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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정치


다중이니 대중지성이니하는 말에 신뢰가 없는 나로서는 민주주의의 구동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보다는 대중이나 민중이라는 그 모호한 주체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대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그 무엇은 어리석고 폭력적인데다 염치도 없고 반성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기억력도 없다(나쁜게 아니다. 없다.)

그럼 민주주의는 그 실체도 모를 주체에 의해 작동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정치의 주체가 모호해지고 대중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그것들'에 의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구동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할때면 늘상 한다는 말이 "그래서 플라톤적 철인정치에 대한 예찬이냐"는 빈정거림이지만, 뭐 그럴 수도 있고.

분명한건 민주주의, 합리적 개인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고 그들 모두가 스스로 저마다의 정치를 구현해내는 상호부조적 시스템. 그것은 언제까지나 놓아서는 안되는, 놓을 수 없는 이상이라는 것. 그건 일종의 정언명령, 도덕법칙.

그건 다시말해 어리석고 우매한 주체들의 우매한 행진을 바라봐야만 하는 것이다. 고작 씁쓸해하거나 잔소리만 하면서. 막힌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가 볼 수밖에 없는 형국. 그나마의 위로라면 막힌 벽을 오방세게 들이받으면 금이라도 가지 않을까하는 얄팍하고 알량하지만 간절한 희망.쯤??

뿌리깊은 나무 보다가 갑자기 헛소리 작렬.

단상


1.
루피가 뽀로로 친구인줄은 몰랐다. 제길. 뽀로로 열심히 봐야했는데...

2.
늘 그렇지만 아주 작은 격려 한마디.가 힘이 된다. 스스로 내지 않으면 사그라들 알량한 힘인 줄은 알고있지만 그래도 고마운 일이다.

3.
운이 좋았다. 정말. 이젠 고민을 해야한다. 생각을 잘 정리해봐야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하는 일. 헛바람과 설레발로 또 시간을 허비해선 안된다. 이건 어쩌면 기운을 차릴 수 있는 계기였다. 이렇게 얻은 기운을 어디에 어떻게.

4.
날이 추워서 감기에 걸렸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고, 보고싶어서 전화를 걸고, 집에오려고 차를 탔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과정이, 결과가. 날로 먹으려 들어서 안된다. 해야지, 살아야지.

5.
오늘같은 날은 역시 시규어로스.


Sigur Ros - Illgres

평범한 사람 - 루시드폴, 눈물자국 닦지말고 꼬질꼬질하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루시드폴의 평범한 사람은 용산참사를 노래한 곡이다.
살고싶어 올랐다 죽어서 내려온 이들에 대한 노래.

언젠가의 디렉터스 컷에 호란과 루시드폴이 나왔는데 호란이 앨범중에 '평범한 사람'이 제일 좋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전업가수 선언을 한 루시드폴의 마음을 노래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해석이야 본래 전적으로 해석자의 몫이니 호란의 발언을 탓할건 없지만 어쨌든 작자의 의도와 전혀 다른 노선을 탄건 틀림없다.
폴은 그자리에선 부정도 수긍도 없이 웃더라만.

그런거다.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하거나 상상하지 않는다.

도심 한복판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불타죽은 사람들이 존재할거라는 상상.
재개발이란 미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나고 폭도로 매도되고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거라는 상상.
그저 대한민국은 하늘엔 조각구름이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며칠 후면 용산참사 3주기다. 다시 벌써 잊어가고있다.
어제 그 자리를 지나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곳을 지나다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잊고살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눈물자국 같은거 닦지않고 꼬질꼬질 남겨두며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좋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 이렇게요



좋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 김종철


창간 스무돌을 맞으며| 좋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 김종철

수목(樹木)은 중력의 힘에 의해 아래쪽으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중력에 역행한다.
생명이란 비협력주의가 아닐까? ― 균터 안더스

