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1.
사건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감금 및 집단 성폭력 사건'이 아닐까. 수많은 야동 사이트들에 그 사진들이 돌아다녔을 테고, 피해자의 고발이 없었다면 여전히 'OO녀'같은 별칭이 붙어서 사내들의 낄낄거림과 조리돌림 대상으로 온라인을 부유하고 있겠지. 그래선 안된다는 말을 하는 이들에게 발끈해서 나서는 모습, 사건의 실체가 다 파악되지 않았느니 하는 온갖 말들을 덧붙여 피해자를 낙인찍으려는 태도가 지금 딱 이 사회의 수준이다. 

이런 모습을 그저 이성과 지성의 부재, 소양의 부족 같은 걸로 이해해왔다. 그래서 더 멍청하다고 말했고, 우리는 조금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더 건방지고 오만해 보일 수는 있겠다만, 난 오히려 내가 더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이니 지성이니 소양이니. 그런 것들은 그저 노력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아주 약간의 노력. 그런 것으로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근래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보고, 들으면서 부쩍 지치고 피곤해졌다. 문제는 어쩌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도대체 난 어떻게 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2.
삶이라는 것이 대단히 가치있어서, 그보다는 내 삶만은 대단히 가치있는 것이어서 어떤 궤도에 올라탈 이정표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땐 내가 소년만화의 주인공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럴 수밖에. 내 세계의 인식은 오직 나 뿐인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조연, 주변부로 보일밖에.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그런 유치한 생각은 하지 않게 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 수준이었나보다. 역경에 처한 소년만화의 주인공에게 반드시 기사회생의 대찬스가 주어지는 것처럼 내게도 그런 순간의 이정표가 올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아직도. 

사는 일이란 게 그렇게 대수로울 것도 없고, 빅찬스 같은 것도 실은 없이 그저 꼬박꼬박 꾸역꾸역 꾸준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일이란 걸 인정하는 게 쉽지 않다. 지루한 삶의 연속. 하지만 스피노자의 말마따나 하늘이 내려준 삶의 빅찬스란 그렇게 대단할 것도 거대할 것도 없을 일이다. 그저 내 욕망을 가늠하고 단 한순간, 찰나라도 반짝거리게 만들 힘. 그런 것이겠지. 그 정도는 만화 속 주인공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그러니까 결국, 악셀 한 번 밟아봐야 하지 않겠나.

3.
생각해보니 10년 전 이맘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왜 나아진 게 없냐고 투덜댈 게 아니라 다시 또 더 좋아지길 준비해야하겠다. 바야흐로 렙업의 시기. 진득하게 앉아서 읽고 보고 듣고 쓰는 연습.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 몸은 튼튼하게 만들자. 

4.
'인연'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쌓이는 인연이란 결국 옷깃만 스쳐도 쌓이는 '업'이기도 한 것. 감당할 수 없는 업을 두려워해 인연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모든 말과 행동이 인연을 쌓는 일이고, 동시에 업을 짓는 일이다. 조심스레. 신중하게. 말을 줄이고 몸을 아끼며.

5.
이런 시절엔 김장훈의 노래를 듣고 그 공연에 가고 싶어진다. 외롭고 쓸쓸하다가 막 웃겨버린.
유튜브에서 김장훈을 검색해더니 온갖 조롱만 쏟아져 나와서 속이 상했다. 좋은 노래를 부르는 좋은 사람으로 남아줬으면 좋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