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11 - 친구 자취방


짜장면이나 한그릇 얻어먹을 셈이었어. 몸을 쓰는 일을 하는 데 내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는 니가 더 잘 알테니까. 이사하는 날 나를 굳이 부른 건 혼자 짐을 싸고 나르기 적적하니 와서 재롱이나 떨고 핑계김에 술이나 마시자는 네 배려인줄 알았지 뭐. 졸업하고 몇년이더라. 서른 몇 살이 어느새 훌쩍 넘어있었으니까. 아마 그 때를 떠올린 거야. 스무살 무렵에 그 스머프 반바지만한 네 자취방에 모여 앉아서 죽어라 부어 마시던 그 때 말이야. 


이사를 하니까 와서 손을 거들라던 네 전화를 받고 호기롭게 그러마 말했지만, 실은 그날 아침에 정말 무진장 가기 싫었드랬다. 일은 왜 그렇게도 바빴냐 말이야. 기자질이라는 게 그랬어. 특히 우리 회사는 더 그랬지. 주말이면 일은 더 많았단다. 뭔 놈의 집회는 그리 많고, 뭐 그걸 굳이 다 챙기려고 하는지. 그날은 모처럼 일정이 없는 주말이었어. 그래서 늦잠을 자고 싶었나봐. 집에서 일어나서 늬 집까지 버스를 타고 또 한시간은 가야 하는데, 넌 아침 9시까지 오라고 했잖아 임마.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 이불 속에서 실눈을 뜨고, '급한 취재가 생겼다고 말하면 이해해주지 않을까?', '걍 무시하고 자버린 다음에 나중에 쿨하게 사과할까' 같은 생각들을 하는 통에 잠이 깨버렸다. 씻지도 않고 비척비척 나와서 버스를 탔다.   


실은 너희 집을 다시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엔 너무 기억이 많아. 부끄러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이제 그곳이 없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잘 모르겠으니 그냥 아침의 일정이 귀찮았던 걸로 해두자. 그게 제일 평범하잖아. 


# 방 한구석 먼지 쌓인 기타 


그러게, 난 어차피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우리 엄마도 이삿날이면 나한테 집 밖에 나가있는 게 더 도움이라고 말했다니까. 내가 늘 지정석처럼 앉던 구석에 또 앉아서, 그 구석에서 살았던 날들의 이야기를 꺼내 수다를 떠는 게 내 역할이었지 뭐. 이럴 줄 알고 너도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을 부른 거잖아. 누누히 말하지만 일은 원래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구. 


누구 누구가 애인한테 차이고 와서 엉엉 울다가 이불 위에 토하던 날, 군대가기 싫다고 새벽까지 술을 퍼마시다 결국 늦잠을 자곤 아침에 춘천까지 택시를 타니 퀵을 부르니 법석을 떨던 날, 너랑 나랑 주먹다짐을 한 날도 있었다. 분명히 내가 이겼지. 코피가 나면 지는 거라는 룰은 도대체 어느 동네 룰이냐. 니가 먼저 울었는데. 거기다 난 원래 코피가 잘 나는 타입이라니까. 그 때 우리가 왜 싸웠는지는 기억하느냐. 난 기억하지만 차마 너무 부끄러워서 말은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에서 다시 분명히 말하건대 전지현이 더 예쁘다 임마.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어제 밤에 초록색 위액을 봤네, 난 피를 토했네, 붉은색 즙이면 그건 쓸개즙이네. 뭐 그런 말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도 밤이 되면 또 술을 들이 부었어. 스물 몇 살 때더라. 누구의 생일이었더라. 하여튼 누구의 스물 몇 번째 생일이었어. 넷이 앉으면 무릎과 무릎이 닿는 네 좁은 방에 7명이서 낑겨 앉아 술을 마시던 날. 생일이라고 굳이 양주를 마셔야 한다면서 싸구려 양주 몇 병을 사들고 들어와서 과일 안주랍시고 귤을 까먹었다. 그 때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날이 참 좋았어. 개미 오줌만큼도 안들어있는 양주병을 죄다 비우고 늘 그랬듯 소주병과 맥주캔이 방 여기저기에 다시 흩어졌고, 먹다 남은 라면국물과 냉동만두 따위가 널부러진 밥상. 그 밥상을 발로 슬슬 밀면서 눕듯이 앉아 노래를 흥얼 거리던 그날. 그 날 눈이 펑펑 왔던 건 기억이 난다. 뻑뻑 피워 올린 담배 연기 넘어 반지하 창문에 눈이 쌓이던 모습이 참 예뻤다. 우리가 불렀던 노래는 뭐였더라. 내가 김장훈을 고래고래 부르다 시끄럽다고 너한테 귤을 맞은 건 분명히 기억하는데. 


학교에서 도망나와 잠수를 탄 것도 그 구석자리였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서 며칠동안 밥도 안먹고 술도 안마셨다. 그냥 그렇게 침잠하고 싶었어. 그 땐 뭐가 그렇게 괴로웠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염없이 괴롭고 슬펐어. 하긴 그 때 우리는 온갖 것들이 다 아프다고 했고, 모든 것들이 다 사랑스럽기도 했어. 사흘째인가 나흘째인가 내가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던 네 말이 참 큰 위로였다. 나중에 넌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넌 늘 그렇게 날 위로해주곤 했었다. 


실은 내가 더 좋은 삶을 살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너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한 네 삶이, 스스로 삶을 꾸리고 지탱해가는 모습이 어느어느 문건 속에서 본 혁명이니 변혁이니 노동의 가치니 하는 말들 보다 훨씬 더 감격스러웠다.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노동해방이 어쩌구를 지껄이던 내게, "이렇게 술을 마시고도 아침이면 꾸역꾸역 눈을 뜨고 일을 해야 하는 게 노동자의 삶"이라면서 "니가 읽는 책 속에도 이런 게 있길 바란다"고 말하던 것도 네 방의 그 구석자리였다. 


내가 너에게 위로가 됐던 날도 있었길 바란다. 그래, 그날처럼. 지금 생각해봐도 넌 참 모질게도 차였었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순정마초인 네놈이 이별을 통고하는 그녀 앞에서 온갖 멋있는 척은 다 하고 돌아온 것도 모자라 우리 앞에서도 멋있는 척 폼잡다가 취해서 질질 짜는 걸 그 때 찍어 놨어야 하는데. 잡스가 조금만 더 일찍 노력해서 아이폰이 몇년만 더 일찍 나왔으면 그 희대의 명장면을 남겨놓을 수 있었을 텐데. 그날 니가 폼잡다 넘어지면서 쪼개진 변기 커버는 아직도 그대로네. 그때 우리의 위로는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지 못했느냐고, 왜 그 앞에서는 울지도 못하고 여기서 추태냐고 놀려댔지만, 우리가 그녀의 결혼식에 똥물이라도 뿌리겠다며 허황된 악다구니를 부렸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진짜였단다. 서툴러서 그랬다. 어쨌든 걘 너 버리고 만난 그 양반이랑 결혼해 잘 산다더라. 이제 너도 행복해야 한다. 침대 밑에 아직도 고이 모셔놓은 그 상자도 이제 그만 버리렴.

