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가 몰래보는 병맛기사와 슬쩍 포스팅 - 유승준은 잘못하지 않았음



유승준 출연 '대병소장' 안보기 운동

기본적으로 기계적 중립을 지키겠다며 작위적 냉정함을 가장하는 글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사건을 명징하게 꿰뚫는 냉철함이 기자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라고는 생각한다.

링크시킨 기사에서 유승준을 굳이 스티브 유라고 칭하거나, 퇴출당한 미국인이 은근슬쩍 국내로 복귀하려는 속셈을 기정사실화 하는 일들은 냉철함은 커녕 유치하기까지 하다. 정보 전달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유승준이라는 호칭이 적당하고, 그의 속내 같은거 관심법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확실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측성 기사는 조선일보 기사 다음으로 나쁜거라고 학교에서 안배웠나.

사건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게이트 키핑의 과정은 어쩌면 사건 그 자체와 발화자보다 청자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대상을 지칭하는 언어와 표현이 이렇게 적나라하다면 말 할 것도 없다. 기사는 대중의 분노를 호출하는 글이 아니다. '전 남한의 군필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치고 싶거들랑 남보원이나 가시던지.

비단 이 기사뿐이 아니고 또 연예기사뿐이 아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기사들도 가끔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건 마찬가지다. 성명서 같은 글들을 쏟아 놓고 감정을 충동질하면서 진보니 미래니 사회적 책임, 연대니 하는 무책임한 말들만 뱉어 놓는 걸 보면 답답할때도 있다. 눈은 멀리 두어도 다리는 이곳을 딛고 있어야 한다. 다리마저 둥실떠서 부유하는 글들은 선동아니면 광고가 되기 십상이다.


어쩌다 보니 또 삼천포로 빠졌지만,
어쨌든 난 유승준이 큰 잘못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개인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입국금지 조치를 가하는 당국이 더 큰 잘못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대중예술인이다. 대중들의 심기를 불편케 했다면, 대중들의 눈밖에 나면 그만인 일이다. 그의 개인생활에까지 국가가 일일이 나서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물며 언론이 나서서 그 치졸한 간섭과 유치한 왕따놀이를 조장하는 일따위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가끔 이런 되도않는 기사를 보면 화가 난다. 정말 좋은 글을 쓰고 건강하고 넓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장벽에 부닥쳐 기자의 꿈을 포기하는 걸 종종 보기 때문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달겨들어 보지도 못했지만) 그 장벽에 내 눈앞에도 어렴풋 보이기 때문이다.


 

LG, 이택근을 버려라


LG빠 17년만에 늘어가는 건 인내력과 이해심뿐이다. 김재현 이상훈 유지현을 차갑게 버리는걸 이해해야 했고, 7년동안의 꼴찌다툼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거기까진 견딜만 했다. 기다리다 보면 94년의 영광이 다시 올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버뜨. 가끔 이 부자구단의 이해 할 수 없는 돈지랄은 도저히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FA대어들이 오는 족족 먹튀가 되는건 선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건 구단의 잘못일테다. FA는 역량이 검증된 선수란 뜻이다. 검증된 선수가 줄줄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탓은 구단의 관리문제다. 적재적소에 선수를 사용하지 못한 문제, 부상을 캐어하지 못한 문제, 멘탈에 도움을 주지 못한 문제 등등등. 그리고 이제 또 같은 짓을 벌인다.
올 스토브 리그 최대의 화제, '이택근'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택근은 타율 3할1푼에 4할 출루율, 4할6푼의 장타율 그리고 무엇보다 43개의 도루를 해낸 멋진 외야수다. 국대의 외야수이기도 하고 얼굴도 잘생긴데다 미녀 여친까지 있어서 스타성으로는 현재 KBO에서 손가락에 꼽힌다고 볼 수도 있다. 거기다 심지어 우타자. 좌타 일색의 LG가 탐낼만한 자원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과연 LG는 이택근을 탐내야 할 것인가?



## 외야진

LG의 주전 외야진은 국대 외야진과 바꾸자해도 바꾸지 않을만큼(아, 쓰다보니 솔직히 현수는 탐난다...;; 현수라면 전력분석이고 나발이고 닥치고 영입...;;) 엄청나다. 왕년의 도루왕 출신 타격왕과 3년연속 도루왕, 국민우익수까지. 거기에 적토마 이병규의 복귀가 거의 확실하고 안치용까지 대기중인 LG의 외야진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미어터지고 있다. 거기에 이택근까지 가세하게 된다면 그건 타팀에게도 LG에게도 공포다.

지명타자와 1루수 겸업의 대안을 제시하겠지만 지명타자와 1루수는 그렇게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까치 혜성이가 1루보던 시절에야 1루라면 수비 못하는 슬러거들의 휴게실쯤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오른쪽 타구에 대한 수비 비중이 증가해가는 현대야구에 있어서 1루 수비는 내야 수비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포수 출신 외야수 이택근에게 걸출한 1루 수비를 기대하는건 욕심이다. 실제로 이택근의 1루수비는 그닥 좋은 성적이 아니다. 그는 데뷔이후 112경기에 1루수로 출전해서 8개의 에러를 했다. LG의 수비시프트를 적응 해 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포지션의 변경은 그렇게 쉽게 말할 부분이 아닌것이다. 그건 다른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외야진중에 1루수비가 가능한건 그나마 이진영정도지만 국민우익수를 1루에 가져다 놓는 전력낭비를 용납할 만큼 KBO 나머지 7개구단은 만만치 않다.

지명타자로의 활용도 마찬가지다. 일본에 진출했던 이승엽이 지명타자로 기용되자 굳이 나서서 수비를 해야겠다던 땡깡은 괜한게 아니었다. 공격에만 가담하고 수비땐 벤치에서 파이팅만 해야하는 지명타자는 공격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타격을 잘하니까 타격만 해라라는 발상은 안이함을 넘어서 무식하다. 거기에 내년이면 FA자격을 얻는 박용택의 경우 자신을 어필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 그만큼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불만은 그대로 성적으로 연결될테다. 심지어 그는 2010년 LG선수단을 이끄는 주장이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누구하나 지명타자로 기용되는 것을 꺼릴만큼 발군의 외야수비 실력을 갖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병규는 시드니 올림픽 일본전에서 한국 야구사상 가장 멋진 장면중 하나로 기억될 수비를 보여준바 있다.



## 내야진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넘치는 외야진이 영향을 미치는 곳은 외야뿐이 아니다. 화려한 외야수들의 1루와 지명타자 겸업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1루와 지명타자를 맡아 오던 최동수와 박병호도 긴장의 나날이다. 94년에 입단해 LG의 굴곡과 영광을 모조리 지켜봐온 최동수는 오늘 LG의 역사다. 그야말로 화려하지 않은 프랜차이즈 스타. 최병살이란 오명을 뒤집어 쓰기도 했지만 불혹의 나이에 포텐셜을 터뜨리는(?) 대기만성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지난시즌 규정타석엔 못미쳤지만 시즌 막판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3할 가까운 타율과 65타점 이상의 타점으로 LG상위타선의 한축을 담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1루 수비 또한 여느 구단 1루수에 못지 않는 실력을 보여준다.

