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스_아무말큰잔치] 힙스터의 언덕, 몰취향의 고원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힙스터의 언덕, 몰취향의 고원

1.
언제였더라. 한창 ‘썸’을 타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어쩐지 80년대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땐 눈에 콩깍지가 씌인 탓인지 ‘참 우아한 휴일을 보내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 음악을 틀어놓고 책장 청소를 하다 만화책을 한권 집어 들고 먼지구덩이 위에 벌러덩 누워 낄낄거리고 있는데 ‘굳이 솔직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음악 들으면서 책 읽고 있다”고 대답하다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혹은 ‘정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2.
어느 카페에 앉아 있는데 음악 선곡이 너무 대중없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라고 말하기엔 나오는 음악들이 너무 조야했고, 카페의 컨셉으로 이해하기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손님들의 취향에 맞춘 것이라기 여기기엔 손님은 내 일행들뿐이었고. 도대체 뭘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친구가 너무 손쉽게 답을 알려줬다. “멜론 인기차트 100”. 이런 빨간 맛.

3.
살며 가장 어이가 없었던 때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동영상을 영화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투덜거리고 있는데 눈물 콧물을 다 뺀 일행들이 내게 “재수없다”고 말했다.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한다느니, 어설프게 평론가인 척을 한다느니, 천만이 넘는 사람들을 다 바보로 여긴다느니, 영화를 판단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다 듣고 나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건, ‘이게 정말 재미있어?’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천만관객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든 감독이다. 그의 다른 천만관객 영화도 영화라고 부르긴 어렵다.)

얼마 전에 ‘힙스터 체크리스트’가 세간에 떠돌았다.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찰스 부코스키를 읽고, 강원도 양양에서 서핑을 즐기거나 대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야 힙스터다. 사람들은 경리단이나 해방촌 같은 ‘힙한 동네’에 몰려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케아에서 가구를 사고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아다니고 ‘평양냉면’과 ‘알리오 올리오’를 먹는다. 냉면에 가위질을 하면 안 된다고 면장질을 하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힙스터 체크리스트 같은 건 사실 언어도단이다. 힙스터의 본질은 ‘구분짓기’에 있다. 독보적이고 독특한 취향으로 자기를 타인과 구분짓는 것, 그러니까 자아와 주체의 확립이 힙스터의 의미라면 “이래야 힙스터”라는 힙스터 판독기에 편입되는 순간 그는 이미 힙스터가 아니다.

따져보면 사실 한국에 ‘취향’ 같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똑같이 머리를 빡빡 밀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강요받으며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노래를 들으며 똑같은 독재자를 찬양하며 사는 나라에 취향같은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취향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명확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학교 현관엔 현관문보다 큰 글씨로 단결과 통일이라고 적힌 액자가 붙어 있었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였다. 그걸 민주화라고 불러야하나, 아무튼 겨우겨우 대통령 욕을 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절이 왔을 때 ‘똘레랑스’란 말이 유행했다. 교과서에도 상대주의니 다양성이니 하는 말이 등장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같은 표어도 그때쯤 나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양’과 ‘취향’을 책으로 배운 탓일까. 사람들은 ‘단결’과 ‘통일’이 있던 자리에 ‘취향’과 ‘다양’을 채워놓고 똑같이 굴기 시작했다. 힙스터가 되기 위한 방법마저 남과 같아야 하는 세상이라니. 자아와 주체는 여전히 삭제돼 있다. 다름을 허용치 않던 폭력이 ‘다름’을 강변하는 야만으로 둔갑했다. 역시 마찬가지로 ‘타자성’에 대한 혐오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얼굴을 볼 수나 있을까.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언어생활에서 ‘다름’과 ‘틀림’을 도무지 구분하지 못한다.) 모두 똑같은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 한국사회엔 여전히 취향이 없다. 용산구와 마포구에만 힙스터 체크리스트에 충족하는 힙스터가 수만 명은 될 거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몰취향의 고장.

몰취향은 위험하다. 자기의 얼굴을 모르는 달걀귀신들만이 횡행하는 세계와 같다. 세계를 단조롭게 만들고 서로를 외면하다 결국 혐오하게 한다. 심지어 몰취향을 취향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알리바이마저 주어진다면 (혹은 스스로 획득한다면)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지금은 총체적 난국이다. 몰취향의 가짜 힙스터들이 몰린 자리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고 가난한 자영업자들은 쫓겨난다. “호모를 싫어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라는 말이 혐오를 정당화 한다. ‘취향’의 외피를 뒤집어 쓴 ‘몰취향’은 마침내 반지성주의를 잉태한다.

곧 타인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 “그건 틀렸어”라는 지적에 그것이 무엇이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이다. 지적 사유와 갈등과 토론과 쟁명이 사라진다. 자기 존재의 역능을 통해 타자의 얼굴을 보기보단 대화를 포기하고 타자를 외면하고 혐오해버린다. 그걸 타자성의 인정이라고 우긴다. (결과적으로 <국제시장>이나 <해운대>가 천만관객을 돌파한다.)

다시, 그 시절 내 썸녀는 정말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고 전시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 ‘조악한 욕망’에 홀랑 넘어가 눈에 하트를 그린 내 유치한 마음이다. 멜론 인기차트 100을 틀어놓고 기계적으로 커피를 내려주던 그 카페의 알바는 귀갓길에 어떤 음악을 들을까? <국제시장>의 감독은 다음 영화에서 또 천만관객을 넘길 수 있을까? 경리단 오르막길, 힙스터의 언덕은 자기들만을 고립시킨 몰취향의 달걀귀신들이 모인 고원은 아닐까.

[워커스 34호]


[워커스_아무말대잔치] 어떤 광기에 대하여

[워커스_아무말대잔치] 어떤 광기에 대하여


어떤 광기(狂氣)에 대해 생각해보자. 광기의 전제는 ‘무조건’이다. 당신이 부르면 태평양을 건너서라도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유행가 가사야 다소 낭만처럼 보일 수 있겠다만 무조건이란 결국 비이성과 맹목의 의미다. 그러니까 ‘내가 널 만나려고 태평양을 건너는 건 이성이고 합리고 나발이고 신경쓰지 않는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의미. (사실 연인관계에서도 이렇게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관계는 낭만보다는 공포에 가깝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를 단 하나로 일축한다. 하여 결국 폭력을 잉태한다. “길라임 씨가 내겐 송혜교고 전지현”이라고 여기던 분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선 집회에서 행하는 폭력을 보라. 광기의 결과는 결국 폭력이다.

이 광기는 그저 ‘적폐세력’에게만 있다고 여기는 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대상이 길라임 씨에서 ‘우리 이니’로 달라졌을 뿐 행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자 개인의 SNS 좌표를 찍어 화력을 집중하고, 구매력으로 언론사를 압박하거나 입맛에 맞지 않는 모든 비판을 가짜뉴스로 이해한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세상 모든 가치를 ‘우리 이니’로 일축해 버리는 폭력.

하지만 ‘그래서 문빠들은 안 돼’라고 말하는 당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당신의 일상에 스며든 맹목과 광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국뽕’에 젖어 든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면서, ‘문빠’들의 몰지각함을 욕하면서, 그러니까 황우석과 심형래와 노무현과 문재인, 이덕일, 환단고기, 두유 노 강남스타일을 욕하면서 당신이 던진 그 멸칭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무엇을 배제했는지. 또 당신은 그 욕설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뽕, 빠, 까

뽕, 빠, 까(집단적 광기, 아니 그보다는 광기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들엔 왜 하나같이 된소리가 쓰이는 걸까) 같은 단어들로 지칭되는 집단의 공통된 정서적 근간은 ‘상징적 타자’에게 자기의 욕망을 모두 투사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욕망도 비난도 자기 자신이 아닌 상징의 몫이 된다. 모든 집단 광기의 투사, 상징적 타자를 향한 돌팔매질은 나와 당신, 우리의 뱃속에 숨어 있는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입신양명의 신화, 경제적 성공의 신화, 산업화와 근대화가 빚어낸 먹고사니즘의 신화 같은 괴물. 거기에 성숙하지 못한 정치제도와 반지성주의의 파토스가 양념처럼 버무려져 만들어낸 촌극. 결국 자기 내면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욕망과 배반의 꼭두각시놀음이 부끄러워 은폐하는 광기의 카니발 같은 것.

얼마 전 동네 학교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의 교사가 학교 축제에서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발언과 신체접촉을 한 사건이다. 취재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보도를 자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반면 이 사건을 처음 제보한 학생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학교의 다른 잘못들도 보도하고 기사화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사건들에 대한 제보도 이어졌다.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소의 잡음은 덮자고 말하는 어른들과, 그런 어른들을 조롱하며 도리어 더 많은 학교의 잘못을 고발하고 성토하는 학생들의 대비. 학교라는 상징에 자기들의 욕망을 투여하는 어른들과 그 상징에서 얻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학교라는 상징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학생들의 대비. 학교의 ‘어른’들은 학교라는 상징이 자기의 명예라도 되는 양 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학교의 평판이 떨어지면 대학입시 성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면서 울먹거리던 그를 보면서 실소가 나왔다. 도대체 학교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과 대입결과의 상관관계를 연결지으려면 뇌 내엔 어떤 망상이 가득차야 하는 걸까. 제보를 해온 학생들은 해당 교사의 사소한 잘못을 들추느라 여념 없었다. 수학여행에 가서 그 교사만 다른 층에 묵었으니 특혜라거나, 그 교사만 생활지도가 유독 엄격했다거나 하는.

상징에 집착하면 본질을 잃게 된다. 이 학교의 교사를 비롯한 어른들은 학교의 명예에 집착하는 광기 어린 태도로 폭력을 만들었다. 그들의 언어 어디에도 피해자는 없다. (그들은 실제로 ‘사건을 명확하게 고발하고 나선 이가 없으니 피해자가 없는 셈’이라는 논리를 들고 오기도 했다. 끔찍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가해 교사라는 ‘악’의 상징에 집착하느라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발생한 젠더 권력의 격차,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주목하지 않았고 그저 ‘가해자’ 개인에게 모든 문제를 치환했다. 그래서 그 악을 치우고 나면 그 자리엔 또 무엇을 채워 넣게 될까.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떠난 자리에 문재인이 들어 무엇이 달라질까. 문재인이 떠난 자리에 다른 이를 채우면 또 무엇이 달라질까. 상징을 깃발처럼 올리고 그걸 빼앗고 찢겠다며 싸우는 동안 결국 웃는 건 누구일까. 깃발을 숭배하는 집단이 광기를 부리는 동안 배제되는 건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이다. 광기의 집단이 올린 깃발을 찢겠다고 덤비는 일은 오히려 광기가 짓밟은 깃발조차 올리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은폐하는 일이다. 또 다른 광기. 랑시에르의 지적처럼 정치란, 또 삶과 투쟁이란 깃발과 상징들의 싸움이 아니라 그 밑에 깔린 몫 없는 자들의 싸움이어야 한다. 깃발을 보며 미치지 말자. 당신이나 나나 몫이 없긴 마찬가지.