    

우리의 안주는 늘 너무 초라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그럭저럭 돈을 벌고 살았으니, 이제 그럴듯한 안주를 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래도 우리의 안주는 계속 초라했다. 가끔 짜장라면을 끓여먹는 게 가장 스페셜한 안주였다. 면이 퍼지도록 졸여서 치즈와 계란을 범벅해 죽처럼 만들어 퍼먹던 그 우리의 스페셜 안주가 어느날 티비에 나왔을 때 호들갑 떨면서 저작권을 요구해야 한다면서 또 낄낄거리기도 했다. 간짜장 곱빼기를 시키고 짬뽕국물을 추가로 달라고 하면 자장면과 짬뽕을 다 먹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누가 냈더라. 기억나지 않으니 내가 낸 걸로 하자. 그건 정말 연필에 지우개를 붙인 이후 인류가 고안한 가장 좋은 아이디어였지. 우리는 그 싸구려 안주들에 줄창 술을 들이 부었다. 이과두주를 그라스에 따라 마시면서 황비홍의 주제가를 엉터리로 따라부르기도 했다. 사내란 응당 강해야 (男兒當自强) 한다면서. 


술을 마시고 울다, 싸우다,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의 이십대는 오직 그것들이었을까. 취하고 떠들고 속상해하고 슬퍼하다 토악질해내듯 다 쏟아내면 다시 살아나 또 집 밖으로 나서는 것. 생각해보니 그 스무살이 네 스머프 반바지만한 방구석에 다 쌓여있다.


# 여전히 난 스무살


어느 날부턴가 네 방에 우리가 모여 앉는 일이 줄어들었다. 누구는 차를 사고, 누구는 주택 청약을 시작하고, 누구는 장가를 가고, 어느 주식이 전망이 좋고 하는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 거리가 되면서였던 것 같다. 사실 제일 먼저 발길을 끊은 건 나였다. 난 그런 이야기들이 싫었거든. 여전히 나는 철없이 가난하고, 제 앞가림도 못하고, 통장에 수만원이 없어서 벌벌떠는 삶이라. 사실 그보다는 이런 초라한 삶에도 응원을 보내주는 너희들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믿는다고, 세상에 내가 하는 말이 가장 똑똑하고 믿음직스럽다고 말해주는 너희들에게 늘 화가 났고 부끄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런 것에 화를 내는 게 부끄러웠다. 아마 몇 년 사이에 위로조차 받지 못할 만큼 내가 형편없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발길도 끊고, 연락도 뜸해졌다. 


네가 제일 서운해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니 전화를 부러 받지 않은 것도 니가 제일 서운해 하리라는 걸 알아서 그랬던 것 같아. 그러면서 말은 참 호화롭게 했다. 삶의 궤적이 달라졌으니 의무감 처럼 만날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의무감처럼 지켜야 하는 것이 어떻게 우정이냐고도 말했다. 의리 놀이 같은 것 좀 하지 말라고 젠체를 하기도 했고. 생채기같은 말들을 소금처럼 뿌려놓고 실은 나도 참 속상했단다. 왜 내 삶은 계속 이모양인지. 왜 나는 늘 가난한지. 왜 나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지, 왜 나는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지. 술에 취해선 그런 말들을 일기장에 쓰는 날 밤에 전화기를 조물딱 거렸지만, 결국 너에게 전화를 하지는 못했다. 모두가 성장하고 있는데 나만 여전히 네 반지하 자취방에 있는 것 같았다. 실은 사과를 하고 싶었다. 너한테는 꼭. 

  

얼마만이더라. 너랑 통화를 한 것이.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사를 도와달라고 했고 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마하고 호기롭게 말했다. 아침에 네 방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그건 아침 일정이 힘들고 귀찮았기 때문이라고 하자. 일은 안하고 구석에 앉아 쫑알쫑알 떠들어댔던 것은 실은 너에게 하는 사과였다. 여전히 서툴어서 그렇다. 하지만 마음은 정말 진짜였단다.  네 방이 없어졌으니, 이제 나도 방구석에 쳐박아놓은 스무살에서 빠져나와야 하겠다. 너희들은 이미 훌쩍 커버렸는데, 나만 꽁하니 구석에 처박혀 세상이 어쩌구하는 말을 떠들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니. 네 방을 정리할 때 날 불러주어서 참말로 고맙다. 나도 그 구석에 안녕을 말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 무엇보다 전화해줘서 고맙다. 


네 새집에는 볕이 잘들어 참 좋더라. 그 스머프 반바지에 비하면 축구장만큼이나 넓어진 집이 네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일곱명이 아니라 열댓명도 둘러앉아 술을 마실 수 있겠더라. 무엇보다 결혼을 축하한다. 어른이 됐구나. 삶에 사람을 들이는 일이, 누구의 삶 속에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 책임과 노력이 어떤 것인지 넌 참 잘 아는 사람이니까,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테다.


이제 아마 그 때처럼, 이과두주를 그라스에 부어마시던 때처럼 살 수는 없겠지.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서도 안되겠지. 하지만 그 때를 더 소중히 기억하면서 살자. 그리고 조금씩 더 좋은 어른이 되자. 


그래도 가끔 만나 황비홍 노래를 부르면서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좋겠다. 사내라면 응당 강해야지.


++


BGM은 토이의 <안녕, 스무살>

생각해보니 나 이 노래 부르다가도 귤 맞았던 것 같은데.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10 - 인사동 노마드



인사동이야 유명한 한량들의 놀이터다. 천상병의 시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때, 천상병의 부인이 운영하는 '귀천'이라는 찻집이 인사동 어드메에 아직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설레하면서 인사동 골목을 누비기도 했다. 찻집이야 뭐 별 거야 없더라만, 거기 앉아 모과차를 홀짝거리면서 괜히 시인이 여기 어디쯤 앉아서 쓰린 속을 부여잡고 '나의 가난은'같은 시를 쓰면서 또 철없는 술타령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하는 일은 퍽 즐거운 일이었다.




