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리뷰 - 마이 플레이스, “그건 평균이지, ‘정상’이 아니에요”



사고 (事故)[사ː고][명사]

1.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2.사람에게 해를 입혔거나 말썽을 일으킨 나쁜 짓.


“사고를 쳤어”. 한 숨을 푹 내쉬는 아버지, 죄를 지은 듯 침통한 표정을 짓는 어머니, 고개를 푹 숙인 딸, 흥분한 듯 숨을 씩씩거리는 오빠. 사랑의 도피행각 끝에 배가 불러 나타난 딸이 ‘사고’란 대사를 뱉으면 비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 전형적인 한국의 홈드라마라면 그렇다.


사전에 나온 것처럼 ‘사고’는 ‘불행한 일’이며 ‘나쁜 짓’이다. 하여 공공기관의 수장을 낙마시킬 만큼 혼외임신을 부도덕한 짓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임신(사실 이 표현도 지극히 모순적이다. 처녀가 어떻게 임신을 하나)은 분명 ‘사고’다. 더구나 임신을 했으면서 결혼은 굳이 하지 않겠다는 딸이라면 이보다 큰 사고뭉치는 없다. 딸을 임신 ‘시킨’ 그 놈(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사위는 아니다)은 결혼해 딸과 손주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거다.     


# 정상성에 대한 질문


전형적인 한국의 드라마에서 사고친 딸의 귀환 시퀀스만큼이나 흔한 연출은 또 임신한 연인에게 “내가 책임지겠다”며 “결혼하자”말하는 남자의 결기어린 선언이다. 임신한 연인을 대하는 남성들의 책임감은 대부분 ‘결혼제도로의 편입’이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그것은 그대로 결혼제도 바깥에서의 출산과 육아를 무책임한 것, 그리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다. 


<마이플레이스>는 어느날 느닷없이 임신해서 나타난 감독의 여동생과 가족들, 그리고 여동생의 아들 소울이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그야말로 계획되지 않은 사고를 치고 집에 돌아온 딸과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 


<마이 플레이스>의 박문칠 감독은 영화에서 “평소 자신을 꽤나 진보적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임신해서 돌아온 여동생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숫제 딸의 임신소식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알려지면 이제 난 교회에도 못다닌다” 면서. 아버지는 손자 소울의 돌잔치 초대장에도 누구의 아이인지 정확히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 문숙은 이 임신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결혼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계획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캐나다의 정부가 지원하는 육아지원금과 학자금 대출을 통해 생활을 꾸리고 학업을 마친 이후에 대출금을 갚아나가겠다는. 실제로 문숙과 소울은 계획대로 캐나다 정부의 보조금과 학자금대출, 무상보육 시스템을 활용하며 충분히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주변에서 우려한 것처럼 ‘계획에 없던 사고’, ‘무책임하고 철없는 행동’이 아님을 삶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


흔히 말하는 ‘정상가족’이란 어쩌면 판타지에 다름없다. 혹은 편집증이나 강박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양부모와 미혼의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역사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가족을 대표하는 가족형태이며 정상성을 획득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사생아(私生兒)라는 표현은 이 이데올로기가 우리사회에서 갖는 역할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겠다. “공식적이지 못하고 사사롭게 태어난 아이”라는 뜻인 사생아의 영어 표현은 ‘Love Child’. 오히려 사랑과 출산, 행복 같은 말은 결혼 바깥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조금 심각해져본다면, 엄부자모의 단란한 4인 가정이라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국가와 자본이 ‘국가권력’과 ‘생산수단’을 소유한 채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의 성’을 통제하여, 가능하면 최고의 노동력, 즉 국민을 끊임없이 가장 싸게 제공받음으로 궁극의 이익인 국가경쟁력, 자본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미셸푸코는 “성권력의 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이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이용해 ‘생명의 정치적 배치’를 관리하고 통제한다”고 말한다.

 

결국 덧없고 무의미한 정상가족, 정상성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사회의 비혼 여성이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은 것’에 가깝다.


# 가족의 의미


하여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모든 억압과 통제의 기초단위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족은 살아갈 힘을 만들어주는 모든 행복의 기초단위이기도 하다. <마이 플레이스>에서 감독은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연출했던 단편영화를 소개한다. 사회로부터 결국 소외당한 주인공이 결국은 엄마 품으로 찾아드는 내용의.


언젠가 가족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족을 “억지를 부릴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이라는 말로 정의한 적 있다.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다소 폭력적이지만 의례히 받아 줄 것이라고 여기며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대상들이라는 의미였다. 어디서 큰 빚을 지거나 혹은 말도 안되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도 아니라면 방구석에서 잉여노릇하며 백수로 피둥피둥 한심하게 살아도 받아줘야하는, 받아 줄 수 있는 존재들. 최후의 순간까지 치달은 후에 결국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믿음의 대상 같은 것. (물론 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족이란 친족간의 혈연적 유사성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유대관계가 그 핵심에 더 가깝겠다.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아이는 갖고 싶었던 문숙의 솔직한 속내는 “어떤 경우라도 자기 편이 돼주는 존재”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기존의 가족에서 느끼지 못했던 유대관계를 자신의 분신으로 부터 얻고 싶었던 마음. 

  

# 다시, 가족의 탄생


<마이 플레이스>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서로 오해하거나 잘 모르고, 그래서 왜곡되거나 삐뚤어졌던 혈연적 가족관계에서 소울의 탄생이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가까워지는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는 듯한 모습이다. 


딸 문숙은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미워했지만 소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또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마찬가지로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를 이해할 계기를 갖게 된다. 감독 역시 ‘이방인’과 ‘비정상’으로 살아야 했던 가족사를 더듬으며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던” 어린 시절과 지금의 모습을 되새긴다. 


차별과 가난에서 도망쳐 캐나다를 찾았던 부모세대와 다시 돌아온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던 자식세대. 두 세대의 고통은 ‘다름’을 배제하고 ‘평균’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이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용납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경직성에 ‘이방인’으로 떠돌던 가족. 그러나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지탱시켜주는 것 역시 가족이라는 것을 이들은 소울의 탄생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된다. 한 곳에 모여 살지 않아도,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유지되며 서로의 버팀목이 돼주는 가족, ‘마이 플레이스’의 탄생이다. 


# 소울


감독 가족의 결합을 이끌어낸 소울은 어느덧 아홉살이 됐고 캐나다에서 행복하게 성장 중이다. 가끔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는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가족을 ‘비정상’이라고 여기지 않는 건강한 어린이로 자라고 있다 한다. 소울은 한국과 몽골(감독의 아버지는 몽골에 거주하며 봉사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캐나다에 각각 떨어져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 엄마를 모두 가족이라 부르며 “사람들은 생김새와 피부색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관찰해낼 만큼 영특하고 “그래도 모두 같아졌으면 좋겠다” (글쓴이의 자의적 해석일 수 있지만,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살면 좋겠다는 의미로 들렸다)고 말할만큼 기특한 어린이로 자라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체화하며 ‘정상’을 강요받지 않는 아이들이 자라 만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장면.

 


안녕, 김연아

스포츠 중계를 보려고 졸린 눈 부비며 깨어있었던 게 얼마만인지.


클래스가 다른 천재의 마지막 무대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그건 기술의 클린이나 난도가 높은 점프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아름다움에 대한 경배. 냉정하게 기록을 따지는 '경기'가 아니라 서로의 아름다움을 견주고 순수하게 경탄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무대'에 대한 감사. 몇 년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군림한 여왕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그녀의 우아함에 한 번이라도 탄성을 질러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들었을테다.


메달의 색깔과는 관계없이 오늘도 최고로 아름다웠다. 마지막이라는 짠한 상황이 곁들여지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눈물이 찔끔할만큼. 김연아가 좋아졌던 건, 언젠가 얼음위에서 '기술'을 부린다고 생각되던 다른 선수들에 비해 그녀만이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였다.  오늘도, '안녕, 할아버지'하고 춤추는 모습은 지난 몇 년간의 시간들을 그러니까 힘겹기도 영광스럽기도 때로는 지겨웠을지도 모를 그 시간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양. 


아름다움의 가치는 메달의 색깔이나 몇몇 사람들의 점수 따위로 매겨지는 것은 아니겠다. 시간이 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의 오늘의 누구를 기억할지에 따라, 혹은 어느 한 사람이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따라.


김연아의 뒤에서 더 힘들었을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악셀 성공도 축하한다. 은퇴하는 마오도 마침내 (메달따위와 관계없이) 기쁘고 행복했을 무대였음. 집착이네 발악이네 하는 저열하고 치졸한 조롱에도 끝내 도전하고 성공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조금씩 전성기의 나이를 지남에 따라 신체능력도 저하되고 어쩌면 생애 마지막 올림픽에서도 넘어지도 조롱받을지 모를 도전을 끝내 시도하고 마침내 성공하는. 삶에서 대부분의 도전이란 언제나 비루하고 가망없고 허무하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끝내는 성공해버리는 이야기. 일본의 청춘만화 스토리같고 좋다. 아름답고.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이번 심판진의 채점은 잘못된 것 같다. 아마 올림픽을 통해 왕년의 영광을 되살려보려는 푸틴의 삽질이 애꿏은 선수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고 있는 거겠지. 분노하고 비판해야지. 다만 거기에 분해서 평창에서 두고보자느니 러시아를 어쩌겠다느니 하는 사람들을 보자면 조금 답답하다. 똥묻힌 놈이 싸우잔다고 같이 똥묻히자는 것 같아서. 사실 88년이며 2002년에 한국도 똑같거나 더한 짓 많이 했다. 그 치졸한 분풀이들이 오늘 보았던 아름다운 춤사위에 똥물을 튀길까 저어된다.


여튼, 아디오스 할아버지.했던 김연아의 다음 행보도 기대된다. 어디서든 발군이었던 클라스는 어느 곳으로 가도 빛난다는 내 지론은 거의 과학적 이론에 가깝다. 


이쯤에서 오늘의 그녀를 보고 생각나는, 

연화야 낙목한천의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다큐리뷰 - 식코, 감기도 못고치는 사회에 대한 조롱


의사는 한국 드라마 주인공의 직업으로 가장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대부분 “의술 보다는 인술”을 실천하라는 격언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며, 돈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가슴 아파 하고, 한 발 나아가서는 그 치료비 마련을 위해 애쓴다. 시골 보건소나 낙도의 공중보건의로 일하거나 ‘국경없는 의사회’같은 NGO에 들어 제 3세계 오지로 의료봉사를 떠나기도 한다. 그런 주인공들의 가장 큰 라이벌은 “병원도 기업이야”, “병원은 흙파서 치료 하냐”란 대사가 어울리는 또 다른 의사 혹은 병원 경영자들이다. 그들은 병원 경영을 위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으며 이른바 ‘돈 되는 환자’를 유치하는데 혈안이 돼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드라마가 그렇듯이 그들도 극의 말미에는 대오각성, 가난한 이들에게도 평등하게 의료행위를 실천하는 의사가 된다.


드라마에서 ‘가난한 환자도 잘 돌봐주는 의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수익을 올리는데 치중하는 의사’가 결국은 패배하는 라이벌로 등장하는 까닭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 즉 우리의 인식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적어도 돈이 없어 사람이 죽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믿음. 그러나 동시에 그런 ‘착한 의사’들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제는 그런 의사를 현실보다는 판타지의 세계에서나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모종의 불안감도 익히 알기 때문이다.


# 늬들 어떻게 그러고 사니?


마이클 무어가 만든 <식코>는 미국의 의료보험제도가 얼마나 형편없는 제도인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한에서 가장 처절하게 비난하는 영화다. 작업 중 중지와 약지 손가락을 잘린 남자가 병원비 때문에 약지손가락만을 봉합하기로 결정했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이클 무어는 미국의 민간의료보험이 어떻게 환자들을 ‘죽여 왔는지’ 수 십 개의 사례를 나열한다. 마이클 무어를 따르며 미국의 민간의료보험을 살펴보자면 미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다. 그들은 보험신청을 더 잘 거부한 직원과 의사에게 더 높은 연봉을 주고, 아무리 시급한 환자여도 보험회사가 지정한 병원 외에는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우기다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병원비 지불 능력이 없는 환자는 봉합도 끝나지 않은 환부를 그대로 드러내놓고 병원 밖으로 내쫓거나 보험금이 지급된 환자의 병력을 뒤져 보험금을 기어이 환수해가기도 한다.