[워커스 32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떡밥엔 찬성하지만 낚이는 건 싫습니다


이제와 고백하건대 2012년 대선에서 난 문재인을 찍었다. 그즈음 숱했던 술판에서 “문재인이 이명박이나 박근혜와 다를 게 뭐냐”고 말했다. FTA와 대추리, 비정규직법, 부안, 이라크 파병 등등등. 참여정부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만큼, 혹은 그보다 더 노동자와 농민, 민중들을 괴롭혔다. 그 때도 지금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문재인을 찍었다.

이번엔 좀 빠르게 고백하자면 난 심상정을 찍었다. (더구나 나 혼자 조용히 심상정을 찍는데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심상정을 찍자는 독려도 좀 했다.) 여전히 숱했던 술판에서 난 “심상정은 또 문재인과 다를 게 뭐냐”고 했다. 진보정치를 참칭하는 자유주의 정치, 페미니즘을 자처하면서 당내에 창궐하는 ‘한남충’들에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비겁함, 피와 눈물이 치열하게 쌓아올린 진보정당의 성과를 갉아먹은 기회주의. 그런 말을 했다. 이런 생각도 당분간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엔 심상정을 찍었다.

# 떡밥에 낚이지 마세요

당연하지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됐다고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새 대통령은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실상 인천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직고용 정규직 전환보다는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은 그대로 둔 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중규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찾았을 때 이런 우려를 제기한 노동자에게 “한 번에 다 얻으려 하지 말라”고 답한 건 우려를 더 키운다. 인천공항공사가 ‘좋은일자리 TF’를 만들면서 자회사 설립을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정규직화, 노동중심 같은 말은 사실 떡밥이다. 떡밥의 달콤한 유혹을 따라간 결과 비정규직 법안이 만들어졌고 대추리와 이라크엔 군대가 파병됐다. 떡밥에 낚이면 실상 우리의 삶은 저들의 정치에 포섭된다. 그 포섭은 저들의 알리바이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너희들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 늬들도 좋아했잖아.” 안타까운 건 아직도 자기들이 낚인지 모르는 어망 속의 물고기들이다.

정의당으로 표상되는 한국의 ‘진보정당’도 마찬가지다. 본래 진보 운동은 거개의 권력과 자본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함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적대함으로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에 진보와 정치의 공간을 만드는 작업. 그러나 진보정당은 진보보다는 정당에 방점을 찍음으로 공적 영역과 권력에 포섭됐다. 진보 ‘정당’의 정치는 새로운 것으로의 전복보다는 체제를 용인함으로 얻는 안정적 지위에 국한됐다. “사회적 합의가 용인하는 진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같은 거다. 중식이 밴드의 여성혐오 가사에 대처하는 방식이나 김지연 성우 부당해고에 이은 당내 메갈리아 논쟁에 대처하는 정의당의 방식이 그랬다. ‘안정된 진보’의 떡밥에 낚이면 상상력과 자생성을 박탈당한다. 균열을 두려워하게 되고 마침내 체제에 순응하게 된다.

# 그렇지만, 떡밥을 버리진 마세요

문재인이나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 해서 나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토록 지껄이면서도 정작 그들을 찍은 이유는 어쩌면 그게 ‘연대’의 본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대란 본질적으로 서로가 가진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2012년, 문재인은 쌍용차 해고자의 복직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연히 그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노동 문제의 상징과 같던 쌍용차를 언급함으로 자신의 개혁 이미지를 공고히 하려 했을 뿐이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쌍용차의 해고노동자들이 일거에 복직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건 고작 대통령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적어도 노조가 박근혜 정부에서보단 조금 더 유리한 고지에서 투쟁하고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언급’의 힘은 딱 그만큼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을 위해 난 문재인을 찍을 수 있었다. 문재인은 표를 얻고 ‘우리’는 딱 그만큼을 얻는 거다. 이번 선거에서 심상정에게 표를 준 이유도 마찬가지다. 계속 열세였던 심상정이 TV토론에서 성소수자 문제에 자기의 1분을 할애하는 순간, 멀리서 찾아왔다는 성소수자 청년과 얼싸안던 그 순간 심상정의 지지율 그래프가 움직였다. 그렇지만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소수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심상정이 득표한 수만큼 혐오가 조금 ‘주춤’할 것이란 기대. 그녀에게 준 ‘표값’으로 내가 기대한 건 딱 그만큼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고 쿨하게 다시 헤어지는 것. 그게 연대의 본질이다.

정치인을 이용하는 건 그들을 논리적 모순에 처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들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 표를 구하러 다닐 때와 이후의 말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말의 무기를 쥐고 그들을 다그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죽어도 그들은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시혜와 권력의 크기를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저 애초부터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용할 거리들은 차고 넘친다. 낚시 바늘을 피해 떡밥을 야금야금 물어뜯을 방법은 많다. 난 낚이는 것은 싫지만 떡밥엔 찬성한다.


[워커스 31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대학에선 두꺼운 철학책을 끼고 앉아 사랑이니 삶이니 실존이니 하는 말을 지껄이고 싶었다. 어릴 때 본 드라마에 나온 형들은 그랬다. <우리들의 천국>이나 <카이스트> 같은 드라마. 나이를 더 먹고 취직을 하면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의가 넘치는 신입사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야근 중에 눈 맞은 직장동료와 시작한 불 같은 연애 같은 것도 상상했다. <미스터큐> 같은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이 꼭 있었다. 그런 장면에서 여배우는 주로 김희선이었다. 꿈이 참 컸다. 난 장동건이나 김민종이 아닌데.

생각해보면 한 20년쯤 전, 드라마엔 캔디들이 참 숱하게 나왔다. 그런 드라마의 캔디는 자고로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대충 때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하라”는 대사를 날려주는 게 자고로 모든 드라마 속 신데렐라, 캔디의 첫 대사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 역도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드라마 속의 대학에도 삶이나 실존, 사랑, 낭만 같은 오글거리는 말보다 알바와 최저임금과 등록금, 취업난 같은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캔디들은 이제는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돈보다 꿈과 사랑을 택하던 대학생들은 꿈과 사랑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예전엔 직장에서 야근하다 눈 맞는 커플의 가장 큰 방해가 ‘연적’이었지만 지금은 ‘신분’이다. 남자 주인공은 주로 정규직, 여자 주인공은 비정규직이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드라마 주인공들과 달리,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하고 취직해야 하는 신자유주의형 주인공들이 갖는 삶의 태도 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드라마.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CJ E&M의 예능채널인 tvN에서 드라마를 만들던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라마 <혼술남녀>의 종방연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이한빛 PD가 만들던 <혼술남녀>는 노량진 고시학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친구가 없고 돈이 없고, 시간과 여유가 없어 홀로 술을 마시는 ‘혼술족’들의 이야기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는 그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려 한다고 드라마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한빛 PD의 일은 위로와 공감이 아니었다. 이한빛 PD는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하면서 촬영 중간에 촬영팀에게 계약파기를 알리고 계약금을 환수 받는 일을 담당했다. 드라마 현장의 계약직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 하는 일이다. 이한빛 PD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일에 대해 선임 PD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욕설이었다. 이후 그에게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이 강요됐다. 선임의 눈 밖에 난 그에게 인격적인 모독과 집단 괴롭힘도 뒤따랐다. 이한빛 PD의 유가족들은 CJ E&M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이한빛 PD가 사망한 이후 회사는 유가족에게 “이한빛 PD가 불성실했고 비정규직을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사건은 6개월 가까이 은폐됐고 4월이 돼서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랐다.

기륭전자, 서울대 점거 농성장, KTX 해고 승무원, 416 연대. 이한빛 PD가 1년차 월급을 쪼개 돈을 보낸 곳들이다. 신출내기 드라마 PD는 아마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나보다. 마음과 힘을 모아 더 좋은 세상, 따듯한 마음을 그리는 그런 드라마. 돈 보다는 사랑이 중하고 삶에는 희망이 남아있는 그런 드라마. 외로운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드라마. 그러나 세상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정리해고, 계약직, 욕설과 따돌림. 어딜 봐도 드라마 같지 않던 현장에서 그는 조금씩 죽어간 셈이다. 차라리 그보단 이제 드라마조차 더 이상 따듯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정한 세상의 삶이야말로 드라마처럼 사는 일일까.

#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은 ‘사이다 같은 드라마’라고 호평 받았다. 말단 사원들이 재벌기업의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몇 해 전 크게 히트한 <미생>은 비정규직 노동자 들에게 ‘장그래’라는 대명사를 만들어줬다. 그 드라마들을 꼬박꼬박 챙겨봤지만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경리부 말단직원들이 대기업의 분식회계를 밝혀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고,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견뎌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 드라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고다르가 말하길,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했다. 영화란 현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만드는 이가 그리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을 막무가내로 해고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PD가 죽어나가는 세계에 사는 이들이 그려낸 현실을 구태여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희망 같은 걸 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쩐지 자꾸 옛날 드라마만 찾아보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서울의 달>을 유료 결제했다. 홍식이는 비참한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부여잡을 수 있었는데.


[워커스 30호]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청년문제 같은 건 없다"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청년문제 같은 건 없다"



답답한 마음에 “그래서 도대체 청년의 문제가 뭔데?” 라고 물었더니 “선배가 겪는 문제가 바로 청년 문제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딱히 반박할 말도 없으니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다. ‘청년문제’를 주제로 (무려 원고지 15매에 달하는, 무려 신박한 문체로) 글을 써내라는 무리한 청탁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청년의 문제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싫었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워커스>가 규정하고 있는, 또는 이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청년’이 무엇인지, 창간 당시부터 ‘청년’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갖은 기획과 꼭지를 생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겠다. 도대체 왜. 청년이 도대체 뭐라고.


청년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다. 이 모호한 의미 규정 때문인지 정부와 지자체가 규정하는 청년 세대의 기준은 제멋대로다. 19대 국회는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처음에 청년을 만 19세에서 만 29세로 규정했다가 30대 구직자들을 소외한다는 지적에 만 34세까지로 상향 조정했다. 정부의 청년전용창업자금 지원은 만 39세 이하만 받을 수 있다. 서울시의 청년보장제도는 만 19세에서 29세가 수혜 대상이지만 성남시의 청년배당 대상자는 만 19세에서 24세까지다. 정치권의 청년규정도 제각각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청년 비례대표를 뽑을 때 청년의 기준이 정해졌는데 새누리당은 35세 미만, 새정치민주연합은 45세 미만이었다. 만 31세의 성남시민인 나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받을 수 없지만 정부의 청년창업자금 지원은 받을 수 있다. 서울은 성남보다 공기가 좋지 않아서 신체적, 정신적 성장과 무르익음이 더딘 것일까.


