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나라 - 사랑한다구요 젠장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머나먼 나라>다.


이 가난한 골목길이 끝나는 곳에 "눈부신 햇살이 가득하고 졸음같은 풍요로움이 깃들어 따듯하고 유쾌하며 모든 사랑과 모든 평화가 있는 나라가 있을 것"이라고 꿈꾸던 소년들의 이야기.


드라마의 배경은 후암동 언덕배기의 골목이다. 지금은 그 골목의 달동네 마을도 사라졌다. 졸음같은 풍요와 모든 평화와 사랑을 꿈꾸던 소년들의 머나먼 나라는 여전히 어쩌면 앞으로도 없다.


골치아픈 생각들을 하고나선 비관적인 이야기를 떠올리다 문득 이 드라마가 생각났다. 주인공들이 세상을 등지는 비극적인 결말에도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는 분명 '희망'이다. 골목길의 끝에 있을 머나먼 나라. 그건 긍정의 힘이니, 힐링이니 하는 싸구려 진통제와는 다른 희망이다. 오늘의 고통을 직시하는 삶. 그 고통을 딛고서야 저 너머의 머나먼 나라를 응시할 수 있다는 희망.


그래서 삶의 희망에 관해 알량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은 너무 무모하고 오만하다. 삶의 무게를 긍정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위로따위 실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그저 할 일은 내 골목길 끝의 머나먼 나라를 그리는 일이다.


드라마는 격정과 광기의 80년대가 끝나고 90년대가 스며든 골목길을 배경으로 했다. 쌓아둔 연탄이 사라진 것 말곤 달라진 것이 없다는 자조. 실패와 좌절의 90년대가 지나고 21세기가 스며든 오늘의 골목길이라고 다를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눈부신 햇살이 가득하고 졸음같은 풍요로움이 깃들어 따듯하고 유쾌하며 모든 사랑과 모든 평화가 있는 나라"를 꿈꿔야 한다. 사실 그것말곤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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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전시하면서 그저 등장인물을 괴롭히는 것으로 현실을 운운하는 요즘의 드라마들은 실은 고통 포르노에 지나지 않는다.. 는 메모를 써놓았다. <나의 아저씨>같은 드라마. 누군가 쥐어주는 불민한 희망의 위로. 그건 사실 희망을 '쥐어줄 수 있는 그'에 대한 위로다. "사랑한다구요, 젠장"을 외치던 한수의 반짝거림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려운 근래의 TV 속.


하지만 그게 뭐 드라마 탓이겠나. 드라마와 영화는 반영의 현실인 법이다. 사랑한다구요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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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이제 2회를 봤을 뿐인데... 이 드라마는 48부작이다. 엉엉엉.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워커스_아무말큰잔치]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대학에선 두꺼운 철학책을 끼고 앉아 사랑이니 삶이니 실존이니 하는 말을 지껄이고 싶었다. 어릴 때 본 드라마에 나온 형들은 그랬다. <우리들의 천국>이나 <카이스트> 같은 드라마. 나이를 더 먹고 취직을 하면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의가 넘치는 신입사원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야근 중에 눈 맞은 직장동료와 시작한 불 같은 연애 같은 것도 상상했다. <미스터큐> 같은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이 꼭 있었다. 그런 장면에서 여배우는 주로 김희선이었다. 꿈이 참 컸다. 난 장동건이나 김민종이 아닌데.

생각해보면 한 20년쯤 전, 드라마엔 캔디들이 참 숱하게 나왔다. 그런 드라마의 캔디는 자고로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대충 때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하라”는 대사를 날려주는 게 자고로 모든 드라마 속 신데렐라, 캔디의 첫 대사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 역도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드라마 속의 대학에도 삶이나 실존, 사랑, 낭만 같은 오글거리는 말보다 알바와 최저임금과 등록금, 취업난 같은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캔디들은 이제는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돈보다 꿈과 사랑을 택하던 대학생들은 꿈과 사랑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 예전엔 직장에서 야근하다 눈 맞는 커플의 가장 큰 방해가 ‘연적’이었지만 지금은 ‘신분’이다. 남자 주인공은 주로 정규직, 여자 주인공은 비정규직이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드라마 주인공들과 달리,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하고 취직해야 하는 신자유주의형 주인공들이 갖는 삶의 태도 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드라마.