창간 20주년을 맞는다. 되돌아보면 힘겨운 시간의 연속이었으나 어느새 20년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창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녹색평론》의 규모나 살림살이는 별로 변한 게 없고, 생존을 위한 기반은 늘 불안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사회 속에서 중요한 매체가 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왔다. 이런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잡지를 성심껏 지원해주는 적지 않은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독자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녹색평론》이 실제로 얼마나 쓸모있는 일을 해왔느냐일 것이다. 이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이 점에 관련해서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오늘날 언론이 처해 있는 위기상황이다. 언론은 지금 복합적 위기상황에 처해 있지만, 최대의 위협은 상업주의적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기업 혹은 경영조직체로서 언론은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으려면 비즈니스의 논리를 외면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미디어가 광고주라는 이름의 금권세력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인습적인 사고, 편견, 이념적 편향에 의거하여 언론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기대를 품고 있는 ‘미디어 소비자’의 욕구도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언론 ― 매스미디어 ― 이 엄밀한 의미의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원래 언론·출판행위란 ‘반역’을 위해 시작된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반역’이란 물론 주류의 가치, 즉 지배적인 제도와 관습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뿌리에서부터 의심한다는 뜻이다. 서양에서 출판을 가리키는 말(edition)과 반역행위를 가리키는 말(sedition)이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기성의 체제와 지배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언론은 예로부터 어용언론이라고 일컬어져왔다. 오늘날 언론이 광고주와 ‘미디어 소비자’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어용언론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은 자신의 본래적 사명 ― ‘반역행위’ ― 을 스스로 배반하는 행위를 강요당할 위기상황에 항상적으로 처해져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명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소규모 매체밖에 없는지 모른다. 소규모일수록 외부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녹색평론》이 감히 그러한 독립매체에 속한다고 주장할 염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열심히 노력은 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후쿠시마 참사 이후 확연해진 원자력의 치명적인 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온갖 허위, 속임수, 협잡에 대해서 대다수 미디어가 침묵하거나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에서 《녹색평론》이 비판적인 물음을 계속 던질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작은’ 매체 특유의 독립성 덕분일 것이다.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 ― 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예를 들어, 현재 이 나라의 ‘진보진영’이 거의 일치해서 제시하고 있는 ‘복지국가’ 논리에 대해서도 《녹색평론》은 계속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물론 복지국가론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복지국가론이 기본적으로 경제성장과 생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상, 그것이 빈곤과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는 방책으로서 정말 실효성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복지국가 논리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극히 의문스럽다. 복지국가란 국가의 계속적인 세수(稅收) 증가를 전제로 해서만 실현 가능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 세수 증가는 경제성장과 고용의 안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석유공급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세계금융시스템이 뿌리에서부터 붕괴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이 계속되고, 전통적인 의미의 산업적 고용이 확대된다는 게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설령 그러한 기적이 비록 단기간은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 궁극적인 결과는 생태적 자멸행위가 될 것임은 명백한 일이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그렇다. 많은 논자들은 이것을 한국사회가 직면한 가장 긴박한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그들의 우려는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현상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고, 세대 간 인구비율 균형이 붕괴되어 최소한도의 복지국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게 문제이다. 그 결함이란 그들이 미래를 단순히 현재의 연장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은, 오늘날 온갖 징후로 보아서, 앞으로의 세상은 결코 현재상황의 단순한 연장이나 확대된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해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거의 전적으로 값싼 석유에 의존해 있는 현재의 산업, 금융, 교역, 에너지, 식량 시스템은 물론이고, 이와 같은 물질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 정치, 문화, 교육 등 중앙집권적 시스템 전부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는 더 유지될 수 없는 날이 조만간 닥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우려는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경제논리에 의거한 것이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그것은 또한 심히 비윤리적인 인간관·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은 이 세상에 어떤 시스템에 필요한 도구가 되려고 태어나는 게 아니다. 물론 개인이 행복한 삶을 누리자면 복지시스템을 협동적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개인의 독특한 인격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행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야만적인 폭력이 되고, 개인은 시스템에 복속된 부품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온 세계가 갈수록 인구과잉 문제로 고뇌가 깊어지는 상황에서, 한국경제의 활력을 위해 인구증가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명백히 비윤리적인 사고방식이다. 세계 전역에 걸쳐 인간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어디서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환영해야 할 일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인구감소 자체가 아니라, 왜 지금 한국사회에서 출산 저하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이 사회에서 아기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 초인적인 용기와 고난을 각오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왜, 어쩌다가 이 사회가 미래로 가는 문을 닫아버린, 절망적인 사회로 떨어져버렸는가 ― 저출산 현상에 관련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이런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현재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진보적’ 사상과 ‘개혁적’ 담론은 거의 예외 없이 근시안적 현실진단과 피상적인 처방에 머물러 있다. 이 불모적인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최대 원인은 그러한 사상·담론 속에 에콜로지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의 지식사회에는 아직도 에콜로지에 무감각하거나 무관심한 이들이 허다하다. 많은 지식인들은 아마도 에콜로지문제는 기술적으로 극복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들은 당장 급한 것은 먹고사는 경제문제이지, 에콜로지는 이차적인 문제라고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경제문제’가 이제는 ‘에콜로지’를 고려하지 않고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국면에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독일 시인 브레히트는 편협한 근시안적인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전쟁과 학살로 치닫고 있던 자기 시대의 상황을 “자신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톱으로 베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의 행위로 묘사한 바 있다. 이것은 브레히트 시대보다도 오히려 오늘의 상황을 더 적실하게 드러내는 예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라도 ‘경제’에 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새로운 상식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다. 그동안 ‘경제’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지난 200~300년간 화석연료·핵에너지에 기반한 무한한 욕망 추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개념체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경제’ 개념을 척결하지 않는 한, 갈수록 심화되는 환경―자원―에너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고사하고, 최소한도의 기초적 생존·생활도 불가능해지는 날이 곧 다가올 게 분명하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과 에너지에 의존하여 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착각이자 망념이다.

