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6. 18:41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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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6. 18:36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2018. 5. 6. 18:34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쇼타로 컴플렉스’와 ‘로리타 콤플렉스’는 다른 것이냐는 주제를 두고 한동안 온라인이 시끄러웠다. 어느 방송에서 한 여성철학자가 쇼타콤과 로리콤을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젠더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대상이 되는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를 기반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로리콤이나 아동성애 같은 심각한 주제는 물론 데이트 비용 부담, 여성 전용 주차장, 여성부의 존재 같은 이제 꺼내기도 지겨운 케케묵은 이야기들까지. 젠더 권력에 대해, 사회적 맥락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지 않으면 어정쩡한 ‘이퀄리즘’따위에 빠지기 십상이다. “밥값 더치페이도 안하는 메갈들” 같은 빻은 소리나 하게 되겠지.
# 바야흐로 ‘페미니즘 리부트’
근래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바야흐로 갈등의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말까지 나올 만큼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는 비약적인 양적 확장을 이뤘다. 이제 사회 곳곳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 양적확장이 곧 질적 상승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적어도 ‘온라인 공간’에서만큼은 그렇게 보인다. (페미니즘 논의의 확장에 SNS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의 역할은 막중했다. 운동의 주요 전선은 여전히 라인 위에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온라인상에서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 갈등과 대립이 불러온 폭력과 차별에 대한 논란은 페미니즘 운동 전체에서도 매우 높은 의미량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건 ‘권력’과 ‘젠더권력’을 혼동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소수자에 대한 페미니즘 일각의 배척이다. ‘쓰까페미(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부르는 말)’와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m)’의 대립.
최근엔 한 학자가 학회에서 논문발표를 저지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레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주로 그 학자의 발표를 반대하며 학회를 ‘압박’했다. 그 학자가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를 조장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들이 말하는 ‘성소수자로서의 여성혐오’란 게이 커뮤니티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나 트랜스젠더들의 성별정체성을 옹호하는 일이었다. ‘압박’이 이뤄졌고 ‘권력’이 작동했다. 이것은 기울어진 ‘젠더권력’이라는 사회적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할 일일까. 아니면 ‘권력’을 통한 억압이라는 기성의 구조가 외피를 바꿔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일일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연예인 지망생의 SNS도 최근의 화제였다. (그 연예인 지망생은 이런저런 사건들로 데뷔 전임에도 매우 유명하다.) 유명한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여성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SNS에 종종 올리다보니, 그녀에겐 꽤 많은 메시지들이 도착했다. 그녀는 자신의 SNS에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받았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내용인즉슨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 그녀는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여성’으로 자신을 정체화 하는 이들에게 “넌 여성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발언이다. “나의 운동에서 당신들을 배제하겠다”는 발언이기도 하다. 존재를 단정하고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것을 어떤 이름이든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발화의 형태가 온건하든 급진적이든, 운동의 요체는 소외된 주체를 복원하는 일에 있다. 그것은 나의 운동이 다른 무엇을 소외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하다. ‘젠더권력’의 불공평함을 바로 잡기 위해 또 다른 ‘권력’으로 폭력과 차별, 착취와 억압을 허용하는 것은 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게 제대로 ‘젠더권력’의 불공평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지정성별 남성의 이성애자이고 뚱뚱하고 지성 피부에 탈모가 온 남성이다. 난 남성으로서 젠더권력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학벌이 없는 흙수저 노동자로서 이 사회의 계급구성의 하단부에 놓여있다. 난 이성애자로서 주류에 있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로서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선 배제되고 있다. 내 다양한 정체성들은 서로 어떤 것들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소외를 이중으로 가속시키기도 하고 중화시키기도 한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킴벌리 크랜쇼는 ‘교차로에서의 교통사고’를 예로 들었다. 교통사고가 교차로에서 일어날 경우, 사고는 오직 한 방향에서 온 차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 때로는 모든 방향에서 오는 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 사고는 더욱 커진다. 사고의 수습방법도 다양해지고 책임추궁의 방식도 달라진다. 페미니즘 운동뿐이 아니라 모든 운동은 사실 서로의 관계, 그리고 주체들의 배치에 따라 생성될 수밖에 없다. 굳이 운동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존재하는 모든 일이란 타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억압된 여성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에서 자기의 억압을 인식하듯, 소외된 노동자가 배제된 장애인에게서 자기의 소외를 발견하듯. 이 모든 것들은 관계를 맺고 있고 어느 하나만이 자기의 정체성일 수는 없다. 각자의 다양한 정체성이 어떤 배치를 이루고 어떤 기재와, 어떤 욕망과 접속하고 교차하는지에 따라 삶의 양식도, 그 삶의 양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도 발생한다.
