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댕이는 살려놔야지



[산하칼럼]20년 전의 대자보, 오늘의 대자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 

군복을 벗고 찾아온 교정에는 

막바지 진달래만큼이나 싱싱한 젊음들이 배타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네. 

시험지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언어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그때쯤 깨닫게 되지. 

남몰래 도서관에서 시험지 채우는 연습을 하는 동안 

세월은 시험지 채우기보다는 쉽게 흘러가지.


김영하 - 다시 은둔을 꿈꾸는 친구에게 (H의 결혼에 부쳐) 


2.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좋다거나 아이큐가 높다는 얘기는 뇌세포의 개수가 절대적으로 많거나 뇌용량이 큰 것 보다는 '시냅스'의 문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냅스란 한 뉴런에서 다른 세포로 신호를 전달하는 연결 지점을 뜻한다. 그러니까 뇌신경과 뇌신경사이의 전달통로.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 이 연결통로가 다양할수록 머리가 좋다는 말일텐데, 그건 아마 사고의 유연함, 내지는 다각적 관찰, 혹은 이면을 볼 수 잇는 힘. 정도로 해석되겠다. 


사람은 살면서 보통 (주입된 것이든 스스로 익숙해진 것이든) 자주 사용하는 사고체계, 그러니까 늘 사용하는 시냅스만을 사용하면서 나머지 것들은 퇴화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살던대로만, 편한대로만 살아서 우리는 조금씩 더 멍청해지고 있다는 이야기. 이게 과학적으로 맞는 것이든 아니든 그건 그 다음의 문제겠다.


3.

어쨌든 수다떨어서 밥먹고 살겠다고 나선 이상, "시험지 한 장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언어를 상실"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사실 원고지 한 장, 어느 땐 (지금도) 이 포스팅 하나를 다 채우지 못해 끼적거리고 지우기를 수십번 반복하기 일쑤다. 


4.

말을 앗아가는 것은 세상이나 사회.라기보다는 그것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고 규정하고 단정하는 스스로인 게 더 정확하겠다. 나이드는 것은 세상을 조금 더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냉철하고 객관적이라는 것은 거기서 한발작 물러서는 것이라고, 한발짝 물러섰으니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철이드는 것은 내 일이 아닌 일에 열을 내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쿨'하게 살아야만 견딜 수 있었을까. 혹은 '잉여'를 자처해야만 좀 덜 부끄러웠을까. 그렇게 어느새 사고는 단절되고 언어를 상실하고 시냅스가 끊어져 멍청해져서는. 인지부조화, 대가리를 짚더미에 쳐박고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으면 세상도 나를 보지 않을거라 여기는. 닭들마냥.


5.

저 대자보가 회자되고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저 자리엔 비슷한 내용의 대자보들이 숱하게 붙었었을테고, 저 대자보를 쓴 친구도 이미(아마?) 저 자리에다 여러차례 무언가를 호소하고 바랐을거다. 다만 그걸 보지 '않은' 것은. 쿨하게 살아야만 견딜 수 있었고 잉여를 자처해야만 좀 덜 부끄러웠을 사람들, 나나 당신. 그렇게 할 말도, 들을 말도 조금식 빼앗겨버린 사람들. 


(어쩌면 저 대자보 사진 뒤에 보이는 종이들이 어느 토익학원이나 유학원, 혹은 대기업 공모전 포스터일 것이란 짐작이 어렵지 않다.)


6.

새벽에 괜히 센치해져선 이런 되도않는 중언부언을 끼적이고 있지만 이건 올곧이 부끄러움이고 그래서 자기위안이다. 다만.


비록 어느 순간 행동하고 나서고 또 깨지고 쥐어박히고 하지는 못해도. 말만이라도 그것만이라도. 말만은 잃지 말아야지. 늘상 들었던 말이 "주댕이만 살아가지고"였으니 그나마 산 주댕이라도 고이고이 간직하고 살아야지. 그래서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시험지를 채우거나 이렇게 누구 하나 읽지도 않을 잡설을 끼적이는 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지. 


7.

여담이지만, 대학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던 대자보도 그렇고 저 학교는 대자보 참 잘 쓰네.ㅋ 


내가 쓴 (악필)대자보를 보고 굳이 뜯어와서 "학우들 우롱하지 말라"던 그 잔인한 기억이 문득 새록새록하구만. 대자보 꿈나무를 짓밟았어. 엉엉엉 

그라운드의 진짜 똥내 - 정대세에 대하여

 

 

자칭 지식인 변 모가 정대세를 공작원이라 부르며 쫓아내야 한다고 지껄이던 날, 피파는 인종차별 금지대책 테스크포스를 만들었다. AC밀란의 보아텡이 관중들로 부터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은 탓이다.

 

당시 경기에서 보아텡은 자신을 향한 인종차별 발언에 분노했고 그의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나갔다. 심판도 경기를 중단했다.

피파는 즉각 축구계에서 인종차별적 행위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그보다 며칠 앞서선 현역 NBA선수로는 처음으로 제이슨 콜린스가 커밍아웃을 했다. 새로운 팀과 계약을 준비하는 예민한 시기였다. 현재 NBA 최고의 선수인 코비브라이언트는 제이슨의 용기를 지지하고 응원하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오바마 두 전현직 대통령도 그의 용기에 지지의 뜻을 보냈다. 전설의 선수인 매직존슨과 그의 아들도. NFL의 누구는 제이슨을 비난했다가 사람들의 뭇매에 곧바로 사과를 해야했다.

 

스포츠의 가치는 우정과 협력, 상생, 상호발전에 있다. 본인은 바라지 않는다지만 정대세는 이념이나 정치색 같은 것 없이 그저 그라운드를 뛰고 골을 넣고 함께 환호하는 즐거움으로 서로가 관계맺고 우정을 나눌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렇다면 기분좋은 땀내가 나는 그라운드에 잠입해 똥내를 풍기는 공작원이 오히려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덧. 정대세의 소속팀은 삼성. 그가 JTBC를 종북좌파 방송이라 말한 것처럼 삼성 역시 종북 기업이라 비판할지 여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덧2. 정대세가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하는 까닭은 그가 자이니치, 즉 재일동포기 때문이다. 남한정부가 재일동포들을 어떻게 외면했는지, 많은 수의 재일동포들이 어째서 북조선을 자신들의 조국으로 여기게 됐는지는 또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있지만, 다큐 '우리학교'를 보면 더 좋겠다.

