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9. 18:55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농사꾼_이야기
0.
초등학생 때, 대기업 총수들의 자서전이 유행처럼 출판됐다. 지금이야 그게 재벌의 정계 진출을 위한 떡밥, 기업을 사유화하기 위한 신화화의 수작이라며 비아냥거릴 만큼 머리가 굵었지만 그땐 그 ‘성공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참 꼼꼼히도 읽었다.
그 자서전들의 내용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재벌 회장은 어린 시절 밥 먹듯 서울로 가출했다.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가출할 때마다 그를 찾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흘린 땀만큼 반드시 돌려주는 게 땅이다.”
어린 나이에 그 말이 왜 그리 인상적이었는지 이후로 재벌 회장보다는 농부를 동경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솔직한 노동을 하고 딱 그만큼의 대가를 거둬들이는 사람들. 생명을 키워 내고, 밥을 만들고, 키워 낸 삶이 다시 죽어 새로운 생명이 되는 세계의 순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
1.
실제로 농부를 처음 본 건 스무살무렵이다. 그 때 그는 서른 다섯이었고 어릴 적 떠났던 고향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요리사였다던 그는 아마 고단한 서울살이를 견디지 못했으리라. 논과 밭을 오가는 트럭 안에서,
둘이서만 몰래 빠져나가 차가운 커피를 놓고 낄낄거리던 읍내의 종묘사에서, 낚시대보다는 소주잔과 삶은 돼지고기에 더 집중하던 밤의 저수지에서 그는 늘 힘겨워했다. 바닥을 친 줄 알았더니 더 내려가던 나락값과 말라버린 고추모종과 빚을 갚기 위해 더 빚을 내야 하는 상황과 커가는 아이와 한미 FTA와 아무나 보고 막 짖어대는 그 놈의 강아지 새끼와 기타등등 기타등등.
우리는 만나면 늘 술에 취하는 중이거나 가까스로 술에서 깨는 중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상태였는데,
“가능하다면 농사를 짓고 싶다”는 내 말에 그가 절대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때에 우리가 술에 취하는 중이었는지 깨는 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그는 농사같은 거 짓지 말라고 했다. 환상을 갖지도 말라고 했다.
1-1.
대학을 졸업하고 더이상 농활을 가지 않게 됐을 때도 종종 그를 찾아갔다. 어느 때엔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렵다며 그 앞에서 훌쩍대기도 했다. 데모하러 상경 한 번 하지 않는다며 그를 타박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곧잘 발끈해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론은 늘 건배였다. 별 수 있나 뭐. (둘 다 씩씩거리는 걸 그치진 않았다.) 성실하게 농사를 짓다 결국 생활에 실패한 그의 형제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한숨을 쉬기도 했고, 잔뜩 늘어난 그의 빚을 걱정하기도 했다. 부끄런 고백이지만 그의 집 인근에 원전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난 처음으로 원전이 들어서는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가 받을 보상금이 그의 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일지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꽤 오랜시간 함께 술을 먹었고 고기도 먹었고 나이도 먹었다.
그 날은 전 날 청보리밭 축제를 가자는 그와 집에 앉아서 술이나 먹자는 내 이죽거림이 길어지고 결국 그가 토라져서 샐쭉샐쭉 술을 잔뜩 먹은 다음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현관문 넘어로 (거실에서 내가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로 뚫린 현관문을 열어 놓았었다!! 무려 배를 드러내놓고 자고 있었는데!!) 비닐 하우스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아, 술 진짜 많이 먹었는데. 아침나절 하우스 앞에 앉아서 해장술을 홀짝 거리는데 그가 “이제사 농사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농사도 세상도 차근차근 한 평씩 지어야 한다는 걸 나이들고 농사를 짓다보니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삶을 짓는 일이 농사를 짓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걸, 20년 가까이 농사를 짓고 마흔이 훨씬 넘어서야 이제 가까스로 조금 알겠다고. 한 평씩 한 평씩 차근 차근. ‘이 형이 나만 놔두고 어른이 됐나’하는 서운함에 “그게 신상 복분자 말뚝이 나올때마다 사재기해서 말뚝만 만 개를 가진 남자가 할 말은 아니”라고 이죽거리긴 했다.
2.