# 예술에 대한 동경.




좋은 예술은 좋은 삶에서 비롯한다고 여전히 믿는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믿는다. 믿는 일이란 아는 것과는 또 다른 영역의 것이니까.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는 작가들, 화가들, 배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그들의 예술에는 좋은 삶이 깃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것은 예술이 아닐 것이라고 애써 말한다. 


노래를 부르는 일, 시를 짓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는 일. 삶과 세계를 사랑해서, 그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서 더 좋은 세계와 사람을 상상하고 새로움을 그려내고 누구에겐가 건네고 또 받는 일. 오직 그런 일만을 예술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 어쩌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좋은 예술은 좋은 삶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반대로 좋은 삶이란 좋은 예술을 빚어내는 삶일 것이다. 그게 글이든 노래든, 그림이든. 이런 바람을 무책임하고 막연한 동경이라고 꼬집어도, 무식한 환상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블리치에서 말하길, 동경은 이해와 가장 멀리 있는 말이라고 했지. 난 아마 예술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닐까.ㅋ)


듣기로, 인사동은 좋은 시와 좋은 그림과 좋은 노래를 건네주던 예술가들, 한량들의 놀이터다. 놀이터였다. 과거에는 그랬다고 한다. 술에 취한 천상병이 시를 쓰고,  민병산이 '철학의 즐거움'을 이야기하던 시절. 그런 얘기를 어깨넘어로 귀동냥하거나 책으로만 주워들었지만, 듣기로 그 때는 그랬다고 한다. 지금의 인사동 모습에서 그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잔뜩 들어섰고, (스타벅스를 한글로 써서 인사동에 로컬라이징 했다고 마케팅하는 건 정말 너무 알량하지 않나.ㅋ) 휘황한 간판들 밑에 조악한 하회탈 모형과 효자손이 늘어섰다가, 외국인 관광객들은 호텔로 돌아가고, 한국인 젊은이들은 길 건너 종로의 술집으로 몰려들어가는 늦은 밤이 되면 모든 조명이 꺼지고 사람도 사라진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술 한되를 받아들던 한량들의 모습같은 거 사실 인사동이 아니라 어디에 있을까. 듣기로 그랬다.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있었는지, 있는지도 모를 예술에 대한 동경은 더 가소롭다. 




# 노마드



종로경찰서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인사동 끄트머리로 향하면, 높은 담벼락을 뒷배삼아 "이제 어디로 쫓아낼테냐" 하고 묻는 것 같은 술집들이 있다. '가까스로'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그 집들엔 머리 희끗한 이들이 둘러 앉아 그 높은 담벼락 바깥의 세계에서는 도통 하지 않을 것 같은 말들을 한다. 누가 보기는 하는 지 알 수 없는 연극 포스터들이 군데군데 덕지덕지 붙어 있다. 옛날 노래소리와 그 옛날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부르는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아마 그런 게 예술일까?. 모르겠다. 그들의 삶이 좋은 삶이었는지, 혹은 좋은 삶이 될지, 그냥 옛날을 그리워하고 세계에서 외면받는 것을 예술이라거나 풍류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니까 내가 괜한 '말' 따위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실은 모르겠다. 


어쨌거나 골목 한가운데 술집, '유목민', 노마드는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요즘처럼 덥지도 춥지도 않을 즈음이면 가게 바깥 골목에 자리를 벌이고 앉아서 소주잔이나 막걸리 사발 위로 담뱃재를 날리며 술을 마신다. 괜히 귀천에 앉아 천상병을 상상했던 것처럼, 거기 앉아서 시덥잖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나도 예술의 어느 한 구석에, 그 시절의 한량들이 벌이는 풍류의 한자락이라도 닿길 바라면서 가소롭고 알량한 허세를 부리는 거다.


인터넷에서 훔쳐온 사진이다. 앞으로는 이제 정말 사진을 열심히 찍겠습니다.



언제더라, 이삼년쯤 된 것 같은데. 그날도 골목 구탱이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 뒷자리에는 영화배우와 감독, 제작자들 일군이 앉아서 영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가끔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가끔은 어느 누구에 대한 험담을 상스런 육두문자를 섞어서 늘어놓고 있더라. 그 옆에는 환갑은 진즉에 넘었을 것 같은 남자들이 앉아서 음악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끔 인권이, 현식이, 용필씨 같은 말들이 나오는 걸로 연배를 짐작했는데, 김현식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동갑이니까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았겠다. 


그날도 맞은 편에 앉은 친구의 얘기보다 옆테이블 소리에 더 흥미를 두는 못된 습성이 동해 그들의 얘기를 훔쳐듣고 있었다. 거개가 왕년에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 뮤지션이었는지 떠벌이는 자랑을 가장한 푸념이거나, 지금 잘 나가는 그 놈들이 얼마나 사기꾼이고 나쁜 놈들인지를 알려주는 험담을 가장한 질투이거나. 우리는 그 시시껍절한 소리들을 엿들으면서 나이듦과 낡아가는 것과, 부여잡아 썩어가는 것과, 나아가지 못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희망을 근거삼아 오직 새로운 상상력에 대한 긍정만이 예술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맞아, 그 사람들 들으라는 듯이 그랬다. 아마 우리의 허세와 드러내기 부끄러운 동경이 더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혹시나 우리도 늙어가지 않을까 무서워서, 혹시 우리의 삶에 정말로 예술이 깃들지 않으면 어쩌나 무서워서. 일부러. 


바이올린 가방을 든 초로의 남자가 골목으로 비척비척 들어선 건 더이상 얘기를 엿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인권이가 내 밑에서~~"라고 말하던 남자가 바이올린 남자에게 아는 체를 한다. 바이올린을 들춰맨 남자는 꾸벅 인사를 하고 그 테이블 옆에 서서 몇마디를 주고 받다가 이내 바이올린을 꺼냈다. 작은 스피커도 꺼냈다. 무슨 곡이었더라. 귀에는 익은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연주했다. 작은 스피커는 찢어질 듯 듣기 싫은 소리를 냈고, 연주는 썩 훌륭하지 않았다. 그래도 술에 취한 가을 밤, 인사동 어름에 흐르는 바이올린 소리가 어떻게 싫겠어. 박수를 보냈다. 


우리의 박수가 향한 건 연주자였지만, 박수를 받은 건 '인권이를 밑에 뒀던' 남자였다. 묻지도 않은 곡목으로 시작한 곡 설명을 한참하던 그는 "이제 사람들이 잘 아는 가요로 한 곡 해봐"라고 말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태도였지만 사양할 새도, 말릴 새도 없이 연주는 시작됐다. 광화문 연가. 중간중간 음정도 틀리고, 악보를 잊은 듯 듬성듬성 연주가 끊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연주를 마치면 열심히 박수를 쳐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연주는 노마드 사장님의 제지로 중단됐다. "민원 들어오니까 연주는 안됩니다". 그럴리가.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내가 이자리에서 몇 번이나 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연주중인 곡을 중간에 끊으면 어쩌나. 무례해. 무례하다고.


