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이태원 한복판엔 '서울펍'이 있었다. 거길 많이 좋아하진 않았다. 시끄럽고 번잡해서. 그래도 종종 서울펍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낄낄거리면서 놀았다. 이태원은 그런 동네지. 서울펍은 이태원에 거의 처음으로 생긴 '펍'이라고 했다. 94년이라던가, 95년이라고 했나. 암튼 병맥주를 든 외국인이 포켓볼을 치면서 하이 파이브를 하는 장면을 TV말고 실제로 처음 본 건 서울펍이었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나는 장소라 최근엔 '태양의 후예'를 이곳에서 찍기도 했다.


얼마 전 서울펍 자리에 공사가 한창이길래 내부수리를 하는 줄 알았다. 좀 낡긴 했었어. 의자가 좀 편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지나쳤다. 공사가 끝나면 한 번쯤 또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얼마 후에 서울펍이 있던 자리에 '이바돔 감자탕'이 들어온다는 안내 현수막이 걸렸다. 이바돔 감자탕이라니.


이바돔 감자탕이라니. 뭐랄까. 책을 좋아한다던 그녀가 가방에서 김난도의 베스트셀러나 원태연의 시집을 꺼냈을 때 느꼈던 그 기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옥장판 카달로그를 내밀 때 느낄 수 있는 기분. 그런 거.


어제는 마침 그런 얘기를 했다. 이태원에 많던 LGBT바들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 다들 높아가는 임대료 문제가 가장 컸을 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난 그보다는 문화의 소비층이 더 편협해져 가는 것은 아니겠냐는 의문이 들었다. 클럽이나 라운지바 같은 곳들이 이태원 곳곳, 골목골목에 들어서 있다. 주말 저녁이면 거리를 꽉 채우고 있는 사람들. 거기서 몰개성을 발견하는 것이 어쩌면 오만하거나 꼰대같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사라진 서울펍과 LGBT바들 대신에 클럽과 이바돔 감자탕과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들어서는 것. '레시피는 중요하지 않고 사람들이 무엇을 구매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요식업자가 지배한 거리. 그런 것들에서 우리의 취향은 오직 '소비'로 편협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1-1.

사실 몰개성의 척도는 맛없는 음식과 재미없는 영화와 구린 음악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바돔 감자탕은 정말 더럽게 맛없다. 이걸 증명하려고 어제 굳이 그 이바돔 감자탕에가서 술을 마셨다.


감각은 단련되는 것이고 지성은 쌓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면 덜 아는 것이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단련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롭고 맛있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야 한다. 탐미(耽美)와 구지(求知)는 차라리 인간의 본질적 의무다.


취향의 편협함, 지적 태만, 감각의 퇴행이 가져올 것은 어리석은 폭력이다.


어제 LGBT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난 "어쩌면 혐오범죄가 더 두려운 거리가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몰개성한 환락의 도시는 다양에 대한 혐오와 배제 폭력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바돔 감자탕 같은 걸 맛있다고 먹으면서 살면 오래동안 육수를 내고 시래기를 삶고 좋은 고기와 향긋한 들깨를 쓰는 감자탕에게 맛없다는 폭력을 일삼겠지. 그런 거다. 다.


1-2. 

이태원을 비롯해 홍대나 신촌, 서촌, 종로통, 을지로에 종종 가던 단골 술집들이 자꾸 문을 닫고 그 일대엔 이바돔 감자탕 같은 것들이 자꾸 문을 여니까 짜증이나서 하는 얘기다. 세상은 빨리 돌아가지만 더 복잡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바돔 감자탕을 먹고 나와 화가 잔뜩나고 술도 잔뜩 취해서는 "모두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싶어." 라고 말했다. 일행이 무슨말이냐고 물었다. "안경은 눈 나쁜 사람이 쓰는 거니까."


2.

그래도 어제 엘지가 두산을 이겨서 다행이다. 차우찬이 멋지게 완투승을 거둬서 다행이다. 한 시즌에 특정팀에게 전패하는 수모를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두산이 끝까지 봐주지 않고 경기해줘서 다행이다. 난 사실 마지막 경기니까 두산이 이웃집 애들 불쌍하다고 봐주면 그것대로 또 싫을 것 같았는데.


