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처럼의 외출이 반가워 그저 집으로 돌아서기가 아쉬웠다. 남대문시장에서 출발해 회현동과 시청을 지나 종로와 을지로, 명동을 모두 배회하고서야 중앙극장 앞에 도착했다. 시간대가 맞는 영화가 하나라도 있으면 보고 들어가야지. 라고 마음먹었지만 요즘 통 영화를 보지 않는게 단지 시간이 없어서만은 아니라는걸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갖지도 않았다.
어디서 풍문으로 들었던 제목에 재기발랄해 보이는 포스터, 그리고 시작시간이 2분도 남지 않은 영화를 발견하고서도 사실 조금을 망설였다. '이 영화를 볼까, 말까?'
시간이 10분 남짓만 남았어도 아마 보지 않았을것 같다. 사람들이 헐레벌떡 입장하고 영화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서야 표를 사고 영화관으로 뛰어들어 앉았다.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코트를 벗으면서도 영화에 대한 설레임같은건 없었다. 그저 내가 본 영화 목록과 영화봤다고 자랑질하는 리뷰가 블로그에 하나쯤 더 쌓이겠거니 하는 생각밖엔.
#2
좀비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래서 많이 보지도 않았지만 이 영화가 다른 좀비영화들과 다르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막연한 공포와 미지의 대상, 그저 타자화된 그들을 마을 한 구석, 가족의 일원으로 들여놓은 일이 인상적이었다. 그야말로 생활밀착형 좀비. 한명의 자신과 수십억의 타인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수십억의 자신이 살아가는 곳.
[그 이후... 미안해요]같은 꼭지는 그런 얘기들을 가장 절실하고 가슴아프게. 서로를 죽고 죽이던 그들은 자신의 입장만을 강변한다. 그건 '입장바꿔 생각해봐'를 넘어, 자신만이 중심에 있다는 오만한 세계관이 빚어내는 인간사회의 비극 같은거.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무한히 반복될 그런 비극.
#3
'키노망고스틴'이란 영화제작집단은 초저예산이란 어려움을 무모한 상상력과 몸빵(?)이란 최대의 무기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제작비때문이었는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로 역할을 바꿔 스탭을 하고 배우들이 한 영화 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는(심지어 연출자나 스텝들이 주연배우들인 경우가 좀 있었음..ㅎㅎ)일이 오히려 영화엔 도움이 된 것 같단 생각. 결국 이까 그 좀비와 지금 이 피해자와 저 구경꾼은 모두 같은 사람들이란 느낌이 들어서.
#4
'좀비하이'를 복용한 클리너 역할의 아저씨가 자꾸 눈에 익어서 누군지 곰곰히 생각하다 결국 검색해봤더니, 아하.
비운의 드라마 2009 외인구단에서 하극상으로 나왔던 아저씨였구나.
#5
그런데 집에 오며 곰곰히 생각해보니 좀비란 놈들 자체가 본래 그런 이들 아닌가 하는 생각. 주변에 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적'이 되어 몰려오는 일. 그 좀비는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니여. 친구도 아니고 적도아닌 관계는 사실 살며 만나는 무수한 관계들. 그럼 이것들도 다 좀비인거임?
괜히 이러다 좀비영화 매니아 되는거 아니냐며....ㅎㅎ 벌써 로메로 아저씨 영화들 다 검색 끝냈다며...ㅎㅎ
#6
간만의 즐거운 시간. 앞으로는 영화도 책도 뭐든 더 열심히 봐야지. 내가 즐겁지 않으면 결코 즐거워지지 않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