<워커스> 창간 초기에 ‘청년 패널’이란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2~30대 비슷한 연령의 몇몇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취업, 빈곤, 연애와 성, 가정과 가족의 문제 등등 이른바 ‘청년 문제’로 손쉽게 언급되는 주제의 대담을 하는 기획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기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매 호의 기사에선 대담을 진행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기자가 뭔가 대단한 대화라도 오고가고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과장했지만, 이제와 고백하건대 그거 죄다 ‘뻥’이었다. (독자 제현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매주 도무지 하나로 그러모아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됐다. 뉴스가 제공하고 드라마와 영화가 포장한 ‘청년 세대’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청년 세대는 죄다 가난하고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알바에 시달리고 그 알바 업주는 악덕업주라는 설정. 그럼에도 미래의 꿈과 희망에 열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클리셰, 지독한 가난함에도 끈끈하게 이어지는 사랑과 그 사랑마저 극복하지 못할 고단한 삶이라는 진부한 러브라인까지. ‘청년 세대’라는 허상을 만들고 그들이 사는 허구의 세상을 구획하는 일이었다. 거짓부렁의 글을 돈 주고 사 읽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의 관심과 호명은 거개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변명도 얹고 싶다. 대상을 짜맞추고 거기서 자기만족을 얻는 일. 무례한 고나리질과 의미 없는 꼰대질.


이건 ‘청년’이라는 개념 범주를 묻기 이전에 ‘청년 세대’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이를 규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정말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세대의 범주를 상정해놓고 문제를 만들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끼워 맞추다보니 ‘청년’이라는 세대는 호명의 순간부터 대상화된다. “너희는 이런 세대고, 이런 아픔을 겪고 있을 거야 맞지?” 체제는 젠더, 인종, 세대, 국가 같은 것들로 노동력을 구획하고 통제한다. 2017년을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취업하기 어려운 건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따른 문제고 삶이 피폐해지는 건 고도화된 신자유주의가 추동한 경쟁 때문이다. 그들이 그 세대여서 그런 게 아니다. 청년들이 만 39세를 넘어서는 순간 ‘뿅’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은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 제각각의 삶, 저마다의 어려움, 저마다의 고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의 주름에 새긴 고통의 종류와 양과 질은 다 다르다. 그것들을 고작 ‘세대’의 이름으로 뭉뚱그리는 일은 너무 안일하고 불온하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달관 세대 등등등 등등등.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수많은 말과 말의 잔치가 포섭할 수 있는 ‘청년’은 없다. 세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다. 특정 연령대를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가난한 청년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문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아니라 불량한 일자리, 불안한 고용이 문제다. 29세의 미취업이 49세의 실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건 아니다. 미래세대라고? 49세에겐 미래가 없냐고. 굳이 일부러 노력해서 ‘청년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워커스>는 안일한 세대론이 담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은폐하고 있는 너머의 것들을 들춰내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젊은 피’를 운운하며 떡고물 던져주듯 젊은 이들의 표를 구걸하거나 강탈하는 정치권의 속내, 88만원이니 청년의 대변자니 하는 세대론 장사치들의 꿍심 같은 것. 오늘 ‘청년 세대의 문제’를 운운하는 건 피시방에서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부디 담당기자는 다음 원고청탁에선 더 신박한 주제의 원고를 청탁해주길 바란다.[워커스 29호]

<위플래쉬> - 당신은 무엇에 순종하고 있는가

 

<위플래쉬> - 당신은 무엇에 순종하고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은 단언하건대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악의와 이상함으로 똘똘 뭉친 지휘자이자 교수인 플래처가 파놓은 치졸하고 저열한 함정에 걸려든 악의와 이상함으로 똘똘 뭉친 드러머이자 제자인 앤드류의 소름끼치는 화학작용. 이상하고 나쁜 놈들이 모여서 빚어낸 그 장면이 끔찍한 건 그 장면이 사뭇 감동스러워 보이는 까닭이다. <위플래쉬>가 흥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잔혹한 장면을 보면서 사제간의 정리(情理)’ 같은 말을 꺼냈다. “어쩌면 플래처 교수의 폭력적인 교육방식은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기 위한 필요악일지 모른다.”면서. (실제로 <위플래쉬> 개봉 당시에 한 SNS에서 본 감상평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감상평에 동조했다.) ‘사랑의 매훈육당한 스톨홀름 증후군 환자들의 사회.

 

<위플래쉬>는 세계에서 영화 시장이 가장 큰 북미를 제외하고는 한국에서 가장 흥행했다. 워낙에 잘 만들어진 영화기 때문에 평단의 찬사를 받는 것이야 이상할 것 없지만, 감독도 배우도 생소한 이 저예산 영화가 한국에서만 유독 흥행을 기록한 것은 의아한 일이다. <위플래쉬>는 저예산 영화로는 드물게 158만 관객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웠다. 국내 저예산 영화들이 관객수가 1만명만 동원해도 대박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위플래쉬>의 흥행 성공은 그야말로 초대박이다.

 

# 권위에 대한 굴종 - “당신들 친구 중엔 찰리 파커가 없잖아요

 

주인공 앤드류는 다분히 종속적인 사람이다. 그는 무엇에 도전하는 법이 없다. 앤드류는 왜 셰이퍼 대학에 다니느냐고 묻는 여자친구 니콜에게 셰이퍼가 최고의 음악학교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미식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사촌들에겐 그래봤자 3부 리그에서 뛰고 있으니 절대 NFL에 갈 수는 없다고 조롱한다. “평범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더라도 찰리 파커처럼 모두에게 회자되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한 앤드류에게 가족들은 친구들이 널 기억해 줄 것이라고 조언하지만, 앤드류는 당신들 친구 중엔 찰리 파커가 없잖아요.”라고 답한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앤드류의 답은 언제나 권위를 성취하는 것이다. 미국 최고의 음악학교 셰이퍼에서도 플래처 교수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모든 학생들이 그가 지휘하는 밴드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 밴드를 거치면 뉴욕필하모닉이 있는 링컨 센터 무대로 직행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다. 하여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권위가 발생하는지 지켜보면 그 사회를 움직이는 욕망을 알 수 있게 된다. 폭언과 폭력이라는 플래처 교수의 교육법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가 실력성공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의 학생들은 두들겨 맞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도 플래처 교수 슬하에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성공으로 가는 첩경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 플래처를 견디면서 자기들도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권위로 치장한 폭력에 굴종하는 것은 또다른 폭력을 잉태한다는 단순한 인과. 그리고 폭력의 순환을 귄위라고 여기게 하는 사회.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런 상황은 정상이 아니며 그런 폭력과 그 폭력을 묵인하며 재생산하는 사회의 비정상성을 지적한다. 학교의 관계자는 플래처 교수의 옛제자가 자살한 사건을 앤드류에게 알려주며 플래처의 학대를 고발하도록 한다. 이 장면은 그동안 플래처와 앤드류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 관계가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던 영화적 시선을 환기해 관객들에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 결국 플래처의 교육이 교수직을 잃을 만큼 반사회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 ‘권위주의라는 권위

 

그런데 관객들은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플래처 교수의 열정을 부러 애써 느낀다. 사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많은 수의 관객들은 (특히 한국의 관객들은) 플래처의 교육법 따위는 폭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을만큼 폭력적인 교육환경에서 자라온 피해자들이다. ‘사랑의 매같은 모순의 언어가 팽배한 교실에 살았고, 이름대신 성적으로 호명되는 삶을 살았다. 대학의 서열에 따라 인생의 등급이 낙인찍히고, 취업한 회사의 시가총액으로 인격의 경중을 가늠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런 이들이 플래처 교수의 교육법을 보면서 제자의 가능성을 위한 필요악의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끔찍한 일이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교육법으로 이전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남자를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플래처의 교육법에 열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말을 붙이며 사랑의 매’, ‘체벌’, ‘훈육같은 말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너무 많다는 사실.

 

권위주의는 권위에 굴종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한국사회 (비단 한국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는 권위에 순종하며 언젠가는 자신이 권위를 갖게 되는 순간을 갈망하는 삶의 태도를 철이든다고 표현한다. 권위주의적 삶의 태도가 권위를 가진 셈이다.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기의 폭력을 고발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한 무대로 플래처는 큰 무대를 준비한다. 그리곤 앤드류에게 일부러 틀린 악보를 준다. 당황한 앤드류를 보면서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 플래처의 복수. 그런데 앤드류의 당황은 잠시. 앤드류는 플래처의 함정에서 오히려 자기가 연습했던 곡을 소신껏 연주해내며 상황을 이겨낸다. 그리고 앤드류와 플래쳐가 서로를 보며 짓는 미소. 플래처는 마치 자기의 가르침을 마침내 이해한 제자의 성장을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이고, 앤드류는 스승의 의도를 이제야 알아챈 제자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졸한 사적 복수는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 앤드류로 인해 고매한 교육자의 뜻으로 격상된다.

 

앤드류와 플래처가 마침내 공명한 것이라고 해도 이는 앤드류가 플래처의 폭력적인 세계에 다시 빠져 들어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플래처의 권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는 그 무대 이후를 보여주지 않지만 어쩌면 그 날 이후 앤드류는 플래처에게 더 심한 학대를 당하는 학생으로, 그리고 주변에게 그 폭력을 전염시키는 가해자로 살아가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 전염

 

권위는 결국 사회적 합의에 의해 생성된다. 그 사회의 크기는 상관없다. 사회의 지향과 욕망에 따라 무엇을 좇느냐가 권위를 결정한다. 그래서 권위주의는 전염된다. 권위에 순종하는 것으로 자기의 욕망을 해소하려는 태도가 곧 권위주의기 때문이다. 권위에 가까이 다가가는 누구를 지켜보는 일. <위플래쉬>의 플래처는 그 권위주의의 전염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의 학생들이 조바심을 내도록 하고, 그들의 욕망을 단순화 시키고, 그 단순한 욕망이 촉발한 조바심 위에 군림한다. 권위는 강고해지고, 그의 권위에 굴종하는 문화는 다시 사회를 지탱하는 권위가 된다. 그리고 이내 그 권위는 주변을 전염시키고, 더욱 강력한 권위가 된다. 할 일은 순종밖에 남지 않는다.

 

고민해 볼 일이다. 당신이 순종하는 권위는 무엇인가. 당신의 플래처는 누구인가. 당신은 그를 참된 스승같은 말로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갖고 싶은 권위는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누구에게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가.

 

 

 

<곡성>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곡성>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작년 여름, <곡성>을 보고나온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을 내놨다. 일광(황정민 분)과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의 굿판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일광과 외지인은 한패인지, 무명(천우희 분)은 마을의 수호신인지. <곡성>은 해체된 플롯의 영화다. 매 시퀀스는 놀라울만치 정교하지만 정작 시퀀스 간의 인과(因果)가 없어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못한다. 인과 대신 우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개연성대신 감독의 불친절한 생략이 이야기(의도적인) 구멍을 낸다. 이 구멍들은 영화 밖에서 다른 영화적 재미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 구멍을 채우기 위한 해석을 내놓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각자의 근거를 들이밀었다. 영화는 이 논쟁들이 사그러질 때까지 계속된 셈이다. 감독은 이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비가 내리면 옷이 젖게 되듯 누군가의 불행도 그냥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불행에 대해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피해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위로하기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이 영화가 애초에 납득과 이해, 설명의 범주 바깥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불가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 어디 한 번 이해해 보라고 관객들을 부추기는 영화다. 그 이해와 몰이해, 불가해와 억측, 추론과 합리사이에서 벌어지는 언설과 언설의 중첩. <곡성>의 진짜 시작은 영화가 끝난 다음일지도 모른다. ‘현혹되지 말라는 무명의 말에 시험에 든 종구처럼 관객들은 <곡성>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시험에 들게 된다. 답도 없는 시험.