 

덧3. 일전에 얻어들은 성남일화의 황기청년단 이야기를 종종 살펴본다. 이 친구들, 근래부터 80년 5월을 기억하자며 응원 시작 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다고. 좋다좋아. 만일 여기에도 정치색을 운운한다면 정말로 공작 해버리겠어.더 보기

싸이, 애국주의, 쌍용자동차

시끌시끌하기에 뭔가 봤더니 싸이의 무료 공연이다. 인도는 물론이고 8차선 대로까지 교통이 통제됐다. 
수만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울광장부터 광화문 네거리까지 발디딜 틈이 없다. 

공연이 열리는 서울광장 바로 맞은편엔 쌍용자동차 대한문 분향소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분향소는 사람들에 포위됐다. 그 기막힌 대비. 
원래 장례는 축제라고 했던가. 그 사뭇 다른 두 축제가 어쩐지 서글프다. 
이 와중에 쌍용자동차 문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겠다고 목청을 높이는 이들은 더 섦다. 
인파에 치어 저녁도 못먹었다면서. 

화가 난 건 경찰에게다. 
시민들의 교통을 방해할 수 없다며 일요일 오전에 열린 걷기행사에 1차선도 내주지 않았던 그 경찰이 직접 나서 8차선 도로를 막아준다. 
공간확보를 위해서일까, 전경차도 얼마 없다. 
차를 우회하라는 경찰의 호각소리는 스물 두 명의 생목숨과 수백만 비정규직들의 삶에 대한 권리보다, 함께살자는 그 소박한 외침보다 빌보드 싱글차트 2위가 훨씬 중요하다는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 때 단 두어시간만 인도와 차도를 내어달라는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무슨 짓을 했던가. 
공동주최였던 우리 편집장은 소환장도 받았다. 

싸이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이번 히트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한다. 
마룬파이브와 자웅을 겨루는 싱글넘버라니. 서울광장이 문화행사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의의나 의도가 기껍진 않지만)무료공연도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상갓집 앞에서 깨춤을 추고 있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싸이의 노래에 해외의 언론들은 한국사회의 계급갈등을 풍자한 곡.이라는 평론을 했다고. 
싸이의 진짜 의도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 평론에 동의하고 싶다. 정말 그랬다. 

미국에서는 강남스타일이 정말 인기 있다고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기사들도 많이 있나본데, 
이 광기어린 애국주의 이벤트에 열광하는 한국의 광적인 애국자들도 봐줬으면. 

도대체 이 난데없는 무료공연의 의미는 뭐고 이 신드롬은 뭐냐. 

힘겹게 오른 버스에서 들린 라디오는 오늘 '싸이특집'이란다. 인터넷 뉴스며 SNS며 온통 싸이 이야기. 

심지어 '국가대표 가수'로서 싸이에게 주어진 막중한 역할을 엄중히 요구하는 글도 봤다. 미쳐돌아가고 있는거지. 


삼성, 월드컵, 올림픽, 싸이, 디워, 황우석 등등등. 

동원된 싸구려 국가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하는 것은 당신의 삶이고 노동이다. 


내가 버스 우회때문에 드립다 걸은게 억울해서 이렇게 툴툴거리는게 아니다. 진심이다. 

(안내도 없어서 버스 진행 역방향으로 한시간을 걸었다. 사실 엄청 억울하고 짜증난다.) 


그래도 싸이가 계속계속 잘돼서 빌보드 석권도 하고 아메리칸 아이돌 심사위원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다, 진심이 아니므니다.


10

싸이가 별로가 되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는 트윗을 하나 봤는데, 거기서 언급하는 예시가 김장훈이더라.

아 속상해서 정말.


덧붙이는.


- 공연이 끝나고 수만의 인파가 우르르 밀려나가면서 일대는 아비규환이었단다. 쌍용차 김정우 지부장은 피케팅을 하다말고 메가폰을 잡고 장내 질서 정리를 했다고. "밀지말고 천천히, 빨리가면 위험합니다"


- 인파가 빠져나가자 남은건 쓰레기더미, 구멍나고 찢어진 분향소 천막 비닐, 깨져버린 화분들, 박살난 어쩌다 카페.

조합원들은 그저 청소하고 천막을 수리하고 다시 꽃을 심고. 어느 쪽이 더 자랑스러운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 이 와중에 공연을 보러온 시민들이 많이 서명에 동참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 그 힘이 무엇보다 강해져 마침내는. 



'밥은 쌀로 짓는다' 수준의 당연한 이야기지만

1.

2002년에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가 우리동네에 유세를 왔을 때 난 맨 앞에 앉아있었다. 거기서 그는 "반미면 어떻고 친북이면 어떻냐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농민의 아들이다"라는 말도.


어린 나이였지만 그 말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난 희망돼지도 보냈고, 지지의 편지도 썼고, 노사모도 가입했다.


2.

다음 해, 수시시험을 보려고 갔던 어느대학에서 칸쿤에서 돌아가신 이경해 열사의 분향소를 봤다.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는 '농민의 삶'을 위해서 목숨을 끊어야 했다.


3.

대학 새내기 시절에 했던 세미나 중 가장 격렬했던 토론은 이라크 파병에 관한 토론이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남의나라 침략전쟁에 군대를 파병했고, 부안에 핵폐기장을 지으려고 했다. 부평에서, 포항에서, 여의도에서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죽어갔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서라는 말을 하던 이가 대통령인 정부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차례로 죽였다. MB정권을 살인정권이라 부르지만, 사실 노무현 정권에 죽은 노동자가 훨씬 많다. 노동자 농민이 잘사는 세상을 약속했던 그는 어느날 "더이상 죽음으로 항거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했다. 얼마전부터 지금까지 떠들썩했던 한-미 FTA도 노무현의 작품이다. 4대 선결조건에 스크린쿼터가 포함됐을 때 "영화인 여러분 자신없습니까?"라고 말했었던가.


4.

그리고 그는 대추리에 군대를 파병했다. 대추리에 모여있던 주민들과 신부님들과 평화활동가들과 농민들과 학생들은 '적군'이 됐다. 전장에서 적군을 포박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포박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해야했다. 그 날 여러사람이 광주를 떠올렸다.


5.

