르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바람으로써 혁명적이다. "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우리가 해야 일은 오직 하나다. 정치인에게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바라는 욕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 샌더스든 안철수든 상징따위야 그다음에 골라잡으면 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에 가장 깊숙히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불평등의 경제다.

다큐리뷰 - 거미의 땅, 기억하는 방식과 망각하는 방식

기억하는 방식과 망각하는 방식 거미의 땅

 

 

사람은 게으르다. 게을러서 기억도 제멋대로다. 기억을 단순화 하면 편하다. 상처를 입힌 대상을 한 놈으로 압축하고, 원망하고 미워해야 할 대상도 그냥 한 놈으로 치는 거다. 그게 남의 일이라면 더 쉽다. 그냥 말하고 스스로 납득하고 필요한 만큼 잊으면 된다. “네가 아픈 건 오직 그 놈 때문이야.”

 

그러나 사실 모든 상처는 사고의 중첩이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기억과 사연과 사건이 제각각의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은 도무지 게을러서 이 중첩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아프거나 너무 귀찮거나 또는 너무 부끄럽다.

 

수없이 많은 사고와 사연이 엮여 만들어진 상처가 다시 또 엮이고 엮여 묶인 건 공간이다. 너무 아프거나 너무 귀찮거나 또는 너무 부끄러운 기억과 사연, 사람을 매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간 자체를 철거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니 그보다는 우리는 그렇게 하나하나씩 기억을 간소화하고 공간을 철거해왔다.

 

한 때 신문물과 외화벌이의 첨단에 있던 경기 북부지역의 기지촌들도 그렇다. 지금 그 공간 위엔 으리번쩍한 뉴타운이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는 잊었다.

 

# 개미처럼 일했고 거미처럼 사라졌다

 

바비엄마는 77세다. 30년이 넘게 파주 선유리에서 햄버거를 만들어 파는 선유분식을 운영 중이다. 그녀는 기지촌의 양공주로 일하던 20대에 26번의 낙태를 했다. 29살엔 결국 자궁을 드러냈다. 그 후유증으로 그녀의 건강은 온전치 못하다. 카메라는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배와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는 장면을 잡아낸다.

 

그녀는 아들 바비를 낳고 다시 임신을 했다. 결혼을 약속했던 미군의 아이였다. 그러나 이 미군은 다른 남자의 아이인 바비를 미국에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비엄마는 다시 아이를 떼어낸다. 뱃속에서 7개월을 견디다 끄집어내진 아이는 종이상자 안에서 죽어간다. 바비엄마 박묘연과 바비는 죽어가는 아이의 곁을 지켰다. 이후 바비엄마는 기지촌 여성들의 대모로 살았다. 방송에 출연하고 기지촌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러나 세상은 냉정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내 얘기엔 지어낸 것도 없고 숨기는 것도 없어. 누가 욕을 할지라도 이건 내 얘기니까. 우리는 개미처럼 일했고, 거미처럼 사라졌어

 

박인순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갔었다. 그곳에서 두 딸을 낳고 생활했으나 알코올과 약에 찌든 미국인 남편은 그녀를 폭행하고 성판매를 강요했다. 박인순은 두 딸을 남겨두고 다시 기지촌으로 돌아왔다. 정신병처럼 보이는 무()병을 얻은 그녀는 거리를 배회한다.

 

미술 심리치료를 받아 그림을 그리고 절에서 기도를 올리면서도 그녀는 때때로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는다. 대부분 미군과 포주에 대한 저주다. 포주는 글을 모르는 그녀의 돈을 갈취했다. 영화는 법당의 불경 외는 소리 위에 그녀의 저주와 욕설을 덧씌운다. 그녀는 평화와 안식을 갈구하면서도 자기 안의 분노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다.

 

왜 때렸니, 왜 돈 안줬니, 이 망나니 미군아. 다 불태워 버릴 거야

 

안성자는 흑인 혼혈로 태어났다. 엄마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기지촌의 양공주가 됐다. 그녀는 많은 기지촌을 전전했고 그렇게 옮겨 다닐수록 빚은 늘어갔다. 보건증이 없어 보건소에 감금되기도 했다. 결혼을 약속한 미군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미국으로 떠나 연락이 두절된 약혼자는 1년이 지나서야 편지로 파혼을 통보했다.

 

안성자는 KBS 인간극장 <애니의 사랑>편에 출연했지만 카메라는 그녀의 삶 전체가 아니라 흑인 혼혈로의 삶, 기지촌 양공주의 고달픈 과거만을 요구했다. 브라운관을 바라보는 세상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딱 그만큼의 이야기만.

 

# 그곳엔 유령이 산다 망각의 방식

 

박인순은 밤이면 이제 초라해진 뺏뻘 기지촌 거리를 헤맨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그녀는 골목을 걸으면서 벽에 낙서를 하거나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방에 돌아오면 불을 끄고 초를 켠다. 그리고 난해한 그림을 그린다. 가끔 괴성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기도 한다.

 

박인순을 괴롭히는 건 무병으로 인한 두통이다. 그녀는 기지촌에서 머무는 수많은 유령들을 보고 느낀다. 기지촌의 골목에는 유령이 산다. 슬프고 분노한 사람은 죽어서 작은 입자가 되고 그 수많은 작은 입자들은 실체가 되어 그 골목 여기저기를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그 골목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유령들이 실재하는 것이든, 고단한 삶을 살아온 박인순의 정신병이든 그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공간은 여전히 남아있고 박인순의 기억에 그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실재하고 있다. 그것을 유령으로 부르든, 정신병으로 부르든.

 

박인순과 바비엄마와 안성자의 상처는 모두 제각각이다. 마찬가지로 박인순이 보는 유령들의 상처와 분노 슬픔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그녀들의 (혹은 그들)의 기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우주가 얽혀 만들어낸 공간.

 

거미의 땅은 제목처럼 땅거미처럼 사라진 땅의 이야기다. 서울 경기 북부에 화려하던 기지촌 공간은 재개발과 뉴타운 정책으로 하나씩 지워졌고 잊히고 있다. 기지촌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주한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며 만들어졌다. 기지촌의 여성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양공주로 영입됐지만 그 배경에는 군사정권의 체계적인 관리와 포획’ (그건 포획이었다. 빈곤과 사회적 낙인, 배제, 망각은 당시의 정권이 그녀들을 대하던 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적어도 그녀들은 당시 사람취급을 받지는 못했다.)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을 애국자니 산업역군이니 하는 말로 포장하던 한국 정부는 90년대 이후 기지촌 운영에 대한 관여 일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기지촌 공간은 철거됐다.

 

공간의 말소는 기억도 말소했다. 세상은 뱃속에서 끄집어낸 아이의 죽어가던 모습과 보건소에 갇혀 엄마를 그리워하던 고통, 포주에게 화대마저 빼앗긴 억울함을 그냥 아픈 역사로 퉁쳤다. 그리고 그 위에 호화로운 아파트를 짓고 그 아파트 값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기지촌의 흔적은 그저 땅값, 집값을 떨어뜨리는 악재로만 남았다. 세상이 기지촌을 기억하는 방식은 필요한 만큼을 망각하기 위해서다.

 

주한미군, 외화벌이 같은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말소되고 잊힌 그녀들은 재개발, 뉴타운 같은 또 다른 정책적 필요성에 의해 다시 말소되고 또 잊힌다. 저마다의 사연과 상처를 가진 수많은 유령들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편하게 망각된다. 철거된 공간에는 망각된 유령들과 그 유령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골목을 떠도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여전히.

 

# 세라와 애니, 과거와 오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안성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의 후반부다.

 

안성자는 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성자는 세라와 애니라는 두 개의 자아를 가졌다. 세라는 기지촌 친구 애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지만 애니는 편지에 답을 하지 않는다. 세라는 애니에게 자신의 고통을 보여줌으로서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편지를 받은 애니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기지촌으로 돌아가 세라의 흔적을 되짚어보며 그 시간들의 실체, 고통을 직면한다.