 

# 불가해, 비이성, 그래서 뭣이 중헌디?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곡성>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인용되는 누가복음 24장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는 대목이다. 예수의 제자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처음부터 믿지 못하고 예수의 손목에 난 못자국을 확인하고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서야 예수의 부활을 믿었다. 예수는 보고서야 믿는 도마를 꾸짖으며 보지 않고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도그마, 증명과 확인을 요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와 신앙을 뜻한다.

나홍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생겨나지 않으며 불가해한 영역, ‘그냥 그런 것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감독이 그 불가해의 세계를 위해 영화 곳곳에 구멍을 내 영화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적이고 치밀한 짜임새가 없는 이야기로 만든다. 그리고 종교를 끌어들인다. 그러니까 개연성을 찾지 말라, 세상은 원래 그렇게 이해가 애초에 불가능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종교적 도그마를 그 근거로 가져다 쓴 셈이다. ‘고작 보고 있는 것에 현혹되지 말라면서.

영화 속 모든 불행은 인물들이 의심을 시작하는 순간 찾아온다. 마치 도마가 예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은 순간. 종구가 외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외지인이 제거되었다고 믿을 때 딸은 낫는다. 일광으로부터 악마가 무명이었다는 설명을 들은 후부터 다시 딸이 아프기 시작하고 자신이 눈으로 본 것보다 귀로 전해들은 것에 확신을 가진 순간 파멸에 이른다. 성긴 플롯 사이 유려한 시퀀스의 함정을 걷어내면 이 영화는 의심하는 모든 인물에게 처벌을 가하는 이야기다. ‘믿지 아니하였으니 복은 없을 것이다.’

<곡성>은 인간을 불가해한 세계의 사생아 정도로 이해한다. 인간이 믿지 않고 의심하며 사유하는 순간 불행이 시작된다. <곡성>에 나오는 이들은 (감독의 말대로라면 피해자들은) 이성을 갖춘 듯 착각하지만 실은 현혹 당했고, 아무 것도 모르고(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이해했다고 여겨서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한다. 누구를 향해 살을 날리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던 영화 속의 굿판을 빼내면 영화 속의 폭력은 비이성의 함정에 빠진 피해자들이 다시 가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무속신앙, 기독교, 제노포비아, .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정보가 부족할 때 그 구멍을 채우는 것은 일종의 믿음이다. 누군가는 개인의 체험을 동원하고, 누군가는 철학적 명제를 빌려온다. 누구는 종교에 의탁하고 누구는 다른 개인에게 종속한다. 감독은 불가해의 세계를 던지고 그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여 구원을 받으라 종용한다.

 

# 시험, 인간을 믿는 일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거짓말이다. 세계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믿음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는 자포자기는 위로가 아니라 기만이기 때문이다. <곡성>은 결국 인간을 파괴했다. ‘인간적인 것들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 무기다. 종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불행의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려 의심할수록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버린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의 씨앗이 됐다. 그곳에서 생각하고 의문을 던지는 인간의 행위는 불행의 씨앗이다. <곡성>에서 인간은 미약한 존재라기보다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로 보인다. 무력한 당신에게 무력한 내가 던지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나.

어쩌면 이 영화는 영화와 세계, 인간과 희망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영화가 무력한 인간을 응시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무력한 인간이 섞여 살아가며 지향하는 다음 세계에 대한 제시가 없다면 영화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고 자기 운명을 바꿀 수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까닭은 뭘까. 우리는 그저 운좋게 줄을 잘 서서 구원을 기다리기만 해야 할까.

누가복음 1장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목소리, 그러니까 자연의 목소리에서 자기 존재의 역능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된다. 예수는 요한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사실 예수는 저세상이나 하늘나라를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알 수 없는 하늘나라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접할 수 있는 현실이라고 봤다.

세계는 물론 엉망진창이다. 감독의 말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인과도 없어 보인다. 여기서 벗어나는 일은 요원하다. 세계는 생각보다 더 더럽고 추악하다. 그러나 영화의 윤리적 태도란 그 파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안간힘이 돼야한다. 삶의 태도란 그 안에서 한 줄의 희망을 찾아 삶을 바꿔나갈 때 빛을 발하게 된다. 예수도 부처도, 어쩔 수 없으니 체념하고 살라고 가르치진 않았다.

시험에 들지 말지어다. 시험은 어쩌면 맹목을 권유하거나, 초월자에 대한 거스를 수 없음을 강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역능, 삶에 대한 아주 작은 희망,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믿을 수 있냐는 물음이다. 시험에 현혹되지 말자. 문제를 잘 읽으면 답이 보이는 법.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수면의 과학> - 총천연색 꿈의 세계, 하지만 깨어나야 합니다

<수면의 과학> - 총천연색 꿈의 세계, 하지만 깨어나야 합니다

 

 

꿈의 세계. 현실에선 도통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들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공간이다. 개연성도 과학적 원리도, 자연의 섭리도 상관없다. 그저 바라는 것들이 총천연색으로, 때로는 폭력적일만큼 단편적인 색으로 나타난다.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나의 의지일 뿐이다. 미셸 공드리의 영화 <수면의 과학>은 총천연색 꿈의 세계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영화다. 그래서인지 영화엔 개연성이라곤 없다.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증세를 가진 남자의 동화다. 또한, 염세적이고 철없는 남자의 연애 방식을 자학적으로 드러내는 보고서이기도 하다.

소심한 멕시코 아티스트 스테판은 꿈속에서는 ‘TV 스테판이라는 화려한 쇼의 활달한 진행자로 변신한다. 어려서부터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 속에 살아온 스테판은 심기일전해 파리로 날아온다. 아버지를 여의고 마법사와 연애 중인 프랑스인 어머니 크리스틴이 그에게 소개한 일자리는 달력 만드는 회사.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고 창의성이 희박한 일은 스테판에게 스트레스를 안길 뿐이다. 한편 스테판은 아파트 이웃의 아가씨 스테파니에게 끌리는 자신을 깨닫고 그녀에게 집착한다. 일과 연애감정이 배설하는 좌절은 기괴한 전조와 환상으로 변해 스테판의 꿈속에 등장한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스테판의 혼돈스러운 꿈은 다시 그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내몬다. 스테파니는 신기한 장난감들- 심지어 독심술 기계와 타임머신을 포함한- 을 만들 줄 아는 재능있고 천진한 남자에게 호감을 품지만 그의 생떼와 위악에 지쳐간다.

 

# 꿈의 해석과 꿈의 구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꿈 해몽집인 줄 알고 읽기 시작한 적이 있다. 이내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책을 집어던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꿈의 해석이나 점쟁이의 꿈 해몽이나 꿈을 기호와 은유, 상징으로 대한다는 점에선 상통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다양성을 의미의 단일성으로 환원시킨다. 꿈의 이미지는 검열을 피해 변장하고 나타난 억압된 욕망이라는 것. 정신분석은 꿈을 개인적 무의식(프로이트)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집단적 무의식(칼 융)상징으로 읽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꿈은 욕망이나 상징을 표현하는 장치가 아니다. 미래를 예고하는 전조(前兆)도 아니다. 공드리는, 그러니까 스테판의 입을 빌린 공드리는 왜 굳이 꿈을 해석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꿈과 실제가 뒤섞이고 상상의 전조가 열리고 독심술과 타임머신이 가능한 현실이면 안되느냐 묻는다. 이 영화는 수면의 해석학이 아니라 수면의 과학이다. 물론 감독은 나도 프로이트 책 몇권쯤은 읽었다는 티를 초반부에 내고 싶어하지만, 이내 자기의 방식대로 나아가며 비과학적 수면의 세계가 얼마나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무의식의 터가 되는지 역설하려고 한다. 그게 수면의 과학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잡은 사랑이야말로 바로 이런 무질서한 모양새가 아니겠냐고 묻는다. 꿈을 해석하며 현실에 반영하고 싶어하고 몽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공드리는 마치 엄숙주의라고 비웃는듯하다. 공드리가 그리는 사랑의 세계는 그토록 엄숙한 현실의 세계에 있지 않다.

공드리의 영화에서 잠든 연인은 오래된 아이템이다. 그들은 잠만 자지 않고 꼭 꿈을 꾼다. 그러니까 꿈. 공드리를 뮤직비디오계의 발명가 자리로 만든 그 시절의 작품들에는 참으로 많은 인물들이 잠들고 꿈속을 헤매고 또 깨어났다. 꿈은 현실을 덮어 서로의 경계를 뒤섞어버리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관계의 맥락을 무너뜨리는 초절의 무기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자기와 타자의 관계마저 뒤섞어 버리는 초절의 무기. 그리고 이런 초현실적인 상상의 장면들은 대개 너무나 사랑스럽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그런 장면들은 여전하다. 꿈속에서 바위만하게 커지는 스테판의 손, (그 손은 첨단의 그래픽 기술이 아니라 그냥 커다란 소품으로 무작정 대체해버린다) 서투른 애니메이션 요소, 조악해 보이지만 그래서 그 빈틈으로 상상력을 초대한다. 1초 타임머신 기계와 독심술 기계처럼 말도 안 되는 장난감들이 등장한지만 그것들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면서 실제의 장면을 지배해버린다. 공간의 변환은 영화적이라기보단 연극적이다. 영화적 배경보다는 연극적 무대에 가깝게 장면이 배치된다. 음악과 미술, 색 모든 곳에서 경계를 허무려는 듯 기존의 것들에 상상의 기재를 덧씌운다. 영화라기보단 공드리의 두시간짜리 꿈에 초청받은 듯한 연출이다. 영화는 대단히 자유롭다.

 

# 언젠간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유롭다는 말은 일견 아름답고 상쾌하지만 실은 산만함과 무질서에 대한 유아적 욕망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스테판의 동료는 산만함은 생산성을 저해한다고 일갈한다. 사실 이 대사는 공드리가 주변으로부터 숱하게 들어왔을 말이지만 영화 속 스테판도, 그리고 그 인물이 자기의 분신이라고 말한 바 있는 공드리도 끝내 그 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가 유치하다고 지적해도 공드리는 스테판이 그랬던 것처럼 꿈의 세계는 본래 유아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러면 안되느냐고 되묻겠지.

<수면의 과학>은 유아적이기 짝이 없는 스테판이 어머니를 떠나 다른 여자를 찾는 이야기를 다룬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이건 아이의 꿈이다. 스테판에게 스테파니는 현실원리를 대변한다. 그는 그녀를 통해서만 현실과 화해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실은 스테판은 스테파니를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테판에게 현실의 창구인 스테파니는 스테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을 강요하고 꿈의 세계를 부정하던 하버지. 그래서 스테판을 스테파니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사랑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그저 너는 나의 창의성을 칭찬해줘야 한다고 요구할 뿐이다. 어쩌면 스테파니에 대한 스테판의 사랑은 자기애의 연장일 뿐이다. 자기가 두려워하는 상상을 실재로 둔갑시켜놓고 스테판은 강박적으로 스테파니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떼를 쓴다. 토라진 아이처럼 울며 보채다 제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행동하다 일을 그르치고, 이 모두는 스테파니를 지치게 한다. 스테판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벽에 부딪힌다. 스테판은 꿈을 꾸기 시작하고, 거기서만 골든 포니 보이를 타고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수면의 과학>이 자전적 영화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에서 스테판은 감독처럼 창의성에 넘치는 어떤 인간 유형을 대표한다. 나이가 들어도 결코 늙지 않는 영원한 소년’. 영화를 찍기 전 공드리는 실제로 연인과 헤어졌다. <수면의 과학>은 연인에게 버림받은 공드리의 이야기다. 스테판의 입을 빌려 말하는. 그래서 영화의 세계는 공드리의 꿈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 한 편으로 남의 연애사를 유추한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지만 어쩌면 공드리의 연애는 스테판의 연애와 같지 않았을까?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창의적인 천재 감독의 사랑. 자기애의 연장에서 자기의 창의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타자성마저 거부해버린 유아적인 철부지의 사랑. 그래서 <수면의 과학>정말 이제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건가?”라고 애처롭게 저항하는 감독의 자문 같다.

