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9 - 을지로 판타지아



모친의 전성기 시절 나와바리는 을지로와 충무로 일대였다.

 

꿈많은 만화가 지망생이자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이었던 모친은 결국 외할머니의 부지깽이 러시에 굴복해 인쇄소에 취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꽤 오랜 시간 일을 놓지 않았으니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을지로의 인쇄소 골목에서 보냈다.


(나중에야 동생 넷이 줄줄이 딸린 가난한 집의 장남과 결혼한 탓으로 맞벌이가 필수였다는 정황을 이해했지만. 그땐 모친이 야근하고 돌아와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사는 집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내일 아침밥을 준비하는 데 이어 고등학생이던 삼촌의 도시락까지 준비하는 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했다. 참.)


# Pax Euljironia


당시 모친이 했던 일은 한자 타자기를 사용해 책을 조판하는 일이었다. 7~80년대엔 아직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었고, 당시의 책들은 대부분 한자 사용 빈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으니 한자 타자기의 활용도는 출판-인쇄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모친은 내가 아는 사람 중 한자를 가장 많이 안다. 여전히 가끔 방송에서 한자 사용을 틀리거나, 해석을 이상하게 하면 지적을 즐기신다.) 


이렇게 생긴 거다. 한자 활자만 3천 자 가까이 된다. 그 한자를 몽땅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활판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모두 외고 있어야 한다. 역시 손발이 불편해야 머리가 좋아진다.




다니던 인쇄소에서도, 을지로 인쇄골목의 업자들 사이에서도 모친은 꽤 유능함을 인정받은 인재였다고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셨는데 나로선 본 바가 없으니 믿을 도리밖에 없다. 암튼 그 때가 모친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다. 


모친은 지금도 대단한 풍류객이라 가끔 만취한 모자가 동틀 녘이 되어서야 귀가하다 현관문 앞에서 만나는 일도 종종 있는데, 몸과 마음과 주머니 사정까지 좋았던 그 땐 참말 대단했다고 한다.   


# Midnight in EulJi-Ro


그날은 모친의 생일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겨울이었다. 생일 선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양희은 아줌마의 콘서트 티켓을 샀다. 빠듯했던 알바비밖에 없는 대학생 나부랭이였던지라 2층의 가장 싼 좌석이었지만 그래도. 모친은 그 시절의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매우 좋아하셨다. 울다가, 웃다가. 돌이켜보니 그 해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엄마없이 맞이하는 모친의 첫 생일. 


공연을 보고 나와 모친과 술을 마시러 나섰다. 사실 그 즈음은 이미 내가 여기저기 술을 한창 마시러 다닐 때이기도 했고 특히 서울 도심 한복판은 집회 뒷풀이를 통해 수집해놓은 맛집 정보가 빠삭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자연스레 모친을 인도하려 했으나 종로통 무교동 을지로 골목골목을 누비는 모친에게 어느새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던 것이다. "니가 술을 마셔봤자지, 이 구역의 한량은 나야"라는 표정이었달까. 


모친은 그 날 골목 골목을 누비면서 그 때와 달라진 풍경, 이제 떠난 사람들,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들, 변해버린 당신의 모습, 하지만 여전한 당신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당을 자부하던 남정네들을 말술로 꺾어버린 이야기, 미녀 동생에게 흑심을 품은 남자 놈들을 혼내주던 무용담, 그렇지만 너무 새침해 사실은 밉상이었던 동생, 그러니까 내 이모에 대한 험담, 생각보다 시시했던 첫사랑 이야기, 야근하는 밤이면 전화기 너머로 기타치며 노래를 불러주던 잘생긴 남사친, 빽판을 구하러 미군부대에 함께 숨어들던 큰오빠, 큰오빠보다 사랑하는 조용필 오빠, 양희은 언니, 못생긴 배철수, 쉘부르, 쎄시봉, 명보극장과 국도극장, 어울리지 않게 책을 좋아하던 거래처 남자, 다시말해 내 아버지 이야기까지. 골목골목의 굽이는 그녀의 삶의 주름이었고 그 골골에 갖은 이야기와 술과 음식과 토악질과 눈물이나 땀이나 설움 같은 것들이 잔뜩 남아 여전히 눅진눅진했다.  


모친을 따라 '동원집'에 처음 갔다. 동원집은 모친이 다니던 인쇄소와 매우 가까워서 당시에도 즐겨찾던 집이라고 했다. (그 땐 이 집이 TV 프로그램들이 앞다퉈 꼽는 맛집이 될 줄 알았을까.) 감자국 두그릇과 머릿고기 한접시를 시키고 소주를 마셨다. 술이 취할수록 그날 모친과 내가 나눈 대화는 아무말 대잔치가 됐다. (사실 그날의 느낌들이 남아있을 뿐 어떤 얘기를 했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게 벌써 근 10년 전 얘기다.) 


이 사진은 며칠 전 동원집에서 찍은 사진. 10년 전엔 먹기 전에 사진찍는 문화같은 건 없었다.



서로 자기말만 떠들어대고 있었고 허름한 감자국집에 앉은 모자의 다소 어색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우리의 그 날 대화는 대단히 매끄러웠는데, 그 순간 우리는 아마 같은 나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공구상가 어디쯤을 지나다 우리도 모르게 80년대 초반의 을지로로 흘러들어가버린 사람들처럼. 55살의 지훈이 엄마가 아니라 25살의 미스 박, 조용필 빠순이, 미래문화사의 에이스, 을지로의 풍류객. 박신자 씨를 만나러.


박신자 씨와 난 서로의 삶의 고민이 가장 힘들다는 듯 떠들어댔다. 그랬던 것 같다. 집을 떠나버린 남편, 내 맘도 몰라주는 그녀, 조국통일과 노동해방, 가정경제와 건강, 학생운동의 전망과 언론사 시험 진로 사이의 간극, 도무지 오르지 않는 우리집 집값. 등등등. 등등등. 서로 제 말만 떠들어대는 만취한 스물 다섯살들의 대화가 그렇듯. 영원히 넌 내게 스물다섯이야 배배, 오 곱하기 오 배배.


동원집에서 이미 취할만큼 취했지만 2차를 갔다. 굳이 골뱅이를 자셔야 한다고 하셔서. 골뱅이는 모친의 훼이버릿 술안주다. 그게 팍스 을지로니아 시절에 생긴 취향이라고. 사실 나도 술자리를 1차로 끝내본 적이 살며 없어서 (이는 모친 역시 '여전히' 마찬가지... 이걸 쓰고 있는 지금, 모친은 2차로 옮긴다며 먼저 자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골뱅이 집으로.


영동 골뱅이를 갔다. 노가리 골목과 함께 을지로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들러 맥주를 마시는 집이다. '오비 맥주집'과 함께 이 일대 주당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고. 


작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여기는 옆집인 영락 골뱅이.


   

그 날 우리 술판은 매우 늦게까지 이어졌다. 조용필과 최진희, 김현식, 스모키에 로보까지 등장한 노래방과 3차까지. 집에는 택시를 타고 갔다. 다행히 택시비는 모친이 내셨지만 그 날 술 마시느라 한 달 알바비를 거의 다 탕진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풍류객의 올바른 자세.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미드나잇 인 을지로.



# EulJi-ro Fantasia


취향을 모친에게 물려받은 탓인지 아니면 피는 못속이는 건지 이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마시는 동네도 이 일대가 됐다. 그보다는 을지로가 이렇게 멋과 풍류, 낭만과 해학이 가득한 동네입니다.


주로 1차는 5가의 경상도집에서 시작한다. 이른 저녁시간부터 길바닥 포장마차에 앉아 돼지갈비에 소주를 두어병 마시곤 배를 다 채우지 않은 채 일어서 을지면옥을 향한다. 냉면이 나오기 전에 술을 한 두잔쯤 미리 먹고, 냉면이 나오면 면을 흐트려 면의 곡향이 육수에 베기 전에 그릇째 두어 모금을 들이키면 돼지갈비 기름과 술냄새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입천장을 씻어내는 느낌이 든다. 제육과 냉면을 두고 소주를 또 두어병 마시고 나면 근처의 영락 골뱅이나 노가리 골목으로 간다. 배가 아직도 다 차지 않았다면 조금 걸어 다동 용금옥의 추어탕이나 길 건너 종로통의 영춘옥엘 가도 좋다.


위에서부터 경상도집 돼지갈비, 영춘옥의 따귀찜과 을지면옥의 냉면

   



이 가게들은 모두 술 좋아하길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멋진 곳들이다. 특히 을지면옥같은 경우는 언제고 모친과도 꼭 함께 가길 바라는 곳이다. 냉면을 좋아하는 모친은 그 시절에도 을지면옥은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느 곳에선가 평양냉면을 먹어봤지만 맛은 도무지 심심한데 고기 냄새는 날대로 나서 영 못먹겠더라는. 그래서 근래들어 티비에서 냉면을 소개할 때마다 저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혀를 차는 모친에게 을지면옥의 개운한 육수를 꼭 알려주고 싶더라.


그래서 그렇게 대를 이어 을지로 판타지아. 낡고 오래됐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건 노포들만이 아니다. 기억의 전승, 삶의 연속,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더해 또 누군가에게. 술과 맛있는 음식이 연결짓는 것. 그 시절을 간직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일. 오늘을 살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 하지만 그 시절이 쌓여 주조한 오늘을 똑바로 직시하는 일. 세월을 견디고 다시 오늘을 견뎌내는 삶. 내일을 희망하는 삶. 엄마의 삶, 나의 삶. 당신의 삶. 우리의. 그렇게 계속 계속 삶을 예찬하며 을지로 판타지아.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고 냉면도 먹고.


# Diamond And Rust


기억이란 다이아몬드 아니면 녹.


을지로를 누비던 오늘의 박신자 씨에게 그날의 기억들이 찬연한 다이아몬드였으면 좋겠다.

삶에 최선을 다해 충실했고 가난과 고난에서 때로는 현명하고 또 때로는 어리석어서 이제는 나이들고 지치기도 한 그녀가, 그 다이아몬드를 자산 삼아 오늘을 더 찬연히 살아가는 멋진 여성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을지로를 누비고 다닐 나에게 오늘이 다이아처럼 남으면 좋겠다.

늘 삶과 관계에 솔직하면 좋겠다. 내가 누군가의 기억에 '녹'으로 남지 않으면 좋겠다. 

늘 삶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고 가난과 고난을 가끔은 현명하게 또 가끔은 어리석게 맞이하면서도 늘 그 순간을 돌이키고 싶어하거나 후회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엄마에게 배운 건 그런 거다. 넘치는 알콜분해효소와 새벽귀가 본능보다는.


어느 날엔가, 이 부정기 연재에 나온 집들에서 엄마랑 같이 술을 마실 수 있게되면 더할 나위 없겠다.

하지만 그 전에 을지면옥부터 먼저.


  






 

아버지

대낮부터 아버지와 술을 마시고 조금 취했다.


낮술에 취하면 애비에미도 몰라본다는 격언을 떠올리며 '앞에 앉은 사람이 아버지라는 걸 까먹기 전까지만 마시면 되니까'하면서 안심하고 마셨더니 이 꼴이 됐다.


아버지는 나보다 좀 더 취한 거 같으니 내가 이긴 셈이다. 뿌듯하지는 않다.


오늘은 아버지의 환갑 생신이다. 생활수준과 의료기술의 발전에 따라 국민전체의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환갑의 중요도가 떨어지는...같은 개드립을 구사하려다 관두고, 아버지에게 아주 좋은 환갑잔치 상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했다.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그렇듯 조선 남자의 전통적인 꼰대질을 시전하셨다. 당신이 지내온 과거의 영광과 세상탓, 아버지와 잘 아는 누구가 어느 부처 고위직의 누구다 같은 거.


되게 홍상수 영화같은 술자리였고 어쩐지 쓸쓸해졌다. 어제 홍상수 영화를 봐서 그런가보다.

아버지 뒷모습을 괜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괜히 씁쓸해지는 클리셰같은 장면을 일부러 연출하지는 않았지만,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안바뀌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뒷모습을 계속 봐야했다. 이게 다 이재명 때문이다. 성남의 교통시스템은 정말 지랄맞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하기 때문에 술을 깨러 인근의 다방으로 들어왔고 옆테이블엔 내 또래의 아이 엄마들이 앉아있다. 나한테 술냄새가 난다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데, 내가 안들릴 줄 아냐. 내가 내 앞에 일행의 목소리보다 옆테이블 얘기에 집중하는 도청계의 소머즈인데. 하지만 미안하니 어서 나가야지.


