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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진짜’인가


 

<화차> -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진짜인가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한다. 그리곤 간단한 호구조사. 나이는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그렇게 서로 정보가 오가고 나면 우리는 그를 알았다고 말한다. 가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서류가 필요한 순간도 있다. 주민등록증, 통장 사본, 여권, 졸업 증명서 같은. 그런 서류가 오간 후엔 그의 신원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어떤 누구를 알고 그의 신원을 확실하다고 말하는 데 필요한 것이 고작 그를 호명하는 기호들이다. 그런데 그런 기호들이야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는 일이다. 어려울 것이 없다. 세상은 기호 너머의 실체보다는 기호 자체를 규명하고 얻어내는 데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 당신은 누구인가

 

<화차>는 삶을 통째로 훔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선영과 문호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다. 결혼 전 문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에서 선영은 전화를 한 통 받고 홀연히 사라진다. 문호는 선영의 종적을 찾다 자신의 약혼녀 선영이 실은 경선이라는 이름의 전혀 다른 사람이며 실제 선영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문호가 전직 형사인 사촌 형 종근의 도움을 받아 선영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마치 그럴듯한 추리영화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시선은 물론 문호와 종근조차 선영의 종적을 잡아내는 추리게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그들 모두 경선(선영)을 자기가 원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그를 입증하려 노력한다.

 

문호는 사라진 선영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도대체 넌 누구야?”. 문호는 경선이 자신이 알던 선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끝까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전직 형사인 종근이 살인사건과의 연관을 의심하며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조언할 때에도 그는 형이 선영이를 아느냐고 화를 낸다. 끝까지 경선의 무죄를 믿고 그를 되찾으려는 순정남. 문호의 경선은 일상의 한 부분인 약혼녀 선영이다. 그래서 문호의 추적은 경선을 자신의 착한 약혼녀 선영으로 규정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종근의 경우는 경선이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임을 확신하고 그녀를 뒤쫓는다. 주인이 사라진 경선의 빈 집안을 탐색하던 종근은 지문 하나 남아있지 않은 집을 보고 요것 봐라라고 말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범죄현장을 목격한 형사의 시선이다. 영화 속 종근의 상상에서 경선은 잔혹한 살인범이다. 순정남 문호의 감정을 따라 경선의 무죄를 바라던 관객들은 종근의 냉소적인 시선을 따라 이번엔 경선을 동정의 여지가 없는 잔인한 살인범으로 인식하게 된다.

 

종근의 시선을 따라 끔찍한 범죄자 경선을 추적하던 관객들의 시선은 경선의 시점으로 경선의 과거가 드러남으로써 다시 그녀를 연민하게 된다. 관객들은 그녀가 사채업자에게 지장을 억지로 찍히고 팔려갈 때, 술집 여자 차림을 하고 택시에서 내릴 때를 보면서 그 아픔과 분노를 직접 느끼게 된다. 경선은 산골 펜션에서 선영을 죽이고 피범벅이 된 채 자신을 때린다. 살인이라는 끔찍한 경험에서 자신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음 행동을 한다.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낄 시간도 두려움에 떨 여유도 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고 그 죄책감마저 억눌러야 하는 고단한 삶에 관객들이 느끼는 건 연민과 동정이다.

 

선영으로 변한 경선. 그 한 명에 대한 각자의 규정은 모두 다르다. 관객들도 문호의 마음을 따라, 종근의 관찰을 따라, 그리고 경선의 삶을 따라 그녀에게 접근하지만, 어느 모습도 경선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관객들은 경선을 증오할 수도 연민할 수도 없다. 경선 자신이라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규정할 수 있을까.

 

# 무엇이 되기를 바라서

 

자아는 자신의 관념 안에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에 비친 얼굴로 구성된다. 그래서 오히려 무서운 것은 타인의 삶을 도둑질 해 살 수밖에 없었던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사라지고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사칭하고 살아도 도무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세상이다. 타자의 존재를 타자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태도다.

 

자신의 실존이 무엇인지, 그녀가 경선인지 선영인지는 그녀 자신도, 그녀의 연인 문호도 알 수 없다. 마치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알 수 없었던 장자처럼. 그래서인지 경선도 나비를 보며 자신의 존재를 질문한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욕망이 꾸역꾸역 몰려든 용산으로 그녀가 향한 이유는 함평의 나비 축제를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문호가 기억하는 선영(경선), 종근이 단정한 경선, 그리고 경선이 되고 싶었던 선영. 모두 경선이며 또한 경선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모두 무엇이 되기를 바란다. 경선은 자신이 선영이길 바랐고 나중엔 자신이 선영인지 경선인지조차 혼동했다. 문호는 경선이 선영으로 머물러주길 바랐다. 경선이 아니라. 결국, 모두가 존재를 무엇으로, 제멋대로 규정하려 했고 결과는 그 대가를 치른 파국이었다.

 

# 대한민국의 가장 천박한 욕망이 몰려든 곳

 

영화의 원작 소설은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진 이후 불황기가 배경이다. 극단적 소비주의가 만들어낸 살풍경. 이같은 배경은 90년대 이후 한국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부자 되세요란 주문이 온 나라를 사로잡고, 주민등록번호에서 신용카드번호로 사람을 규정하는 수단이 옮아가던 시절. 경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건 사채 때문이다. 그리고 빚을 내라고 강요하고 경선의 불안한 삶에 위로의 손길 한 번 주지 않은 건 세상이다.

 

영화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원작소설만큼 사회적 문제에 비중을 두진 않는다. 사실 영화를 보는 관객 중 누가 모르겠는가.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빚은 얼마나 두려운지, 삶은 얼마나 외로운지. 영화는 굳이 이런 것들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감독은 용산역을 마지막 장면의 배경으로 택하면서 이 파국의 난장을 총체적으로 전시한다. 끊임없이 사람이 들고나는 곳, 무수한 욕망이 교차하는 곳, 백화점의 무수한 상품들이 즐비한 곳,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천박한 욕망이 밀려들어 잔인하게 타올랐던 곳.

 

당신이 당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세상이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기록이다. 자본이 부여한 신용, 국가가 부여한 일련번호 같은 것들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기억이다. 몸과 마음을 섞어 살을 부비고 말과 정을 나누며 누군가에게 남긴 흔적. 그러나 실은 이것 중 어느 것도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타인의 얼굴을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데 급급할 뿐인 관계도, 고작 기호에 불과한 숫자들도 실존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인 보바리즘(Bovarysme)은 사회적 불안이 가중될 때 심해진다. 강요당한 욕망이 더 나은 무엇으로의 도피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무엇으로 규정하는지. 타인에게 멋대로 투사한 자신의 욕망인지, 숫자놀음에 불과한 기호들인지, 세상에 떠밀린 안타까운 변명인지. 당신이 보고 있는 그것은 정말 진짜인가.

 

그래서 오늘 거대한 용산역에 있는 것 같은 우리는 모두 화차를 기다리고 있는 경선과 똑같은 셈이다. 아직 선영이 나타나지 않았을 따름. 그러니 선영이 나타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맡기 전에 내 옆의 경선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너 자체로 괜찮다는 아주 사소한 위로 한마디쯤 건네 보는 게 좋겠다.    




*땡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