꿈은 총천연색이고 아름답다. 백일몽. 코끼리가 나비를 타고 날아다닐 수도 있고, 기타를 타고 배기음을 뿜으며 질주할 수도 있다. 슬픔은 과장되기도 기쁨이 강물처럼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꿈은 깨어나야 하는 법. 사랑은 현실의 영역이다. 사실 영화도 마찬가지. 현실에선 슬픔도 기쁨도 끝이나게 마련이고 다른 존재와의 사랑은 잠에서 깨어난 현실에서만 가능하다. 영화는 머릿속에서 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에 걸어 다른 이와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실 자기 안의 세계가 달콤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이 씁쓸하기 때문 아닌가. 공드리와 스테판이 현실에서 또다른 스테파니를 만난다면 그녀를 꿈의 세계로 초청하기보다 꿈 바깥으로 한 걸음 더 나오는 용기를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좋은 걸 우짜노 -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질 것들

좋은 걸 우짜노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질 것들

 

누구의 인생에나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데 내게만은 도무지 오지 않는다. 난 언제든 기회가 오면 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 모양인 건 도통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태어나면서부터 기회를 잡은 사람들을 본다. 흔히 금수저라고 부르는 사람들. 별다른 노력 없이 나보다 훨씬 앞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태어나기도 전에 기회를 잡은 사람들도 있다. ‘재능’.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새 이미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금수저에겐 불공정하다며, 사회가 잘못됐다며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부어주겠지만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이들에겐 뭐라고 욕도 할 수 없다. 어떤 이들에겐 우연찮은 기회도 오는 것 같다. 인맥, 학연, 혈연.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기회는 나에게만은 오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월급쟁이고, 난 지방의 삼류대학을 나왔다. 그렇게 욕만 하거나 욕도 하지 못하다 어느새 삶은 아스라이 지나간다. 기회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 좋은 걸 우짜노

 

<아스라이>는 대구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청춘의 이야기다. 주인공 상호는 우연히 고등학교 후배의 부탁으로 영화의 제작 프로듀서를 맡은 뒤 영화에 빠져들었다. 고교졸업 직전 무작정 만든 영화가 우연치 않게 그럭저럭 인정받은 후, 서른이 다 되도록 안팔리는영화를 만들고 있다. 뒷걸음질에 쥐를 잡아 주인에게 칭찬을 들은 소는 아마 평생 뒷걸음질만 치게 될테다. 갈으라는 밭은 갈지 않고. 그러나 쥐를 잡는 재능은 소가 아니라 고양이에게 내리는 법이다. 다시는 칭찬을 받지 못한 상호도 영화판을 전전한다. 돈도 벌지 못하고 제 앞길도 찾지 못하면서, 계속 뒷걸음질치는 소처럼 미련하게. 그런 미련한 인생이 십여 년, 어느 날 술자리에서 영화를 함께 만들던 후배는 얄미운 충고를 던진다. “형은 영화 그만 만들어, 잘 찍지도 못하면서”. 상호는 여전히 미련스럽게 대답한다. “좋은 걸 우짜노, 그냥 해야지.”

 

상호는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린다. 기다리는데서 멈추지 않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 못해 영화를 못만드는 것일까 자문하다 대학의 영화 동아리를 찾아갔지만 콤플렉스만 더 심해질 뿐이다. “타르코프스키 작품 중엔 어떤 걸 좋아해요?”. 도대체 타르코프스키는 어느 나라에서 뭐하는 사람인 걸까.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상호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고 지방에 살기때문에 서울에 집중된 문화적 수혜도 먼 얘기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재능이 없다. 그런 주제에 영화를 찍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만큼 영화를 좋아한다. 좀 덜 좋아하면 그만두기도 쉬울텐데.

 

총체적 난국을 미련하게 버텨내는 상호의 삶을 안쓰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자면 문득 떠오른다. ‘나도 무엇을 저렇게 좋아했는데’. 돈이 없거나 재능이 없어서, 여건이 좋지 않아서,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어느새 사라지고 잊힌 좋아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시를 쓰고 싶었고,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축구를 하고 싶었고, 매일매일 치킨을 한마리씩 먹을 수 있는 치킨집을 운영하고 싶었는데. 그 때로 다시 돌아갈 기회만 있다면 다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이 있는데. 이제는 입 밖으로 발음하는 것조차 민망해진 이라는 단어가 내 생활의 한구석에 생생히 꿈틀거리던 때. 어쩌면 여전히, 아직도.

 

상호에게도,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금수저가 아니었고 이렇다 할 재능도 없었다. 재능있는 이들을 일발에 역전할 찬스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상호는 아직 거기에 남았고 돌아보니 당신과 나는 떠났다. 상호는 좋은 걸 우짜노라고 말했고 우리는 좋지만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했다. 그뿐이다.

 

# 부르지 않으면 아스라이 사라진다

 

유행처럼 번지는 청년 세대라는 말은 얼마나 허망한가. 이 도시에선 서른 아홉 살까지 청춘이라는데, 저 도시에선 서른 살이면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고 한다. 알량한 숫자놀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청춘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실 기회. 청춘은 꿈을 유예할 기회가 사라지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어느 날 이라는 단어가 생경하게 들리고 입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워진 날,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무엇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날, ‘좋은 걸 우짜노라고 말하기 보다 좋지만 어쩔 수 없잖아를 말하게 된 날 청춘은 끝난다. 삶과 꿈을 유예할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인생의 봄. 아직 뜨거운 성장의 여름도, 풍요로운 수확의 가을도 오지 않은 시작의 봄. 청춘이 시작의 의미라면 청춘의 시간엔 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 아직 꿈을 품어도 괜찮고 실패해도 괜찮은 시절. 봄에 시들어버린 꽃들이 썩어 여름의 열매에게 양분이 돼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시절. 돈도 없고 재능도 없으면서 여전히 꿈을 유예하는 상호는 그래서 청춘의 한복판을 살고 있다. 상호가 청춘을 살고 있는 것은 그가 아직 미련스럽게 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상호도 나이를 좀 더 먹으면 결국엔 영화 만들기를 포기할지 모른다. 재능없음에 절망하고, 가난에 무릎꿇고. 결국 어느 회사의 영업사원이 돼 넥타이로 목을 옥죄고 사장님들의 비위를 맞춘 대가로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혹은 갑자기 터진 대박에 유명한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겠다. 상호가 붙잡고 앉았던 청춘의 시절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 줄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꽃이 피었다고 봄이 아니듯, 꽃이 졌다고 봄이 아닌 것도 아니다. 봄은 봄이라고 부를 때야 비로소 봄이다. 청춘을 청춘이라고 부를 기회, 꿈을 부둥켜잡고 지질거리며 매달리다 꺽꺽 소리내 울 수 있는 그 기회의 시절만은 당신과 나와 상호에게 모두 있었다. 재능이나 재력따위로도 살 수 없던 그 기회의 시절. 우리가 흔히 기회라고 부르는 것들은 우리에게 영 오지 않지만, 우리가 기회인줄도 모르는 순간을 우리는 직접 만들 수 있다. 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아스라이 사라지듯 그 기회의 순간들도 우리 삶에서 아스라이 사라진다. 청춘은 청춘이라 부를 때야 비로소 청춘이다. 기회는 당신이 기회라고 불러야 비로소 기회다.

 

# 청춘의 클리셰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타르코프스키를 모르던 대구의 영화소년, 공모전에서 300번이나 탈락한 재능없는 영화감독, 안될 걸 알면서도 오기로 꿈을 부여잡고 청춘을 유예한 미련퉁이. 그리고 마침내 <아스라이>가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길고 짧은 30편의 영화를 만든 후 첫 개봉작이었다. 감독의 나이 서른 살이 되는 해였다.

 

김삼력 감독은 청춘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했다. 푸르지도 않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는 내도록 흑백이다. 거무튀튀한 화면에서 상호는 내도록 울고 다치고 좌절한다. 푸른 빛, 쏟아지는 햇살, 활기차고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죄다 청춘의 클리셰라고 주장하는 감독의 투박한 말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들린다. 그 투박함은 영화의 만듦새도 다소 투박하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 투박함의 열정이 김삼력과 상호를 여전히 대구의 독립영화 바닥에 놔두고 있는 것일테니 상관없다.  

‘삶의 비밀’ - <세상의 모든 계절>

[영화리뷰]

 

삶의 비밀’ - <세상의 모든 계절>

 

성지훈

 

언제나 더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행복해지길 바라서 영원히 행복하지 못하고 부유한다. 고작 지나온 것들만을 뒤늦게 인식하는 존재에게 현재란 고작 쌓인 과거의 무덤일 뿐이고 미래란 유예된 과거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인식은 더디다. 그래서 고정된 상태로의 행복같은 건 없다. 행복이란 오직 지향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을 손에 쥐길 바라기 때문에 삶은 괴로워진다. 행복이란 것이 없다면 행복의 대립항으로서의 불행도 없다. 있지도 않은 것에 자기 삶을 우겨넣기 때문에 괴로워진다. 그래서 어쨌거나 삶은 괴롭다. 그보다는 사실 삶이란 것은 행복이나 불행 같은 안일한 말 따위로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 “누구나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은 노부부 톰과 제리, 그리고 그들의 친구 메리의 이야기다. 톰과 제리는 그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과 달리 매우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다. 남편 톰은 인자한 지질학자고 톰의 아내 제리는 상담치료사다. 그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한다. 그들은 능숙하게 요리를 하고 때때로 친구들을 불러 함께 식사한다. 주말엔 농장에서 정성스레 작물을 가꾸고 잘생기고 위트있는 변호사 아들이 연인과 함께 가끔 찾아온다. 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며, 학식이 풍부하다. 저녁 식탁의 대화에서 늘어가는 탄소배출량을 고민할만큼 정치적으로도 깨어있다. 그야말로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상적인 가정.

