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 이 대책없는 낭만에 대한


솔직함이나 진심. 같은 말들을 좋아한다.
사람이나, 사랑, 관계. 같은 말도 물론이다.
하지만 그런걸 사실 잘 믿지는 못한다.

감정이 움직이는 그대로. 를 꿈꾸지만 사실 난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감정. 을 더 믿는 편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걸 부정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다만 아직. 이라는 거지.
그래서 이 대책없이 낭만적이고 우직하게 순박한 영화가 좋았다.
마음이 움직이고, 결국 다시 삶을 살아가는 순간들이 반짝거리던.




버스를 타고 시애틀로 향하던 애나의 눈은 무관심보단 어쩌면 두려움에 가깝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무관심을 어떤 의지도 욕망도 없음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모든게 두려운게 아닐까. 하는.
상처가 크면 딱지도 크니까.

이런 생각은 영화가 한참 지나고 그녀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할때 더 확실해졌다. 그녀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더 세상을, 사람을, 또 자신의 삶을 동여매고 있구나. 그 안에 박제시켜 놓았구나. 다시 죽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었구나. 하는 생각들.


시간이 지나며 애나와 훈이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이 달라지고, 조금씩 자기 밖으로 나오던 애나가 사랑스런 춤을 상상하고, 마침내 눈물을 쏟으며 소리지를 때. 서로가 서로를, 마음이 마음을, 만남이 관계를 또 삶을 변화시킬거라는 이 대책없는 낭만이 스크린에 나타난다. 

영화를 볼 땐 대사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대사보단 애나의 얼굴, 그러니까 표정에 무게가 실린다. 그녀는 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표정이 자기를 지켜줄거라는 듯이. 그러다 한번씩, 범퍼카에서 달리면서 훈의 말도 안되는 대답에 피식거리며, 유령관광온 관광객들에게 놀라며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관계(들)은 변한다.

영화는 대책없이 낭만적이다. 3일의 외출동안 만난 남자와의 관계(그게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가 죽어있던 그녀를 깨운다. (훈이 애나에게 굳이 시계를 주는 이유는 그녀에게 멈춘 시간을 건네주는 의미일까) 무튼 시간이든 마음이든 감정이든 죽어 멈춰 있던 그녀를 깨워 변화시키는건 관계, 사랑, 사람. 이라는 그런 낭만.

난 낭만을 동경하지만 동경은 이해의 반대말이니까. 갖고 싶지만 정체도 모르는 것.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모두의 자유. 관계와 감정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건 그대로 건강하고 성실한 삶.

다만 헛갈리지는 말자. 모든 관계가 이처럼 낭만적일리도 또 당신을 살게하지도 않을테니.
다만 보지 못했어도 희망을 버리지도 말자.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을. 그 찰라의 소중함이란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아름답고 짜릿하니까.


덧,
탕웨이는 아름답다.
좋은 연기를 찾고 싶다고, 어쩌면 연기는 그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는 인터뷰를 봤더니 더 아름답다.

덧2,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을 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왠지 뜬금없게.


버스, 정류장 -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들





# 이제 만날 때가 됐다는 듯이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개봉 당시였다. 분당 총알이 400발 이상씩 소모되고, 핵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한번쯤은 있으며, 도시 전체(보통 LA나 NY)를 날려버릴 양의 액체폭탄에 대한 걱정으로 불철주야 피 흘리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헐리우드 영화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그 홍수에 화답하듯 그런 영화들에 열광하는 친구들과 몰려 다니던 시절이었다. 있어 보이는 척이 주고 일켠에 또 다른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였던 취향 덕에 일단 지루해 보이고 친구들은 혹평을 평론가는 호평을 던질 것 같은 영화들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이 영화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나서 젠체하며 "나쁘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그 순간의 우쭐함을 만끽하곤 이내 잊어버린 그 영화들 중 하나.