내가 그 무례하다고 눈살을 찌푸려봤자 무슨 상관이야. 바이올린 남자는 별다른 항의없이 바이올린과 스피커를 챙겼다. 그리고 연주를 시켰던 남자에게 막걸리 한사발을 얻어마시고선 자리를 떴다. 종로경찰서 사이로 난 좁은 길. 올 때처럼 비척비척. 그 모습을 보면서 쓸쓸해보인다고 말하려다 이내 관뒀다. 그의 연주가 어쨌건, 막걸리 한사발이나 비척거리는 걸음이나 내가 뭐라고. 그걸 쓸쓸하다고 말해. 



광화문연가를 연주할 때 동영상을 찍었다. 캡처한 후 사진은 부러 뿌옇게 보정했다.



# 예술이라 부르는 유목생활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목은 어쩌면 그 예술을 운운하는 한량들에게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어느 한 곳이고 발붙이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 안주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하는 일. 모든 것의 변화를 꿈꾸고, 늘 다음의 것을 상상하고 새로움을 향하고, 그래서 지금 있는 자리에 있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떠남을 전제로 잠시간 머무는 것. 그러면 예술과 여행과 삶은 다 비슷한 것 아닐까. 우리는 끊임없이 떠나요. 우리는 끊임없이 헤어져요. 우리는 계속 부족해요. 한순간도 온전하고 안온할 수 없어요. 


며칠 전, 어떤 예술도 어떤 현실보다 극적일 수 없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현실의 삶이란 늘 더 절실하거나 부박해서, 고작 재현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진짜'의 무엇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 얘기를 할 때 노마드의 바이올린 남자를 떠올렸다. 좁은 골목길의 비척거리는 걸음과 예술에 대해서, 찢어진 소리를 내는 고물 스피커와 연주에 대해서, 소음 민원과 막걸리 한사발에 대해서. 그의 예술과 쓸쓸해보인다는 말에 대해서 떠올렸다. 좋은 예술이란 좋은 삶에서만 기인할 것이란 동경, 어떤 예술도 현실보다 극적일 순 없겠다는 말. 그 말과 동경이 허술한 것은 어쩌면 예술과 삶이라는 것이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겠다. 고 오늘은 생각했다. 바이올린 남자의 비척거리는 뒷태와 찢어진 스피커와 광화문 연가.


<아이다호>라는 영화를 봤을 때, 리버피닉스가 분한 마이크 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평생 길을 맛보며 길위에서 잠드는 도로의 감별사. 길 자체가 집이고 목적지이며 경유지였던 그. 떠나고 또 떠나며 어느 한 곳에도 머무르지 않았던 그의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스콧, 마이크의 사랑을 지나고, 길위의 삶을 지나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간 그처럼 안주하게되고 멈추게 되는 것이 싫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 사진을 핸드폰이나 모니터 화면 속에 박아넣고 그런 삶을 운동이나 예술 같은 표상에 끼워맞추는 얘기들을 많이도 지껄였는데. 실은 스콧의 삶도, 마이크의 삶도, 내 살아가는 꼬라지도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을 오늘은 했다. 바이올린 남자가 마신 막걸리와, 소음에 대한 민원과 나의 가난은. 떠나는 것만으  





예술이 살아가는 일만 못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이 곧 예술이고 예술은 좋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이 그냥 예술일지 모르겠다. 우리는 계속 부유하며 행복함을 좆겠지. 부유하며 좋은 시를 찾는 것처럼. 다만 우리의 부유는 더 나은 곳을 향한 유목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떠나온 자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분탕질이진 않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앞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부박함이란 내일의 나아짐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어제있던 곳이 아니라 내일 있을 곳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삶이란 그런 것이고, 삶이 곧 예술이라면 예술도 그런 것이겠지. 어제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 들뢰즈는 "사막이나 스텝을 늘리되 그곳에서 인간이 살 수 없게 만들지는 말라"고 했다. 우리는 부유하며 떠난 곳을 황폐하게 할 것이 아니라 부유하며 우리의 스텝을, 사막을 조금씩 늘려 그 곳에 사람이 살게해야 한다.고 오늘은 생각했다. 



# 2018 트랜디 한량


인사동에 가봐야 천상병이나 박이엽, 민병산 같은 이들은 없다. 그들이 없으니 인사동도 이제 예전같지 않다.고 말하는 늙은 남자들은 아직 있다. 하지만 2018년 오늘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한량의 미덕이라면 그곳에 과거의 누가 있건, 오늘은 오늘의 술을 마시고 오늘의 노래를 부르면 될 일이다.ㅋ


노마드는 음식이 정갈하다. 추천 메뉴는 콩탕이다. 비지찌개처럼 걸쭉하고 되직하지 않다. 고소한 콩냄새와 담백한 국물이 좋아서 소주든 막걸리든 막 오조오억병씩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방문에서 더는 콩탕을 팔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콩국을 얻어오던 거래처 사장님이 돌아가셨단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법이니 새로운 안주를 개발하자. 지난 번엔 두부김치와 생태탕을 먹었다. 맛이 없을리가 없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 미세먼지 대신 담뱃재 날리는 노상에 죽치고 앉아 술을 먹는데, 좋지 않을리가 있나. 이게 2018 S/S 트랜드 조선 한량의 참모습이다.   


BGM은 전범선과 양반들로 하지 뭐.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6 종로 - 락커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암굴같은 입구다. 롤링스톤즈며 밥 딜런, 데이빗 보위의 사진이 붙어있는 입구를 지나 들어가면 담배연기 자욱한 가운데 듬성듬성 테이블이 몇개 널부러져 있다.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오는데 묘하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고요함에 가깝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테이블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인장이 그런 테이블을 딱히 자제시키는 것도 아니건만 소란스러움은 아니다. 끈적거릴만큼 친밀하지도 않고 버름할만큼 데면데면하지도 않다.


# Midnight In Rock'n Roll


자고로 락스타란 불꽃처럼 살다가 떠나버려야 한다. 벽에 똥칠하며 오래도록 사는 건 락스타의 의무가 아니다. 그러니까 60년대의 3J처럼. 


락커스에 처음 갔을 때 쯤 도어즈의 노래가 나왔다. Light My Fire. 

짐 모리슨처럼 살고 싶었는데.