시급한 것은 경제성장, 생산력 증대, 대량생산/대량소비를 통한 ‘발전’ 혹은 ‘진보’의 추구라는 낡은 공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우리의 생활방식을 자연의 본성과 리듬에 순응하는 순환적인 패턴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요컨대 산업자본주의 이전, 인류의 오랜 생활방식이었던 순환경제 시스템의 복구·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순환경제란 단순히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는 생활패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절제하고, 절약하는 것은 오랫동안 인류사회에서 기려온 덕행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느 때나 존중돼야 할 생활자세이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개개인이 물자를 절약하는 미덕을 발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절약하더라도 재생 불가능한 자원은 언젠가는 고갈되기 마련이고, 오염된 환경은 결국 거주 불가능한 공간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인 지하(地下)자원 ― 원자력을 포함한 ― 에 의존하지 않고, 영구적 지속이 가능한 태양에너지 중심의 지상(地上)자원에 의존하는 생활패턴의 선택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경제’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순환적 생활패턴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자와 에너지 조달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총체적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결국 정치적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용문제만 해도 그렇다. 좁은 의미의 경제문제로서만 볼 때, 부당해고, 실업, 비정규직 등 ‘일자리’ 문제는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로 환원되기 쉽다. 그리고 그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상, 고용문제의 해결은 난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격심한 경쟁을 강요하는 글로벌경제시스템 속에서 기업은 단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이윤 증대를 위해서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업은 윤리적 덕을 실천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운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말이다. 기업에 의한 기부, 지원, 자선사업이란 것도 결국은 더 많은 이윤 확보를 겨냥한 간접적인 투자행위일 뿐이다. 오늘날 기업 쪽에서 볼 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비자의 존재이지 더 많은 노동자의 존재는 분명 아니다. 이미 시장은 과잉 생산물로 넘쳐나고, 자동화·기계화의 급속한 발달로 생산현장에서의 인간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는 아직도 초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고, 기업의 방종한 행태를 묵인하거나 조장하는 곳이 허다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애국심 따위에 호소하는 것으로써 기업의 해외이전을 막아낼 도리는 없는 것이다. 이 상황은 계속 확대·심화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고용문제의 전망은 실로 암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 전태일의 시대에 노동자는 ‘착취’를 당했으나, 지금 김진숙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노동으로부터의 ‘배제’이다. 한때 이 나라 서민층 아이들의 꿈은 대통령, 판사,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규직’이 아이들(그리고 부모들)의 꿈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성장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방법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복지국가’ 시스템을 통한 극복이라는 것도, 그것이 불가피하게 더 많은 성장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인 이상, 역시 지속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산업사회의 주류였던 방법, 즉 대규모 산업시스템 속에서 일자리와 생계를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소규모 지역 중심, 자립적 생산·생활협동체들을 광범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틀 속에서 태양에너지에 기반을 둔 순환경제를 구축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다. 문제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과 확산을 가로막는 기득권 세력의 방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민주주의의 확립, 즉 보편적 이성이 존중을 받고, 합리적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을 확보하는 게 관건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은 흥미로운 참조사례를 제공한다. 후쿠시마 사태 후 원자력을 2020년까지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한 독일의 경우를 보면, 진정한 선진사회란 결국 합리적 상식이 살아있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체르노빌에 이어 또다시 묵시록적인 핵 참사를 목도하면서 독일사회는 더는 원자력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은 정상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간사회라면 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당연함이 쉽게 통하지 않는 게 또한 오늘의 세계 현실이다. 미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이 기회를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로 삼겠다는 한국정부나 아직도 원전문제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일본정부를 보면, 오늘날 이 세상이 악마적인 정신에 의해 깊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만큼 독일의 자세는 단연 돋보인다. 특히 주목할 것은 메르켈 독일 수상이 원전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안전위원회’와 함께 ‘윤리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 그리고 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자신의 정치적 적수를 임명함으로써 정파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공정한 결론을 원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양심적인 행위라기보다 매우 합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자면 비판적인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 ‘윤리위원회’에는 원자력에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관계자는 단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리위원회 구성 멤버는 가톨릭의 추기경, 프로테스탄트 목사,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을 포함한 몇몇 학자, 소비자 문제를 전문으로 하는 교수 등 17명이었다. 이 위원회에 참여했던 베를린자유대학 교수 미란다 슈라즈는 지난 6월 일본에서 행한 강연에서, 윤리위원회가 이렇게 구성된 이유는 “어떠한 에너지를 사용할 것인가는 전력회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정책을 이른바 관계당국이나 기업 혹은 전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생활하는 주체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지만, 이 당연한 논리가 새삼 극히 신선하게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독일 연방의회 의석의 절반이 정당별 비례대표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도 독일의 ‘상식’을 말해주는 증거인지 모른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의회제 정당정치는 사실상 금권과두(金權寡頭) 정치를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선거라는 것은 기득권층의 영구집권을 돕는 합법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선거를 폐지하고, 의회제 정당정치를 방기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현행의 제도 내에서 최대한 민주주의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의 하나가 비례대표제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1983년에 독일 연방의회에 녹색당이 진출하고, 2011년에 그 의회에서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쇄를 압도적 표차로 가결하는 게 가능했던 것은, 독일사회의 일반적인 상식 이외에, 그 정치시스템이 갖는 합리성에도 기인하는 바가 컸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의석의 절반이 비례대표제에 의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독일의회에는 이익집단, 특히 기득권층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적 선택과 결정의 공간이 그만큼 확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독일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아직 불완전한 상태일지라도, 비교적 합리적인 정치시스템이 존재할 때 그 사회가 어떻게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지, 하나의 모범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사람들과 얘기하다 대의제 민주주의, 의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할라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든다. 그리곤 이내 꿈만꾸는 아나키스트.쯤으로 치부해버리며 이내 봉합. 그리고 결론은 선거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으로 정치적 소임을 다하자. 그렇게 만들어져서 참여정부였나.

그건 체제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아둔함이거나 게으름이다. 김종철 선생 말대로 지금의 경제는 "지난 200~300년간 화석연료·핵에너지에 기반한 무한한 욕망 추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개념체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더불어 지금의 정치체제는 그 '경제'를 장악하는 이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과두로서 존재한다. 결국 바깥을 상상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뭇 공허하거나 현실감없을 수도 있는 얘기에 독일의 선례는 좋은 모델이 돼준다. 합리적 정치시스템, 윤리적 사회를 상상하고 지향하는 일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단상

1.
뿌리깊은 나무를 보다 이도의 꿈에 문득 조소를 보냈다. 글을 읽는다해서 모두 언어를 갖게되진 않는다. 지금 수백년후의 백성들이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어린백성들은 이르고자 하는 바 있어도 '그들'의 언어만을 사용해야한다. 법이나 제도, 진영, 합법이나 비폭력같은 말은 역시 저들의 언어다. 청춘이니 희망이니 멘토니 통합이니 혁신이니 하는 말들은 저들의 '꼼수'고 포장이다. 언어를 상실한다는 것은 그런것이다. 이도도 말했지만, 우리의 언어로 제대로 말해야 한다. '지랄'이라고.

2.
나꼼수 여의도 콘서트에 3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고한다. 거북하다. 그들의 선의를 의심하진 않지만(사실은 아니다 그들의 선의도 조금은 의심한다)그들의 지성은 확실히 의심한다. 그들이 정말 FTA를 반대한다면 그들은 나꼼수에 열광해선 안된다. 어제 여의도에서 김어준과 아이들이 뭐라고 말했을지는 안들어봐서 모르겠지만, 그들의 스탠스는 명확하다. 그들은 '노무현은 좋지만 이명박은 싫어'가 전부다. FTA반대는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거부여야 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한 도다른 대안에 대한 상상력이어야 한다. 사회의 모순은 체제에 있지 정권에 있지않다.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다른 점을 갖는 부분은 '권위주의'와 '노골적 몰염치'정도다. 신자유주의의 총아인 FTA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지나며 만들어졌고 성장했다. 이명박이 한 일이라곤 비준하고 부시 골프카트 몰아준 일 정도가 전부다. (고작 그거하고 이렇게 욕먹는 것도 쉬운일은 아니다. 인물은 인물이야) 본질따위 안중에도 없이 표면에만 천착하는 일, 그리고 그 천착을 이용하려는 꼼수는 사기다.