 

메리는 제리의 직장동료다. 제리가 일하는 병원의 비서직 사무원이다. 메리는 제리 부부와 달리 학식이 부족하고, 이혼했으며, 가난하고, 외롭다. 그래서인지 알콜 의존증도 있다. 거기다 무엇보다 너무 수다스럽다. 메리의 삶은 비참하고 불행한 삶이다. 누구의 삶을 감히 불행하다고, 비참하다고 단정할 수 있겠느냐만 메리의 삶만은 확실히 불행하며 비참하다. 메리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래서 메리가 밝은 전등 불빛에 달려드는 날벌레처럼 제리의 주변을 멤도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작은 질량의 사물은 더 큰 질량의 물체에 끌려간다는 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던가. 제리는 자신의 환자를 대하듯이 메리를 받아준다. “Yes”라고 말해주며 메리의 끝없는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아마도 메리는 그들 곁에 있음으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나아가선 자신도 그들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은 메리도 알고 있다. 자신은 결코 그들의 공동체 안으로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문제는 메리가 톰과 제리의 아들 조에게 연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행복한 가정에 편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면서 불거진다. 그 순간 언제까지고 메리를 안아줄 것 같았던 제리의 연민은 싸늘한 외면으로 변모한다. 마치 불길한 전염병을 만난 것처럼. 행복은 불행의 침범을 차단한다. 메리는 앞으로 더욱 외롭고 괴로워지겠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영화는 아무런 과장도 없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쓸쓸함을 표현해낸다. 메리는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그대로 묻어있는 얼굴로. 아무런 대사가 없지만 메리는 마치 누구나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잖아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열매를, 겨울에는 소멸을.

 

<세상의 모든 계절>은 노부부 톰과 제리, 그들의 친구 메리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메리와 메리의 궁상을 지켜보는 우리, 그보다는 메리보다 더 궁상맞은 삶을 살고있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의 삶은 메리의 삶을 닮아있다. 늘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이 초래한 결핍에 집중하는.

 

영화는 행복의 상징과 같은 톰과 제리 부부보다는 그 주변에서 자기의 삶을 학대하는 이들의 편이다. 영화는 행복한 (혹은 행복한 것으로 여겨지는) 노부부를 제시하고 영화의 시선은 그들을 응시하며 부러워하는 이들의 자괴감과 궤를 맞춘다. 불면증 환자 자넷과 홀아비 뚱땡이 켄, 세상에서 무감한 로니, 그리고 메리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들을 지켜보기보다 이들이 되어 톰과 제리 부부를 지켜보게 한다.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 자체보다는 그걸 바라는 일에 집중하는 메리와 켄과 로니와 당신과 나.

 

비단 영화가 지시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은 늘 제리와 톰을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다. 그들의 주변을 맴돌고 그들 속으로 편입되길 바라지만 결코 그리 들어갈 수는 없다는 걸 실은 알고 있는 삶. 그래서 늘 부유하는 삶. 부유를 불행이라고 부르는 삶. 우리는 결핍된 것을 욕망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욕망은 욕망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욕망이 결핍을 초래한다. 삶을 생산하는 원동력인 욕망대신 욕망이 초래한 결핍에 집중하다보니 당신과 나의 삶은 때때로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자기의 삶을 부정하기 바빴던 메리처럼.

 

행복이라는 안일한 말로 치부했던 제리와 톰의 삶은 실은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일 따름이다. 애초에 행복이라는 거창한 말은 언어의 유희일 따름이다. 삶은 시간을 따라 변모하며, 매 순간의 욕망도 변모하기 때문에 고정된 개념의 행복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불행도 없다. 그저 순간 순간 자기 삶의 존재를 긍정하며 마주보며 웃는 것. 세상에 있는 모든 계절을 마주하고 괴로워하다, 웃다, 살아가다 사라지는 것. 삶의 의미란 고작 그런 것이다.

 

영화에서 제리 부부는 텃밭의 작물들을 소중히 가꾼다. 영화는 4계절의 하루씩을 보여주는 데 철마다 톰과 제리 부부가 텃밭을 가꾸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 부부의 삶은 욕심내지 않고 꾸준하고 차분하게 가꿔온 텃밭 같다. 때가 돼 씨를 뿌리고 잎을 가꾼 뒤 열매를 수확하면 식물은 죽는다. 봄에는 꽃을, 여름에는 열매를, 겨울에는 소멸을.

 

# 삶의 비밀

 

살다가 어쩌면 인생을 관통하는 한 줄의 깨달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고 산을 오르지만 실은 그런 건 없다. 미래엔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삶에는 해결같은 것이 없다. 삶의 비밀, 그리고 비극은 바로 그것이다.

 

머피의 법칙,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행과 불운은 모두 내 삶으로만 기어들어오려는 것 같다고 여기지만 그래서 어젯밤 어느 술자리에서도 누가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불행 올림픽을 개최했지만 실은 그런 것도 없다. 삶의 비밀, 삶의 희극은 그런 것이다. 이러쿵저러쿵 삶을 계획하며 도무지 행복해지지 않는 삶의 우울증에 시달리지만 그건 어쩌면 봄에 열매를 바라서, 가을에 꽃을 바라서 그런 것일지 모를 일이다.

 

행복도 없고, 그래서 불행도 없고, 해법도 없고 해답도 없는 것이 삶이라 삶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이 넓은 세계에서 누구 한 사람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고 존재는 먼지보다도 작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 먼지같은 삶에 주어진 찰나의 순간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더 거대한 것을 바라다 불행해질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찾고 자기 욕망에 솔직해질 것,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을 사랑할 것, 남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직시할 것, 나의 가능성을 상상할 것,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갈 것. 고작 이것이 삶의 진짜 비밀이다. ‘고작이것을 못해 불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이까짓 것들을 고작이라 부르든 행복이라 부르든 그것은 상관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삶의 비밀을 주변에 널리 전염시키며 살아갈 것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화차> -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진짜’인가


 

<화차> -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진짜인가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한다. 그리곤 간단한 호구조사. 나이는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그렇게 서로 정보가 오가고 나면 우리는 그를 알았다고 말한다. 가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서류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주민등록증, 통장 사본, 여권, 졸업 증명서 같은. 그런 서류가 오간 후엔 그의 신원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어떤 누구를 알고 그의 신원을 확실하다고 말하는 데 필요한 것이 고작 그를 호명하는 기호들이다. 그런데 그런 기호들이야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일이다. 어려울 것이 없다. 세상은 기호 너머의 실체보다는 기호 자체를 규명하고 얻어내는 데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 당신은 누구인가

 

<화차>는 삶을 통째로 훔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선영과 문호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다. 결혼 전 문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에서 선영은 전화를 한 통 받고 홀연히 사라진다. 문호는 선영의 종적을 찾다 자신의 약혼녀 선영이 실은 경선이라는 이름의 전혀 다른 사람이며 실제 선영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문호가 전직 형사인 사촌 형 종근의 도움을 받아 선영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마치 그럴듯한 추리영화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시선은 물론 문호와 종근조차 선영의 종적을 잡아내는 추리게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그들 모두 경선(선영)을 자기가 원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그를 입증하려 노력한다.

 

문호는 사라진 선영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도대체 넌 누구야?”. 문호는 경선이 자신이 알던 선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전직 형사인 종근이 살인사건과의 연관을 의심하며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조언할 때에도 그는 형이 선영이를 아느냐고 화를 낸다. 끝까지 경선의 무죄를 믿고 그를 되찾으려는 순정남. 문호의 경선은 일상의 한 부분인 약혼녀 선영이다. 그래서 문호의 추적은 경선을 자신의 착한 약혼녀 선영으로 규정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종근의 경우는 경선이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임을 확신하고 그녀를 뒤쫓는다. 주인이 사라진 경선의 빈 집안을 탐색하던 종근은 지문 하나 남아있지 않은 집을 보고 요것 봐라라고 말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범죄현장을 목격한 형사의 시선이다. 영화 속 종근의 상상에서 경선은 잔혹한 살인범이다. 순정남 문호의 감정을 따라 경선의 무죄를 바라던 관객들은 종근의 냉소적인 시선을 따라 이번엔 경선을 동정의 여지가 없는 잔인한 살인범으로 인식하게 된다.

 

종근의 시선을 따라 끔찍한 범죄자 경선을 추적하던 관객들의 시선은 경선의 시점으로 경선의 과거가 드러남으로써 다시 그녀를 연민하게 된다. 관객들은 그녀가 사채업자에게 지장을 억지로 찍히고 팔려갈 때, 술집 여자 차림을 하고 택시에서 내릴 때를 보면서 그 아픔과 분노를 직접 느끼게 된다. 경선은 산골 펜션에서 선영을 죽이고 피범벅이 된 채 자신을 때린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경험에서 자신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음 행동을 한다.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낄 시간도 두려움에 떨 여유도 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그 죄책감마저 억눌러야 하는 고단한 삶에 관객들이 느끼는 건 연민과 동정이다.

 

선영으로 변한 경선. 그 한 명에 대한 각자의 규정은 모두 다르다. 관객들도 문호의 마음을 따라, 종근의 관찰을 따라, 그리고 경선의 삶을 따라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어느 모습도 경선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관객들은 경선을 증오할 수도 연민할 수도 없다. 경선 자신이라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규정할 수 있을까.

 

# 무엇이 되기를 바라서

 

자아는 자신의 관념 안에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에 비친 얼굴로 구성된다. 그래서 오히려 무서운 것은 타인의 삶을 도둑질 해 살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사라지고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사칭하고 살아도 도무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세상이다. 타자의 존재를 타자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태도다.

 

자신의 실존이 무엇인지, 그녀가 경선인지 선영인지는 그녀 자신도, 그녀의 연인 문호도 알 수 없다. 마치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알 수 없었던 장자처럼. 그래서인지 경선도 나비를 보며 자신의 존재를 질문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욕망이 꾸역꾸역 몰려든 용산으로 그녀가 향한 이유는 함평의 나비 축제를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문호가 기억하는 선영(경선), 종근이 단정한 경선, 그리고 경선이 되고 싶었던 선영. 모두 경선이며 또한 경선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모두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 경선은 자신이 선영이길 바랐고 나중엔 자신이 선영인지 경선인지조차 혼동했다. 문호는 경선이 선영으로 머물러주길 바랐다. 경선이 아니라. 결국, 모두가 존재를 무엇으로, 제멋대로 규정하려 했고 결과는 그 대가를 치른 파국이었다.

 

# 대한민국의 가장 천박한 욕망이 몰려든 곳

 

영화의 원작 소설은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진 이후 불황기가 배경이다. 극단적 소비주의가 만들어낸 살풍경. 이같은 배경은 90년대 이후 한국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부자 되세요란 주문이 온 나라를 사로잡고, 주민등록번호에서 신용카드번호로 사람을 규정하는 수단이 옮아가던 시절. 경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건 사채 때문이다. 그리고 빚을 내라고 강요하고 경선의 불안한 삶에 위로의 손길 한 번 주지 않은 건 세상이다.

 

영화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원작소설만큼 사회적 문제에 비중을 두진 않는다.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 중 누가 모르겠는가.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빚은 얼마나 두려운지, 삶은 얼마나 외로운지. 영화는 굳이 이런 것들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감독은 용산역을 마지막 장면의 배경으로 택하면서 이 파국의 난장을 총체적으로 전시한다. 끊임없이 사람이 들고나는 곳, 무수한 욕망이 교차하는 곳, 백화점의 무수한 상품들이 즐비한 곳,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천박한 욕망이 밀려들어 잔인하게 타올랐던 곳.