락커스의 벽에는 어느 시대를 살았던 어느 락스타들의 사진이 잔뜩 걸려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누구인지를 특정할 필요는 없다. 다 락스타다. 무언가를 부쉈고 자기가 부서지는 삶을 살았던. 





락커스에는 주로 3차쯤, 그러니까 술도 좀 오르고 이야기거리도 좀 떨어졌을 때 가곤했다. 그래서 락커스에서의 대화는 주로 벽에 붙어있는 락스타들의 시시껍절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주다스프리스트의 롭 할아버지와 프레디 머큐리가 서로를 놀려대고 씹어대던 이야기나 (롭 할아버지가 "프레디는 모터사이클 대회에 나가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자 프레디가 "그가 발레수트를 입고 발레공연을 한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던)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의 러브스토리 같은 얘기들에 멋대로 온갖 스토리를 가져다 붙이며 낄낄거리며 놀아대는. 약에 찌들어 자살한 락스타는 사랑할 수 있지만 무병장수하며 옛날노래로 투어나 도는 할배들은 용서할 수 없다며 놀아대는.





길 건너 종로통에 온통 소몰이 목동들이 흐느끼는 노래만 나오는 호프집이 가득하다. 간판도 막 소리를 지르고 있다. 들어오라고. 그 골목에서 한블럭만 도망치면 롹스피릿이 이렇게나 충만한 곳이 있다. 심지어 사장님은 존 레논을 닮았다. 정말이다. 깜짝 놀란다. 그래서 과장을 한움큼 정도만 보태서 얘기하면 락커스의 암굴같은 입구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시간이 건너뛰는 그 골목과 같다. SG워너비에서 도망쳐 진자 사이먼앤 가펑클을 만나러 왔습니다.


신청곡을 많이 내지는 않지만 가요만 아니라면 장르불문 거의 대부분의 신청곡을 다 틀어주는 편이고, (가끔 가요도 틀어준다. 그렇다고 SG워너비나 휘성 같은 걸 틀어주진 않아요) 신청곡 리스트에서 파생돼 주인님이 틀어주는 음악도 좋다. 마치 "너네 이 노래도 좋아하지?" 하는 것 같이.



 # 나만 알고 싶은 집





좋아하는 술집 중에 누구든 다 같이 가서 술마시고 싶은 집이 있는가 하면, (이를테면 전봇대집은 누구라도 함께 가고 싶은) 되게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나누고 싶은 집이 있다. 락커스는 후자. 그러니까 비장의 술집이라는 거다.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하다고 하기에 홍대와 강남이 더 익숙한 제 또래의 친구들은 아무도 모르더라만요)한 곳이지만 그래도. 


락커스는 이상하게 내밀하고 (어두워서 그른가) 묘하게 안락하다 (의자가 그렇게 작은데도!!). 어느 날 내가 술마시자며 락커스에 함께 가면 그 쪽을 되게 좋아한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막 의미를 부여해야 뭐라도 걸릴 것 같아서.ㅋ)



# 그 때


락커스에 가장 많이 드나들던 건 한 7~8년 전쯤. 그 땐 사흘에 한 번이 멀다하고. 낙원상가 옥상에 서울아트 시네마와 필름포럼이 있고, 인디스페이스는 중앙극장에, 시네코어도 그 부근에 있을 무렵이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살았던 그 때를 나는 허송세월 기(期)라고 부르는데, 매일같이 저 위에 늘어놓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교보문고에 배깔고 누워 책을 읽었다. 낮에는 중앙극장 옆에 있는 싸구려 커피집에서 커피를 사서 명동성당에 앉아 있었고 낙원상가에서 1500원짜리 국밥으로 배를 채우다 날이 저물면 락커스에서 술을 마셨다. 전화기도 없어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돈도 없어서 늘상 걸어다녔다. 걷다가 공중전화를 보면 전화를 해서 누구를 불러내거나,(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동전을 산처럼 쌓아놓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허송세월이라고 말했지만 그 때는 참 소중했던 시절이다. 얻은 것만 있고 잃은 것은 없이 버린 것만 있는 때. 락커스는 그래서 좋다. 그 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공간들, 소리나 냄새, 마셨던 술이나 사람이 좋은 것.


그렇게 1년쯤 놀고 다시 복학하게 될 때 락커스도 문을 닫고 공사를 시작했다. 셔터에는 '봄이 오면 보자'고 써 있었나. 복학하고 봄이 오고 몇 달쯤 후 락커스를 다시 갔을 땐 내부 인테리어도 매우 멀끔해지고 공간도 더 넓어지고. 그래도 예전만 못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바뀌어야 하고 넓어져야 하고 깨끗해져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지난 것들에 천착하지 않고. 시절은 시절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술집도 내 삶도.



# etc


1.

하지만 락커스는 좀 비쌉니다. 근래엔 편의점에서도 온갖 수입맥주들을 쉽게 살 수 있으니 기네스 한 병에 만원을 받고 필스너우르켈 한 병에 9천원을 받는 락커스는 확실히 비싸요.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으니 다른데서 술을 원껏 마시고 막차로 가거나, 아니면 아껴먹어야 합니다. 락커스에서 술을 먹고싶은만큼 먹었다가 기둥뿌리가 뽑혀본 경험에서 드리는 충심어린 조언입니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기둥뿌리가 하나 없어요.


2.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다 말해놨지만 '나만 알고 싶은 술집'의 기조를 지키기 위해 약도나 정확한 위치 같은 건 공유 안합니다. 그냥 검색하세요. 찾기 엄청 쉬워요. 다만 일요일은 문을 닫습니다. 일요일에 갔다 낭패보지 마시길.


3.

락커스가 문을 닫았다면 그 옆에 '오존'이라는 맥주집도 좋습니다. 이 연재에 끼워줄만큼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아요. 동행인이 에어로스미스보다 림프비즈킷을 더 좋아한다면 오존 쪽이 더 괜찮을 겁니다. 거긴 밥도 팔아요. 맛은 없지만.


4.

늘 그렇듯이 사진은 인터넷 어드메에서 불펌. 그래도 한 장은 직접 찍은 사진임니다. 친구랑 술마시다가, 쟤는 지 사진이 이렇게 쓰이는 줄 모르겠지. 초상권 따위 난 몰라요.ㅋ


5.

스토리지 사이트가 유료화되면서 음악을 올릴 방법이 없네. 기껏해야 유튜브 링크. 



   

       

 


The Doors - Light My Fire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5 한남동 - 개골목


본래 5편은 종로의 락커스를 하려했지만, 뭐 이게 돈받고 하는 일도 아니고 쓰고 싶은 순서야 내 맘이지.ㅋ

요 며칠 학교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그 때 사람들을 계속 만났더니, 한남동을 지나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오고 있으니.