레디컬 페미니즘이 의미 있었던 지난 세기는 페미니즘이 ‘조개 줍는 소리’로 치부되던 당시의 운동에 저항하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8~90년대를 관통하며 레디컬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이 고유의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남성이 전유하던 운동의 부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다. 노동이 해방되면 여성도 해방된다던 당시 꼰대 아재들의 주장과 ‘자궁달린 여자만 여자’라며 ‘당신이 아닌 자들’을 배제하는 지금의 주장은 얼마나 다른가. 세상을 단 하나의 책으로 이해하고 단 하나의 창으로 관찰할 순 없다. 한국사회, 아니 사실은 이 세계 전체가 기울어진 젠더권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지만 오직 그것만이 문제고 나머지는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XX염색체와 자궁을 가진 존재들만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이고 나머지는 다 배부르고 편한 소리 늘어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모니터 바깥으로
고백하자면, 이건 다시 쓰는 원고다. 수정이 늦어 원래 썼던 원고가 이번호 <워커스>에 실렸다. 이 글은 아마 인터넷을 통해서만 유통될 테다. 난 수정되지 않은 지난 원고에서 “여성주의는 따듯한 마음과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여성주의만 진짜 여성주의라고 광광우럭 하는 꼴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지 않으면 생존조차도 힘에 부쳐야했던 여성에 관해 사유해 본적도 없는 속편하고 배부른 한남충의 ‘진짜 페미’인정 운운. 뭐 그런 거. 진의가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 한계를 극복해 더 많은 이해와 연대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그러면서 종종 칭찬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고.
내가 하려는 노력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 바깥을 끊임없이 살피려는 노력이다. 젠더권력을 날 때부터 가져서 실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삶을 애써 보려하는 노력. 거기서 나의 폭력을 떠올리고 당신이 받았던 억압을 상기하려는 노력. 내 삶의 모순을 인식하는 계기로 삼고 당신의 싸움에 함께 연대하려는 노력. 그렇게 나와 당신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며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실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음을 깨닫는 노력. 그렇지만 당신의 존재와 나의 존재는 특수성을 지니며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노력. 내가 생각하는 노력은 그런 것이다. 그저 페미니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혹은 운동은 바깥을 향해야 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이든 그 바깥에도 고통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고통이 또 다른 폭력과 차별과 착취를 용인해주는 자유이용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창의 모양에 따라 세계는 달리 보이지만 진짜 세상은 창으로 보는 세상보다 훨씬 더 많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다못해 창문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했듯 '넷페미’는 지금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한 전선이다. 수없이 많은 주의와 주장, 말과 글, 이미지가 온라인을 떠돈다. 사회적 조류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실제 세계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넷페미의 운동과 투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서 유통되는 모든 것들이 정말 모든 것은 아닐 수 있다. ‘온라인의 언니들’ 덕분에 코르셋을 벗었다지만, 하지만 정말 당신은 정말 코르셋을 벗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맘에 들고 편한 코르셋으로 갈아입은 것은 아닌지.
2018. 5. 6. 18:31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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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6. 18:07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답답한 마음에 “그래서 도대체 청년의 문제가 뭔데?” 라고 물었더니 “선배가 겪는 문제가 바로 청년 문제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딱히 반박할 말도 없으니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다. ‘청년문제’를 주제로 (무려 원고지 15매에 달하는, 무려 신박한 문체로) 글을 써내라는 무리한 청탁을 받고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청년의 문제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싫었기 때문은 아니다) 도대체 <워커스>가 규정하고 있는, 또는 이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청년’이 무엇인지, 창간 당시부터 ‘청년’을 주 독자층으로 삼아 갖은 기획과 꼭지를 생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겠다. 도대체 왜. 청년이 도대체 뭐라고.