3.
더불어 멘토니, 희망이니,청춘이니, 닥치고니 하는 타령들 좀 이제 그만. 안철수와 박경철에게서 더이상 뭘 배우잔 말이냐. 도대체 청춘이 이런것이며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닥치고 정치나 하라는 폭력적 언사에서 뭘 배워야 하지? 그건 강박이다. 안철수의 서울시장 출마가 거론될 때 안철수가 3백명의 멘토를 가지고 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시껍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삶의 지혜를 물을 단 한명의 친구도 어려운데 난.위에서 얘기한것처럼 자신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이도와 우리소이가 그 개고생하면서 글자 만들어주면 뭐하나. 자기언어로 글 한줄, 세상의 단면도 읽지 못하는 수백만의 멘티들만 만들어냈다. '닥치고'라는 말은 너의 언어를 봉인하라는 말이다. 좀 닥쳐라.

4.
티비를 켰더니 조선TV가 나온다. 헉. 한참을 찾아 헤맨끝에 나의 사랑 KBS드라마를 찾았다. 무려 96번. 리모컨질하다가 손가락 관절에 물찰 기세.내 재인이를 돌려줘 엉엉엉. 근데 얘네 살아남을수는 있을까?

5.
아침이라기엔 좀 이른시간, 그러니까 6시반쯤에 담배사러 갔다가 눈발인지, 빗방울일지 모를 것들을 맞으면서 한참쭈구리고 앉아 지나는 사람을 구경했다. 동도 채 트지 않은 시간에 사람들은 분주했다. 부지런한 사람들. 문득 날짜를 생각해보니 12월, 겨울의 첫날이다. 그렇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참을 앉아있다가 집으로 들어오는데 문득 이기선의 시가 생각났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이었다 "

6.
MAMA는 못봤지만 소시무대의 클립이라도 봐주는게 참된 소덕의 자세. The Boys는 오글거리는 가사에 짜증이 나다가도 아이들이 팔뻗고 걸어오면 심장이 덜컹한다. 하악하악. 어쨌든 영어가사가 더 간지나네. 이거 사대주의임?


꿈이야기


1.
꿈을 꿨는데, 중학교때 우리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던, 지금은 건달이 됐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들을 수 있던 놈이 나왔다. 난 그닥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폭력에 노출된(선생님들로부터 당하는 폭력은 제외하고) 청소년기를 보내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공포는 버젓이 있었나보다.

꿈에서 난 그에게 굉장히 굴종했고 비겁했고 그리고 자존심 상해했다. 그것은 내가 갖는 폭력의 이미지에 가까운것 같다. 저항하려 애쓰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굴종할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폭력의 성질이 본래 굴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했다. 꿈에서도, 깨고 나서도. 그건 물리적 힘과 권력에 대한 동경, 마초적 본성. 난 그 물리적 힘이라는 것이 사실은 굉장히 부질없는 것이고 타인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권력은 타도의 대상이라고 여겨왔지만, 사실 내 자아는 그걸 그리고 있었던거다.
하긴, 영화나 드라마에서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악당앞에서 옴짝달싹 못하던 주인공을 보면서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해 순간의 권력을 챙겨내는 장면을 상상한 적도 많다.

생각해보니 이건 내 무기력이나 비겁함, 위선, 이중성에 대한 자학이었다. 자학을 통해 스스로 위로하는 비겁함이다. "직시하고 있으니까 굳이 건들고 말하지마"같은.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을 끄적이면서 얻는 자기만족, 골방의 수음.
이전에 운영하던 블로그 이름은 자학일기였다.

2.
나도 꽃에서 이지아는 꿈을 꾸지 않아도 살 수 있는것 아니냐며 고함쳤다.
결국 드라마에서 이지아는 꿈도 꾸고 그걸 이뤄갈 단초도 얻고 희망도 얻는 해피엔딩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 꿈도 희망도 재능도 의지도 없다. 갖고 싶은 것도 버리고 싶은 것도 없다. 외롭지만 그것도 별 상관없다. 관계의 부담과 성가심보다는 훨씬 좋다. 다만 이런 상태를 한심함이라고 부르거나 안타깝다 말하는 일들을 납득하지 못하겠다. 꿈을 꾸지도 희망을 갖지도, 생에 대한 열정을 갖지 않고도 살 수 있다. 벤야민은 인생은 살만한 값어치가 있어서 사는게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어서 사는것이라고 말했다. 자살할 만한 값어치도 느끼지 못하는 삶도 있는거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알고있기 때문이다. 이건 인지부조화다. 난 희망도 꿈도 재능도 열정도 갖는 일이 싫은게 아니라 못하는거다. 그래서 싫은척 쿨한척 하는거다. 이게 The 구려.

3.
외면하거나 직시하거나. 그건 오직 한번만 선택할 수 있는 수능시험 같은건 아닐거다. 난 직시하기도 외면하기도 한다. 흔들흔들. 일일드라마같은 삶이 부럽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꿈을 위해서 한 발 내딛는. 광기에 찬 자살도 부럽다. 세상을 조소해줄 용기가. 열정만 못한 재능을 탓하는 괴로움조차 부러움의 대상이다.

좀 똑바로 산 다음에 얘기해. 라고 꼰대같은 잔소리를 누가 늘어놓는다면 죽여버릴거야. 물론 그럴 용기도 없이 쿨한척 웃어주겠지만 하하하.

4.
영화나 음악은 회피와 도피의 가장 좋은 수단이다. 예쁜 연예인이나 사회적 분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데모를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신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나 하나.



단상


1.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세대'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반딧불의 날갯짓, 개구리 울음, 마른풀 타는 연기, 물 빠진 갯벌…. 뭘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고 일상을 꾸려갑니다, 물신만 추앙할 뿐.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가치는 더 이상 이 땅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느 곳이건 99퍼센트가 1퍼센트에 의해 전복되고, 공동의 것은 소유권의 절대성 앞에 무릎 꿇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일이란 없습니다. 우리란 없습니다.