개골목이라는 괴랄스러운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입학도 하기 전이었다. 오래도록 우리 옆집에 살던 형은 우리학교 화학과 96학번이다. 나도 한남동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자 그 형은 제일 처음 내게 "엄마 걱정하시니까 개골목같은데 다니지 말라"고 했다. 그 땐 개골목이 뭐 어디 유명한 술집 이름쯤 되는 줄 알았다. 


그 때 그 형의 충고란 실제로는 술 많이 먹고 다니지 말라는 농담섞인 말이었겠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개골목으로 대변되는 '그 정서'를 조심하라는 선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보게된다. 아무튼 괴랄한 골목이었고 거기에 기생한 괴랄한 삶, 또... 어쨌든. 


# 박제


개골목은 단국대학교 정문에서 한남역 방향으로 술을 찾아 걷기 시작하고 더이상 술을 마시지 않고는 걸을 수 없겠다 싶을 때쯤 나타나는 작은 골목이다. 80년대 영화에나 나올법 한 낡고 허름하고 종종 더러운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저마다 가게들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각 과마다, 무리마다 멋대로 부르는 이름들로 더 많이 불리는. 사실 각각의 무리들마다 가는 집은 거의 정해져 있어서 "개골목에 가자"는 곧 그 집을 가자는 얘기니까 이름같은 게 굳이 필요 없다.


그러니까 개골목은 골목 전체가 마치 하나의 술집처럼 인식되곤 했는데, 그건 개골목이 어떤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면 거꾸로 그렇게 골목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되는 현상이 이같은 문화를 만들어낸 것일 수도. 


아무튼 개골목에는 그 골목에서만 통용되는 '정서'가 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해보라면, 아마 '박제'. 그곳에선 사람도 시간도 공간도 심지어 음식도 박제된다. 머무름. 모든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듯한. 그리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마침내 제대로 썩지도 못하고 사라지거나, 혹은 버려지거나. 박제가 돼 더 오랜 시간을 버텨내지만 결국 색이 바래고 사람들은 잊어가고 외면했던 시간에 두들겨 맞아.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 두 발로 걸어가게 하지 않는다


개골목이라는 이름은 "네 발이 되기 전엔 나갈 수 없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이 얘기를 해준 선배들은 그네들의 선배한테 그렇게 전해들었을 테고. 그 선배들도 뭐 마찬가지겠지. 그게 뭐 중요한가. 어쨌든 정말로 네 발로 기기 전엔 나오기 힘들다. (물론 난 네발로 기어서 나온 적 없다. 내가 바로 개골목 최후의 승자.)


소주는 다른 술집보다 쌌다. 그 때 다른 술집들에서 보통 2500원이었던 거 같은데 여긴 2천원이었다 그 밑이였나. 안주라곤 꼴랑 닭도리탕 하나인데 (벽에 붙여놓은 메뉴판엔 삼겹살이니 부대찌개니 있지만 시켜본 적도 없고 시키면 나올지도 의문이다.) 닭도리탕 국물에 밥까지 볶아먹고도 부족해 냄비를 박박 긁는 주제에 소주를 더 달라고 하면 주인 할머니가 옛다 먹어라하는 표정으로 계란말이를 대자로 부쳐주신다. 그럼 또 소주를 댓병은 더 마시고, 안주가 또 부족해지고 결국 깍두기를 국물까지 퍼먹고 바닥까지 긁어먹는 '악순환'이라 쓰고 '일상'이라 읽는 일이 펼쳐진다. (그래봤자 계란말이를 또 주지는 않는다.)






닭도리탕은 솔직히 맛있지 않았다. 닭을 초벌로 익혀서 기름을 빼거나 육수를 미리 뽑거나 하는 수고 같은 건 애초에 기대도 해선 안되고 그냥 토막낸 생닭과 갖은 채소와 양념을 한 냄비에 넣고 맹물 부어서 끓여준다. 익기까지 시간도 오래걸리고 닭이 익는 동안 감자는 푸석 부서지고 당근은 흐물거리게된다. 누가 먹더라도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맛. 그런데 그걸 그렇게 먹고 다녔다. 사실 맛이 뭐가 중요하겠나. 어차피 두어시간 쯤 지나면 다 토해버릴 것들.ㅋ 개골목 초입 공터에는 온갖 싸움박질 소리와 발악발악 부르는 노래소리 (그건 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악발악이 옳은 표현이다)와 함께 토악질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여간 개골목에서 술을 먹는다는 의미는 "오늘 하굣길에 가볍게 맥주나 한잔 하자"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늘 먹고 죽자, 술마시고 니가 죽건 내가 죽건 나는 책임을 지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내일 아침 안전하게 학생회실에서 눈을 뜰거야"의 의미에 가깝달까. 정말 신기하게도 개골목에서는 아무리 술에 꽐라가 돼도 다음날 아침이면 무사히 학생회실 생활방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래, 신기해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다 나같은 마당쇠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와 땀방울이었음을 그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씨바.) 같이 술마시던 나를 따돌리고 일문과 여학우들하고 개골목에서 놀다가 만취가 돼선 개골목 앞 트럭밑에서 자고 있는 총학생회장을 업고 학생회실까지 옮겨놓은 것도 나였다. (우린 기계과 개강총회 뒷풀이에 있었다. 무려 기계과. 총학생회장 그는 나를 기계과에 버려두고...)  


# 박제된 공동체의 흔적


"네 발로 기어나가야 한다"면서도 그렇게 술들을 퍼 마실 수 있었던 건 그런 노력의 축적이었다. 


"니가 말은 그렇게 해도 날 버리고 가진 않을 거잖아." 


그건 막연한 신뢰감의 표출이었고 그 신뢰가 본심이었든 관성이었든 아니면 허세나 동경 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좀 웃기는 감정이었든 어쨌든 그 때 거기서 같이 술을 마시는 친구들에겐 그런게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학생'이나 '청춘'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집단의 특권이었거나 아니면 강요됐던 그것. 공동체, 유대감, 의리, 낭만 뭐 그런 거.


그래서인가 우리는 거기서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큰소리로. 

주로 민중가요를 개사한 '과가' 같은 거였다. 

같이 있음을 과시하고 동질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개골목엔 여기저기서 피, 심장, 조국, 미제 뭐 이런낱말이 가득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제일 시끄러운건 행정학과 애들이었다. 그네들은 과가로 '동지가'를, 학생회 사회부 애들은 '결전가'를 불렀는데, 그 노래들을 엄청 시끄럽고 결의에 차서 부르는데 술에 취해 혀는 꼬부라진 뭐 늘 그런 웃기는 상태였던 거 같다. 하여튼 어깨동무하고 팔뚝질하면서 동지가를 부르다가 갑자기 막 토하고 울고 업고가고.


