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눈을 뜨자마자 티비 앞에 앉아서 정찬성의 복귀전을 기다렸다. 12시부터 시작하는 이벤트의 메인이벤터로 나온다는데 경기시간이 다 제각각이니 언제 시작하는지 알 수가 있나. 다 보면서 기다려야지.


격투기를 좋아하지만 좋아한대봤자 K-1과 프라이드를 좋아했던 거여서 프라이드가 망하고 UFC가 대세가 된 이후엔 격투기를 잘 보지 않았다. 링 위에서 '무도'를 하는 것 같았던 K-1이나 프라이드와는 달리 옥타곤의 철망에 사람을 몰아놓고 피를 튀기며 두들겨패는 UFC는 영 체질에 맞질 않았다. 아기자기했던 일본의 퍼포먼스와 스토리에 비해 '완전미국'이라고 써놓은 것 같은 퍼포먼스도 취향엔 안맞았고. 그러다 정찬성의 등장 이후로 UFC를 좀 보게 됐는데, 좀비라는 별명처럼 근성으로 승부하는 플레이를 좋아한다. 


UFC 4전만에 치른 타이틀 매치에서 어깨뼈가 탈구됐음에도 끝까지 해내려던 모습이 좋았다. 전설의 강타보단 그 강타를 견뎌내는 모습이 더 멋진 법이지 스포츠에선. 아무튼 크로캅이 곤자가에게 하이킥을 맞고 쓰러진 이후로 아주 오래간만에 좋아하는 격투기 선수가 생겼다. 오늘의 날카로웠던 카운터 어퍼도 좋았고.


그나저나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바다하리는 지금 어디서 뭘하고 있는지. 그 형이 싸움은 제일 잘하는데.


2.

백수 생활의 낙은 역시 영화보기. 근래에 봤던 영화 중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송희일 감독의 <미행>이다. 국가적 재난에서 희생된 피해자의 부모가 산으로 숨어드는 이야기. 누구나 세월호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는 단 한 번도 세월호를 직접 명시하지 않는다. 굳이 사건을 직접 호명하고 감정을 이끌어내고 고통을 전시하면서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산으로 숨어든 이들, 숨어들 수밖에 없던 이들, 그 와중에 그들을 또 헤집고 발로차는 이들을 응시할 뿐이다. 


오늘에 이르러 예술이 세월호를 바라보는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답.


3.

근래들어 건강이 영 좋지 않다고 느끼는데, 어디가 딱 아픈 건 아니고 그냥 늘 컨디션이 좋지 않다.. 는 정도. 아무래도 건강검진을 받고나서 더 그러는 것 같다. 혈압이 말도안되게 높이 측정되고 신장에 작은 용종이 있고.. 어쩌고 저쩌고. 사실 대단히 안좋은 결과는 아니다. 혈압은 다시 측정했을 때 꽤 정상치에 가깝게 나왔고 신장의 용종도 당장 걱정할 건 아니라는 의사소견이 있었다. 그보다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부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며칠을 공포감에 좀 떨었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것.에 대한 공포같은 거다. 내가 내 몸을 컨트롤 할 수 없게 됐을 때, 무지막지한 돈이 들게 됐을 때, 내가 다 놔두고 떠나야 할 때, 어쩌면 졸라 아프게 떠나야 할 때. 갑자기. 


그런 생각들을 자꾸 하면서 막 잠도 설치고 그랬다. 형들은 한 살 씩 먹어가면서 이제 건강을 걱정할 나이가 돼가는 거라고 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암튼 불안함 때문이라도 좀 건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얘기를 되게 독한 담배피면서 술에 잔뜩 취한채 기름진 안주를 앞에 두고 했다. 아마난 안될거야.


4.

백수 생활이 길어지다보니 조급증이 나면서 웬 이상한 회사에 면접을 봤다. 영 마뜩치 않았지만 제시한 보수가 꽤 괜찮아서 그러려니 몇 년 살면서 또 다른 길을 고민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면접에서부터 사짜 꼰대 냄새가 풀풀 났지만 그런 걸 견디는 비용까지 포함된 게 괜찮은 보수라고 생각해 출근을 하기로 했는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와서는 "급여를 좀 내려서 와줄 수 없겠냐"고 하더라. 거의 절반 수준으로. 사람을 한 명 더 뽑아야 하는데 당장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당분간만 좀 이해해 달라면서. 그렇겐 안되겠다고 하니 열정, 희망, 미래.. 뭐 이런 말들을 뱉어내더라. 아니 아저씨 누굴 호구로 보시나요. 열정과 희망을 품고 열심히 하시라 말하고 끊었다. 세상엔 사기꾼이 너무 많다. 문제는 거기에 호구들이 자꾸 걸려드니 그런 놈들이 줄어들지 않는 거겠지. 아마 누군가는 같은 수작에 걸려들었을테다. 이 똥물에 튀겨죽일 놈들.


5.

요즘은 촛불집회에도 잘 나가지 않고 정치 이슈에서도 눈을 좀 떼려고 한다. 마음이 피폐해지는 것 같아서. 맨날 말로는 희망같은 단어를 주섬거리지만 희망의 부스러기, 끄트머리라도 잡기 어려운 탓이다. 대선 주자 몇 명을 지지하는 형태로, 누군가를 증오하고 배제하는 것으로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서 어쩔건데?'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도 없으니. 어쩌면 지금 해야 할 건 좀 거리를 둔 채 더 똑똑해지고 더 품이 넓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희망을 말할 수 있을 때, 내 삶의 지표를 그려낼 수 있을 때. 말은 침묵보다 의미있을 때나 뱉어야 한다.


6.

어떤 걸 들어도 도통 집중이 안된다. 예전엔 노동요로 스크리모 하드코어를 들었는데 무려. 찾다 찾다 보니 클래식을 듣게 됐는데, 이게 생각보다 쏠쏠한. 열심히 공부하면서 들으면 또 새롭겠다. 요즘 가장 즐겨듣는 건 길 사함과 외란 쉴셔가 연주한 파가니니.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친절한 연주. 서정적이고. 매끈하고.  


소나타 6번은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면서 귀에 익었던 그 곡이다. 


6-1.

클래식 얘기를 하다보니. 근래 TV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건 팬텀싱어를 볼 때다. 노래 한 곡이 이렇게 사람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구나. 싶은 순간들. 주말 저녁 엄마와 팬텀싱어를 보면서 고훈정에 대한 사랑을 함께 고백하곤 했다. 공연하면 공연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