최동수가 LG의 역사라면 박병호는 LG의 꿈이다. 그는 아마시절, 동대문에서 4연타석 홈런을 날려 아마야구의 알미늄배트를 나무배트로 바꿔버린 장본인이다. 그는 창단이래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LG의 빅배트, 슬러거이다. 그가 아마시절이나 2군에서 보여줬던 능력은 그가 충분히 빅뱃으로 자라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고 실제 그는 올시즌 1군 경기에서 수차례 아치를 그려내며 자신의 성장을 증명했다. 물론 그는 아직도 피래미다. 그를 김별명이나 꽃범호 하물며 양신이나 헐크에게 갖다대기는 본인을 넘어 갖다대는 사람마저도 부끄럽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어린선수다. 어떻게 커나갈지 모르는. LG의 미래는 박병호가 쥐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 유망주의 성장에 있어 가장 필요한건 경험과 조언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LG의 슬러거라지만 그나마 그에 가장 가까운곳에 있었던건 최동수다. 박병호가 성장 할 수 있으려면 옆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조언을 해줄 선배가 필요하다. 그리고 배우고 익힌 것을 시험하고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실전경험이 필요하다. 결국 답은 1루 수비와 지명타자로 박병호와 최동수를 기용하는 것이다. 그간 LG에 없었던 자연스러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은 다름아닌 1루다.



## 마운드, 키스톤 콤비 - 문제는 바로 여기다

공격력에 있어 '우리에게 부럼 없어라'를 외치던 LG가 올시즌 꼴찌보다 못한 수모를 당한 이유는 누구나 알듯 마운드다. 봉미미에서 봉타나로 격상된 봉중근은 올시즌 봉크라이가 됐다. 7이닝 2실점의 봉리티스타트로 에이스의 책임감을 짊어지고 3.29에 11승이라는 성적으로 그걸 증명해냈지만 그 외엔 투수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올시즌 비담과 함께 꽃미남계의 양대산맥으로 자리잡은 심수창역시 시즌 중반까지 안정된 마운드 운영으로 반짝거렸지만 투수는 무엇보다 예민한 생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멘탈에 약점을 드러내며 연패의 수렁에서 허덕이다 끝내 인성이형한테 대드는 폭발을 보여줬고, 우규민은...우규민은...우규민은.... 그만하자. ㅠㅠ 김상현을 내주고 받아온 강철민은 마운드 근처에도 못가봤고, 릭바우어나 존슨은 기대도 안했건만 기대에 못미치는 실력을 보여줬다. 돌아온 이동현이나 박명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직 전성기의 구위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범준이나 한희, 최동환같은 유망주들의 가능성이랄까.

야구는 결국 투수놀음이다. 10점을 따내도 11점을 내주면 지는게임인 것이다. 올시즌 기아의 우승은 CK포의 엄청난 활약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구톰슨 로페즈 윤석민 서재응 양현종 유동훈까지 보유한 철벽마운드의 승리인 것이다.

애초에 마운드의 보강이 전력보강의 알파이고 오메가인것을 안 LG프론트는 처음부터 마운드 보강을 핵심과제로 삼았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눈물을 머금은 것이 팬들만인지 프론트도 함께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페타신도 버린채 용병 투수를 물색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세이부에서 세이브좀 한다던 오카모토 신야를 영입해 왔지만 그의 구위는 전성기를 8번쯤 지났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결국 이대로라면 작년과 마찬가지로 '배추가, 동현이가, 철민이가 돌아와 줄거야'라는 막연한 기대로 마운드 보강을 끝내게 될 상황이다. 차라리 드래곤 볼을 모으시지.

뿐만 아니다. 화끈한 LG공격진의 구멍은 박경수 권용관의 키스톤 콤비다. 역대 최강의 유망주, 진정한 5툴 플레이어라던 박경수는 입단과 동시에 유지현 코치의 등번호를 물려받을 만큼 기대를 받고 있다. 무려 7년째. 권용관 또한 발군의 유격수로 엘지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하지만 그의 빈타는 어쩌면 5백원짜리 야구연습장의 공마저도 못치는건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게한다. 그들은 발전하지 않고 있다. 오래도록.

그들의 포텐셜은 누구라도 인정하는 바이다. 팬심으로 거짓말을 쪼끔 더해 말하자면 권용관의 수비는 박진만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박경수는 빠른발에 클러치 능력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5툴 플레이어다. 그러나 그들이 정체하는 이유는 견제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오지환이나 박용근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분명 그 사이엔 넘사벽이 있다. 플래툰 시스템을 도입하여 경쟁시킬 곳은 바로 여기다. 욕먹더라도 히어로즈에서 선수 사오기를 결심했으면 차라리 강정호같은 유망한 내야수를 사오는게 나았을거란 생각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강정호와 오지환, 박경수, 권용관이 끊임없이 경쟁하는 키스톤 콤비. 생각만해도 설레지 않느냐 말이다.



## 그래서 이제 어쩔거임?

나라고 이택근의 가세가 반갑지 않겠는가. 이대형과 이택근이 테이블 세터로 나서서 줄창 뛰어주고 박용택 이진영 이병규가 불러들이는 시나리오에 왜 히죽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건 불균형이다. 야구의 매력이란 것이 스타플레이어, 슈퍼 플레이어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작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여러명의 수비를 재끼고 골을 넣어버리는 마라도나나 호나우도의 플레이는 야구에선 나올 수 없다. 가장 철저한 팀플레이의 스포츠가 바로 야구다. 이택근이 4할을 치고 도루를 90개쯤해도 혼자선 점수를 낼 수 없다. 야구팀을 만드는 과정은 무엇보다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다.

이대로라면 LG의 외야진은 포화를 넘어 과부하 상태다. 아깝지만 이택근은 계륵인 것이다. 버려야 할테다. 가능하다면 이번 거래를 물렀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니 이택근을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하고 쓸만한 좌완 유망주 하나 받아오는게 좋다. 그래 권혁 정도라면 좋겠다.(아. 욕심인가)

박종훈 감독에게 5년이나 되는 계약기간을 제시한 이유는 당장의 우승이 아니라 팀의 재건이다. 팀의 재건이라 함은 팀의 기본을 제대로 닦게 하는 것이다. 팀의 기본이란 성장하는 유망주, 정점에 선 스타플레이어, 팀의 균형, 팬들의 애정을 두루 갖추는 것이다. 이택근은 엄청난 플레이어임엔 틀림 없지만 오늘 LG에서 탐낼 선수는 아닌 것이다.

## 추가, 재미로 짜본 2009 선발 오더

공격

1. 이대형 (CF)
2. 정성훈 (3B)
3. 박용택 (LF)
4. 이병규 (DH)
5. 박병호 (1B) - 최동수
6. 이진영 (RF)
7. 박경수 (2B) - 박용근
8. 조인성 (C) -  김태군
9. 권용관 (SS) - 오지환

선발

1. 봉중근
2. 용병투수 (큰 기대는 안하니까 기대한 만큼이라도 해주는)
3. 심수창
4. 한희 - 이형종 - 이범준

불펜

이동현, 오상민, 최동환, 류택현, 등등등

마무리

이재영, 오카모토 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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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년엔 가을에도 야구했으면 좋겠다.



고장난 고물 녹음기 - 노빠


노회찬, 그 답답한 녹음기 정치


아. 줄줄줄 쓰다보니 얼마전에 했던 얘기만 반복하게 되는. 답답한 녹음기도 아니고.
그래서 간략하게.

1. 노빠와 민주당은 진보가 아님. 진보정당과는 눈꼽만큼의 동질성도 없으므로 연대는 불가능.

2. 민주당과 노빠들이 진보연하는게 이명박보다 더 꼴보기 싫음. 노무현과 이명박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

3. 진보 정당 연대의 목표는 눈앞 선거의 승리가 아니라 (거창하게는)민중 정치 실현, (쉽게 말해)잘먹고 잘살자임.

3-1. 민주당과 노빠가 대단한 지분을 갖고 있지도 않음. 서거 정국의 노란풍선은 민주당지지가 아니라 노무현 개인에 대한 연민과 애정. 혹은 구태의 정치보복에 대한 분노 표출이었음.

4. 지방선거, 총선, 대선 몽땅 한나라당이 이겨도 나라 안망함.

5. 오히려 어설프고 명분 없는 연대로 그나마 한줌밖에 안남은 진보 정당이 지리멸렬하는게 훨씬 위험함.