미국 의료보험제도의 난점을 살피는 마이클 무어의 태도는 차라리 미국인들에 대한 조롱에 가깝다. “늬들 어떻게 이러고들 사냐?”. 그 조롱은 비교적 공공의료체계가 잘 잡혀 있는 나라들과의 비교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마이클 무어는 미국인들이 조롱하거나 경멸하곤 하는 프랑스와 쿠바, 영국, 캐나다의 의료제도를 보여주며 미국인인 자신이 그들의 의료보장제도에서 얼마나 충격을 받는지를 극적으로 연출한다. 영화의 말미, 미국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쿠바에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는 장면은 미국에 대한 조롱의 정점을 찍는다. 미국에서 200달러나 하는 약을 쿠바에선 단돈 5센트에 구입한 인물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눈물을 짓는다. (심지어 미국에서 의료보험보장을 받지 못해 쿠바에서 치료를 받은 이들은 미국정부가 ‘영웅’으로 호칭했던 9.11 사건의 구조대원들이다. 그들은 당시 테러범들이 수용돼 있는 관타나모 형무소만큼의 의료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마이클 무어는 영화에서 “세상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 한다. “단지 아프면 치료를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웃과 더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 결국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가장 당연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 우리는 의료를 지킬 수 있을까 


<식코>가 우리나라에 개봉한 건 2008년이었다.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된 촛불의 시선이 의료를 비롯한 공공부문의 민영화로 점차 넓어지던 바로 그 때. 그리고 5년여가 지난 2013년, 정부는 원격의료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을 내놓으며 의료민영화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지금 나오는 ‘의료민영화’ 논란은 그리 정확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사회의 의료는 이미 민영화돼 있기 때문이다. 의료 공급은 이미 94%가 민간병원에서 이뤄진다. 대부분의 대형 대학병원은 물론 동네의원들까지 민간이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이점을 강조하며 의료공공성의 핵심인 건강보험의 민영화 계획이 없으므로 ‘의료민영화’는 없다고 꾸준히 주장한다. 정부의 말마따나 건강보험민영화가 없는 한 의료민영화는 없다면 정말  ‘의료민영화’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다시 바꿔야 한다. “우리는 의료의 공공성을 지켜갈 수 있을까?” 


흔히들 한국의 의료보장제도가 미국의 그것보다는 월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 착각이다. OECD 국가들의 의료체계에서 한국은 미국과 함께 민간형 의료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분류된다.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성은 현재 55% 정도다. (OECD 평균은 75%) 적자가 심각하다는 이유로 환자를 내쫓아가며 문을 닫은 진주의료원 같은 공공병원도 전체 병원의 10%에 불과하다. 


사실상 영리병원을 허용한 정부정책에서 영리병원에 투자한 자본이 병원을 통해 수익창출을 시도하기 시작했을 때 그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간다. 건강보험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의료민영화가 아니라던 정부의 말도 한미 FTA 체결로 민간의료보험 시장의 성장과 해외 의료법인의 국내시장 진출이 허용됐음을 떠올리면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식코>에서 그렇게 잔인하고 치밀했던 미국의 의료보험회사들이 한국시장에 몰려오고 그들이 한국의 영리병원에 투자하며 수익을 거둬간다 해도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돈이 없어 환자가 죽어나가는 일은 한국에서도 이미 발생하고 있다. 한국의 의료보험 체계에서도 건강보험은 의료원가의 일부만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병원은 환자가 부담해야 하는 각종 비급여 서비스와 과잉의료를 제공하는 변칙적 방법을 사용한다. 의료라는 전문 분야에 대한 정보력이 극히 취약한 소비자인 환자는 사실상 의사의 판단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과잉진료와 비급여 서비스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한 번에 수백만 원씩 하는 치료나, 수천만 원의 병원비가 없어서 환자가 죽거나 가산을 탕진하는 에피소드는 이미 한국사회의 클리셰다.


# 감기 걸려 사람이 죽어선 안 되는 거잖아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철학이다. 아니 그보다는 삶의 방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한미 FTA니, 무슨 정책이니, 계획이니 하는 말들 보다는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돈 때문에 죽이지는 말자”는 마음. 고작 이런 마음에 철학이니 윤리니 하는 거창한 말들을 가져다 붙이기는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공공(公共)’이나 ‘복지’라는 말만 나오면 경제수준이나 규모, 효율성이나 합리성 같은 말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환자가 누워있는 병원의 문을 닫은 도지사도 있었다. 그런 이들일수록 대부분 ‘국격’이나 ‘선진국’같은 말은 두 손을 들고 환영하기도. 그러나 국격이란 적어도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일이 없는 나라에서 쓸 수 있는 말일테다. <식코>에서 공공의료의 좋은 예로 보여준 영국의 의료보장제도는 1948년에 시작됐다. 전쟁이 끝난 지 고작 3년 후. 온 나라가 폭격의 잔해도 치우지 못했던 그 시절에 영국은 적어도 아픈 사람만은 사회가 함께 치료하자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따라하고 싶어서 법과 제도를 총체적으로 수입하기로 결정한 ‘선진’ 미국은 ‘적국’ 쿠바보다 영아사망률도 높고 평균수명도 짧다. 무엇이 ‘선진’이고 국격일까.


근래에 보기 시작한 어느 드라마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봤다. 힘들게 번 돈을 모두 병원에 기증하는 어느 청년에게 병원원장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자 그 청년은 “사람이 감기에 걸렸다고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드라마의 배경은 1930년대였다. 2014년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겨우겨우 빠져나온 감기 걸려 사람 죽는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페이스공감 기획 - 리플레이


EBS 스페이스 공감, 10주년 기획 - 리플레이


"공감은 2014년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며 그 시작 선에서 함께 출발했던 다양한 뮤지션들을 선정, 10년 전 세상에 나온 그들의 1집을 1번 트랙부터 차례대로 들어볼 수 있는 <리플레이> 시간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는 음악의 가치와 10년 전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드리는 시간이자 또 다른 시작을 여는 자리"




일생 당첨이니 당선이니 하는 말들과는 무관하게 살아왔지만, 공감에서만은 좀 사랑받은 것 같다.

정말 꼭 보고싶었던 공연은 대부분 당첨이 됐고, 당첨빈도나 횟수도 주변 친구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내가 당첨되놓고 시간이 안되서 친구들 보내준 공연도 좀 된다.ㅋ


공감에서 (특히 헬로루키에서) 처음 만나 반해버리곤 지금껏 좋아하는 팀도 있고,

장사익 아저씨나 김창기 아저씨 같은 여간해서 만나기 힘들었던 사람들의 노래도 공감 덕에 들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허클의 공감 공연은 3번쯤 본 것 같다. 


얼마전 공감이 축소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사태를 맞아 염통이 쫄깃해졌었지만, 다행히 잘 해결된 것 같고, 해결을 축하라도 하듯 이런 기똥한 기획이. 공감이 처음 문을 연 2004년에 난 대학에 입학했고, 좋아하는 여자애도 생겼고 술도 무진마셨고, 노래도 엄청 들었다. 그 때 좋아하던 이들의 1집을 다시 리플레이하는건 아마 여전히 주억거리며 차마 놓지 못하는 그 스무살을 다시 떠올리게 해줄 것 같아.


그 시절에 곧 들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매우 좋아하는 이장혁이나 MOT 같은 팀들의 1집앨범이 2004년에 나왔었고, 이번에 첫 타자로 나서는 가리온의 1집도 04년이다. 일단 가자, 매봉역으로.ㅋ


(여기서 공감당첨 필살 노하우를 공개합니다. 공감에서 꼭 보고싶은 공연이 있다면 그 앞까지 딱히 대단히 보고싶지는 않지만 눈길은 가는 공연들을 몇 개 더 신청함니다. 신청탈락이 4~5회 정도 쌓인 다음 꼭 보고싶은 공연의 선정순서가 오도록. 부작용은 그닥 가고싶지도 않았는데다, 시간마저 애매한 공연이 당첨되고 그 공연에 결석하면 당분간 당첨에 엄청난 불이익이. 결국 인생은 타이밍이란 얘기지요.ㅋ)


 


 

올해도 이런 짓이나 하고 놉니다 - 2013 영화/음반 결산


언제까지 이런짓이나 할른지 모르지만, 여튼 올해도 1년동안 좋았던 노래랑 영화들. 결산.


(오토플레이로 노래 걸어놨어요, 시끄러우면 맨 밑으로 내려가서 꺼주시압)


# 영화


1. 설국열차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생존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생태계인 열차를 민주적이고 정의롭게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열차밖으로 나가선 결국 북극곰에게 잡아먹힐 뿐이라고. 그러나 북극곰이라는 생명체가 이미 (그것도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가) 살아가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인류의 존속을 위해 열차의 운행이 지속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중심적 사고다. 생태계의 주인은 인류가 아니다. 오히려 인류는 지구의 '암세포'같은 존재에 가깝다. 여하튼,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이 세계보다 나은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이 세계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야지만.


새로운 지구에 새로이 발을 디딘 어린아이들(신 인류의 조상)이 인상적이었다. 어린 흑인 남자아이와 벽 너머를 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연상의 동양소녀. 인류가 지향해야 할 혹은 인류가 가장 꿈꾸는 형태의 조합 아닌가. (사실 앵글로 색슨이 멸종한게 아주 초큼 통쾌했었다ㅋ)



2. 노라노




역사란 고루하거나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또 내일을 주조하는 것이라는 사무치는 교훈. 꼰대질하는 늙은이가 아니라 삶의 지혜를 나눠주는 어른들. 그보다는 계속계속 지혜로워지며 함께 살아갈 나이들었지만 늙지 않는 언니들과 그녀들의 예술. 


엄마를 극장으로 끌고가게 하는 힘. 

"엄마, 노라노 입어봤어요?"



3. 카운슬러




카운슬러의 감독이 코엔형제라고 착각했던 건 매카시의 극본을 처음 본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였기 때문이다. 아마. 그러니까 이건 리들리 스콧보다는 매카시가 먼저 떠오르게 되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선명하게 기억나던. 그러니까 우리에게 공포와 폭력, 그런 것들을 가져오는 운명앞에 우리는 얼마나 가련하고 나약하고 하잘것 없는 존재인지, 또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를 잔인하고 집요하게 보여주는데 혈안이 된 영화다. 


그건 인간이, 혹은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갖는 근원적 비극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그다지 의미있는 일도 아니다. 죽이는데 죽어야지. 그리고 그 죽음이란 것도 사실 별거 아니다. 드럼통에 시체를 담아 이쪽 저쪽 국경을 옮겨 다니거나 죽은 시체를 쓰레기장에 버리거나 하는, 그러니까 죽음이란게 (누군가에겐) 그렇게 하잘것 없고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삶이라는 것도 어느 누구에겐 퍽이나 쓸모없다는 그런 얄밉게 정확하고 냉정한 이죽거림.


문학작품처럼 받아들여질 법한 대사들도 그렇고 치타가 약한 짐승들을 사냥하는 걸 또 지켜보며 그 치타를 키우는 카메론디아즈도 그렇고 탄성이 나올법한 장면들이 숱하다. 그리고 페넬로페 크루즈는 엄청 예쁘고 카메론 디아즈는 늙어서 더 섹시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브래드 피트. 헐 대박.



4. 더 헌트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사냥을 하는 일은 없다. 언제나 떼를 지어 포위망을 이루고 도망갈 곳을 잃은 한마리의 사냥감을 죽인다. 더 헌트는 사냥에 관한 영화이며 인간이 무리를 이뤄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 사냥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얼마나 무력한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오직 옳은 것이라고 믿었던 공동체나 혹은 다수결, 민주주의 같은 말들이 실은 무엇보다 어리석고 폭력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인간사회에서 대개의 경우 사냥감은 합리적 비판과 준엄한 재판 대신에 감정과 알리바이(난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를 위해 결정된다. 그리고 결정된 사냥감을 향해 드러내는 이빨이나 가학성은 놀랍도록 잔인하며 그 잔인함은 대게 정의나 도덕, 혹은 이성같은 말들로 포장된다. 영화에서 어른들은 주인공의 아동성추행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거짓말을 시인하는 소녀에게 "너무 두려운 사건이라 네 무의식이 그날의 기억을 지운거"라는 되도않는 심리학 지식을 들먹이는 장면에선 실소를 넘어 공포심까지 들었다.


우리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에 속하려고 발버둥친다. 대게 공동체에서 버림받아 상처받지만 상처를 주는 배제와 소외 역시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5.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더이상 '이야기'를 치밀하게 짜는 일 따위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홍상수의 영화들은 도리어 치밀한 이야기 구조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플롯이나 서사에 따르는 구조라기 보다는 캐릭터와 그에 다르는 자연스런 상황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에 가까운데 아마 캐릭터만 주고 그날의 상황이나 배우의 연기에 많은 것을 맡기는 그의 작업방식에 따른 것이기도 하겠다.


여하간 해원은 근래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예쁜'여자였는데 유부남을 만나는 언니를 미쳤다고 표현하면서 정작 자신은 유부남을 사랑하거나.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며 이선균의 속물근성을 비난하는 동시에 자신은 결혼상대로 적합한 미국교수에 호감을 표현하는 것 같은 종잡기 '충분한'그 꼴보기 싫음에 기인하는 바가 크겠다. 원래 썅년들이 예쁜법이다.