#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CJ E&M의 예능채널인 tvN에서 드라마를 만들던 이한빛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라마 <혼술남녀>의 종방연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이한빛 PD가 만들던 <혼술남녀>는 노량진 고시학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친구가 없고 돈이 없고, 시간과 여유가 없어 홀로 술을 마시는 ‘혼술족’들의 이야기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는 그들을 ‘위로’하고 ‘공감’하려 한다고 드라마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한빛 PD의 일은 위로와 공감이 아니었다. 이한빛 PD는 <혼술남녀>의 조연출을 하면서 촬영 중간에 촬영팀에게 계약파기를 알리고 계약금을 환수 받는 일을 담당했다. 드라마 현장의 계약직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 하는 일이다. 이한빛 PD는 계약직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일에 대해 선임 PD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욕설이었다. 이후 그에게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이 강요됐다. 선임의 눈 밖에 난 그에게 인격적인 모독과 집단 괴롭힘도 뒤따랐다. 이한빛 PD의 유가족들은 CJ E&M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이한빛 PD가 사망한 이후 회사는 유가족에게 “이한빛 PD가 불성실했고 비정규직을 무시해 갈등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사건은 6개월 가까이 은폐됐고 4월이 돼서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랐다.

기륭전자, 서울대 점거 농성장, KTX 해고 승무원, 416 연대. 이한빛 PD가 1년차 월급을 쪼개 돈을 보낸 곳들이다. 신출내기 드라마 PD는 아마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나보다. 마음과 힘을 모아 더 좋은 세상, 따듯한 마음을 그리는 그런 드라마. 돈 보다는 사랑이 중하고 삶에는 희망이 남아있는 그런 드라마. 외로운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드라마. 그러나 세상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정리해고, 계약직, 욕설과 따돌림. 어딜 봐도 드라마 같지 않던 현장에서 그는 조금씩 죽어간 셈이다. 차라리 그보단 이제 드라마조차 더 이상 따듯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정한 세상의 삶이야말로 드라마처럼 사는 일일까.

# 드라마처럼 살 수 있을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김과장>은 ‘사이다 같은 드라마’라고 호평 받았다. 말단 사원들이 재벌기업의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이었다. 몇 해 전 크게 히트한 <미생>은 비정규직 노동자 들에게 ‘장그래’라는 대명사를 만들어줬다. 그 드라마들을 꼬박꼬박 챙겨봤지만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경리부 말단직원들이 대기업의 분식회계를 밝혀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믿을 수 없고, 비참한 비정규직의 삶을 견뎌내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 드라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

고다르가 말하길,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했다. 영화란 현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만드는 이가 그리는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을 막무가내로 해고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PD가 죽어나가는 세계에 사는 이들이 그려낸 현실을 구태여 보고 싶지 않다. 이제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희망 같은 걸 감히 찾아낼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쩐지 자꾸 옛날 드라마만 찾아보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서울의 달>을 유료 결제했다. 홍식이는 비참한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부여잡을 수 있었는데.


[워커스 30호]


하이킥 - 숏다리 주제엔 원래 역습같은거 안돼요





“축이 되는 디딤 발이 흔들려서 킥이 정확하지 못하니까 공이 떠버리는 겁니다”


한 때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축구 해설가였던 신문선은 늘 ‘축’과 ‘디딤발’을 강조했다. 간과하기 쉽지만 정확하고 강한 킥을 위해서는 공을 때리는 발보다는 땅을 딛고 있는 디딤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강속구 투수에게 강한 어께만큼이나 튼실한 하체와 균형 감각이 더 중요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끝내 강력하지도, 정확하지도 못한 킥을 날린 채 끝을 맞았던 것도 축과 디딤 발이 튼실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드라마의 ‘킥’이 결국 멜로라인이라면 김병욱 감독이 구축한 하이킥의 세계의 멜로라인을 지탱해주는 축은 ‘해학’이다. 