6. 사람들이 백날 이래봐야 노빠들에겐 씨알도 안먹힐 거라는 걸 앎. 오직 방법은 개무시 크리.



태안, 코펜하겐, 헌터스, 북친- 인간의 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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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고 2년, 의항리에선

허베이스피릿호가 태안바다에 기름을 쏟은지 어제로 정확히 2년이다. 백만의 사람들이 보여줬다는 그 감동의 자원봉사가가 끝나고 나자 거짓말처럼 바닷'가'는 깨끗해졌고, 어업도, 생태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다, 그건 거짓말이다.

눈에 보이는 곳만 닦아내, 바닷속은 여전히 기름 알갱이들이 가라앉아 죽어있다. 생명들이 살 수 있을리 없다. 자식들 가르치고 시집보낸 굴이며 조개는 돌아올 줄 모른다. 다시 기름이 쏟아져도 사람들이 금방 또 나서 닦아줄거라 믿는지 정유업체는 아직도 한겹유조선을 바다에 띄워 수만 수억톤의 기름을 들여온다. 보상도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상건수의 0.9%, 신청액의 0.6%만이 보상받았을 뿐이다.

우려했던건 이런 일이었다. 원인과 과실도 밝혀내지 않은 채 자원봉사 미담으로 사건을 왜곡했던 자본과 정부, 언론은 이제 아무런 것도 해주지 않는다. 태안의 주민들은 건강도 돈도 삶도 모두 잃은 채 한숨을 내쉬는 일밖에 남은게 없다.

사실 더 근본적인 물음은 사고가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무엇때문에 저 많은 기름이 바다위를 오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그날도 오늘도 하지 않는다. 더 많은 소비, 더 큰 안락의 댓가가 결국은 목숨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한,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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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자발적 감축하되 성장에 필요한 만큼은 배출”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성장에 필요한만큼은 배출'이라는 미적미적한 카드를 들고 나섰다.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온실가스를 9번째로 많이 내뿜는 나라이고, 온실가스 배출 증가량에 가장 많은 나라이다. 그런나라에서 심지어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기치를 내건 정부가 성장할만큼은 하고 되도록 줄여보긴 하겠다는 되먹지도 않은 말이라니.

물론 비단 어느 한 나라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온실가스 배출과 생태파괴는 이미 말로 담을 수 없을만큼이고, 일단 먹고 살기 바쁜 개도국들과 신흥 공업국들 또한 온실가스 따위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결국 생산을 늘리고 소비를 증대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인 자본의 속성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 삼키는 것이다. 문제는 욕심이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죽여야 하는 제로섬게임. 결국 생산하고 소비하다 제 목숨까지 소비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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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일요일밤의 새 코너 '헌터스'에 대한 논란이 첫 방영 이후에도 잦아들지 않는다.
여론을 의식한 듯 첫 회 방송에선 멧돼지의 포획이나 사냥에 대한 얘기가 많이 등장하진 않았지만 근본적인 관점,
그러니까 인간의 이익을 위해 다른 동물의 개체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그릇되고 오만한 관점은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번식해 생태를 파괴하는 생물은 다름아닌 인간이다. 좁은 땅떵어리에 60억이 넘는 개채가 살며 모든 생태사슬을 끊어 놓고 있다. 멧돼지는 고래로 살아왔던 영역과 생존을 위한 본능만을 발휘할 뿐, 오히려 다른 존재를 위협하는 건 인간이다.

자기의 잣대로 다른 생명을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다는 생각은 고대의 노예제도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 않는 사회의 발달, 신분철폐와 평등, 박애. 애초에 자신 아닌 존재의 생명 자체를 하찮게 여기고 있으니 노예를 죽이는 것쯤 아무렇지 않던 고대 귀족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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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인간 자체를 증오하고 오직 인간의 절멸만이 답이란 무모한 주장을 하는 건아니다. 분명 인간은 어떤의미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머레이 북친의 말에 따르면 모든 오류의 시작은 (인간)사회와 자연을 분리하는데서 시작한다.
자연을 인간사회의 발전을 위한 정복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관점도, 인간의 원죄에 의한 자연 파괴를 막기위해 인간을 혐오하는 관점도 인간사회와 자연을 분리하여 사유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사회'는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생물종과는 다르게 가진 특질이다. 동시에 인간의 사회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것이지만 그 의미는 엄청나게 다른)개미굴이나 늑대의 부족처럼 자연계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면 무조건적인 개발주의든 근본생태주의든 양극단의 늪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인간이 생태계의 일부인 것을 간과하는 오만.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이다.

문제 인식의 시발점은 생태계 일부로서의 인간사회다. 정복하여 계급을 두고 착취하는 구조를 인간사회 내부에서 뿐 아니라 생태계 전체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생태계의 파괴나 부조화는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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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적 생산량이 극심히 부족한 시절로 회귀할 수 는 없다. 다만 과하게 누려오던 것들을 포기 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지만 인간에 대한 증오가 답은 아니다.

결국 조금 버려야 한다. 조금 더 가난해 질 수 있어야 한다. 덜 생산하고 나눠 써야 한다.덜 먹고 덜 버려야 한다. 더 많이 걷고 더 여유 있어야 한다. 서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아껴줘야 한다. 정복보단 공존을, 물질보단 정신을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신은 그럴 수 없는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더 노력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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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스를 기다리다 일밤의 또 다른 새코너 '단비'를 봤다. 물이 없어 죽어가는 가난한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를 보다 수도꼭지를 열어놓고 양치를 하던 아침나절이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물은, 뺏지 않으면 적어도 모자르지 않다.


파업을 지지합니다

 
1.
철도노조의 파업이 끝났다. 결국 백기를 들고말았다. 불법을 운운하는 정부의 등쌀에, 수구언론이 전가의 보도처럼 떠들어대는 '국가경제'에 협박당할 사람들의 예정된 광기에.

먹고살 안정된 일거리가 보장됐으면서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천박한 의식으로 노동자들을 바라보는지 여실히 드러낸다.

누구나 알듯 파업은 헌법적 권리다. 덜 가난하다거나 덜 괴롭다는 이유로 그 권리를 침해 할 수는 없다. 그런 논리로 따지고 들자면 실업자보다 나은 비정규직도, 노숙자보단 나은 철거민들도 두 손 놓고 아무런 불만 없이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정부는 가장 취약한 계층의 목소리엔 귀를 귀울였는가.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철거민 어느 한 곳에 하다못해 동정과 연민의 눈길이라도 보낸적이 있던가. 영하의 날씨에 옥상에서 제 몸이 타는 것도 아랑곳않는 늙은 아버지를 방화범, 살인자로 만들어버린 일이 불과 며칠전이다.

'그러게 선거 때 정신차리지 그랬어' , '다음 선거때 두고보자' 같은 의미없는 말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파업'이야말로 민중의 힘을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사실 문제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업'을 필두로 하는 민중 개개인의 직접행동. 민주주의에서 주권을 실현하는 가장 큰 수단은 선거가 아니라 직접적 행동이다.

2.
좀 따지고 들면 정치파업이라는 말 자체가 웃기긴 하지만 그건 차치하더라도 난 철도노조의 파업이 정치파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기업 선진화 방안은 필연적으로 공기업 노동자들의 삶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철도의 적자는 부실경영과 정부정책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철도공사는 여타 국가에 비해 훨씬 많은 시설 관리비를 내는데다 벽지 운행등의 서비스를 위해 정부가 지급하는 보조금은 실제로 받지도 못하고 있다. 거기에 정부가 무리하게 공항철도를 인수케 함으로 철도공사의 적자를 부추기고 있다. 이런 판국에 공기업 선진안 같은 하찮은 종이 쪼가리로 모든 적자의 원인을 노동자에게서 찾으려 하는건 어불성설이다. 노조가 파업에 나서는 것은 반정부투쟁보단 차라리 생존권투쟁인 것이다.