누구의 딸도 아니고 싶었던 해원은 사실 누구의 애인이거나 딸이거나 제자이거나. 하는 관계 밖에서는 살 수 없는, 혹은 살아본 적도 살아갈 능력도 없는. 그런 보통의 여자애, 라기 보단 보통의 사람. 늘 우리는 독립과 주체를 꿈꾸지만 한 순간도 종속되고 소속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최근의 홍상수 영화에서 '꿈'이나 '상상'이 주된 소재로 쓰이는데,(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꿈을 꿨다 깼다하는 해원처럼 잘 어울리는 이도 없더라. 정은채도 예쁘고. 



6. 러시안소설



영화보다는 한 편의 소설같은 영화는 그 문장(대사라기 보다는)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듯한 영상들로 흥미를 배가한다. 흑백과 같은 톤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전반부는 러시아 소설마냥 급하지도 경쾌하지도 않은 속도로 꾸역꾸역 이야기를 전개한다.


과장된 자의식과 꼭 그만큼 유난스런 컴플렉스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캐릭터들과 그들을 부추기는 주변부의 조화가 병맛같은 이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가면서도 부대끼거나 억지스럽지 않게한다. 사실 러시아 소설이 그렇지않나. 장황하고 엄숙하지만 뚝 덜어져서보면 병맛같은 상황. 심지어 이름도 지랄같고.


두번재 오프닝 시퀀스가 등장하고 나오는 총천연색의 현시점은 어쩐지 전반부의 남자애들처럼 들뜨고 산만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뭐. 어쩐지 급하게 마무리한 것 같은 성긴구석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그대로 읊어 나가던 카페 느와르가 떠오르기도 하고. 지루해질 것 같으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소설책, 이거 재밌자고 쓴게 맞다.  



7. 홀리모터스



영화와 세계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감독 자신에 대한 자기고백. SF와 뮤지컬 가족드라마를 넘나드는 '오스카'( 참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혹은 감독 자신의 꿈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현대의 영화의 연장이다. 통일되는 주제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실 어떻게 보면 무슨 말인지도 모를만큼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놀랄만큼 영화의 거의 모든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고 영화란 결국 꿈의 연장임을 또 감독과 배우란,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 일반들 역시 꿈을 꾸고 그에 열광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곧 다가올 '자정' 모든 것이 끝날 자정에 대한 부담과 걱정. 


재미있는 것은 카락스의 영화를 보면서 종종 일으키곤 하는 이미지의 착각인데, 카락스의 전작(은 폴라X라고 말하겠지만 도쿄 3부작의 '메르드'가 있다. 사실 이 광인, 메르드의 이미지가 홀리 모터스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로 이어진다) 메르드를 보고 나는 갑자기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순간 깜짝 놀랐는데, (전적으로 외모 때문이다) 예수와 닮은 메르드에 대해 말하다 불현듯 체와 예수의 공통점을 발견하려고 애쓰기도 했었다. 홀리모터스의 메르드를 보고도 같은 생각을 하다가, 몽유병에 걸린 귀신이 극장을 빠져나오는 장면에선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고 말하던 맑스를 떠올렸다. 뭐, 가져다 붙이자면 못할 것도 없겠으나, 이거 좀 병이다.ㅋ


8. 아티스트 봉만대



여배우의 몸을 전시하고 섹스신과 어색한 연기, 개연성없는 상황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남성 관객 일반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지도 못하니까 요즘 고삐리들은 에로영화 안보고 일본 AV를 보는거 아니냐)시키려는 목적만을 갖는 저열함. 이 한국의 에로영화를 바라보는 스테레오 타입이면서 동시에 비교적 정확한 분석.되겠다.


'에로영화'라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기 일수인 상황에 (실제로 색안경 끼고 봐도 할 말없어지는 에로영화들이 즐비한 것도 현실) 봉만대의 존재는 어쩌면 감사할 일이다. 봉만대의 영화는 적어도 개연성 없이 배우들의 몸을 소모하거나 그들을 남성관객 일반의 눈요기로 전락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적어도 "정말 야하다" 야한게 그저 훌렁훌렁 옷을 벗기는 것은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느낌. 일까.


에로영화라기 보다는 에로영화 현장에 대한 페이크 다큐에 가까운 영화는 실제로 어떻게든 색안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감독과 배우들과 현장에 대한 관찰이다. '노출'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은이나 곽현화 이파니는 물론이고 (그녀들에게 그런 편견을 주입한 것도 그것을 이용하고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그래서 또 그 편견을 경멸하는 것도 오직 남성임을 영화는 여실히 드러낸다) 십여년동안 대표작이 여전히 번지점프를 하다인 여현수까지 배우들의 적나라한 고민과 한계를 필터없이 보여준다. 이는 봉만대 감독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인데, 에로라는 장르영화에 애정과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임하는 감독 자신을 '떡감독'이라 칭하는 웃픈대사가 영화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라디오스타에 나왔던 봉만대에서 드러났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면서도 동시에 그 설움과 그럼에도 갖는 'B급'들의 열정에도 소홀하지 않다. 다소 성긴 이야기와 구성이 거슬리기도 하지만 그런건 얼마든지 웃어넘길만큼의 미덕들이 있다.


9. 힘내세요, 병헌씨



청춘이나 꿈, 위로, 격려 같은 말들에 얼마나 신물이 나면 얼마전엔 서점에서 "청춘으로 사느라 힘들었지"같은 제목의 책도 목격했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혹은 그게 아니라도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꿈이 괴로운 것은 비단 우리가 청춘이어서가 아니며 그래서 청춘이 그렇게 아름답게 포장되거나 대상화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원래.


똥마렵다고 연출부에서 잘린 병헌씨는 되도 않는 헛소리로 시간을 보내는 백수한량이고, 어쩌다 운좋게 얻어걸린 시나리오로 데뷔를 하려다 결국엔 좌절된 어이없는 인상이며, 임신한 아내를 두고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못난 남자고, 그럼에도 어께에 힘이 잔뜩 들어가 강형철 따위.라고 말하는 찌질한 군상이다. 그러니까 곧 '나'고 어쩌면 '당신'이다.


그래서 그가 좌절하지 않고 끝내는 운좋게 얻어걸린 시나리오로 입봉하고 흥행한 상업영화 감독이 되길 바랐지만 어차피 안될거라는 걸 영화 시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애가 성공하면 안되는 거다. 찌질하고 못나고 게으른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듣고 싶은 말은 "잘될거야" 같은 의미없고 막연한 위로나, 어차피 다 알고 있는 귀찮은 잔소리가 아니라 "힘내라"는 단 한마디였다. 사실 그거 아니면 할 것도 없으니. 병헌씨가 상업영화 감독으로 성공하길 바라진 않지만, 그가 영화를 꾸준히 계속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  


10. 지슬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5월의 광주를 소재로 삼아 욕지기 나오는 영화 따위나 만들었던 어느 작품들에 대해 경멸 이상의 감정을 갖고 있지만 지슬에는. 제주 토박이 감독이라 할 수 있는 표현들과 대사들에서 그 날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쩌면 필름도 제주도에서 만들어진걸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4.3에서 희생된 그 모든 넋들에 대한 진혼곡이었던 영화는 어느 편에 서서 분노를 부추기지도 뜨거움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죽어간 모든 이(군인이든 양민이든)들의 넋을 위로하는데만. 그래서 뜨거움을 강요하고 선악을 굳이굳이 구분하려던 몇몇의 (정치적) 영화들에서 보이는 거북함이 없다. 다만.


때마침 지난 4월, 제주를 찾아 항쟁의 유적지를 둘러본 직후 영화를 봤다. 아직 우리 사회엔 미처 정산하지 못한 일들이 숱하다.  그들은 무엇때문인지 죽어야했고 무엇때문인지 감춰지거나 외면당하거나 왜곡돼야 했으며 무엇때문인지 아직도. 


11. 그밖에,


블루재스민이나 화이, 사이비, 베를린, 우리선희 같은 영화들도 참 좋았지만 힘들어서 패스. 10개 채웠잖아.ㅋ

전설의 주먹, 감기 같은 올해의 (대)망작들도 한마디씩 써볼까 했지만 힘들어서... 좋은 영화도 안쓰는데 뭐. 

하지만 강우석은 전설의 주먹이 재미없으면 앞으로 영화를 안만들겠다고 공언했으니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퉤퉤퉤.



# 음반


1. 들국화 - 들국화



전설의 귀환. 몇몇 사람들이 "수작이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내놓아서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건 취존의 영역. 그들은 전설이라고 하여 음악 외적인 것들로 그들을 평가(저평가든 고평가든)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일견 동의. 사실 나도 들국화의 앨범을 올곧이 음반 자체로서만 평가하는건 아니기 때문이다. 들국화의 1집을 들으며 자란 세대들에게 이번앨범의 의미와 들국화를 상상하며 자라 이제서야 비로소 들국화를 만나게 된 이들에게 이 앨범의 의미는 분명히 다르다.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을 분리시키라고 한다면 그건 억지. 


그래서 들국화의 이번 앨범은 내게 전설의 위용을 그대로 확인시켜주는 음반이다. '걷고걷고'같은 노래는 환갑의 나이든 '형등'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꼰대가 아니라 선배임을 알려주는. 더욱이 재채기 같은 곡들은 그들이 어쩌면 나이도 먹지 않은게 아닐까 싶어지는 노래다. 


주찬권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아마 공연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아듀 주찬권 공연이라도 한 번 쯤 해줬으면 싶은 팬으로서의 욕심이 있다.


(앨범 녹음을 다 끝내놓고 불현듯 떠나버린 주찬권, 어느 땐 그 위력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몇 장 만들지 못한 들국화의 새 앨범을 위해 하늘이 주찬권 아저씨에게 소명을 줬다가, 소명을 다한 그를 데려간 건 아닐까.. 뭐 그런 공상도 해본다. 여튼 아저씨..엉엉엉)


2. 윤영배 - 위험한 세계



종탑이나 망루, 구럼비, 자본주의, 국가주의 같은 말들을 이렇게 서정적이고 담담한 목소리로 부를 수 있다니.

그의 노래를 듣고 누가 "민중가요 흉내내는 겉 멋"이라고 혹평했는데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서정성이라는게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이나 남녀간의 오매불망한 마음만을 노래하는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시대'나 세상을 이야기한다고 그대로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로 빠져드는 것도 아니다. 분명 그동안의 경향성이 그래왔던게 사실이라면 윤영배의 음악은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그러니까 서정적인 민중가요라든가(이런 표현은 쓰면서도 심히 거슬린다) 하는데 닿아있다. '좀 웃긴' 앨범부터 그랬지만 윤영배는 어저면 조동익 조동진 이후 가장 걸출한 포크가수인 것 같다. 


3. 조용필 - Hello



들국화를 비롯해 유독 '전설'이라 불릴만한 이들의 귀환이 많았던 해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화제는 역시 조용필 (JYP...같은 농담하면 안되겠지?ㅋ) 가왕이 왜 가왕인지, 그가 왜 여전히 현역인지. 세월이 묻어서 녹이되고 지난 날의 영광을 붙잡고 산다면 추해지겠지만 세월의 먼지와 주름을 골골이 새겨 숙성시킨다면 그게바로 '장인'이겠다. 여전한 용필오빠. 혹은 옛날보다 더 멋있는 용필오빠.


(여담이지만, 우리 엄마는 용필오빠의 앨범이 나온 날 바로 조인성에 대한 애정을 거두셨다. 그냥 걔는 귀여워 한거지 용필오빠를 향한 팬심은 거둔 적 한 번도 없었다는 명언을 남기시기도. 때마침 조인성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아줌마 팬들의 인기를 잃어가는 중이었다는 말은 패스ㅋ)


4. 장필순 - Soony 7



올 한 해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은 역시 장필순이겠다. 신보 발매직후 찾았던 공감에서도 느꼈지만 그녀의 음악은 이전보다 훨씬더 사색적이고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렇다고 노래가 지루하거나 평이하게 흐른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녀가 사는 곳을 들먹이며 제주의 바람같은...을 운운하면 너무 유치하니까 빼버리더라도 마치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평온한 자연 속의 노래들.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줄곧 귀에 곷고 있었던 거겠고. 특히 '눈부신 세상' 같은 노래는 아마 올 해의 단 한 곡.


5. 이승렬 - V



고백하건대, 이승렬쯤 좋아해주지 않으면 음악 듣는게 아니지. 같은 마음이 없는건 아니다..ㅋ

열광하는 유앤미블루나 그의 솔로1집과는 다분히 차이나는 이번 앨범은 이런 고백을 이끌어낼만큼 낯설었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이 생소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사운드 모음집. 좋아하는 그의 보컬과 세련되고 안정적인 멜로디에 빠졌던 팬의 마음에서 지나간게 더 아쉬운 그런거다. 왜, 난 소녀시대의 노래중에 다시만난세계를 제일 좋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달까.ㅋ


여튼 나올거라는 소문만 무성한 유앤미블루의 앨범도 얼른얼른. 이승렬은 이제 솔로에선 예전으로 회귀할 것 같지 않았거든. 하지만 좋습니다, 이번엔 진짜라구요.