그 진상의 나날들. "하지만 같이 진상을 부리는 게 청춘의 낭만이고 특권이잖아"라고 강변하는 듯한 모습.


(우리과 과가는 '조국과 청춘 두번째'를 개사한 노래였다. 이게 원래 엄청 빡쎈데 여성비율이 높은 과 특성상 부르기만 하면 곱고 예쁘게 뽑히는게 문제였다. 나중엔 그게 아예 자리를 잡아 새로운 편곡이 나와버린 느낌. 나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ㅋ)  


그러나 사실 그 때 이미 공동체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었다. 못된 구태만 남은 공동체의 흔적. 

우리는 함께 살기 보다는 각자 살다 가끔 모여 술을 마시는 관계였다. 동지같은 낮부끄런 말은 꺼내본 적도 없다. 노래를 불렀지만, 그냥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가졌던 환상, 선배들이 강요한 유대감, 마뜩치 않게 여겼지만 억울해서 나도 후배에게 강요했던 그것. 그것들을 어떻게든 보위하려 했던 감정이 모이는 곳이었다. 우리의 개골목은. 환상을 지켜내거나, 아니면 그 환상에 잠깐만 들어가 보거나. 어쨌든 공동체가 존재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 있었다. 그 환상을 가진 우리들은 개골목 밖에선 박제된 이들이었고, 개골목은 박제를 잠깐 생명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 그 어줍지않은 환상


낡고 허름하고 더러운데다 맛도 없는 개골목을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건 그 아주 오래된 대학생, 청춘의 모습을 닮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저기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면 마치 이제는 지나가버린 그 시절을 우리에게로 소환해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 같은 거였다.


2천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우리는 (적어도 나는) 늘 그런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 시달렸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들처럼 조국통일이나 노동해방을 외치기엔 어딘가 쑥쓰러웠고,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들이 열광했던 문화적 풍요도 없었다. 김연수는 뉴트롤즈와 첩혈쌍웅과 개같은 날의 오후에 열광하던 세대를 '나의 세대'라고 말하더라만, 우리에겐 함께 열광하고 공유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들지 않는 철없는 어린이가 되거나, 빨리 나이들어버린 애늙은이가 됐다. 어느 쪽이든 시간의 흐름을 잡아채고 머무는 박제의 상태.


# 버려지는 박제


철거되거나 이사간 집에서 나온 쓰레기 무더기를 보면 가끔 박제들이 섞여있다. 한 때는 살아있었을, 그 이후에도 어느 부잣집 서재에서 자태를 뽐냈을. 하지만 버려진 박제는 흉물스럽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썩어야 할 때 썩지 못한. 두 눈을 부릅뜨고 쓰레기 더미 안에 쳐박힌.


시절을 고이 보내지 못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박제가 돼버린 것들은 흉물스럽고 딱 그만큼 안쓰럽다. 어떤 욕심이 그것들을 썩어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나.


겪어보지도 못한 지난 시절을 그저 말만 듣고 그리워했던 건 시대를 박제로 만들게 한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생명도 시간도 세계는 그렇게 흐르고 변화하고 썩고 다시 태어나는 게 순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고집스럽게 낡게된다. 


개골목에서 보냈던 스무살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는 건 그 시절의 어리석고 소중했던 마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지나쳐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개골목이 있던 자리는 이제 비싼 수입 오토바이 매장과 뭐가들어설지 아직 모르는 공사장으로 변했다. 학교가 옮겨간 후에도 2년정도 더 자리를 지키던 몇몇 가게들도 이제 없어졌다. 최후까지 남아있던 개골목 할머니집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 깍두기에 곰팡이가 슬어있는 걸 보고 더이상 개골목을 찾지 않았다. 하긴 그 무렵 할머니집도 문을 닫았다. 음식도 가게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게 마련이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사랑. 깍두기는 익어야 맛있지만 곰팡이가 슬면 버려야 한다.


# 여담


1. 개골목에서 술마신 얘기를 이렇게 거창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지껄였지만, 이건 내 감상일 따름이다. 개골목에 얽힌 추억은 개골목을 들락거린 사람 수만큼 많을 테다. 그냥 난 그랬다고요.


2. 개골목에 얽힌 더럽고 야한 얘기들도 많은데, 차마 쓸 수가 없다. 그거 쓰면 거의 일베감. 


3.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해 어디어디 학회나 동아리의 단체손님을 독점하던 한남복집은 96년 H의장 정명기 의장의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다. 그래서 한동안 집회 뒷풀이 장소로 많이 쓰였다고. 하지만 내가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다. 


4. 오늘은 닭도리탕에 소주를 마시겠다.  


5. 사진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그냥 퍼왔다. 너무 예전일인가, 사진 하나 없네.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2 - 서교동, 묘한술책

술집유랑기를 써봐야지.란 마음을 먹고 첫 번째로 포스팅한지 1년이 넘었으니 이 게으른 연재는 연간인 것으로...ㅎ


어쨌든 2편 시작.



어느 날인가 여지없이 할랑할랑 술마실 집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2010년의 가을 쯤이었던 것 같다. (2009년일 수도 있고) 세상 모든 일에 까칠한 편이지만 술 마실 집을 고르는데는 특히 그 까칠함을 배로 발휘하는 더러운 성질을 보유했기 때문에 엉덩이 붙일 자리를 찾기 위해 한두시간쯤 길바닥을 헤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는 그 날도 일행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기억에, 묘한술책은 조금 촌스럽고 무성의한 꼬마전구 같은 것들로 창문을 칭칭 감아놓고 쪼그만 간판만 하나 겨우 붙여놓은 채 골목안에 숨어있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유명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애정이 식어버리는 변태적 마이너 감수성의 소유자인 '우리'(나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다..끼리끼리라고 하지않나)는 골목 안에, 그것도 이층에, 굉장히 작게, 심지어 어두컴컴하게, 남들은 잘 안갈 것 같은 분위기인 그곳을 굉장히 맘에 들어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것들은 다분한 오덕의 냄새, 만화책, 내 엉덩이엔 너무 작아보이는 의자들, 그리고 묘하게 눈에 띄던 체게바라.같은 이름.




