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 들어오다 첫눈을 봤다.
올 해 첫눈을 함께 본 사람이 택시기사 아저씨라는 게 어쩐지 웃겼지만,
아저씨도 어쩐지 서글퍼보였으니 쌤쌤이다. 삶은 늘 이렇게 공평하다.
첫눈을 보면서 겨울의 시작을 생각하기보다, 가을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런가보다. 계절의 시작보다 계절의 끝.
하긴 난 해변을 바다의 시작이 아니라 바다의 끝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계절이 끝나고, 시대가 지나고, 생의 단락이 한 번 더 접히고.
삶과 얼굴, 그리고 뇌에도 주름이 한 줄쯤 더 새겨질 거다.
깔딱고개. 라던가 난 늘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에 서툴다.
하지만 첫눈이 계절의 끝자락을 알려주는 것처럼,
반갑고 예쁘게 끝과 시작을 맞이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다시, 처음이라오.
2.
첫눈을 보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홍대어름에 있다가 사라진 '작은상자'라는 술집이다.
지금은 없어졌는데, 홍대에 '작은상자'라는 술집이 있었다. 이름처럼 정말 작은 지하방이다. 세 명 정도가 앉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바와 테이블 두 세 개가 전부였다. 실내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스피커가 터질 듯이 음악소리를 키워놨었다.
처음 그 가게를 들어갔던 건 새벽 2시 30분쯤. 왜 날짜나 계절이 아니라 시간을 기억하냐면.
우리가 처음 작은 상자에 들어갔을 때,
머리를 길게 길러서 누가보더라도 '저 락커입니다'라는 환청이 들릴듯한 알바언니가
"3시면 문을 닫아야한다"라고 축객령을 내렸다.
이름도 가게 모양도 들리는 노래도 다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다며 발걸음을 돌리는데 조그만 바에 구겨져 누워있던 아저씨가 말했다. "30분 동안 재밌게 놀다가면 되잖아요"
그러게, 어차피 술은 이미 진탕마셨겠다, 맥주 한 잔만 마시자고 들어온 거 30분이든 2시간이든 무슨 상관이야. 30분만 재밌게 놀면되지.ㅋ 그리고 우리는 출근 러시아워 버스를 타고 집에 들어가게 됐다능.ㅋ
그 이후에는 단골손님마냥 작은상자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작은상자는 엄청 불친절하고 엉성해서 메뉴판에 있는 안주라고는 소세지와 마른안주, 노가리 정도가 전부인데 그나마도 되는 건 거의 없다. 새우깡은 안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맥주도 마찬가지. 메뉴판엔 온갖 맥주 이름이 써있지만 있는 건 언제나 카프리 아니면 카스였다. 분명 자기들 공연장에서 남은 맥주 가져와 가게에서 파는 걸 거라는 추측도 했었다.
스피커 밑에 앉은 날은 노래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니 볼륨을 조금만 줄여달라고 말했다가 "저희들이 들어야 해서 못줄여준다"는 반자본주의적 손님접대 멘트를 들어야 했다. 물을 한 잔 달라고 하면 편의점에서 1.5리터 생수를 사다줬다.
망하기 십상이게 장사를 하더니 결국 망했다. 사진과 흔적 하나 남겨놓지 못했건만.
써놓고보니 뭐가 매력적이냐. 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겠지만 아마 사라져서 그런걸까.
난 여기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앞으로도.
3.
그건 아마 그 시절들이기 때문일까.
첫눈 오는 오늘 같은 날, 그 불친절하고 비좁았던 술집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고, 찌질한 첫사랑 얘기를 하고, 더 찌질한 구남친 얘기를 하면서 낄낄거리다 삶에 대한 한탄이나 그래도 갖는, 혹은 가져야하는 일말의 희망에 대해 읊조렸다.
큰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고 신청곡을 퇴짜맞거나 주인 아저씨가 말해주는 추천곡을 수첩에 적어넣었다.
아케이드 파이어나 짜르 같은 노래들.
그렇게 놀다가 동틀무렵에야 나선 거리에 눈이 내리면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걸판지게. 바지가 젖으면 지하철에서 민망하다는것도 잊을만큼 신이났었다. 춤을 추듯 미친 것처럼 낄낄거렸다.
스무살 남짓한 삶이 버겁다며 되지도 않는 시를 짓고 읽고 외웠지만, 그래도 삶에는 한 줄 희망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어느 날 작은상자가 없어졌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게는 늘 망하게되더라니까.
그래서일까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것도 그 때쯤 그 부근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그런 얘기도 들었는데,
"그 때 니눈이 반짝거리긴 했어"
옥상에서 눈 내리는 걸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들어온 방 안에서 거울을 보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이제 숭숭 빠진 내 머리털과, 흐리멍텅한 눈.
삶이라는 것에 그 때만큼 실망하지도 않지만 그 때만큼 희망적이지도 않은.
숨만 쉬어도 꿈틀거리는 게 있었는데, 이젠 희망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계절이 변하고 가게가 망하고 같은 자리에 소란스러운 프랜차이즈 주점이 들어오는 것처럼 삶과 사람, 사랑은 시시때때로 변한다.
다만 그 변화를 인정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다시 돌이키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주름의 골골에 새겨진 삶을 기억하는 것.
하지만 그래도 그때 그 반짝이던 눈이 서럽긴 하다. "내 눈알을 내놔"
4.
첫눈에 센치해져선 이런 글이나 끼적이고 있지만. 잠이나 자야한다. 시간이 몇시냐.ㅋ
5.
폭설로 인해 내일 출근 취소. 뭐 이런 꿈같은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첫눈에 소원비는 사람들, 이 소원도 좀 빌어봐요. 혹시 아나, 원기옥처럼 바람이 모여 소원이 이뤄질지.
지구인들아 힘을 빌려줘.
6.
어떤 노래를 들으면 좋을까 하다가
Balmorhea - The Wi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