노무현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희망돼지를 돌려달라고. 당신에게 걸었던게 희망이 아니었음을 알았다고.


6.

대학도 나오지 않은 시골 촌부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조금은 평등해질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대기업 사장 출신의 경제인이 대통령이 되면 경제가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던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7.

청렴하고 깨끗해 '보이는' 기업인이 대통령이 되거나 '가장 훌륭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대통령'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가 대통령이 된다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거나 '변절한 노동운동가'가 대통령이 된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니다. 


8.

주체의 문제다. 더 행복하고 싶고 '잘' 살고 싶다고 여기는 주체 개개인의 문제다. 모든 이가 정치주체가 되고 경제주체가 돼야하는 일이다. 대통령 한 명 잘 뽑아서 세상이 나아질거라는 믿음은 어느 으슥한 골짜기에서 무림기서를 얻어 천하제일 내공의 검객이 되겠다는 심보와 다르지 않다. 사실 이건 그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9.

잘되도 니 탓, 안되도 니 탓이라는 태도는 아주 편하지만 비겁하다. 민주주의란 원래 귀찮고 어렵고 성가신 일이다. 엄청 훌륭한 제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쩌면 가장 태평성대를 이룰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하겠다고 그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면, 그 민주주의 하겠다고 이토록 치열하게 떠드는 것이라면, 그 성가심과 귀찮음 정도는 감내해야한다. 


10.

그리고 공부하고 읽고 생각해야한다.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너는 그러고 있냐.란 비난은 듣지 않는걸로.ㅋ) 보다 실체에 가까운, 보다 정의에 가까운, 보다 행복에 가까운 선택을 위해서는 말이다. 여기서 선택은 투표, 선거에만 국한하는 말이 아니다. 선거는 어디까지나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


11.

여튼 쓸데없고 안어울리게 긴 글의 요지는 '안철수의 생각' 살 돈 있으면 참세상을 후원하라는 것 입니다. 아니면 여기저기 엄청 많은 장투사업장에 연대기금을, 그도 아니라면 희망식당에서 나한테 밥 사달라는, 30일부터 시작하는 제주 평화 대행진에 단돈 2만원 내고 참가하라는.


덧,

이걸 페이스북에 먼저 올렸었는데 선배가 댓글로 좋은 구호를 하나 달아줬다.

"우리의 지도자를 바꾸지 말고 우리의 삶을 바꾸자"

 

여기 사람이 있었다



2년 반만에 다시 붙은 촛불...용산참사 현장 촛불문화제 - 참세상 기사링크








1.

어제 2년 반만에 용산참사 촛불집회가 열렸다.

남일당은 폐허로 변했고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울시 주차난 해소를 위해 주차장이 그토록 급히 필요해서 6명이나 사람을 죽였나보다.


2.

두개의 문은 5만 관객을 넘겼다.

개봉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하던 영화에 5만의 관객이 몰린건 무엇보다 영화가 갖는 힘이겠지만 타이밍의 적절함과 배급위원회의 노력도 빼 놓을 수 없겠다.

정동영에 문성근 같은 정치인들이 대선정국에 맞물려 영화관을 찾아주고

현병철같은 인사도 비록 쫓겨나긴 했지만 영화관을 찾았다. 심지어는 경찰들도 단체관람을 했다고. 영화가 가진 힘이다.


이 관객 증가추세라면 10만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거기에 공동체 상영이나 상영관 추가확보가 더 진행된다면 어쩌면 더. 더 많은 사람들이 '돈내고' '시간들여' '마음아파'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건 용산참사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보다 '좋은영화'를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건 정말 잘 만든 웰메이드 필름이다.


3. 

어제 촛불문화제에 강허달림 언니님이 왔다.

(팬심돋게) 내가 제일 먼저 알아보고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가수가 아니라 개인 참가한 시민으로 온 그녀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팬심을 제거해서 봐도 그 태도는 정중했다. 인터뷰 신청한 내가 무례해보일만큼)


그녀 2집의 '멈춰버린 세상'은 용산참사를 위무하는 노래다.


++

가느다란 길 같이 걸었던 길
그 길에 내몰린 사람들
벌겋게 달아오른 불꽃에 멈춰버린 세상

내 모든 걸 주고도 남아 바뀔 수 만 있다면
나 아닌 누구의 삶이 유지될 수 있다면야
같은 공간, 같은 눈빛, 같은 웃음소리 나누던
촉촉이 젖은 길 흘린 눈물만큼 비린세상



기자들이며 팬들을 우르르 몰고와서 사진 한 방 찍고 떠나는 유명한 사람들에 비하면 

그녀는 확실히 덜 유명하지만 집회의 맨 뒷자리에서 끝까지 집회를 바라보던 그 마음만은 진짜인게 보인다.

늘 얘기하지만 노래는 딱 그만큼만이다. 살아가는만큼 살아본만큼 바라보는만큼. 

그녀의 노래가 사랑스러운 이유. 라고하면 너무 팬심돋는 맨트인걸까.ㅋ


4.

강허달림 얘기가 나와서.

그녀는 내가 아직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는 '레드마리아'의 OST도 불렀다. 

(본인은 페미니스트 가수라고 불리거나 규정되는 것을 마뜩치 않아하는 것 같아 그렇게 부를 수는 없지만)

그녀는 경직된 규정, 소외, 허한 마음에 대한 위로.(를 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텐데)를 노래한다. 


언제가도 얘기했지만 그녀가 부른 '독백'을 듣고서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었다. 엉엉엉


여하튼 인터뷰를 거절하고 거절받은 그녀와 나는 잠시잠깐의 어색함을 겪어야 했는데 

내가 바로 팬심돋게 싸인을 요청했다. 그리고 일전에 그녀가 내 블로그에 방문해서 내 앨범평을 보고선 내가 보러간 공연에서 앨범평을 얘기했던 에피소드도. 그렇게 팬 인증을 하고서야 명함을 받아주셨. 다음에 또 어딘가에서 만나면 기어이 인터뷰 해주셨으면. 이번에도 자기이름 검색하다 또 이 글을 봐주셨으면.ㅋ 


5.

이것도 언젠가 얘기했던 것 같은에 난 모든 예술가는 좌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파를 있는 그대로만을 긍정하지 않고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상상하고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예술가는 가장 근원적인 좌파일 수밖에 없다.


