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4월에 마지막 월급을 받았고 벌써 내일 모레면 입추니까, 여름 한철을 백수로 살았다. 모아둔 돈이 있어서 유유자적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가난에 찌들어서 여기저기 돈꾸러 다니는 비루한 계절이었다. 직장을 나올 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을 많이 다친 건지, 상황이 안좋아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면서 마음 바닥이 드러나자 마음에 담아뒀던 잔여물이 많았던 것도 알았다.  


며칠 전에 누가 추천해준 소설을 앉은 자리에서 밤새워 다 읽어버리고 어쩐지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됐다. 개연성 있는 생각은 아니고 그냥 밤새워 책을 읽고 났더니 뭔가 하나를 해냈다는 느낌이 든 게 좋았던 것 같다. 그동안은 너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지. 영화도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고. 


책을 읽을 것.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열심히 볼 것. 짧더라도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쓸 것. 영화와 드라마, 책을 보고 감상을 남길 것. 연필로 종이에 뭐라도 적을 것. 글을 쓸 때 남의 글을 배끼지 않을 것. 배달음식을 먹지 않을 것.


2.

결국 글을 써서 먹고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살고 싶지만 요즘은 내가 쓰는 글이 부끄러워서 어디 내놓고 돈 달라고 하기가 어렵다. 들켜버렸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남의 말을 내 말처럼 '우라까이'해서 살았다. 농 반 진담 반으로 "우라까리를 해도 걸리지 않게 잘 포장하는 게 내가 가진 재주"라고 말했는데, 그런 재주는 애초에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배낀 자기는 알고, 원래 주인도 알고. 자꾸 하다보면 읽는 사람들도 알게 되겠다. 난 자꾸해서 읽는 사람들한테도 들킨 것 같고.


더 들키면 정말 큰일이겠다 싶어졌다. 애초에 내 깜냥 바깥의 이야기들을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것들,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 누나들이나 형들이 하는 멋있는 얘기들을 배껴오는 일. 나도 멋있을 줄 알았지 뭐야. ~~에 따르면, ~~가 말하길 같은 문장이 많아지는 건 내가 가진 언어가 얼마나 빈약한지를 드러내는 좋은 척도겠다. 


할 수 있는 말을 할 것. 할 수 있는 말을 늘여갈 것. 모른다는 말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을 것. 모른다는 말 뒤에 숨지 않을 것.


2-1.

요전에 재밌게 읽은 책은 김혜진의 <중앙역>이다. 그 전에는 김금희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녀들은 모두 내 또래다. 기자사회에선 이제 비슷한 또래의 기자들이 이름을 조금씩 알려가고 있다. 좋은 시각과 마음을 토대로 좋은 문장으로 좋은 기사를 만든다. 전에는 '나도 기회만 오면', '나도 저런 여건과 자원이 있으면', '문장 자체는 내가 더 좋지 않아?' 같은 생각들을 했다. 맞다 다 질투였다. 


질투하지 말 것. 질투를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말 것.


3.

도통 많은 것들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요즘이지만 도통 관심을 끊을 수 없는 게 엘지트윈스다. 올 초에는 말도안되는 트레이드로 양상문의 모가지를 따버리고 싶다는 기도를 했는데, 시즌 초반에 성적이 잘 나오자 그런 저주는 한풀 꺾이기도 했다.


요즘 엘지는 선발 마운드가 무너지고 불펜은 이미 무너졌고 빠따는 무너지는 중이다. 오랜만에 박용택이 3할을 못치는 시즌을 볼 수도 있겠다. 양상문에 대한 저주를 다시금 퍼부어야 하나 싶다가도,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하며 수양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내가 금지어 감독의 엘지 시절도 견뎌냈는데. 


그래도 시즌 마치기 전에 두산한테 한 번이라도 이겨봤으면 좋겠다. 특정팀 상대 시즌 전패기록이 한국 프로야구사에 있기는 한 거야?


4.

재밌게 보고있는 드라마는 <라이프 온 마스>와 <미스터 선샤인> 미스터 선샤인은 이병헌과 김태리, 무엇보다 김민정 누나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구요.) 때문에 보고 있다. 김은숙의 드라마는 그 '인기'때문에 오히려 갈수록 더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캐릭터의 서사를 짓뭉개지 말아주세요. 그 와중에도 이병헌과 김민정의 매력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인데 그 중에서도 김민정. 극에 등장하는 이병헌의 매력이야 워낙에 입증된 것이니까 그렇다 해도, 이제 스크롤에 이름 두번째로 올라가는 여주의 자리에서 살짝 물러난 김민정이 보여주는 매력이 어마어마하다. 


실은 김민정은 아역때와 아역에서 갓 벗어난 때, 그러니까 <카이스트>나 <술의나라>같은 걸 찍을 때 이후론 마냥 선하고 사랑스러운 역할을 한 적이 별로 없다. 늘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 있었고, 슬픈 구석이 있었고. <아일랜드>의 시연이나 <버스, 정류장>의 소희처럼. 이번 드라마에서도 그런데, 아비에게 팔려 외국 노인의 첩실로 살아야했던 재능도 사연도 많은 여인의 모습을 김은숙이 더 잘 그려주면 좋겠다. 김민정이 지금도 하드캐리하고 있다고요. 이 드라마 자체가 배우들의 하드캐리로 이뤄지고 있지만. 19세기의 조선에 망고빙수를 내놓는 성의와 고민없는 PPL을 보면 집필에 시간을 많이 쓰실 수 있을 것 같은데.


5.

더위 때문에 자꾸 가위에 눌린다. 땀에 절어서 깨곤 하는데, 며칠 전부터 그냥 에어컨을 켜고 자기로 결정했다. 전기료 아끼려다 장례치르면 그 돈이 더 비싸겠지. 하루종일 탄소와 똥만 배출하는 삶이 부끄럽지만 어쩌겠어요.

 


6.

잔나비. 요즘 제일 즐겨듣는 밴드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 남겨두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