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2 - 서교동, 묘한술책

술집유랑기를 써봐야지.란 마음을 먹고 첫 번째로 포스팅한지 1년이 넘었으니 이 게으른 연재는 연간인 것으로...ㅎ


어쨌든 2편 시작.



어느 날인가 여지없이 할랑할랑 술마실 집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2010년의 가을 쯤이었던 것 같다. (2009년일 수도 있고) 세상 모든 일에 까칠한 편이지만 술 마실 집을 고르는데는 특히 그 까칠함을 배로 발휘하는 더러운 성질을 보유했기 때문에 엉덩이 붙일 자리를 찾기 위해 한두시간쯤 길바닥을 헤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는 그 날도 일행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기억에, 묘한술책은 조금 촌스럽고 무성의한 꼬마전구 같은 것들로 창문을 칭칭 감아놓고 쪼그만 간판만 하나 겨우 붙여놓은 채 골목안에 숨어있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유명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애정이 식어버리는 변태적 마이너 감수성의 소유자인 '우리'(나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억울하다..끼리끼리라고 하지않나)는 골목 안에, 그것도 이층에, 굉장히 작게, 심지어 어두컴컴하게, 남들은 잘 안갈 것 같은 분위기인 그곳을 굉장히 맘에 들어했다.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것들은 다분한 오덕의 냄새, 만화책, 내 엉덩이엔 너무 작아보이는 의자들, 그리고 묘하게 눈에 띄던 체게바라.같은 이름.




언젠가 꼭 소개하고 싶지만 없어져서 아쉬운 '작은상자'같은 가게를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분명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뭔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손님이 들어왔어도 과한친절을 보이지 않고 자기 자리의 술자리를 지켜내려 노력하는 주인의 모습..이랄까..ㅋ


건네준 메뉴판도 좋았다. 그러니까 세트이름 같은 아이디어를 말함인데, 국산맥주 세트인 자랑스런 한국인이나 볼셰비키 메롱메롱(은 보드카 세트였던가), 먹고 죽자는 세트인 모태꽐라..뭐 이런 이름들. 내가 또 이런 소소한 아이디어에 홀딱 반하는 디테일한 남자임..ㅋ


여하간, 첫 방문에 매우 호감이었던 이 곳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찾으려했을 때, 묘한 술책은 이미 사라지고 그 자리엔 무슨 네일샵인가가 들어서 있더라. 그리하여 그날 밤의 묘한 술책은 우라시마 타로가 다녀온 용궁이었던 것인가, 내가 육관대사를 만난 구운몽의 성진이 된 것인가, 이 허망한 인생은 꿈인지 나비가 나인지 하여튼 뭐. 그렇게 "묘한술책이라는 괜찮은 곳을 찾았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버린 것인지 그날 밤이 꿈이었던 것인지..."같은 신비로운 체험 수기를 둘러대기 수 차례, 기어이 어느 길모퉁이에서 묘한술책을 다시 발견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불까지 꺼져있는 이 작은 간판을 매의 눈으로 집어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당연히 그날도 어둑한 밤, "지훈이가 술집은 잘 찾음"같은 '묘한'펌프질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눈알을 굴리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그 작은 간판을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심지어 너무 늦은 시간이었던 탓인지 간판은 불이 꺼져 어두웠다. 게다가 난 양쪽 눈 모두 근시, 난시, 원시를 패스해 값비싼 초고굴절비구면 렌즈를 착용한 환자의 안구를 보유한 남자인데.


불꺼진 간판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스무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묘한술책을 찾았다. 내가 스무시간동안 묘한술책가서 술마실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진짜다.. 그 땐 그런 초잉여킹 시절이었다.) 



묘한술책은 스페셜한 위크엔드를 더욱 엣지있게 보낼 수있게끔 보다 인텔리전스하고 아방가르드하게 리뉴얼돼있었고  이 인테리어는 그 어떤 미셀러니도 놓치지 않을만큼 센서티브하고 트렌디했다. 아키하바라 본토에서 건너온 듯한 피규어들과 브릿팝의 시크한 멜로디들이 내츄럴하게 콜라보레이트 되면서 페르시안 고양이의 엘레강스하고 시크한 워킹이 조화를 이룬 파티피플의 핫플레이스로 탈바꿈 돼 있었다....(는 보그병신체를 좀 써보고 싶었지만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니 일단 패스ㅋ)

