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본 몇편

1.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의 흥행은 실패했고 그 이유는 관객들의 '익숙함'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밀은 없다는 불균질의 영화다. 영화는 이 사회의 규칙에서 벗어난다. 손예진이 분한 연홍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신경쇠약증 환자다. 그러나 영화 속 사건의 본질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사건의 본질이 세상적 상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치 암투, 음모, 범죄가 영화의 줄기를 형성할 것 같았던 세상적 기준은 영화에서 여지없이 배제된다. 거의 조롱당하는 수준으로. 그건 연출과 편집에서도 드러난다. 벌써 등장한 VOD를 동원해 두 번 세 번쯤 보고나면 감독이 던져준 떡밥들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알 수 있다. 암튼 규칙을 위반한 탈주의 영화, 그러니까 선굵은 남자들의 정치드라마에서 탈주한 발칙한 영화다.


손예진은 현재 우리나라 30대 여배우 중 가장 독보적이다. 외모 뿐이 아니라 필모를 쌓아가는 테크트리가. 흥행과 비주얼과 영화적 가치 모두를 망라하는 그녀의 필모가 감탄스러울 따름. 이 영화에서도 손예진은 엄청나게 아름답지만 그녀가 연기한 연홍은 아름답지 않다. 연홍은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환자라니까. 근데 엄청 아름답다고.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영화를 보시라고요.


2. 부산행

원래 좀비영화는 메타포 덩어리다. 좀비가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는지, 누구를 먹어치우는지, 어떻게 죽는지, 어떻게 감염되는지, 심지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까지 모두 현실을 반영하는 메타포가 된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흑인 좀비가 백인들을 먹어치우는 장면이 인종문제를 풍자한 거라고 분석되지만 사실 그건 엑스트라 배우 중에 가장 연기를 잘한 배우가 흑인이었던 게 이유다. 원래 감독에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여튼 좀비영화는 뭐든 덧씌우면 메타포가 된다.)


군복을 입은 좀비들이라든지, 좀비를 시위대라고 하는 방송이라든지, 오 필승 코리아에 달려드는 좀비떼라든지. 하여튼 한국형 좀비들이 등장하고 그것대로 한국의 현실을 풍자하는 소재가 된다.


그 풍자가 좀 아쉬울 정도로 단순하고 캐릭터들이 죄다 너무 직선이긴 하지만 오락영화, 그것도 수백억이 들어간 대규모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복잡함으로는 그 정도가 딱 좋다. 내러티브의 아쉬움은 마동석의 하드캐리와 정유미에 대한 사랑으로 얼마든지 극복가능하다. 연출과 편집은 매우 속도감 있고 기차라는 공간의 상상력이 주는 쫄깃한 쾌감도 상당하다.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의 질펀함을 기대했다면 적절치 않지만 그래도 연상호는 영화 정말 잘 만든다. VIP시사 이후 감독들이 모여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대며 "재밌다 씨발."을 외쳐댔다는 흘려들은 소문은 이유가 있는 일이다.


3. 터널

세월호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세월호의 기억에서 도무지 벗어나올 수 없고, 영화도 굳이 벗어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부분에서 세월호 사건이 매칭되고 김해숙 아줌마가 연기한 장관은 실소가 삐져나올 정도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영화의 만듦새나 배우의 연기를 이야기 하기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희망'을 갈구하게 되는데, 그건 아마 세월호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또 절망을 목격하게 된다면 도무지 견딜 수 없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은 시스템의 무능력과 잔인함 앞에 버려진 한 남자의 구조는 마땅히 실패하는 것이 개연성있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그가 결국엔 살아나길 바라게된다.


몇몇 장면들이 매우 좋거나 매우 거슬렸는데, 일테면 마지막 장면. 일상으로 돌아온 하정우가 다시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 트라우마마저 벗어내고 일상, 빛으로 복귀하는 듯한 그 장면은 완전히 사족이고 억지였지만 그래도, 가짜라도 그 희망이 진짜이길 바라는 한 순간이 간절했다.


4. 본 투 비 블루

실제의 쳇 베이커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또라이 약쟁이 범죄자다. 영화는 그의 인새을 적당히 윤색하고 허구를 가미하고 도려냈지만 그래도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또라이 약쟁이.


자기 재능에 지쳐 결국 약에 의존 자기의 삶을 파괴한 천재 뮤지션의 판타지.를 적당히 잘 따라가고 있다. 그냥 적당히.


그렇지만 나는 그런 판타지를 싫어하지 않는데다 쳇 베이커의 연주를 좋아하니가 전형적인 전기영화라도 참 좋은. 간간히 들리는 음악소리와 등장하는 이름들, 특히 마일드 데이비즈 같은 이름.


5. 우리들

화해하는 법을 언제부터 잊어버렸을까. 금을 밟으면 배제되고, 누군가의 고변만으로 배제가 그토록이나 쉬워지는 어른들의 세게의 룰을 언제부터 가르쳐 왔나. 아이들은 어쩜 그런 걸 또 이렇게 잘 배우나.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결국은 다투고 화해할 줄 모르고 멀어지다 결국 제가 더 외로워지는 어리석은 제로섬 게임 같은 세상.


라인 밖에 나란히 선 두 아이가 선 안쪽의 세상을 나란히 바라보면서, 힐끗 힐끗 서로의 시선을 경계하고 또 갈구하면서 마침내는 손을 내밀게 됐을까.

아, 이런 영화는 좀 봐줘야 한다. 내가 본건 요즘이지만 상반기에 개봉했을 테니, 2016 상반기 최고의 영화. 보고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