사실 모든 삶이 늘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일이라면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그래서 모든 삶이 곧 예술이라는 거잖아.


7.

김석기를 비롯한 이들에게 고발운동이 시작됐다. 이른바 '나는 고발한다' 에밀졸라의 유명한 경구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역사의 공범과 역사의 목격자. 두 개의 문이 다시 앞에 있다. 

경찰특공대에게 두 개의 문은 혼란이었지만 우리에게 두 개의 문은 용기다. 진실이고 선언이고 다짐이다. 


8.

남일당이 있던 곳은 공터로 변해 주차장으로 쓰인다. 

그리고 그 흉물스러운 주차장 바리케이트 한 귀퉁이에도 꽃이 피었더라.

밟아도 밟아도 살아나 다시 피는 꽃.









강허달림 - 멈춰버린 세상



괜히 선거평가

괜히 동해서 선거평가.

1. 설레발치던 야권연대는 참패. 정권심판은커녕 지들이 심판당했.. 결국 정책적 차별성을 보여주지도, 인적 쇄신을 해내지도 못한 채 무조건 '우리도 나쁘지만 쟤들이 엄청나빠' 프레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증명 한 선거. 대선때 뭐라도 하고 싶다면 분노나 원망보다 일단 반성을. 하지만 그거 절대 못할거라는 걸 알기때문에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대로면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맞이 할 수도 있을 듯?ㅋ

2. 통합진보당은 민노당 시절부터 지켜오던 동남권 라인을 상실. 울산에서도 창원에서도 거제에서도. 남은건 관악, 노원 같은 민주당이 던져준 떡밥. 이제 확실한 민주당 2중대로 자리잡았다. 예전엔 노동당 2중대, 지금은 민주당 2중대. 2중대 밖에 할게없는 당인가보다. 이로서 한국엔 노동자 정당이 사라졌다.

3. 진보정당의 개박살. 진보신당은 1%, 녹색당은 0.4% 정확히 92년으로 회귀했다. 백기완선생이 92년 대선에서 1.5%받았다고 했었나.

4. 하지만 괜찮다. 진보신당은 21만명이 넘는 이들에게, 녹색당도 10만에 가까운 이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정규직 철폐와 탈핵과 생태주의와 인간적 삶의 복원에 동의해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언제 한번이라도 쉬운적 있었나. 김순자 아줌마가 더욱 힘을 불끈내주길, 김종철 선생님이 더 중요한 얘기를 좀만 더 쉽게 써주시길, 언젠간 그 문건에서나 보던 적녹동맹이 이루어지길 기대할 힘이 생겼다.

5. 오타까지 배낀 문대성과, 제수를 성폭행하려던 개새끼까지 당선됐다. 뭐 그렇다는거다. 이 정도로는 멘붕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을 6명이나 죽인 김석기가 출마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저정도 쯤이야 뭐.

6. 그래도 이게 사는건가

7. 선거운동한답시고 쌍차 분향소에 조문도 안간 자칭 진보정당이지만, 한일병원 노조와 쌍차, 홍대, 재능, 강정, KEC 그밖의 모든 폭력에 저항하고 있는 곳에 힘이 될 수 있길 바란다.

8. 정진'후'는 어떻게든 당선이 되는구나. 정진'우'를 바랐지만.

9. 난 처음으로 대한민국 0.5%가 됐다. 뭐 나름 뿌듯해.

10. 자세한건 내일 기사에서....물론 선배들이 쓸거다.ㅋ

11. 이 사진은 마음이 짠하네.


이 살인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 -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과 ‘살인의 추억’의 기시감


전봇대 뒤에 숨어있던 남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여성을 납치한다. 남자는 납치한 여성을 강간하고 무참히 살해한다. 피해 여성은 간곡하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경찰은 애꿎은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수사 책임자가 옷을 벗고 물러나지만 여파는 잦아들지 않는다. 이 와중에도 경찰은 사건의 본질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사건은 오리무중이고 진짜 범인은 음흉하게 다음 범죄를 기획한다.

지난 1일 벌어진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3년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줄거리다. 기시감이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와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은 놀랄만치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건의 배후엔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경찰’이고 조금 나아가면 ‘정권’이고 어쩌면 ‘국가’ 혹은 ‘체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장면을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아”

영화 ‘살인의 추억’의 주인공들은 끈질긴 수사 끝에 범인이 등장하는 시점을 알아낸다. 비 오는 날, 라디오에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가 흘러나오면 범인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들은 마침내 범인이 등장 할 시점을 포착하지만 결국 희생자가 발생한다. 촘촘한 포위망을 구축해야 할 경찰력이 시위진압을 위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살인의 추억’의 배경이 됐던 5공 말기, 경찰은 시골 아낙이나 지켜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정권을 위협하는 이들을 고문해야 했고(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가끔씩은 성고문도 해야 했고(권인숙 성고문 사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러내기 위해 철거민(상계동 철거민 탄압)들을 쫓아내야 했다.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의 경찰들도 바빴다. 그들은 꼼꼼히 라디오를 챙겨들을 필요도 없이 피해자가 위치정보를 매우 상세하게 알려줬고, 7분이 넘는 시간동안 피해자와 전화가 연결돼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 듣고 있었지만 단순한 “부부싸움 같았다”던 담당 경찰관은 상황을 수수방관했고, “단순 성폭력 사건인 줄 알았다”던 형사과장은 다음날 사건이 다 종결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하다. 이들은 바다 건너 제주의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을 ‘진압’해야 했고,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에게 최루액과 테이저건을 쏴야하는 데다가, 크레인을 점거한 노동자와 그녀를 돕겠다고 몰려든 ‘외부세력’들을 쫓아내야 했다. ‘부부싸움’이거나 ‘단순 성폭력’일지도 모르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엔 이들에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 서천호 경기경찰청장은 강정에 수 백 명의 경찰력을 투입했고, 과잉진압 논란이 있던 ‘희망버스’ 당시 부산경찰청장 이었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평택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당시 경기경찰청장이었고, 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서울 경찰청을 거쳐 경찰청장으로 영전했다)

영화가 ‘동네 바보 형’ 한 명을 잡아다가 두들겨 패서 거짓 증언을 만들어내는 모습과 신고전화 녹취시간과 경찰출동 여부 등 금방 드러날 거짓말로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모습도 닮아있다. 이들도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하지만, 이들의 ‘사건해결’은 일반적인 의미의 그것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에겐 ‘사건이 불거지지 않는 것’이 ‘해결’이지 않을까. 그들이 지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정권’, ‘국가’, ‘체제’같은 것들 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이건 ‘기시감’이라는 단순한 현상으로 설명 할 수 없다. “이 장면을 언젠가 본 적 있는 것 같아”라는 신기한 감정으로 치부하기에 이 반복은 너무 구조적이고 치밀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는가

눈 밖에 난 인물이라면 그가 연인의 딸에게 어떤 선물을 할지 고민하는 대화까지도 엿듣는 국가다. 공무원이고 노조고, 정치인이고, 언론사고 ‘닥치고 사찰’하는 국가다(굳이 정권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정권만 그런 것이 아니니까).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 맨 앞장에 태극기를 그려 넣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충성’을 맹세시키던 국가다.