3.
기륭, 쌍용, KBS, 철도까지. 정부의 노조 길들이기는 이제 본궤도에 올랐다. 온 나라에 무노조경영방침을 도입할 셈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자본의 독재가 도래한 것이다. 이젠 무기력과 냉소가 가장 위험하다. 대통령만 다시 잘 뽑으면 될거라거나 선거때까지만 참자는 허황부터 버려야 한다. 먼저 할 일은 '인식'하는 일이다.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인식하고 무엇이 내 삶을 위한 일인지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포기없이 싸워야 한다.

다시 파업하라. 파업을 지지한다.

우리 이제 헤어져


 진보정당이 유시민 전략을 받아야 하는 이유

## 사표론 혹은 비판적 지지론

노도와 같았던 87년의 항쟁을 끝마치고서도 노태우가 대통령직을 승계받는 꼬라지를 물끄러미 지켜봐야 했던 이유는 양김의 분열이었다. 분열에 대한 공포와 승리에 대한 집착은 그때부터였다. 많은 이가 '그들'을 싫어하고 미워했다. '그들이 다시금 권력을 잡아  내 삶을 파괴할 모습'을 보게 되는 걸 두려워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될 놈'을 밀어주자고 다짐했다. 다음에, 다음에를 기약하면서.

다음은 계속 차일피일 미뤄졌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지나 변변한 진보후보도 하나 내지 못한 지난 대선까지도 비판적 지지론과 사표론은 스멀스멀 고개를 디밀었다. 대선뿐이 아니었다.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 웃긴건 진보를 자처하며 비판적 지지론에 치를 떨던 이들조차도 정작 의회입성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선거연대를 운운하던 모습.

그렇다면, 그간 일련의 정치협상들은 모두 진보나 혁명을 위한 것들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건 단지 금뱃지 패티시였다. 어떻게든 금뱃지를 탐하려는 저열한 욕심.들 주제에 진보니 개혁이니 집권저지니 비판적지지니 하는 말들을 입에 올려왔던거다. 어느 진영에든 노골적인 금뱃지 페티시 환자들이 넘쳐나는데 대의와 명분과 미래와 우리를 위해서 일단 지금은 닥치고 요기 붙어라 루저들아 라는 외침에 홀랑 넘어갈 바보가 어디있겠는가.

## 진보의 약진, 그리고 몰락

진보정당의 약진이라고 한다면 역시 2004년 총선의 결과다. 13%의 지지를 받고 두자리수 의석을 확보한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탄핵과 민주당과 노빠들의 공이었다고 자처하기에는 글쎄. 난 유시민이 사표를 운운하며 민노당 찍으면 또 한나라당이 이긴다고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연하다. 내가 그러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ㅡㅡ;;) 민노당 당게와 아고라를 오가며 사표론을 들먹이며 비판적 지지를 외치던 그 많던 불망의 밤들을 분명 기억하고 있는데 모든게 민주당의 공이라니.

진보의 몰락이라던 지난 대선의 2%지지와 분당은 한나라당의 탓이 아니다. 오히려 진보와 개혁을 자처하던 지난 정권이 보여준 행태라는 것이 아프간, 이라크도 모자라 대추리에까지 군대를 파병하고, 대량해고와 비정규직법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한미 FTA까지 채결한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겠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일단 지난정권과 민주당도 진보를 자처했으니 진보니 뭐니 하는 딱지가 붙은 모든 집단에 응징의 철퇴가 가해진건 어쩌면 당연한 일. '초록은 동색일지도 모르지만 쟤네와 우린 달라'라는 말조차 꺼내보지 못한 진보정당에 제일 큰 책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판국에 진보정당의 약진은 민주당 덕, 몰락은 한나라당 탓.이라는 해괴막측한 논리를 들고 나온다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발딱발딱 일어나 게거품 물어댈판이다.

## 백마 엉덩이와 흰말 궁둥이

초록은 동색이다. 행정수도 이전과 4대강사업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또 비핵개방3000과 대추리 파병또한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행정수도이전은 지방 발전 계획이라는 별로 아름답지도 않은 미명으로 또다시 작위적으로 근대화된 도시를 만들겠다는 단순무식한 발상에 다름없었다. '발전'이라는 미명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발상. 또 발전이라는 것이 오직 근대화되고 물질화되는 형태로만 나타나야 한다는 어리석고도 오만한 믿음. 개발이라는 당치도 않은 미명으로 강바닥을 해집겠다는 4대강 사업은 그런 개발주의, 물질주의를 부모로 둔 행정수도의 쌍생아와도 같다. 이제와선 노무현 정권에 입안됐다는 이유만으로 세종시 원안 추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몰상식이 짜증날 뿐이다.

평화를 졸로 보고 경제를 숭배하고 생태를 외면하는 곳.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닮은 차원을 넘어 완전히 똑같다.
연대가 이루어져야 할 곳은 오히려 그들이다. 난 그들이 속시원하게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똘똘 뭉쳐줬으면 싶다. 괜히 헷갈리지 않게.

앞서 말한것처럼 반MB전선은 진보니 혁명이니 개혁이니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금뱃지 페티쉬 환자들의 사이좋은 위장술. 비슷하고 공감해서 짜여진 연대가 아니라 오직 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짜여진 연대. 공감을 얻을 수 있을리 없다. 

## 진보의 목적 - 그러니까 무엇을 위해서

정당의 목적은 물론 정권창출에 있다. 그러나 진보의 목적이 정권창출과 의회진출에만 있느냐. 글쎄 과연.
대의를 이루는 쉬운길을 놔두고 왜 어려운 길로 돌아가냐 묻는 비담에게 스승 문노는 말했다.
"쉬운길로 가선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대의인 것이다"

진보정당이 모든 진보운동의 주력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의회진출과 정권창출은 정당의 목적일 순 있겠으나 진보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진보의 목적, 동력은 '명분'이다. 이것저것 다 재쳐두고 의회에 진출하고 정권을 창출한다고 만사가 해결되지 않는다. 정당은 찾을 수 있겠으나 진보는 찾을 수 없는.
시작이고 끝은 아다시피 더 낮은 곳에 있다. 국회의원 금뱃지보다 마을사람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이장님이 훨씬 진보의 명분에 가깝다. 이거고 저거고 일단 닥치고 의회진출부터.가 아니다.

의석과 정권을 잃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저들의 놀음에 놀아날 필요는 없다. 이미 저들이 되어버렸다면 할 말 없게 되는 거지만.

## 우리 이제 헤어지자

때만되면 이런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아깝기' 때문이다. 쌓아왔던 것, 버텨왔던 것 가진 것들을 내주기 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줘야 할 건 버려야 할 건 다 버리는 것이 진보다. 쌓고 또 쌓아서 만족하는건 그야말로 꼰대들의 턱기 아닌가.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면 이젠 가진것도 없지 않은가.

인정할건 인정하고 딱부러지게 말해야 한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놀아라. 우린 너네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 시시껄렁한 유혹에 넘어갈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음은 딴 집에 가있으면서 몸만 내게 와 부비며 용돈 타가는 옛날 애인하곤 헤어져야 한다. 그게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다.