이 영화를 다시 만난건 지난 봄이었다. 2010년의 봄.
언젠가 2010년을 정의한다면 '무의미'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을 친구에게 했었다. 정말 그즈음의 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무의미한 허송세월인줄을 알면서도 어떤 것도 하지 않는 무의미. 의미 없는 게으름. 집 밖은 커녕 방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다. 전화는 받지 않다가 이내 끊어버렸고(사실 끊겨버렸고) 귀찮아서 밥도 안먹었다. 담배도 잘 안폈다. 그 와중에 가지 않는 시간을 떼우려 영화들을 몇 편 다운 받아 보곤 했는데 그 안에 있었다.
정말, 이제 만날 때가 됐다는 듯이.

난 내가 아주 웃겼다. 생각해보면 대단한 고민거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치열한 삶의 반동에 따른 은둔도 아니었다.  내가 아주 못나고 게으른 놈이란 자괴감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했지만, 정작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말해보라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은둔을 즐기기도 했다. 별 말은 안하셨지만 가끔 걱정스런 눈길을 보내던 엄마나, 밖으로 끌어내 보겠다고 야구티켓에 내 코드의 술집까지 찾아놨다는 친구들의 관심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관심을 받고 싶었던 유아기적 외로움과 투정이었을까. 그래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라고 물으면 글쎄, 만사 귀찮아서. 가 가장 근거있겠다. 무엇도 명확한 이유가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외로움만은 진짜였다.
그러다 이 외로운 사람들의 영화를 봤다. 이제 만날 때가 됐다는 듯이.





# 그 외로운 사람들
재섭은 핸드폰을 사지 않는다. 여전히 삐삐를 들고 다니지만 정작 누구와 연락을 주고 받지는 않는다. 관계를 유지해 나갈 의사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누군가 삐삐를 쳐주길, 누군가 다시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철학이니 역사니 정통이니 하는 말들을 제법 지껄일 줄 알던 그는 세상의 루저다. 차 한대 살 여력도 마땅치 않고 어둔 골방에서 의미 없는 소설이나 끼적이는 동네 학원 강사.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을 하찮게 여긴(여기려고 한)다. 시를 모르는 것들, 대화가 되지 않는 것들, 속물들. 친구들에게 컴플렉스를 운운하던 그의 말은 허세이기도 하지만 진심이기도 하다.


소희는 진실을 믿지 못한다. "진실은 곧 거짓"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도 사실은 거짓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진실된 말과 관계를 희구한다. 사는게 무슨 의미냐던 그녀는 친구의 죽음을 아파한다. 어쩌면 그녀는 영화를 보러가자던 원조교재 상대에게조차 진실된 관계를 그리워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여관이나 가자던 그에게 환멸을 느끼는 반복을 볼 뿐이지만.  

그/녀는 외롭다. 고립돼 있지만 그 고립을 누구도 봐주지 않아서 더 외롭거나 어쩌면 그 고립을 자기가 자초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에 더 괴롭다. 혹은 내가 정말 외롭기는 한걸까. 하는 물음. 그 알량한 자기 확신조차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외롭고 또 괴롭다. 자기로 부터도 타자로 부터도 고립돼 있는 것 같아 더욱 그렇다. 재섭과 소희 얘기가 아니다. 내, 우리의 이야기다.




# 같은 버스를 타는 사람들
서울 시내에 수백개의 버스 노선과 정류장이 있겠지만 사실 이용하는 정류장은 그리 많지 않다. 생활이 일차원적인 외로운 사람들이라면 더욱 더. 거기에 시간도 매일 어슷비슷하니 버스에서 정류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어쩌면 매일 매일 같은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면, 이 사람들은 한 다다음 생애쯤엔 대단한 친구로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같은 버스를 탄다는 것은 같은 곳을 향해 간다는 뜻이다. 그 버스를 같은 정류장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이다. 서로 닮은 소희와 재섭이 있기에 가장 적절한 곳.