 

세라는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었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었던 안성자의 과거, 애니는 그 외로웠던 애니를 마침내 인정하고 껴안을 수 있는 안성자의 오늘이다. 그녀는 외면하고 싶었고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대답하고 인정하고 마침내 감싸 안는다.

 

특별한 설명 없이 전개된 이 분열증적 화면들은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무시하고 오히려 극영화의 연출로 전개되는 듯 보인다. 한참을 지켜보고 애니와 세라가 모두 안성자임을, 그리고 그녀가 마침내 자기 안에서 화해를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아 갈 때쯤 안성자는 폐허가 된 기지촌 보건소 건물에서 춤을 춘다.

 

과거와 현재, 애니와 세라를 오가던 안성자는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공간에서 가장 아름답게 춤을 추며 현재와 과거를 인정한다. 그건 화해나 용서, 치유 따위의 안일한 말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건 그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이다. 지나온 삶의 고통도 번민도 그 갈등마저도 자신이었음을 인정하는 몸짓. 화해도 용서도 치유도 그 다음이다. 망각하고 침잠시키는 것이 아니라 끄집어내 마주하고 다투고 마침내 끌어안은 기억’.

 

# 그건 아직 우리의 몫이 아니다

 

얼마 전 한 방송에서 70년대 정권이 기지촌 운영에 어떻게 관여했는지, 그리고 지금 그 흔적을 어떻게 지워 가는지 밝혀지면서 사회적 공분이 일기도 했다. 금세 식어버리긴 했지만. 최근에는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타결한 정부에 대한 거센 비난여론이 이어지고 있다. 기지촌 여성은 사실 주한미군에게 한국정부가 제공위안부와 같다. 그리고 그 기억을 지워버린.

 

망각은 쉽다. 그 고통을 단순화해 기억하기도 쉽다. 분노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 분노를 바탕으로 그들을 위해 싸우는 일은 더욱 쉽다. 정작 어려운 건 그 기억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그 기억에서 나의 치부를 마주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저들과 싸우며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그들과, 혹은 나와 싸우는 것이 가장 어렵다.

 

용서와 화해를 섣불리 말해선 안 된다. 그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분노와 비난도 쉽게 말해선 안 된다. 그러기에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망각하고 외면하고 있다.

 

 

※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2015 올해의 영화 / 음반





올해도 영화 / 음반 결산.

돈도 안주는데 이런 거 참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돈 주면 더 열심히 해요.


어쨌든 영화 음반 각 10개씩.



# 영화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홍상수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많은 걱정을 하게된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더 나은'상황을 고려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더 나은 상황을 고려하느라 진심이나 솔직함 같은 건 선택의 고려 요소가 아니게 된다.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는 선택의 그 덧없음을 보여줘 왔던 것 같다. "그렇게 따져봤자 어차피 안될거야. 병신들아" 같은 느낌. 이 영화라고 '어차피 안될'상황이 나아졌겠냐만 그래도 어차피 안될 상황에 대한 위로 정도일까. 우리의 삶은 어차피 안될 거고 실망할 테지만 지금 이순간 솔직할 수 있다면, 삶에 조금은 충일할 수 있다면 그래도 아주 약간, 이 뭣같은 삶에서 희망의 부스러기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올해의 영화. 

이 영화를 보러 들어가던 날의 생각과 그리고 다시 영화관 밖으로 나왔을 때의 느낌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 이 느낌을 흘리고 싶지 않아요.


- 자객 섭은낭 / 侯孝賢, Hsiao-hsien Hou  





거장이라는 이름은 공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비정성시와 연연풍진 (특히 연연풍진)은 살며 본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반드시 들어갈 영화기도 하다. 허우샤오시엔이 무협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미 장풍 쏘고 낙엽밟아 날아다니는 무협은 아닐 것을 알았다.


영화의 무협은 인간의 범주를 넘지 않고 섭은랑이라는 인물 역시 인간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 자객이라는 비인간적 직업이 인간의 범주를 넘지 않고 존재했을 때 나타날 갈등 고민 연민이 그대로 담겨있으며 서기는 그 감정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 (서기 누나는 여전히 완전 멋있다.) 


화려함보다는 수려함에 가깝고 침통보다는 아련에 가까운 화면이 백미다. 새로운 무협영화 장르가 개척됐고, 그 첫번째는 이 영화다. 



- 스파이 브릿지 / Steven Spielberg





냉전시대 이야기고, 스파이 얘기인데 심지어 스필버그가 만들어서 별로 보고싶지 않았는데.

반공영화는 아니고 미국 만세를 이야기하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삶을 위대하게하고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은 정의로움과 그 정의를 지켜내는 신념이라는 아주 당연한 상식에 대한 영화. 


신념은 내용이 아니라 신념 그 자체만으로 위대하고 사실 온전한 진실과 정의는 어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장면처럼. 그 장면에는 모두 4개의 시선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남자, 거울속에 비친 남자, 자화상 속에 그려진 남자,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까지.

(그래서 모든 것엔 옳거나 그름이 없다는 양비/양시는 아니다. 그 믿는바를 지켜내려는 모든 신념이 위대하다는)


톰 행크스는 스필버그의 페르소나임에 틀림없고 스필버그는 거장임에 틀림이 없나보다. 그래도 난 ET가 여전히 제일 좋은데.



 

- 한여름의 판타지아 / 장건재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사람 '사이', 극과 다큐멘터리 '사이',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 '사이', 스크린과 관객 '사이', 카메라와 배우 '사이', 배우와 배우 '사이', 말과 말 '사이'


사이에 관한 영화이고 영화란 본질적으로 그 사이를 포착하고 담아내는 작업임을 알게하는.

그 사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도 감독과 관객 저마다 제각각일테고 그 제각각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겠다. 사실 삶의 매력이기도 하겠다.


영화는 시종일관 선량하고 예쁘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으니 로맨스 영화로서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여행지에서 만난 낮선 사람과의 사랑은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데 뭐가 됐건 영화를 보고 나와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삶이 늘 그렇지 뭐. 현실은 시궁창. 젠장. 




- 버드맨 / Alejandro Gonzalez Inarritu 





다시 사랑받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보단 사랑받은 적이 있기나 했던가.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버드맨의 가면 같은 건, 그러니까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가면같은 건 어쩌면 사랑을 받기 위한게 아니라 하기 위한 것.


삶은 늘 역설로 흐르고 인과는 무시되는 것처럼 보이거나 가끔은 정말로 무시되기도 하지만 삶의 불확실성이야말로 불확실한 삶에 세상이 주는 가장 따듯한 위로.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살기는 참 힘들고 사랑은 주기보다 받고 싶은 법. 사실 영화 한 편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달라질까.ㅋ


이냐리투는 그동안 죽음과 감정이 베베꼬이는 영화들을 만들어내더니 버드맨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어냈다. 아닌게 아니라 좋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은 이렇게 변하고 발전하는구나. 




- 킹스맨 / Matthew Vaughn





'매너 매잌스 맨'. 올 상반기 최고의 유행어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오락영화란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통쾌함과 뻔뻔함이 가장 큰 매력이다.

007도 사실은 실체를 모르고 (어쩌면 007에게 지령을 줄 것같은) 있을 듯한 고급 요원들이 아서왕과 기사의 이름을 받고 수제 양복과 포마드 잔뜩발라 넘긴 머리를 하고 앉아서 벌이는 그.


스냅백과 블링블링 악세사리를 차고 앉아 햄버거를 먹고 스마트폰을 무기삼아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당과 대비되는 정갈함. 


뭐 내용이 필요한가. 그 잔혹한 액숀신에 흐르는 엘가 같은 게 이 영화의 요체고 전부다. 


그리고 콜린 퍼스의 간지. 갓양남의 전형일까. 

  



- 소셜포비아 / 홍석재





영국의 퍼기경은 SNS를 인생의 낭비라고 표현하셨다. (그러니까 퍼디난드 이 양반아 축구 좀 잘하지.)