대중추수주의에 대한 추억



MB “인기·인심 얻는 데 관심없다”



우리학교는 재단의 비리, 방만한 경영, 어른의 사정등의 이유로 초유의 학교부도 사태를 맞은 적이 있다. 그 초유의 사태를 해결코저 재단과 학교당국이 생각해낸 방법이라는 것이 '캠퍼스 이전'이었다. 서울시내에서 땅값으로 둘째가라면 서럽던 땅을 몽창 팔아서 빚을 갚고 헐값에 사두었던 변두리 귀퉁이로 학교를 통째로 옮기는 막돼먹은 퍼포먼스. 당연히 학생들은 결단코 반대해 나섰고 90년대를 관통하며 지지부진 늘어진 이 싸움이 학교의 전통처럼 자리잡아갔다. 그러던중 20년만에 운동권 학생회가 총학생회 수권에 실패하고 어용(이라 짐작되는) 총학생회가 들어서자마자 총학생회장은 이전 합의에 도장을 찍어버렸다. 싸움이 끝난 것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왔던 학교 이전이 확실시되자, 더이상 투쟁의 방향성조차 잡아낼 수 없었고 마침내 온 학교의 학생회 일꾼들이 모여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중론은 현실을 수용하고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15년을 백지화와 반대만을 외쳐왔으니 대표체로서 '이후'에 대한 준비가 있었을리 없다. 소소한 생활환경적 준비에서부터 이후의 학자투쟁에 대한 전망까지 무엇하나 마련된게 없는 상태였다. 아무런 준비없이 시장나가는 소마냥 끌려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이제부터라도 내일을 준비하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물론 학생회에 바라는 학우들의 의견도 거기에 모아져 있었다.

난 패배한 총학생회선거에서 학자정책을 맡았다. 때문에 조직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운동권들의 습성대로 패배 후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새조직에서도 학자정책을 맡고 있었다. 이후의 투쟁방향을 토론하자며 모인 그 자리도 내가 제안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패배이후 현실인식과 이후를 대비하자는 말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나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론과 대세였음에도 난 패배주의라 단정지으며 말을 꺼냈다.

"패배주의다. 상황이 어찌됐든 옳은 방향성을 제시하고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데 상황논리에 밀려서 정작 해야 할 투쟁을 도외시 하겠다는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학우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투쟁을 진행하겠다는 말은 어느 것도 책임지고 헌신하지 않겠다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대중추수주의일 뿐이다. 결국 소 끌려가듯 끌려가더라도 끝까지 저항하며 우리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단념하고 걸어서 따라가서는 안된다. 그 끝모를 저항이 대중들에게 우리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고백하건대 당시 써냈던 학자운동총론에도 [골 터질때까지 싸운다. 안되면 될때까지 싸운다.]로밖에는 요약되지 않는 말들을 써내렸었다. 실제로 그런 생각뿐이었다. 우리가 옳으니 아니, 결국 내가 옳으니 이대로 싸워나간다면 언젠가는 알아줄거야.라는 막연하고 헛된 믿음이었다. 마치 오늘은 오해받더라도 후일엔 기억되는 선지자를 코스프레 하고 있었다. 그 코스프레의 시작은 끝간데 없는 자기확신. 그건 오만이었다.

그 되도않는 일장연설이 먹혀들었는지 그 날부터 새로운 캠퍼스에 등교를 하게되는 날까지 다들 머리통이 터지도록 싸웠다. 앞에서는 학교당국과 재단, 어용(이라 짐작되는)총학생회를 규탄하며 이미 구부능선을 넘어 현판식만 마치면되는 신캠퍼스 이전을 백지화하라고 소리치며, 뒤로는 새 캠퍼스에서 살아갈 방편을 물어오는 학우들을 만나는 후배일꾼들만 죽어나는 판이었다. 그/녀들은 어지러워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도 몰른다고 말했다. 그럴수밖에. 나도 그게 뭐하는 짓인지 몰랐으니까. 난 그 말도 안되고 억지스런 쑈를 보면서도  애써 이게 진정성이고 모든것을 결의한 투쟁이라고 자기합리화 했다.

결국 새로운 캠퍼스를 맞닥드리고나서 모든 것은 명확해졌다. 아무런 준비없이 목청껏 있는 힘껏 치대온 팔뚝질은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이전이후 1년간은 그 공백을 매워내느라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학우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갓끈이나 고쳐매고 있던 우리를 외면했다. 총학생회 선거에서 다시 패배했다.

처음 '학습'을 하던 때 받은 책은 '학생회 운영의 원칙과 방도'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종종 나오는 어휘가 대중추수주의에 빠져선 안된다는 말이었다. 무조건 대중들이 원하는대로 행동해선 혁명이고 나발이고 결국 아무것도 못한채 쫑나기 십상이라는. 선배들도 그렇고 나도그렇고 그 말이 깊이 와닿았었나보다. 이후 뭔가 학우들의 의견이 어떻고 하는 말이 나타나면 '대중추수주의'라는 간편한 말로 뭉개버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만하면 빨갱이를 운운하던 꼰대들처럼. 그 편리한 무기를 무기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으니 그건 지독한 자기확신이었다.

대중추수주의란 말은 확고한 자기확신없인 가능하지 않다. 물론 무조건 대중들만을 쫓는 인기영합, 포퓰리즘은 어디서든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사랑이든 삶이든 혁명이든 정치의 영역이든 모든 곳에서 자기애와 확신은 명확해야 하는것도 맞는 일이다. 그러나 확신만큼 오만한 것이 없는 것 또한 맞는 일이다. 정도가 지나친 자기애로 자기를 민족의 태양으로 만들어버린 사례도 있지 않은가. 인민들이 굶고 있으니 지금하는 짓들 당장 멈추고 인민들 밥부터 주시오. 라고 말하면 그는 무어라고 할까. 대중추수주의라고?

인기따위 신경쓰지 않겠다는 MB의 말을 보고 있다가 여러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가장 싫어해 양극단에 서있는 그들은 사뭇 닮았다. 자기 신념에 대한 흔들림없는 확신.(무엇을 향한 어떤 신념인지가 중요한건 아니다. MB에게 신념이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의 이익, 자본의 이익만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았다면야.) 한 줄의 의심도 하지 않으니 끝없는 평행선을 달릴밖에. 대중의 말따위야 한낱 우민(愚民)들의 의미없는 하소연일뿐.
결국 선지자를 코스프레하는 대책없는 책임감과 헌신에 혀를 내두르다가 지난 시간이 떠올라 얼굴이 빨개진다. 잃어봐야 알게 될 것들. 그러나 나야 고작 대학생활5년과 학생회를 잃었다지만 저들이 잃을건 수천만명의 삶인데.

난 여전히 정답을 알지 못하겠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를 확신하는 일과 남을 받아안는 일의 적절한 경계선따위 도대체 어떻게 짐작해야 할까. 그러나 한개 두개 만들어진 오답노트 같은 것들은 있다. 확고한 신념같은 것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생각.
신념을 표피로 드러내 마침내 영웅이되는 옛날 이야기도, 목숨은 내놓을지언정 신념은 내놓지 않는 신념의 강자들이 이루어낸 혁명의 시대도 내가 감당하기에 난 너무 소시민적이다. 난 언제나 틀리고 틀린문제 또 틀리기도 하고 찍어서 맞춘걸 알고서 맞춘듯 으스대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 모두를 거스르는 신념 같은거 난 두렵다. 오답을 놓고도 결국 정답으로 증명해낼 지혜와 의지가 있는 이라면 모를까. 그러나 인간사 예수와 석가 이후로 그런 인간이 있기는 했나?   





사과즙 글씨
정을 의심하여 반을 내세우고 합이 도출되어 다시 정이되는 변증법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논리라고 말하던 고교때 국사선생님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정체를 숨긴 주사파였던것 같지만, 변증법이 아름다운 논리라는건 여전히 동의하는 바이다. 흔들림없이 '정'을 세우는 일, 거리낌없이 '반'을 받아안는 일, 그리고 마침내 합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내는 것이 진보하는 일이다.
 

  

광기와 폭력


"상습 아동성폭력범 화학적 거세 필요"

나영이 어머니 “관심도 후원도 사양할래요”


분노 할 일이다.
성범죄의 대상이 점차 어린, 약한 여성에게로 집중되는 일과 사회적 공분과 슬픔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범죄 예방에 대해서 분노 할 일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일이 양형을 늘리고 처벌을 가혹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서는 안된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분출에 가깝다.