같은 버스를 탄 그/녀는 서로의 곁에서 목 놓아 눈물 흘린다. 아주 솔직한 울음. 조금 더 솔직했던 소희가 조금 먼저, 말도 행동도 운동신경도 마음도 조금 더딘 재섭이 조금 더 늦게. 그렇게 온전히 서로의 같은 방향을 같은 정류장을 확인하려는 듯 감독은 그 눈물을 오래도록 담아낸다.
(재밌었던건 재섭이 눈물 흘리던 우체통.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는 그 빨간 상자. 재섭은 우체통을 사이에 두고 소희와 이야기 나누다 눈물을 흘린다. 마치 편지 하듯이.)




눈물을 훔친 건 그 장면이다. 아, 같은 버스를 타고 눈물을 받아 줄 친구.
아니, 그보다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여담이지만, 영화 이미지를 찾으려고 검색을 하다 '지루한 원조교재 영화'란 댓글을 봤다. 원조교재의 정의는 이미 영화 안에서 원조교재 아저씨가 내려줬다. 사랑없이 돈만 왔다갔다 하면 원조교재라고. 재섭과 소희는 사랑을 한다. 그 사랑이 연인의 마음이어도 좋고 동류의 인간에게 느끼는 우정이어도 좋고 사제간의 의리어도 좋다. 다만 그들이 사랑을 하는게 중요한거다. 그렇게 편협하게 정의 내리기에 사랑이란 말은 너무 예쁘고 아깝고 소중하다.
참고로 이 댓글을 본 포털은, 예전에 '사랑'을 검색했을 때 '이성간의 연애 감정'이란 편협한 정의로 난 짜증나게 한 그 곳이다. 내 이놈을 참.




# 김민정
아, 이렇게 예쁠수가.
연기를 잘 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렇게 잘 맞을수가. 마치 맞춰 입은 것처럼.
'아일랜드'의 시연도 그렇고 김민정은 상처받고 아파서 더 날을 세우는 그런 슬픈 역할이 잘 어울린다.

사실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다.
정유미나 백진희를 주목하고 있고 윤아나 신민아를 보면 정신 못차리고 하악거리지만
팬카페까지 가입한건 이 언니 하나다...ㅋ



# 이 영화에 이렇게까지 집착할 줄이야


이런 저런 말을 쏟아냈지만 그저 보고 있으면 맘이 설레는 영화다. 며칠전엔 버스 안에서 OST를 듣다가도 그런 맘이. 위로일까. 그런거였으면 좋겠다. 무튼 외로운 누구를 알게 된다면 이 영화 DVD를 내밀어 볼테다.









이웃집 좀비 - 그야말로 이웃집의 좀비들




#1
모처럼의 외출이 반가워 그저 집으로 돌아서기가 아쉬웠다. 남대문시장에서 출발해 회현동과 시청을 지나 종로와 을지로, 명동을 모두 배회하고서야 중앙극장 앞에 도착했다. 시간대가 맞는 영화가 하나라도 있으면 보고 들어가야지. 라고 마음먹었지만 요즘 통 영화를 보지 않는게 단지 시간이 없어서만은 아니라는걸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갖지도 않았다.
어디서 풍문으로 들었던 제목에 재기발랄해 보이는 포스터, 그리고 시작시간이 2분도 남지 않은 영화를 발견하고서도 사실 조금을 망설였다. '이 영화를 볼까, 말까?'
시간이 10분 남짓만 남았어도 아마 보지 않았을것 같다. 사람들이 헐레벌떡 입장하고 영화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서야 표를 사고 영화관으로 뛰어들어 앉았다.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코트를 벗으면서도 영화에 대한 설레임같은건 없었다. 그저 내가 본 영화 목록과 영화봤다고 자랑질하는 리뷰가 블로그에 하나쯤 더 쌓이겠거니 하는 생각밖엔.