혹자는 SNS를 시간(S) 낭비(N) 서비스(S)의 줄임말이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트위터와 페북을 끊고 모두 싸이월드 블로그의 세계로 돌아오세요)


소셜포비아는 스릴러 같거나 추리물 같지만 매우 엉성하다. 그렇다고 그 엉성함이 흠결은 아니고.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첨예화되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병철 <투명사회>


영화가 보여주는 건 우리사회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SNS의 폐해들이다. 마녀사냥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그리고 얼마나 바보같은 말과 행동들이 이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지. 음모론 같은 거.


엉성한 남자애들이 나오기 때문에 영화 전체가 엉성하게 흘러도 어색하지 않고 실제 세계가 엉성하기 짝이 없다는 것도 더욱 여실히 드러난다. 어쨌든 결론은 이 세계에서도 우리들은 모두 패자에 불과하다는 것.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 같은 책

 

인디영화씬의 핫피플 변요한과 이주승이 동시에 나온다. 

그러고보니 이제 얘들은 인디영화씬의 핫피플이 아니라 그냥 핫피플이지. 



- 베테랑 / 류승완





얼마전에 개봉한 내부자들이 노렸던 건 베테랑이 가졌던 지위였겠지만 그러려면 영화를 그렇게 만들면 안됐지.


영화는 시종일관 가장 '대중적'인 언어로 악을 꾸짖는다. 분명 우리사회의 모순을 규명하는데는 더 많은 언어와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사실 2시간 남짓의 오락을 위해서 필요한 건 그게 아니다. 통쾌한 일침과 꿀밤.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 새끼한테 꿀밤 날려주는 좋은 형에게 박수치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구조. 여기에서 필요한 건 깊이가 아니라 정확함이다. 황정민과 유아인, 유해진은 모두 정확했고 그래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유행어가 될 듯한 명대사까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같은. 이건 사실 강수연이 술 마실 때 배우들과 종종하는 건배사라고 한다)


장점이 명확한 만큼 한계들도 비교적 뚜렷한데,

구조적 모순에는 침묵하던 경찰조직이 '내 새끼'가 다치자 몽땅 나선 다는 점이나, 일상적 폭력을 희화하고 있다는 점이나,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감안할 수 있는 범위'보다 과한 마초적 언어들이라든가. 

(그래서 사실 이 목록에 넣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한국영화도 너무 없고...)



- 잡식가족의 딜레마 / 황윤





우리는 늘 고기를 먹지만 그 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른다.

고기 역시 생명이고, 그 생명의 존엄성을 갖는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먹거리는 다 생명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의 죽음을 딛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때문에 온정적인 태도로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삶을 인정할지 묻는 것. 그리고 내 생이 어떤 죽음을 딛고 있는지를 아는 것. 감사히 여기는 것, 나 역시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을 아는 것. 


인간은 본래 채식을 하는 생물이 아니므로 나 역시 원칙적인 채식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인의 섭생이 과도한 육식에 매몰돼 있고 그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자본이 소용되고 있으며 지구 생태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야. 현재 지구에는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와 돼지가 있고 그네들이 뿡뿡 내뿜는 방귀와 가스들이 메탄가스란 이름으로 지구를 병들게 한다. 그들이 먹어재끼는 옥수수가 토양을 갉아먹고 있기도 하고.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자본주의가 부채질한 풍경이고. 


황윤 감독은 이번 총선에 녹생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섰다. 이 포스팅에는 그녀와 녹색당의 선전을 바라는 마음이 아주 많이 담겼지만 사전 선거운동은 아니다.



- 아무르 포 / Jessica Hausner 





폰 클라이스트는 천재 극작가였지만 자살했다. 생전에는 아무도 그의 작품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고 극도로 가난했던데다, 조국인 프로이센은 식민지나 마찬가지였고, 연애도 잘 안됐다고 한다. (게이였다는 얘기도 있고) 여튼 그는 베를린의 어느 강변에서 유부녀와 함께 동반자살했는데, '유부녀와 동반자살한 천재 극작가'라는 모티프는 그동안 몇 번이고 영화화 됐어도 이상할 게 없는 소재되겠다. 낭만적이지 않은가 말이야.


영화 속 클라이스트가 실제의 클라이스트와 얼마나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영화는 주로 동반자살한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의 입장에서 그려지는데 이 언니가 좀 멍청하다. 난 동반자살로 표현되는 자살 대부분이 사실은 살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남의 손에 맡길만큼 유약한 건 결국 멍청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게다가 둘은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잖아.


그에반해 클라이스트는 또라이 기질이 코믹스러울 정도로 유쾌한데, 압권은 보는 사람마다 동반자살을 제안하는 장면. 그 유쾌함이 혁명 이후의 유럽과 그 지독하고 갑갑한 세상을 살아가는 천재의 염세를 잘 그려내고 있다. 


덧,

전주영화제에서 히트를 했다는 소문에 전주는 못갈지언정 어둠의 경로를 통해 힘겹게 구했는데, 자막 ㅆㅂ.

  







# 음반



- 모노톤즈 / Into The Night





“난 처음부터 록 스타가 되고 싶었다. 아니면 의미가 없지. 비틀즈한테 고무가 됐었는데, 그렇게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만큼 행복하게 만들어줘야지. 내가 그랬거든. 로큰롤을 처음 들었을 때 너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차승우


청년폭도맹진가와 청춘98을 듣고 자란 차차키드에게 모노톤즈는 평가나 왈가왈부의 대상은 아니다. 그야말로 락스타, 경배의 대상. 로큰롤은 차차고, 차차의 음악은 로큰롤이다. 여기서 로큰롤은 일개 장르따위가 아니라 삶의 태도 같은 건데, 로큰롤을 들었을 때 행복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차차의 말처럼.


문샤이너스 해체이후 차차가 박현준과 밴드를 만들었다는 소문, 보컬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 음악이 거의 완성됐다는 소문, 박현준이 결국 밴드에서 나갔다는 소문. 뭐 이런저런 소문들만 들으면서 간간이. 하지만 모노톤즈가 나온다던 락페스티벌에도, FF에서 했다는 데뷔공연에도 가지 않았다. 삶은 로큰롤이 없이도 굴러갔고 더이상 로큰롤은 곧 행복을 의미하지도 않았던. 블로그 이름을 바꿀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름을 바꿀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았던 날들. 하지만 다시 모노톤즈의 노래를 듣고있다. 그리고.


모노톤즈의 노래를 뭐라고 말해. 그게 뭐든 난 다시 시작했고, 공연날짜를 기다리고 있고, 또 사랑을 찾을 거고, 행복해질 거다. 가끔 방황해도 괜찮고, 질퍽하거나 암울해도 괜찮다. 그래서 다시, 그렇게, 로큰롤하게. 삶을 행복하게 살아도 괜찮다.


그래도 Let's Rock'n Roll   



강허달림 / Beyond The Blues





강허달림은 독보적인 블루스 보컬이다. 사실 한국은 블루스 풍토가 워낙에 척박해서 마땅히 대중적인 블루스 보컬 하나 없는 게 사실이긴 하다만.


2집에서 어쩐지 이모같은 노래로 살짝 엇나갔던 노래가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 쓸쓸하고 사무치는. 블루스는 그래야 제 맛. 그보다는 어떤 노래를 불러도 블루스가 되는 보컬이 된 느낌일까. '기슭으로 가는 배'나 '이슬비', '거리' 같은 트랙을 들었을 때 그런 느낌이 선연하다.


리메이크란 원곡의 후광에서 멋어나지 못하거나 어설픈 도전으로 이도저도 아닌 우스꽝스러움이 되기 십상인데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아 좋았다. 마치 처음부터 자기 노래였다는 듯이.


얼마전에 본죽 광고에 강허달림의 노래가 나오던데, 

무엇보다 강허달림이 꿋꿋하게 블루스 보컬이었으면 좋겠다.  



- Kendrick Ramar / To Pimp A Butterfly





켄드릭 라마를 처음 들은 건 몇 해 전 '컨트롤 비트 대전'때문이었다. 사실 힙합은 그렇게 즐겨 듣는 편도 아니고. 어쨌든 켄드릭 라마는 컨트롤 비트 이후 "새 앨범이 나왔다니 들어는 봐야지" 정도.