성범죄가 일어난 후에 가장 중요시 해야 할 일은 피해자가 다시금 건강을 되찾아 피해를 극복하고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분노를 분출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 사태에 과연 어떤 도움일까 고민해 봐야한다. 오히려 2차 피해로 번질 우려가 더 크다. 생각해보면 이후를 살아가며 받을 부담스런 사회적 관심(이라고 쓰고 낙인이라고 읽는다)이  범행당시의 충격보다 덜하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다.

사형이니 거세니 하며 떠들어대는 일도 마찬가지다. 고결하게 가해자의 인권을 운운할 만큼의 깜냥은 아니지만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정도는 의심해 볼 일이다. 범죄는 양형이 가벼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툭하면 사람을 죽여 없애는 중동이나 가까이는 북쪽나라에서도 성범죄는 빈번하다. 아동 성범죄에 가장 민감하다는 미쿡에서도 아동 성범죄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인민재판 하듯이 모여다니며 죽여라를 외쳐대는 군중들의 폭력성이 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건 차라리 광기(狂氣)다. 자신의 정의감을 과시하며 만만한(?) 가해자를 향해 던지는 돌은 평소 발로하지 못한 자신의 폭력성을 공인된 대상에게로 향하는 광기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나. 그들의 폭력적 분노는 '가해자'란 이름을 갖게되며 동시에 더할나위 없는 약자가 되어버린(이래서 무조건 약자가 옳다고 얘기하긴 어려운 것)이에게로 쏟아진다. 약하고 어린 여성에서 행하는 폭력과 사뭇 닮지 않았나. 라는 불온한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분노하여 사태를 올바르게 다잡는 일과 다만 현상에 천착해 욕구를 분출하는 일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일인걸 명심해야 한다.

병을 치료하는 일은 통증과 원인을 동시에 제거해 나가야 옳다. 통증을 줄인다며 진통제만 고집하다간 병을 키우기 십상이고 병의 원인을 고친다며 통증을 무시하다간 병보다 고통에 먼저 상할 수 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부당하고 끔찍한 일에 분노하고 소리치며 같이 울고 흥분하는 일은 표면을 달래는 진통제 같은 것이다. 분노할 일에도 분노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회와 사람은 죽은것과 진배 없기 때문이다.
범죄가 발생하는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는 일은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처벌하는 일보다 애초에 폭력을 없애는 일이 더욱 현명하고 근원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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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사형이니 거세니 하는 방법들이 과연 가당키나한 얘기들인가 의심한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논리적으로 함당한가하는 의문도 의문이지만, 과연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이들 또한 사람이 아닌가말이다. 무엇이 있어 누구에게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었을까. 법전 몇쪽 외웠다고, 고작 몇 표 받아 선거에서 당선됐다고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를 부여받는건 아니다. 처벌은 징벌보다 교화에 더 큰 목적을 두는 법이다.

아이고, 우리 슨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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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첫번째 선거는 92년 대선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당시에 골목골목마다 붙었던 대통령선거 포스터는 신기한 풍경이었다.

아버지는 김대중 후보의 지지자였다. (후일에야 듣게 된 얘기지만, 아버지는 당시 민중 후보였던 백기완 선생을 지지했으나 '사표론'에 휩쓸려 김대중 지지로 돌아선 전형적인 비판적 지지자 였다.ㅎ) 집안에서고 어느 자리에서고 아버지는 공공연히 '김대중 선생님'을 뽑아야 민주화가 완성된다고 말했었다.

꿈뻑꿈뻑 졸면서도 아버지를 따라 개표방송을 보던 나는 아버지가 분개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김대중 선생님'은 처연하게 울었고 숙적이자 라이벌이자 동지이자 웬수인 김영삼이 당선됐다. 아버지는 분개하고 원통해했지만 나로선 '후보중에 제일 못생긴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참 폼 안나게 됐다'란 생각외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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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IMF가 터졌다. 온 국민이 나서서 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캠페인이 펼쳐졌다. IMF와는 상관없이 당시 우리 가족 경제는 내 출생 이후 최고의 호황기였기 때문에(그때 우리 부모님은 꿈에 그리던 내 집 장만을 하셨다.) 경제 위기에 대한 푸념은 사실 팝콘을 집어먹는 뉴스비평에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 모든게 멍청하고 무능한 김영삼 탓이라고했다. 식탁에선 멍청한고 무능한 김영삼을 비꼬는 우스개가 가족의 화목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구제금융신청과 외자유치, 국민캠페인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흐뭇해 하셨고. 나도 덩달아 흐뭇해 했다. 아이고 우리 슨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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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오후. 순안공항에 남한 대통령이 처음 발을 딛고 국방위원장과 뜨거운 악수를 하던 그 순간에 난 교무실에서 업드려뻗쳐있었다. 왜 혼나고 있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선생님들 들으라고 한 말은 정확히 기억난다.
" 아 왜 뉴스보느라 다들 난리야. 대강하고 빨리 와서 집에 좀 보내주지."
정확히 4년 후 그 장면을 볼때마다 환호하고 눈물흘리며 '자주통일의 필승보검, 민족의 빛 공동선언'이란 성명서를 쓰게 될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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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아버지와 술을 마시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로 언쟁을 벌였다.
"그는 위기극복을 가장하여 국제 금융자본앞에 우리를 내 던지고 신자유주의 경제구조를 만들어냈어요. 결국 구조조정, 경영합리화라는 미명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렸죠. 가난한자들의 돈을 빼앗아 재벌의 배를불려준것이 어째서 위기 극복이죠? 그와 박정희가 다른점을 모르겠어요. 노벨평화상이 별건가요? 결국 다 국가와 자본의 신선놀음일 뿐이에요."
아버지는 예전처럼 분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고 말씀하셨다.
난  중얼거렸다. '도대체 뭘 배웠길래 선생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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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무실에 앉아 푸짐했던 점심식사에 만족하며 배를 두드리고 있을때 속보가 흘러나왔다.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굉장히 슬펐다. 이해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가 공동선언을 만들어내고 민주화를 이룩해내서 드는 안타까움따위는 아니었다. 공동선언은 가변적인 평화안착엔 기여했지만 그 자체로 문제를 내포하고(이 문제에 대한 인식은 차후에 다시 포스팅)있고, 민주화의 공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업적이 훌륭한 위인에게 바치는 경외도 인간적 감정이 물씬 드는 친구에게 보내는 안타까움도 아닌 이 감정은.

어쩌면 '존경'이겠다. 80이 넘는 세월동안 오직 하나의 신념.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진정으로 옳다고 믿는 그것.에 모든것을바칠 수 있는 끈기와 의지. 거기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강인함. 그것에 대한 존경.
지금 이 마음은 존경할 것들이 점차 사라지는 세상에서 얼마남지 않은 존경의 대상마저 사라져버리는 아쉬움과 허탈함에서 나타나는 것이겠다.

그래, 그는 선생님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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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노제가 있던 거리에서, 함께 거리를 걷던 누이에게 물었다. 누가 죽어야 또 사람들이 이리 슬퍼할까요.
글쎄, 김대중 선생쯤이나 되야 이만큼의 오열이 또 있겠지.
사람들에게서 눈물을 이끌어내는건 거짓 이미지나 화려한 업적이 아니다. 그건 오직 진정성. 난 노무현의 서거정구에서 한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김대중선생이 노통의 유가족을 보며 오열하는 장면에선 눈물을 훔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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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다면 이란 말들을 하던데 난 그 냥반 다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겁의 세월동안 영면만 오직 휴식만. 삼가 명복을.




김장훈, 봉중근, 애국주의 - 당신을 위해서만


그의 애국심은 언제나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언제부턴가 '독도'에 아주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그와 그런 그를 추켜세우며 '김장훈을 국회로'같은 시시껍절한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어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했는데, 기어이 노래를 못하게되는 한이 있어도 독도 문제는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그의 말에 마침내 '아차'싶다.