#2
좀비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많이 보지도 않았지만 이 영화가 다른 좀비영화들과 다르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막연한 공포와 미지의 대상, 그저 타자화된 그들을 마을 한 구석, 가족의 일원으로 들여놓은 일이 인상적이었다. 그야말로 생활밀착형 좀비. 한명의 자신과 수십억의 타인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수십억의 자신이 살아가는 곳.

[그 이후... 미안해요]같은 꼭지는 그런 얘기들을 가장 절실하고 가슴아프게. 서로를 죽고 죽이던 그들은 자신의 입장만을 강변한다. 그건 '입장바꿔 생각해봐'를 넘어, 자신만이 중심에 있다는 오만한 세계관이 빚어내는 인간사회의 비극 같은거.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무한히 반복될 그런 비극.

#3
'키노망고스틴'이란 영화제작집단은 초저예산이란 어려움을 무모한 상상력과 몸빵(?)이란 최대의 무기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제작비때문이었는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역할을 바꿔 스탭을 하고 배우들이 한 영화 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는(심지어 연출자나 스텝들이 주연배우들인 경우가 좀 있었음..ㅎㅎ)일이 오히려 영화엔 도움이 된 것 같단 생각. 결국 이까 그 좀비와 지금 이 피해자와 저 구경꾼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란 느낌이 들어서.

#4
'좀비하이'를 복용한 클리너 역할의 아저씨가 자꾸 눈에 익어서 누군지 곰곰히 생각하다 결국 검색해봤더니, 아하.
비운의 드라마 2009 외인구단에서 하극상으로 나왔던 아저씨였구나.

#5
그런데 집에 오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좀비란 놈들 자체가 본래 그런 이들 아닌가 하는 생각. 주변에 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적'이 되어 몰려오는 일. 그 좀비는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니여. 친구도 아니고 적도아닌 관계는 사실 살며 만나는 무수한 관계들. 그럼 이것들도 다 좀비인거임?
괜히 이러다 좀비영화 매니아 되는거 아니냐며....ㅎㅎ 벌써 로메로 아저씨 영화들 다 검색 끝냈다며...ㅎㅎ

#6
간만의 즐거운 시간. 앞으로는 영화도 책도 뭐든 더 열심히 봐야지. 내가 즐겁지 않으면 결코 즐거워지지 않는 법.

샘터분식






1.
그래도 아주 간만에 본 영화라 한마디 하려고 앉았는데 딱히 할 말도 없는 영화였다.

2.
'공간'을 중심으로 공간 위의 '일상'을 잡아내려는 의도는 보였으나 의도에만 그치고 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3.
매력적이었던건 '민중의 집'과 수줍은 안성민씨 정도였으나, 이 또한 영화적 재미는 별로. 차라리 샘터분식 사장님과 더 수다를 떠는 영화였다면 혹은 Jerry K의 공황장애에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난 그거 끝까지 궁금하던데.
전작에서부터 느끼는 거지만 감독은 자신이 만들고 있는것이 영화인지, 프로파간다 영상인지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영화의 목적이 프로파간다라고 한다면 할 수 없지만, 그럼 돈을 받지 말아야지.

4.
내용이 아니더라도 편집이나 촬영에서부터 조금 더 신경을 쓰는게 어떨까. 장장 1년이나 찍은건데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 아깝잖아요.

5.
졸았지만 졸만했다.
밤을 샌 다음날 봤던 영화들도 눈한번 깜짝이지 않고 봤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 책임 아님 퉤퉤퉤.

6.
그래도 태준식 감독의 다음 작품도 챙겨볼꺼다.