야구를 못할 수 있고, 꼴찌팀을 응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야구의 매력이 뭐관대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고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야구를 보느냐고 묻는다면 '오직 야구만이 다른 선수가 아니라 공과 겨루는 스포츠'라고 대답했다. 야구는 공보다 빨리 베이스에 도착하는 스포츠다. 상대가 아무리 빨라봤자 난 공보다만 빠르면 된다. 그래서 야구는 올곧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야구장 위엔 스무 개의 경기가 있다. 사실 덕아웃고 불펜에서 마음을 졸이고 있을 더 많은 경기가 있다. 그래서 경기에서 지더라도 이긴 것 같은 순간이 있다. 10점 차, 20점 차로 지더라도 단 한개의 안타가 승리가 되는 순간. 마찬가지로 143번의 패배에도 단 한 번의 승리가 이번 시즌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순간.


엘지가 두산에게 시즌내내 패배했을 때 화가났다기 보다는 그 수많은 운동과 경기에서 각자의 싸움에서마저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 화가 났다. 그까짓 포스트시즌 못나가면 어떠냐. 그래봤자 공놀이인데. 하지만 삶을 걸고 하는 경기에서 저녀석과의 싸움이 아니라 공과 하는 내 싸움에서 지는 것이 당연해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할 일.


2-1.

하지만 양상문의 모가지는 따겠어요. 한 시즌 지나니 잊은 줄 알았지 이놈아. 다음 FA에서 박용택에게 최고대우를 약속하고 최정을 데려오는 데 성공하면 용서해주마.


3.

아침마다 같은 지하철을 탄다. 7시 55분에 석계역을 지나는 응암순환 6호선의 8번칸. 그래서 거의 매일 아침 같은 사람들을 본다. 아침마다 스마트폰으로 예능프로그램을 보는 거대한 백팩을 맨 아저씨.


며칠 전엔 그 아저씨와 싸웠다. 내릴 역을 지나쳤는지 그 만원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말치며 허둥지둥 내리더라. 사실 그 아저씨는 늘 그런 편이다. 그 커다란 백팩을 매고 두 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내릴 때마다 사람들을 밀고 지나간다. 그 날은 전 날 예능이 무척이나 재밌었는지 키득키득 새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더니 기어코 내릴 역을 지나친 것 같았다. 사람들을 밀치며 (사실 밀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기의 갈길을 뚜벅뚜벅 걸었고 사람들이 밀려나간 거지. 이게 더 나브다고 말하는 거다. 사람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더라. 숨도 안쉬어지는 만원 지하철인데.) 기어코 내린 그는 자기에게 밀려서 스크린도어와 지하철 사이에 넘어진 대단히 위험한 상황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두리번 거리더니 이내 다시 지하철에 탔다. 착각한 거지.


그가 다시 탔을 때, 그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항의를 했다. "무례하고 위험한 행동을 했다. 보여지는 연배에 비해 굉장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다시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면 결단코 좌시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의 짧은 욕설. 짧은 순간이었지만 4가지 정도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는 성의없게 , "네, 네 ,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이어폰을 다시 꼈다.


내심 사람들이 같이 분노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침의 피로란 그런 것인가. 아침의 지하철은 질서와 예의, 안전 같은 것들이 철저히 무시되는 공간이지만 그 무시가 또 다른 질서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 이 지하철이 향하는 곳은 어쩌면 응암역만은 아니겠다. 라고 생각했다.


4.

미스터 선샤인을 열심히 봤다. 하지만 드라마는 엉망진창이었고, 김은숙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영역으로의 도전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 스스로 지닌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만을 확인한 드라마. 라고 평가하겠다. 이 얘기도 쓰고 싶었는데, 앞에 분량이 너무 길다.. 피곤하기도 하고. 그건 다음 기회에. 투 비 콘티뉴.


4-1. 

하지만 김민정 누나는 엄청 예쁘다. 드라마는 김민정 누나를 캐스팅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가치가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