해학이란 현실에 기반한 웃음이다. 비극적 현실에서 파생된 희극이다.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조언이야말로 해학의 본질을 꿰뚫는 경구다.  


그동안의 하이킥 시리즈는 오직 물질만을 숭앙하는 자본주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소외된 개인, 사랑조차 철저히 계급적인 세상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김병욱 감독의 정확한 ‘눈’이 디딤 발과 축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튼실한 축을 바탕으로 한 킥은 지붕을 뚫어버릴 듯 거침없는데다 정확했다. 높은 시청률과 스타탄생은 성공한 슈팅에 이은 일종의 세리모니였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도 그랬다. 2012년을 돈의 해로 규정한 이적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 혹은 ‘종속’돼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야기는 수 십 년간의 인간관계를 금전관계로 전복시키면서 시작했다. 가부장의 권위도 사실은 ‘금력’에 기반 하고 있었음을 폭로했다. 금력의 상실이 곧 권위의 상실로 이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던 내상은 급격한 스트레스에 부닥쳤다. 123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좋았던 유선의 ‘완경’ 에피소드도 경제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완성과, 이별, 새로운 삶에 대한 이미지들은 그냥 차치하더라도. 


그러나 갈등은 너무 쉽게 봉합됐다. 남한사회에 사업에 실패한 가정은 숱하겠지만, 복권당첨으로 재기의 기회를 잡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취업에 애를먹던 취업준비생이 용감하게 꿈과 희망을 담은 대기업에 지원해서 합격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현실적 난관’을 무시하고 말이다. 


숏다리들의 기습적 하이킥은 통쾌하겠지만, 사실 그 궤적이란 롱다리의 미들킥보다도 낮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이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을 멈춰야 했던 것처럼 짧은 다리들의 역습도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한다. 짧은 다리들의 하이킥이란 그저 통쾌함으로 건네는 위로가 최선이다.    


희망과 행복이란 절망과 불행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불행을 정확히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망조차 하지 못한 희망이란 거짓이고 불행해본 적 없다면 행복 할 수도 없다. 사실 희망과 절망, 행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이킥의 매력은 그 종이 한 장을 포착해 내는 지점에 있었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란 이름처럼 이번 시즌이 그 불행과 절망의 순간들을 가장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담을 수 있었을테지만, 절망은 방치됐고, 불행은 외면당했다. 현실이 거세된 그렇고 그런 가짜 희망극. 무책임한 ‘1년 후’ 혹은 ‘그들은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건 해피엔딩, 혹은 시청자들이 강요하는 ‘강박적 행복’에 대한 김병욱 감독의 신물이거나 납득이거나 항복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롱일 수도 있겠다. 사실 김병욱 감독의 전작들 중에는 해피엔딩이 아닌 작품이 없다. 김병욱 감독의 최고작이라 꼽고싶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도 마지막 회,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왔지만 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삶은 늘 죽음을 곁에 두는 것이며 죽음조차 일상인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붕킥의 세경도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삶, 물질, 풍요가 행복을 가늠하는 오직 한가지의 잣대가 아님을 김병욱 감독과 하이킥의 세계는 알고 있었고 행복과 불행은 총량의 법칙에 따라 움직임을, 마냥 행복할수만도, 마냥 불행할 수만도 없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절망에 대한 응시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행복을 탐구하는 모습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이킥의 주인공들은 늘 안주하지 않고 떠났다. 발전이란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삶, 관계로.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아무도 떠나지도, 상처받고 치유하지도, 변화하고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완성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겠지만, 사실 그런 삶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이제 끝났다.