세금을 내고, 법규를 준수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것은 ‘국가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 곳에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을 국가가 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결과 오늘 날 돌아온 건 치안의 바깥으로 내던져지는 결과다. 어느 경우엔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국가에게 사생활이 파헤쳐지거나 직접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교과서는 분명히 우리의 안전한 삶과 행복을 위해서 국가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는데, 실상은 그 반대다. ‘국가’(로 대변되는 그 무엇)의 존속과 안위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경찰과 군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따금 그들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살인의 추억’의 시대와 ‘수원 성폭행 살인사건’의 시대 사이엔 30년에 가까운 시간이란 간극이 있지만, 여전히 동시대라 불러야 한다. 사람보다 국가가 우선시 되거나 국가를 위해 사람이 무시되는 시대. 공권력의 의미가 ‘공익’을 위한 권력보단 ‘공인’을 위한 권력으로 이해되는 시대.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이 지겨운 반복의 주범은 사실 우리이기도 하다. 몰이해 혹은 무지는 망각이나 단념보다 더욱 큰 죄악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왜 화를 내야하는지 알지 못하는 일.

“부부싸움인 줄 알았다”는 말의 기저엔 부부간의 폭력은 개입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일한 의식이 깔려있다. “단순 성폭행인줄 알았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 성폭행 사건은 긴급을 요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을까.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경찰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무책임한 사람들의 반응에 더 큰 상처를 받는다고도 말하고 있다. 10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유가족은 “그러게 왜 밤중에 돌아다니냐는 악성댓글이 달리고, 언론들은 멋대로 사건을 부풀린 자극적 기사를 내고 있다”고 말하며 “이런 일들이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일에 무던해질 대로 무던해진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도 무던해졌는지 모르겠다. (이 유가족이 출연한 라디오 프로그램도 애초에 프로그램 공식 웹사이트에 그의 실명을 공개했다가 그가 익명을 요구하자 부랴부랴 실명을 삭제했다)

감수성의 문제다. 자신과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의 정도를 인지하는 능력의 문제다. 부족한 감수성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폭력도,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도 인지하지 못하게끔 한다. 국가가 살인을 방관해도, 부부간의 폭력을 일상으로 치부해도, 성범죄의 책임을 오직 피해자에게 전가해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시대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문제의식조차 없는데 어떻게 나아갈까. 그저 지긋지긋한 반복뿐이다.

살인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 - “미치도록 잡고 싶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살인의 추억’ 메인포스터가 하는 말이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를 잡을 수 없었던, 오늘날 수원에서 또 한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경찰이 수사보다 축소를, 사과보단 은폐를 선택하게 했던 ‘그 것’. 그 범인을 미치도록 잡고 싶지만 ‘그 것’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어딘가에서 음흉하게 웃고 있다.

어쩌면 ‘그 것’은 가까이에 있을지 모른다. 부부간의 폭력은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머리에, 성폭력의 원인은 피해 여성에게 있다고 말하는 당신의 혀 끝에, 피해자의 처신을 운운하는 댓글을 달고 있는 당신의 손 끝에.

추억은 과거에 머물러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때 추억이 된다. 반복되는 것은 추억이 아닌 현실이다. 우리가 전부 달려들어 죽인 그녀. 우리에게 이 살인만은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비키니응원 논란에 대하여 - 뿌리 깊은 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본거야


지난 주말 비키니응원 논란을 보다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생각났다. 좀 뜬금없이. 남한사회 똥멍충이 마초이즘의 여성에 대한 객체화에서 로자를 떠올리는 건 사실 그녀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ㅋ

맑스의 친구였고 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대장 격이던 베른쉬타인을 수정주의라 비판하고 그 레닌과도 맞짱을 뜨던 이 혁명가는 장애를 가진 유대인이다. 그리고 여성.

로자는 그랬다. 그녀는 여성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유대인이라서, 코뮤니스트라서 받아야 하는 온갖 모순을 직접 맞닥뜨려야 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의 삶의, 세상의, 혁명의 온전한 주체에서 비껴 서지 않았다.

언젠가 로자가 스파르타쿠스단을 이끌던 혁명가, 레닌에게 거의 유일하게 대항 할 수 있었던 이론가로서의 평가보단 흔치않은 '여성 혁명가'로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끝까지 그녀는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보다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로 존재한다. 더욱 속상한 일은 그 객체화의 주범이 그녀를 동지라 말하던 이들이란 사실이다.

남한사회는 여러모로 많이 구리지만 그중에서도 젠더문제에 대한 인식은 구림오브 구림, 병신큰잔치. 여성의 성이 정치주체인 남성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성들에게 호출되는 것은 참여가 아니라 도구화다. 자발적인 참여니, 표현의 자유니를 운운해선 안 된다. 그 행위, 그러니까 여성의 특정 성징을 통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서로 말 안 해도 알고 있잖나. 그렇게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다면 왜 성범죄는 여성들의 야한 옷차림 때문이고 여성들의 방탕한 생활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거냐. 여성이 성의 주체로서 나서는 일은 음란이고,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객체화 되는 일은 자유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오만하고 안하무인한 모순인가.