6. 강아솔 - 정직한 마음



강아솔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흔해빠진 '홍대 여신'을 연상한게 비단 내 잘못만은 아니다. 기타를 매고 예쁜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말에 그동안 덧씌워놓은 이미지는 그런거 아니었나. 다만 강아솔의 음악을 듣고서 그녀가 그런 '흔해빠진' 누구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낀 까닭을 뭐라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이번 앨범 제목처럼 '정직한 마음'때문일 수도 있겠고. 그녀가 단지 예쁘고 '잘 팔리는'노래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테다. '엄마'나 '남겨진 사람'같은 트랙에서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관계에 대한 그녀의 정직하고 착한 마음이 느껴지는 때문일테다.


우클렐레나 오카리나 같은 악기 써가며 예쁘고 상큼하게, 그러니까 대학 새내기들이 싸이월드 배경음악에 걸어놓을 법한 사운드들을 부러 만들어내지 않아서 그런 마음이 더 잘 닿는 것이겠지. 여튼, 언젠가의 와우북페에서 랩퍼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아.. 진짜로 랩음반 내줬으면 좋겠네..ㅎㄷㄷ


7. 이효리 - Monochrome



핑클은 나에게 빛이고 과학이며 진리였으며 곧 신앙이다. 그래서 사춘기 때부터 줄곧 꿈에 효리가 등장하면 연애대상이었고 다소간 야한 상상도 곁들여지는 발칙한 소년이었는데..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꿈에 이 누나가 나오면 연애를 하는게 아니라 연애'상담'을 하고 있다. 내가 인식하는 그녀의 포지션이 이제 그렇게 바뀐거겠지. 이건 그녀가 나이들었다거나 섹시하지 않다는게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이고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다. 무려 거기에 현숙함가지 더해져 이젠 넘사벽이 된..엉엉엉 이상순 나쁜놈.


언젠가 토크쇼에서 동물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공장식 축산과 반련동물 시장의 비대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봤는데, 이 누나가 패션으로 생명권보호를 소비하는게 아니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갖게됐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매력속으로..이상순 나쁜놈 엉엉엉.


그러면서 기대했던 것은 그녀의 노래였다. 난 노래란 사는만큼 불러지는 것이라 믿는 낭만주의자여서 더욱 넓어지고 현숙해진 그녀의 노래가 좋을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를 품었고 역시 빛이고 과학이고 진리인 그녀는 내게 응답을 주셨다. 아멘, 이상순 나쁜놈 엉엉엉.


앨범 전체가 좋은 트랙들로 꽉 차있었고, 여러가지를 시도하며 재미있게 만들었습니다.란 느낌이 확실히 전해지는 앨범이었다. 특히 미스코리아 같은 노래는 더. 앨범 전체에 묻어있는 롤러코스터의 냄새는 그녀의 남편의 도움이겠고 그걸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옛날 DSP시절부터의 안티놈들의 분열책동과 악선전이 있었지만 그게 뭐 어때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마음과 좋은 영향을 받으며 변모해가는 그녀에게 아낌 없이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 이효리를 국회로... 이상순 나쁜놈 엉엉엉


8. Sigur ros - Kveikur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면서 '시규어로스'와 비욕의 나라.라고 표현하던 친구가 아이슬란드의 펍에도 제이슨므라즈가 흐르더라.는 통탄을 뱉어냈었다. 그래, 술마시며 노는 펍에서 시규어로스는 무리야.


하지만 이번 앨범의 시규어로스는 펍마저도 정복할 심산인가보다. 보고있나 므라즈. 

서정성, 간결함, 신성, 아이슬란드의 찬바람. 같은 말들로나 표현되던 그들의 음악은 보다 격정적이 됐고, 한 걸음 더 세련되졌다.  이야 겨우 익숙해진 것 같은 그들의 '말'도. 기품과 우아함을 포함한 모종의 격정.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써놓고도 참 조야하다.


지난 여름 시규어로스의 공연을 가지 못한게 일평생의 한으로 남겠지만, 또 오겠지?   


9. Arcade Fire - Reflektor



이번 앨범에 대해 댄서블해졌느니 리듬이 어쩌구 하는 말들을 막 하더라만, 잘 모르겠으니 패스. (흠좀무)

하지만 기존의 앨범들이 지나면서 망작을 내버리는게 (대) 유행인 시절에 꾸준히 좋은 또 일관성있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건 엄청난 미덕이다. 게다가 남의 나라말로 하는 노래는 별로 듣지도 않는 나같은 아이에게 아케이드 파이어의 존재는 대 축복. 내가 앨범을 챙겨 듣는 남의 나라 '현역'밴드가 있어효..ㅎㄷㄷ


기존의 앨범들에서 보여주던 훨씬 폭발적이고 열기띈 음악에 대한 아쉬움들이 있겠지만, 이들도 나이를 먹어가고 동시에 음악도 변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하낟. "아, 그랬어, 그럼 다음은 뭐야?"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좋아하는 팀이 있는 건 참 복받은 일이다. 


우리의 선배들이 라디오헤드나 콜드플레이, 좀 더 위로가서 U2에게 가졌던 그런 마음들을 꾸준히 나도 가지고 가다 십 몇년 후엔 아케이드 파이어도 레전드가 될 날이 오면 좋겠다.


10. GD - Coup d'etat



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과소평가 받는 음악인 중 하나로 GD를 꼽는다. 그가 패션센스 예능감, 스타성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가장 큰 매력인 음악을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방송이나 공연에서 기깔나는 간지를 보여줄 때마다 열광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운 맘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저러면 또 음악은 듣지도 않고.."하는 팬심 때문이다.


이번 앨범은 그의 음악적 성취와 그의 상업적 성취가 가장 적절한 비율로 섞여있는 앨범이라고 생각했다. 삐딱하게 같은 트랙은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신나고 가장 보편타당한 노래였다. 방송에서 부르면서 팬들은 물론 관객 일반 모두를 열광시킬. 동시에 늴리리야나 Black 같은 곡들은 그가 작곡자나 프로듀서로서 얼마나 좋은 감각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곡이겠다. 단언컨대 가장 완벽한 아이돌.


GD에 대한 호불호는 취존의 영역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GD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취존의 영역이 아니다.


11. 그밖에,


우리 지은이의 이번 영리한 앨범이나, 김오키, 나윤선 같은 앨범들이 좋았다. 특히 나윤선의 앨범은 상찬이 자자했지만 그래서 더욱 나는 뭐. 좋은거 알겠는데, 나까지 좋아해야해.? 하는 마음도 약간. EXO나 샤이니, F(x)도 역시 좋았다. 이로서 난 SM의 노예 인증. 





Sigur Ros - Brennisteinn

‘먹고사니즘’의 주문 - 용산참사 5주기를 맞아, <두 개의 문> 우리 정말 안녕들 한 건가

‘먹고사니즘’의 주문 - 용산참사 5주기를 맞아, <두 개의 문>

우리 정말 안녕들 한 건가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한복판 용산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서울시와 삼성물산이 주축이 돼서 진행한 용산국제업무지구 재개발 사업으로 강제 철거된 철거민들의 농성 중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뿐 아니라 당시 사건으로 장애를 입은 이도 있고 그 화마 속에서 평생 씻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다. ‘용산참사’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에 구구절절하고 세세한 설명은 어쩌면 필요하지 않을 테다. 우리는 모두 그 날 저마다의 눈으로 이 참극을 지켜봤고 그 비릿했던 기억을 잊기에 5년은 너무 짧았다. 하물며 그 날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참극들이 되풀이되는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 2009년 1월의 기록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두 개의 문>의 포스터를 마주하게 되면 그 제목에서 마치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한 추리활극을 떠올리게 된다. 혹은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약간의 사전정보를 들고 영화를 마주하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경찰의 과잉진압을 고발하는 영화를 염두에 두게 된다. 그러나.

 

<두 개의 문>은 관객을 선동해 모두가 화내고 슬퍼하다 영화의 말미에는 마침내 “진실을 규명하고 정권에 책임을 묻겠다”는 결기어린 다짐이 샘솟게 하는 영화가 아니다. 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까발려 사회적 공론을 형성하겠다는 야심찬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그저 여기저기서 모아 온 용산참사 당시의 사건 필름들을 지루할 정도로 보여 줄 뿐이다. 그리고 지루한 법정공방. 수 천 쪽의 법정 기록을 읽고 채집하며 증언을 기록하는 작업. 영화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무엇을 밝혀내려는 욕심도, 관객들에게 분노하고 슬퍼하라며 부추기는 목적도 없다. 그저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

 

그리고 오히려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더욱 알 수 없게 된다. 공권력 남용에 대한 규탄으로 이 참사를 바라보기에 그 대상인 경찰특공대 대원들은 혼란스러웠고 공포심에 떨고 있었으며 그들이 열어야 할 문이 무엇인지, 그 문을 열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도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라면 이 영화는 차라리 스릴러에 가깝다. 차례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그저 공포에 떨며 서로를 의심하는 일밖엔 못하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6명의 사람이 화마에 휩싸여 죽어갔는데 우리는 그 범인이 누군지 여전히 모른다. 영화 속 법정 장면은 범인의 죄를 밝혀내는 과정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누군지를 찾는 과정에 가까워 보였다. 그 불길에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범인으로 지목돼 교도소에서 4년여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남편을, 아들을 잃은 ‘아줌마’들이 거리의 투사로 변해갈 동안에도 사람들은 이 ‘사건’의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정작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다.

 

# 무엇을 보고 있었나

 

영화에 사용된 화면은 두 가지다. (영화 중간에 삽입되는 인터뷰 영상들은 제외하고) 하나는 칼라TV를 비롯한 진보언론매체들의 영상이고 또 하나는 경찰의 채증 영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동안 쉽게 보지 못했던 채증영상을 통해 보이는 현장이다. 두 영상을 각각 씨줄과 날줄이라고 한다면, 두 실이 엮어내는 천이 전혀 성기거나 어색하지 않다. 그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까닭이다.

 

경찰의 채증영상은 매우 흔들리고 혼란스럽다.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몰랐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화염병을 두려워했던 것처럼. 망루안의 사람들이 위대한 혁명을 바라는 투사나 사회의 전복을 바라는 폭도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잔인한 살인마도, 피도 눈물도 없는 전투기계도 아니었다. 그 순간 그 곳에서 철거민들과 경찰특공대 양쪽 모두는 겁에 질렸고, 상황을 강요받았다. 그 곳은 마치 서로 죽일 것만을 강요받던 콜로세움이었다.

 

앵글 한 번 변하지 않는 인터뷰와 흔들리는 채증영상. 영화는 집요할 정도로 그 혼란과 공포, 그리고 그 후에 찾아온 이 잔인한 고요에 관객을 반복해서 끌어들인다. 경찰특공대의 그 그악스러운 잔인함은 어쩌면 공포심의 발로였을까.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은 대부분 노예였다. 그들은 싸울 것을 강요받았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권력은 그 열광을 지배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럼 콜로세움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상대 검투사인가, 아니면 콜로세움 경기를 조장한 권력인가. 혹은 열광을 보내던 관객들인가. 그 피해자는 잔인하게 목이 잘린 검투사 노예일까 아니면 열광의 대가로 자신들을 착취를 망각해 준 관객들일까.

 

# 여러분 부~자 되세요

 

2000년대 초반 한 신용카드 광고의 카피였던 “부~자 되세요”는 모델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카피는 온 나라의 주문이 됐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서로 부자가 되라고 말했다. IMF를 지나면서 신용카드를 비롯한 금융 자본의 비대화가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 목표가 된 시점이다. 인생의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될 뿐이고, 인격은 그저 '돈'으로 추정됐다. 돈이 곧 삶의 유일한 목표이고, 종교가 되어버린 것.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6명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책임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외면했다. 철거민들의 죽음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었고, 경찰의 죽음은 전문시위꾼 폭도들의 폭력 때문이 됐다. 이 외면과 전가의 무책임함에서 ‘대중’이라고 불리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대통령 한 명에게 화살을 돌리거나 과잉된 공권력을 탓하며 거기서 한 발 물러설 알리바이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로마의 권력자들은 콜로세움으로 대중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그 살인 유희에 열광을 보낸 것은 대중이다. 열광이 호출한 잔인함. “부~자 되세요”라는 주문이 호출 한 것은 무엇일까. 어느 술자리에서 ‘용산참사’이야기로 목에 핏대를 세우던 우리는 집에 돌아와 주식 시세표나 집값의 오름 추이를 뒤적거리고 아이들에겐 공부해서 명문대가고 좋은 직장 가라는 ‘주문’을 외우진 않았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과도한 경제숭배에 있다. 일종의 ‘먹고사니즘’ 태안 바다에 기름이 쏟아졌을 때 도대체 우리는 얼만큼이나 시체 썩은 기름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을까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 이는 많지 않았다. 한적한 시골 농토에 ‘서울사람들만’ 쓸 전기를 공급할 송전탑이 들어설 때, 이웃나라에서 역대최고급의 방사능 유출이 일어났음에도 신규원전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숱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반도체 기업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다시 용산참사를 호출하는 주문을 외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 다시, 두 개의 문

영화에서 ‘두 개의 문’은 얼마나 성급하게 경찰이 투입됐는지, 심지어 이들의 안전조차 보장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하며 동시에 관객들에게 또 다른 메타포로 다가온다. “ 두 개의 문이 당신 앞에 놓였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하는 질문.