어느 순간에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삶을 지탱시키는 힘이었다. 이해와 용서. 같은 말을 입에 주워담은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누가 누굴 이해하고 용서해. 감히. 오늘도 아버지가 중얼거린 "삶은 각자 사는 거"라는 말, 증오도 애정도 마뜩치 않은 이 뜨뜻미지근한 마음. 명백한 타자화.


다만 서로의 삶을 살고 가끔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조금은 해보는. 

그리고 고희에는 오늘보다는 좋은 음식, 많은 사람들을 다짐하는 정도의. 그냥 그 정도.


회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전환과 환기가 필요한데, 아무래도 컬투쇼를 들으면서 가야겠다.

단상

1. 
김태용 감독의 <여교사>를 봤다. 영화를 다 보고 크레딧에 오른 감독의 땡스 투에 '김태용'이 있는 걸 보고서야 알았다. '아, 이 김태용이 그 김태용이 아니구나' 어쩐지 영화 보는 내내 이상하더라니. 

1-1. 
<여교사>는 꽤 괜찮은 영화지만 아쉬운 지점들이 종종 있었다. 일테면 김하늘의 복수가 너무 단순하고 짜친 것. 그녀의 질투와 증오, 단념, 삶의 무게, 집착 이런 것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는데 영화는 너무 손쉽게 이걸 해소해버린다. 하지만 가난하고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나이든 여자가 돈많고 예쁘고 다 가져서 나쁠 필요도 없는 애한테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게 그런 거 말곤 없는 것도 사실이지 뭐. 이 김태용 감독의 전작 <거인>도 좋아하는데 감독은 계급간에 발생하는 어쩔 수 없어서 미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짜증나고 보기싫지만 몰입할 수밖에 없다. 내가 흙수저라 그렇지 뭐. 어쩔 수 없다. 

1-2. 
<거인>에서 최우식은 정말 신의 한 수 였다. 하지만 이번엔 배우들이 좀... 김하늘은 늘 뭔가 아쉽고, 유인영은 '늘'이라고 말할만큼 뭘 본 것도 없다. 연기는 엄청 구리다. 몸매는 엄청 예쁨. 깜짝 놀랐다. 중간에 곽동연이 잠깐 나온다. 찌질한 고삐리로 나오는데 잠깐이지만 얘가 제일 눈에 띄는 배우. 김하늘도 이 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설행에 나왔던 임화영도 알게모르게 계속 눈에 띄는. 

1-3. 
2016년부터 여성의 영화가 강세라고 생각했다. <비밀은 없다>나 <우리들>, <미씽>까지. <여교사>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여성이 성적 욕망의 주체, 특히 롤리타 욕망의 주체로 나서는 지점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의 성역할을 뒤집어 놓은 셈이다. 일종의 전복. (영화는 알게모르게 계속 이런저런 전복을 시도한다.) 다만 언급했던 다른 영화들과 달리 남성 감독의 영화라 그런지 여성의 욕망은 그저 남성에 의해 대상화된 연민의 시점에 그친다. 특히 유인영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한데, 난 김하늘을 비롯해 타자들이 걔를 보는 시각 말고 걔의 진짜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보여주지도 않고. 그런 건 유인영 때문은 아닐 거다. 

2. 
며칠 전에 모친이 만취한 상태로 귀가해서는 "노무현은 아무래도 타살당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나는 "당시에 그런 의혹도 있지만 대부분 의혹수준에서 멈췄고 나로서는 명백히 자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사회적 타살'이니 하는 얘기를 하기엔 모친이 너무 취해있었다.) 하지만 모친께서 주장하시길, 당신은 그날 새벽 우연히 라디오를 들었는데 "당시 라디오에선 전 대통령이 타살로 죽었다고 보도하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자살로 보도내용을 바꿨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고 그날의 보도들과 지난 방송까지 찾아가며 보여드렸건만 모친께선 "기자라더니 헛똑똑"이라 일갈하시며 "모두 날조되고 조작됐다"고 강하게 주장하시었다. 당장 이에 대해 취재하라고도 말씀하시.... 암튼 그래서 얼른 어디든 취직해서 이거부터 취재해야하나 싶다. 내가 엄마 말 잘듣는 착한 아들이다. 

2-1. 
만취한 모친과의 황당한 에피소드로 웃어 넘길 수는 없는 게, 암시가 주는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하고 있다. 가끔 모친은 동창이나 동네 아주머니들과의 단체 카톡방을 보여주는데, 거기엔 이런 음모론이나 선동이 늘 넘쳐난다. 좌우보혁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노무현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던 우리 모친이 그랬던 것처럼 저마다 자기의 마음 속 무언가를 건드리는 그 이야기들에 격하게 반응한다. 쿼어퍼레이드 때, 호모들이 사탄의 나라를 만들려 서울을 점령했다는 메시지도 봤다. 그런 암시에 걸려들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이성의 영역은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사실 사람을 움직이고 설득하는 데 좋은 건 논리나 이성보다는 정념이다. SNS는 일반화 되고 정보접근 창구가 그로 단일화되는 세대가 늘어나면서 거긴 괴벨스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 같다. 

3. 
동네 카페에 앉아있는데 옆 자리에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 애와 엄마가 앉았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데 여념없는 남자 애는 오전 중에 2군데의 학원을 마치고 온 모양이다. 엄마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주고 3번째 학원 학원버스가 오기를 함께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자는 딜을 시작했다. 축구교실에 다니고 싶다는 아이에게 엄마는 거래조건으로 또다른 학원을 내밀었다. 아이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뭔가를 사달라고 했고 (잘은 알 수 없지만 게임기 이름 같았..) 엄마는 세부 모델명과 용량을 역으로 제시하며 가격을 인하해 수용했다. 사교육계의 임상옥, 육아계의 김만덕을 본 기분이다. 이곳은 개성인가요 베니스인가요. 

4. 
<로그 원>이 개봉하고 주변에 거기 열광하는 덕들이 종종 눈에 띈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하나도 보지 않은 나로서는 데면데면하다. 사실 스타워즈 뿐 아니라 허리우드의 '시리즈'들에 다 시큰둥한 편이다. 세계관을 끊임없이 늘려가는 마블의 히어로물도 작년쯤에야 가까스로 시작했고,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심지어 해리포터 시리즈도 안봤다. 이쯤되니 주변에서 무식하다고 하도 성화라 뒤늦게야 공부하듯이 몰아서 본다. 007을 며칠에 걸쳐 처음부터 가까스로 정주행했고, 미션 임파서블도 마찬가지로 시간들여 깜지쓰듯 정주행했다. 그렇지만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본 시리즈가 하나 있는 데 '오션스' 시리즈다. 오션스 시리즈의 미덕은 밤새도록 떠들어댈 수도 있을텐데. 방바닥 뒹굴며 나초에 치즈찍어 먹으며 오션스 트웰브를 보는 게 주말을 보내는 가장 완벽한 방법 중 하나다. 러스티 형 짱짱맨. 암튼 버니 맥 아저씨가 죽고 더이상은 오션스 시리즈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안타까웠는데 새로운 오션스 시리즈가 나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오션스 8> 대니 오션의 동생이 이끄는 여성 사기단 이야기라는데 캐스팅이 어마어마하다. 산드라블록과 헬레나 본햄 커터, 앤 해서웨이에 다코타 패닝, 케이트 블란챗도 나온다. 아, 리한나도. 세상을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또 이렇게 하나 늘었다. 

5. 
역시 해야할 일이 있으면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진다. '이제 그만하고 집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탁기 안의 빨래도 널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마 난 안될 거야... 벌써 아홉시네.



민중총궐기 참석 후기

주말이 지났지만 100만의 여파는 아직 사그라들질 않는듯 보인다. 그동안 억압당한, 혹은 스스로 억제해온 분노의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100만의 집결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억압당한 분노의 표출이었다면 평화시위의 프레임은 스스로 억압해온 분노의 관성이다. 저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으니 폭력만은 안된다는 말, 아이와 노인, 여성들도 함께 하고 있으니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 문법이니 규칙이니 전략이니 하는 말들이 그 관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건 사실 전복의 상상력이 부재한 것에 다름 아니다. 제도와 법이라는 거대한 아버지를 정점에 둔 일종의 오이디푸스 삼각형.

선거와 법치주의 같은 현대 민주주의 제도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의 법치주의는 법의 지배 보다는 법에의한 지배에 가깝다. 그보다는 법 자체가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탄생한다.모든 법을 부정하는 아노미를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좀 그런 걸 지향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좀 더 아나키적으로) 법이나 선거제도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종종 쓰는 표현이지만 주인집 허락을 받아, 주인집 망치를 빌려, 주인집을 부술 수는 없다. (주인집 망치를 '빼앗아' 주인집을 부수는 일과는 다르다.)

아버지, 주인집, 제도, 법 같은 것들을 살해하는 일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 죄의식이란 강력한 삼각형의 강박이 날조한 것이기 십상인 때문이다. 그 콤플렉스 안에서 발생한 저항은 저항이라기 보단 순응에 가깝다. 전복과 탈주의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삼각형의 정점만을 갈아치운 채 우리는 여전히 갇혀있게 된다.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권이 저렇듯 개수작을 부리는 건 그 징후다.

100만의 사람이 모이면 100만의 욕망이 분출되게 마련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욕망의 분출을 긍정하는 일이다. 혁명은 욕망의 분출에서 시작한다. 욕망은 그저 결핍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산되고 또 생산하는 일이다. 평화라는 말에 욕망을 가두지 말자. 평화는 고착된 상태가 아니라 추구하고 지향되는 과정이다. 평화를 지향하는 상상, 탈주를 도모하는 용기. 필요한 건 오직 그런 것들 뿐이다.


+

이번 민중총궐기의 브금은 <청년폭도맹진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 그 누구라더냐 
저 철옹성을 쳐부수고져 힘차게 맹진하노라 
 짓밟힌 자들의 처절한복수리로다 
주먹 불끈쥐고 일어설 때 

화염 속에 불타오르는 저 철옹성의 끝을 보리라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8 서촌 - 안주마을



그 날은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싶었다. 백수생활이 길어지면서 주머니는 하염없이 가벼워졌고, 가벼운 주머니를 핑계로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있었다. 공부는 영 되질 않았고 책을 읽어도 눈에 들지 않았다. 찌는 것처럼 더운 여름에 집에는 에어컨도 없었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날.

점심 나절이 지날쯤부터 전화통을 들고 여기저기 찔러보기 시작했다. 누구는 야근이라고 했고, 누구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누구는 선약이 있다고 했다. 온갖 곳에서 다 퇴짜를 맞고 우울함이 더 차올라 있을 때, 동거남은 날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면서 술 마시러 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잡쳐버린 기분, 우울함의 끝에서 술이 넘어갈까…는 커녕 좋다고 쫄레쫄레 따라나서 서촌의 안주마을로 향했다. 안주마을에선 언제, 누구와, 어떤 상황이라도 맛있고 재밌게 술을 마실 수 있다. 짜증날 땐 짜장면, 우울할 땐 안주마을.


# 알콜 코뮨

안주마을에 들어서면 일단 육회와 카스처럼을 시킨다. 육회는 마장동 축산시장 어느 집보다도 안주마을 육회가 더 좋다. (솔직히 진짜 그정도는 아니고..ㅎ 접근성 좋은 서울 한복판에서 먹기에 충분히 맛있는 정도) 육회를 다 먹고나면 소주 안주로 적합한 음식들과 맥주 안주로 더 좋은 음식들을 모두 먹어야 하는데 그 때마다 주종을 바꿀 수 없으니 소맥을 말아 먹는 게 베스트다. 이곳은 타협과 절충의 안주마을. 술자리의 민주주의 공동체. 알콜 코뮨.

육회와 카스처럼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낮에 술마시자고 전화했을때 퇴짜를 놓은 이들이다. 바쁘다던 그놈은 일을 미뤘으니 술을 마시자고 했다. 선약이 있다던 누나는 잠깐이라도 들리겠단다. 이 와중에 내가 연락도 하지 않았던 놈한테마저 전화가 왔다. 술 마시자고. 졸지에 서로 생면부지인 사람들 6명이 버름하게 마주보고 앉았다. 아직 육회 한접시를 다 비우기도 전에. (심지어 한 놈은 자기 학교 후배를 데려왔다. 걔는 무슨 죄야.)

