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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1.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세대'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반딧불의 날갯짓, 개구리 울음, 마른풀 타는 연기, 물 빠진 갯벌…. 뭘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고 일상을 꾸려갑니다, 물신만 추앙할 뿐.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가치는 더 이상 이 땅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느 곳이건 99퍼센트가 1퍼센트에 의해 전복되고, 공동의 것은 소유권의 절대성 앞에 무릎 꿇습니다. 사람들에게 내일이란 없습니다. 우리란 없습니다.

명백한 예외주의입니다. 그랬지요. 녹색평론의 길은 늘 외로웠지요. 마치 무언극 같았지요. 애타게 얘기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안타까운 목소리였지요. 그래도 바람찬 광야에서 20년을 버텨왔네요. 함께 할 수 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존경합니다. - 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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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고 앞서가고 성장하는 스포츠와 같은 삶의 주문만을 강요받아 오직 그것만이 삶의 진실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왜 사는지, 무엇이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건 우리사회에서 어쩌면 녹색평론뿐이다.

녹색평론이 창간 20년을 맞았다. 어렵고, 쉽게 읽히지 않고, 낄낄거릴 요소도, 꼼수같은 글도 없지만 그 성실하고 본질적인 질문과도 같은 묵묵한 걸음과 글은 얼마나 소중한가.


2.



날씨가 이렇게 추워지면 시규어로스가 생각난다.
예전에 뉴트롤즈와 첩혈쌍웅과 개같은 내인생으로 '나의 세대'를 정의하는 김연수의 글에,
툴툴거리면서도 내심 부러워 했었다. 나의 세대라니.

하지만 지금은 뉴트롤즈대신 시규어로스가 있으니까.
나중에 나의 세대를 정의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면 시규어로스와 소녀시대는 반드시.
이렇게 결론은 시규어로스와 소녀시대는 동급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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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ð suð í eyrum við spilum endalaust.
"아직도 귀를 울리는 잔향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연주한다”

3.
통합진보정당이 출범했다.
사실 진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어색하다. 종북주사파와 노빠, 금뱃지 페티쉬들이 모여 만든
혼합 잡탕 자유주의 정당.이 가장 적절하겠다.

이제 남한의 의회에 진보정당은 없다.
그들은 아마도 진보의 가치보다 대중의 가치에 맞춘 정치를 할테다. 그러나 그 대중들의 입맛이란 결국 신자유주의의 언어안에서 만들어지는 것. 바깥을 상상하고 탈주를 시도하는 것이 좌파고 진보라면 이제 남한의 의회에 진보정당은 없다.

대중들은 자본주의적 체제 안에서 그 대안을 위해 자유주의를 선택했지만 그건 결국 실패할 공산이 크다. 자유주의가 (대표적으로 안철수같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식은 상식과 도덕이다. 그건 자본주의적 언어에 포섭된 저항, 결국 자본주의를 공고히하게 된다. 이제는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가 총체화되는 시기. 이택광교수는 폴라니의 말을 들어 파시즘이라고. 파시즘 같은 무시무시한 말이 와닿지는 않지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거다. 이렇게 좌파와 진보는 (일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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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전복과 봉합의 과정에 벌어지는 틈새의 희망을 믿고 발견하려는 노력을 다짐했으니,

사람들은 그래도 저항과 상상의 기억을 더듬어 또다른 언어를 찾으려 할것이다. 물론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