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5 한남동 - 개골목


본래 5편은 종로의 락커스를 하려했지만, 뭐 이게 돈받고 하는 일도 아니고 쓰고 싶은 순서야 내 맘이지.ㅋ

요 며칠 학교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그 때 사람들을 계속 만났더니, 한남동을 지나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오고 있으니.


개골목이라는 괴랄스러운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입학도 하기 전이었다. 오래도록 우리 옆집에 살던 형은 우리학교 화학과 96학번이다. 나도 한남동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자 그 형은 제일 처음 내게 "엄마 걱정하시니까 개골목같은데 다니지 말라"고 했다. 그 땐 개골목이 뭐 어디 유명한 술집 이름쯤 되는 줄 알았다. 


그 때 그 형의 충고란 실제로는 술 많이 먹고 다니지 말라는 농담섞인 말이었겠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개골목으로 대변되는 '그 정서'를 조심하라는 선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보게된다. 아무튼 괴랄한 골목이었고 거기에 기생한 괴랄한 삶, 또... 어쨌든. 


# 박제


개골목은 단국대학교 정문에서 한남역 방향으로 술을 찾아 걷기 시작하고 더이상 술을 마시지 않고는 걸을 수 없겠다 싶을 때쯤 나타나는 작은 골목이다. 80년대 영화에나 나올법 한 낡고 허름하고 종종 더러운 가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저마다 가게들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각 과마다, 무리마다 멋대로 부르는 이름들로 더 많이 불리는. 사실 각각의 무리들마다 가는 집은 거의 정해져 있어서 "개골목에 가자"는 곧 그 집을 가자는 얘기니까 이름같은 게 굳이 필요 없다.


그러니까 개골목은 골목 전체가 마치 하나의 술집처럼 인식되곤 했는데, 그건 개골목이 어떤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면 거꾸로 그렇게 골목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되는 현상이 이같은 문화를 만들어낸 것일 수도. 


아무튼 개골목에는 그 골목에서만 통용되는 '정서'가 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해보라면, 아마 '박제'. 그곳에선 사람도 시간도 공간도 심지어 음식도 박제된다. 머무름. 모든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듯한. 그리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마침내 제대로 썩지도 못하고 사라지거나, 혹은 버려지거나. 박제가 돼 더 오랜 시간을 버텨내지만 결국 색이 바래고 사람들은 잊어가고 외면했던 시간에 두들겨 맞아.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 두 발로 걸어가게 하지 않는다


개골목이라는 이름은 "네 발이 되기 전엔 나갈 수 없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이 얘기를 해준 선배들은 그네들의 선배한테 그렇게 전해들었을 테고. 그 선배들도 뭐 마찬가지겠지. 그게 뭐 중요한가. 어쨌든 정말로 네 발로 기기 전엔 나오기 힘들다. (물론 난 네발로 기어서 나온 적 없다. 내가 바로 개골목 최후의 승자.)


소주는 다른 술집보다 쌌다. 그 때 다른 술집들에서 보통 2500원이었던 거 같은데 여긴 2천원이었다 그 밑이였나. 안주라곤 꼴랑 닭도리탕 하나인데 (벽에 붙여놓은 메뉴판엔 삼겹살이니 부대찌개니 있지만 시켜본 적도 없고 시키면 나올지도 의문이다.) 닭도리탕 국물에 밥까지 볶아먹고도 부족해 냄비를 박박 긁는 주제에 소주를 더 달라고 하면 주인 할머니가 옛다 먹어라하는 표정으로 계란말이를 대자로 부쳐주신다. 그럼 또 소주를 댓병은 더 마시고, 안주가 또 부족해지고 결국 깍두기를 국물까지 퍼먹고 바닥까지 긁어먹는 '악순환'이라 쓰고 '일상'이라 읽는 일이 펼쳐진다. (그래봤자 계란말이를 또 주지는 않는다.)






