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8 서촌 - 안주마을



그 날은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싶었다. 백수생활이 길어지면서 주머니는 하염없이 가벼워졌고, 가벼운 주머니를 핑계로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있었다. 공부는 영 되질 않았고 책을 읽어도 눈에 들지 않았다. 찌는 것처럼 더운 여름에 집에는 에어컨도 없었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날.

점심 나절이 지날쯤부터 전화통을 들고 여기저기 찔러보기 시작했다. 누구는 야근이라고 했고, 누구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누구는 선약이 있다고 했다. 온갖 곳에서 다 퇴짜를 맞고 우울함이 더 차올라 있을 때, 동거남은 날 안쓰러운 듯이 쳐다보면서 술 마시러 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미 잡쳐버린 기분, 우울함의 끝에서 술이 넘어갈까…는 커녕 좋다고 쫄레쫄레 따라나서 서촌의 안주마을로 향했다. 안주마을에선 언제, 누구와, 어떤 상황이라도 맛있고 재밌게 술을 마실 수 있다. 짜증날 땐 짜장면, 우울할 땐 안주마을.


# 알콜 코뮨

안주마을에 들어서면 일단 육회와 카스처럼을 시킨다. 육회는 마장동 축산시장 어느 집보다도 안주마을 육회가 더 좋다. (솔직히 진짜 그정도는 아니고..ㅎ 접근성 좋은 서울 한복판에서 먹기에 충분히 맛있는 정도) 육회를 다 먹고나면 소주 안주로 적합한 음식들과 맥주 안주로 더 좋은 음식들을 모두 먹어야 하는데 그 때마다 주종을 바꿀 수 없으니 소맥을 말아 먹는 게 베스트다. 이곳은 타협과 절충의 안주마을. 술자리의 민주주의 공동체. 알콜 코뮨.

육회와 카스처럼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낮에 술마시자고 전화했을때 퇴짜를 놓은 이들이다. 바쁘다던 그놈은 일을 미뤘으니 술을 마시자고 했다. 선약이 있다던 누나는 잠깐이라도 들리겠단다. 이 와중에 내가 연락도 하지 않았던 놈한테마저 전화가 왔다. 술 마시자고. 졸지에 서로 생면부지인 사람들 6명이 버름하게 마주보고 앉았다. 아직 육회 한접시를 다 비우기도 전에. (심지어 한 놈은 자기 학교 후배를 데려왔다. 걔는 무슨 죄야.)

어색하고 버름한 술자리를 예상했지만 그날은 생각보다 훨씬 유쾌하고 즐거운 자리가 됐다. 각자 좋아하는 안주를 끊임없이 시켰고 대부분의 안주가 맛있었다. 안주마을의 미덕이다. 다양한 안주들을 모두 준수하게 내어놓는 것. 소주안주와 맥주안주, 육류와 생선, 탕과 마른안주까지 대중없어 보이는 그것들을 다 그럭저럭 괜찮게 자리에 두는 것, 그것들이 썩 어울려 보이게 하는 것.

그날 불려나온 이들의 면면도 그랬다. 한 명은 나와 같이 사는 내 대학 선배였고, 한 명은 고시생활에 코가 꿰인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대학 동기와 평범하지 않은 직장에 다니는 선배 누나도 있었다. 동창 놈에게 끌려나온 학교후배, 불쌍한 그 아이도 있었지. 아무튼 이들은 다 서로가 생면부지인 사이였다. 그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실 이들은 마른안주와 간재미회무침과 치즈샐러드가 한 테이블에 있는 것처럼 어색한 조합이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와 삶의 궤적과 영역은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음주취향과 식성, 술자리에서의 습성마저도 상이하다. 그래서 이들이 한데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내심 흥미진진 기대하는 마음이 반, 지독히 어색하고 지루한 몇 시간을 보낸 뒤 아무런 재미도 성과도 없이 헤어지게 될거란 두려움이 반이었다. 그 날 그 자리가 유쾌했던 건 전적으로 안주마을의 매력 덕분이었다.

안주마을에서 어떤 안주가 가장 맛있냐고 물으면 뭐 하나를 집어내지 못하고 “다 그럭저럭 맛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준비된 대부분의 음식이 그냥 그럭저럭 맛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좋아하는 안주 하나쯤은 주문이 가능하고 누군가에겐 생소할 음식도 걱정없이 권할 수 있을 정도의 맛이다. 그래서 그날은 마치 포트럭 파티 같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씩 시킬 때마다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면서 음식을 권하고 나누는. 생면부지의 삶이 한 테이블에서 뒤섞였지만 그래도 저마다의 사람과 삶이 적당히 어울리는. 대중없어 보이는 삶과 음식들이 그자리에 적당히 괜찮게 어우러지는. 사실 살며 한 번 섞일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잠시간 앉아서 벽과 차이 없이 머물를 수 있는. (물론 술은 계속 소맥이었다. 소맥이야 말로 음주문화의 헬레니즘 알콜코뮨의 이데올로그.)  




# 좁지만 좁지 않은 정신과 시간의 방

원래 워낙에 장사가 잘되고 손님이 많은 집이지만 요 몇년새 서촌이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하는 바람에 안주마을은 사람이 미어터진다. 주말 저녁에는 2~30분 웨이팅이 기본이다. 가뜩이나 좁은 가게에 사람들마저 흘러 넘치니 테이블 사이 간격도 매우 좁다. 나같은 경우 화장실 한 번 가려고 일어설 때마다 좌우 양 옆 테이블이 모두 움직여줘야 한다.

신기한 건 그렇게 밀집되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묘하게 방해받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거다. 옆 테이블이 소란스러워 우리가 방해를 받는 것 같지도. 누가 들을까 염려해 우리 일행이 목소리를 줄이거나 조심스러워 하게 되지도 않는다. 왜 대학가의 거대한 프랜차이즈 술집에서는 조금만 시끄러워도 내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술을 코로 마시는지 아이폰을 앞접시 삼아 라면을 떠먹는지도 모르게 되는데 말이야.

그 이유가 뭘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모두를 다 뒤섞여버리는 그 느낌,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해봤다. 옆테이블과 우리 테이블의 이질감 같은 게 잘 없으니까. 그러니까 경계하거나 방해받는 느낌을 받을 이유도 없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 추천안주는 없습니다. 다 맛있어요.

그 날 우리가 먹은 안주는 육회와 간재미 회무침, 삼치구이와 알탕, 감자전, 계란말이, 라면 등등등. 등등등. 정확히는 기억이 안난다. 술값만 25만원이 넘게 나왔던 것만 간신히 기억이.. 그 날 그들 모두를 에어컨도 없는 우리집으로 끌고가서 술을 더 먹었는데, 처음엔 없었던 어색함이 뒤늦게 밀려들어 금방 파했던 것도 간신히 기억난다.

역시 즐거움의 공은 모두 안주마을에 있다. 거길 벗어나면 다 사라지고 말아요.

어색한 누구와 술을 마셔야 한다면 안주마을로 가세요. 뭐가 맛있냐고는 묻지 마시고.
개인적으로 전 청어알젓이 좋다는 팁만.



1. 주말엔 자리 없습니다. 웨이팅 걸어놓고 옆에 봉구비어가서 맥주마시면서 기다리세요.
1-1. 일찌감치 한 명을 희생양으로 보내서 자리를 맡아놓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2. 한라산을 팝니다.

3. 사진은 이번에도 다 훔쳐온 사진입니다. 언제쯤 제가 술보다 먼저 카메라를 신경쓰게 될까요. 


4. 브금은 한대수 아저씨의 '하루아침'. 소주나 한 잔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