독도의 '소유'에 대한 논쟁과 대립은 사실 대다수의 우리들의 삶과는 무관한 일이다. 결국 한떨기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 그것에 우리는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바다 저편 새들의 고향에 대해서까지 '소유'를 주장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종속시키려는 자본과 국가주의의 탐욕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차원에서 일부 일본 극우세력의 파시즘과 역사왜곡에 마땅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정당하고 정의로운 일이겠으나 그 접근이 '소유를 우리의 것으로 확정짓는'형태라면 이는 그 극우 파시즘을 우리 안으로 확장시키는 것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당면한 일본내 극우파시스트세력에 대한 지탄과 철퇴는 응당 가해져야 할 것이나 더욱 신중하고 엄격해야할 것은 우리안에 존재하는 파시즘이다. '우리 것'아닌 것들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로하는 애국주의, 민족주의는 결국 자본과 국가의 탐욕에 순응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독도를 누구의 '소유'로 할 것인가 하는 의미없는 다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질문과 싸움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장훈은 독도를 포기한은 있어도(포기라는 말조차 웃기지만) 노래를 포기해선 안된다.(물론 그 발언이 그대로 그의 진정이 아니라 그만큼의 굳은 각오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있지도 않은 독도의 '소유권'보다 곁에 존재하는 그의 노래가 우리의 삶을 훨씬 더 위로하기 때문이다.



봉중근은 팔꿈치 부상의 와중에서도 팀을 위해 몸바쳐 경기에 나서겠다고 한다. 그의 숭고한 희생과 의지에 많은 팬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지만, 글쎄.

봉중근은 명실상부 국내 프로야구에 손꼽히는 에이스투수다. 95마일을 육박하는 그의 묵직한 직구와 예리하게 허를 찌르는 너클 커브는 명품중의 명품이다. 8개구단의 주전 타자 72명중 봉중근의 볼을 자신있게 쳐 낼 수 있다고 장담 할 자 얼마나 될까.

걸출한 실력을 가진 봉중근에게 LG팬들이 거는 기대는 컸다. 8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 몇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투수부문 수상, 소박하게는 탈꼴찌. 그런 부담을 고스란히 전해받아서일까, '팀을 위해'라는 말이 그의 입엔 아주 붙어 있다. 시즌 초반 인터뷰에서도 다승이나 삼진보다는 이닝을 많이 소화하는 것이 팀을 위한 길이라고 말하던 그는 '팀'의 의미를 과대 확장하여 해석한다. 그는 팀을 위해 던지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팬들을 위해서나 다른 누구를 위해서 던지지 않아도 좋다. 그는 그저 자신을 위해서만 던지면 된다. 자신을 위하는 것이 높은 연봉이든, 명예의 전당이든 그저 그는 자신을 위해야만 한다.

박민규의 소설 [삼미 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엔 도대체 정체도 모를 팀의 위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바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저 팀을 위해 조직을 위해 헌신을 강요받는 일은 지독한 폭력이다. 하물며 그것이 자신의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짓임에야. 국기에 대한 맹세를 매 월요일 아침마다 강요받고, 조직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영웅들의 영웅담을 교과서로 배우면 자란 우리는 조직에 헌신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만이 '절대 선'인줄로 착각하고 있다. 착각이다. 오히려 암묵적으로 헌신과 충성을 강요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건 선이라기 보단 차라리 악.

WBC가 시작되기 전, 김인식감독은 국가가 있어 야구를 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군말없이 대표팀 차출에 응하라는 엄포를 놓았다. 김인식 아저씨를 좋아하지만 그건 틀렸다. 국가가 있어 야구인생에 방해가 될지언정(군대같은거) 국가가 있어 그들의 야구인생에 도움이 되었던적은 결단코 없다. 지금도 WBC의 영웅들은 막판 체력저하와 잔부상으로 개고생중.


한겨레 지면을 통한 장은주 교수와 권혁범 교수의 애국주의 논쟁이 흥미롭다. 이택광 교수까지 덤으로 끼어들어 장은주 교수를 물리치는 형국. 장은주 교수의 민주적 애국주의란 개념은 모호하다. 결국 논의를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확립한 공화국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진행시키기 때문에 논리가 허공에 맴돌밖에.

애초에 민주주의는 가당치도 않은 개념이다. 다들 이 민주주의라는 말에 목메어 살지만 사실 그건 되게 거추장스럽고 어리석은 장치. 심지어 이루기조차 지난한. 하여 민주주의는 현실에선 그저 지향의 문제일 따름이다. 공고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국 따위 소설책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약간의 민주주의와 약간의 파시즘과 약간의 폭력과 약간의 저항이 어우러진 세상을 살며 애국주의를 말하는 것은 이미 숱한 근로인민들을 바탕으로 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포기하며 국가에 투항하겠다는 말과 같다. 오늘 국가는 투쟁의 대상이지 종속의 대상은 아니다.

대한민국 좀 싫어하면 어때. 그거까지 보듬는게 민주주의 아니겠어?



쌍용, 패배, 유턴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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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싸움이 끝났고, 결국 패배했다.
얻은 것은 상처뿐이고 잃은 것은 어쩌면 가진 전부이다.

쌍용차의 투쟁은 일개 사업체의 투쟁을 넘어서 한국사회 전체 노동운동의 향방을 쥔 싸움이었다.
그토록 처절한 싸움에서도 결코 고삐를 늦추지 않은 정부와 자본은 쌍용차를 어떤 '본보기'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쌍용차뿐 아니라 전체 자동차 업계, 나아가 남한에 존재하는 모든 산업체의 노동자들에게 '유연성'의 칼날이 밀려 들어올 테다. 예외는 없다. 쌍용차가 그랬던 것처럼.

강성노조를 구축하고 있는 현대차나 기아, 대우차들에게도 조만간 정리해고의 칼날은 짓쳐들어갈테다. 평택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 정리해고의 폭풍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단초가 된다. 어떤 노조깃발을 올리고 얼마나 강력한 투쟁을 만들어 내든 예외는 없다. 쌍용차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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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98년 울산과 2001년 부평에선 정말이지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었다. 그때에도 노조는 총고용보장의 구호를 들고 단결 결사 투쟁을 외쳤지만 노조 지도부는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했다.
사태가 이지경까지 이르렀을때 노조의 총고용보장은 사측에겐 억지로만 인식될뿐이다.
'안 해줘도 되는 일을 내가 왜?'
고용을 보장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수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합리적 대안을 애초에 만들어 놓았어야 했다. 생각지도 못했을리 없다. 울산과 부평의 전투를 지나며 아무것도 학습하지 못했다는건 배운것도 안배웠다고 우겨대는 열등생의 외침과도 같다.
설사 옥쇄파업에 들어선 노조의 기조와 구호가 총고용보장으로 모아지더라도 그 옆에 자리잡은 사회 제단체의 요구와 구호는 달랐어야 한다. 자기들마저도 옥쇄하겠다는듯이 총고용보장 피켓을 들고서 싸움을 부추기는 소위 진보 단체, 정당이라는 사람들조차 열등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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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산별노조를 달성하는 것이 노조의 힘이 강력해지고 전체 노동 운동 대오의 연대가 강력해 질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쌍용차 사태에 이르러 금속노조에는 좁쌀 만큼의 연대 대오도 있지 않았다. 고작해야 공동투쟁이라는 공허하고 하나마나한 구호만이 남았을 뿐이다.
사실 민주노총의 소위 귀족노조들이 과연 연대가 무엇인지나 알고 있을까란 생각을 한다. 그들이 자기 회사 비정규직들의 투쟁에조차 언제 손 한 번 내밀어 준적이 있었나.
이제 다시 닥쳐올 또 다른, 하지만 꼭 같은 정리해고의 바람에서 어느 누구도 손내밀어 주지 않는 외로운 싸움을 전개하게 될테다. 그건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 그렇게 연대는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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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를 비롯 현대차등의 자동차 산업 노조들은 매 투쟁의 목표를 성과급 확장과 임금 인상에 두고 싸웠다. 당장의 주머니싸움에(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임금투쟁은 노조의 기본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투쟁임에 동의한다)골몰한 나머지 고용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거나 정부정책을 수립해 나가는 중 장기적 투쟁을 등한시 했다. 그 결과 사측의 정리해고를 막아 줄만한 어떤 제도적이고 합리적인 장치의 도움도 얻지 못하고 인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사측이 어려워졌을때에도 고용을 유지하며 함께 방법을 찾아 나갈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거나 고용을 보장 승계할 기금을 미리 마련하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대안이 있어야 했다. 자동차노조가 내일의 두꺼운 지갑을 위해 포기한건  내 평생 날 지켜줄 통장의 목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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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싸움이 끝났고 결국 패배했다.
누구는 이제 아무런 미련도 없어 떠난다고 했고, 누구는 그래도 살아 싸워야겠다고 했고,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울었다.
아무런것도 남지 않았다. 패배의 기억밖엔. 그러니 이제 새기고 가꿔야 할 건 패배의 기억이다. 패배의 기억은 곧 성장과 학습의 동력이다. 패배에 익숙해짐은 나약해지는 일이 아니라 칼을 가는 일이다. 설픈 거짓 승리에 도취되어 무뎌지는 칼을 절망과 패배의 기억으로 벼려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유턴해선 안된다. 다시 또 아무런것도 배우지 못하고 충분히 절망하지 못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선 안된다.