 

당신이 당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세상이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기록이다. 자본이 부여한 신용, 국가가 부여한 일련번호 같은 것들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기억이다. 몸과 마음을 섞어 살을 부비고 말과 정을 나누며 누군가에게 남긴 흔적. 그러나 실은 이것 중 어느 것도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타인의 얼굴을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데 급급할 뿐인 관계도, 고작 기호에 불과한 숫자들도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인 보바리즘(Bovarysme)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될 때 심해진다. 강요당한 욕망이 더 나은 무엇으로의 도피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 타인에게 멋대로 투사한 자신의 욕망인지, 숫자놀음에 불과한 기호들인지, 세상에 떠밀린 안타까운 변명인지.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정말 진짜인가.

 

그래서 오늘 거대한 용산역에 있는 것 같은 우리는 모두 화차를 기다리고 있는 경선과 똑같은 셈이다. 아직 선영이 나타나지 않았을 따름. 그러니 선영이 나타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맡기 전에 내 옆의 경선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너 자체로 괜찮다는 아주 사소한 위로 한마디쯤 건네 보는 게 좋겠다.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단상

1.

휴가가 끝났다. 휴가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제와선 뭣이 일상이고 어디가 비일상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화장실 문고리와 늘어난 팬티 고무줄마저 낯설다.


2.

휴가 중엔 두 편의 영화를 봤다. <공범자들>과 <택시 운전사>.

'기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다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기자질을 똑바로 못하고 있어" 운운하며 자괴감을 가장해 내가 실은 기자임을 확인하거나 받으려는 뻔뻔한 마음도 아니고, "내가 뭐라고"라며 주억거리다 초라한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빈궁한 마음도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을지문덕한 기분. <공범자들>을 보고 나와서 길바닥을 휘휘 걸어다니느라 애꿎은 주차비만 날렸다. 

직업, 밥벌이에 자긍심과 애정을 쏟는 일.에 대해 생각했고 노력과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그보다 더 거창한 단어들이나 훨씬 쪼잔한 말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 밤의 최고조는 아무도 나와 술을 마셔주지 않은 것이었다.


2-1.

<공범자들>엔 내가 콩알만하게 스쳐 나온다.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녀서 한 번에 알아봤다. 어떤 얼굴들, 아는 얼굴, 반가운

얼굴들이 스쳐나올 때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고영주 아저씨가 배바지 입고 나오는 장면이 최고조로 흥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2-2.

모처럼 성당에 갔고, 이용마 선배가 쾌차하시길 기도했다.


3.

휴가의 본래 목적대로 검진을 받았고 예상한 결과를 받았다.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를 받으려고 그 돈지랄을 했나 싶어서 "역시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아는군요"같은 개드립을 날리다가 살짝 혼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짜증이 좀 났고 그보단 사실 좀 무서웠다. 

사실 제일 큰 짜증은 내년이나 후년부터 적용될 거라는 엠알아이 의료보험이다. 돈 많이 벌어서 엠알아이 기계나 한 대 사고 싶다. 옛날에는 윤전기를 사고 싶었는데 말이야.


4.

일산으로 옮긴 스페이스 공감의 첫번째 공연을 다녀왔다. 예정은 크라잉넛과 로맨틱펀치의 합동공연이었지만 배인혁의 급환으로 크라잉넛의 단독공연이 됐다. 크라잉넛의 공연은 신났고 캡틴락은 여전히 철이 없었다. 크라잉넛은 22년째다. 오래가는 힘.에 감탄하다 크라잉 넛의 히트곡에 대해 생각했다. 인디씬에서 출발한 팀 중 대중적인 히트곡을 가장 많이 만든 팀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가장 본질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쳤다.

그 며칠 전에는 대중예술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부르지 않는 노래, 보지 않는 영화, 읽지 않는 만화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하는. 대중예술의 정수는 결국 대중성이냐는 질문. 그래도 <해운대>를 천만 관객이 본 건 납득할 수 없다. 퉤퉤퉤.


4-1.

일산으로 옮긴 공감은 접근성이 너무 떨어졌고 (주엽역에서 2km나 떨어져있다. 버스를 타야한다. 무려.) 공간 자체의 매력도 반감된 느낌이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감('감'이다. 실제 거리는 모르겠다.)이 더 벌어진 느낌인데, 그건 객석이 반원형이었던 매봉 공연장이랑은 다른 객석 모양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LED 화면이 생겼는데 어찌 쓰셔야 할지 아직 연구가 되지 않은 듯 보였고, 무엇보다 조명이 너무 후지다. 관객 한명한테 핀조명을 쏘고 레이저를 발사하고... 무대에다 하시라고요. 가뜩이나 짜친 조명. 지미집이 머리위를 붕붕 날아다니는 것도 여전히 싫다. 언제고 한번은 헤드샷 할 것 같아.


잔뜩 투덜거렸지만 암튼 그래도 백피디님 감사합니다. 


5.

김현아가 원두 한보따리를 사줬다. 테라로사에서 파는 원두 중에 가장 맛있는 거라면서. 목욕재계를 마치고 정성스럽게 갈아 성심껏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다. 커피를 제대로 내릴 줄 안다면 더 맛있겠지. 아니, 지금은 맛이 없다는 게 아니고. 암튼 공부를 해야한다.


6.

모처럼 고요서사에서 책을 샀다. 

고요서사에서 주워오는 책들은 대개 다 좋다.


++

...

뭉뚝한 연필, 가느다란 연필, 부러진 연필로

새벽의 어깨선을 열심히 그리던 시간들도 모두

모두 갖다 버렸다

버렸더니 살겠다

내가 나를 연기하며 

(시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연기를 하며)

그늘을 기억하는 일과

들어가 사는 일 사이에서 도르래를 굴리며

살 수는 있겠으나

...


-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박연준



6-1.

숨어있는 책에서는 이남덕 교수의 한국어 어원연구 전집을 주웠다. 옛날 얘기같은 걸 기대했는데, 만주어와 퉁구스어가 잔뜩이다. 차가 생겨서 좋은 점은 두껍고 무거운 책을 사서 싣고 올 수 있는 일이다.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


7.

엄마랑 같이 동두천에 있는 이모네 집에 갔다가 대리운전을 불러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잠들었고 대리기사 아저씨와 어색한 듯 수다를 떨었다. "15만킬로나 탄 것 치고는 진동이 없고 소음이 적어요", "앞유리에 유막 제거를 해야겠네요" 같은 얘기들과, 본업은 덤프트럭 운전이지만 일거리가 너무 줄어 지난 주부터 대리운전 알바를 시작했다는 얘기, 그래서 하루에 3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한다는 얘기, 아직 초보라 대리기사 셔틀도 이용할 줄 몰라 그제 밤엔 10km나 걸어야 했다는 얘기. 

도착할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산이랑 같이 만원짜리 한 장을 더 줬다. 그게 뭐라고 나도 한참을 쭈뼛거렸고 그 아저씨도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돈을 받았다. 자는 줄 알았던 엄마는 뒷자석에서 하는 얘기들을 다 듣고 있었고, 잘했다고, 내가 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주려했다고 말했다. 엄마랑 나는 돈을 주는 것 말고는 감사와 위로, 격려를 전할 방법이 없는 것이 좀 속상하다고 생각했고, 돈을 주는 것 이상의 격려가 어디있겠냐고 말했다. 부쩍 고단해져서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비오는 데 차에 창문이 열려있는 것도 모르고. 덕분에 침수차량이 됐다.


8.

잠을 자야겠다. 상경하기 전에 침대 시트를 갈아놓고 간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내일은 또 뭐 살아지겠지. 새 시트에서 잤으니 새 날이면 좋겠다.

오랜만에 정치 얘기

1. 



식당주인이 애초에 밥을 팔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항의하러 찾아간 거라고. 이게 그렇게 이해가 안될까. 어떻게든 감싸주고 싶다면 일단 무엇을 잘못했는지부터 인정하고 시작하는 게 상책. 그게 그렇게 어렵나. 

2. 
386, 깨시민, 노빠, 친문.. 뭐 등등등 등등등. 그들을 어떻게 호칭하든가 어쨌든. 그들은 진보, 인권, 민주주의같은 구호를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삶의 행태는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여성을 혐오하고 노동을 소외한다. 생태를 외면하고 지역엔 무관심하다. 구호는 혁명을 외치지만 삶은 속물적이다. 촛불을 들고 정권을 타도하자고 구태의연한 구호를 외치고선 그 선언적 살풀이가 끝나면 어느 곳에 모여앉아 여성을 혐오하고 성소수자를 비하하며 주식과 부동산 정보를 탐닉하는 그들. 

 아니라고 발뺌하지 마라. 부안, 대추리, 새만금, 대우차, 한미 FTA, 이라크 파병, 김선일, 허세욱, 배달호, 전용철, 이경해.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 이름들 앞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대통령은 이명박이나 박근혜와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착한 FTA", "좌파신자유주의" 같은 말장난은 입으로는 이상을 지껄이면서 삶은 저들과 똑같이 속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분열증을 증거할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토록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건 그들의 정치적 오류보다는 그 분열적 태도가 역하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3. 
이건 그저 유령들의 싸움이다. 박정희의 관과 노무현의 관을 짊어진 사람들의 싸움이다. 신화 속 영웅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일단 영웅을 신화 속의 인물로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 후일 또다시 영웅으로 소비돼야 할 사람들. 그래서 정치판에 정작 정치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지겹도록 끊임없이 제기되는 갖은 음모론도 같은 맥락이다. 

 대의제 정치는 정치의 자리에 정치보다 인격신을 만들어 끼워넣는다. 이런 부분에서 스스로 '진보정당'을 자처하고 있는 곳들과 거기에 서식하는 '진보 정치인'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권력의지 같은 피씨방에서 디스크 조각모음하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데 어디에 진보가 들어갈 수 있나. 

 정치는 삶을 행복하게 할 질문의 축적이다. 진정한 영웅,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초인을 뽑는 천하제일무술대회가 아니라. 게이가 핍박받고 장애인이 불편하고 난방을 하지 못해 얼어죽고 공장에선 노동자가 쫓겨나고 도롱뇽과 도마뱀이 죽어가는 곳에 필요한 것이 정치다. 정치란 권좌가 아니라 일상이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 노동자와 친한(親努)정치는 도덕적 인격이 아니라 질문의 축적이 이루어낸다. 

4. 
무엇을 할 것인가. 박정희의 유령이 출몰하는 건 구태정치의 과거 잔재들 때문보다는 이 분열증의 사회가 자초한 것에 가깝다. 속물적 삶.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맹목적 구호. 삶의 가치, 인간적 삶에 대한 희구같은 말이 이미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이 유령을 내쫓자고 저 유령을 들여오는 셈. 해야 할 일은 먼저 인간적 삶을 복원하는 일이다. 

약자와 함께 하는 삶, 빼앗는 것보다 나누어 잘 사는 일, 삶에 희망을 드리우는 말과 노래. 누군가의 삶을 앞에두고 감히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는 일. 그러니까 삶과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를 전복하는 일.