묘한술책에 들었을 때, 벽엔 여전히 체게바라가 적혀있었고, 주인 내외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으나 거북한 친절을 내세우며 과하게 맞이하지는 않는 매력을 뿜어냈으며, 한켠엔 커트코베인과 인코그니토의 브로마이드, 쌓여있는 책들과 피규어, 은은한 담배냄새, 그리고 고양이 수 마리(아직도 고양이가 정확히 몇 마리인지 모르겠다... 볼 때마다 걔가 걔같고...;;)





묘한술책에 가면 늘 국산맥주세트를 먹게된다. 내가 가난해서 그런게 아니다. 난 원래 국산맥주를 좋아한다. 엉엉엉.
여하튼 맥주를 시켜놓고 흥아흥아 놀다가 주위를 둘러보고 손님이 없으면 리퀘스트 페이뻐를 적어 주인언니에게 전달하면 주인언니 뜻대로 이런저런 것들을 골라서 틀어주시기도 했다. (손님이 없고 주인언니 기분이 상쾌해 보여야 한다. 한 번은 손님 많다고 거절당한 적도 있다. 무지 민망했다) 종종 함께 가는 선배 김 모 씨는 듀스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는 막장 진상을 부렸으나 약간, 아주 약간 귀여워서 주인언니의 용서를 받고 지금도 그를 볼때면 그 댄스를 이야기하곤 하시더라.

묘한술책에 묘한 호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언젠가 주인언니가 우리 자리에 오셔서 서명지를 내민적이 있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반대 서명지였는데, 그 때가 마침 강정마을에 있다가 올라온지 얼마 안됐을 때였다. 당시에 여기저기 술집에서는 삼성카드 받지 않는 불매운동도 막 일어나고 그럴 때였는데. 어쩐지 강정의 노력이 멀리 서울에서도 그것도 이렇게 일상적인 곳에 퍼져가고 있다는 마음이 들어 고맙고 좋고 흐뭇하고 그랬다. 더 자주 와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찍어둔 사진이 있나 뒤적거려보는데, 묘한술책은 아주 한정적인 사람들하고만 함께 갔던 것 같아. 그건 마치 서랍안에 숨겨놓은 내 필살 아이템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몰래 보여주는 그런 느낌. 사실 알고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말이지. 그러니까 묘한술책은 내 비장의 장소.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한 집인데 말이지.ㅋ

어느 날인가 또 묘한술책에 같이 가는 친구가 새로 생긴다면 좋겠어.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테마별로 사람별로, 날씨별로 가게되는 공간이 달라지는데 말이지. 이를테면 비가 주륵주륵 오는 날, 후배들과 함께 있다면 광장시장으로 가게되고 맘이 있는 그녀와 함께 있다면 고즈넉한 전통주 가게로 가는 것처럼 말이지. 묘한술책은 아마 더 가까워지고 싶은 친구와 함께가는 곳.이란 느낌적인 느낌임니다. 어쩐지 긴밀하거든 거기는.

그러니까 이 유랑기의 애초의 목적대로 유용한 정보를 드리자면, 묘한 술책으로 가서 그녀와 가까워지세요. 비싼 메뉴를 잔뜩 시키시구요, 결제는 일시불로. 물론 이론과 실제는 별개임니다.


덧,
며칠 전에 갔더니 어느 새 금연이 됐더라. 은은한 담배연기와 담배냄새는 사라졌어. 강호의 낭만이 땅에 떨어졌도다. 커트코베인도 체게바라도 모두 담배를 물고있는데 말이지. 금연을 하려면 차라리 이주일 사진을 걸어놓으라고. "국민여러분 꼭 담배 끊으세요" 엉엉엉

덧2,
사진은 여기저기 블로그에서 가져왔음니.. 맨 마지막은 정덤양과 함께 갔을 떄 찍으신..

덧3,
다시 읽어보니 너무 무성의하지만, 뭐 어쩔 수 없슴니다..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걸요..ㅋ
다음 3편은 연간이므로 내년 봄에나 나와야겠지만, 며칠 전 백수가 됐으므로 흥청망청 술마시다 며칠내로 올라올 수도 있슴니다..ㅋ

노래는 트래비스. 여기가 브릿팝의 시크한 멜로디들이 넘쳐나는 곳이다..ㅋ
 

Travis - Clo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