켄드릭 라마의 랩은 어떤 의미에서 랩보다는 선언이나 연설과 같다고 생각했다. 'I'나 'King Kunta'같은 트랙들. 돈 많이 벌고, 예쁜 여자하고 섹스하고, 약이나 쭉쭉 빨아먹고 다니는 걸 자랑하는 게 전부인 노래가사랑은 다르게. 


무엇보다 전자음에 기반하거나 훅이 강한 멜로디만 넘실대는 주류힙합.(이라고 표현하기에 내가 뭘 딱히 대단히 많이 듣는 건 아니다만, 나 같은 애가 찾지 않아도 들었으면 주류힙합이겠지)에선 잘 들을 수 없는 음악. 펑크나 재즈에 가까운 사운드들도 매력적이다. 신나고 잘한다.의 느낌을 넘어서 분명 한 획, 내지는 거장의 냄새가 폴폴. 

(I를 듣다가 마틴 루터 킹을 생각했는데, 자기는 쿤타킨데라네. 역시 나 같은 범인과는 다르다.ㅋ)


비트나 따라하지 말고 좀 제대로 따라했으면 좋겠다.


- 정차식 / 집행자





"귀신 나올 것 같다"던 얘기처럼 그의 음악은 귀곡락이다. 듣기에만 그런 게 아니라 음악을 만드는 과정도 그렇다고. 코드 몇 개를 펼쳐놓고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옮겨적으면 그게 노래.라니 그게 작곡이냐 신탁이지.ㅋ


정차식의 음악은 격려, 위무 이런 것들하고는 상관이 없다. 노래는 지난 '황망한 사내'에서보다 더욱 처절하고 고달파졌다. 할렐루야라니. 절대자인 아버지에게 구원을 갈망할만큼.


하지만 힐링이니 하는 거짓부렁 상품이 넘쳐나는 와중에 차라리 죽도록 힘들다며 "무엇을 선택해도 후회되며 어디로 가려해도 꿈이라 허무하다"는 말은 차라리 위로에 가깝다. 나도 사는 게 좆같애. 힘내라고, 내가 너를 힐링해 주겠다고 덤비는 사기꾼들 틈새에서 그만 오직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은 느낌. 한 번만 더 내게 힘내라고 말하면 침을 뱉어주겠어요.


  

- Bob Dylan / Shadows In The Night





예전에 며칠 연속으로 밥딜런이 죽는 꿈을 꾼 적 있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가장 죽지 않았으면 하는 뮤지션이 밥딜런인가보다. 이 나이 든 히피는 여전히 한 순간도 안주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영광 같은 건 모른다는 듯이 연이어 앨범을 내놓다가 36번째 정규앨범마저 내놨다. 36집 가수라니.


시나트라의 노래들을 다시 부른 10곡으로 채워진 앨범은 이 노래가 원래 시나트라의 노래였나 싶다. (My Way는 없다.ㅋ) 전형적인 헤테로섹슈얼 마초 남성이었던 시나트라와는 또 다른. 시나트라의 도시적 우울함, 그러니까 30년대 뉴욕 뒷골목, 마피아와 시가같은 목소리보다는 더 관조적이고 더 쓸쓸하다. 70이 넘은 노인이 지나간 세월을 조망하는 것 같은.


이런 느낌은 Auyumn Leaves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온갖 드라마 같은데서 늘 끈적끈적 흐르는 노래인 이 곡을 더할 수 없게 담백하게 불러버린다. "가을 정도 지나는 게 뭘 그리 거창해"하는 것처럼.


하지만 나이든 히피의 목소리가 짙은 허무따위는 아니다. 오히려 삶을 관조해서 더욱 희망적인. That Luck Old Sun 같은 노래. 


Like that lucky old sun. Give me nothing to do But roll around heaven all day.

저 나이든 행운의 햇살처럼, 

천국을 배회할 일 말곤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아주세요. 


할아버지처럼 늙고 싶네요.



- 혁오 / 22





눈독 들이고 있던 밴드가 유명해지는 건 기분이 나쁘면서 동시에 좋은 일이다. 장기하나 국카스텐 같은. 이젠 지들 입으로 '나만 알고싶은 밴드'라고 말하는 혁오도 그 중 하나 '였다'. 망할 무한도전.


여튼 정규앨범 한 장 내지 않은 주제에 기똥찬 음악을 해내는. 이걸 어떻게 구분해야하나. 소울도 아니고 펑크도 아닌 것이 가만 듣다보면 알앤비같기도 하고. 여튼 제일 좋아하는 트랙은 'Hooka'인데 끈적거리면서 느끼하지 않은 오혁의 보컬이 가장 매력이다. (공드리가 제일 좋아. 라고 누가 말하길래 후카 끝나면 공드리 나와. 로 정리했다.. 이래저래 다 좋다는 얘기다.ㅋ) 요즘 표절 얘기도 나오고 방송에 너무 노출돼 이런저런 하마평에 시달리는 모양이더라만, 결국 나온다는 그 정규앨범이 모든 걸 설명하겠지.



- 이승열 / SYX





지난 앨범이 너무 실험적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유앤미블루 시절이나 솔로 1,2집 정도의 정서로 조금은 돌아온 느낌. 이거말곤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그냥 마냥 좋은데. 올 해 가장 많이들은 앨범. 이자 올 해의 음반을 쓸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지난 V 부터 뭔가 확고해진 형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기다리던 유앤미 블루는 이제 물건너 갔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보다는 이제 기다릴 의미가 없겠다는 느낌에 더 가깝겠다. 한국에서 '음악'을 가장 잘하는 남자. 라고 부르고 싶은. 


'a letter from'은 세월호 이야기다.

깊은 물 속에서 온 편지. 




- Jamie XX / In colour





트랜스나 EDM을 영 듣질 않아서 가끔 뒤처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클럽을 안다니는 게 문제인가 싶기도 (하지만 클럽에서 날 안받아 줄거라는 게 문제, 나이트가 더 체질이라는 게 더 큰 문제) 하지만 영 뚱땅거리는 소리가 익숙해지질 않았다.


올 여름에 EDM을 좀 '공부'하고 싶어져서 친구에게 물었더니 Jamie XX를 추천해줬다. 이걸 듣고도 맘이 동하지 않으면 다 텄으니 그냥 LA 메탈이나 들으라며. 다행히 다 트진 않았는지 이후에도 이 앨범을 꽤나 많이 들었는데, 특히 노동요로 이만한 게 없었다. 하반기에 나온 내 대부분의 글들은 대부분 여기에 힘입은. (지금도.ㅋ) 


클럽사운드에도 우아함이. 

얼마 전에 데미안 라이스를 폄훼하다 반성했던 일도 있고. 음악엔 편견을 두면 안된다.



- 김사월 / 수잔





김사월을 처음 본 건 우연히 따라간 김사월 X 김해원의 공연. 어쩐지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인디씬의 여성 솔로에게 포크는 드문 장르가 아닌데, 그게 너무 지나쳐서 이제는 좀 지겨울 지경. 이런 상황에서 김사월은 특별한 존재가 된다. 예쁘기만 하지 않은 노래지만 예쁘다. 이 말도 안되는 문장으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김사월의 앨범 커버에 있는 사진을 봐도 그렇다. 예쁘지 않은데 예뻐. 이상하게 예뻐.

퇴폐적이지만 참 곱다.   

 


- Steve Hackett / Wolflight





프로그래시브는 폼잡고 싶어서 듣기 시작했다. 뉴트롤즈나 QVL같은. 

그러다 학교 앞에 '르네상스'라는 펍의 사장님한테 물려서. (그 아트록밴드 르네상스 맞다. 신도시의 대학가 앞에 르네상스라니!!) 프로그레시브의 세례를 받게 됐는데, 괜히 QVL 노래를 신청했던 게 화근이었다. 여튼 거기서 맥주 공짜로 엄청 얻어먹었다. 스티브 해킷도 그 때 그 사장님이 소개해준. 씨디도 한 장 주셨다.  