 

감독들은 기획의도에서 “관객대중 스스로 어떤 위치에서 이 사건을 경험하고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 스스로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녀들이 말하는 진상규명과정이란 경찰이 망루를 때렸는지, 시너가 얼마나 쌓여있었는지, 경찰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를 판가름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사건의 정황과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보다, 용산으로 대변되는 이 ‘먹고사니즘’의 풍경을 호출하는데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 그건 가치의 전환이다. 인간적 삶에 대한 복원.

 

수전손택은 “꼭 강해지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2014년 1월의 기록

 

이 글을 쓰고 있는 2013년 12월 22일 현재, 경찰은 백여 명의 사람들을 연행하며 정동 경향신문 사옥 내에 소재한 민주노동조합총연맹 (민주노총) 사무실을 침탈했다. 파업 중인 철도노조 위원장이 민주노총 사무실에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고 한다. 건물 유리문을 파손하고 출입을 통제하는 십여시간의 작전이 펼쳐졌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시민들은 “철도노조 위원장은 이곳에 없다”며 경찰을 제지했고 경찰은 시민과 조합원 100여 명을 연행하면서 작전을 강행했다. 역시나 경찰이 찾던 철도노조 위원장은 거기에 없었다. 더욱이 법원은 경찰에 ‘체포영장’을 발부했을 뿐 ‘수색영장’은 발부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경찰은 헌법의 영장주의를 위반하면서 언론사 건물에 침입해 노동조합 사무실을 수색했으며 그마저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 물러나야했다는 것이다.

 

5년전 이 맘때, 재개발 사업을 위해 십 수 명의 철거민들이 올라 “살겠다”고 외치던 망루를 공격하던 모습과 놀랍도록 유사해 보이는 건 그 때도 지금도 추운 겨울이어서만은 아니다. 공적 재산인 토지와 철도를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회의 ‘주문’이 사뭇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고액연봉자 주제’에 파업씩이나 한다며 손가락질을 하는 오늘의 모습에서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떼거리를 쓴다고 비판하던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 덧

 

민주주의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겠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일이란 어쩌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내 삶을 좌우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 내 삶을 결정하는 나의 욕망이 주식시세표인지, 부동산시세표인지. 혹은 우리의 행복을 규정하는 것이 우리 자신인지 아니면 이 먹고사니즘의 사회가 규정한 “부~자 되세요”라는 주문인지.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자신에게 물어보자.

 

진짜, 정말 우리는 안녕들한건가.

 

 

노라노 - 올 해의 영화




어쩐지 콧구멍이 벌름거리기 시작했던 건 최은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던 순간이었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던, 그야말로 여배우의 얼굴.(그건 지금의 젊은 여배우들에게 아름답다거나 예쁘다는 감상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층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옷 매무새를 만져주는 여든 다섯의 스타일리스트, 노라. 육십여년 쯤은 가볍게 뛰어넘어버린, 아니 그보다는 육십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이 어쩐지 가슴벅차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건 아마 '시간'이 세겨놓은 주름과 그 주름의 골마다 박힌 지혜와 어리석음, 그걸 고스란히 견뎌온 묵직한 삶.의 아름다움이었을테다.


그리고 기어이 눈물이 흘렀던 건 노라노 선생이 스무살 남짓 젊은 여자애들과 전시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기억이 전승되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여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나이들었지만 낡지 않은 여자와 나이들어도 결코 낡고 싶지 않을 (혹은 낡지 않을) 여자들의 만남. 역사란 고루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가슴벅찬 것이며,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주조하는 것이라는 명징한 증명이었다.


영화는 노라노를 1세대 패션디자이너로 추켜세우거나 그녀의 위대한 업적을 되짚어 찬미하는 지루한 우를 범하지 않았고 그녀의 삶도 과거에 연연하고 이름에 기생하는 멋대가리 없는 것이 아니었다. 노라의 전시회 라비앙 로즈는 그녀의 60년 디자인 인생을 되짚고 회고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난 60년을 딛고 다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영화는 "때로는 어리석었고 때로는 현명했었던" 그녀의 삶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가장 적절한 거리에서 관찰한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녀의 성과도 오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그리고 그 반복과 인정이 바로 "장밋빛 인생, La Vie en rose"라는 깨달음을 목격한다.


삶을 살고, 견디고, 다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실은 장밋빛 인생. 기꺼이 올해의 영화다.


- 영화를 보고나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엄마를 찾는다. "엄마 노라노라는 디자이너를 알아요?"

- 당연히 우리의 엄마들은 대부분 노라노의 옷을 한두번 쯤은 입어봤거나, 혹은 노라노의 샵을 기웃거려 봤다. 그녀들의 전성시대. 엄마랑 같이 영화를 다시 보러가야지.







학교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믿음 - 우리학교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공교육 12년간의 모든 노력이 투여될 단 하루에 수험생들은 물론 그 주변사람들도 애가 녹는 시기다. 


작년 이맘쯤에는 한 도시에서 십 수 명의 청소년들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각각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아마 가정, 학교, 사회 어느 곳에도 전할 수 없었던 외로움이었을 테다.


국제중, 특목고, 자사고, 명문대.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서 학교의 역할은 ‘교육’보다는 ‘진학’에 방점을 찍고 있다. ‘높은 교육열’은 곧 ‘높은 사교육비’로 이어졌다. 한국은 GDP 대비 사교육비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교실에는 친구, 우정, 선생님, 꿈, 희망같은 말보다 ‘일타강사’, ‘쪽집게과외’, ‘합격비법’ 같은 말이 넘쳐난다. 최근 어느 사교육업체는 광고에서 “우정이란 그럴듯한 명분으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며 “친구는 네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는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정말 말만 그럴듯한 우정이란 우리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일까. 그럼 학교란 우리에게.



# 글로배우지 않아도 아는 ‘함께 사는 법’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의 제목은 ‘혹가이도 조선 초중고급학교’(남한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훗카이도’가 올바른 표기지만 영화에서 문화어인 ‘혹가이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혹가이도로 통칭)의 구성원들이 조선학교를 ‘우리학교’라 부르는데서 왔다. 


조선학교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이 조국의 말과 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세운 학교다. 영화의 배경이 된 혹가이도 조선학교는 북해도 섬의 유일한 조선학교로 초중고등부가 모두 함께 생활하며 학교 아이들 중 일부는 12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내기도 한다.


사실 ‘우리학교’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이다. 우리집, 우리학교, 우리엄마, 우리편. 한국어는 ‘나’라는 표현보다 ‘우리’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한다. 영어의 소유격 ‘My’를 해석하면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로 번역된다. 그건 아마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의 것에 더 가깝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하는 경구들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나 아닌 것들과 관계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노력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래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은, 또 그 교육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학교의 본령은 분명히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데 있다.


영화 <우리학교> 속 ‘우리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그 교육과 학교의 본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그 모습이 그토록 뭉클했던 이유는 그 본질에 충실한 학교의 모습에 그대로 비치는 지금 이곳의 학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혹가이도 우리학교의 아이들은 타국 땅에서 고국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학내 조선말 100% 사용’이라는 약속을 정한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오직 조선말만 사용하며 생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서부터 조선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편입생들은 더 그렇다. 어린시절 내내 일본학교에 다니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조선학교로 편입한 ‘려실’은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일본어로 말하지 않으면 목표달성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자연히 아이들과는 계속 서먹해지고, 적응은 곱절로 힘들어지는 악순환. 그러나 반장 재훈은 “조선말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편입생들이 일본어를 쓰는 것은 약속을 깨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잘 쓰지도 못하는 조선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수이 조선말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물꼬를 터주는 일. 려실은 후에 그 날을 떠올리며 “울듯이 기뻤다”고 말했다. “말하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 나의 사정을 알아주었느냐”면서.


<우리학교>가 개봉한 2007년, 남한의 서점가에는 <배려>란 자기계발 서적이 불티난 듯 팔리고 있었다.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배려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3, 40대 직장인들에게 이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모습을 보며 려실에게 일본어를 써도 괜찮다고 말해주던 재훈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 큰 어른이 돼서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책 한 권으로 배우겠다고 덤비는 모습이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는’ 열일곱 재훈의 진짜 배려 앞에 부끄러웠다.


나이가 들면 분명 알게되는 일들이 있다. 공존하는 삶,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결국엔 자신을 살아가게 해준다는 것. 어쩌면 요즘 힐링이니 위로니 격려니 하는 ‘말’과 ‘글’이 득세하는 것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 때문이겠다. 그러나 사실 이미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살 부대며, 다투고 화해해가며 배웠어야 할 ‘생활’들.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마음껏 배워가는 이 행복넘치네”


-<우리학교> OST ‘우리를 보시라’ 中



#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우리학교를 찾아오십시오”


군사부일체라고 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선생님들은 ‘담탱이’나 ‘꼰대’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양 극단의 어느 쪽이든 선생님이란 존재는 언제나 어렵고 멀다. 


그러나 ‘우리학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지근거리에 있다. 그들은 아이들과 말뚝박기를 하고 함께 케이크를 만들고 한 이불을 덮고 잔다. ‘우리학교’의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은 통제와 감시, 훈육의 대상 보다는 말벗이고 놀이동무고 사춘기를 겪고 있는 동생에 가깝다. 


그건 우리학교의 특성보다는 어쩌면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유대감에 가까울 수도 있다.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온갖 박해와 소외를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 다시 그런 삶을 이겨나가야 할 다음 세대의 동생들, 후배들에게 갖는 안타까움 섞인 사랑. 때문에 ‘우리학교’ 선생님들은 지식의 전승이나 진학지도가 아니라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는 법을 가르친다. 낮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 (하지만 사실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이든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 이방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까)


영화의 말미, 혹가이도 우리학교 21기들의 졸업식에서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학교생활의 추억을 낱낱이 이야기하며 눈물 짓는다. 그리고 그 추억의 한 켠에는 반드시 선생님들이 있다. 아이들의 고백은 선생님과 학교가 등장하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미담이 아니다. 그저 함께 케익을 만들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땀을 흘린 작고 소소한 기억들. 강사나 교사, 꼰대, 담탱이가 아니라 ‘선생님’이 되는 일은 그렇게 아이들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 스며드는 것 부터였다.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선생님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다.


선생님들은 험난한 세상을 맞이할 아이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우리학교를 찾아오라”고 말한다. 언제까지고 기댈 수 있는 선생님과 학교가 돼주겠다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함께 견뎌주겠다는 소중한 다짐과 약속. 


# 이념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조총련, 재일조선인, 북한. 남한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낮설고 두려운, 또 어려운 이름들이다. ‘우리학교’의 교실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아이들은 ‘북조선’을 조국이라 부른다. 운동회엔 인공기가 걸리고, 표준어가 아니라 문화어를 배운다. ‘우리학교’의 사람들은 “고향은 남쪽이지만 조국은 북쪽”이라고 여긴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종북빨갱이’를 운운할지도 모르겠다.  


해방이후 남한도 북조선도 선택하지 않고 사라진 나라 ‘조선’의 국적을 선택했던 동포들을 남한정부가 어떻게 외면했는지, 일본정부가 얼마나 박해했는지를 논하면 그들이 조국을 북쪽이라 말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남과 북, 북과 남은 실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대립하고 적대하는 관념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보다 더욱 분단의 비극과 지난시절의 비극에 맞닿아 있다. 등굣길에 치마저고리가 찢어지고, 수없는 협박전화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 국적선택을 강요받으며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삶.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분단이란 모호한 이념의 대립이나 첨예한 정치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일부다. 정작 색안경을 모로 끼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분단을 만들고 대립을 유지하는 어른들.        


조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일본 우익들의 입항반대시위를 만났을 때 성에가 낀 버스 유리창에 통일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는다. 그건 아마 ‘적대’가 아니라 ‘평화’를 바라는 마음. 오직 그것만이 이 무의미하고 지루한 싸움을 끝낼 길이라는 것을 체득한 아이들의 마음이겠다.


어린 품속에 그려본 사랑하는 조국은 하나였네

오랜 세월에 목이 다 말라도 마음은 서로 눈물로 적셨네

- <우리학교> OST ‘하나’ 中



# 학교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믿음


어떤 삶과 어떤 교육이 옳은 것이라고 분명히 단정할 수 없다. ‘우리학교’의 모습만이 이상적이고 아름답다고 마냥 찬미할 수도 없다. 고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학벌과 경쟁의 승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작금의 교육현실에서 이상론만을 주절거리고 지금 딛고 있는 현실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꿈만을 강요하는 일이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 없는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경쟁하고, 서로를 적대하고, 험난한 삶에 지칠 아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만큼은 쥐어주고 싶다. 내가 이기는 법보다 우리가 함께 하는 법을 먼저 떠올리고 선생님 눈을 피하기보다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시절,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믿고, 나만 잘 사는 일을 어리석다 여기는 시절. 삶에 그런 한 시절쯤 있어야 평생을 두고 곱씹으며 힘낼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학교.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찾아 갈 수 있는 ‘우리학교’. 우리를 언제까지나 키워주고 마침내 최후에는 기대 쉴 수 있는 그런 학교에 대한 꿈.