어색하고 버름한 술자리를 예상했지만 그날은 생각보다 훨씬 유쾌하고 즐거운 자리가 됐다. 각자 좋아하는 안주를 끊임없이 시켰고 대부분의 안주가 맛있었다. 안주마을의 미덕이다. 다양한 안주들을 모두 준수하게 내어놓는 것. 소주안주와 맥주안주, 육류와 생선, 탕과 마른안주까지 대중없어 보이는 그것들을 다 그럭저럭 괜찮게 자리에 두는 것, 그것들이 썩 어울려 보이게 하는 것.

그날 불려나온 이들의 면면도 그랬다. 한 명은 나와 같이 사는 내 대학 선배였고, 한 명은 고시생활에 코가 꿰인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대학 동기와 평범하지 않은 직장에 다니는 선배 누나도 있었다. 동창 놈에게 끌려나온 학교후배, 불쌍한 그 아이도 있었지. 아무튼 이들은 다 서로가 생면부지인 사이였다. 그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실 이들은 마른안주와 간재미회무침과 치즈샐러드가 한 테이블에 있는 것처럼 어색한 조합이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와 삶의 궤적과 영역은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음주취향과 식성, 술자리에서의 습성마저도 상이하다. 그래서 이들이 한데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심 흥미진진 기대하는 마음이 반, 지독히 어색하고 지루한 몇 시간을 보낸 뒤 아무런 재미도 성과도 없이 헤어지게 될거란 두려움이 반이었다. 그 날 그 자리가 유쾌했던 건 전적으로 안주마을의 매력 덕분이었다.

안주마을에서 어떤 안주가 가장 맛있냐고 물으면 뭐 하나를 집어내지 못하고 “다 그럭저럭 맛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준비된 대부분의 음식이 그냥 그럭저럭 맛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좋아하는 안주 하나쯤은 주문이 가능하고 누군가에겐 생소할 음식도 걱정없이 권할 수 있을 정도의 맛이다. 그래서 그날은 마치 포트럭 파티 같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씩 시킬 때마다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면서 음식을 권하고 나누는. 생면부지의 삶이 한 테이블에서 뒤섞였지만 그래도 저마다의 사람과 삶이 적당히 어울리는. 대중없어 보이는 삶과 음식들이 그자리에 적당히 괜찮게 어우러지는. 사실 살며 한 번 섞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잠시간 앉아서 벽과 차이 없이 머물를 수 있는. (물론 술은 계속 소맥이었다. 소맥이야 말로 음주문화의 헬레니즘 알콜코뮨의 이데올로그.)  




# 좁지만 좁지 않은 정신과 시간의 방

원래 워낙에 장사가 잘되고 손님이 많은 집이지만 요 몇년새 서촌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하는 바람에 안주마을은 사람이 미어터진다. 주말 저녁에는 2~30분 웨이팅이 기본이다. 가뜩이나 좁은 가게에 사람들마저 흘러 넘치니 테이블 사이 간격도 매우 좁다. 나같은 경우 화장실 한 번 가려고 일어설 때마다 좌우 양 옆 테이블이 모두 움직여줘야 한다.

신기한 건 그렇게 밀집되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묘하게 방해받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옆 테이블이 소란스러워 우리가 방해를 받는 것 같지도. 누가 들을까 염려해 우리 일행이 목소리를 줄이거나 조심스러워 하게 되지도 않는다. 왜 대학가의 거대한 프랜차이즈 술집에서는 조금만 시끄러워도 내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술을 코로 마시는지 아이폰을 앞접시 삼아 라면을 떠먹는지도 모르게 되는데 말이야.

그 이유가 뭘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두를 다 뒤섞여버리는 그 느낌,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해봤다. 옆테이블과 우리 테이블의 이질감 같은 게 잘 없으니까. 그러니까 경계하거나 방해받는 느낌을 받을 이유도 없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 추천안주는 없습니다. 다 맛있어요.

그 날 우리가 먹은 안주는 육회와 간재미 회무침, 삼치구이와 알탕, 감자전, 계란말이, 라면 등등등. 등등등. 정확히는 기억이 안난다. 술값만 25만원이 넘게 나왔던 것만 간신히 기억이.. 그 날 그들 모두를 에어컨도 없는 우리집으로 끌고가서 술을 더 먹었는데, 처음엔 없었던 어색함이 뒤늦게 밀려들어 금방 파했던 것도 간신히 기억난다.

역시 즐거움의 공은 모두 안주마을에 있다. 거길 벗어나면 다 사라지고 말아요.

어색한 누구와 술을 마셔야 한다면 안주마을로 가세요. 뭐가 맛있냐고는 묻지 마시고.
개인적으로 전 청어알젓이 좋다는 팁만.



1. 주말엔 자리 없습니다. 웨이팅 걸어놓고 옆에 봉구비어가서 맥주마시면서 기다리세요.
1-1. 일찌감치 한 명을 희생양으로 보내서 자리를 맡아놓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2. 한라산을 팝니다.

3. 사진은 이번에도 다 훔쳐온 사진입니다. 언제쯤 제가 술보다 먼저 카메라를 신경쓰게 될까요. 


4. 브금은 한대수 아저씨의 '하루아침'. 소주나 한 잔 마시고.  



다큐리뷰 - 내 이름은 말랄라

<내 이름은 말랄라> : 상식에 대한 공격에 대처하는 자세 


“저의 목소리는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는 매일 커지고 있습니다.” - 말랄라 유사프자이


# 상식

2012년 파키스탄 스와트 밸리에서 열다섯 살의 말랄라가 총에 맞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와 말랄라에게 “네 이름이 말랄라냐”고 물었고 말랄라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곧바로 총을 쐈다. 말랄라는 왼쪽 머리와 목에 총상을 입었다. 말랄라를 쏜 남자들은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 소속이었다. 사건 직후 파키스탄 탈레반은 성명을 발표해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여성이 세속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며 “율법에 어긋나는 세속주의를 설파하면 누구든지 우리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말랄라가 사는 파키스탄 스와트 밸리는 2009년부터 탈레반이 점령하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 율법을 들먹이며 여성은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했다. 말랄라는 ‘굴 마카이’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탈레반이 저지르는 만행을 고발했다.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었다. 탈레반은 말랄라가 계속 글을 쓰면 그녀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가족들도 죽이겠다고했다. 그러나 말랄라는 협박에 질려 글쓰기를 그만두는 대신 실명을 공개하고 BBC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결국 그녀는 탈레반이 쏜 총에 맞았다.

201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일흔 살 노인 백남기가 쓰러졌다. 수만의 사람이 몰려있는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다. 경찰 살수차는 백남기를 조준해 10기압의 물포를 직사했다. 10기압의 물포는 시속 160KM로 날아오는 야구공에 얻어맞거나 100m 높이에서 떨어진 물풍선에 직격되는 것과 똑같은 충격이다. 백남기는 두개골이 골절돼 뇌가 손상되는 중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다. 경찰은 사건 이후 지금까지 물포 직사가 적법한 절차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과격한 시위”가 문제라는 것이다.

백남기는 전남 보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백남기가 서울까지 올라온 2015년 11월 14일은 서울에서 ‘민중총궐기’ 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농사꾼 백남기는 한없이 떨어지는 쌂값으로 농민들이 얼마나 힘겨워지는지를 알리고자 상경했다. 현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에서 추곡수매가 21만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백남기가 쓰러지던 2015년 말 당시 쌀값은 한가마에 12만원이었다. 개사료 80Kg보다도 싼 값이다. 수백만 톤의 쌀이 남아돈다며 쌀을 개사료보다 싼값으로 취급하던 정부는 3만톤의 쌀을 수입해왔다. 쌀 수입량을 더 늘리겠다는 입장도 내놨다. 애초에 약속했던 쌀값 인상문제는 언급도 없었다. 백남기는 지금의 쌀값으로는 농사지어 살아갈 수 없다는, 정부가 약속을 지켜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지켜야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을 했다. 백남기는 결국 정부가 쏜 물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다.

# 웃을 수도 없는

말랄라는 총에 맞은 직후 영국으로 이송돼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깨어난 후에도 그녀는 탈레반의 억압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여성과 어린이들의 현실을 알려내는 활동을 이어간다. 그 활동으로 2014년에는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그러나 말랄라의 가장 큰 고민은 물리 시험과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교 숙제다. 카메라는 인권활동가 말랄라의 활동과 꼭 같은 분량으로 말랄라의 쉽지 않은 학교생활을 비춘다. 영어단어를 외우고 61점짜리 물리 시험지를 감추고 파키스탄의 친구들에게 “영국 애들은 공부를 엄청 잘한다”고 하소연하는 평범한 17살 고교생 말랄라의 모습이다. 그건 말랄라의 목숨까지 앗아갈 뻔 했던 그녀의 주장이 사실 얼마나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공부를 하는 일이, 숙제하기 싫어서 몸을 베베 꼬는 일이, 책을 읽고 시험을 보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일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그 일상을 보고 있자면 총에 맞고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주장이란 게 ‘고작’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바람이라는 게 허망할만큼 웃긴다.


그러나 말랄라의 그 평범한 바람조차 ‘수치’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되면 마냥 웃고있을 수만도 없다. 파키스탄 옵서버(Pakistan Observer)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정치적인 결정이고, 서방세력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말랄라는 서방세력이 원하는 것을 판매하는 평범하고 쓸모없는 소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어떤 이들은 말랄라의 투쟁이 서방세력의 정교한 음모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며, 말랄라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SNS에는 ‘말랄라드라마’(#MalalaDrama)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파키스탄인 일부는 말랄라가 파키스탄에 서구적 가치를 주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담아 ‘말랄라드라마’ 해시태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백남기는 쓰러진 후 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1년 가까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백남기는 2016년 9월 25일 끝내 숨을 거뒀다. 경찰의 공권력 집행으로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언론은 백남기의 학생운동, 농민운동 경력을 제시하며 그가 불법 과격시위를 했기 때문에 물포 직격 살수는 불가피한 공권력 집행이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학생운동, 농민운동 경력이 있는 ‘평범하지 않은’ 농민이었다던 백남기가 그 날 주장했던 건 ‘공약 이행’이었다. 쌀이 남아돈다고 쌀값을 후려치더니 굳이 쌀을 또 수입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약속을 지키라는 ‘과격한’ 주장 때문에 일흔살 노인에게 물대포를 직접 쐈다는 경찰당국의 해명은 허망할만큼 웃긴다.

백남기의 사망 이후 벌어진 상황은 억지로도 웃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다. 병원 측은 백남기의 사망을 발표하면서 그가 ‘병사’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그의 사망원인을 규명하겠다며 시신을 부검하겠다고 나섰다. 어떤 이들은 백남기가 사망한 것은 가족들이 그의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며 유가족들을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로 고발한 사람들도 있다. 백남기가 경찰의 물포가 아닌 시위대에게 맞아 사망한 것이라는 음모론도 나왔다. 물포에 맞아 정신을 잃은 노인에게 경찰이 20초가 넘도록 물포를 ‘조준 사격’한 장면은 온 국민이 다 봤다.

# 놀랍도록 닮아있다

가끔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놀라울만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땅의 모습과 닮아있는 다큐멘터리나 영화가 있다. 그건 세상을 살아가는 군상의 모습이, 그들의 욕망이, 그에 대한 분노가, 그럼에도 명확한 한계가, 극복하지 못한 오류가 닮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학교에 가고 싶었던 말랄라와 농사를 지어 먹고살고 싶었던 백남기는 똑같이 그들의 땅을 ‘지배’하는 욕망과 한계와 오류에게 공격당했다. 무섭도록 닮아있는 공격이다.