아무튼 스티브 해킷 할아버지는 여전히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는 록음악계의 흰수염해적. 힘이 괴물같아서 아직도 엄청난 대작들을 막 쏟아낸다. 'Love Song to A Vampire'같은 거. 9분이 넘는데 후반부는 심지어 메탈 사운드도 나온다. 


아트록 앨범들은 대부분 한바퀴를 다 듣고 나면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고전파 클래식은 듣다가 간간히 졸기라도 하지. 이건 뭐 졸만 하면 쾅쾅거리니까.ㅋ


여튼 올해의 아트록 앨범을 끝으로 연말 정산도 끝.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   




다큐리뷰 - 당신과 나의 전쟁 –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기까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뉴스레터에 실린 글입니다 (링크)


2009년의 여름, 평택. 그는 거기 있었다. 해외 먹튀 자본이 떠난 후 2천여 명의 해고자가 나온 공장 구석. 한 때는 국내에서 가장 튼튼한 자동차를 만들던 그 공장의 구석에 그가 있었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을 이끌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던 국가폭력에 맨 몸으로 맞선 노동자들의 맨 앞에 그가 있었다. 

2015년의 겨울, 조계사. 그는 거기 있다. 그는 전 국민을 비정규직으로 만들겠다는 ‘개혁’에 맞섰고, 개사료보다 싼 쌀값에 항의하다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해매는 농민을 위로하고 그 책임자를 찾자고 말했다. 그 죄로 그는 희대의 범죄자가 됐고 결국 절간 한 구석에 숨어 곡기마저 끊어야 했다.

한상균. 2009년에는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의 지부장이었고 지금은 민주노총 위원장인 그가 서있는 곳은 7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갇혀있다. 
 

 

# 2009년

2004년 당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쌍용 자동차는 중국의 상하이 자동차에 인수됐다. 그러나 상하이차는 2008년 돌연 자본 철수를 결정한다. 건실한 국내 자동차 제조사였던 쌍용차의 핵심 기술과 인력을 중국으로 빼돌린 이후였다.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경영하던 4년 동안 단 한 푼의 돈도 투자하지 않았다는 건 상하이차가 철수한 이후에 드러났다. 전형적인 ‘먹튀’였다.

상하이차의 철수 이후 구조조정의 칼바람에서 2천여 명의 노동자가 해고됐다. 희망퇴직이니 무급휴직이니 하는 말들이 동원됐지만 평생 기름밥 먹으며 ‘삶’을 이어온 노동자들로선 삶의 공간을 빼앗긴 셈이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의 칼날을 피해 간 ‘산 자’와 그렇지 못한 ‘죽은 자’로 나뉘었다. 어제까지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같은 대폿집에서 소주병을 두들기던 동료들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회사는 ‘산 자’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 반대와 회생 방안을 요구하던 해고자들의 집회 바로 옆에서 산 자들의 관제 데모가 열렸다. 77일간의 옥쇄파업에는 ‘구사대’가 동원됐다. 손 안대고 코 풀기에는 분열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신동기 씨는 ‘산 자’였다. 그는 정리해고 대상이 아니었지만 77일간의 옥쇄파업에 동참했고 결국 괘씸죄로 회사에서 잘렸다. 그는 “인간적인 도리까지 저버리면서 돈을 벌라면, 차라리 도둑질을 하고 만다”고 했다. 노동자의 연대, 단결, 투쟁 같은 학습된 언어가 아니라 형들과의 의리, 사람의 도리를 말하는 듬직한 동네 형들의 언어로.

신동기 씨의 언어는 곧 해고당하고 77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언어이고, 한상균의 언어다. 땀 흘리며 일하고, 일한만큼 받고,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당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언어.

그러나 2009년의 여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벌어진 일은 당연한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을 일이 아니었다. 헬기에서 뿌려대는 최루액과 테이저건 곤봉과 군홧발은 그들을 짓이겼다. 그건 ‘짓이겼다’는 사람에게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표현으로도 모자란 광경이었다. 그보다, 그날 그곳에서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칭하는 건 노동자들과 경찰 양 쪽 모두다)

77일의 파업을 이끈 한상균은 3년형을 받아 수감됐고 만기를 채워 출소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20여 명의 ‘동료’들이 죽었다. 동생과 동료들은 그가 감옥에서 나온 뒤 ‘동지’가 됐다. 한상균은 출소 후 ‘동지’들과 함께 다시 초고압이 흐르는 공장 주변의 철탑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같은 눈높이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하늘 위의 섬과 같은 곳이었다.
 

 

# 2015년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라는 이름이 붙은 집회의 선두에 한상균이 있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었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늘리고 파견업 허용업종 확대와 임금피크제 확대시행을 골자로 하는 노동개혁안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일하고 싶다고, 일한만큼 받고 싶다고,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돈을 받고 싶다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2009년부터 7년이나 지났지만 바람은 같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도 똑같았다. 

한상균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세월호 진상규명 투쟁과 그 과정에서의 집회로 이미 체포영장이 나와 수배생활 중이었다. 민중총궐기 집회를 마친 한상균은 경찰의 체포시도를 피해 조계사에 들어갔다. 조계종단은 세속의 풍파를 피해 부처님의 가피에 몸을 의탁한 그를 품어주겠다고 나섰고 경찰은 겹겹이 조계사를 에워쌌다.

2009년, 2012년과 마찬가지로 한상균은 고립됐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뉴스에 나오는 한상균의 직함은 쌍용차 노조위원장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달라졌고,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70만 명의 노동자로 늘어났지만 그의 말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도, 그를 대하는 세상의 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9년부터 지금까지 한상균은 쭉 고립돼 있었다. 그보다는 노동자들은, 아니 차라리 그냥 우리들은 고립돼 있었다. 

사실 한상균이라고 썼지만 한상균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돈 벌어 먹고 사는 힘없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에 가깝다. 한상균은 ‘당신과 나’다. 당신과 나는 2009년의 쌍용차 공장에, 2012년의 철탑 위에, 2015년의 조계사에 있다.   
 

 

# 당신과 나의 전쟁  

당신과 나는 강경한 투쟁을 일삼는 노동자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로는 진보를 떠드는 어느 회사의 부장님일 수도 있고, 그 부장의 잘난 체에 아니꼬워 하는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일 수도 있다. 거리에 나와 복면과 밧줄을 든 투쟁하는 노동자일 수도 있고 집회 현장에 나갈 시간도 없이 야간노동을 해야 하는 파견직 노동자일 수도 있다. 이미 애초에 정리해고 당한 실직자일 수도 있고 실직이라도 당해보고 싶은 취준생일 수도 있다. 숨죽여 지내는 공장 안의 산자일 수도 있고 산자이면서도 투쟁의 목소리를 높였다가 괘씸죄로 해고당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건 당신과 나의 전쟁이다. 당신과 내가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당신과 내가 함께 싸우는 전쟁.

영화는 옥쇄파업이 끝난 뒤 여전히 복직을 위해 손 팻말을 든 해고 노동자들을 외면한 채 묵묵히 전자 출입문에 출퇴근 카드를 찍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자들을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13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궐기’라는 이름으로 서울 한복판에 몰려들었던 날이 지나갔다. 13만의 맨 앞에 서있던 사람,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노인,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경찰이 찾아온 학생들, 집에 가는 길에 체포된 젊은이. 이들과 당신과 나는 다른 이들일까. 우리는 손 팻말을 든 쪽일까 아니면 묵묵히 출퇴근 카드를 찍는 쪽일까. 아니 그보다 이런 구분은, 당신과 나와 저들을 나누는 구분은 누구의 언어일까.

당신과 나의 전쟁은 어떻게 ‘당신과 나’의 전쟁, ‘우리’의 전쟁이 될 수 있을까.
 