지독한 싸움이 끝났고 결국 패배했다.
이제 남은 것조차 없지만 오늘 얻은 상처가 후일의 칼날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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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기 사람이 있다.

미디어법, 민주주의, 싸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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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디어법이 통과됐다.고 한다.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도 지키지 않은 졸속 날림 구라 야바위 통과지만 어쨌든 통과는 통과. 라고 할테다.

미디어법이 통과된 날 밤, 평소 시크함을 인생의 기조로 관철시키겠다는 양 살아가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광우병 쇠고기가 들어왔을때도 이명박이 당선됐을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무섭다."

대리투표와 거짓졸속날림으로 진행된 표결과정에서 보이는건 분노와 웃음을 넘어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두려운건 미디어법의 통과나 다가올 미래라기보단 '국민'이라고 불리우는 우리가 뽑은 저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천고의 진리로 믿던 민주주의(그러니까 대의민주주의)가 얼마나 나약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공포로 가득찬 순간이었다.

모름지기 모든 존재는 학습하기 마련인 법. 하루하루 지나며 성장하고 학습해야겠다. 민주주의란 누구 하날 잘 뽑아서 내 생을 편하게 날로먹겠단 심보의 집합으론 성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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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투표 영상이다. 다음에 올라간 영상은 애저녁에 지워졌다. 거기만 막으면 되는줄 알았나보다. 바보들.
우리는 유튜브에서 소녀시대와 폴포츠말고도 많은 것들을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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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틀째 언론노조의 집회에 참가중이다.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데 다들 어색한 옷을 입고 있는것 같더라. 투쟁의 현장에서 불리는 노래들이 팔뚝질을 동반한 진군가일 필요는 없다. 아니 차라리 그래선 안된다.

우리의 노래가 좀 더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어설픈 개사곡 같은거 말고.
첨바왐바나 밥딜런, 우디거스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노래를 싸움의 현장에서 불렀다.



구토, 나를 위해 노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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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노조 간부의 아내가 자살했다. 이로서 쌍용차 사태로 생을 빼앗긴 사람만 벌써 4명째.
정부는 공권력 투입을 결정했고 노동자들은 페인트가 가득한 공장안에서 다시 제 목숨을 내놓으려 하고 있다.
빼앗고 빼앗다 이젠 빼앗을게 목숨밖에 남지 않아 목숨마저 빼앗는가,
빼앗기고 빼앗기다가 이젠 남은게 목숨밖에 없어서 그마저도 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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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의 피해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6개월이 넘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떠나지 못했을테다.
사실 더욱 서러운건 테러분자니 폭도니 하는 모함보다 이젠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 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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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반가운일이다. 소녀시대를 못보고 선덕여왕을 못보더라도 반가운일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 언론을 빼앗기면 모두 뺏기는 것이다. 유래없는 민간독재는 더욱 공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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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팍팍하다.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 쿨하게 외면할 깜냥도 안되는 겁쟁이로선 매일매일이 구토와 같다.
이 역겹고 답답한 삶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나를 위해 노래 불러주세요.




Alexi Murdoch - Song For You

그건 취향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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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 일이고 네 취향이고 네 문제이므로 내가 사사건건 시시콜콜 일일이 간섭할 이윤 없지.
라는 말은 사실 반만 맞는 얘기다.

난 사실 상대성이나 다원주의 같은 말에 절대적인 동의를 표하지 않는다. 그건 사실 다양성이라는 핑계로 상대에 대한 무관심을 합리화시키는 무책임이다. 분명 절대적이고 명확한 것들은 있다.

재작년 여름, 디워 논쟁이 한창일때 '그건 그들의 취향'이라는 보도를 휘두르며 디워를 비판 하는 사람들을 다양성도 인정하지 못하는 몰지각한 모리배로 치부하던 사람들이 있었다.(일테면 김규항같은. 쿨게이라는 '부정적인' 수사를 들었을때 제일 먼저 김규항을 떠올렸었다. 변희재 같은 듣보잡은 제외하자.) 모든걸 취향의 문제로 뭉뚱그리는건 판단을 둔하게 하기 십상이다.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전가의 보도는 기준을 짓이겨 모두를 게으른 소경으로 만들곤 한다. 분명히 디워는 손발이 오글거리는 졸작이었고 디워에의 열광은 싸구려 애국심 이상은 아니었다.

분명하고 명백한 것은 있게 마련이다. 디워가 싸구려 애국심에 기인한 C급 아리랑 뮤직비디오였다는 사실과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소녀시대가 원더걸스보다 예쁘다는 사실은 절대적이고 명확한 것이다.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판단의 영역이란 얘기. 짜장이냐 짬뽕이냐를 두고 고민할때처럼 취향을 운운할 영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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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교육을 받아와서인지 21세기의 현대사회는 다원성의 사회임을 지나치게 인식하는 실수가 잦다.
다원주의에의 지나친 집착, 그러니까 취향이라는 말에 대한 지나친 맹신은 본질을 호도하게 만들곤 한다.
사람들이 취향에 의한 선택을 하는 동안그 선택의 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사실들은 잊혀진다. 알량한 취향의 자유로 본질은 은폐되는셈. 취향껏 커피를 고르는 동안에도 남미의 커피농장 노동자들은 착취당하고 있지만,스타벅스 컵홀더는 컵뿐 아니라 자유로운 소비자의 눈까지 가린다. 그건 명백히 가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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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취향에 대한 얘기를 하냐면,
그건 네 문제야. 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무책임하다.

소통이 될리 없다. 모든것을 서로의 취향의 문제로 돌려버리면. 싸움은 없겠지만 동시에 감응과 발전도 없어진다.
싫거나 좋거나를 분명히 하는 일은 귀찮고 피곤하고 에너지 소비도 많은 일이지만 동시에 건강한 일이다. 네 말도 네말도 맞다를 강조하던 황희정승은 사실 게으름뱅이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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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세상을 유지하는데 가장 우선되어야 할 덕목이겠지만
내것을 명확히 갖는 것은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데 가장 필요한 덕목이겠다.
내것을 갖는 일은 곧 무지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