말랄라는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가 총에 맞았고, 백남기는 “함께 먹고살자”고 말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말랄라를 공격한 탈레반은 ‘테러 집단’으로 불린다. 그들이 전통이고 신념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 폭력이고 억압이라는 것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 백남기를 공격한 이들에게도 전통과 신념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은 그 전통과 신념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 남은 이들의 몫

말랄라는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한 명의 아이, 한 명의 선생님, 한 권의 책, 한 개의 펜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학교에 가고 시험을 보고 책을 읽고 가끔 숙제를 빼먹고 UN에서 연설을 하면서 산다. 그렇게 일상을 지켜내는 것으로 자기의 바람이 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당연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백남기는 끝내 살아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말랄라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일상과 바람을 증명하지 못하게 됐다. 그렇다면 여든 여덟번의 손길로 벼를 키워내는 농부의 삶이 비루해지지 않아야 한다 말하고,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에 살인적인 물포가 돌아오는 일에 화를 내는 일, 백남기의 목소리는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의 목소리이며, 그들의 목소리는 매일 더 커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백남기가 쓰러진 민중총궐기는 올해에도 진행된다. 11월 12일.

단상

1. 

밤새 있어서 24시간 하는 카페에 있었다. 3~4 쯤엔 취객들이 곳곳에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는데 5시쯤 되자 고등학생들이 몰려들어 책을 펴놓고 시험공부를 한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고전문학 교과서를 들고 수미상관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댄다. 공부를 핑계로 앉아서 수다 떠는 열중하는 모양새다. 그래도 시험 봤으면 좋겠네.


2. 

집으로 오면서 배가 고파서 분식집 앞에서 오뎅을 주워먹었다. 오뎅 2개를 먹는동안 김밥을 사가는 손님이 10명도 지나갔다. 돈통을 미리 쌓아논 김밥 옆에 놔두고 손님이 알아서 돈내고 김밥을 집어가는 시스템. 저렇게 김밥 줄을 들고 버스며 지하철을 타겠다. 바쁜 와중에도 아침은 먹겠다는 사람들. 그렇게라도 하루를 버티겠다는 사람들. 생의 의지 같아서 어쩐지 경외감이 들기도. 어쩐지 서글프기도. 어쩐지 조금 부럽기도. 어쩐지 배가 고프기도.


3. 

오늘은 가을야구 시작. 엘레발이라고 놀림당할까봐 시즌 중반까지 엘지의 가을야구 탈락을 점치는 냉철한 팬의 포지션을 가장해왔다. "전력상 6~7 정도가 적합해 보이는데, 팬심이 있으니 6 정도 하면 좋겠어"라고 말하면서. 9연승 기간 이후에도 그런 기조를 유지하며 쿨게이를 표방해왔지만 그래도 가을야구하니 좋다. 유광잠바는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못입지만, 제가 91 엘지트윈스 어린이 야구단 출신입니다.


3-1. 

나온김에. 오래도록 엘지팬하면서 맘고생 많았다. 금지어 18  Shake It 김재박으로 이어지는 엘지의 암흑기, 고난의 행군을 견뎌오면서 가장 싫었던 순위보다는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일테면 우규민 헤드샷 사건. 머리에 타구맞고 기절한 우규민 보고 낄낄거리다 결국 교체도 안해준. 금지어의 인격이 쓰레기인 그때 결정.) 유지현을 베팅볼 투수 취급하며 강제 은퇴시킨 , 김재현에게 각서 받은 , 그리고 기타친다고 이상훈 쫓아낸 . 엘지 감독들과 프런트가 짓들이다. 사실 엘지가 구단의 프랜차이즈를 제대로 대우해서 끝을 아름답게 적이 번도 없다. 원년부터 있던 팀에 영구결번이 김용수 명이다. 그나마 김용수 아저씨도 프론트는 굳이 은퇴시키겠다고 은퇴시키려고 바락바락 기를 썼었다. 선수들을 대하는 실리도 없고 명분도 없고 의리도 없다. 암튼 지긋지긋하고 너무 싫은 투성인데 ...


3-2. 

여튼 얘기를 꺼낸 라뱅 때문이다. 라뱅은 라면수비니 팀워크 브레이커니 여러가지 오해를 받지만 KBO 최고의 타자( 하나) 분명하다. 돌아가신 하일성 아저씨가 좋아했는데. 엘지에서 유일하게 30-30 해낸 선수이기도 하고 왕년엔 팀의 리드오프보다 도루를 많이 하고 출루도 안타도 많이 했다. 그야말로 적토마. 엄청 빠르고 싸움도 잘하는. 이런 선수를 시즌 내내 2군에 처박아 것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그건 전적으로 감독의 팀구상이니까 놔두고


필요한 예의와 배려였다는 말만. 20년동안 팀을 지켜온 선수에게 명예롭지 못한 마무리를 강요하는 무례함과,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는 치졸. 선수의 미래와 삶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 그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마저 무시하는 안일함


만일 유지현 코치 처럼 1년짜리 푼돈 계약서를 내밀거나, 이상훈처럼 온갖 모욕을 줘가며 다른 팀으로 떠밀거나, 김재현 처럼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거나. 암튼 그러기만 해봐. 내가 한때는 쌍마의 네임드 키워였는데. 쌍둥이 삘딍에 똥뿌리는 사수대, 백순길 체포결사대 내가 조직한다고.  


4. 

고즈넉한 아침이었는데, 야구 얘기가 나오니 흥분을 해버렸.. 암튼 타이거즈 성님들, GG합시다요.


5. 

요즘 녹색당에서는 청소년 흡연권을 두고 아재들과 전투가 한창이다. 서울대병원 농성장 흡연구역에서 청소년 녹색당원 몇 명이 담배를 피웠는데 그게 못마땅했던 아재들이 담배 끄라며 윽박을 질렀고 청녹당원들이 반발하면서 불거진. 경찰 침탈 막자고 모인 자리에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됐다. 


며칠 계속 시끄러워서 그 아저씨들 하는 얘기를 좀 자세히 들여다 봤더니, 그냥 빻은 소리. 끔찍한 나이주의, 청소년을 계도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못난 태도 같은 것들은 워낙 다들 지적하니 놔두고. 가장 웃긴 부분은 “자기는 충분히 진보적이지만 청소년이 어른들 앞에서 담배 피는 꼴은 못보겠다”는 말과 “자기는 청소년의 흡연권을 인정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청소년 흡연권을 인정하는 정당은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당 차원에서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말. 도대체 ‘깨어있는 진보적 시민 자격증’은 어느 공기관에서 발급하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좌파, 진보로 규정하면서 “내가 이렇게 진보적이라서 아는데 넌 틀렸어”라는 말을 너무 쉽게한다. 


내가 당원이긴 하지만 사실 녹색당과 녹색당원들은 별로 진보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다. 생태주의 운동을 환경보호 운동과 크게 구분하지 않고 있는(혹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봤고, 노동이나 인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민주당 정도의 스탠스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난 ‘녹색’이라는 패션으로 당원들을 꽤 많이 유입한 ‘성공한 마케팅’이라고 여기기도 하는데, 나쁜 의미는 아니다. 다만 앞으로 더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거지. 암튼 그래서 ‘녹색당원 = 급진좌파’라는 도식을 스스로 만들어서 완장처럼 찬 사람들을 보면 참 갑갑하다. 좀 부끄럽기도 하고.


이런 분들이 녹색당의 원내진출(멀리는 정권창출도 보시던데…)을 강하게 바라시는데, 그 원내진출을 위해서는 사소한 인권침해나 가치관의 양보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시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는 일, 성소수자들의 권익, 여성들의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 묻고 싶은 건, 그런 거 안 할 거면 왜 굳이 힘들게 녹색당을 하고 있나. 사실 그정도 ‘진보시민을 자처하며 자기만족을 얻고 조금 고생하면 원내진출은 물론 정권 창출도 할 수 있는 당’은 따로 있지 않은가 말이야. ‘진보정당’에서 방점은 정당이 아니라 진보에 찍혀야 한다. 진보정치 하려고 정당 만든 거지 정당 하려고 하는데 진보정치 쪽에 T.O.가 나서 진보정당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특히 녹색당은 강령에서도 ‘반정당의 정당’을 명시한다. 정권창출이 아니라 살기좋은 지구와 뭇생명들과의 화해가 정당의 목표라고. 


6. 

짧게 쓰려고 했는데 또 길어졌어. 일단 자야겠다. 짤방은 여러모로 답답해서 준비한.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7 합정동 - 仙술집



홍대 앞 상권이 포화상태에 이른 2천년대 중반, 그러니까 이제 홍대 앞에 라이브 클럽들이 더는 남아있기 어려워지던 그 시절쯤, 사람들은 하나 둘 씩 거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벗어났다기 보다는 쫓겨났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신촌역 가는 기찻길에 늘어섰던 고깃집들은 기찻길을 뜯어내고 공원을 만드는 공사로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얼마 전엔 최후의 가게마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나던 길에 고깃집들이 사라진 걸 보고 친구가 연락을 줬다. 무척 서운해 하리라는 걸 알았나보다.) 버름하게 드럭에 처음 갔던 중딩 때, 얼굴도 처음 본 형들이 고기며 소주를 사주면서 롹큰롤 어쩌구 하던 그 가게들이 다 사라졌다. 


피카소 거리(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데) 곳곳에 작고 허름하고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가게들, 몇 년간을 제집을 드나들듯 기웃대며 정치, 연예, 시답지도 않은 화제들로 목에 핏대를 세우던 술집, 가끔은 술취한 노브레인의 불대가리나 어어부의 백현진이나 캡틴롹을 볼 수 있었던 그 가게들도 다 사라졌다. 거긴 감성주점이니 하는 연예인 이름 들어간 술집이나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바뀌었고 나같은 애들은 잘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이제는 사라질(!) 타나 FF, 고고스투, 롤링 홀 같은 곳에서 공연을 보면 이런 얘기들을 지껄였다. “X발, 삼거리 포차가 이렇게 핫플레이스일 줄은 난 몰랐네”. 그리고 비척비척 상수동이나 합정동으로 걸어갔다. 술을 찾아 헤매는 술나비처럼.     


# 내가 아는 형들은 하나 둘 날개를 접고


그 때 거기서 술 사주고 고기 사주고 같이 담배 피던 형, 누나들은 번화한 곳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부유(浮遊)하거나 갈 곳 없이 잠시 머무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잡았다고. 형들은 그 시절을 다 놀았다고 치고, 이제야 머리도 굵고 술먹고 담배 피워도 나라에서 간섭하지 않는 나이가 된 나는 여전히 아쉬워서 그 동네를 부유하거나 갈 곳 없이 머물렀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토악질을 하면서 한참을 걸어다니다가 갔다. 선술집에.


그러니까 선술집은 순전히 우연히 처음 간 곳이다. 아니다, 누가 데려갔던 것도 같다. 내가 좋아할 거라면서. 하여튼 그게 뭐가 중요해. 그 날도 롤링홀인지 타인지에서 공연을 본 날이었는데 또 하염없이 걷다가 불쑥 선술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적당히 취해있었고, 사람은 얼마 없었다. 목동들의 흐느끼는 노래소리가 없었고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우울하고 또 적당히. 적당히. 기억난다. 처음 데려갔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 자리에 앉아 사장님에게 물었다. “뭘 먹을까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선술집에선 아무자리에 앉자마자 사장님께 안주를 물어보는 게 보통이 됐다. 메뉴판도 없이 그날 그날 있는 생선도 다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선술집은 선어회 전문점이다. 메뉴판은 없고 벽에 이런 저런 메뉴가 붙어 있는데 가격은 적혀있지 않다. 병어조림이나 도미머리 구이 같은 게 써 있긴 하지만 딱히 눈여겨 보지는 않았다. 사장님에게 뭘 먹으면 좋을지 물으면 사장님은 우리가 저녁은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를 묻기도 하고 그런 거하곤 상관 없이 오늘 어떤 생선을 잘 골라 왔는지 자세하게 얘기해 준다. 한 번은 기분이 좋아서 (사실 같이 있던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혼마구로를 달라 했더니, “비싸니까 먹지 말라”고 하더라. 역시 믿고 맡깁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 친구와는 결국 잘 안됐나봅니다.


그래서 선술집은 ‘밖으로 나가버린 너를 욕하면서 안으로 취해만 가던 나’들과 함께 찾는 최후의 보루같은 게 돼버렸다.

언젠가 우리의 세대를 뭐라 규정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었나. 지금 나는 우리 세대를 ‘주변인 세대’라고 명명하겠다. 우리는 무엇이 돼야 할지 몰라서 무엇이 되길 바라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무엇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늘 괴롭고 또 외롭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이제는 차라리 외로움마저 느끼지 못해 그마저 퇴화시켜버렸다. 퇴행.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른이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아이가 됐다. 


