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휴가가 끝났다. 휴가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제와선 뭣이 일상이고 어디가 비일상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화장실 문고리와 늘어난 팬티 고무줄마저 낯설다.


2.

휴가 중엔 두 편의 영화를 봤다. <공범자들>과 <택시 운전사>.

'기자'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다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기자질을 똑바로 못하고 있어" 운운하며 자괴감을 가장해 내가 실은 기자임을 확인하거나 받으려는 뻔뻔한 마음도 아니고, "내가 뭐라고"라며 주억거리다 초라한 스스로를 다독이려는 빈궁한 마음도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을지문덕한 기분. <공범자들>을 보고 나와서 길바닥을 휘휘 걸어다니느라 애꿎은 주차비만 날렸다. 

직업, 밥벌이에 자긍심과 애정을 쏟는 일.에 대해 생각했고 노력과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했고, 그보다 더 거창한 단어들이나 훨씬 쪼잔한 말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 밤의 최고조는 아무도 나와 술을 마셔주지 않은 것이었다.


2-1.

<공범자들>엔 내가 콩알만하게 스쳐 나온다.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녀서 한 번에 알아봤다. 어떤 얼굴들, 아는 얼굴, 반가운

얼굴들이 스쳐나올 때마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고영주 아저씨가 배바지 입고 나오는 장면이 최고조로 흥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2-2.

모처럼 성당에 갔고, 이용마 선배가 쾌차하시길 기도했다.


3.

휴가의 본래 목적대로 검진을 받았고 예상한 결과를 받았다.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를 받으려고 그 돈지랄을 했나 싶어서 "역시 제 몸은 제가 제일 잘 아는군요"같은 개드립을 날리다가 살짝 혼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짜증이 좀 났고 그보단 사실 좀 무서웠다. 

사실 제일 큰 짜증은 내년이나 후년부터 적용될 거라는 엠알아이 의료보험이다. 돈 많이 벌어서 엠알아이 기계나 한 대 사고 싶다. 옛날에는 윤전기를 사고 싶었는데 말이야.


4.

일산으로 옮긴 스페이스 공감의 첫번째 공연을 다녀왔다. 예정은 크라잉넛과 로맨틱펀치의 합동공연이었지만 배인혁의 급환으로 크라잉넛의 단독공연이 됐다. 크라잉넛의 공연은 신났고 캡틴락은 여전히 철이 없었다. 크라잉넛은 22년째다. 오래가는 힘.에 감탄하다 크라잉 넛의 히트곡에 대해 생각했다. 인디씬에서 출발한 팀 중 대중적인 히트곡을 가장 많이 만든 팀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가장 본질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쳤다.

그 며칠 전에는 대중예술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부르지 않는 노래, 보지 않는 영화, 읽지 않는 만화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하는. 대중예술의 정수는 결국 대중성이냐는 질문. 그래도 <해운대>를 천만 관객이 본 건 납득할 수 없다. 퉤퉤퉤.


4-1.

일산으로 옮긴 공감은 접근성이 너무 떨어졌고 (주엽역에서 2km나 떨어져있다. 버스를 타야한다. 무려.) 공간 자체의 매력도 반감된 느낌이다. 무대와 객석의 거리감('감'이다. 실제 거리는 모르겠다.)이 더 벌어진 느낌인데, 그건 객석이 반원형이었던 매봉 공연장이랑은 다른 객석 모양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LED 화면이 생겼는데 어찌 쓰셔야 할지 아직 연구가 되지 않은 듯 보였고, 무엇보다 조명이 너무 후지다. 관객 한명한테 핀조명을 쏘고 레이저를 발사하고... 무대에다 하시라고요. 가뜩이나 짜친 조명. 지미집이 머리위를 붕붕 날아다니는 것도 여전히 싫다. 언제고 한번은 헤드샷 할 것 같아.


잔뜩 투덜거렸지만 암튼 그래도 백피디님 감사합니다. 


5.

김현아가 원두 한보따리를 사줬다. 테라로사에서 파는 원두 중에 가장 맛있는 거라면서. 목욕재계를 마치고 정성스럽게 갈아 성심껏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다. 커피를 제대로 내릴 줄 안다면 더 맛있겠지. 아니, 지금은 맛이 없다는 게 아니고. 암튼 공부를 해야한다.


6.

모처럼 고요서사에서 책을 샀다. 

고요서사에서 주워오는 책들은 대개 다 좋다.


++

...

뭉뚝한 연필, 가느다란 연필, 부러진 연필로

새벽의 어깨선을 열심히 그리던 시간들도 모두

모두 갖다 버렸다

버렸더니 살겠다

내가 나를 연기하며 

(시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연기를 하며)

그늘을 기억하는 일과

들어가 사는 일 사이에서 도르래를 굴리며

살 수는 있겠으나

...


-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박연준



6-1.

숨어있는 책에서는 이남덕 교수의 한국어 어원연구 전집을 주웠다. 옛날 얘기같은 걸 기대했는데, 만주어와 퉁구스어가 잔뜩이다. 차가 생겨서 좋은 점은 두껍고 무거운 책을 사서 싣고 올 수 있는 일이다. 고맙고 즐거운 일이다.


7.

엄마랑 같이 동두천에 있는 이모네 집에 갔다가 대리운전을 불러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잠들었고 대리기사 아저씨와 어색한 듯 수다를 떨었다. "15만킬로나 탄 것 치고는 진동이 없고 소음이 적어요", "앞유리에 유막 제거를 해야겠네요" 같은 얘기들과, 본업은 덤프트럭 운전이지만 일거리가 너무 줄어 지난 주부터 대리운전 알바를 시작했다는 얘기, 그래서 하루에 3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한다는 얘기, 아직 초보라 대리기사 셔틀도 이용할 줄 몰라 그제 밤엔 10km나 걸어야 했다는 얘기. 

도착할 무렵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산이랑 같이 만원짜리 한 장을 더 줬다. 그게 뭐라고 나도 한참을 쭈뼛거렸고 그 아저씨도 한참을 쭈뼛거리다가 돈을 받았다. 자는 줄 알았던 엄마는 뒷자석에서 하는 얘기들을 다 듣고 있었고, 잘했다고, 내가 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주려했다고 말했다. 엄마랑 나는 돈을 주는 것 말고는 감사와 위로, 격려를 전할 방법이 없는 것이 좀 속상하다고 생각했고, 돈을 주는 것 이상의 격려가 어디있겠냐고 말했다. 부쩍 고단해져서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비오는 데 차에 창문이 열려있는 것도 모르고. 덕분에 침수차량이 됐다.


8.

잠을 자야겠다. 상경하기 전에 침대 시트를 갈아놓고 간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내일은 또 뭐 살아지겠지. 새 시트에서 잤으니 새 날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