 

# 한상균

이 글을 쓰고 있던 날은 12월 7일이었다. 그 때까진 한상균의 거취가 결정 나지 않았지만 이 글을 송고하는 10일 오전, 한상균은 자진출두해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감옥에 있더라도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하고 호송차에 올랐다. 

언론에서는 장삼이사의 말잔치가 다시 시작됐다. 강경노선만을 고집하는 운동권의 구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심심치 않다. 

그래서 이제 당신과 나와 한상균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요즘 본 영화 몇 편


1. 자객 섭은낭





허우샤오시엔은 친절하지 않다. 굳이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보여주고 공감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서사를 해설하는데 품을 들이는대신 치밀하고 아름다운 미장센이 극을 이끌어간다.

내면을 관조하는 데에는 대사보다는 배우의 치밀한 연기가, 풍광이, 영화 속의 장치들이 작용한다. 

느린 호흡과 진행, 순차적이지 않은 시퀀스의 배열 같은 걸 두고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일종의 여백의 미 같은 것. 상상력으로 채워넣으면 될 일.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영상미란 이런 것이다 라고 단정하는 듯한 그림들 앞에 지루할 틈이나 있을까.


2. 검은 사제들





호러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장 명확히 보여준 영화가 아닐까.

엑소시즘 같은 거야 수입된 장르인데, 그게 한국 땅에서 한국인 신부들에게, 그것도 한국사회의 가톨릭 교회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조율될 수 있는가를 매우 적절한 균형감각으로 진행하고 있다. 쓸데없이 거창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아서 좋았고 디테일한 부분들 (일테면 사제와 부제들의 일상적인 모습들, 꼰대스런 군상들)까지 명민하게 잡아내서 더욱 흥미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동원. "사제복은 그런 핏이 날 수 있는 옷이 아니"라는 어느 신부님의 절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강동원은 반칙이긴 하다 좀. 돼지를 안고 있어도 케미가 쩔어.


아무튼 섹시하고 연기잘하는 중년배우.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강참치가 이 영화의 미덕 1등.


3. 내부자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 오락영화로서 다가서고자 했다면 재미가 없고 흥미진진하지도 않으니 실패.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면 얄팍하니 실패. 배우들의 간지로 승부하고 싶었다면 캐릭터를 더 섹시하게 만들었어야지. 그것도 실패. 대 망작.


이병헌의 사투리 연기가 재미있었다. 만 네이티브 호남인이 사투리 너무 어색해서 확 깼다.고하니 수긍해야지. 하여 미덕없는 대 망작 확정.


4. 혼자





머릿속에 남아있는 잔여물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들을 직시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것보다 좋은 건 잔여물을 남기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 

있지도 않은 위협들. 사실은 내가 쳐 죽인 자아.

 

우리가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는 없으니 꿈에 의존하거나 아니라면, 영화를 만들거나.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 기록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 기록이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흔히 다큐멘터리를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인 기록일까. 그보다 ‘객관’의 의미는 무엇일까, 차라리 ‘객관’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현상은 인식의 주체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그만큼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진다. 코끼리의 다리와 귀를 각각 만진 맹인들의 우화는 어쩌면 현상의 인식과 실체적 진실의 결코 좁힐 수 없는 괴리를 나타내는 건 아닐까.



# 다이렉트 시네마


다이렉트 시네마는 미국의 프레드릭 와이즈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와이즈먼은 생생한 사건이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흘러가도록, 사건의 직접성을 포착할 수 있게 카메라 앞의 대상을 내버려두는 관찰자적 접근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카메라 앞의 모든 인공적인 요소들을 제거했다. 조명과 촬영장비, 스태프까지. 인위적인 모든 요소를 거부한 채 눈앞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는 작업방식이다.

에릭 바누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 A History the Non-Fiction Film>라는 저서에서 다이렉트 시네마에 대해


“다이렉트 시네마의 감독은 카메라를 상황 속에 던져놓고 위기의 순간이 오기를 바라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다이렉트 시네마를 옹호하는 예술가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되길 꿈꾼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카메라가 접근할 수 있는 사건들 속에서 진실을 구축한다.” 고 설명한다.



프레드릭 와이즈먼, <티티컷 풍자극 Titicut Follies>, 1967



와이즈먼의 데뷔작인 ‘티티컷 풍자극’은 매사추세츠 주립병원의 간수와 치료사, 사회사업가 등이 재소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84분간의 흑백 필름에 자세히 기록한다. 와이즈먼은 인터뷰와 내레이션, 자막 같은 ‘다큐멘터리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채 병원의 인권유린과 권력을 비판한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주장이다.


다이렉트 시네마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관찰자적 순수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카메라가 존재하는 한 대상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꽁꽁 숨겨놓은 카메라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앵글 밖으로 나가버리는 야생의 맹수들을 보라. 몰래 카메라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눈치 빠른 연예인들도 사실 야생의 맹수와 같은 후각이 있겠다.)


영화는 편집의 과정을 거쳐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진다는 점에서 이미 순수한 관찰자의 시점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보다는 관찰 대상을 선정하고 관객에게 이를 소개하겠다는 생각부터 ‘객관’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대상의 선정이란 오롯이 감독의 ‘의중’과 ‘의도’아닌가.

다이렉트 시네마의 대표 작품 격인 ‘티티컷 풍자극’ 역시 매사추세츠 병원의 인권유린 실태를 고발하겠다는 와이즈먼의 의중과 의도가 반영된다.


결국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영화의 맹아인 것. 다이렉트 시네마가 주장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은 어떤 불순물도 첨가되지 않은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주장’하는 ‘진실’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영화가 제작방식에서 ‘사실의 적시’만을 견지한다하더라도, 이미 ‘순수’와는 멀어진다. 사실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에 애초에 순수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 시네마 베리떼


시네마 베리떼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민속지학자인 장 루슈에 의해 시작된 다큐멘터리 제작 이론이다. 그는 플레허티가 ‘북극의 나누크’를 찍으면서 에스키모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연출자와 등장 인물간 상호작용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실천했던 것처럼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자 곧 사람과의 관계를 기록하는 것임을 경험에 의해 인식한다.



로버트 J 플레허티,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 1922



시네마 베리떼는 주제와 연출자의 상호작용을 허용하고 심지어는 촉발시키기도 한다. 이 방법론은 카메라의 존재를 합법화시켰으며 감독에게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함께 책임지는 촉매자의 역할을 부여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감독이 특정한 순간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신 그 순간을 예상하고 자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시네마 베리떼 형식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장 루슈의 ‘어느 여름의 연대기’다. 영화는 감독인 장 루슈가 파리의 시민들에게 던지는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는 근본적인 질문 하나만으로 진행된다. 이 질문은 출연하는 시민들은 물론 감독인 루슈까지, 근원적 행복에 대해 자신을 점검하게 한다. 때로 감독은 촬영한 장면을 해당 인물에게 보여주면서 그 인물이 말했던 내용들을 수정하거나 더욱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장 루슈, <어느 여름날의 연대기 Chronique d'un été Chronicle of a Summer>, 1961



시네마 베리떼 형식은 우리가 익숙하게 ‘다큐멘터리’로 인식하고 있는 작품들에도 차용된다. 소개했던 ‘웰랑 뜨레이’에서 감독의 가족들이 내적과 학살의 기억을 가진 캄보디아의 마을공동체에 녹아들어가던 모습, ‘할매꽃’에서 감독이 외할머니의 사연을 받아들여가는 과정, 그리고 어머니에게 ‘용서’를 묻던 모습이 모두 시네마 베리떼의 제작이론에 기반을 두었다 할 수 있겠다. (그들이 제작이론에 의거해 부러 그 같은 대화를 시작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취할 수밖에 없는 그 방식들을 루슈가 이론으로 정립한 것에 더 가깝겠다.)



