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달에 대한 사랑고백

 

1.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말에 한달음에 필름포럼으로 갔다. 그 땐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 맨 위층에 있었다. 옥상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오늘 볼 영화 포스터를 봤는데, 왠 사내놈들 둘이 홀랑 벗고 누워있는 거 아닌가. <후회하지 않아>였다. 그 때 그렇게 말했다. 그들을 차별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권장하지는 않는다고. 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는 건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지금 생각하니 참 지랄같은 말이었는데, 저 부끄러운 얘기들을 이제 지랄맞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후회하지 않아>덕분이다. <후회하지 않아>를 추천했던 선배누나는 이후에도 여성영화제엘 데려가고 종종 퀴어영화를 추천해줬다. 그 영화들, 그 영화들을 보고 나와 떨었던 수다들이 켜켜이 쌓이며 호모포비아는 조금씩 치료됐던 것 같다. ‘마음의 준비라니. 진짜 지랄맞네. 부끄럽기 그지없다.

 

2.

핸드폰 액정 메인화면에 적어둔 문장을 바꿨다. 그 때까진 수 년간 우리민족끼리였는데. <애국자 게임>을 보고난 다음이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도서관에 가 책을 잔뜩 빌렸다. 이것 저것. 학교에서 선배들한테 받은 책들도 다시 꺼내 읽었다. 헌책방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종이가 누렇게 바랜 책들을 읽었다. <애국자 게임>을 보고 핸드폰의 문구를 바꾸기까지 1년 반 남짓이 걸린 것 같다. 그렇지만 핸드폰의 문장을 바꾼 건 <애국자 게임>을 보고난 다음이다.

 

3.

세상은 그들을 대척점에 놓고 대비시켜왔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면에선 같은 편이다. 야만의 땅에 내몰려졌다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상황은 달랐지만 그들에게 역할과 상황을 준 이는 같았다. 그리고 그가 아마 이 스릴러의 살인마, 끝판 왕.”

 

<두 개의 문>이 개봉했을 때 이런 문장이 들어간 리뷰기사를 썼다. 기사의 야마는 경찰과 철거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에서 탈피해 관객 스스로 시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두 개의 문 중에서. 고백하건대 그 기사는 리뷰보다는 차라리 반성문에 가까웠다. 증오와 적대로 알리바이를 마련하려던 비겁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4.

영화를 보고나면 때때로 그런 순간들이 있다. 뒷골이 시큰하거나, 가슴이 답답한. 무언가를 막 적고 싶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마구 떠들고 싶은. 새로운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좋은 영화란 내게 새로운 질문을 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폭력, 사랑, , 나이듦, 가난, 연민, 착취, 노래, 예술. 뭐 그런 것들. 무엇이든 우리가 딛고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에 대해. 인간적 삶의 복원에 대해. 좋은 영화와 좋은 책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우리의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끌어주는 신박한 상상력이고 노련한 길잡이다.

 

5.

<애국자 게임><두 개의 문>은 시네마 달에서 만든 영화다. (<후회하지 않아>는 아니다. 하지만 이후에 찍은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시네마 달이 제작했으니까, 대충 넘어가자.) 말이 너무 길어질까 적지 않았지만 <레드마리아>, <상계동 올림픽>, <버스를 타자>, <거미의 땅>, <송환>, <노라노> 등등등. 등등등. 내 삶을 조금씩 변화시켜온 시네마 달의 영화들은 많다.

 

이건 그저 시네마 달의 영화를 좋아하고 시네마 달의 영화들을 삶에 덕지덕지 붙여 온 팬의 팬심 고백 같은 거다. 시네마 달의 영화가 없었다면 단언컨대 내 삶은 지금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을 거다. 분명히.

 

6.

시네마 달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블랙리스트, 지원배제 뭐 이런 말들이 등장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로 시네마 달을 지켜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나로선 시네마 달이 사라지면 좋은 영화를 만나게 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게 될 거란 아쉬움이 가장 크다. 시네마 달의 영화들은 대부분’ (사실 별로 안좋아했던 영화들도 좀 있다..)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책을 읽게 했고 수다를 떨게 했고 술을 마시게 했고.

 

다행히 나처럼 시네마 달과 시네마 달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네마 달을 지켜내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스토리 펀딩도 이어지고 영화 상영회도 한다. 스토리펀딩은 한겨레 21의 인터뷰와 박주민 의원의 글이 연재 됐더라. 모두 시네마 달에 대한 애정과 고운마음이 잘 보이는 좋은 글들이었다. 없는 형편에 조금 후원도 했다.

 

다들 자기 재주를 보태 시네마 달을 지켜내겠다고 나섰으니 나도 내 재주를 보태야겠다. 내 재주가 별거 있나. 영화보고 술 먹는 거지. 주말엔 인디스페이스에서 영화를 봐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시네마 달이 지금껏 만들어온 영화들에 고마움을 고백하고 앞으로도 계속해 만들 영화들을 응원하는 일.


 



+

혹시 주말에 인디스페이스에 가실 분이 계시다면. 추천 영화는 <투 올드 힙합 키즈><그림자들의 섬>, <잡식가족의 딜레마>. 특히 <투 올드 힙합 키즈>엔 어느새 스타가 되어 무려 해피투게더와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지조가 나옵니다. 무려 주인공.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