초고층의 으리번쩍한 고층 빌딩들 사이에 남은 낡은 선술집의 모양새가 그렇다. 원래 그 주변엔 비슷한 가게들이 꽤 있었다. 지금은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한없이 치켜들어야 하는 그 건물이 있던 자리엔 히레사케가 맛있던 작은 이자카야가 있었다. 낡고 허름한 호프집도 있었다. 토악질을 하는 남자애들이 있었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이제는 혼자 남다시피 한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결국 이겨낸 걸까, 아니면 남아서 떠나지도 못하는 걸까. 어쨌든 남았다. 이건 내 얘기다. 이상하게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면 늘 만취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거기서 앉아 만난 사람들과는 그런 얘기를 했다. 떠나가는 이야기, 남아서 기다릴 이야기, 무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이야기, 결국 버리고 말 이야기.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나 정말.


사실 그건 선술집의 안주가 비싸서 그렇다. 작은 접시에 몇 점 올라간 선어회는 푹푹 떠먹기에 부담스럽고 회 한 점에 술을 몇 잔씩 먹다보니 금세 취할밖에. 그래서 술을 마실 때면 누군가는 울었던 것 같다. 선술집에서 택시를 잡으러 가는 길은 아침에 침대에서 화장실로 가는 길 만큼이나 멀다. 


# 나 이렇게 이 땅에 선 채


그래도 여전히 선술집엘 다닌다. 거기서 술을 먹고 좋은 꼴을 본 적이 별로 없는데도 말이다.  찌질찌질 울거나 시원하게 토악질을 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대판 소리를 질러 싸움박질을 하더라도. 그건 그대로 오늘을 살았음을 증거하는 일이라 여기는 탓이다. 그리고 선술집의 선어회는 정말 맛있기 때문이다. (술집 유랑기에서 처음으로 맛있다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토악질을 하고. 그러고보면 숙취에 시달리는 일만큼이나 자기 존재를 절절히 확인하는 순간이 있을까. 새벽내내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사투를 벌이면 내장의 위치는 물론 식도의 위치까지 알게되지 않나. 난 내 살들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골격들도 통증을 통해 가까스로 확인한다. 올 여름 두툼하게 썰어나온 고등어회를 먹고 여지없이 만취한 날,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맨날 맨날 사먹을 수 있게 살자”고 약속했다. 사는 게 뭐 별거겠냐, 맛있는 거 먹고 술먹고 토하고 싸우다 화해하는 거지. 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사실 술취해서 지껄이는 말들과 그 끝간데 없는 우울함과 자조는 분명 삶의 징후다. 살 거다. 나는 아직 고개를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 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다. 여전히 스무살. 주변인 세대니까 그런 거다. 여전히 스무살로 살면서 형들처럼 아니라던 곳으로 가진 않을 거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직 아지트도 있고 그 아지트에는 엄청 맛있는 선어회도 있다. 


#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해 보리라


아마 오늘도 술을 퍼먹을 거고, 잘하면 선술집으로 가게 될 수도 있겠다. 가면 또 시덥지 않은 정치 경제 연예 연애 얘기를 하면서 싸우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얘기들을 지껄이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얘기들을 경청하게 되겠지. 그런 게 사는 거다. 어차피 살아가는 건 소극(笑劇)이다. 그러면 더 비속하고 더 웃겨야지. 막다른 골목으로 질주해야지. 어차피 힘차게 맹진하며 골로가는 청춘이다.  




Etc.


1. 화장실이 굉장히 좁습니다. 좋은 술집은 화장실을 좁게 만들어야 한다는 법령같은 거라도 있나봐요.

2. 월요일은 쉽니다. (일요일인가? 아마 월요일 맞을 겁니다.)

3. 진짜로 좀 비쌉니다. 식사 후에 방문하시길 권합니다. 술 좀 먹는 성인남성 둘이 앉아 양껏 먹으면 십수만원은 훌쩍 깨집니다.

3-1. 무조림이 별미입니다. 회는 조금씩 맛을 음미하며 드시고 진짜 안주는 계속 주는 무조림으로 하는 게 노하우. 생활의 지혜, 가정경제 도우미.


4. 사진은 고등어 회 사진말고는 다 인터넷에서 훔쳐온 겁니다. 이 연재 계속하려면 나도 사진같은 걸 좀 찍어야 할텐데 술먹기 바빠서 ;;;



*동진형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요즘 본 몇편

1. 아수라


20년 동안 본 정우성 중 가장 안멋있음.
멋진 배우들로 멋진 장면을 만든다고 멋진 영화가 나오는 건 아니다.
영화는 현실을 짚고 딛고 지적하지만 늘 그 너머의 것을 봐야한다.
괴롭히고 학대하는 것으로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는 척 가장하는 건 비윤리적이다.
사실 이 영화가 현실의 통증을 정말로 보려했는지도 알 수 없다.
주지훈이 수훈갑. 하지만 이번에도 망했어요. 다섯손가락 같은 거나 찍더니.
잘나가는 무비스타로 언제쯤 돌아올 겁니까. 엉엉엉.


2. 고산자


강우석의 악덕은 크게 두 가지다. (잘게 쪼개면 더 많다는 말.)
하나는 영화를 겁내 못만든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 영화를 계속 만든다는 거다.
다른 작가와 감독에게 갔으면 더 좋은 영화가 됐을 소재와 배우들을 가져다가 엉망진창 지랄염병을 만들어 놓는다. 지난 번에 '전설의 주먹'이 재미 없으면 다시는 영화를 안만든다기에 쌩돈 내고 그 영화라 부르기에 민망한 두 시간짜리 동영상을 다 봤는데. 그거 보고 이제 강우석은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안심했는데.

암튼 이번에도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라는 꽤 괜찮아보이는 소재를 들고선 영화라 부르기에 민망한 두시간짜리 동영상을 만들었다. 차승원이 이렇게까지 지루해보일 줄이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으니 그냥 탐관오리와 왜적들만 들들 볶아서는.. 감독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신 거라고 봅니다 전.

눈에 띄는 건 전국팔도 경치와 남지현. 한국에는 가볼 땅이 아직도 저렇게 많다. 해외여행은 당분간 포기. 내 우산도를 꼭 가보아야겠소. 남지현은 또래의 배우들, 그러니까 심은경이나 박은빈에 비해 성장이 좀 더딘 편인 것 같. 그래도 이 영화에서 신동미와 함께 가장 영리하게 연기하고 있는 배우. 아재들보다 낫다.


3. 그림자들의 섬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

노동은 한 번도 빛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노동자들이 빛의 구역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배를 만들었고 그 배를 팔아서 이 나라는 돈을 벌었지만 정작 배를 만든 사람들은 그 배의 거대한 그림자 안에만 있었다.

노동운동의 이미지는 늘 그랬다. 피, 붉은 머리띠, 눈물, 억울함, 결연한 의지, 강고한 투쟁, 죽음, 죽음. 하지만 노동자는 사실 일하고 월급받아 밥을 먹고, 삶을 지탱하고 성취를 이루고 가끔 좌절해도 다시 살아남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 자체로 삶에 빛을 받는 사람들이고. 삶의 주체여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김주익이나 곽재규 최강서, 김진숙.

'사람'에 대한 조명이라는 점에서 인터뷰가 끌고가는 서사의 방식이 매우 적절했다. 굳이 분노하게 하려는 프로파간다가 아니어서 좋았던 건 그들이 일상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모두의 일상이고 사람은 모두 노동자라는 이 단순한 사실이, 그림자의 섬에 갇혀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려는 당연한 노력이.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 Out-Size - 맛있는 집 이야기



그동안의 술집 유랑기엔 “음식이 맛있다고 할 순 없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여야했다. 이게 맛집 탐방기도 아니고 술과 음식 이야기 보다는 그 술집에서의 ‘내 얘기’인지라 맛보다는 사연에 방점을 찍었던 탓이다. 사실 음식이 맛있는 집이란 찾기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맛집이라고 불리는 곳들은 ‘먹을만한 음식’을 내놓는 것이지 맛있는 음식을 내놓지 않는다. 여기서 혼동이 발생하는데, 요즘 우리는 맛있는 음식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구분하지 못하며 산다. 암튼 그래서 이번엔 번외로 ‘맛있는 집’ 이야기를 해보려고.


1. 먼저, 나는 대체로 화가 나 있음을 알리며 재수없는 고나리질


대저 ‘회’ 라고 하면 ‘싱싱한 활어 회’를 최고로 치는 경향이 분명하다. 예전 어떤 식당에서는 아직 아가미가 꿈뻑거리는 생선 대가리를 회 접시 옆에 같이 얹어서 내오기도 했다. 어쩌라는 건지. 그러나 사실 서울에서 먹는 활어 회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제, 아니면 그제 잡은 생선을 탱크에 가둬서 수백키로는 덜컹거리며 달려온 다음 좁은 수조 안 미지근하고 더러운 물에 넣어서 간신히 아가미만 꿈뻑거리게 만들어 놓은 생선을 잡아 주는 것. 서울에서 먹는 활어란 그런 의미다.


마치 미각이 없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회와 해산물이 싱싱하고 맛있다는 식당이 있다고해서 따라갔더니 회는 으깨질대로 으깨져서 걸레쪽 같고, 살은 핏물이 베어 선홍색이다. 새우는 너무 삶아 살이 푸석하고 조개에선 폐타이어 냄새같은 게 난다. 거기에 초장을 푹하고 찍어서 깻잎에 싸고 마늘까지 두어쪽을 올리고선 회가 맛있다고 하면 그냥 앞으로 이이의 추천은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한다.


네이버 맛집 블로거들이 주로 소개하는 홍대나 경리단, 가로수길 같은 곳의 맛집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포스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문장이 “맛있게 맵다”는 말인데, 정작 먹어보면 캡사이신 덩어리에 지랄염병조미료 범벅인 경우가 열중 여덟 아홉이다. 대포알만한 카메라를 음식에다 들이밀고 그 지랄염병조미료 덩어리를 먹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도대체 왜 이 비싼 돈을 내고 줄까지 서서 이걸 먹어야 하는 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게 패션이니까.


며칠 전에도 줄을 서서 먹는다는 대학로의 어느 돈까스 집에 갔는데 아니나 달라. 안심 돈가스이라고 내어준 6조각 (미니) 고기 덩어리는 돈가스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칼을 내주지 않고 썰어서 나온 걸 보면 한입 내지는 두입 크기일텐데, 고기가 과하게 두꺼워 이빨을 넣고 한 번쯤 한 숨을 돌린 다음에 다시 씹어야 절단이 가능할 정도다. 이렇게 두꺼운 고기를 익히려면 기름 안에서 얼마나 익혀야 하는 거야. 높은 온도로 튀기면 고기가 다 타버릴테니 저온으로 튀겼을테고 그래서인지 튀김옷이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는 습자지 수준의 튀김옷이 눅눅하게 고기에 늘어붙어 있다. 아, 고기가 설익은 건 자기들만의 방식이라고 친절히 테이블마다 써붙여 놨으니 패스. 플레이팅은 참 예뻤다. 돈가스 접시만한 예쁜 돌판을 함께 주길래 뭔가 했더니 그 판위에 소금을 뿌려놨다고.. 왜 그래야 하는 건가요.


암튼 난 미각을 비롯한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자기 신체 기관의 예민함을 단련하는 정도에 따라 정교해진다는 상식에 더해 사회가 유도하는대로 시시각각 날조되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본연의 감각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와 사물, 사건에 대해 늘 의심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테레비와 인터넷이 맛있다고 하고 사람들이 많이 먹으면 무조건 맛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백종원 식당 음식이 맛있다고 칭송하는 것과 북한 주민은 뿔달린 괴물이라고 믿는 것과 박정희가 반인반신이라고 여기는 게 사실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말씀.