명백한 예외주의입니다. 그랬지요. 녹색평론의 길은 늘 외로웠지요. 마치 무언극 같았지요. 애타게 얘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안타까운 목소리였지요. 그래도 바람찬 광야에서 20년을 버텨왔네요. 함께 할 수 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존경합니다. - 최재천

++
정복하고 앞서가고 성장하는 스포츠와 같은 삶의 주문만을 강요받아 오직 그것만이 삶의 진실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왜 사는지, 무엇이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건 우리사회에서 어쩌면 녹색평론뿐이다.

녹색평론이 창간 20년을 맞았다. 어렵고, 쉽게 읽히지 않고, 낄낄거릴 요소도, 꼼수같은 글도 없지만 그 성실하고 본질적인 질문과도 같은 묵묵한 걸음과 글은 얼마나 소중한가.


2.



날씨가 이렇게 추워지면 시규어로스가 생각난다.
예전에 뉴트롤즈와 첩혈쌍웅과 개같은 내인생으로 '나의 세대'를 정의하는 김연수의 글에,
툴툴거리면서도 내심 부러워 했었다. 나의 세대라니.

하지만 지금은 뉴트롤즈대신 시규어로스가 있으니까.
나중에 나의 세대를 정의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면 시규어로스와 소녀시대는 반드시.
이렇게 결론은 시규어로스와 소녀시대는 동급인 것으로.

++
Með suð í eyrum við spilum endalaust.
"아직도 귀를 울리는 잔향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연주한다”

3.
통합진보정당이 출범했다.
사실 진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어색하다. 종북주사파와 노빠, 금뱃지 페티쉬들이 모여 만든
혼합 잡탕 자유주의 정당.이 가장 적절하겠다.

이제 남한의 의회에 진보정당은 없다.
그들은 아마도 진보의 가치보다 대중의 가치에 맞춘 정치를 할테다. 그러나 그 대중들의 입맛이란 결국 신자유주의의 언어안에서 만들어지는 것. 바깥을 상상하고 탈주를 시도하는 것이 좌파고 진보라면 이제 남한의 의회에 진보정당은 없다.

대중들은 자본주의적 체제 안에서 그 대안을 위해 자유주의를 선택했지만 그건 결국 실패할 공산이 크다. 자유주의가 (대표적으로 안철수같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식은 상식과 도덕이다. 그건 자본주의적 언어에 포섭된 저항, 결국 자본주의를 공고히하게 된다. 이제는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가 총체화되는 시기. 이택광교수는 폴라니의 말을 들어 파시즘이라고. 파시즘 같은 무시무시한 말이 와닿지는 않지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거다. 이렇게 좌파와 진보는 (일견)망했다.

++
하지만 이 전복과 봉합의 과정에 벌어지는 틈새의 희망을 믿고 발견하려는 노력을 다짐했으니,

사람들은 그래도 저항과 상상의 기억을 더듬어 또다른 언어를 찾으려 할것이다. 물론 나도.

단상


1.
온몸이 꼬이고 꼬인 뒤에 제 집 처마에다 등꽃을 내다 거는 등나무를 보며, 그대와 나의 관계도 꼬이고 꼬인 뒤에라야 저렇듯 차랑차랑하게 꽃을 피울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 - 안도현, 삶의 비밀

안도현은 좀 오글거리는 것 같아서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 아침 귀갓길에 갑자기 '삶의비밀'이란 말이 번뜩 떠올랐다. 뭐 이유가 있나, 갑자기 떠오른 말에. 도대체 이게 무슨말이냐 생각하다가 난 검색이 생활화된 N세대(?)이므로 구글링, 안도현의 글줄을 발견했다. 뭐 그냥 그렇다고. 난 술은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니까 이건 헛소리인것.
2.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08년의 촛불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희망을 보았다고 말했었다. 물론 나도. 다중지성과 창의적인 실천력, 저항의 기억들이 합쳐져서 '대중'들이 계급적, 정치적 각성에 한발 다가설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촛불은 패배하고 아무것도 바꾸지도 바뀌지도 못했다. 그리고 3년, 사람들은 그때와 혹은 그 이전과 똑같아 보인다. 여전히 노빠로 대변되는 깡패들이 설친다. 이제는 박원순.안철수빠로 바뀌었지만. 그들의 광기를 호출해내는 주술사들도 있다. 김어준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문은 반지성이다. 이 소모적인 놀이의 유행이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한다. 대중은 절실한 계급적 각성도 정교한 정치적 각성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못하는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놀이의 기억에 존재하는 틈새에 스미는 희망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희망을 믿으려는 노력이다. 냉소와 절망으로는 아무런 것도 해낼 수 없는건 명확한 일이니까. 오늘의 놀이와 내일의 놀이 사이에 존재하는 그 아주 작은 차이와 틈새. 그것이 우리가 얘기하는 느리고 확실한 작은 걸음. 그 희망에 걸어야한다. 노력해야겠다.

3.


자기회사의 문제도 1면에 실어버리는 이 패기. 이것이 언론이다.

4.
어제 마신 술이 문제인가, 배탈이 났지만
또 생각나는 술술술. 이거 이제 좀 무섭다.

5.
녹색평론이 20주년을 맞았다. 기념으로 학교후배들 보라고 학생회실에 정기구독을 시켜.......주고싶지만 난 담뱃값 마련도 잘 못하는 백수 날거지. 이런 책이 있다며 슬적 추천해줘야지. 나꼼수 같은거 듣고 낄낄거리거나 학생회실에서 여자연예인들 시스루룩에 하악거리는 일 말고도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 얼마든지 있단다.

6.




조동희 언니의 1집 앨범.
올해는 정말 기다렸던 음반들이. 조동희라니.
이 언니 도대체 몇 년만이야.

소리 지르지거나 울지않고,
일부러 행복하라거나 슬프라고 강요하지도,
자기가 제일 불행하다고 징징거리지도 않는 노래.

++
누구든 내게 다가와 내얘길 들어줘
휘청이는 이세상속에 혼자하던 노래
지친 나의 맘에 귀를 기울여요
 

단상


1.
낮잠을 잤는데, 요상한 꿈을 꿨다.
이상비만 동물들이 넘쳐나는 동물원을 구경하는 꿈이었는데, 처음에는 날씨 좋은 날 유유자적한 동물원 산책이었다 나중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산길 사파리 트래킹이 됐다. 집채만한 개나(심지어 이 개는 아프로 펌을 하고 있었다), 살쪄서 게으른 표범이 바다를 배경으로 늘어져 있는 꼴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꿈에선 좀 무서웠다능. 이거 도대체 뭐임.