자신만은 그 유치한 마초이즘의 수혜자가 아니라는 알량한 자기위안 또한 역겹다. 이미 남한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것을 깨트리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이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공범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사회가 얼마나 남성 우월주의적 가부장제인지를 인식조차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지보다는 외면, 죄악에 가깝다. 그러면서 그것은 진보라는 가치로 에둘러 포장한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누구더라, '춤 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저 즐거운 진보운동을 운운하는 꼼꼼한 분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기도하다. 난 그 유치한 장단에 춤 출 수가 없다. 그건 유쾌보단 유치에 그보단 폭력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작 이런 사건 하나로 분열을 일으키면..' 운운할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젠더의 문제는 고작을 운운할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그건 이 사회의 인권과 민주를 가늠하는 바로미터. 그리고 무엇보다 주체의 확장만이 운동의 본질이라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런 여성의 성에 대한 도구화는 다신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정치주체의 확장을 그렇게 얘기하던 뿌리 깊은 나무는 도대체 어디로 본거야. 우라질.

스크랩의 소통


글쓰기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읽히기 위한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글의 존재는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치유하는 글쓰기, 그러니까 일기같은건 어쩔거냐는 물음도 있지만, 그건 작자 자신이 독자가 되는 경우니 마찬가지인거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도 얘기했지만 사유는 읽고 쓰고 토론하고 쟁명하며 확장된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큰 즐거움이다. 세계가 넓어지는 즐거움. 그 즐거움을 기술의 발전으로 확장시켜 온 역사가 아마 미디어의 발달史. 구술에서 문자로, 활자로, 영상으로, 마침내 지금 2.0이라 부르는 시기까지.

그래서 미디어의 발달사는 다시 사유의 발달사로 이해할 수 있겠다. 관심을 두는 관계망이 점차 넓어져, 처음엔 가정에서, 마을로, 국가로, 마침내는 세계로. 이건 세계가 분절돼있지 않고 우주 삼라만상이 결국 하나의 관계로 이루어져있음을 이해하고 소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글의 본질은 읽히기 위한 것, 그것은 다시 말해 모든 언어는 관계맺기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SNS니 블로그니 하는 발달된 기술은 소통을 용이하게는 하였으나 소통을 가능케 했는지는 모르겠다. 깊은 사유와 친절한 우정의 언어 대신에 사람들은 140자의 강렬하고 섹시한 문장과 그 섹시함을 가능케하는 폭력, 그리고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네트워크 위에서의 무책임으로 대화를 가장한 웅변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타인과의 공명을 통한 확장을 시도하지 않고 모든걸 자기안으로 수렴하려한다. 그건 트랙백 보단 스크랩에 익숙한 풍경이다. 예쁘거나 웃기거나 자극적인 문장을 RT하고 LIKE해서 수용하는 것으로 소통의 과정을 마무리한다. 그 과정 어디에도 공명과 확장의 자리는 없다.

화제인 '나는 꼼수다'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수 있겠다.   기사링크
위트와 조롱으로 시작한 대화를 사유도, 소화과정도 없이 받아들여 이젠 그 외연의 확장에만 신경쓰게된 불통의 집단. 그게 지금 나는 꼼수다와 그 팬들의 좌표다. 그들이 내걸고 있는 최대의 가치가 소통이고 표현의 자유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건 전형적인 스크랩의 소통이다.

기존의 언어와 합리성이 결국은 그 견고함을 더 가중시킨다. 의심하고 탈주하려는 사유, 그것을 깨고 나서려는 욕망이 결국 사유의 목적이고 진보의 의미다. 결국 모든 언어의, 글쓰기의 목적이다.

고민하고, 의심하며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또 생각하고, 이해하며 써야한다.
이건 사소한 한 줄의 텍스트지만, 그 의미란 사실 세계와의 관계맺기를 시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목적은 왜 열심히 쓰고 방문자도 곧잘 느는데 트랙백도 댓글도 없냐는 투덜거림. 징징징.
확 이글루스로 다시 돌아가버릴까보다.ㅋ





Sigur Ros - Gobbledigook

단상 - 어쩌다보니 정치Ver


1.
서울대학교에 김정일분향소를 설치한 학생이 고발당했다. 난 김정일의 죽음을 과도하게 애도하거나 분향소가 차려진다해도 조문할 생각따윈 없지만,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이들의 정치적 자유까지 막을 생각은 없다. 다만 마찬가지로 그들을 비판할 나의 정치적 자유 역시 요구하겠지만. 볼테르의 유명한 경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여간해선 잘 지켜지지 않는 가치다. 언론법 수업시간에 교수님은 늘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엔 표현의 자유가 명시돼있음을 강조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2.
'닥치고'라는 말에 염증이난다. 무슨 말만하면 이젠 유행처럼 '닥치고'를 연발한다. 그건 닥치고 정치하라는 이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저들의 논리다. 닥치고 일하라던게 새마을 운동이었고, 닥치고 돈벌라는게 신자유주의, 엠비노믹스의 실체다. 언어를 상실하는 것은 저항을 상실하는 것이고, 주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가 되지 말라는 말. 그게 바로 '닥치고 정치'의 본질이다. 정치의 본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닥치지 않는 일'이다.

3.
정명훈 얘기로 타임라인이 시끄러워진게 한참 전인데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다.(이게 다 진중권때문ㅋ) 정명훈이 얼마를 받건 마에스트로에 대한 거장 예술인에 대한 예우와 그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감수성의 중요성에 대해선 일말의 의심도 없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물 없인 살아남을 수 없지만, 노래없인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또한 고급예술이니 대중예술이니 하는 것들로 예술을 나누는 일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접근성과 공공성의 문제,그건 좁혀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고 그에 남한사회가 극도로 미진할 뿐이다.

다만, 몇 억씩이나 받는 시향의 상임지휘자와 백만원을 겨우 넘긴 급여를 받는 연주자가 같은 오케스트라에 있을 때 양질의 예술이 만들어지리라곤, 또 예술이 공공성을 가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가지고 정명훈 개인을 까댈거냐, 그럼 정명훈이 자기 연봉에서 연주자들 월급 인상해주랴.라고 물으면 할 말 없지만, 사실 세계적 지휘자인 그에게 가난한 예술인들이 연대의 손길을 요구하는 것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또 얼마나 있을까. 그에게 연대의 손과 더 적극적인 대처를 요구하는게 그렇게 몰염치하고 비상식적인 일일까. 심지어 그도 바스띠유에서 해고됐을 때 그렇게 예술적 동지들의 연대를 통해 구원받았었는데.