닭도리탕은 솔직히 맛있지 않았다. 닭을 초벌로 익혀서 기름을 빼거나 육수를 미리 뽑거나 하는 수고 같은 건 애초에 기대도 해선 안되고 그냥 토막낸 생닭과 갖은 채소와 양념을 한 냄비에 넣고 맹물 부어서 끓여준다. 익기까지 시간도 오래걸리고 닭이 익는 동안 감자는 푸석 부서지고 당근은 흐물거리게된다. 누가 먹더라도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맛. 그런데 그걸 그렇게 먹고 다녔다. 사실 맛이 뭐가 중요하겠나. 어차피 두어시간 쯤 지나면 다 토해버릴 것들.ㅋ 개골목 초입 공터에는 온갖 싸움박질 소리와 발악발악 부르는 노래소리 (그건 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악발악이 옳은 표현이다)와 함께 토악질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여간 개골목에서 술을 먹는다는 의미는 "오늘 하굣길에 가볍게 맥주나 한잔 하자"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늘 먹고 죽자, 술마시고 니가 죽건 내가 죽건 나는 책임을 지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내일 아침 안전하게 학생회실에서 눈을 뜰거야"의 의미에 가깝달까. 정말 신기하게도 개골목에서는 아무리 술에 꽐라가 돼도 다음날 아침이면 무사히 학생회실 생활방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래, 신기해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다 나같은 마당쇠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와 땀방울이었음을 그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씨바.) 같이 술마시던 나를 따돌리고 일문과 여학우들하고 개골목에서 놀다가 만취가 돼선 개골목 앞 트럭밑에서 자고 있는 총학생회장을 업고 학생회실까지 옮겨놓은 것도 나였다. (우린 기계과 개강총회 뒷풀이에 있었다. 무려 기계과. 총학생회장 그는 나를 기계과에 버려두고...)  


# 박제된 공동체의 흔적


"네 발로 기어나가야 한다"면서도 그렇게 술들을 퍼 마실 수 있었던 건 그런 노력의 축적이었다. 


"니가 말은 그렇게 해도 날 버리고 가진 않을 거잖아." 


그건 막연한 신뢰감의 표출이었고 그 신뢰가 본심이었든 관성이었든 아니면 허세나 동경 뭐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좀 웃기는 감정이었든 어쨌든 그 때 거기서 같이 술을 마시는 친구들에겐 그런게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학생'이나 '청춘'같은 이름표를 달고 있는 집단의 특권이었거나 아니면 강요됐던 그것. 공동체, 유대감, 의리, 낭만 뭐 그런 거.


그래서인가 우리는 거기서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큰소리로. 

주로 민중가요를 개사한 '과가' 같은 거였다. 

같이 있음을 과시하고 동질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개골목엔 여기저기서 피, 심장, 조국, 미제 뭐 이런낱말이 가득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제일 시끄러운건 행정학과 애들이었다. 그네들은 과가로 '동지가'를, 학생회 사회부 애들은 '결전가'를 불렀는데, 그 노래들을 엄청 시끄럽고 결의에 차서 부르는데 술에 취해 혀는 꼬부라진 뭐 늘 그런 웃기는 상태였던 거 같다. 하여튼 어깨동무하고 팔뚝질하면서 동지가를 부르다가 갑자기 막 토하고 울고 업고가고.


그 진상의 나날들. "하지만 같이 진상을 부리는 게 청춘의 낭만이고 특권이잖아"라고 강변하는 듯한 모습.


(우리과 과가는 '조국과 청춘 두번째'를 개사한 노래였다. 이게 원래 엄청 빡쎈데 여성비율이 높은 과 특성상 부르기만 하면 곱고 예쁘게 뽑히는게 문제였다. 나중엔 그게 아예 자리를 잡아 새로운 편곡이 나와버린 느낌. 나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ㅋ)  


그러나 사실 그 때 이미 공동체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었다. 못된 구태만 남은 공동체의 흔적. 

우리는 함께 살기 보다는 각자 살다 가끔 모여 술을 마시는 관계였다. 동지같은 낮부끄런 말은 꺼내본 적도 없다. 노래를 불렀지만, 그냥 노래를 불렀을 뿐이다. 