# 다이렉트 시네마와 시네마 베리떼


1930년대 이후로 다큐멘터리 제작방식은 격렬한 논쟁을 거치게 된다. 대상에 대한 서정적 관찰과 기록에 집중한 플래허티와 철저한 장인정신의 제작기술과 철저한 주관의식이 개입되는 지가 베르토프의 그것이다. 플래허티의 서정성도, 베르토프의 과장된 예술의식도 마뜩치 않았던 젊은 예술가들은 ‘프리 시네마 운동’이라는 새로운 문화 사조를 창출해낸다. 거기서 탄생하는 것이 시네마 베리떼와 다이렉트 시네마다. TV의 보급, 촬영과 음향장비의 발전 등의 변화에 맞춰 ‘기록’과 ‘현장성’에 방점을 찍은 미국의 다이렉트 시네마와 대상과의 관계에 작가의 미학적 관점을 반영하도록 노력한 프랑스 중심의 시네마 베리떼로 분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서로 다른 극단에 있는 제작 기풍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제작이론의 뿌리가 사실은 같다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추구하던 것은 대상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결국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기반으로 ‘진실’을 탐구하는 예술이라는 정의가 확립돼 온 과정이다.



# 역사란 대화, 그리고 현실을 다듬는 망치


기록의 의미란 ‘사실의 축적’에 있다. 그리고 축적된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찾는 탐구의 과정이다. 진실이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으며 곧바로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바라보는 사람의 세계관에 따라, 바라보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고 또 새롭게 기록된다. 그렇게 다르게 해석된 또 다른 기록들의 계속된 축적. 그것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진실, 그리고 ‘역사’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첫 장에서는 역사의 정의에 대해 배운다.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면 후자는 기록한 역사가의 세계관에 의해 해석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가 우직하게 사실을 기록함으로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이렉트 시네마와 같은 것이라면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사관의 세계에 따라 사실의 이면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를 통해 진실을 탐구하려는 시네마 베리떼와도 같겠다.


다이렉트 시네마는 진실의 의미를 사실의 나열로 좁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구도자적 끈기가 오히려 더 그 실체에 가깝다. 와이즈먼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벨파스트, 메인’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지역공동체를 끈질기게 담아낸 그 구도의 산물이다.


시네마 베리떼는 진리에 닿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다. 제멋대로 사실을 왜곡하고 변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면의 진실을 캐내기 위한 노력이다. 감독들의 다양한 세계관과 의도는 왜곡과 편향이 아니다.


청와대 탱크 진격의 사실을 두고 쿠데타로 규정할지 혁명으로 규정할지는, 그 공과 과는 무엇인지 두고 다투는 건 현재의,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대의 몫이다. 그 치열한 쟁명과 토론의 축적이 빚어내는 것이 역사다. 역사란 단면이 아니고, 알량한 단편의 사실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진실의 무게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역사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하는 것이다.


E. H 카의 말을 굳이 인용하자면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여기에 브레히트의 한마디 조언을 덧붙이자면,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을 다듬는 망치다.” 지금도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은 현실을 다듬는 망치가 될 테다.




인생의 책 10권


유행하는 인생의 책 열권 꼽기에, 어쩌다 지명돼서.



1. 오래된 미래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 가장 먼저 떠오른 책은 역시 오래된 미래다. 라다크는 여전히 언젠가는 가보고싶은 곳 1위다. 생명과 공동체라는 말을 생각해보게 된 건 오직 이 책 이후다. 책 열 권을 꼽는 건 좀 어려웠지만 한 권을 꼽는다면 단연 이 책이다.


2. 자본주의 공산주의 - 이원복

; 지금은 이원복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튼 내게 공산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알려준 건 이 책이다. 어린 나이에 훔쳐 본 삼촌 방 책장의 살짝 빨간 책들 중에 유일했던 만화책.


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 해결의 책. 아무렇게나 펼쳐서 막 읽어도 좋아요. 해결의 책처럼.


4. 만물은 서로 돕는다 - 크로포트킨

; 무릇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본성이란 서로를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부조하며 공존하는 것이라는 입증. 혹은 입증이 아니라 단지 바람일 뿐이라도, 

우리가 본래 가진 우정과 사랑을 다시 되찾자는 것, 인간 본래의 삶을 복원하자는 말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인간들보다는 훨씬 좋아보인다. 희망을 갖는 것.


5. 검은 고독 흰 고독 - 라인홀트 매스너

; 박민규는 자신의 소설에 라인홀트 매스너를 등장시켰던 적이 있는데,

그 소설의 등장인물 중 라인홀트 매스너는 지구에 유일한 '안주하지 않는 인간' 이었던 것 같다. 홀로 고독하게 어떤 것의 도움도 없이 낭가파르밧을 오르던 남자의 고독한, 하지만 그 고독이란 자신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게 하는. 뭐 그런 이야기. 몇 번이고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그리고 종종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은 친구들을 보기도 하고.


6. 노마디즘 (과 꼬뮨주의를 비롯한 이진경이 들뢰즈를 말하던 책들)- 이진경

; 사실 두꺼워서 가방에 넣기도 힘든 이 책을 그대로 다 이해했다는 건 아니고. 들뢰즈와 노마디즘, 차이와 반복, 주름 같은 말들에 내 멋대로 붙인 해석은 "그럴 수도 있지 뭐". 경직되지 않은 채 무한히 확장되는 욕망, 그리고 반복되는 그러나 완전히 동일하게 재현되지는 않는 세계에 대한. 구조에 끼워맞추고 분석하고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

여전히 어렵지만, 들뢰즈를 한국말로 이해시켜주는데 큰 도움이었던 이진경. 사실 이진경의 사사방도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줬지만, 뭐 그건 차치하고.


7.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 머레이북친

; 무슨무슨 주의자라고 불리는 게 달갑지도 않고 사실 뭐 그런 거창한 주의나 주장도 없지만 굳이 꼽으라면 사회생태주의자. 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말을 발견한건 다 머레이 북친의 책에서.


8. H2 - 아다치 미츠루

; 내가 살며 배워야 할 건 전부 만화책에서 배웠다. 이제는 대사까지 줄줄 외워버린.

내 이상형은, "내 이상형은 히까리야"라고 하는 말을 알아듣는 여자.


9. 우리글 바로쓰기 - 이오덕

; "말을 마음대로 마구 토해 내는 사람, 그렇게 토해 내는 말들이 모두 살아 있는 구수한 우리 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반갑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말에서 비로소 잊었던 고향으로, 우리의 넋이 깃들인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 이오덕.

글을 잘 쓰고 싶다고 했더니 이 책을 선물해줬었다.


10.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 한 그루씩 나무를 심자. 공사말고 농사짓자. 이윤보단 생명을. 언제고 꼭 다른 세계는 가능할 겁니다. 이 얘기들이 모두 나무를 심은 사람 안에 있다.

야간비행 단상







이송희일 감독의 새 장편영화이고, 올 해 가장 기다렸던 영화다. 








1.

너 외롭지 않냐. 라고 물었고 그 대답은 결국 영화의 말미에 나왔다. 떠나지마.


영화 속 어느 한 명 외롭지 않은 이가 없다. 사실 사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모두 (아마) 외롭다. 외롭다는 말을 건낼 사람도 한 명 없을만큼.


외로움을 나눌 수 있는 이, 

사실 곁에 누군가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단지 서로가 외롭다는 사실을 나눌 수 있는 이를 친구라고 부른다.

너 외롭지 않냐. 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친구가 없으면 세상은 어쩌면 정말로 세상은 끝이겠다. 

그 끝간데 없는 외로움을 토설할 이마저도 사라진다면.





2.

나중에 알게됐는데 영화 속 선생님으로 나왔던 현성은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에 무소속으로 나왔던 배우였다.

(그래서 영화관 옆에 있는 카페에 임순례 감독님이 앉아계셨던 건가?ㅋ)


용주와 기웅이, 기택이나 성진이가 외롭고 슬픈만큼 현성이 연기한 담임선생님과 학주도 외롭고 슬퍼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장어즙과 하체운동, 해병대로만 자기를 과시할 수 있었던 찌질이. 친구가 뭐가 중요하냐는 말, 서울대 가라는 말을 그렇게 슬픈 얼굴로 하던 담임 선생님.

