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6. 07:19 Vecchio Primavera
#1
요즘 보는 드라마 '도망자'에 별반 중요치 않은 개그 캐릭터 형사가 즐겨쓰는 대사는 "내 이럴줄 알았슈".
나도 이럴 줄 알았는데.
#2
블로그에서건 일기장에서건 술자리의 잡담에서건 학생운동이 어쩌구 하면서 말을 뱉어대던 나를 싫어했다. 지나치게 질척거리고 어쩔땐 으스대는 내가 싫었다. 또 지난 내 생활과 삶이 오직 그 단 하나의 언어로 치환되는게 창피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그건 그저 소중하게 간직만 하고 있어야지. 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정말이지 질척거림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 둘 스미기 시작한 일들이 조금씩 걷잡을 수 없어지더니 난 지금 다시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아, 얼마나 웃긴 일일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제 자식의 목을 베어내는 계백장군마냥 '아프지만 떠나보낼께' 같은 신파스런 말이나 주워삼기더니 결국엔 다시.
명분이야 거창했다. 운동권의 구태를 벗겨내고 친구들, 후배들에게 새로운 고민을 연마할 공간정도는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대외홍보용 변명이나, 가진 것을 오로지 다 쏟아내고 또 승리하고 성취하는 기억을 갖고 싶었다는 자기위안용 핑계나. 아주 거창해서 번지르르하지만 사실 누가 들어도 코웃음 치기에 적절한 명분들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게 사실 다 핑계란건 쉽게 알 수 있는 일. 난 그저 '자리'를 찾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마 인정 혹은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겠다. 해왔던 일이라곤, 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뿐이니. 할 수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고 또 찾는 일조차 귀찮아서 안절부절이던 내게 아주 적절한 기회. 적절한 명분 만들기야 식은죽 먹기.
#3
이렇게 외롭고 지칠거라는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니 생각따위 굳이 하지 않아도 지난 일기장을 조금만 뒤적거리면, 아니 그런 수고따위 또 굳이 하지 않아도 기억이라는게 있으면 머리가 아니더라도 몸이 기억하는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기만 했으면. 굳이 이렇게 또 애먼 밤을 벅벅 지새고 또 아프고 그러지 않아도 될텐데. 정말로 몸이 아파서 밥도 못먹고 병원까지 다니는 일 같은거 없었을텐데.
#4
취미로 타로를 보는 친구와 카드를 뽑아봤더니 한다는 말이 "네 슬픔과 처지를 인정해. 그것부터야."
기억에 남은 카드는 Five of Swords.의미는 초라함이라나 실패라나.
#5
나에게조차 이렇게 자신도 확신도 없으면서 어줍잖은 말들로 또 사람들에게 위로며 충고를 건넨다. 언제 철드니. 몇년째 똑같잖아. 어쩜 달라지고 변하는게 없을까.
#6
외로움을 가장 지독하게 느끼는 순간은 오히려 웃고 떠들고 있을때다. 이렇게도 대화에 굶주려 있었나, 아니면 이렇게 어지러운 말들이 아니면 관계맺고 소통하는 법도 잊어버리게된걸까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리고 진심이 담긴 단 한마디, 외롭다는 말을 토로할 대상따위 그 현란한 말잔치의 대상들틈에 있지 않다는걸 아는 순간. 그리고 그건 결국 아무도 없다는 의미라는걸 불현듯 알아버리는 순간. 모두에게 하는말은 곧 어느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라는걸 알아버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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