생각해보니 내 할아버지도 농사를 지었었다. 꽤 길었던 고시생활을 마친 막내 삼촌이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평생을 미장이, 목수, 노가다로 살았던 할아버지는 그린벨트 안에 있는 땅을 조금 빌려서 고추와 깨, 감자, 옥수수 따위를 심었다. 주말이면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고모네 식구들과 신혼인 삼촌 가족까지 다 모여서 그 밭에서 일을 했다. (물론 난 원두막에 앉아 삶은 감자를 까먹고 낮잠을 잤다. 본 투 비 배짱이) 드라마에 나올 법한 고부갈등 에피소드가 하루 걸러 두번 씩 발생하는 우리집 가정사에서 가장 화목했던 시절이다. 음식과 식재료에 대한 고나리질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나와 그 재능을 내게 물려준 엄마는 할아버지의 밭에서 나는 채소들을 좋아했다.
연이은 사업실패와 가난함에 허덕였던 할아버지는 밭고랑 사이에 난 풀이름 하나 모르는 것이 없었고 감자 한 알도 허투로 다루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당시닝 끔찍히도 아끼는 맏손자를 밭에 데리고 나가 풀이름을 알려주고 감자를 캐고 원두막을 같이 고치기를 좋아하셨다. 그럴 때엔 일생을 성공보단 실패가 많았던 나이든 남자의 의기소침이 사라졌다. 나이 들어서도 호두알만한 호박 반지를 끼고 다닐만큼 멋내기를 좋아하고 허영끼가 적지 않은 할머니도 밭에서 일하기를 좋아하셨다. 당신이 기른 배추며 고추로 겉절이라도 담근 날이면 전화통에 불이나도록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말 열심히 밭을 일궜고 딱 그만큼 거둬들였다. 그리고 딱 그만큼 당신들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했고 행복해 했다. 삼촌이 돈을 벌어 신도시의 좋은 아파트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사갔을 때 즈음, 그러니까 더이상 밭일을 하지 않게 됐을 즈음 할머니 할아버지는 쇠약해졌다.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어느 명절날, 난 “흙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동의를 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3.
그리고 백남기.
백남기 씨는 포도밭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다. 유신 정권에 학교에서 제적된 후, 오갈 곳이 없어 수녀원과 수도원 등을 돌아다니며 날품팔이를 하고 인천 포도밭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1980년 세 번째로 제적된 이후에는 아예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5.18 유공자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보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사라져 가는 우리 밀에 관심을 두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밀이 사라지고 미국산 방부제 밀가루가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일을 듣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한 알 한 알 우리 밀 종자를 모으고 다녔을 농사꾼 백남기의 발걸음.
그는 자신을 추방한 이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된 나라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울분이나 지난날의 업적 대신 지금의 삶을 꾸준히 이야기했다. 그는 “농민이 편하게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살았다. 백남기는 거짓된 세상에서도 꾸준히 삶의 소중함을 지켜 냈다. 유신 독재와 계엄과 신자유주의의 풍파에 맞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나 하나 한 평씩, 한 뼘씩. 백남기의 삶의 방식은 농사꾼의 방식이었다. 하나씩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잡초를 뽑았다. 비가 오기를 기다렸고 비가 내리면 감사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가 많이 난다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뿌리지 않은 씨앗에서는 싹이 나지 않는 당연한 삶. 여든 여덟번 손길을 준 벼에서만 나락이 쏟아지는 일. 범사에 감사하며 삼라만상 앞에 겸손해지는 일. 백남기가 그런지 어떻게 아냐고. 원래 농사꾼의 방식은 그런 거다. 생명과 먹을 것과 탄생과 소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삶이란 그런 거다.
4.
왜 갑자기 이렇게 길고 두서없는 글을 주절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 특별히 하고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고. 삶을 살아가는 일이 곧 농사를 짓는 것 같다라는, 한 평씩 한 뼘씩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어제 장례식장 앞에 앉아 있다가 그렇게 농사꾼의 삶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삶을 그리다가. 내 농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난 씨도 뿌리지 않고 수확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비가 온다고 투덜거리고 해가 난다고 볼맨소리를 하지는 않았는지. 뭐 그런.
암튼, 공사말고 농사짓자. 씨 뿌려야 밥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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