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노 - 올 해의 영화




어쩐지 콧구멍이 벌름거리기 시작했던 건 최은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던 순간이었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던, 그야말로 여배우의 얼굴.(그건 지금의 젊은 여배우들에게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감상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층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는 여든 다섯의 스타일리스트, 노라. 육십여년 쯤은 가볍게 뛰어넘어버린, 아니 그보다는 육십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가슴벅차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건 아마 '시간'이 세겨놓은 주름과 그 주름의 골마다 박힌 지혜와 어리석음, 그걸 고스란히 견뎌온 묵직한 삶.의 아름다움이었을테다.


그리고 기어이 눈물이 흘렀던 건 노라노 선생이 스무살 남짓 젊은 여자애들과 전시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기억이 전승되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여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나이들었지만 낡지 않은 여자와 나이들어도 결코 낡고 싶지 않을 (혹은 낡지 않을) 여자들의 만남. 역사란 고루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가슴벅찬 것이며,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주조하는 것이라는 명징한 증명이었다.


영화는 노라노를 1세대 패션디자이너로 추켜세우거나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되짚어 찬미하는 지루한 우를 범하지 않았고 그녀의 삶도 과거에 연연하고 이름에 기생하는 멋대가리 없는 것이 아니었다. 노라의 전시회 라비앙 로즈는 그녀의 60년 디자인 인생을 되짚고 회고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난 60년을 딛고 다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영화는 "때로는 어리석었고 때로는 현명했었던" 그녀의 삶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가장 적절한 거리에서 관찰한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녀의 성과도 오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그리고 그 반복과 인정이 바로 "장밋빛 인생, La Vie en rose"라는 깨달음을 목격한다.


삶을 살고, 견디고, 다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실은 장밋빛 인생. 기꺼이 올해의 영화다.


- 영화를 보고나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엄마를 찾는다. "엄마 노라노라는 디자이너를 알아요?"

- 당연히 우리의 엄마들은 대부분 노라노의 옷을 한두번 쯤은 입어봤거나, 혹은 노라노의 샵을 기웃거려 봤다. 그녀들의 전성시대. 엄마랑 같이 영화를 다시 보러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