바더마인호프 - 폭력, 혁명, 모순과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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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적군파

호치민과 체 게바라를 연호하는 그들의 이상은 간단하다. 자본에 의한 착취, 성에 의한 수탈, 국가에 의한 폭력등등. 모든 파쇼적이고 악랄한 행위들. 인민, 즉 나와 너 내 친구들의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항의와 저항. 고래로 '운동'이나 '혁명'이라고 불리운 것들은 모두 같은 범주에 있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관통하는 적군파의 성립배경에 조금 다른점을 찾자면 그 이름만으로도 후덜거리는 '68'.에 있달까.
해서 망이 망소이의 난과, 독일적군파와, 2008년 여름의 촛불은 그 본질에서 대동소이하니 독일 적군파를 공포의 대상, 테러리스트, 악마집단으로 이해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본래 혁명은 폭력적인 법이다.
마오가 이르길 "혁명은 결코 고상하거나 아름다울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계급을 뒤엎는 폭력적인 행위다.”
혁명은 그렇다. 혁명은. 혁명을 꿈꾸는 이들만을 탓할 순 없다. '혁명'을 꿈꾸지 않으면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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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의 발단

영화는 67년 가두시위중 사망한 오네조르크를 조명하며 시작한다.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사망한 대학생,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부. 80년의 광주와 87년의 이한열을 닮은 그 장면들은 가끔 눈물이 흐를만큼 뜨겁다.

마인호프의 성명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자초한 일'이다. 은행에 대한 테러는 금융독점에의해 인민들을 수탈하는 행위이므로,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외면한채 권력에 굴종한 판사에게, 경찰에게, 기업에게, 국가에게.
애초에 근원을 따져보자면 이 모든 폭력과 테러의 발단의 고리는 '저들'에게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더욱 슬픈건 그 고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끊어내야 하는지 저들은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쯤.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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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모순, 붕괴

호쾌하고 뜨거운 영화의 전반부를 지나 본격적인 적군파 활동이 시작되면서부터 갈등은 생겨난다.
모든 일과 사상엔 모순이 존재하는 법이고 모순을 극복해 내는 과정을 겪으며 숙성되는 법이다. 거기에 혁명이라고 예외일까.

혁명은 자기에 대한 확고함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때문에 혁명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인정하는 것은 곧 자기 전체를 부정하는 것. 때문에 모순도 자기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썩어간다.
인간은 '자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 자기를 부정하느니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더 쉽다.

신화란 그렇게 만들어진다. 관념으로 만들어진 혁명은 교조적이다. 결코 현실일 수 없는.
어느 순간엔가 잘못임을 알게되겠지만 잘못을 인정하기란 목숨을 끊는 일보다도 어렵다. 마침내는 아주 슬픈 눈을 하고 죽어갈 밖에. 저 사진속의 눈처럼. 저런 눈을하고도 '난 민중을 위해 살았고 죽을거야'란 자기도 안믿는 얘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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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할것이냐

테러리즘이 무조건 나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옳다고 말하기도 마찬가지지만. 정답은 없는거니까.
다만, 시골 마을에서 호미를 잡고 노동자 농민들과 혁명을 토론하던 남미횽아들과 쏘고 찌르고 태우고 부숴서 혁명을 이끌려던 유럽횽아들중에 누가 지금 우리 곁에 남았는지를 돌이켜 볼일이다.


## 사실 남일이 아니다

영화가 얘기하자는건 적군파의 과격한 테러가 불러온 참상과 몰락도, 그렇다고 그시절로의 향수를 자극하는 저열한 프로파간다도 아니다. 다만.

똑바로 보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전자 신분증을 도입해 시민들을 통제하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국가와 자기만족과 기만으로 가득찬 혁명으로 모두를 속이는 오만, 빼앗기고도 빼앗긴줄 모르는 무지와, 빼앗지 않기 위해 빼앗는 허세, 허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 많이 비슷한것들.

폭력은 그렇게 지금도 우리안에, 우리 사회안에 버젓이 기생하고 있다.


++덧

영화를 보다 며칠전에 케이블티비에서 본 '쏜다'와 장면이 겹치는 황당함을 겪었는데,
그 황당함이란 전혀 매치 되지 않을 것같은 영화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함이 첫번째였고, 상황이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이 다시 상황을 만들어 종래엔 허무해져 버리는 이 웃기지도 않는 매치가 갖는 설득력이 두번째였다.