# 덧붙여


지난번 소개했던 <그리고 싶은 것>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일본은 점차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북일관계는 해를 거듭하며 악화되고 국제정세도 급변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재일조선인들과 ‘우리학교’들은 전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재일동포들이 북쪽을 조국이라 여기게 된 이유는 남한정부의 무관심과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단언컨대, 기적은 종로에서 시작됐습니다 - 종로의 기적


지난 9월 7일,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에 줄줄 흐르는 땀을 식히려 청계천 모퉁이 나무그늘에 앉았다. 주말 오후의 청계천은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커플들이 가득했다. 더워 죽겠는데 굳이 손을 꼭 잡고 붙어 앉은 그들에게 속으로는 저주를, 눈으로는 질시와 부러움을 쏘아내고 있을 때 눈에 띈 한 커플, 서로의 땀을 닦아주고 부채질을 해주면서도 간간히 입을 맞추고 떨어져 앉을 줄 모르던, 어느 레즈비언 커플이었다. 


그 날은 <소년, 소년을 만나다>, <친구사이>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인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와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동성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종로와 청계천 일대엔 레인보우 깃발과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플랜카드가 즐비했다. 동성애자들과 인권운동 활동가를 비롯해 천여 명의 사람들이 종로와 청계천 일대를 메웠다. 바야흐로 동성결혼 시대의 개막. 


행정당국이 이 세기의 커플(!)의 혼인신고를 받아줄 지 여부나, 이들의 결혼식에 그야말로 똥물을 뿌린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차치하고 이들의 결혼이 한국 사회의 이성애 중심주의, 전근대적 가족주의에 작지 않은 균열을 낸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담배연기 자욱하고 으슥한 게이바(Bar), 가장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정체를 숨겨야 하는 눈물, 세상으로부터의 소외. 이런 상징들이 그동안의 동성애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밝은 대낮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 열린 이 결혼식은 그야말로 ‘기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기적’의 시작은 어쩌면 ‘종로’에서부터.


# 종로의 기적


종로는 이태원과 함께 서울의 게이 커뮤니티를 양분하고 있다. 지금도 종로에는 백 개가 넘는 게이바가 밀집해 있고 젊고 어린 ‘꽃띠’들 뿐 아니라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게이들도 아직 녹슬지 않은 ‘게이다’를 발동시키고 있다. ‘P살롱’으로 불리던 파고다 극장과 극장에서 만난 커플들이 슬그머니 모여들던 종로 인근의 다방들은 게이들의 욕망과 낭만, 실연과 희망이 반복되던 곳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게이설이 나도는 어느 시인은 파고다 극장에서 지퍼가 열린 채 복상사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종로가 게이들의 ‘낙원’인 것만은 아니다. 종로의 뒷골목에선 동성애자를 겨냥한 증오범죄가 종종 일어난다. 게이 커플을 향해 갑자기 달려들어 집단린치를 가하는. 종로는 아니지만 지난 해에는 남산 일대에서도 비슷한 증오범죄가 발생했었고, 마포구청이 LGBT라는 표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현수막 게시를 불허하고 철거를 진행한 ‘사건’도 같은 범주에서 호모포비아(동성애 공포증, 내지는 혐오증)에 해당하는 일이다. 김조광수, 김승환 커플의 결혼식에서도 불청객이 난입해 오물을 투척하고 관계자를 폭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교회장로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이 남자는 “인분과 된장을 섞은 것이 바로 동성애의 현실”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종로에서 한 블럭만 벗어나도 게이들이 받는 시선은 여전하다. 어느 유명 연예인은 동성애를 ‘나쁜교육’으로, 동성애자를 ‘불쌍한 영혼’으로 표현했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는 극 중에 동성애자가 등장한 이유로 수많은 비난 여론을 감수해야 했다. 여전한 호모포비아의 세상. 동성간의 사랑이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 결혼을 당연하게 하는 일은 종로 밖의 세상에선 여전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 가장 리얼한 게이이야기


이혁상 감독과 ‘연분홍치마’가 <종로의 기적>을 내놓기 전에도 LGBT 영화들은 있었다. 그러나 ‘맨얼굴’의 게이들이 자신의 ‘생활’을 노출시킨 작품은 <종로의 기적>이 처음이다. 그동안의 것들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취급하거나 영화의 주변부로 소비하는데 그치기 일쑤였다.


<종로의 기적>의 가장 큰 미덕도 이 지점에 있다. 이혁상 감독은 그동안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했던 혹은 남들과의 다름에서 상처를 받은 이들의 고생담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로인해 ‘인간극장’류의 다큐멘터리가 타자의 고통을 전시하면서 대상을 착취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사실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완성하는 가장 손쉬우면서 안인한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덕은 <종로의 기적>에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관객들은 자신들과는 사뭇 다른 양식의 삶의 모습에서 (여기서의 ‘다름’은 성정체성의 다름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자신을 설득시키는, 이성애자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노력을 의미한다.) 느끼는 괴리감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삶이 여상스럽고 보편적일수록 그 농도를 더해간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리얼리티’다. 간혹 관객일반은 피가 튀고 살점이 뜯어지는 장면을 ‘리얼하다’고 표현한다. 또는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린 캐릭터의 불쌍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값싼 동정의 말과 함께 ‘리얼’이라는 수사를 덧붙인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판타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진짜 삶’에서 머리가 뜯겨나가고 팔목이 잘려나가는 상황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리얼리티’는 현실의 고단함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있다. 그리고 모두 그 강퍅하고 고단한 삶에서 자신의 희망을 발견하고 우직하게 기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


(<종로의 기적>은 게이에 대한 판타지를 깨는데도 적잖이 일조한다. 많은 미드에서 게이는 잘생기고 돈도 많은데 이해심까지 갖춘 완벽한 남자로 그려진다. 심지어 주인공의 믿을 수 있는 절친. 그러나 <종로의 기적>의 게이들은 배나오고, 술 마시고, 가난하고, 소심하며 가끔 찌질하다.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이 그런 것처럼) 


# 다큐멘터리가 삶을 변화시키는 순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는 관찰자의 위치를 고수하며 대상과의 거리유지를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러나 엄밀히 얘기하면 모든 대상은 카메라를 거치는 순간부터 객관적일 수 없다. 그보다 이미 카메라에 담길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어쩌면 세상에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사실 혹은 진실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그래서 다큐멘터리의 본질이니 다이렉트 시네마니 하는 다소 뜬구름 잡는 소리보단 창작자의 의중이 명확히 포착되는 다큐멘터리에 눈이 가는 건 당연한 순리다. <종로의 기적>에서도 감독은 카메라 안의 풍경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이혁상 감독도 “다큐멘터리의 환상과 신화에 얽매이지 않고 감독과 주인공들의 관계가 영화에좀 더 드러남으로 이성애 중심사회를 향한 성소수자들의 메시지에 더욱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영화의 촬영 전과 후 등장인물들은 물론 감독의 삶도 확연히 달라진다.


이혁상 감독은 <종로의 기적>을 통해 커밍아웃했다. 처음에는 카메라 뒤에 숨어 대상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역할을 규정했던 감독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선언하는 순간, 스크린과 렌즈로 가로막혀 있던 벽은 허물어진다. 그리고 관객들은 관찰자가 아니라 ‘종로’ 한복판으로 스며들게 된다. 스스로 ‘영화감독’보다는 ‘활동가’라는 이름이 더 편하다는 감독의 말과도, 다큐는 결국 동화(同化)를 위한 작업일지 모른다는 의문과도 맞닿는 순간.


(감독은 <종로의 기적>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변화한 부분으로 HIV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꼽는다. HIV 인권운동을 하는 욜과 석주의 관계에서 HIV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일이라는 것을 인지했다고. 애초의 욜의 에피소드는 대기업에 다니는 게이가 겪어야 하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결국 HIV문제에 대한 시선으로 마무리된다.)


# 하지만 단언컨대, 기적은 시작됐다


일부러 냉정히 말하면, <종로의 기적>은 흥행에 실패했다. 2006년 개봉한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영화 <후회하지 않아>가 4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연분홍치마’가 제작한 <두 개의 문>이 7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점을 감안하면 1만 명도 채 동원하지 못한 <종로의 기적>의 스코어는 다소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독립영화, 그것도 다큐멘터리의 스코어로는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다)


호모포비아는 여전하다. 결혼식장에서 똥물을 맞은 김조광수 대표는 “그래도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행복과는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함께 사는 당연한 일이 정말로 당연해지기까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어쩌면 그건 정말 기적같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단언컨대’ 기적은 시작됐다. 꽃미남도 아니고 배도 나왔고, 소심하고 가끔은 찌질한 이 보통 남자들이 종로에서 일으킨 기적이 점점 세상을 전염시키길 기대한다. 그래서 사실 행복한 커플에게는 오직 질투와 절망의 저주만 퍼붓고 싶은 내 바람이 이뤄졌으면 좋겠다. 


결혼식 날,주위를 점령한 커플들에게 혹시 망나니 호모포비아로 보일까 염려하며 선량한 눈빛을 가장해 축하의 말만 전하느라 내심 무척 힘겨웠다. 




# 덧붙여, 연분홍치마


<종로의 기적>은 물론 <두 개의 문>같은 의미있는 활동을 계속하는 ‘연분홍치마’의 이름을 꼭 언급하고 싶다.


<종로의 기적>을 제작한 ‘연분홍치마’는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이다. 연분홍치마는 1년에 한 번 꼴로 성적소수문화를 위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발표한다. 그동안 <3 X FTM>,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을 발표해 기록적인 관객동원과 동시에 올 해의 독립영화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연분홍치마’는 최근 제작한 <노라노>를 마치고 활동 1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활동을 준비한다고 한다. 의미있는 주제를 가장 탁월하게 표현하는 ‘연분홍치마’가 앞으로도 지속해 성적소수문화환경에 기여하는 재밌고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


우리선희




영화보고 조용히 알바하고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그냥 술마셔야겠다. 아무래도 홍상수는 주류업계와 내밀한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게 분명하다.ㅋ


다만 선희처럼 예쁘고 착하고 안목있고 자기 욕망에 솔직한데다 또라이 기질도 있는 여자랑 대낮부터. 이 영화, 술은 환할 때 먹는거라고 강변하듯 주구장창 낮술만 마셔댄다. 


여튼 선희처럼 예쁘고 착하고 안목있고 자기 욕망에 솔직한데다 또라이 기질도 있는 여자가 삐삐쳐주길 마냥 기다려(봤자 연락이 오겠냐. 엉엉엉)야지.




결국 우리가 그려야 하는 것 - 그리고 싶은 것


결국 우리가 그려야 하는 것


한국에서 일본은 여전히 금기다. 친일파, 일제의 잔재 같은 말들은 어디서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다. 선거판에서 친일파의 후손 운운하며 상대를 공박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그다지 낯선 풍경도 아니다. 그 영향인지 이 사회엔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증오도 곳곳에 도사린다. 후쿠시마에 재앙이 닥쳤을 때,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거나 오히려 고소해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


사실 그 증오심이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지난 세기 일본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군국주의의 깃발을 세우고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가난한 촌부들의 식량을 빼앗았고, 나라 고유의 말과 글을 없앴고, 학대하고 착취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먼 과거의 일도 아니다. 고작 60여년.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당했던 일이다. 어찌 그걸 그대로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전쟁과 증오, 폭력, 착취, 학대, 복수. 그걸 그대로 일본에 돌려준다고 하여 과연 아픔이 치유되고 상처가 아물고 다시는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는 것일까. 


# 그려야 하는 것


영화는 2007년에서 시작한다.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기점으로 전 일본에 우경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는 시기였다. 한중일의 그림책 작가들은 평화그림책만들기 프로젝트를 제안해 삼국에서 아시아의 평화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동시에 출판하기로 한다. 한국에서는 권윤덕 작가가 참여했고 권 작가는 13살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전쟁과 폭력 속에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소녀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


위안부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의 식민지 국가에서 징용된 일본군의 성노예를 지칭한다. 일본군은 위안부를 동원하기 위해 납치나 인신매매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위안부들은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하루에 수 십 차례 강간을 당했으며 갖은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다.