2. 지랄염병 천하제일 괴식대회

 

내가 살며 가장 놀라웠던 음식은 신천의 해주냉면이다. 사람들이 몇 십분이고 줄을 서서 먹는데 처음 그 광경을 봤던 고등학교 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냉면을 먹자고 줄을 서다니!!  한참만에야 겨우 냉면 한그릇을 받아들고는 더욱 놀랐다. 씨발 이게 뭐야. 맵고 맵고 또 맵기만 했다. 물을 벌컥거리고 혀를 행구고 눈물을 쏙 빼는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매운 걸 못먹는구나” 라거나 “이거 먹으면 내일 아침에 화장실에서 힘들어” “난 괜찮은데?” 따위의 가당치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언제부턴가 매운음식을 기네스 도전하듯이 먹는 풍토가 생겼다. 불닭, 닭발이 그 선두에 있었고 떡볶이 냉면 가끔 카레 따위가 뒤를 이었다.  사실 여기에도 사회적 맥락이 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매운 음식을 찾는다. 통각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 매운음식을 먹으면 엔돌핀이 과다 분비되고 거기서 쾌감을 얻게된다. 사회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은 음악뿐이 아닌 거지. 2000년대 중반이후, 그러니까 세상 살기 참 뻑뻑해지면서 이런 음식들이 마구 유행했다. 그렇게 유행처럼 휘몰아친 매운 음식의 열풍이 좀 더 자극적이고 더 신기하고 더 매운 음식으로 발전해간다. 사람들은 더 강도높고 자극적인 매운 맛에 몰리게 되고, 짬뽕먹다 토하고 불닭먹다 실려가는 일이 만들어진다. 식당들은 더욱 매운 맛을 만들기 위해 온갖 재료들을 집어 넣는다. 청양고추에서 시작해 쥐똥고추나 하바네로를 경유하더니 요즘은 그냥 캡사이신 원액을 집어 넣는다. 그건 식도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종의 도전인 건데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 도전과 엔돌핀의 쾌감과 식도락을 혼동하게 된다. 이게 그냥 ‘맛있는’으로 치환되는 거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이런 괴랄한 음식들이 “맛있게 맵다”는 말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순창 고추장 광고하던 김혜자 아줌마 탓이다. 


얼마 후엔 갑자기 이 지랄염병같은 천하무적 캡사이신 대회의 자매품으로 치즈를 범벅하기 시작했다. 불닭 위에 치즈를 녹여 올린다거나 하는 수준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얼마전엔 졸라 매운 등갈비를 냄비에 가득 녹인 치즈에 찍어먹는 음식도 등장했다. 문화컬쳐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치즈는 매운 맛을 중화시켜주는 떡칠 사리에 가까운 음식이 됐다. 치즈의 풍미와 맛에 심혈을 기울였던 구라파의 낙농장인들이 보면 혀를 찰 일이다. 파트라슈 미안해. 이 아스트랄 미각 불지옥의 최전선엔 일단 편의점이 있다. (물론 이따위 음식을 노하우라고 팔고 있는 음식점도 엄청 많지만) 불닭볶음면에 치즈와 삼각김밥과 기타등등 온갖 것들을 넣고 죽을 쒀먹는 게 요즘 편의점 음식의 패션이다. 얼마 전에 대유행했던 허니버터칩 이후 편의점엔 온갖 것들에 허니와 버터를 쳐발라놓은 음식들이 나오기도 했다. 


음식의 맛과 궁합, 그를 알기위한 노력은 실종됐다. 퓨전이라는 말을 붙이거나 신개념이라는 말을 붙인 음식들, 괴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건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아니, 사로잡았다기 보다는 볼모삼았다. 전쟁통에 먹었다던 꿀꿀이죽. 그 땐 가난하기 때문에 이라도 먹어야겠다던  음식을 먹는 대중들의 선택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런 거도 주면 맛있게 먹을 거라는 산업의 선택이 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누구 탓하기도 어려운 일이 됐고.   


3. 맛집의 개수작 - 네이버 블로그를 금지해야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맛집 블로그라거나 어플에 등록되는 집들을 가보면 대부분이 비슷한 상황이다. 으리번쩍한 접시에 푸짐한 음식을 내어오지만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어떤 집은 먹을만하지도 않은, 대놓고 먹기 힘든 음식들도 있다.

일테면 섞여선 안되는 음식들을 한접시에 내어오거나, (국물이 줄줄 흐르는 김치와 드레싱이 과한 샐러드와 기름에서 나온 순간엔 바삭했을 돈가스를 한 접시에 주는 게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름만 그럴듯했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음식..(최근 토끼정에서 크림카레우동을 먹고 나오면서 30여분째 줄을 서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당신들 시간은 그렇게 한가합니까)이 나오거나 근본적으로 이걸 왜 돈주고 먹고있나 싶은 집들이 있다.


이런 가게들의 공통된 점은 인터넷을 통한 홍보가 무척 잘되고 벌써 여러 개인 맛집소개 프로그램에 한 두번씩은 소개된 곳이라는 거다. 앞서 얘기한 치즈를 매운맛 중화용 정도로 쓰는 매운 음식 맛집들에서 치즈를 줄줄 늘려가며 맛있네요를 외치는 박지윤이나, 한입 이상 먹기 힘든 느끼한 음식을 그릇째 마셔버리는 정준하가 다녀간 곳은 이튿날이면 발을 디딜틈도 없어진다.


여지없이 블로그와 SNS에는 맛집 방문기가 올라온다. 맛에 대한 평가나 소회보다는 사진으로 ‘다녀갔음’을 기록하는 용도에 가까워보이는 포스트에는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고 비슷한 수의 스크랩이 카운트된다. 음식의 맛보다는 다른 요인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연예인들이 먹은 것을 먹어보고 그걸 인증해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식생활에서의 일상이 된 거다. 그렇게 보면 매운 양념에 버무린 빨간 요리와 죽죽 늘어나는 치즈는 그야말로 포토제닉한 음식이다.


4. 진짜 맛집


사실 진짜로 맛있는 집을 찾아내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른 이들의 동의라는 지난하고 힘겨운 과정을 생략하더라도, 내가 참으로 먹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을 죽기 전에 한 두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사실 한 끼에 수십만원 씩 든다는 파인 다이닝에 가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지만 주머니 얇은 사정상 요원한 일이고. 하지만 그래도 내 입과 혀의 즐거움을 느끼는 게 다른 어떤 요소가 아니라 올곧이 나라면 느낄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이 곳곳에 분명 숨어있다고 믿는다.


설탕이나 물엿이 아니라 장과 양파, 양배추만으로도 충분히 달짝지근하게 만든 떡볶이가 있고, 발데온치즈로 만든 소스에 찍어먹는 빵이나 정성스레 우린 육수에 말아먹는 냉면, 걸쭉하게 갈아만든 콩국, 발효하는 냄새가 심하게 나는 청국장, 모짜렐라와 루꼴라만 올라간 피자. 뭐 맛있는 음식은 셀 수도 없이 참 많다. 사실 잘 숙성시킨 돼지고기를 적당히 화력좋은 숯에만 구워도 좋을 일이다. 이런 음식들을 하는 화려하지도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은데다가 대포알 디에스엘알도 없는 식당들은 화려하지도 자극적이지도 대포알 사진기도 없어서 맛집이라고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여러분, 맛집 정보를 얻으려거든 네이버 블로그를 끊고 조선일보 주말판을 보세요. 조선일보 아저씨들이 맛집 정보는 제일 잘 꿰고 있습니다.


4-1. 그래서


다음 술집 유랑기는 내 가본 술집 중 음식이 가장 맛있는 집을 선정해보려고 합니다. 어디가 될진… 사실 정해놨습니다.ㅋ


  




   

농사꾼_이야기


농사꾼_이야기


0.

초등학생 때, 대기업 총수들의 자서전이 유행처럼 출판됐다. 지금이야 그게 재벌의 정계 진출을 위한 떡밥, 기업을 사유화하기 위한 신화화의 수작이라며 비아냥거릴 만큼 머리가 굵었지만 그땐 그 ‘성공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참 꼼꼼히도 읽었다. 


그 자서전들의 내용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재벌 회장은 어린 시절 밥 먹듯 서울로 가출했다.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가출할 때마다 그를 찾아오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흘린 땀만큼 반드시 돌려주는 게 땅이다.” 


어린 나이에 그 말이 왜 그리 인상적이었는지 이후로 재벌 회장보다는 농부를 동경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 솔직한 노동을 하고 딱 그만큼의 대가를 거둬들이는 사람들. 생명을 키워 내고, 밥을 만들고, 키워 낸 삶이 다시 죽어 새로운 생명이 되는 세계의 순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


1.

실제로 농부를 처음 본 건 스무살무렵이다. 그 때 그는 서른 다섯이었고 어릴 적 떠났던 고향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에서는 요리사였다던 그는 아마 고단한 서울살이를 견디지 못했으리라. 논과 밭을 오가는 트럭 안에서, 

둘이서만 몰래 빠져나가 차가운 커피를 놓고 낄낄거리던 읍내의 종묘사에서, 낚시대보다는 소주잔과 삶은 돼지고기에 더 집중하던 밤의 저수지에서 그는 늘 힘겨워했다. 바닥을 친 줄 알았더니 더 내려가던 나락값과 말라버린 고추모종과 빚을 갚기 위해 더 빚을 내야 하는 상황과 커가는 아이와 한미 FTA와 아무나 보고 막 짖어대는 그 놈의 강아지 새끼와 기타등등 기타등등.


우리는 만나면 늘 술에 취하는 중이거나 가까스로 술에서 깨는 중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상태였는데,

“가능하다면 농사를 짓고 싶다”는 내 말에 그가 절대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때에 우리가 술에 취하는 중이었는지 깨는 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 그는 농사같은 거 짓지 말라고 했다. 환상을 갖지도 말라고 했다.


1-1.

대학을 졸업하고 더이상 농활을 가지 않게 됐을 때도 종종 그를 찾아갔다. 어느 때엔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렵다며 그 앞에서 훌쩍대기도 했다. 데모하러 상경 한 번 하지 않는다며 그를 타박하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곧잘 발끈해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론은 늘 건배였다. 별 수 있나 뭐. (둘 다 씩씩거리는 걸 그치진 않았다.) 성실하게 농사를 짓다 결국 생활에 실패한 그의 형제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한숨을 쉬기도 했고, 잔뜩 늘어난 그의 빚을 걱정하기도 했다. 부끄런 고백이지만 그의 집 인근에 원전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난 처음으로 원전이 들어서는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가 받을 보상금이 그의 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일지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꽤 오랜시간 함께 술을 먹었고 고기도 먹었고 나이도 먹었다. 


그 날은 전 날 청보리밭 축제를 가자는 그와 집에 앉아서 술이나 먹자는 내 이죽거림이 길어지고 결국 그가 토라져서 샐쭉샐쭉 술을 잔뜩 먹은 다음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현관문 넘어로 (거실에서 내가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데 마을 한가운데로 뚫린 현관문을 열어 놓았었다!! 무려 배를 드러내놓고 자고 있었는데!!) 비닐 하우스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아, 술 진짜 많이 먹었는데. 아침나절 하우스 앞에 앉아서 해장술을 홀짝 거리는데 그가 “이제사 농사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농사도 세상도 차근차근 한 평씩 지어야 한다는 걸 나이들고 농사를 짓다보니 이제야 알겠다”고 했다. 


삶을 짓는 일이 농사를 짓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걸, 20년 가까이 농사를 짓고 마흔이 훨씬 넘어서야 이제 가까스로 조금 알겠다고. 한 평씩 한 평씩 차근 차근. ‘이 형이 나만 놔두고 어른이 됐나’하는 서운함에 “그게 신상 복분자 말뚝이 나올때마다 사재기해서 말뚝만 만 개를 가진 남자가 할 말은 아니”라고 이죽거리긴 했다. 


2.

생각해보니 내 할아버지도 농사를 지었었다. 꽤 길었던 고시생활을 마친 막내 삼촌이 결혼을 하고 나서였다. 평생을 미장이, 목수, 노가다로 살았던 할아버지는 그린벨트 안에 있는 땅을 조금 빌려서 고추와 깨, 감자, 옥수수 따위를 심었다. 주말이면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고모네 식구들과 신혼인 삼촌 가족까지 다 모여서 그 밭에서 일을 했다. (물론 난 원두막에 앉아 삶은 감자를 까먹고 낮잠을 잤다. 본 투 비 배짱이) 드라마에 나올 법한 고부갈등 에피소드가 하루 걸러 두번 씩 발생하는 우리집 가정사에서 가장 화목했던 시절이다. 음식과 식재료에 대한 고나리질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나와 그 재능을 내게 물려준 엄마는 할아버지의 밭에서 나는 채소들을 좋아했다. 