연인들, 키친



정인, Bobby Kim - 사랑할 수 있을때



##
그저,
사랑하자. 사랑할 수 있을때.
그것 뿐.

##
키친에서 양산이 탐탁치 않던 소녀는 얼굴도 채 나오지 않았지만 백진희. 반두비의 히로인.

##
한동안 1등은 신민아. 그야말로 반짝반짝.
기대할건 정유미. 보고있자면 콩닥콩닥.

##
영화도 좋았고 배우들도 다 좋았고 기분도 좋음.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나자 남는건 불어로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르던 주지훈.
와이키키에서 오지혜가 부른 '사랑밖에 난 몰라'의 아성에 버금가는.
 

반두비 - 타인과 관계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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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들리지 않아 수술 날짜를 받아 놓고 기다리고 있을 즈음, 시시껍절한 농담 한마디를 끼적인 적이 있었다.
'내가 귀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뇌안에 대화 뉴런이 망가져서 그런거다' 라는 자학쯤 되는 우스개.

우스개였지만 웃기지도 않았던 그 끼적임은 어쩌면 은연의 진심이었겠다.
'대화'란 그렇게 쉽지 않은거니까. 하물며 마음과 마음이 부닥쳐 영그는 소통이야 말해 무엇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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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
대화와 소통이 어려운 이유도 가능한 이유도 나와 네가 서로 다른 존재 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고,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대화와 소통이 쉽지 않다.

소통은 벽에다 문을 내는 것이다. 하여 문을 내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벽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벽이 무언지, 얼마나 두꺼운지. 벽을 이루는 것이 인종인지 계급인지 성별인지 나이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인지. 무엇이 나와 너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벽을 인정하는 것부터 벽을 허물어 문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는 법이다.

결국 소통은 타인과 하는 것. 중요한 건 벽을 부수어 통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난 숟가락으로, 넌 손으로 하지만 이 음식이 네게 맛있었음 좋겠어.] 같은 마음이랄까.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어에서 허물어진 벽에 홀로 남은 문이 계속해서 남는다. 문이 온전하려면 벽도 온전해야 하는 법. 벽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허물려 해서도 안되고. 소통이든 연대든 그 전제는 타인. 타인으로서 온전해야 소통도 온전 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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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이주노동자
세계시민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음에도 짙은색 피부와 두꺼운 쌍커풀의 외국인들에게 내보이는 시선은 싸늘. 세계화를 외치는 이들이 인식하는 '세계'란 고작 북반구의 하얀색 코쟁이들.

이 곳은 즐거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한국사람들도 잘 모르는 택껸을 배우는 미국인과 떼인 돈을 받으러 주소 한 장들고 골목골목을 누벼야 하는 방글라데시인의 동석만큼 우스꽝스러운 곳.
이 곳은 지주에게 핍박받는 마름이 소작농을 학대하듯, 지배받는 개인이 타인을 학대하는 곳.
분노한 만큼 서러울 밖에, 서러운 만큼 포기할 밖에 없는 곳.
제가 노예인것도 모르는, 어쩌면 모른 채하는 사람들이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곳.
답 대신 눈물이 먼저 흐르는 곳.

## 노골적이어서 재미없는

민서의 가방에 달린 촛불소녀 뱃지, MB수학학원, 한겨례21, 조선일보, 돌발영상, 불탄 남대문..
너무 노골적이어서 가끔 극을 향한 집중을 방해할정도.
위트와 풍자와 해학은 언뜻언듯 보일락말락이 정도인 것을.

감독은 전작에서도 똑같이. 전작 '방문자'에 비해 훨씬 더 재치있고 부드럽고 유연한 진행이었지만, 그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풍자는 여전히. MB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에 있어 MB는 풍자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목에걸린 밥알처럼 까끌까끌.

##  백진희

예쁘고 잘한다.
처음 만난 카림에게 입맞추고 돌아서는 장면에서의 그 눈빛은 아주 '정확해'보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뻐서 잘해보일 수도 있는거다. ;;
박보영, 정유미와 함께 주목하고 싶어지는.
 