청년의 사전적 의미는 “신체적·정신적으로 한창 성장하거나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다. 이 모호한 의미 규정 때문인지 정부와 지자체가 규정하는 청년 세대의 기준은 제멋대로다. 19대 국회는 청년고용촉진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처음에 청년을 만 19세에서 만 29세로 규정했다가 30대 구직자들을 소외한다는 지적에 만 34세까지로 상향 조정했다. 정부의 청년전용창업자금 지원은 만 39세 이하만 받을 수 있다. 서울시의 청년보장제도는 만 19세에서 29세가 수혜 대상이지만 성남시의 청년배당 대상자는 만 19세에서 24세까지다. 정치권의 청년규정도 제각각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이 청년 비례대표를 뽑을 때 청년의 기준이 정해졌는데 새누리당은 35세 미만, 새정치민주연합은 45세 미만이었다. 만 31세의 성남시민인 나는 성남시의 청년배당은 받을 수 없지만 정부의 청년창업자금 지원은 받을 수 있다. 서울은 성남보다 공기가 좋지 않아서 신체적, 정신적 성장과 무르익음이 더딘 것일까.
<워커스> 창간 초기에 ‘청년 패널’이란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2~30대 비슷한 연령의 몇몇을 불러 모아 그들의 이야기, 그러니까 취업, 빈곤, 연애와 성, 가정과 가족의 문제 등등 이른바 ‘청년 문제’로 손쉽게 언급되는 주제의 대담을 하는 기획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기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매 호의 기사에선 대담을 진행하고 이야기를 정리한 기자가 뭔가 대단한 대화라도 오고가고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과장했지만, 이제와 고백하건대 그거 죄다 ‘뻥’이었다. (독자 제현께 이 자리를 빌어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매주 도무지 하나로 그러모아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됐다. 뉴스가 제공하고 드라마와 영화가 포장한 ‘청년 세대’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청년 세대는 죄다 가난하고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알바에 시달리고 그 알바 업주는 악덕업주라는 설정. 그럼에도 미래의 꿈과 희망에 열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클리셰, 지독한 가난함에도 끈끈하게 이어지는 사랑과 그 사랑마저 극복하지 못할 고단한 삶이라는 진부한 러브라인까지. ‘청년 세대’라는 허상을 만들고 그들이 사는 허구의 세상을 구획하는 일이었다. 거짓부렁의 글을 돈 주고 사 읽은 독자들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청년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의 관심과 호명은 거개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변명도 얹고 싶다. 대상을 짜맞추고 거기서 자기만족을 얻는 일. 무례한 고나리질과 의미 없는 꼰대질.
이건 ‘청년’이라는 개념 범주를 묻기 이전에 ‘청년 세대’가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이를 규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정말 실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세대의 범주를 상정해놓고 문제를 만들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끼워 맞추다보니 ‘청년’이라는 세대는 호명의 순간부터 대상화된다. “너희는 이런 세대고, 이런 아픔을 겪고 있을 거야 맞지?” 체제는 젠더, 인종, 세대, 국가 같은 것들로 노동력을 구획하고 통제한다. 2017년을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취업하기 어려운 건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 따른 문제고 삶이 피폐해지는 건 고도화된 신자유주의가 추동한 경쟁 때문이다. 그들이 그 세대여서 그런 게 아니다. 청년들이 만 39세를 넘어서는 순간 ‘뿅’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실은 ‘청년 문제’ 같은 건 없다. 제각각의 삶, 저마다의 어려움, 저마다의 고통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의 주름에 새긴 고통의 종류와 양과 질은 다 다르다. 그것들을 고작 ‘세대’의 이름으로 뭉뚱그리는 일은 너무 안일하고 불온하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달관 세대 등등등 등등등. 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수많은 말과 말의 잔치가 포섭할 수 있는 ‘청년’은 없다. 세대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다. 특정 연령대를 불쌍히 여길 필요는 없다. 가난한 청년이 문제가 아니라 가난이 문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아니라 불량한 일자리, 불안한 고용이 문제다. 29세의 미취업이 49세의 실직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건 아니다. 미래세대라고? 49세에겐 미래가 없냐고. 굳이 일부러 노력해서 ‘청년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워커스>는 안일한 세대론이 담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은폐하고 있는 너머의 것들을 들춰내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젊은 피’를 운운하며 떡고물 던져주듯 젊은 이들의 표를 구걸하거나 강탈하는 정치권의 속내, 88만원이니 청년의 대변자니 하는 세대론 장사치들의 꿍심 같은 것. 오늘 ‘청년 세대의 문제’를 운운하는 건 피시방에서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부디 담당기자는 다음 원고청탁에선 더 신박한 주제의 원고를 청탁해주길 바란다.[워커스 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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