가졌던 환상, 선배들이 강요한 유대감, 마뜩치 않게 여겼지만 억울해서 나도 후배에게 강요했던 그것. 그것들을 어떻게든 보위하려 했던 감정이 모이는 곳이었다. 우리의 개골목은. 환상을 지켜내거나, 아니면 그 환상에 잠깐만 들어가 보거나. 어쨌든 공동체가 존재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 있었다. 그 환상을 가진 우리들은 개골목 밖에선 박제된 이들이었고, 개골목은 박제를 잠깐 생명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 그 어줍지않은 환상


낡고 허름하고 더러운데다 맛도 없는 개골목을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건 그 아주 오래된 대학생, 청춘의 모습을 닮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저기서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면 마치 이제는 지나가버린 그 시절을 우리에게로 소환해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환상. 같은 거였다.


2천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우리는 (적어도 나는) 늘 그런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 시달렸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들처럼 조국통일이나 노동해방을 외치기엔 어딘가 쑥쓰러웠고,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선배들이 열광했던 문화적 풍요도 없었다. 김연수는 뉴트롤즈와 첩혈쌍웅과 개같은 날의 오후에 열광하던 세대를 '나의 세대'라고 말하더라만, 우리에겐 함께 열광하고 공유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들지 않는 철없는 어린이가 되거나, 빨리 나이들어버린 애늙은이가 됐다. 어느 쪽이든 시간의 흐름을 잡아채고 머무는 박제의 상태.


# 버려지는 박제


철거되거나 이사간 집에서 나온 쓰레기 무더기를 보면 가끔 박제들이 섞여있다. 한 때는 살아있었을, 그 이후에도 어느 부잣집 서재에서 자태를 뽐냈을. 하지만 버려진 박제는 흉물스럽다.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썩어야 할 때 썩지 못한. 두 눈을 부릅뜨고 쓰레기 더미 안에 쳐박힌.


시절을 고이 보내지 못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박제가 돼버린 것들은 흉물스럽고 딱 그만큼 안쓰럽다. 어떤 욕심이 그것들을 썩어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나.


겪어보지도 못한 지난 시절을 그저 말만 듣고 그리워했던 건 시대를 박제로 만들게 한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이라는 것을, 생명도 시간도 세계는 그렇게 흐르고 변화하고 썩고 다시 태어나는 게 순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고집스럽게 낡게된다. 


개골목에서 보냈던 스무살 시절을 그리워할 수 있는 건 그 시절의 어리석고 소중했던 마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지나쳐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개골목이 있던 자리는 이제 비싼 수입 오토바이 매장과 뭐가들어설지 아직 모르는 공사장으로 변했다. 학교가 옮겨간 후에도 2년정도 더 자리를 지키던 몇몇 가게들도 이제 없어졌다. 최후까지 남아있던 개골목 할머니집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 깍두기에 곰팡이가 슬어있는 걸 보고 더이상 개골목을 찾지 않았다. 하긴 그 무렵 할머니집도 문을 닫았다. 음식도 가게도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게 마련이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사랑. 깍두기는 익어야 맛있지만 곰팡이가 슬면 버려야 한다.


# 여담


1. 개골목에서 술마신 얘기를 이렇게 거창하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지껄였지만, 이건 내 감상일 따름이다. 개골목에 얽힌 추억은 개골목을 들락거린 사람 수만큼 많을 테다. 그냥 난 그랬다고요.


2. 개골목에 얽힌 더럽고 야한 얘기들도 많은데, 차마 쓸 수가 없다. 그거 쓰면 거의 일베감. 


3.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해 어디어디 학회나 동아리의 단체손님을 독점하던 한남복집은 96년 H의장 정명기 의장의 부모님이 하시던 가게다. 그래서 한동안 집회 뒷풀이 장소로 많이 쓰였다고. 하지만 내가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다. 


4. 오늘은 닭도리탕에 소주를 마시겠다.  


5. 사진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걸 그냥 퍼왔다. 너무 예전일인가, 사진 하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