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들국화 1집 중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다. 조덕환 아저씨가 만든. 들국화가 재결합 할 때 곧 조덕환 아저씨도 다시 합류할 거라고 아저씨들이 그랬었는데... 조덕환 아저씨는 들국화가 다시 재결합하면 앨범에 실으려고 'Long may you run'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들국화는 없다. 그 노래는 조덕환 아저씨의 새 싱글에 실렸다.

노래는 끝나고 사람을 죽게 마련이다. 들국화의 노래는 이제 과거에 있으니까 하염없이 좋아지기만 할거다. 너무 좋아만 하다가 노래가 낡고 녹슬지 않도록 경계 해야겠다. 그리고 또 다음 노래를. 전인권 아저씨는 밴드를 새로 시작했고 최성원 아저씨는 라디오 DJ가 됐다. 또, 다시, 계속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나이따위야 상관없이. 나이들어도 낡지 않고, 머물러도 녹슬지 않는 삶. 또 새로이 살아야지. 계속 계속 살아야지.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2.
저녁엔 강변북로를 지나는데 한강과 남산 너머로 막 석양이 지고 있었다. 보라색도 아닌 것이 자주빛도 아닌 것이. 무협지에선 그런 광경을 보고 영감을 얻으면 막 무공을 새로 창안하기도 한다. '자하신공' 뭐 이런 거.ㅋ 여튼 그 색깔이 하도 신기하고 예뻐서 핸드폰을 꺼내서 찍으려다가 화면에 담긴 색을 보고 관둬버렸다. 그 색이 아니잖아. 카메라에 찍겠다고 바둥거릴 시간에 잠깐이라도 더 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그래도 그 광경을 남겨놓고 싶다는 욕심이 계속 들었는데, 문득 그래서 사람들은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계덩어리 아니라 마음에 담긴 건, 기계덩어리 아니라 마음으로만 건드릴 수 있는 법이다.

3.
알파고에 대해 얘기하다가. 이세돌이 했던 말 중에 가장 멋있었던 건 "바둑의 낭만을 지킬 것"이라고 했던 그 말. 인공지능과 컴퓨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낼 것이다. 아마 곧.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지켜내며 기계따위는 범접할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말하지만 사실 사람들도 진짜 그 바닥의 감정을 겪어봤는지 그걸 흉내내는 건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구나 다 기형도와 김현식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도 그렇고. 그럴 때 떠오르는 말이 낭만이다. 사람인 우리가 합리와 원칙, 이성의 완성에서 지켜낼 수 있는 건 고작 '낭만'이다. 합리와 이성, 그리고 예술과 고뇌 같은 양 극단의 것들 말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 굳이 치밀하거나 아름답지 않을 수 있는. 낭만의 의미가 무언지는 각자 생각하자고요. 낭만적으로다가.ㅋ 그래서 오늘의 장래희망도 낭만의 화신입니다.

4.
지난 번 절에 갔을 때 얻어온 곤드레를 넣고 밥을 지었다. 그 김에 냉이와 쑥, 참나물을 사다 무치고 모시조개와 냉이를 넣고 국도 끓였다. 시장에서 괜히 기분을 내고 싶어서 나물값을 깎아달라고 졸랐는데, 정색한 아줌마한테 덩칫값 못한다고 혼났다. 덩치와 나물값이 무슨 상관인가요. 하지만 기분좋은 밥상. 봄은 밥상머리에서 온다.

5.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기만책이라고 단정했다.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문화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이라는. 그는 결국 즐거움이 체념을 부추길 것이고 체념은 다시 즐거움으로 잊힐 것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현대 자본주의의 개성은 다 사이비라고도 했다.

하지만 벤야민이 그랬다.
"어느 여름날 한낮에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한순간 이들 현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쉬는 것이다."

똑똑하고 잘난 아도르노 같은 형들의 얘기에 사실 더 눈이 가고 수긍하게 되지만 벤야민과 같은 세계에 살고 싶다.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는 삶.

프로듀스 101을 보다가 그 처절한 대중기만의 현장에서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그래도 김세정이 짱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