2.
끝판왕 원서를 냈다. 아무런 생각도 부담도 없던거라 글도 잘써지고, 뭔가 했다는 느낌만으로 충분해서 기분이 좋다. 심지어 수정없이 원고 분량에 1자도 틀리지 않는 신기까지 보여줬다. 이건 뭐, 나란 남자.

3.
주량은 줄어드는데 술생각은 전보다 더 많이 난다.
=나이먹어 갈수록 돈은 없다.
아, 껍데기에 소주.

4.
엘지가 이택근을 놓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런식으로는 아니다. 엘지는 계약 안할 선수는 자존심 깔아뭉개서 맨탈을 망쳐놓으려는 전략을 프론트 츠원에서 하고있는 듯. 이상훈, 김재현에게 그랬던 것처럼. 야구 얘기나온김에 한마디 더. 당장 성적을 내겠다는 김기태 감독의 말에 코웃음 밖에 안나온다. 그렇게 과단성 있게 결정하면 다 될거 같냐? 김재박과 박종훈은 그냥 좆병신이라서 그랬겠나? 도대체 선후를 몰라.
아, 야구 끊었다 다짐하고 다시 봄되면 잠실로 달려갈 나는 엘지의 노예. 나같은 애들이 몽창 떠나줘야 엘지가 정신을 차릴텐데. 엉엉엉.

5.
스토브리그 소식 안보는척 훔쳐보다가 이하늘 김창렬 피소 소식에 깜짝. 이 형들 잠잠하더니 또 누구 깠구나. 싶었는데, 해피투게더 나와서 자기 놀린거에 삐진 전 멤버가 명예훼손 크리 작렬. 뭐 그럴수도 있지만 좀 찌질해 보이긴 한다. 명색이 전직 DOC인데. 패기가 없어.

6.
희망버스를 기획했던 송경동 시인이 자진출두했다. 송경동은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던 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무사히 내려온 것은 다행스럽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1400일 넘게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재능교육과 5년째 정리해고에 맞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 등 수많은 노동자와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해요. 지금이 출발점이자 시작점이 돼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의 삶이 시보다 아름답다, 아니 그의 삶이 곧 가장 아름다운 시다.

7.
소녀는 야구왕.


꽃다지 - 노래의 꿈




꽃다지 - 노래의 꿈





10년만의 앨범이다.
이젠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도 울려퍼지는 '바위처럼'이나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같은 노래를 부른 꽃다지는 어떤 상징이다. 팔뚝질에도, 어느 술자리의 구슬픈 노래에도 꽃다지는 있다. 그 노래의 상징인 꽃다지가 돈이 없어서 10년만에 앨범을 냈다.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꽃다지의 노래를 들었고 울었고 싸웠던 사람들이 전화카드 한 장을 쥐어주듯 꽃다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이들에게 꽃다지는 더욱 솔직하고 좋은 노래를 보답하려고 노력했다. 공장에 들어가려던 앨범까지 다시 물리며 만들어낸 노래들이다.

어느 날인가 세상이 조금 달라진 것처럼, 어느 날인가 꽃다지의 노래도 조금 달라졌다. 단결투쟁을 외치며 팔뚝질을 선동하지도, 누가 이길을 가라하지 않았다며 결의를 다짐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히 자신의 삶을 토로하고 내 고단한 삶을 바라본다. 그 소리는 달라졌지만 그 안의 위로와 마음은 다르지 않다. 그들의 노래가 특별하지도 빛나지도 않지만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수천 수백의 가슴에 피어나는 민들레 꽃같은 까닭이다.

그들이 노래의 꿈을 잃거나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내 무엇의 꿈을 잃거나 잊지 않을 수 있게.

비록 미친 세월에 묻혀 사라진다해도
다시 한 번 그대 가슴을 펴고 불러준다면 끝까지 함께 할테요


++
노래의 꿈

나는 누군가의 가슴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나서 아무도 날 찾지 않을 때까지 살다 가지
내겐 작은 꿈이 있어 그대 여린 가슴에 들어가 그대 지치고 외로울 때 위로가 되려해

때론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대 행복할 때 때론 그 사랑이 너무 아파 눈물질 때
때론 지난 세월이 그리워 그대 한숨질 때 그렇게 난 언제라도 그대와 함께 하려네

한땐 나와 나의 동료들은 거친 세상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의
분노가 되고 희망이 되어 거리에서 온땅으로 그들과 함께 했지

그땐 그대들과 난 아름다웠어 비록 미친 세월에 묻혀 사라진다해도
다시 한 번 그대 가슴을 펴고 불러준다면 끝까지 함께 할테요

단상


#
"어머님이 안계신 첫번째 노동자 대회입니다"

그러네, 41년만에 처음으로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노동자 대회를 치뤘구나.
하지만, 김진숙은 무사히 크레인에서 내려왔고,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지만 우리는 아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간다. 이젠 재능에서, 쌍용에서, 도처의 모든 싸움터에서 승리의 소식이 날아들거다. 그렇게 이러쿵저러쿵 한걸음씩 조금씩 앞으로 뒤뚱뒤뚱 걷다가 마침내 '내 마음의 고향,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다가가 전태일과 이소선을 만나야지.