언젠가 꼭 소개하고 싶지만 없어져서 아쉬운 '작은상자'같은 가게를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분명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뭔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손님이 들어왔어도 과한친절을 보이지 않고 자기 자리의 술자리를 지켜내려 노력하는 주인의 모습..이랄까..ㅋ


건네준 메뉴판도 좋았다. 그러니까 세트이름 같은 아이디어를 말함인데, 국산맥주 세트인 자랑스런 한국인이나 볼셰비키 메롱메롱(은 보드카 세트였던가), 먹고 죽자는 세트인 모태꽐라..뭐 이런 이름들. 내가 또 이런 소소한 아이디어에 홀딱 반하는 디테일한 남자임..ㅋ


여하간, 첫 방문에 매우 호감이었던 이 곳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찾으려했을 때, 묘한 술책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엔 무슨 네일샵인가가 들어서 있더라. 그리하여 그날 밤의 묘한 술책은 우라시마 타로가 다녀온 용궁이었던 것인가, 내가 육관대사를 만난 구운몽의 성진이 된 것인가, 이 허망한 인생은 꿈인지 나비가 나인지 하여튼 뭐. 그렇게 "묘한술책이라는 괜찮은 곳을 찾았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인지 그날 밤이 꿈이었던 것인지..."같은 신비로운 체험 수기를 둘러대기 수 차례, 기어이 어느 길모퉁이에서 묘한술책을 다시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불까지 꺼져있는 이 작은 간판을 매의 눈으로 집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당연히 그날도 어둑한 밤, "지훈이가 술집은 잘 찾음"같은 '묘한'펌프질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눈알을 굴리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그 작은 간판을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심지어 너무 늦은 시간이었던 탓인지 간판은 불이 꺼져 어두웠다. 게다가 난 양쪽 눈 모두 근시, 난시, 원시를 패스해 값비싼 초고굴절비구면 렌즈를 착용한 환자의 안구를 보유한 남자인데.


불꺼진 간판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스무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묘한술책을 찾았다. 내가 스무시간동안 묘한술책가서 술마실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진짜다.. 그 땐 그런 초잉여킹 시절이었다.) 



묘한술책은 스페셜한 위크엔드를 더욱 엣지있게 보낼 수있게끔 보다 인텔리전스하고 아방가르드하게 리뉴얼돼있었고  이 인테리어는 그 어떤 미셀러니도 놓치지 않을만큼 센서티브하고 트렌디했다. 아키하바라 본토에서 건너온 듯한 피규어들과 브릿팝의 시크한 멜로디들이 내츄럴하게 콜라보레이트 되면서 페르시안 고양이의 엘레강스하고 시크한 워킹이 조화를 이룬 파티피플의 핫플레이스로 탈바꿈 돼 있었다....(는 보그병신체를 좀 써보고 싶었지만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니 일단 패스ㅋ)

묘한술책에 들었을 때, 벽엔 여전히 체게바라가 적혀있었고, 주인 내외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으나 거북한 친절을 내세우며 과하게 맞이하지는 않는 매력을 뿜어냈으며, 한켠엔 커트코베인과 인코그니토의 브로마이드, 쌓여있는 책들과 피규어, 은은한 담배냄새, 그리고 고양이 수 마리(아직도 고양이가 정확히 몇 마리인지 모르겠다... 볼 때마다 걔가 걔같고...;;)





묘한술책에 가면 늘 국산맥주세트를 먹게된다. 내가 가난해서 그런게 아니다. 난 원래 국산맥주를 좋아한다. 엉엉엉.
여하튼 맥주를 시켜놓고 흥아흥아 놀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손님이 없으면 리퀘스트 페이뻐를 적어 주인언니에게 전달하면 주인언니 뜻대로 이런저런 것들을 골라서 틀어주시기도 했다. (손님이 없고 주인언니 기분이 상쾌해 보여야 한다. 한 번은 손님 많다고 거절당한 적도 있다. 무지 민망했다) 종종 함께 가는 선배 김 모 씨는 듀스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는 막장 진상을 부렸으나 약간, 아주 약간 귀여워서 주인언니의 용서를 받고 지금도 그를 볼때면 그 댄스를 이야기하곤 하시더라.

묘한술책에 묘한 호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언젠가 주인언니가 우리 자리에 오셔서 서명지를 내민적이 있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 서명지였는데, 그 때가 마침 강정마을에 있다가 올라온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당시에 여기저기 술집에서는 삼성카드 받지 않는 불매운동도 막 일어나고 그럴 때였는데. 어쩐지 강정의 노력이 멀리 서울에서도 그것도 이렇게 일상적인 곳에 퍼져가고 있다는 마음이 들어 고맙고 좋고 흐뭇하고 그랬다. 더 자주 와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찍어둔 사진이 있나 뒤적거려보는데, 묘한술책은 아주 한정적인 사람들하고만 함께 갔던 것 같아. 그건 마치 서랍안에 숨겨놓은 내 필살 아이템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몰래 보여주는 그런 느낌. 사실 알고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말이지. 그러니까 묘한술책은 내 비장의 장소.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집인데 말이지.ㅋ

어느 날인가 또 묘한술책에 같이 가는 친구가 새로 생긴다면 좋겠어.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테마별로 사람별로, 날씨별로 가게되는 공간이 달라지는데 말이지. 이를테면 비가 주륵주륵 오는 날, 후배들과 함께 있다면 광장시장으로 가게되고 맘이 있는 그녀와 함께 있다면 고즈넉한 전통주 가게로 가는 것처럼 말이지. 묘한술책은 아마 더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와 함께가는 곳.이란 느낌적인 느낌임니다. 어쩐지 긴밀하거든 거기는.

그러니까 이 유랑기의 애초의 목적대로 유용한 정보를 드리자면, 묘한 술책으로 가서 그녀와 가까워지세요. 비싼 메뉴를 잔뜩 시키시구요, 결제는 일시불로. 물론 이론과 실제는 별개임니다.


덧,
며칠 전에 갔더니 어느 새 금연이 됐더라. 은은한 담배연기와 담배냄새는 사라졌어. 강호의 낭만이 땅에 떨어졌도다. 커트코베인도 체게바라도 모두 담배를 물고있는데 말이지. 금연을 하려면 차라리 이주일 사진을 걸어놓으라고. "국민여러분 꼭 담배 끊으세요" 엉엉엉

덧2,
사진은 여기저기 블로그에서 가져왔음니.. 맨 마지막은 정덤양과 함께 갔을 떄 찍으신..

덧3,
다시 읽어보니 너무 무성의하지만, 뭐 어쩔 수 없슴니다..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걸요..ㅋ
다음 3편은 연간이므로 내년 봄에나 나와야겠지만, 며칠 전 백수가 됐으므로 흥청망청 술마시다 며칠내로 올라올 수도 있슴니다..ㅋ

노래는 트래비스. 여기가 브릿팝의 시크한 멜로디들이 넘쳐나는 곳이다..ㅋ
 

Travis - Clo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