예술이 공공성을 갖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예술이 공공재임을 모두가 인식하는 일이 가장 먼저겠지만, 동시에 창작자들의 삶의 문제도 해결하는 노력이 동반돼야한다. 이걸 가지고 닭이냐 달걀이냐를 놓고 싸우듯이 아웅다웅하기만하면, 나라면 일단 외면하게 될 듯.

4.
강정에서 27명의 활동가가 연행됐다. 문정현, 문규현 신부님도 포함해서. 대추리가 생각나는건 어쩔 수 없다. 구럼비 바위는 조금씩 조금씩 깨져나가고 있다고한다. 연대가 필요한 곳은 강정이다. 검찰청 앞에서 어느 쇼맨이 구속되는 현장이 아니라. 비행기 삯이 비싸다면, 강정 상단에서 멸치라도 한박스 주문하는 연대.

5.



종편이나 케이블이나
정치성같은건 사실 없다.
중요한건 팔 수 있느냐 없느냐.
체게바라가 길바닥 티셔츠의 인기프린트가 될줄 생전엔 알았을까.
자본이 무서운건 그점이다. 자신을 향한 저항까지도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힘.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유머와 위트가 계속됐으면.

크리스마스엔 따듯한 멸치국수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 (누가복음 6장 23절,24절)

이틀간 술독과 강추위의 고통을 오가느라 크리스마스가 뭔지는 스케치북에 성시경이 아바타 분장한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으니, 신자는 아니어도 나도 성경말씀이나 하나.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보살피러 와주신 예수께서는 이런 멋진 말씀도 남기셨다. 더 뺏기 위해서, 더 갖기 위해서 자기 아닌 다른 것들의 생명도, 가치도, 삶도 앗아가는 이들에겐 위로도 기쁨도 없다.

주민들의 생활을 빼앗고, 붉은발 말똥게와 돌고래의 삶을 빼앗고, 평화를 빼앗고, 연대와 희망을 부수는 이들에게 피고름 뚝뚝 떨어지는 솔로 크리스마스의 외로움을. 생명과 평화와 연대의 가치를 아는 이들에겐 따뜻한 멸치 다시마 국물로 우려낸 국수 한그릇과 감귤 디저트를. 주문은 아래를 참고하시기 바람미다.

제주 해군기지건설 저지투쟁을 지원하는 강정평화상단!

savejeju@daum.net 전화 010 6286 2131

맛젓갈(200g)25,000원
다시마(200g)10,000원
멸치(200g)10,000원
고등어(1Kg)23,000원
감귤 (10Kg)25,000원

++
일단 귤 한 박스와 멸치를 좀 사야겠다.
하지만 일단 엄마와 상의해야 하는데...ㅋ


Sigur ros - Illgresi

대중정치


다중이니 대중지성이니하는 말에 신뢰가 없는 나로서는 민주주의의 구동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보다는 대중이나 민중이라는 그 모호한 주체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대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그 무엇은 어리석고 폭력적인데다 염치도 없고 반성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기억력도 없다(나쁜게 아니다. 없다.)

그럼 민주주의는 그 실체도 모를 주체에 의해 작동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정치의 주체가 모호해지고 대중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그것들'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구동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할때면 늘상 한다는 말이 "그래서 플라톤적 철인정치에 대한 예찬이냐"는 빈정거림이지만, 뭐 그럴 수도 있고.

분명한건 민주주의, 합리적 개인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고 그들 모두가 스스로 저마다의 정치를 구현해내는 상호부조적 시스템. 그것은 언제까지나 놓아서는 안되는, 놓을 수 없는 이상이라는 것. 그건 일종의 정언명령, 도덕법칙.

그건 다시말해 어리석고 우매한 주체들의 우매한 행진을 바라봐야만 하는 것이다. 고작 씁쓸해하거나 잔소리만 하면서. 막힌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가 볼 수밖에 없는 형국. 그나마의 위로라면 막힌 벽을 오방세게 들이받으면 금이라도 가지 않을까하는 얄팍하고 알량하지만 간절한 희망.쯤??

뿌리깊은 나무 보다가 갑자기 헛소리 작렬.

김진숙의 승리


고백하건대 사실 난 이길 수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책에서건 내 눈으로건 난 이기는 걸 보지 못했다. 부평, 대추리, 이랜드, 평택처럼 영도도 그렇게 울다가 지쳐서 잊혀질거라고 생각했다.

김진숙 앞에서 그토록 많은 이가 울었지만 그녀는 웃었다. 사실 희망을 얘기하면서 절망을 대비했기에 눈물이 나온것일 텐데, 그녀는 절망의 틈바구니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아서 웃을 수 있었을테다. 그리고 그래서 마침내 이겼다. 오늘 하루만은 우리의 승리라고 평가하지 말고 그녀의 승리라고 말해줘야지. 영웅주의라고 누가 찌껄인다면, 그래라. 그녀는 영웅이다. 이건 역사다.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다.


지민주 - 길 그 끝에 서서

그들의 칼날은 언제나 약자를 향한다 - 동정을 가장하지 말지어다


송지선이 죽었다.
흔히 '추문'이라고 표현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자연스레 추문과 짝을 이루는 관심을 빙자한 비난과 욕설과 동정이 따랐다. 그녀는 견디지 못했고 결국 더이상의 반항을 포기했다. 죽일듯이 덤벼드는 이들에게 반항을 포기했으니 죽을 수밖에.

그 추문의 상대였던 임태훈도 죽었다. 이젠.
사람들은 이제 임태훈에게 화살을 돌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요런 댓글 하나를 달아 저마다의 추모를 마친 뒤 이젠 그에게 죽일듯이 덤벼든다. 살인자니 악마니 파렴치한이니 온갖 욕설과 비난이 난무한다. 그를 옹호하려는 이도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넌 이제 죽었다."라는 말 말곤 해줄게 없어.

