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김태용 감독의 <여교사>를 봤다. 영화를 다 보고 크레딧에 오른 감독의 땡스 투에 '김태용'이 있는 걸 보고서야 알았다. '아, 이 김태용이 그 김태용이 아니구나' 어쩐지 영화 보는 내내 이상하더라니. 

1-1. 
<여교사>는 꽤 괜찮은 영화지만 아쉬운 지점들이 종종 있었다. 일테면 김하늘의 복수가 너무 단순하고 짜친 것. 그녀의 질투와 증오, 단념, 삶의 무게, 집착 이런 것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는데 영화는 너무 손쉽게 이걸 해소해버린다. 하지만 가난하고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나이든 여자가 돈많고 예쁘고 다 가져서 나쁠 필요도 없는 애한테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게 그런 거 말곤 없는 것도 사실이지 뭐. 이 김태용 감독의 전작 <거인>도 좋아하는데 감독은 계급간에 발생하는 어쩔 수 없어서 미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짜증나고 보기싫지만 몰입할 수밖에 없다. 내가 흙수저라 그렇지 뭐. 어쩔 수 없다. 

1-2. 
<거인>에서 최우식은 정말 신의 한 수 였다. 하지만 이번엔 배우들이 좀... 김하늘은 늘 뭔가 아쉽고, 유인영은 '늘'이라고 말할만큼 뭘 본 것도 없다. 연기는 엄청 구리다. 몸매는 엄청 예쁨. 깜짝 놀랐다. 중간에 곽동연이 잠깐 나온다. 찌질한 고삐리로 나오는데 잠깐이지만 얘가 제일 눈에 띄는 배우. 김하늘도 이 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설행에 나왔던 임화영도 알게모르게 계속 눈에 띄는. 

1-3. 
2016년부터 여성의 영화가 강세라고 생각했다. <비밀은 없다>나 <우리들>, <미씽>까지. <여교사>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여성이 성적 욕망의 주체, 특히 롤리타 욕망의 주체로 나서는 지점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의 성역할을 뒤집어 놓은 셈이다. 일종의 전복. (영화는 알게모르게 계속 이런저런 전복을 시도한다.) 다만 언급했던 다른 영화들과 달리 남성 감독의 영화라 그런지 여성의 욕망은 그저 남성에 의해 대상화된 연민의 시점에 그친다. 특히 유인영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한데, 난 김하늘을 비롯해 타자들이 걔를 보는 시각 말고 걔의 진짜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보여주지도 않고. 그런 건 유인영 때문은 아닐 거다. 

2. 
며칠 전에 모친이 만취한 상태로 귀가해서는 "노무현은 아무래도 타살당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나는 "당시에 그런 의혹도 있지만 대부분 의혹수준에서 멈췄고 나로서는 명백히 자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사회적 타살'이니 하는 얘기를 하기엔 모친이 너무 취해있었다.) 하지만 모친께서 주장하시길, 당신은 그날 새벽 우연히 라디오를 들었는데 "당시 라디오에선 전 대통령이 타살로 죽었다고 보도하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자살로 보도내용을 바꿨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고 그날의 보도들과 지난 방송까지 찾아가며 보여드렸건만 모친께선 "기자라더니 헛똑똑"이라 일갈하시며 "모두 날조되고 조작됐다"고 강하게 주장하시었다. 당장 이에 대해 취재하라고도 말씀하시.... 암튼 그래서 얼른 어디든 취직해서 이거부터 취재해야하나 싶다. 내가 엄마 말 잘듣는 착한 아들이다. 

2-1. 
만취한 모친과의 황당한 에피소드로 웃어 넘길 수는 없는 게, 암시가 주는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하고 있다. 가끔 모친은 동창이나 동네 아주머니들과의 단체 카톡방을 보여주는데, 거기엔 이런 음모론이나 선동이 늘 넘쳐난다. 좌우보혁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노무현의 죽음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던 우리 모친이 그랬던 것처럼 저마다 자기의 마음 속 무언가를 건드리는 그 이야기들에 격하게 반응한다. 쿼어퍼레이드 때, 호모들이 사탄의 나라를 만들려 서울을 점령했다는 메시지도 봤다. 그런 암시에 걸려들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이성의 영역은 사라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사실 사람을 움직이고 설득하는 데 좋은 건 논리나 이성보다는 정념이다. SNS는 일반화 되고 정보접근 창구가 그로 단일화되는 세대가 늘어나면서 거긴 괴벨스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 같다. 

3. 
동네 카페에 앉아있는데 옆 자리에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이는 남자 애와 엄마가 앉았다.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데 여념없는 남자 애는 오전 중에 2군데의 학원을 마치고 온 모양이다. 엄마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주고 3번째 학원 학원버스가 오기를 함께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자는 딜을 시작했다. 축구교실에 다니고 싶다는 아이에게 엄마는 거래조건으로 또다른 학원을 내밀었다. 아이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뭔가를 사달라고 했고 (잘은 알 수 없지만 게임기 이름 같았..) 엄마는 세부 모델명과 용량을 역으로 제시하며 가격을 인하해 수용했다. 사교육계의 임상옥, 육아계의 김만덕을 본 기분이다. 이곳은 개성인가요 베니스인가요. 

4. 
<로그 원>이 개봉하고 주변에 거기 열광하는 덕들이 종종 눈에 띈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하나도 보지 않은 나로서는 데면데면하다. 사실 스타워즈 뿐 아니라 허리우드의 '시리즈'들에 다 시큰둥한 편이다. 세계관을 끊임없이 늘려가는 마블의 히어로물도 작년쯤에야 가까스로 시작했고,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심지어 해리포터 시리즈도 안봤다. 이쯤되니 주변에서 무식하다고 하도 성화라 뒤늦게야 공부하듯이 몰아서 본다. 007을 며칠에 걸쳐 처음부터 가까스로 정주행했고, 미션 임파서블도 마찬가지로 시간들여 깜지쓰듯 정주행했다. 그렇지만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본 시리즈가 하나 있는 데 '오션스' 시리즈다. 오션스 시리즈의 미덕은 밤새도록 떠들어댈 수도 있을텐데. 방바닥 뒹굴며 나초에 치즈찍어 먹으며 오션스 트웰브를 보는 게 주말을 보내는 가장 완벽한 방법 중 하나다. 러스티 형 짱짱맨. 암튼 버니 맥 아저씨가 죽고 더이상은 오션스 시리즈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안타까웠는데 새로운 오션스 시리즈가 나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오션스 8> 대니 오션의 동생이 이끄는 여성 사기단 이야기라는데 캐스팅이 어마어마하다. 산드라블록과 헬레나 본햄 커터, 앤 해서웨이에 다코타 패닝, 케이트 블란챗도 나온다. 아, 리한나도. 세상을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또 이렇게 하나 늘었다. 

5. 
역시 해야할 일이 있으면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진다. '이제 그만하고 집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탁기 안의 빨래도 널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마 난 안될 거야... 벌써 아홉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