#
노동자 대회의 핵심은 역시 뒤풀이. 술이 좀 모자랐지만, 피곤한 탓인지 추위 탓인지 적당히 알딸딸. 세상은 안좋고, 기분은 좋고, 술도 좋은데, 사람많은 버스는 싫고. 우리들의 어린시절 이미 지나갔고, 어른이란 이름으로 힘든 직장 갖고, 세월가며 이미 뽀얀 얼굴은 갔고. 으응? (이 농담에 웃고있다면 당신도 DEUXist)

#
감수성과 지성의 기능에 대한 얘기를 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 없지만, 역시 난 태어나면서부터 냉혹한 피와 표독스러운 눈을 가진 남자이므로 지성의 확장이 곧 감수성의 확장과 다르지 않다고 결론 지었다. 이성과 충만한 지성에 근거, 판단하며 바라보는 세상은 결국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마음, 상호부조하는 태도, 만물에 겸손해지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욕심부리며 남의 것 빼앗아 제 것만 찾는 아귀축생들은 뭐냐 물으시면, "걔넨 멍청해서 그래요"

#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을 읽고 있는데 도무지 진도가 안나간다. 어렵기도 하지만 도통 책을 읽지 않으니 진도가 나갈리가. 시간나면 저질 무협지나 뒤적이는 잉여로운 생활. 내일부턴 좀 열심히 읽어야지. 지금 읽고있는 무협지 10권까지만 읽고.

#
술마시다 영화제에서 일하는 선배랑 올 해 무슨 영화가 좋앗냐는 얘기를 하는데 도통 영화를 보지 못했네. 안되겠으니 어둠의 경로님이라도 의지해서 몰아쳐야겠다. 어, 그럼 아감벤은 또 언제 읽지?

#

이런게 바로 패기. 이정도 패기라면 갑자원도 문제없다. 보고있나 히로?


단상


#1
민노당과 국참당, 노심조의 진보통합연대가 출범한단다. 순서대로 55:30:15의 지분으로 합의했다나.
종북주의자들과는 한솥밥을 먹을 수 없다며 떨어져나온 이들이 15%의 지분만으로도 괜찮으니 다시 받아달란 꼴이다. 돌아서지 않겠다는 이들에게 분열주의자니 뭐니 온갖 험한말 을 해대더니. 결국 그때부터 그들이 그렸던건 진보나 운동이 아니라 금뱃지였던게 여실해졌다. 전위당이니 정치세력화니 하는 헛소릴랑은 집어치워줬으면 좋겠다. 그건 그냥 금뱃지 페티쉬다. 자, 이제 다음 차례는 뭔가? 노빠와 주사파도 진보세력이니 민주당하고 합칠 차롄가? 반 한나라당, 집권 저지 이런 말들을 운운하며 진보 개혁 통일세력하고도 똥꼬 맞춰야 뭐라도 하나 주워먹을테니.

#2
진보정당은 필요하다. 하지만 진보정당의 집권이 곧 완성은 아니다. 진보정당은 정당이 아니라 진보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정당은 그저 운동의 일환이다. 다방면에 걸쳐 만들어진 수많은 진지중에 하나인 것이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 많은 가치를 포기하거나 돌이킬 수는 없다. 게다가 진보정당과 의회주의에 많은 것을 부여하는 순간 운동과 정치는 타자화된다. 민중 개개인의 삶과 괴리되는 것이다. 박원순을 뽑아 놨다고 서울시정이 민중의 것이 되는건 아니다. 진보정당이 원내 과반의석을 차지한다고 이 사회가 진보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의회주의에 빠진 정치인과 대중들의 사회에선 진보정당의 원내진출과 집권은 어불성설이다. 모르지 않을 이들이 저리 매달려 있는 여의도엔 도대체 젖과 꿀이 얼마나 흘러넘치는걸까.

#3
진보정당은 좀 더 자유롭고 아나키적이어야 한다. 국가, 조직이라는 한계 안에선 상상력이 제한되는 법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소외가 발생한다. 만물과 관계를 맺고 상호부조하며 누구(무엇)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을 상상하는 정당이 진보정당이다.

#4
"나의 코뿔소는" 하고 그는 말했다. "너무 느리게 생각하고 너무 성급하게 돌진하는거야. 그것이 정말 사실이야" 그러면서 그는 이상  더 알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것을 알고자 했던 것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옛날이나 마찬가지로 살아갔다.
페터빅셀 - 책상은 책상이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사람


#5
슈퍼스타K를 열심히 봤다. 울랄라세션의 우승은 이 사회에 아직은 원칙과 정의, 법과 도덕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쉽다. 투개월을 돌려줘 엉엉엉.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탑11부터 그렸던 내 가상 시나리오에 대해 얘기해야지. 사실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시나리오였고, 탑3까지는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에 난 자신이 있었지만,
난 투개월을 지켜주지 못했어. 예림아. 엉엉엉

#6
마봉춘에서 새로 시작한 '나도 꽃'이 생각보다 괜춘한 듯.
이지아는 '소통부재'로 인사고과에서 물먹었지만, 사실 그 드라마의 누가, 또 이 사회의 누가 소통을 하며 살까. 이지아의 말처럼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데.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는 개똥벌레같은 외로움. 할아버지하고 대화하는 시퀀스는 좀 뻔했지만 사실 그런 뻔한게 계속 쓰이는 이유는 좋기 때문이다. 좋았단 얘기다.
이지아는 예쁘고 연기도 잘해서 좋아하는데, 계속 비호감 연예인처럼 취급당하다(내 주위에서만 그랬나?) 서태지와의 이혼사건(이게 사건이 되는 이 개똥벌레같은 사회가 너무 싫다)이후로 급전직하. 고심해보니 그동안 이지아가 착하고 순수하기만 한 캔디역할만 줄기차게 해와서 그런 듯 싶다. 태왕사신기에 베토벤바이러스에 스타일까지 주구장창. 사실 그녀가 뿜어내는 간지가 그 쪽은 아니잖아. 여튼 이번 역할은 참 괜찮을 듯. 상식적이지만 세상이 비상식적이어서 외롭고 뒤틀려서 아픈 역할. 이거 요즘 그녀 상황이랑도 얼추 맞을것 같은데.

근데 왜 보려는 드라마는 죄다 수목에 몰려있는거냐. 방송 3사 원샷 통합논의 해서 월화 수목 주말로 옮겨 배치해주면 안될까?

#7
 투개월이 떨어진 이유는 선곡의 문제였다(고 생각하련다) 장필순 언니 노래를 불렀으면 참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는데.