90년대 중반까지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됐고, 군이 위안소 설치 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근 일본사회의 급격한 우경화로 위안부 범죄 자체를 부정하거나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범죄사실을 축소 은폐하려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윤덕 작가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만나 그림책의 초안을 보여주며 일본이 저지른 전쟁 중 성폭력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답한다. 평화그림책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일본의 출판사 인사도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는 일본의 아이들에게 전쟁의 기억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은폐. 실제로 일본사회는 위안부 범죄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없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인 위로금을 지급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고 있다.  


잊혀지거나, 잊게하거나. 


이제 고작 60여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어느덧 생존한 피해자가 57명(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11일에도 피해자 이용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뿐이 남지 않았다.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그려야 하는 이야기들.

   

# 그들이 그리지 못하는 것


그러나 권윤덕 작가의 ‘꽃 할머니’는 여전히 일본에서 출판되지 않았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의 우익세력들, 그들이 득세하며 급격히 우경화되는 일본사회. 비단 그들이 아니라도 지난 시기 자국의 범죄를, 그것도 이렇듯 더럽고 잔인한 범죄를 들춰내서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림책의 일본 내 출판을 맡았던 ‘동심사’의 회장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서대문 형무소를 견학, 참배하는 열의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권 작가에게 보내온 메시지는 끝내 “일본 사회 내에선 태평양 전쟁 이전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더욱 빈틈없이 준비해 출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 일본의 정계는 심각하게 우경화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의 개정을 촉구하고, 어느 유력 정치인은 “위안부는 정당했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일본 내 우익집단들은 위안부 범죄에 대한 양심적 활동을 벌이는 시민단체들에 대한 테러도 자행하고 있다.


# 결국 우리도 그리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같은 일이 비단 일본에 국한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전쟁 중 성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라이따이한’. 영화 속에서 권윤덕 작가는 어린 청소년들을 만나며 한국의 군인들도 7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많은 민간인 여성들을 강간했던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의 어린 아이들도 일본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베트남의 민중들이 그 광경을 봤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살인과 폭력, 그 광기의 소용돌이에서 분출되는 욕구. 그 욕구의 해소를 위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 사실 위안부 문제는 (그 규모와 잔혹함에서 한국군과 일본군의 그것에 양적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가해국과 피해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전쟁이라는 광기에 희생된 여성인권의 문제다. 기실 한국사회, 특히 정부도 라이따이한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조력에 대단히 인색하다. (이용과 조력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지 ‘않는’ 것들은 일본의 우경화와 우익세력이 아니라 범죄를 범죄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 때문이다. 그것이 서푼짜리 애국주의든, 전근대적 마초이즘이든.


종종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질곡과 수난의 역사를 견뎌온 가여운 피해자로만 포장하거나, 일본군의 잔인함과 군국주의를 성토하는 선동을 일삼는다. 혹은 일본군에게 ‘더럽혀진’ 여리고 약한 소녀의 이미지를 덧씌우거나.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모두 본질의 은폐를 호출한다.


영화에서도 한국의 또다른 남성 작가와 출판사 인사들은(남성이다) 권 작가의 그림책에 욱일승천기가 빠져있음을 지적하며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강조하려 한다. 그러나 권윤덕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일본군 가해자에 희생된 피해 소녀들이 아니였다.


# 그리고 싶은 것   


결국 그리고 싶은 것은 전쟁과 거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성범죄, 그를 종용하는 국가권력과 그를 부러 은폐하는 애국주의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에서 방점이 찍혀야 할 곳은 ‘일본’이 아니라 ‘성범죄’인 것.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일본의 우익세력이나 과거의 전범들이 아니다.(그들의 사과가 필요없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성범죄 보다 일본 그 자체에 분노하고 있던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사과해야 할 것도 한국정부가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무고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강간했던 자신들의 과거와 그에 희생된 인류 전체에 대한 사과가 우선이다.


그림(畵)의 어원은 그리움이다. 권윤덕 작가도 그녀의 그림책을 보고 자랄 아이들도 그리고 그녀와 그 아이들을 모두 지켜보는 이들도 무엇을 그리워해 무언가를 그린다. 그리운 것은 증오가 아니다. 때문에 그려야 할 것, 그리고 싶은 것도 증오나 복수가 아니다. 그려야 할 것은 오직 평화와 위로, 용서, 화해. 그리고 그것은 과거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기억하는데서 출발하며 직시하는 일이란 표면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일이다.


상처가 아픈 것은 낫기 위해서다. 벌을 받는 것은 다시는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거름이 되기 위함이다. 사과는 용서받기 위해 하는 것이고, 화해는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쟁과 폭력, 학대가 없는 꽃 같은 세상. 꽃할머니가 마침내 그렸을 그 세상을 그리는 것은 남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 아버지의 이메일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늘 ‘폭군’이었다. 사소하게는 TV 앞 리모컨 점유율이나 저녁식탁의 고기반찬 선점권부터 조금 더 심각하게는 어머니를 향한 폭력이나 무책임한 가정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매일 술을 마시던 아버지, 그 술상을 뒤엎던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 결코 나를 이해하지 못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이미지는 가부장, 남근주의 같은 말들로 규정됐다. 그렇게 아직 젊은 날을 살아가는 이들은 대부분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증오심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토대가 됐다.


그렇다고 이 시대의 아버지가 얼마나 가족들로부터 소외됐는지, 얼마나 외로운 인간인지를 무작정 두둔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적어도 이 시대 한국사회의 아버지는 정말로 그랬다. 다만,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도.


 


# 그녀의 아버지


홍재희 감독은 그녀의 아버지 홍성섭 씨로부터 43통의 이메일을 받는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1년간 보낸 편지들. 거기엔 1935년부터 이어진 70여 년간의 삶이 적혀있었다.


아버지는 ‘빨갱이들의 나라’가 지겨워 한국전쟁 직전 어린나이에 홀로 월남에 성공한다. 배움에 대한, 성공에 대한 열망이었다. 원대한 꿈과 영민함으로 사업에 성공을 목전에 두고 그는 한국전쟁을 맞이한다. “지긋지긋하던 인민군을 피해왔더니 다시 인민군 천지가 돼버린 것”이다.


이 전쟁과 가난, 이 지긋지긋한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아버지는 바다 건너의 땅에서 꿈을 찾았다. 월남전이 벌어진 베트남, 건설경기 붐이 불던 중동, 독일, 호주, 그리고 미국. 언제나 떠나고 싶어 했던 아버지에게 한국은, 그리고 한국의 가족은 거추장스런 짐이었다. 그리고 그 꿈이 좌절된 아버지에게 한국과 가족은 철저한 원망의 대상.


아버지는 좌절된 꿈이 남긴 상처를 가족에 대한 폭력으로 메우려 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어머니를 가끔은 딸을 때렸다. 경제적으로 무능했으며 무책임했다. 가정경제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으며 똑똑한 두 딸은 대학을 가자마자 집에서 ‘탈출’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결혼해 미국으로 떠난 큰 딸과 아버지가 그렇게나 싫어하던 운동권이 된 둘째 딸의 삶의 원동력은 어떤 부분에선 아버지에 대한 증오였다.



# 우리들의 아버지



그러나 영화가 조금씩 더 아버지의 지난 삶을 추적해 갈수록, (감독 그녀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그 방향성을 잃어간다. 어머니 집안의 내력이 밝혀지면서 부터, 차라리 너무 비극이어서 이제는 희극적이기까지 한 이 나라의 현대사가 이들의 가족사로 침투하면서.


어머니의 작은 오빠는 한국전쟁 직후에 행방불명 됐다. 그 작은 오빠를 찾으러 간 형제도 마찬가지로 행방불명됐다. 당시의 정부는 행방불명을 월북으로 의심했다. 서슬 퍼런 연좌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설상가상 어머니 집안의 오빠들은 전쟁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꿈을 좌절시킨 것은 그 연좌제였다. 높은 성적으로 해외파견 업무 시험을 통과해도 연좌제에 묶여 실패하거나 금세 국내로 소환돼야 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술상을 뒤엎으며 뇌까리던 “빨갱이 처갓집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는 외침은 사실이었던 거다.


지겹고 미웠던 인민군을 피해 넘었던 38선이었지만 전쟁은 다시 아버지의 꿈을 앗아갔고, 그 전쟁과 대립이 남긴 연좌제는 다시 아버지의 남은 모든 희망마저 빼앗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무엇 하나 딱히 잘못한 것도 없이 좌절해야했다. 남은 것은 짧은 해외파견동안 마련한 작은 집 한 채. 아버지는 그 집 한 채만을 부여잡은 채 집안으로 침잠했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에겐, 심지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이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남자에겐 ‘전가’의 대상이 필요하다. “너 때문이야”.


아버지에게는 “빨갱이 처갓집”이 원망의 대상이었다. 북에 남겨둔 가족들이 있으니 북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를 법도 하건만, 아버지에게 북한은 그저 ‘빨갱이들의 나라’였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빨갱이’의 의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부숴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어쩌면 우리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늘 나를 앉혀놓고 무너진 당신의 꿈을 토로했다. 문인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설국’이나 ‘에덴의 동쪽’같은 소설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야기의 결론은 가난한 집의 장남, 가난한 집의 맏사위로서 꿈을 접어야 했던 기구한 팔자와 그렇게 포기하기엔 아까웠던 자신의 문재에 대한 자랑이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사실 아버지뿐일까, 꽤 유명한 만화가의 유망한 문하생이었던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들고 달려온 외할머니의 손에 붙잡혀 집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대부분 그렇게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유로 좌절해야했고 포기해야했고, 또 체념해야했다. 그리고 적당히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어느 곳에 그 원망을 게워내고. 그리고 그 한과 원망으로 얼룩진 폭력은 대물림되고.


‘그건 오로지 이 지겹고 고단한 한국의 현대사 탓이었다’고 말한다면 이건 또 얼마나 무책임해 보이겠냐만. 사실이 그렇다. 그들은 그렇게 누구의 탓도 아닌 채 좌절하고 포기했다.


<감독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시 웃음을 찾은 순간은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미국’을 찾았을 때다. 결혼한 큰 딸을 만나러 향한 미국. 평생을 방안에서 술만 마시던 아버지는 정원을 손질하고 손자를 안고 산책을 나섰다. 집안 곳곳을 청소했고 어머니와는 평생의 처음으로 다정하게 외출했다.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었던 건 분명 대한민국이었을 것이란 느낌이 드는 순간들.>


 


# 그리고 그녀와 우리의 아버지들


영화는 내내 질문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이해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아버지를 용서할 자격이 있겠냐는 질문이다. 감독은 카메라 너머에서 ‘홍성섭 가족’을 기록하는 홍재희 감독이면서 동시에 ‘홍성섭의 차녀 홍재희’로 그 프레임 안에 꿋꿋하게 서 있다.


그 과정은 감독 홍재희가 파헤친 가족과 아버지, 어머니의 알지 못했던 과거를 홍성섭의 차녀 홍재희가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들은 또 우리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아버지 홍성섭 씨는 죽기 직전까지 오래도록 살아온 집의 재개발 투쟁에 참여한다. 평생을 두고 그렇게나 혐오하던 ‘빨갱이 짓’에 가담하는 것. 어쩌면 아버지는 그 투쟁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해왔던 ‘빨갱이’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시금 떠올려본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빨갱이 둘째 딸’에게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우리의 아버지들과 (사실은 내 아버지와) 함께 이 영화를 다시보고 싶어졌다. 여전히 세상에 대한 증오와 체념을 동시에 간직하고 자신에게 또 자신의 가족들에게 모종의 폭력을 가하고 있는 우리의 아버지들과. 그리고 묻고 싶어진다.



“아버지, 제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 사적 다큐멘터리의 미덕



감독의 아주 사적인 다큐멘터리였던 <아버지의 이메일>은 사적 다큐멘터리가 가져야 할 두 가지의 미덕을 모두 지닌다. 하나는 홍성섭의 차녀 홍재희가 그녀의 가족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편지.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아버지를 가진 우리들에게 보낸 교환일기장 같은.



“결국 우리의 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이만큼이나 아팠어.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의 살던 고향은 춤추는 성미산 - 춤추는 숲


택시에 올라 목적지를 말하기 무섭게 기사 아저씨는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앞서 택시에 탔던 어느 모녀의 이야기였다. 말인즉슨, 엄마는 내내 어린 딸을 꾸중했는데 그 까닭이라는 것이 버스에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이란다. “제 밥그릇도 제대로 찾지 못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는 엄마의 걱정. 기사 아저씨는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지 무섭다”고 했다.


간간히 소식을 주고받는 중학생 조카는 얼마 전, 현장학습으로 어느 대기업의 사옥을 방문해 ‘멘토링 스쿨’에 참가했다 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직원들이 열네살의 중학생들에게 자신의 연봉과 학력을 과시하며 스스로 ‘멘토’라 칭한 그 강연회의 주제는 ‘꿈’이었다고. “어떤 어른이 될지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던 조카는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냐고 물었지만, 딱히 무어라 대답해주지 못했다.