 사람들이 잔인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그들의 칼날은 약자를 향한다. 약자를 억압하고 핍박함으로 인정받는 자신의 우월적 지위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싸움 잘하는 옆 학교 짱한테 삥 뜯기곤 분풀이로 우리반 찌질이들을 두들겨 패던 우리반 깡패가 떠오르는 일이다. 이 순환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찾아낸다. 같은 이유에서 삶이 힘겨운 이들을 전시하는 인간극장류의 최루성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동정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지위에 안도감을 느끼는 행위다.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약자를 찾아내고 괴롭혀서 안심을 얻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떤 언론은 네티즌들의 몰지각한 악플이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정작 네티즌들은 그 논란을 재생산하고 확대한 것은 정작 언론이라며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둘 다 아니다. 범인은 이 사회의 구조다. 약자를 밟아야지만 존재가 증명되고 다른 이, 다른 것에 대한 폭력이 삶의 원칙으로 둔갑하는. 즉 다시말해 다르다는 것만으로 이미 약자가 되어버리거나 일반적인 공동체와 윤리 의식에 포섭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용납하지 않고 밟아버리는 이 저질의 사회가 그 범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누가 관심갖고 비난 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송지선과 임태훈이 연애를 했건, 구강섹스를 했건 나와는 전혀 상관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든건 '8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는 여자' , '구강섹스' , '섹시화보를 찍은 아나운서' 같은 자극적인 이미지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이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건 사회가 통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순종적인 여자는 언제나 '오빠'를 만나야 하고, 섹스는 언제나 음습한 곳에 숨겨져야 한다. 하물며 구강섹스라니. 그것도 섹시화보를 찍은 천박한 아나운서가. 아닌 척하겠지만, 그 사뭇 다른 이미지들이 당신들의 그 거창한 '관심'을 끌어낸건 사실이지 않은가. 자기가 만들어낸 이미지 아니냐고? 그걸 소비한건 당신 아닌가? 자본주의는 니즈가 있는 상품만 생산하는 법.


사람들은 무엇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듯 하다.
지금 당신이 행하는 바로 그것이 폭력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위선적 댓글을 달고 호들갑을 떠는 그 모든 일이 폭력이다. 연민과 동정을 갖는다며 또다른 희생양을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지 말아라. '다른 이'를 억압하는 것으로 밖엔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당신도 이미 깡패다. 동정을 가장하지 말지어다. 


홍대 사태를 보다가 - 우리를 위한 변명, 우리도 알아요



온라인은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난다.
돌아다니는 사이트며 블로그가 한정적이라 모두 비정규직 철폐나 홍대 총학생회의 비겁함을 성토하는 내용들이다. 맞아. 비정규직은 철폐되어야 하고 우리의 연대는 더욱 공고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우리의 이야기다. 비겁한 스무살들의 비겁한 변명.

우리는 무엇도 허락받지 못하고 20년을 살아야 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은 애초에 우리 것이 아니었다. 애들은 몰라도 된다는 말로 우리는 격리됐다. 자아를 구분할 수 있을 때쯤부터 우리를 키운건 팔할이 경쟁과 승리에 대한 주문이었다. 아직도 도무지 정체를 모를 그 '철'이 들기 위해서 늘 친구보다 앞서거나 타인에게 냉소적이어야 했다. 꿈? 물론 꾸었다. 어릴적 내 꿈은 판검사였다. 내 친구는 부자가 꿈이었다. 대부분이 그랬다. 꿈이란 삶의 지표가 아니라 권력이나 금력에 대한 희구일 뿐이었다. 우린 연대, 상생, 낭만, 소통, 가난 같은 말보다 먼저 경쟁, 승리, 출세, 성취 같은 말을 먼저 배웠다. 아니, 그런 말만 배웠다. 우리가 스무살이 되던 날, 우리는 대학 배치표를 끼고 앉아 있었다. 수십만명의 인간들에게 등급도장을 찍어주는 그 종이 쪼가리.

그렇게 대학교에 들어왔다. 수백만원의 등록금을 내고 수백만원의 방값과 수십만원의 책값을 쓰면서. 남자셋여자셋 같은 시트콤을 보면서 키웠던 캠퍼스의 낭만이나 소설책에서나 보았던 지성인의 고뇌섞인 일갈따위 대학엔 없었다. 선배들은 우희진보다 안예뻤고 송승헌보다 못생겼다. 소설책이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시대는 엄혹하지도 대학생들은 똑똑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취직이 어렵다는 말은 확인되지 않는 소식통에 의해 끊임없이 날아들었고 실제로 취업을 못한 선배들을 보고 있자니 찌질하고 갑갑했다.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이젠 소 한마리 팔아선 등록금 어림도 없다. 심지어 구제역 파동이라니.ㅋ

무엇보다 펜을 들어야 했다. 이 중에 몇 명만 취업하고 성공할 수 있다면 그게 나여야 한다. 부모님이 뼈빠지게 모아준 등록금 허투로 쓸순 없다. 아파서 결석하는 친구가 걱정은 되지만 굳이 나서서 변호를 해주고 출석을 인정받게 해주고 싶진 않다.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어차피 그게 세상사는 이치인거다. 20여년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그렇게 밀려서 서울대에 가지 못했고 그렇게 밟아서 그래도 이 학교에 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더럽고 아니꼽지만 어쩔텐가, 그게 세상인데.

우리가 이기적이고 비겁하다는 말쯤, 한심하다는 말쯤 이미 수없이 들었다. 위로한답시고 이해한답시고 하는 말들도 들었다. 88만원 세대니 어쩌구 하는. 하지만 "우리를 동정하지 마 thㅔ요." 어차피 그건 우리를 위로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인정 할 수 있다. 우리는 비겁하고 나약하다. 타인의 목숨줄보다 내 학점과 스펙이 더 중요하다. 이게 나쁘다는 것도 알고 그렇지 않게 분투하는 삶이 있는 것도 알고 그런 삶에게 우리가 어떻게 보일 줄도 안다. 가끔 속상하고 더럽고 치사하고 눈물이 나지만 어쩔 수 없다. 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같은거다. 아버지에게 저항하기를 포기한 아들들. 세상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아들들.

그렇다. 이건 전적으로 비겁한 변명이고 남 탓이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난 그래서 키보드 앞에 앉아서 이기적이니 비겁하니 날을 세워 우리를 모욕하는 이들의 말이 싫다. 연구실 책상머리에서 우리를 이해하는 연구를하겠다고 문을 걸어잠그는 식자들도 싫다.

여기까지 써놓고서야 그래서 뭘 어쩌자는건데? 라는 질문을 떠올렸다. 그래, 답은 없다.
계속해서 이 유치한 싸움은 계속될거다. 하지만 한 명 정도는 비겁한 이들을 위한 변명정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위로해주지 못하니 변명만이라도. 

이건 우리 책임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