일테면 이런노래.
장필순 -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김진숙의 승리


고백하건대 사실 난 이길 수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책에서건 내 눈으로건 난 이기는 걸 보지 못했다. 부평, 대추리, 이랜드, 평택처럼 영도도 그렇게 울다가 지쳐서 잊혀질거라고 생각했다.

김진숙 앞에서 그토록 많은 이가 울었지만 그녀는 웃었다. 사실 희망을 얘기하면서 절망을 대비했기에 눈물이 나온것일 텐데, 그녀는 절망의 틈바구니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아서 웃을 수 있었을테다. 그리고 그래서 마침내 이겼다. 오늘 하루만은 우리의 승리라고 평가하지 말고 그녀의 승리라고 말해줘야지. 영웅주의라고 누가 찌껄인다면, 그래라. 그녀는 영웅이다. 이건 역사다.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다.


지민주 - 길 그 끝에 서서

강허달림 -독백,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독백 - 강허달림


노래는 아마 '시절'로 기억된다. 첫사랑 그애가 좋아했던 아소토유니온이나 정인의 노래들은 그 시절을 소환해낸다. 그래서 잘 듣지 않는다. 내 사춘기의 노래는 웃기게도 윤종신과 공일오비였다. 그 땐 HOT가 무림을 평정했을 시절이라 어디를 가도 '위 아더 퓨쳐'와 '행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학원 선생님이 윤종신과 공일오비를 좋아해서 늘상 그걸 듣고 있었고, 학원에서도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실보다 교무실에 앉아 선생님들과 농담따먹기 하길 즐겼던 나는 자연스레 윤종신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식으로 노래 한 곡이 시절을 대변 할 수 있다고 하면, 그리고 내게 가장 소중하고 기억에 남는 노래라면, 아니 기억에 남는다느니 소중하다느니 하는 겸연쩍고 진부한 표현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이 그 노래라면, 그렇다면 난 그 노래로 대변되는 그 시절에서 한발짝도 나서지 못한걸까.

'독백'은 그런 노래다. 그 때.
그러니까 혼란스럽거나, 외롭거나, 어렵거나.
결심했다가 무너지거나, 금방 일어날듯 하다가 또 일어선지 못할거라고 체념하거나.
세상은 혼자라고 읊조리거나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간절히 찾거나.
위로받고 싶었지만 실은 위로하고 싶었거나.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엇도 되지 못했고 또 무엇이 되고싶은지 알지 못해서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도 못했던.

이런저런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감자탕 한 냄비를 나눠 먹는 방법을 몰라서 혼나고 질질 짜거나,
삶을 다시 세워 홀로 올곧이 서겠다며 잘난 척하느라 뻗어 온 손에 침을 뱉었다.
세상은 책 바깥에 있다는 말을 책에서 읽곤 세상에 서려 했고,
갈 곳이 없는 주제에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노라 떠들었다. 그건 생각보다 힘겨운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외로웠다.  

아마 하루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큰 길에서 아무 것도 없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면 놀이터 맞은편에 우리집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놀이터에 앉아서 담배 한대를 태우는게 습관이었는데, 그 때였던것 같다. 이 노래가 박힌건. 강허달림의 노래야 그 전부터 들어왔지만 왜 갑자기 그렇게 서럽게 울어버렸을까. 얼마인지도 모를만큼의 시간동안 울었다.

"무엇들이 그렇게 진실인지 알수도 없을수도. 그런 후에 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 노래는 여전히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아소토유니온의 노래를 들으며 첫사랑을 떠올리거나 윤종신의 노래가 유년기를 떠오르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바래져 미화되거나 희미해진 기억이 아니다. 난 아직도 그 '어둠에 지친 긴 터널'의 정체를 모르는 까닭이다.

난 여전히 혼란스럽거나, 외롭거나, 어렵거나.
결심했다가 무너지거나, 금방 일어날듯 하다가 또 일어서지 못할거라고 체념하거나.
세상은 혼자라고 읊조리거나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간절히 찾거나.
위로받고 싶었지만 실은 위로하고 싶었거나.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엇도 되지 못했고 또 무엇이 되고싶은지 알지 못해서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한 걸음도 나서지 못했다.
애쓴 다짐의 말이나,고백의 말은 필요하지 않다. 한 걸음도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고백이나 다짐은 그동안 얼마나 숱했던가.

좋아하는 이송희일 감독의 단편중에 '언제나 일요일 같이'란 영화가 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화분을 키우지만 그 화분이 말라 죽을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던 룸펜이 나오는. 아 그 뻔해보이는 클리셰에 갇혀서 여전히 같은 노래를 듣고있다.

아, 나란 남자......ㅋ

이러니 살이 빠질리가



#1
어쩌다보니 홍대투어.
Bar 삭, 이리카페, 묘한술책.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음.... 죄다 쳐묵쳐묵하러 다니는.
돈이 남아있을래야 남아있을리가.
살이 빠질래야 빠질리가.

하지만 필스너는 잔에 따라마실때 그 풍미가 곱절로 증가한다는 사실을 배웠으니
이번 회동은 유익한 회동.

여튼 이건 술도 못마시는 주제에 먹기는 남들 곱절로 먹는 덤양코스.
술도 못마시는 주제에 술은 남들 곱절로 마시는 사람들과의 코스는 따로.ㅋ

#2
하루종일 굶다가 짜파게티를 두개나 끓여먹고 요즘 애정하는 "냉장고에서 묵은 감자 삶아서 껍질째 먹기"시전중.
배가 빵빵해졌으니 이제 뿌리깊은 나무 할때까지 늘어지게 한 숨을.......이러니 살이 빠질래야 빠질리가.

#3
내 방에 드디어 바퀴벌레 출현.
세탁기 안의 빨래는 그 안에서 이미 건조 완료.
설거지는 물만 갈아주다가 나중에 그릇없어 밥 못먹을 때.

이러니 살이 빠질래야 빠질리가.

#4
먹다지쳐 잠이 들면 축복을 받으리. 으응?

#5
김진숙이 내려왔고, 수능도 끝났고, 소녀시대도 컴백했으니 술술술.
이러니 살이 빠질래야 빠질리가.




한대수 - 하루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