연이은 사업실패와 가난함에 허덕였던 할아버지는 밭고랑 사이에 난 풀이름 하나 모르는 것이 없었고 감자 한 알도 허투로 다루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당시닝 끔찍히도 아끼는 맏손자를 밭에 데리고 나가 풀이름을 알려주고 감자를 캐고 원두막을 같이 고치기를 좋아하셨다. 그럴 때엔 일생을 성공보단 실패가 많았던 나이든 남자의 의기소침이 사라졌다.   나이 들어서도 호두알만한 호박 반지를 끼고 다닐만큼 멋내기를 좋아하고 허영끼가 적지 않은 할머니도 밭에서 일하기를 좋아하셨다. 당신이 기른 배추며 고추로 겉절이라도 담근 날이면 전화통에 불이나도록 식구들을 불러 모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말 열심히 밭을 일궜고 딱 그만큼 거둬들였다. 그리고 딱 그만큼 당신들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했고 행복해 했다. 삼촌이 돈을 벌어 신도시의 좋은 아파트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사갔을 때 즈음, 그러니까 더이상 밭일을 하지 않게 됐을 즈음 할머니 할아버지는 쇠약해졌다.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어느 명절날, 난 “흙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동의를 했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3.

그리고 백남기. 


백남기 씨는 포도밭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다. 유신 정권에 학교에서 제적된 후, 오갈 곳이 없어 수녀원과 수도원 등을 돌아다니며 날품팔이를 하고 인천 포도밭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1980년 세 번째로 제적된 이후에는 아예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5.18 유공자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보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사라져 가는 우리 밀에 관심을 두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언젠가 우리 밀이 사라지고 미국산 방부제 밀가루가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일을 듣고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한 알 한 알 우리 밀 종자를 모으고 다녔을 농사꾼 백남기의 발걸음.


그는 자신을 추방한 이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된 나라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울분이나 지난날의 업적 대신 지금의 삶을 꾸준히 이야기했다. 그는 “농민이 편하게 농사지으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살았다. 백남기는 거짓된 세상에서도 꾸준히 삶의 소중함을 지켜 냈다. 유신 독재와 계엄과 신자유주의의 풍파에 맞서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나 하나 한 평씩, 한 뼘씩. 백남기의 삶의 방식은 농사꾼의 방식이었다. 하나씩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잡초를 뽑았다. 비가 오기를 기다렸고 비가 내리면 감사했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가 많이 난다고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뿌리지 않은 씨앗에서는 싹이 나지 않는 당연한 삶. 여든 여덟번 손길을 준 벼에서만 나락이 쏟아지는 일. 범사에 감사하며 삼라만상 앞에 겸손해지는 일. 백남기가 그런지 어떻게 아냐고. 원래 농사꾼의 방식은 그런 거다. 생명과 먹을 것과 탄생과 소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삶이란 그런 거다. 


4.

왜 갑자기 이렇게 길고 두서없는 글을 주절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뭐 특별히 하고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고. 삶을 살아가는 일이 곧 농사를 짓는 것 같다라는, 한 평씩 한 뼘씩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서. 어제 장례식장 앞에 앉아 있다가 그렇게 농사꾼의 삶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삶을 그리다가. 내 농사에 대해 생각하다가. 난 씨도 뿌리지 않고 수확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비가 온다고 투덜거리고 해가 난다고 볼맨소리를 하지는 않았는지. 뭐 그런.


암튼, 공사말고 농사짓자. 씨 뿌려야 밥나오지.

다큐리뷰 - 노라 노, 역사란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란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 다큐 <노라 노>




은행이나 미용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그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는 건 패션 잡지다. ‘보그 병신체’는 패션잡지의 글들이 온통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로 이뤄져 있음을 비꼬는 말이지만 사실 어쩔 수 없다. 패션지가 소개하는 대부분의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외국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파리와 밀라노의 최신 트랜드, 현지 디자이너들의 의도를 전달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쓰는 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일까. (물론 쓸데없이 과한 면이 없지 않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오히려 아쉬운 건 온통 외국에서 온 디자인뿐이라는 점이다. 디자인, 미적기준, 실용성 같은 개념이 실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면 한국의 디자인이란 한국의 디자이너가 가장 잘 구현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다.



코코샤넬,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디자이너들은 비단 패션뿐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 트렌드를 선도했고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다. 디자이너들은 물론 ‘패피’들도 그 전설같은 디자이너가 만들어낸 토양 위에서 옷을 만들고 입지만 그 전설들과 동시대에, 같은 선상에서 옷을 만들었던 한국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않는다. 시작과 역사, 그리고 현재. <노라 노>는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노라 노의 삶과 역사를 조망한다. 하지만 그건 낡아빠진 과거의 영웅담이나 존경하는 디자이너에 대한 단순한 오마쥬는 아니다.   


# 장밋빛 인생



라비앙 로즈(장밋빛 인생)은 한국의 1세대 디자이너 노라 노(본명 노명자)의 전시회 제목이다. 영화는 디자이너 서은영이 노라 노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노라 노의 삶을 반추한다. 서은영은 한국 보그에 실릴 노라 노 화보를 준비하면서, 관계자들에게 노라 노의 옷이 몇 십 년 전 보그 해외판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수출용 옷에는 태극마크가 박혀있었다고 설명한다. 최초의 ‘한류’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나 패션업계 종사자가 대부분이었던 현장의 사람들이 대부분 노라 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928년 경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유복한 유년을 보내며 고등학교까지 다녔지만,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곧 이혼했다.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시집생활에 대한 거부였다. 젊은 이혼녀 노명자는 ‘노라’라는 이름을 짓고 디자이너가 됐다.  노라 노가 일을 시작한 1950년대 한국에는 패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런 시절에 옷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옷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대중문화의 향방을 좌우하는 삶. 한국에서 처음으로 패션쇼를 열었던 디자이너. 그녀의 인생은 영화처럼 화려했고 그만큼 풍파가 많았다. 가시가 많은 장미 빛깔 같은 인생.  


서은영은 노라 노의 패션이 어떻게 현대의 패션에 기반이 됐는지, 그녀의 패션이 50년이 지난 지금에 어떻게 재해석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한다. 그러나 노라 노는 서은영의 의도가 탐탁치 않다. ‘옷이 사람보다 앞에 나와선 안된다’는 노라 노의 디자인 철학이 노라 노의 디자인사(史)를 통해 한국의 패션을 재해석하고 싶었던 서은영의 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노라 노는 후배 디자이너들이 이름 붙이 ‘장밋빛 인생’이라는 전시회 제목도 마뜩치 않다. 그녀의 삶이 장밋빛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라 노는 자기의 삶에는 오류가 많았고 때로는 어리석기도 때로는 현명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 복잡한 세월을 그저 ‘장밋빛’같은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노라 노는 과거를 회상할 때는 당당하지만 선의로 자신의 전시회를 돕는 후배들과의 미팅에서는 자주 망설이고 당혹스러워하며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지 못해 낙담하는 표정을 짓는다.  


# 갈등과 욕망, 현역의 증거



그러나 갈등은 오히려 그녀가 과거에 박제된 존재가 아님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 갈등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정립한 디자인 철학,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착, 그리고 여전히 지니고 있는 뚜렷한 욕망. 갈등은 본래 욕망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것이다. 욕망은 미래에 대한 희구, 삶에 대한 열정, 의지와 같은 의미다. 

노라 노는 맟춤옷 일색이던 의류업계에 최초로 ‘표준화된 기성복’을 도입했다. 그녀가 열었던 최초의 패션쇼에도 일반인들이 무대 위에 올랐다. ‘패션’, ‘의상’이라는 말이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에 누구나 예쁜 옷을 보편적으로 입을 수 있길 바랐다. 노라 노가 만든 기성복은 보다 저렴한 가격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려나갔고 의류시장의 양적, 질적 발전을 추동했다.

동년배인 앙드레 김이 화려한 자수와 하얀색으로 유명했다면 노라 노는 심플한 디자인의 검은색 옷을 주로 만들었다. 그건 그녀가 옷을 만들며 ‘일하는 여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여성 노동자였기에 일하는 여성들의 옷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의 디자인 철학이 어디에 기반하는지를 드러낸다.  

여전히 긴 속눈썹을 붙이고 머리를 단장하고 블랙톤의 롱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지금도 옷을 ‘짓는다’. 오랜 단골이 옷이 필요하다고 찾아오면 수다를 떨며 스케치북에 디자인을 그려나간다. 오랜 단골의 성품과 필요와 취향을 아는 그녀의 손에 골무와 바늘이 들리고 한땀 한땀 옷을 짓는다. 세월이 지나도록 그녀의 작업방식은 노동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완고한 철학과 원칙을 지켜내고 여전히 필드에 선 현역 디자이너. 


# 온당한 존경



그래서 그녀는 후배들의 상찬이 달갑지만은 않다. 여전히 진행형인 자신의 삶을 화려한 수사들로 치장해 회고하고 싶지 않았고 자기의 역사를 장밋빛이기만 했던 것처럼 포장해 훈계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화는 그런 그녀의 태도마저도 카메라에 담아냈다. 영화는 입지전적인 실존인물에 굴복해 마냥 미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고 나이들어도 늙지않은 노라 노에게 온당한 존경을 표한다.

영화는 노라 노의 젊은 시절을 재연 드라마의 형식으로 재구성하는데 이같은 방법은 자칫 대상에 대한 과한 상찬이나 대상화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재연 장면들은 이 온당한 존경의 표식을 위한 장치로만 작용한다.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것, 상투적이지 않으면서도 대상에 대한 객관성을 잃지 않는 것. 그건 “때로는 현명하기도 때로는 어리석기도 했다”던 노라 노의 삶의 궤적과도 상통한다.


# 역사는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는 신파의 요소를 최대한 배제했고 단순히 감상적으로만 노라 노를 그려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울컥거림이 시작된 건 최은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던 순간이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던, 그야말로 여배우의 얼굴. (그건 지금의 젊은 여배우들에게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감상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층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는 여든 다섯의 스타일리스트, 노라. 육십여년 쯤은 가볍게 뛰어넘어버린, 아니 그보다는 육십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가슴벅차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건 아마 '시간'이 세겨놓은 주름과 그 주름의 골마다 박힌 지혜와 어리석음, 그걸 고스란히 견뎌온 묵직한 삶의 아름다움이었을테다.

그리고 기어이 눈물이 흘렀던 장면은 노라 노가 스무살 남짓의 어린 디자이너 지망생들과 전시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기억은 전승되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순환의 과정. 그건 그 자체로 역사의 단면이다. 여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나이들었지만 낡지 않은 여자와 나이 들어도 결코 낡고 싶지 않을(혹은 낡지 않을) 여자들의 만남. 역사란 고루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가슴벅찬 것이며,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주조하는 것이라는 명징한 증명이다.


# 수퍼스타 노라 노



영화엔 간간히 아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당대의 여배우들. 그 얼굴들을 찾아내며 감탄하는 것도 노라 노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전시회의 메인 모델이 돼 준 노라 노의 페르소나 최은희와 엄앵란, 김지미, 문희, 윤복희 같은 얼굴들. 당시 노라 노의 옷을 입기 위해 의상실에서 몇 시간을 대기하고 무료로 패션쇼의 모델이 돼 준 노라 노의 친구들. ‘사회문제’였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도 노라 노의 작품이다. 윤복희와는 지금도 절친으로 지내고 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면 몸빼바지와 억센파마가 전부인 줄 아는 ‘엄마’에게 물어보자. “엄마, 노라 노를 알아요?” 어쩌면 우리는 몰랐던 그녀의 역사, 그녀의 삶, 그녀의 장밋빛 인생이 고스란히 드러날지도. 

요즘 본 몇편

1.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의 흥행은 실패했고 그 이유는 관객들의 '익숙함'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비밀은 없다는 불균질의 영화다. 영화는 이 사회의 규칙에서 벗어난다. 손예진이 분한 연홍은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신경쇠약증 환자다. 그러나 영화 속 사건의 본질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사건의 본질이 세상적 상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치 암투, 음모, 범죄가 영화의 줄기를 형성할 것 같았던 세상적 기준은 영화에서 여지없이 배제된다. 거의 조롱당하는 수준으로. 그건 연출과 편집에서도 드러난다. 벌써 등장한 VOD를 동원해 두 번 세 번쯤 보고나면 감독이 던져준 떡밥들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알 수 있다. 암튼 규칙을 위반한 탈주의 영화, 그러니까 선굵은 남자들의 정치드라마에서 탈주한 발칙한 영화다.