하이킥의 결말을 예측해본적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진 두 인물은 이적과 크리스탈이었다. 이적은 늘 그런 삶의 태도를 후회하고 환멸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가장 잘 관철한다. 크리스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 (젊고 예쁜 여자의 성적 매력이 대표적인데)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간다. 미국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아빠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자신의 기질적 특성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그녀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본성을 발각당하지 않았다) 난 그 둘이 결합할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합하는 것. 일종의 M&A 같은거다. 크리스탈은 자신의 미모와성적 매력을 팔고 이적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낭만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금전적 능력으로 젊고 예쁜 여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원시시대에 사냥 잘하던 남자가 애 잘 낳는 여자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적 가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의 낭만이란 그런 것.


지원이는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의사가 될 거라고. 그녀의 말대로 늘 재미없어하겠지만 적당히 재밌는 척 해주면서 그렇게 삶을 살아갈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계상이 걸은 길이기도 하다. 그 결핍감을 봉사활동이니 보건소근무니 하는 것들로 보충하겠지만, 그건 본질적인 건 아니니까. 그렇게 적당히 불행하고 적당히 윤택하고 적당히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원이 뛰쳐나가서 정말 르완다로 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아마 좌절할거야. 르완다 비자가 그리 쉽게 나오나..ㅋ 


종석이는 떠난 사랑에 좌절하고 적당한 성적에 명문대엔 지원했다 떨어지고 삼수해서 수도권 4년제 대학쯤에서 연애하고 술마시다 군대에 다녀오고 가끔 아이스하키를 보러가는 잘생긴 중소기업 직장인 쯤이 될거고, 진희는 언제까지고 골골거리면서 고시원을 전전하다 그럭저럭한 회사 비정규직 경리직원으로 살아가다 과장쯤 되는 남자랑 결혼할거라고 생각했다. 종석이 명문대에 지원하고, 진희가 꿈과 희망으로 대기업에 지원해보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한땐 나도 잘나갔지’를 주섬거리는 것이 짧은 다리들이 날릴 수 있는 역습의 궤적이다. 애초에 짧은 다리들에게 하이킥으로 경기를 역전하기란 불가능 한 일.


다만 희망이란 그렇게 수태날리는 숏다리들의 로우킥에 천하역사도 쓰러지는 법이란 사실이다. 본야스키의 로우킥이 최홍만과 밥샙을 자빠뜨렸던 것처럼. 그러나 어쩌다 날린 하이킥 한방에 들뜨다간 또, 자기가 그런 하이킥 날릴 수 있을거라고 믿고 로우킥 연습 안하다간, 밥 샙한테 신나게 두드려맞는다. 세상은 원래 롱다리들 편이다. 


덧,


- 시즌 시작할때는 오직 백진희 편이었으나 지금은 박하선도 좋아연.

- 이종석에 박하선, 크리스탈까지. 김병욱 감독이 신인배우 알아보는 눈은 정말 매의 눈입니다.


영광의 재인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뿌리깊은 나무와 영광의 재인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내심 더 마음이 갔던 쪽은 오히려 영광의 재인이었다. 그건 오직 박민영 때문이었는데, "뭐야, 김탁구잖아"라는 반응이 떠올랐던 첫 회의 미적지근함과 "우라질, 지랄하네"를 중얼거리는 세종, 심지어 송중기의 자태를 뽐내던 뿌리깊은 나무의 위용에 박민영에 대한 사랑도 잠시 미적지근해졌었다. (여기서 '민영아, 오빠가 미안해' 라고 하면 나 완전 오덕 인증하는거임?)

여하튼 뿌리깊은 나무에 밀려 본방사수가 힘들었던 영광의 재인의 밀린 부분들을 어제, 오늘에 걸쳐 다시보기했다. 보고났더니, 이거 생각보다 더 재밌는 드라마였네.