## 청소년 관람불가

분두비 이미지를 찾으려고 네이뇬에서 반두비를 검색하자 영화에 달린 온갖 악플들이 쏟아져 나온다.
'외국인(피부색 짙은)이 우리나라 여고생을 강탈하는 쓰레기영화'라는 평을 보다 생각했다.

청소년 관람불가는 청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치부를 감출때 쓰는 요령이구나.
사기꾼 약장수가 애들은 가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 이율까?

우익청년 윤성호




은하해방전선에서 재기발랄이 무엇인지 보여준 윤성호 감독의 단편.
풍자, 해학이란 이런것이다.

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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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만 봐도 대충 알것같은 내용이라 기대는 오직 최강희의 미모에만.
아니나 다를까, 뻔한 설정 진부한 소재. 어색한 사투리와 설득력없는 캐릭터.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엄마'는 눈물나.

내도록 덤덤하다 죽은 엄마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결국 울컥.
웃긴건 영화관 안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기침을 하기 시작한 것.

++
시사회라 인사하러 온 강짱의 미모를 기대했지만,
맨뒷줄이라 전혀 볼 수 없었다. 젝일. 그래도 맨뒤까지 풍겨오는 오오라는존재했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트리플, 송중기





##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난 홍상수 영화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아. 라고 얘기하곤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런거다. 모두 잘 알지도 못하며 그저 지껄이기를 좋아한다. 그건 무지일수도 있고 허세일수도 있다.

모두 새 삶과 구원을 갈구하지만, 사실 새 삶이나 구원이 뭔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 어차피 알 수 있는건 없다. 구경남의 말처럼 자신도 똑바로 알지 못하는데 남을 알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세상의 이치 따위야. 구경남의 이름처럼 우린 그저 구경하며 살아가는거다. 결코 당사자는 아니다.

순이의 말처럼 그저 지금이면 된다. 위악이니 위선이니 하는 것들말고 젊은 남자랑 자고 싶었고 그건 단지 질투였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될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건 자유라고 침까지 튀겨가며 얘기했으니 그저 자기에게 충실하게 살면 될 일이다.





## 트리플

막장드라마 열풍이 불더니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모든 형태의 소재를 막장이란 말로 때려넣고 있다.
친구의 아내와 (호적상의)친오빠를 를 향한 사랑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막장으로 부른다고 한다.
진짜 막장은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모든 형태의 사랑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세상 그 자체다. 드라마 속의 쉽지 않은 사랑들은 차라리 순수함이다.

소일거리 삼아 보는 드라마 였지만, 벌떼처럼 비난하는 네티즌들 때문에 더 열심히 보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막장 심보인가 싶지만, 뭐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인걸.

감정에 솔직함은 미덕이다. 관습 통념 규범등등등 따위에 얽메여 자신을 부정하는 일만큼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데다 괴로운 일은 없다. 그건 그야말로 불행해지는 지름길. 세상엔 사랑의 형태도 종류도 과정도 귀결도 무궁하다. 굳이 한가지 형태만(그것도 가장 비겁하거나 용기없거나 폭력적이거나) 고집할 필요따위 없다. 사랑하면 사랑하는거다. 대상이 무엇이든.




##  송중기

이윤정 감독은 파릇한 남자배우를 고르는 눈이 뛰어나다. 태릉선수촌에선 이민기가 그랬고 커피프린스 1호점에선 죽어버린 이언이나 김동욱, 김재욱이 그랬다.(좀 다른 느낌에서지만 어쨌든 다들 괜찮은 남자배우임엔 틀림없다.)

이번엔 송중기다. 천방지축같은 진부한 표현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그의 담백한 매력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굉장히 잘생긴 얼굴로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다니. 사실 지금은 오직 그만 보이고 있다.
(알고보니 쌍화점에서 조인성의 오른팔로 나왔던 그 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