손예진은 현재 우리나라 30대 여배우 중 가장 독보적이다. 외모 뿐이 아니라 필모를 쌓아가는 테크트리가. 흥행과 비주얼과 영화적 가치 모두를 망라하는 그녀의 필모가 감탄스러울 따름. 이 영화에서도 손예진은 엄청나게 아름답지만 그녀가 연기한 연홍은 아름답지 않다. 연홍은 아름다울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환자라니까. 근데 엄청 아름답다고.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영화를 보시라고요.


2. 부산행

원래 좀비영화는 메타포 덩어리다. 좀비가 어떤 상황에서 등장하는지, 누구를 먹어치우는지, 어떻게 죽는지, 어떻게 감염되는지, 심지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까지 모두 현실을 반영하는 메타포가 된다.(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흑인 좀비가 백인들을 먹어치우는 장면이 인종문제를 풍자한 거라고 분석되지만 사실 그건 엑스트라 배우 중에 가장 연기를 잘한 배우가 흑인이었던 게 이유다. 원래 감독에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여튼 좀비영화는 뭐든 덧씌우면 메타포가 된다.)


군복을 입은 좀비들이라든지, 좀비를 시위대라고 하는 방송이라든지, 오 필승 코리아에 달려드는 좀비떼라든지. 하여튼 한국형 좀비들이 등장하고 그것대로 한국의 현실을 풍자하는 소재가 된다.


그 풍자가 좀 아쉬울 정도로 단순하고 캐릭터들이 죄다 너무 직선이긴 하지만 오락영화, 그것도 수백억이 들어간 대규모 장르영화가 보여주는 복잡함으로는 그 정도가 딱 좋다. 내러티브의 아쉬움은 마동석의 하드캐리와 정유미에 대한 사랑으로 얼마든지 극복가능하다. 연출과 편집은 매우 속도감 있고 기차라는 공간의 상상력이 주는 쫄깃한 쾌감도 상당하다.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의 질펀함을 기대했다면 적절치 않지만 그래도 연상호는 영화 정말 잘 만든다. VIP시사 이후 감독들이 모여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대며 "재밌다 씨발."을 외쳐댔다는 흘려들은 소문은 이유가 있는 일이다.


3. 터널

세월호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세월호의 기억에서 도무지 벗어나올 수 없고, 영화도 굳이 벗어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부분에서 세월호 사건이 매칭되고 김해숙 아줌마가 연기한 장관은 실소가 삐져나올 정도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영화의 만듦새나 배우의 연기를 이야기 하기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희망'을 갈구하게 되는데, 그건 아마 세월호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또 절망을 목격하게 된다면 도무지 견딜 수 없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은 시스템의 무능력과 잔인함 앞에 버려진 한 남자의 구조는 마땅히 실패하는 것이 개연성있다는 생각과는 별개로 그가 결국엔 살아나길 바라게된다.


몇몇 장면들이 매우 좋거나 매우 거슬렸는데, 일테면 마지막 장면. 일상으로 돌아온 하정우가 다시 터널을 통과하는 장면. 트라우마마저 벗어내고 일상, 빛으로 복귀하는 듯한 그 장면은 완전히 사족이고 억지였지만 그래도, 가짜라도 그 희망이 진짜이길 바라는 한 순간이 간절했다.


4. 본 투 비 블루

실제의 쳇 베이커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또라이 약쟁이 범죄자다. 영화는 그의 인새을 적당히 윤색하고 허구를 가미하고 도려냈지만 그래도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또라이 약쟁이.


자기 재능에 지쳐 결국 약에 의존 자기의 삶을 파괴한 천재 뮤지션의 판타지.를 적당히 잘 따라가고 있다. 그냥 적당히.


그렇지만 나는 그런 판타지를 싫어하지 않는데다 쳇 베이커의 연주를 좋아하니가 전형적인 전기영화라도 참 좋은. 간간히 들리는 음악소리와 등장하는 이름들, 특히 마일드 데이비즈 같은 이름.


5. 우리들

화해하는 법을 언제부터 잊어버렸을까. 금을 밟으면 배제되고, 누군가의 고변만으로 배제가 그토록이나 쉬워지는 어른들의 세게의 룰을 언제부터 가르쳐 왔나. 아이들은 어쩜 그런 걸 또 이렇게 잘 배우나. 서로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결국은 다투고 화해할 줄 모르고 멀어지다 결국 제가 더 외로워지는 어리석은 제로섬 게임 같은 세상.


라인 밖에 나란히 선 두 아이가 선 안쪽의 세상을 나란히 바라보면서, 힐끗 힐끗 서로의 시선을 경계하고 또 갈구하면서 마침내는 손을 내밀게 됐을까.

아, 이런 영화는 좀 봐줘야 한다. 내가 본건 요즘이지만 상반기에 개봉했을 테니, 2016 상반기 최고의 영화. 보고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단상

1.
들국화 1집 중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다. 조덕환 아저씨가 만든. 들국화가 재결합 할 때 곧 조덕환 아저씨도 다시 합류할 거라고 아저씨들이 그랬었는데... 조덕환 아저씨는 들국화가 다시 재결합하면 앨범에 실으려고 'Long may you run'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들국화는 없다. 그 노래는 조덕환 아저씨의 새 싱글에 실렸다.

노래는 끝나고 사람을 죽게 마련이다. 들국화의 노래는 이제 과거에 있으니까 하염없이 좋아지기만 할거다. 너무 좋아만 하다가 노래가 낡고 녹슬지 않도록 경계 해야겠다. 그리고 또 다음 노래를. 전인권 아저씨는 밴드를 새로 시작했고 최성원 아저씨는 라디오 DJ가 됐다. 또, 다시, 계속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나이따위야 상관없이. 나이들어도 낡지 않고, 머물러도 녹슬지 않는 삶. 또 새로이 살아야지. 계속 계속 살아야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2.
저녁엔 강변북로를 지나는데 한강과 남산 너머로 막 석양이 지고 있었다. 보라색도 아닌 것이 자주빛도 아닌 것이. 무협지에선 그런 광경을 보고 영감을 얻으면 막 무공을 새로 창안하기도 한다. '자하신공' 뭐 이런 거.ㅋ 여튼 그 색깔이 하도 신기하고 예뻐서 핸드폰을 꺼내서 찍으려다가 화면에 담긴 색을 보고 관둬버렸다. 그 색이 아니잖아. 카메라에 찍겠다고 바둥거릴 시간에 잠깐이라도 더 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 광경을 남겨놓고 싶다는 욕심이 계속 들었는데, 문득 그래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계덩어리 아니라 마음에 담긴 건, 기계덩어리 아니라 마음으로만 건드릴 수 있는 법이다.

3.
알파고에 대해 얘기하다가. 이세돌이 했던 말 중에 가장 멋있었던 건 "바둑의 낭만을 지킬 것"이라고 했던 그 말. 인공지능과 컴퓨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낼 것이다. 아마 곧.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지켜내며 기계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말하지만 사실 사람들도 진짜 그 바닥의 감정을 겪어봤는지 그걸 흉내내는 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구나 다 기형도와 김현식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도 그렇고. 그럴 때 떠오르는 말이 낭만이다. 사람인 우리가 합리와 원칙, 이성의 완성에서 지켜낼 수 있는 건 고작 '낭만'이다. 합리와 이성, 그리고 예술과 고뇌 같은 양 극단의 것들 말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 굳이 치밀하거나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 낭만의 의미가 무언지는 각자 생각하자고요. 낭만적으로다가.ㅋ 그래서 오늘의 장래희망도 낭만의 화신입니다.

4.
지난 번 절에 갔을 때 얻어온 곤드레를 넣고 밥을 지었다. 그 김에 냉이와 쑥, 참나물을 사다 무치고 모시조개와 냉이를 넣고 국도 끓였다. 시장에서 괜히 기분을 내고 싶어서 나물값을 깎아달라고 졸랐는데, 정색한 아줌마한테 덩칫값 못한다고 혼났다. 덩치와 나물값이 무슨 상관인가요. 하지만 기분좋은 밥상. 봄은 밥상머리에서 온다.

5.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기만책이라고 단정했다.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문화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이라는. 그는 결국 즐거움이 체념을 부추길 것이고 체념은 다시 즐거움으로 잊힐 것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현대 자본주의의 개성은 다 사이비라고도 했다.

하지만 벤야민이 그랬다.
"어느 여름날 한낮에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한순간 이들 현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쉬는 것이다."

똑똑하고 잘난 아도르노 같은 형들의 얘기에 사실 더 눈이 가고 수긍하게 되지만 벤야민과 같은 세계에 살고 싶다.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는 삶.

프로듀스 101을 보다가 그 처절한 대중기만의 현장에서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그래도 김세정이 짱인데.





단상

1.
며칠 전에 외국인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이 들어왔길래 누군가 들여다 봤다.
그녀는 10여명의 페이스북 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모두 '지훈'. 아마 어느 지훈을 찾고 있나보다. 사진이 프로필에 걸려있으니 본인 확인이 대단히 어렵지 않았을텐데, 이렇게 온갖 지훈들에게 연을 대고 있더라. 괜히 온갖 말을 맞춰가며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상상했다. 어쨌든 그녀가 찾고 있는 지훈을 만날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낭만적이어라. 야밤에.


2.
이세돌이 알파고에 이겼다. 이세돌이 때는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패배했네, 이건 사기극이네 뭐네 말들이 많아 볼썽사나웠는데 속이 시원하더라. 이세돌은 바둑 두는 프로그램이랑 대국을 했고 그렇듯이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그냥 이세돌의 바둑.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그냥 이세돌에 대한 팬심으로 그의 승리를 진심 축하하고 싶다.

이세돌의 이름이 부쩍 많이 들렸던 그가 10대의 나이로 32연승을 거두며 최우수기사상을 받았던 3 시절. 그래서 지금도 '이세돌 3'이란 호칭이 제일 익숙하다. (마찬가지로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의 단수가 귀와 입에 익어서 아직도 유창혁 6단과 이창호 7단ㅋ 90년대 초중반에 바둑학원에 다니고 아버지가 두는 바둑을 어깨넘어로 구경하고 그랬다.) '당차고 되바라진 말만큼이나 현란한 행마' 같은 이세돌에 대한 평가를 주로 봤는데 아마 그런 좋았나보다. 아성이었던 이창호를 이길 때도 유독 그에게만은 존경심을 표할 때도 좋았다. 내가 천재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그러니까 그냥 팬심. 또래의 바둑 두는 형에 대한. 아무튼 이세돌 9단이 5국에서도 좋은 바둑을 뒀으면 좋겠고 이기든 지든 그의 바둑이 계속 그의 바둑이었으면 좋겠다.


3.
내일이면 창간호가 나온다. 어쩐지 후덜덜. 거기 실린 글들을 사람들이 (무려 돈내고!!) 읽게 해도 괜찮은가 싶고. 거짓말은 없었는지, 고민없는 문장은 없었는지, 띄어쓰기는 했는지. (맞춤법은 선배들이 교정을 봤을테니 .) 더해서 고단한 작업을 앞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후덜덜. 복잡한 심경인데 그렇다고 이제와 어쩔건가 싶기도 하고... 그냥 응원해 주세요. 좋은 책을 만들거고요. 재미있는 글을 겁니다. 일단 지금 다짐은 그래요.


4.
내일 아침 책이 나오기도 하고, 해야할 일들도 있고, 아침 일찍부터 출근 자신도 없고해서 사무실로 왔다. 놀멍 쉬멍 일해야지. 가끔 사무실에 야밤에 혼자 있는 짓을 하는데,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 연필에서 나는 소리, 내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말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니터 불빛말곤 사위가 어두울 . 그냥 오롯이 혼자 있는 같을 . 번거로운 것들과 더는 이야기 하지 않아도 같은 기분.
삶은 본래 이토록 외로운 것이라는 각인이라도 하겠다는 . 하지만 담배는 나가서 핍니다.


5.
요즘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노래를 듣고. 하지만 지나간 일들이야 어차피. 그리고 돌아올 일들 따위도 어차피. 묵은 감정은 청산해야 하는 일이고 잔변감이야 해소하면 일이다. 다만 순간에 다할 최선. 관계와 기억을 눅진눅진 녹으로 만들진 말아야지. 그래서 지금은 손지연을 듣는다.



++
어차피 영원하진 않을텐데 내가 미워하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