# 자본주의 우화

옛부터 자고로 캔디라 함은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떼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해라"라는 대사를 날려주는게 자고로 모든 신데렐라, 캔디류의 드라마 첫 회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는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그녀들은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캔디들에 비해,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형 캔디들이 갖는 삶의 태도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캔디. 어쩌면 우리도, 그녀들도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건 극중의 허영도 팀장의 대사에서도 나타난다.
"정말 비참한 건 잘못을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야"

여담이지만 모 기업의 광고가 마뜩찮은 것도 같은 까닭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은 좋아질 것도 많다는 말'이라던가. 그건 역시 쌓아올려 나아가는 것만이 오직 옳은 일임을 강변하는 말이다. "돈 벌자고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대신에 "뭐든지 열심히 해서 돈 벌거에요. 빠샤"가 꿋꿋함의 상징이 되는 시대.

조금 유치했지만 영광의 재인은 이런 세상을, 그러니까 세상을 구성하는 계급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그곳은 가족을 찾는 일 마저도 '처음엔' 돈의 힘을 빌려야 했다. 주인공들의 정직한 심성은 돈을 대하는 태도로 그려지고, 타인에 대한 호감과 사랑 역시 돈으로 표현된다. 오직 돈만이 세상의 모든 언어고 감정이고 윤리인 시대, 바로 지금. 

#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보려고 해요

이렇게 한 줄이라도 끄적거리고 싶게 만들었던 건 저 진부하고 오글거리는 대사 때문이었다. 진부하고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남겨놓아야 하는 말, 희망.

그토록 싫던 서재명 회장과 닮아가던 재인은 마침내 답을 찾았다. 그건 직원이 곧 회사라는 아버지의 말씀. 그녀는 다시 사람이 희망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을 읊조리면서 모든 희망을 사람에게 건다. 어디서 보기만 하면 하악거리는 소재인 '노동자 자주경영'. 그게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얘기일테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물려가도 우리 서로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있다는 얘기. 역시 모든 우화는 오글거려도 새겨들어야 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있다. 그들이 권하는 선이란 사람이고, 그들에게서 발견한 희망이었다. 

재밌었던 건 내내 영광의 재인의 앞길을 막았던 뿌리깊은 나무의 주제의식도 같았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책임이기 때문에 책임질 수 있는 몇몇이 해나가야 한다는 정기준과 정치의 주체는 책임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함께 토론하고 쟁명하여 고통스럽더라도 책임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세종의 대립. 그건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와 그럴 수 없는 이의 대립이었다. 정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어떤 답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안일하지 않은 대답을 내놨다면, 영광의 재인은 말했다시피 조금 유치하고 조금 조악하지만 결코 거부 할 수 없는 희망으로 대답한다. 그건 재인이 '기적'이라는 무기를 들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희망은 어쩌면 이뤄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기적같은 희망을 가져요"

냉철하고 정확한 눈도 좋지만, 때로는 무조건적이고 근거따위 없더라도 마냥 희망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도 반가운 법이다. 재인이의 기적처럼.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박민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평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못되고 차가운데다 비관적이기까지 한 도시남자라서 사실 희망의 강요. 같은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의 주체가 박민영이라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달까.ㅋ

그녀는 왜 이런 표정을 지어도 아름다운 것인가.


박민영은 예쁜데다 매우 영리하다. 그건 그녀의 작품 선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선택했던 작품들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한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자명고를 들먹거리는 이가 있더라만, 자명고는 박민영을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가치있는 작품이다. 완전한 파국, 그 섬칫할 만치의 비극을 가졌던 사극이 존재하기나 했던가. 자명고는 훌륭한 상상력의 스토리와 섬세한 감수성이 스몄던 걸작. 흠이라면 시껍할 만치의 시청률과 조기종영일까. 