시네마 달에 대한 사랑고백

 

1.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말에 한달음에 필름포럼으로 갔다. 그 땐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 맨 위층에 있었다. 옥상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오늘 볼 영화 포스터를 봤는데, 왠 사내놈들 둘이 홀랑 벗고 누워있는 거 아닌가. <후회하지 않아>였다. 그 때 그렇게 말했다.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권장하지는 않는다고. 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지금 생각하니 참 지랄같은 말이었는데, 저 부끄러운 얘기들을 이제 지랄맞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후회하지 않아>덕분이다. <후회하지 않아>를 추천했던 선배누나는 이후에도 여성영화제엘 데려가고 종종 퀴어영화를 추천해줬다. 그 영화들, 그 영화들을 보고 나와 떨었던 수다들이 켜켜이 쌓이며 호모포비아는 조금씩 치료됐던 것 같다. ‘마음의 준비라니. 진짜 지랄맞네. 부끄럽기 그지없다.

 

2.

핸드폰 액정 메인화면에 적어둔 문장을 바꿨다. 그 때까진 수 년간 우리민족끼리였는데. <애국자 게임>을 보고난 다음이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도서관에 가 책을 잔뜩 빌렸다. 이것 저것. 학교에서 선배들한테 받은 책들도 다시 꺼내 읽었다. 헌책방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종이가 누렇게 바랜 책들을 읽었다. <애국자 게임>을 보고 핸드폰의 문구를 바꾸기까지 1년 반 남짓이 걸린 것 같다. 그렇지만 핸드폰의 문장을 바꾼 건 <애국자 게임>을 보고난 다음이다.

 

3.

세상은 그들을 대척점에 놓고 대비시켜왔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면에선 같은 편이다. 야만의 땅에 내몰려졌다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황은 달랐지만 그들에게 역할과 상황을 준 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아마 이 스릴러의 살인마, 끝판 왕.”

 

<두 개의 문>이 개봉했을 때 이런 문장이 들어간 리뷰기사를 썼다. 기사의 야마는 경찰과 철거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에서 탈피해 관객 스스로 시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두 개의 문 중에서. 고백하건대 그 기사는 리뷰보다는 차라리 반성문에 가까웠다. 증오와 적대로 알리바이를 마련하려던 비겁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4.

영화를 보고나면 때때로 그런 순간들이 있다. 뒷골이 시큰하거나, 가슴이 답답한. 무언가를 막 적고 싶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마구 떠들고 싶은. 새로운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좋은 영화란 내게 새로운 질문을 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폭력, 사랑, , 나이듦, 가난, 연민, 착취, 노래, 예술. 뭐 그런 것들. 무엇이든 우리가 딛고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에 대해. 인간적 삶의 복원에 대해. 좋은 영화와 좋은 책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우리의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신박한 상상력이고 노련한 길잡이다.

 

5.

<애국자 게임><두 개의 문>은 시네마 달에서 만든 영화다. (<후회하지 않아>는 아니다. 하지만 이후에 찍은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시네마 달이 제작했으니까, 대충 넘어가자.) 말이 너무 길어질까 적지 않았지만 <레드마리아>, <상계동 올림픽>, <버스를 타자>, <거미의 땅>, <송환>, <노라노> 등등등. 등등등. 내 삶을 조금씩 변화시켜온 시네마 달의 영화들은 많다.

 

이건 그저 시네마 달의 영화를 좋아하고 시네마 달의 영화들을 삶에 덕지덕지 붙여 온 팬의 팬심 고백 같은 거다. 시네마 달의 영화가 없었다면 단언컨대 내 삶은 지금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을 거다. 분명히.

 

6.

시네마 달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블랙리스트, 지원배제 뭐 이런 말들이 등장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로 시네마 달을 지켜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나로선 시네마 달이 사라지면 좋은 영화를 만나게 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게 될 거란 아쉬움이 가장 크다. 시네마 달의 영화들은 대부분’ (사실 별로 안좋아했던 영화들도 좀 있다..)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책을 읽게 했고 수다를 떨게 했고 술을 마시게 했고.

 

다행히 나처럼 시네마 달과 시네마 달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네마 달을 지켜내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스토리 펀딩도 이어지고 영화 상영회도 한다. 스토리펀딩은 한겨레 21의 인터뷰와 박주민 의원의 글이 연재 됐더라. 모두 시네마 달에 대한 애정과 고운마음이 잘 보이는 좋은 글들이었다. 없는 형편에 조금 후원도 했다.

 

다들 자기 재주를 보태 시네마 달을 지켜내겠다고 나섰으니 나도 내 재주를 보태야겠다. 내 재주가 별거 있나. 영화보고 술 먹는 거지. 주말엔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를 봐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시네마 달이 지금껏 만들어온 영화들에 고마움을 고백하고 앞으로도 계속해 만들 영화들을 응원하는 일.


 



+

혹시 주말에 인디스페이스에 가실 분이 계시다면. 추천 영화는 <투 올드 힙합 키즈><그림자들의 섬>, <잡식가족의 딜레마>. 특히 <투 올드 힙합 키즈>엔 어느새 스타가 되어 무려 해피투게더와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지조가 나옵니다. 무려 주인공.ㅋ 

단상


1.

눈을 뜨자마자 티비 앞에 앉아서 정찬성의 복귀전을 기다렸다. 12시부터 시작하는 이벤트의 메인이벤터로 나온다는데 경기시간이 다 제각각이니 언제 시작하는지 알 수가 있나. 다 보면서 기다려야지.


격투기를 좋아하지만 좋아한대봤자 K-1과 프라이드를 좋아했던 거여서 프라이드가 망하고 UFC가 대세가 된 이후엔 격투기를 잘 보지 않았다. 링 위에서 '무도'를 하는 것 같았던 K-1이나 프라이드와는 달리 옥타곤의 철망에 사람을 몰아놓고 피를 튀기며 두들겨패는 UFC는 영 체질에 맞질 않았다. 아기자기했던 일본의 퍼포먼스와 스토리에 비해 '완전미국'이라고 써놓은 것 같은 퍼포먼스도 취향엔 안맞았고. 그러다 정찬성의 등장 이후로 UFC를 좀 보게 됐는데, 좀비라는 별명처럼 근성으로 승부하는 플레이를 좋아한다. 


UFC 4전만에 치른 타이틀 매치에서 어깨뼈가 탈구됐음에도 끝까지 해내려던 모습이 좋았다. 전설의 강타보단 그 강타를 견뎌내는 모습이 더 멋진 법이지 스포츠에선. 아무튼 크로캅이 곤자가에게 하이킥을 맞고 쓰러진 이후로 아주 오래간만에 좋아하는 격투기 선수가 생겼다. 오늘의 날카로웠던 카운터 어퍼도 좋았고.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바다하리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그 형이 싸움은 제일 잘하는데.


2.

백수 생활의 낙은 역시 영화보기. 근래에 봤던 영화 중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송희일 감독의 <미행>이다. 국가적 재난에서 희생된 피해자의 부모가 산으로 숨어드는 이야기. 누구나 세월호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단 한 번도 세월호를 직접 명시하지 않는다. 굳이 사건을 직접 호명하고 감정을 이끌어내고 고통을 전시하면서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산으로 숨어든 이들, 숨어들 수밖에 없던 이들, 그 와중에 그들을 또 헤집고 발로차는 이들을 응시할 뿐이다. 


오늘에 이르러 예술이 세월호를 바라보는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답.


3.

근래들어 건강이 영 좋지 않다고 느끼는데, 어디가 딱 아픈 건 아니고 그냥 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는 정도. 아무래도 건강검진을 받고나서 더 그러는 것 같다. 혈압이 말도안되게 높이 측정되고 신장에 작은 용종이 있고.. 어쩌고 저쩌고. 사실 대단히 안좋은 결과는 아니다. 혈압은 다시 측정했을 때 꽤 정상치에 가깝게 나왔고 신장의 용종도 당장 걱정할 건 아니라는 의사소견이 있었다. 그보다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부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며칠을 공포감에 좀 떨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것.에 대한 공포같은 거다. 내가 내 몸을 컨트롤 할 수 없게 됐을 때, 무지막지한 돈이 들게 됐을 때, 내가 다 놔두고 떠나야 할 때, 어쩌면 졸라 아프게 떠나야 할 때. 갑자기. 


그런 생각들을 자꾸 하면서 막 잠도 설치고 그랬다. 형들은 한 살 씩 먹어가면서 이제 건강을 걱정할 나이가 돼가는 거라고 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암튼 불안함 때문이라도 좀 건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얘기를 되게 독한 담배피면서 술에 잔뜩 취한채 기름진 안주를 앞에 두고 했다. 아마난 안될거야.


4.

백수 생활이 길어지다보니 조급증이 나면서 웬 이상한 회사에 면접을 봤다. 영 마뜩치 않았지만 제시한 보수가 꽤 괜찮아서 그러려니 몇 년 살면서 또 다른 길을 고민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면접에서부터 사짜 꼰대 냄새가 풀풀 났지만 그런 걸 견디는 비용까지 포함된 게 괜찮은 보수라고 생각해 출근을 하기로 했는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와서는 "급여를 좀 내려서 와줄 수 없겠냐"고 하더라. 거의 절반 수준으로. 사람을 한 명 더 뽑아야 하는데 당장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당분간만 좀 이해해 달라면서. 그렇겐 안되겠다고 하니 열정, 희망, 미래.. 뭐 이런 말들을 뱉어내더라. 아니 아저씨 누굴 호구로 보시나요. 열정과 희망을 품고 열심히 하시라 말하고 끊었다. 세상엔 사기꾼이 너무 많다. 문제는 거기에 호구들이 자꾸 걸려드니 그런 놈들이 줄어들지 않는 거겠지. 아마 누군가는 같은 수작에 걸려들었을테다. 이 똥물에 튀겨죽일 놈들.


5.

요즘은 촛불집회에도 잘 나가지 않고 정치 이슈에서도 눈을 좀 떼려고 한다. 마음이 피폐해지는 것 같아서. 맨날 말로는 희망같은 단어를 주섬거리지만 희망의 부스러기, 끄트머리라도 잡기 어려운 탓이다. 대선 주자 몇 명을 지지하는 형태로, 누군가를 증오하고 배제하는 것으로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서 어쩔건데?'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도 없으니. 어쩌면 지금 해야 할 건 좀 거리를 둔 채 더 똑똑해지고 더 품이 넓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희망을 말할 수 있을 때, 내 삶의 지표를 그려낼 수 있을 때. 말은 침묵보다 의미있을 때나 뱉어야 한다.


6.

어떤 걸 들어도 도통 집중이 안된다. 예전엔 노동요로 스크리모 하드코어를 들었는데 무려. 찾다 찾다 보니 클래식을 듣게 됐는데, 이게 생각보다 쏠쏠한. 열심히 공부하면서 들으면 또 새롭겠다. 요즘 가장 즐겨듣는 건 길 사함과 외란 쉴셔가 연주한 파가니니.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친절한 연주. 서정적이고. 매끈하고.  


소나타 6번은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서 귀에 익었던 그 곡이다. 


6-1.

클래식 얘기를 하다보니. 근래 TV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건 팬텀싱어를 볼 때다. 노래 한 곡이 이렇게 사람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구나. 싶은 순간들. 주말 저녁 엄마와 팬텀싱어를 보면서 고훈정에 대한 사랑을 함께 고백하곤 했다. 공연하면 공연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