# 다시 마을 - 인간적 삶의 복원


마포구에 위치한 성미산 마을은 ‘대안적 도시공동체’다. 초보 엄마, 아빠들은 “우리는 잊고 살았지만 아이들만은 부모세대와 달리 인간으로서 지키고 살아야 할 가치를 배우고 자랐으면”하는 마음으로 성미산 자락에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한해 두해가 지나는 동안 어느덧 마을에는 마을 밥집과, 카페, 학교까지 생겨났고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는 최초로 주민공천 후보까지 내는 등 성공한 도시공동체, 풀뿌리 민주주의 실험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도시공동체니 공동육아니 민주주의니 하는 다소 거창한 말보다 성미산은 그저 ‘동네’, ‘마을’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어울리겠다. 불과 2~30년 전만해도 당연했던 그 ‘동네’.


감독은 영화의 초입에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동네 풍경을 자랑한다.(그렇다, 그건 분명 자랑이다.) 사람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가는 길에, 학교를 다녀오다가, 골목어름에서 햇볕을 쬐다가 감독과 인사를 나눈다. 이웃사촌은커녕 옆집,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오늘날의 도시생활에서 인사하고 화답하고 미소 짓고 음식을 나눠먹는 마을의 풍경은 그리움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소통과 관계 맺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인간이 인사와 화답으로 표현되는 관계 맺기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거든 대답하지 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오라”고 가르쳐야 하는(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점을 또한 인정한다) 세상은 분명 병들어 가고 있다.


어느덧 부모세대가 된 이들, 그러니까 속칭 3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사랑이 풍부한 어른들에 의해 키워졌다. 그들에게는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이었다. 이모와 삼촌은 물론 동네 아주머니들과 형, 누나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사랑 많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 사랑을 주는 법, 받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 힘이 아마 암울했던 시대, 그들이 목 놓아 세상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것.


그러나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무한경쟁의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 옆에 앉은 친구는 곧 너의 경쟁자임을 잊지 말라고 강요하는 유명학원의 광고 문구를 보며 자라야 하는 아이들은 어디서 사랑을 나누고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서로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이뤄지는곳, 마을은 그대로 인간적 삶의 복원을 향한 첫걸음이다. 시간과 관계의 축적. 단골손님과 동네 형들과 옆집 아줌마와의 인사, 다툼, 화해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마을 공동체. 그 관계의 중첩과 마을이 서로를 돌보고 안아주는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   

  


# 나무를 심는 사람 - “생명에는 주인이 없어요”


감독은 어느 날 성미산 마을의 열세살 승현이가 파헤쳐진 나무의 뿌리에 흙을 덮어주는 장면을 포착한다. 나무가 안쓰럽다는 듯 승현이는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 손으로 흙과 나무뿌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어느 사학재단의 개발이익을 위해 성미산은 파헤쳐지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심은 어린나무들도 수십 년간 마을을 지켜봤을 아름드리도 포클레인과 전기톱 앞에서 허물어진다. 거세게 저항하는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관청 공무원들과 시공사 직원들은 ‘사유지’임을 강조한다.


그러게. 제 소유인 땅에서 주인이 무얼 하든 누구도 상관할 수 없다. 어른들의 세계는 그렇다. 그러나 승현이는 “생명에는 주인이 없다”며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한다. 


“이 작은 나무에도 온갖 개미들이며 벌레들, 진딧물이 있어요”


제 주변에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아파트 평수를 넓히는 것을 생의 지상과제로 삼은 어른들에게는 없는 그 지혜가 산을 놀이터 삼아, 나무와 꽃을 친구삼아 살아온 아이들에게는 있다. 사람이 버젓이 앉아있는 땅을 중장비로 파헤치고, 높은 곳에 매달린 사람들을 밀쳐내고, 전기톱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어른들에게는 없는 지혜. 


여담이지만, 마을의 한 아이는 공사장 주변에 포도 씨를 뿌리면 공사가 멈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포도가 자라나면 인부아저씨들이 포도를 따먹느라 공사를 안 할 것이라는 이야기. 중장비로 위협하고 완력과 악다구니로 저항해야 하는 어른들을 모두 일순간에 부끄럽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곳이 그의 땅인지 나는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이거나 아니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백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中


성미산을 놀이터삼아 자란 아이들은 땅과 나무를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자연보호’니 ‘녹색성장’같은 표어를 내걸며 땅을 파헤치고 나무를 자른다. 그건 사람도 자연도 그저 자신의 주변부, ‘환경’으로만 대하는 태도와 자신을 포함한 뭇 생명을 모두 자연의 일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다.  


# 다시, 나의 살던 고향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영화의 흐뭇한 시선은 울고, 다치고, 슬퍼하는 이들의 흔들리는 시선으로 서서히 옮겨간다. (영화에는 감독의 촬영카메라 외에도 주민들이 핸드폰이나 캠코더로 직접 찍은 영상들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그 영상들은 어둡고 흔들리는 주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 산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 너무나 두꺼운 현실이라는 벽에 고작 조약돌 하나 던진 것이라는 자조.


영화의 시선은 그렇게 사람들의 절망과 슬픔을 응시한다. 사람들은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실패했고, 지쳤고, 다쳤다. 그러나 절망에 대한 지긋한 응시에 따르는 것은 다시 모종의 희망이다. 그것은 마을사람들이 몸으로 부대끼며 포클레인을 막아 세우던 싸움에서 ‘냅둬유’라고 노래를 부르며 성미산과 그 산자락 사람들의 삶을 전달하는 방식의 저항으로 옮겨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한 소절씩, 한 음정씩 짚어가며 인간적 삶에 대한, 뭇 생명들과 함께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렇게 다른 세상과 더 나은 삶의 꿈을 조금씩 전염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영화와 성미산의 사람들이 다시 부여잡은 희망의 방식이다.


마을의 어른들은 성미산이 마을 아이들의 ‘고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마음 한켠에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 곳, 고향.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고향을 지키려 그토록 힘겹고 어려운 싸움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싸웠다.


그 치열했던 싸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고향은 허물어질지 모른다. 젖은 흙을 헤집고 나온 지렁이, 제 손으로 한 삽씩 정성스레 심은 아까시 나무가 모두 콘크리트 덩어리 밑에 파묻힐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고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다. 아이들의 고향은 성미산이라는 공간 그 자체보다는 어쩌면 산의 품에서 자란 이만 가질 수 있는 너른 마음, 지고 또 져도 노래 부르고 웃으며 다시 희망을 움켜쥐는 삶에 대한 의지이며 그 마음을 지닌 이들과의 관계와 기억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 마을 사람들은 공사 중에 뽑혀버린 성미산 장승을 다시 세운다. 그 앞에서 너그러운 마음과 산의 품을 기원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그렇게 다시 처음이다. 비록 산의 한 뭉텅이가 잘려나가더라도 다시 살아갈 희망을 부여잡은 그 춤과 노래. 그리하여 시간이 또 지나 언젠가는 더 이상 성미산이 꽃피는 산골이 아니게 되더라도 


“나의 살던 고향은 춤추는 성미산”      





    

은밀하게 위대하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1.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때부터 그랬지만 장철수 감독은 영화를 잘 찍는다. 말인즉슨 김봉남도 은밀하게도 모두 이 영화가 내보여야 할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있다. 는 것.

2. 은밀하게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김수현이다. 김수현은 또래의 남자배우들 중 특출날 정도로 영민한 연기를 해내고 마찬가지로 특출나게 아름답다.

3. 지난 해 늑대소년 개봉당시 이후 영화관에 가장 많은 여성관객이 몰려드는 것을 봤고 몇년만에 처음으로 멀티플렉스에서 영화가 매진돼 두시간 이상을 기다려봤으며 늑대의 유혹 이후 처음으로 영화관 안에서 비명소리를 들었다. (괜찮다. 나도 비명 지를 뻔 했다. 어후. 그리고 같이 본 우리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

3. 간첩, 바보, 꽃미남, 야오이, 슬랩스틱, 가족애. 까지. 오락영화의 흥행요소들을 전부 버무려놓은 영화는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에서 흘러가고 다시 강조하지만 그건 김수현의 압도적인 매력과 그를 표현해 낼 줄아는 감독의 역량 때문이겠다. 

4. 다행인지 나는 이 영화의 원작 웹툰을 보지 않았다. 

5. 두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하다. 제 멋대로 반전이라고 우겨넣은 장치들은 유치하다못해 조악하고 지루하다. 개연성 없는 줄거리도 흥미로웠던 것은 캐릭터들의 매력 때문이었으나 김수현과 이현우가 억지부리고 납득도 안되는 인물로 돌변하자 영화 전체가 힘을 잃는다. 감정은 과잉하고 더불어 연기도 과잉한다. 한 씬을 십분가까이 끌어버리는 그 아연실색할 편집은 또. 난 무슨 타르코프스키인줄 알았다. 

6. 감독이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지 순간 착각한 듯한 후반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미친듯한 흥행돌풍의 이유도 납득할 수 있을만큼, 오락영화의 미덕은 충분하다. 

7. 손현주, 고창석, 주현, 홍경인 같은 좋아하는 배우들이 잔뜩이지만 이네들의 매력을 충분히 살려주지 '않은' 것은 또 서운함. 그렇다 그건 살려주지 않은 것. 사실 씬 스틸러가 많을수록 영화는 산으로 가는 법이니까. 

8. 다 해야 예닐곱 씬밖에 안나온 박은빈은 엄청 아름답다. 내가 박은빈이 만 15세일 때부터 알아보고 찜해놓은 매의 눈. 근데 왜 구암허준 같은걸 찍고있냐 말이지. 

9. 영화에 나오는 동네를 보면서 엄마랑 저 동네 엄청 좋다고 얘기했다. 동네사람들이 같이 삼계탕을 끓여먹고, 어른들 심부름으로 멸치똥도 따고, 밤중에 애가 없어지면 온동네 사람들이 찾으러 다니고, 외상으로 산 담배를 슈퍼앞 평상에 앉아 피우는. 그런 동네.

전국노래자랑 - 그래도 Let's Rock'n Roll

 

 

 

영화는 나른하고 통속적이고 신파적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게 얘기해줘도 좋은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영화의 이야기가 삶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건 현실의 삶이란 언제나 고단하고 비관적이며 (적어도 오늘 날의 세상에는) 희망같은 것을 말하기에 너무 가혹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겠다. 그래서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통속신파극을 보고나서 늘 하는 말은 "결국 해결된 것은 없잖아"

 

사실 이경규 아저씨와 배우들(특히 류현경과 유연석)에 대한 팬심만으로 본 이 영화도 그랬다. 그래서 보는내내 투덜투덜. 마찬가지로 삶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영화는 그저 해피엔딩으로 달려가고.

 

하지만 아무 개연성 없이 무능한데다 무책임하기까지한 남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장면에서 문득.

 

삶이란 복잡다난하지만 또 동시에 다분히 통속적이며 신파적이기도 하다. 개연성 없이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용서하기도 한다. 하물며 반려자 혹은 가족이라면. (난 아직도 우리 부모님의 감정과 관계를 적절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삶의 문제란 종종 그렇게 미숙하게 봉합되고 사소한 계기로 해소된다. 거기다 그 해소란 것이 진짜 정답인지는 언제까지고 알 수 없다. 해결하지 못해 곪아터지기도 하지만 섣불리 해결하려 들다가 어긋나고 덧나 다치기도 한다. 그럼 어쩌면.

 

노래자랑에서 불러재낀 카스바의 여인 한자락이 지난한 삶의 고민들을 모두 해소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상관 없다는 뜻이거나 모든 영화가 거기에 가닿을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이 영화의 바람처럼 "이게 당신의 문제를 해소해주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사소한 희망일 수도 있길 바라요"하는 마음.

 

 

고다르는 "영화는 현실의 반영보다는 반영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영화란 현실을 똑 떼어내 필름안에 박아넣는 것이 아니라 만든 이의 의식을 현실화 시켜내는 것.

 

요즘 무언가를 볼 때마다 극중 인물들의 고통을 대상화하며 즐거워했다. 좋아하는 어느 영화 감독의 "근래에 나오는 단편영화들이나 시나리오들에 대해 타자의 고통을 내면화하고 사유하는 과정없이 그저 소비, 전시하는 장르적 착취만을 가하고 있다"는 충고를 보고선 아 그렇구나. 싶었다. 그간 내 태도는 마치 삶의 정체를 응시하는 냉소적 관찰자 코스프레. 그리고 말한 것처럼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는 곧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다.

 

타자의 고통을 소비하고 착취하면서 희망을 부정하는 것. 얼마전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레 끼적인 글쪼가리에서도 그랬다. 그저 괴롭히는데만 급급해서는.

 

더 폭넓게 사유하고 이해하고 응시하는. 그리하여 마침내 그럼에도 부여잡는 희망의 부스러기마저 포착해내는.

 

전국노래자랑이 그렇게 고단한 삶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럼에도 한 줄기 희망을 부녀잡는 좋은 극본의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삶이란 그럼에도" 같은 건강한 마음의 미덕을 돌아보게 됐다는 것.

 

 

그러니까 말인즉슨, 나도 류현경 같은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