여하튼 이 영리하고 예쁜 배우에게 홀릭하게 된 계기는 어느 인터뷰. 성균관 스캔들이 끝나고 있었던 그 인터뷰에서 그녀는 “마지막에 대사성이 김윤식 박사라고 불렀다. 마지막까지 동생의 이름으로 박사를 한 거다. 결국 여자로서 인정받은 건 없다”라고 말했다. 극과 캐릭터를 진짜로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말 좋은 시야를 가진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던 계기.
언제나 다음 작품이 매우 기다려지는 배우랄까.

그녀의 작품중 가장 좋아하는건 런닝,구. 종종 이렇게 단편을 찍어주면 더 좋겠다.




##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

예전에 SNS에 중얼거린 낙서인데,

'인생은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경구를 떠올리며 일평생 대충 때우다 가게되면 가고 또 아님 말지 뭐. 하다가도 어느 날은 삶에 당당히 맞서는 무사가 등장하는 무협지에 주먹이 불끈불끈 하기도 한다. 이렇게 흔들흔들 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인가보다. 생각해보니 성균관스캔들에서 정조는 나침반이 흔들리는 한 틀린 방향을 가리키진 않는다는 주옥같은 대사를 날려주신다. 그래, 답은 결국 박민영인 것이다.

이걸로 완벽히 박민영 덕후 인증.ㅋ

잘 알지도 못하면서, 트리플, 송중기





##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난 홍상수 영화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아. 라고 얘기하곤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런거다. 모두 잘 알지도 못하며 그저 지껄이기를 좋아한다. 그건 무지일수도 있고 허세일수도 있다.

모두 새 삶과 구원을 갈구하지만, 사실 새 삶이나 구원이 뭔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 어차피 알 수 있는건 없다. 구경남의 말처럼 자신도 똑바로 알지 못하는데 남을 알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세상의 이치 따위야. 구경남의 이름처럼 우린 그저 구경하며 살아가는거다. 결코 당사자는 아니다.

순이의 말처럼 그저 지금이면 된다. 위악이니 위선이니 하는 것들말고 젊은 남자랑 자고 싶었고 그건 단지 질투였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될 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건 자유라고 침까지 튀겨가며 얘기했으니 그저 자기에게 충실하게 살면 될 일이다.





## 트리플

막장드라마 열풍이 불더니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모든 형태의 소재를 막장이란 말로 때려넣고 있다.
친구의 아내와 (호적상의)친오빠를 를 향한 사랑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막장으로 부른다고 한다.
진짜 막장은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모든 형태의 사랑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세상 그 자체다. 드라마 속의 쉽지 않은 사랑들은 차라리 순수함이다.

소일거리 삼아 보는 드라마 였지만, 벌떼처럼 비난하는 네티즌들 때문에 더 열심히 보고 있다. 이건 또 무슨 막장 심보인가 싶지만, 뭐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인걸.

감정에 솔직함은 미덕이다. 관습 통념 규범등등등 따위에 얽메여 자신을 부정하는 일만큼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데다 괴로운 일은 없다. 그건 그야말로 불행해지는 지름길. 세상엔 사랑의 형태도 종류도 과정도 귀결도 무궁하다. 굳이 한가지 형태만(그것도 가장 비겁하거나 용기없거나 폭력적이거나) 고집할 필요따위 없다. 사랑하면 사랑하는거다. 대상이 무엇이든.




##  송중기

이윤정 감독은 파릇한 남자배우를 고르는 눈이 뛰어나다. 태릉선수촌에선 이민기가 그랬고 커피프린스 1호점에선 죽어버린 이언이나 김동욱, 김재욱이 그랬다.(좀 다른 느낌에서지만 어쨌든 다들 괜찮은 남자배우임엔 틀림없다.)

이번엔 송중기다. 천방지축같은 진부한 표현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그의 담백한 매력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굉장히 잘생긴 얼굴로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다니. 사실 지금은 오직 그만 보이고 있다.
(알고보니 쌍화점에서 조인성의 오른팔로 나왔던 그 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