(사실 나는 영화에서 담임선생님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랐었다.)





"세친구의 무소속이 어른이 된다면 저 담임의 모습일까."하는 글을 읽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세친구들도 서로를 잊어갈테고 외롭다는 말을 건낼 이도 없이 세상을 견뎌내는 어른이 된다면 외롭다는 말을 하지도, 들어주지도 못하는 어른이 되겠구나. 그리고 또 똑같은 과정은 아이들에게.



3.

어떤 면에서 영화가 끝까지 가지 않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서로에게서 위로를 구하고 서로를 이해하거나 납득하거나, 그마저도 아니라면 까닭이라도 알아채는 일이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생떽쥐페리는 비행하다 결국 사라지듯 죽었다. 빛을 찾아 날아가는 일이란 생각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하지만 끝까지 가지 않은 것이 아쉬운 건지 아니면 더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엘리베이터에서 눈물을 흘리던 소년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그 끝을 굳이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할 수나 있을까. 용주가 엘리베이터에서 주저앉아 눈물 흘릴 때 숨이 턱하고 막혀왔는데. 희망, 친구의 한 마디 눈길과 손길. 그까짓 거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영화에서마저 끝을 운운하나. 싶은 마음도. 



4.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좋았다. 이건 해피엔딩일까, 아니면. 

사실 해피엔딩이 뭐라고.


불안하고 무섭고 외로워 죽겠는데 부여잡은 건 고작 서로의 손밖에 없는 상황, 그나마 이 손도 언제까지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어두컴컴한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어쩐지 행복하게 들렸다. 이건 해피엔딩이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해피엔딩 따위 모르겠지만 그저 살아가야 한다면 그 손이 아이들에게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에 흐르던 그 음악이 행복하게 들렸던 건 아이들이 부여잡은 가냘프고 위태로운 희망에 대한 찬가. 같아서일까.  




5.

기웅이를 연기한 이재준이 잘 생겼다. 카메라가 비추는 방향에 따라 계속 다른 얼굴이 나오는 느낌이었는데,

어떤 순간순간에 기깔나게 잘생긴 눈이 보인다. 수염도 좋고. 내가 수염 페티쉬가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다. 하악하악.





그밖에 이송감독의 영화가 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신인배우의 연기력. 이 아쉽겠지만 어쩐지 이번 영화를 계기로 다음, 혹은 다다음 영화 쯤에서는 유명하고 연기도 잘하는 주연배우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후회하지 않아보다 더 상업적으로 흥행 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 (만드는 입장에서도 그걸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좀 들었고)



6.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인물은 게이어플로 만난 용주의 친구다. 

이름이 안나왔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용주를 짝사랑하던 귀요미.


생글 웃던 이 귀요미가 눈물 흘릴 때. 넌 등을 보이지 마.


 



7.




이 영화의 베스트 컷이다.

박미현 배우의 연기가 영화를 통틀어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의 연기력을 합친 것만큼 좋기 때문이다.

는 공식입장이고


진짜 이유는 그냥 아는 사람들만 아는 걸로 하자.ㅋ


클럽공연 짧은후기, 노래를 돌려받은 기분이에요






노래 잘해서 좋아해요.ㅎ



기회비용 15만원짜리, 재밌거나 의미있었을 시간까지 포함하면 더 큰 기회비용을 지불한 공연이었지만, 그럼에도 간만에 참 좋았던. 그동안 궁시렁 궁시렁 이러쿵 저러쿵 말이 참 많았지만, 이렇게 노래가 좋으면 다 좋아요. 바로 팬심 되살아나 또 하악하악.

십 수 년만에 다시 돌아온 원년멤버의 우당탕탕 드럼소리가 그 시절의 노래와 마음을 상기시켜 주는 양. 형들한테 덤비는 것 같고 감히 불러선 안될 것 같아 그것만이 내 세상이나 넋두리 같은 노래는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었는데, "사실 덤비는거면 또 그게 어때서"하며 부르던 그것만이 내 세상이 참 좋더라. 기쁨보리떡이나 슬픈인연도 무척 좋았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노래만불렀지'. 작년쯤 한창 산만하고 정신없던 시절에 부르던 노래만 불렀지는 그렇게 싫었었다. "내 노래만 불렀지를 돌려줘"라는 공연후기도 썼었는데..ㅎ 그건 마치 노래를, 어쩌면 시절을 다시 돌려받은 느낌. 그래서 오랜만에 덩실덩실.ㅎ 대학로 소극장 구석에서 덩실덩실 우린 미쳤어 하고 소리지르던 시절도 다시 생각나 울렁울렁 하기도 하고. 여튼,

며칠 전 전인권 아저씨 공연도 그렇고 요즘은 참 좋은 노래들에 귀가 행복한 시절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으니 이제 새로운 꿈을 꾸어요.ㅋ


Bandits - Another Sad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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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남성중심의 사회와, 그 세상의 폭력, 저항과 탈주, 그리고 음악을 통한 우정과 연대. 밴디트가 가진 키워드는 이렇게 매력적이다. 어쩌다 주워들은 another sad song을 찾아가다 만난 영화는 참말 근사했다. 총을 겨누는 제복의 남자들 앞에서 기꺼이 총을 버리는 여자들. 열광하는 관객들의 머리 위로 뛰어내리는 밴드. 하악하악.

90년대 초중반에 개봉한 영화들은 너무 어렸던 탓에 놓치고 지나가기가 십상이다. 차근히 하나하나 다시 구해서 봐야겠다. '그땐 너무 어렸어요 기획'쯤이 될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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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I can't really tell you, what is wrong 
But all that comes out is another sad song 
Maybe it's because I slept too long 
And nobody called me on the phone.


만신




"외기러 왔소, 불리러 왔소, 죽은 쇠를 받아다가 산 쇠를 만들러왔소"


'걸립'은 새 만신이 신내림을 받기 전 마을을 돌며 내림굿에 쓸 무구와 쌀을 얻는 일이다. 집안에 오래된 죽은 쇠를 받아다가 산 쇠로 만들며 집 사람들을 축원한다. "이 쇠 받아다 큰 만신 되세요". 하나의 만신이 탄생하는 과정은 마을이 힘을 모으고 희망을 축원하는 일이다. 만신의 굿과 기도란 개인의 부귀나 영화가 아니라 공동체, 나아가선 세계와 소통하는 일에 더 가깝다.


만신이 작두의 날을 타는 것은 마치 그녀들의 삶을 닮아있는 것 같다. 사람과 신의 경계에 위태하게 서있는 양. 어느쪽으로 기울 수도 없는 외롭고 고독하게 그저 가장 높지만 가장 위험한 곳을 살아내야 하는.


그래서 어쩌면 무속과 굿은 예술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이겠다. 사후의 구원을 보장하며 엄숙한 합창에 헌금봉투를 내미는 이들에게 돼지머리에 만원짜리를 턱턱 붙이는 굿이야 천하고 해괴한 것이겠지만 사후에 올 세계가 아니라 지금 이자리에서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고 울고 웃게 만들어주는 굿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예술이고 연출일 수 있다.


박찬경 감독은 굿이 오늘날 영화를 비롯한 대중예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넘나드는 연출을 보인다. 다큐에 캐릭터가 들어서고 현실의 인물과 극의 인물이 만나는 순간, 그러니까 경계성이 무너지며 경계의 삶이 드러나는 그 순간 만신 김금화의 삶이 더 애잔하고 슬프고 감동스러워진다. 그게 가장 잘 들어나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쇠걸립 시퀀스다. 쇠를 얻으러 다니는 어린 넘세 김새론에게 "큰 무당이 되라"며 쇠를 건네는 출연진과 마을사람들과 스탭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김금화 만신까지. 지나간 시간과 사연이 올올이 풀어해쳐지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


만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그래요, 영화보는 거 좋아한다면 이 영화는 꼭 봅시다. 김금화 선생님이 쓴 '비단꽃 넘세'도 좀 읽구요.


덧,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백현진이 부른 파경. 영화와 백현진의 목소리는 어쩌면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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