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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 - 숏다리 주제엔 원래 역습같은거 안돼요





“축이 되는 디딤 발이 흔들려서 킥이 정확하지 못하니까 공이 떠버리는 겁니다”


한 때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축구 해설가였던 신문선은 늘 ‘축’과 ‘디딤발’을 강조했다. 간과하기 쉽지만 정확하고 강한 킥을 위해서는 공을 때리는 발보다는 땅을 딛고 있는 디딤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강속구 투수에게 강한 어께만큼이나 튼실한 하체와 균형 감각이 더 중요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끝내 강력하지도, 정확하지도 못한 킥을 날린 채 끝을 맞았던 것도 축과 디딤 발이 튼실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드라마의 ‘킥’이 결국 멜로라인이라면 김병욱 감독이 구축한 하이킥의 세계의 멜로라인을 지탱해주는 축은 ‘해학’이다. 


해학이란 현실에 기반한 웃음이다. 비극적 현실에서 파생된 희극이다.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조언이야말로 해학의 본질을 꿰뚫는 경구다.  


그동안의 하이킥 시리즈는 오직 물질만을 숭앙하는 자본주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소외된 개인, 사랑조차 철저히 계급적인 세상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김병욱 감독의 정확한 ‘눈’이 디딤 발과 축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튼실한 축을 바탕으로 한 킥은 지붕을 뚫어버릴 듯 거침없는데다 정확했다. 높은 시청률과 스타탄생은 성공한 슈팅에 이은 일종의 세리모니였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도 그랬다. 2012년을 돈의 해로 규정한 이적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사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 혹은 ‘종속’돼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야기는 수 십 년간의 인간관계를 금전관계로 전복시키면서 시작했다. 가부장의 권위도 사실은 ‘금력’에 기반 하고 있었음을 폭로했다. 금력의 상실이 곧 권위의 상실로 이어졌음을 인정하지 못하던 내상은 급격한 스트레스에 부닥쳤다. 123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좋았던 유선의 ‘완경’ 에피소드도 경제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완성과, 이별, 새로운 삶에 대한 이미지들은 그냥 차치하더라도. 


그러나 갈등은 너무 쉽게 봉합됐다. 남한사회에 사업에 실패한 가정은 숱하겠지만, 복권당첨으로 재기의 기회를 잡는 가정은 얼마나 될까. 그동안 취업에 애를먹던 취업준비생이 용감하게 꿈과 희망을 담은 대기업에 지원해서 합격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현실적 난관’을 무시하고 말이다. 


숏다리들의 기습적 하이킥은 통쾌하겠지만, 사실 그 궤적이란 롱다리의 미들킥보다도 낮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이 행복해지기 위해 시간을 멈춰야 했던 것처럼 짧은 다리들의 역습도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한다. 짧은 다리들의 하이킥이란 그저 통쾌함으로 건네는 위로가 최선이다.    


희망과 행복이란 절망과 불행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불행을 정확히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절망조차 하지 못한 희망이란 거짓이고 불행해본 적 없다면 행복 할 수도 없다. 사실 희망과 절망, 행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이킥의 매력은 그 종이 한 장을 포착해 내는 지점에 있었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란 이름처럼 이번 시즌이 그 불행과 절망의 순간들을 가장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담을 수 있었을테지만, 절망은 방치됐고, 불행은 외면당했다. 현실이 거세된 그렇고 그런 가짜 희망극. 무책임한 ‘1년 후’ 혹은 ‘그들은 그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주문과도 같았다.    


이건 해피엔딩, 혹은 시청자들이 강요하는 ‘강박적 행복’에 대한 김병욱 감독의 신물이거나 납득이거나 항복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조롱일 수도 있겠다. 사실 김병욱 감독의 전작들 중에는 해피엔딩이 아닌 작품이 없다. 김병욱 감독의 최고작이라 꼽고싶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도 마지막 회,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왔지만 가족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삶은 늘 죽음을 곁에 두는 것이며 죽음조차 일상인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붕킥의 세경도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 삶, 물질, 풍요가 행복을 가늠하는 오직 한가지의 잣대가 아님을 김병욱 감독과 하이킥의 세계는 알고 있었고 행복과 불행은 총량의 법칙에 따라 움직임을, 마냥 행복할수만도, 마냥 불행할 수만도 없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절망에 대한 응시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행복을 탐구하는 모습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이킥의 주인공들은 늘 안주하지 않고 떠났다. 발전이란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새로운 사람이나 새로운 삶, 관계로.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아무도 떠나지도, 상처받고 치유하지도, 변화하고 발전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완성했다.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겠지만, 사실 그런 삶은 없다. 어떤 의미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이제 끝났다.


하이킥의 결말을 예측해본적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태도를 가진 두 인물은 이적과 크리스탈이었다. 이적은 늘 그런 삶의 태도를 후회하고 환멸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가장 잘 관철한다. 크리스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 (젊고 예쁜 여자의 성적 매력이 대표적인데)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워간다. 미국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아빠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선 자신의 기질적 특성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그녀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본성을 발각당하지 않았다) 난 그 둘이 결합할 거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합하는 것. 일종의 M&A 같은거다. 크리스탈은 자신의 미모와성적 매력을 팔고 이적은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낭만이 없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금전적 능력으로 젊고 예쁜 여성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원시시대에 사냥 잘하던 남자가 애 잘 낳는 여자와 결합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적 가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매력으로 작용하는. 자본주의의 시대의 낭만이란 그런 것.


지원이는 결국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의사가 될 거라고. 그녀의 말대로 늘 재미없어하겠지만 적당히 재밌는 척 해주면서 그렇게 삶을 살아갈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계상이 걸은 길이기도 하다. 그 결핍감을 봉사활동이니 보건소근무니 하는 것들로 보충하겠지만, 그건 본질적인 건 아니니까. 그렇게 적당히 불행하고 적당히 윤택하고 적당히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원이 뛰쳐나가서 정말 르완다로 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아마 좌절할거야. 르완다 비자가 그리 쉽게 나오나..ㅋ 


종석이는 떠난 사랑에 좌절하고 적당한 성적에 명문대엔 지원했다 떨어지고 삼수해서 수도권 4년제 대학쯤에서 연애하고 술마시다 군대에 다녀오고 가끔 아이스하키를 보러가는 잘생긴 중소기업 직장인 쯤이 될거고, 진희는 언제까지고 골골거리면서 고시원을 전전하다 그럭저럭한 회사 비정규직 경리직원으로 살아가다 과장쯤 되는 남자랑 결혼할거라고 생각했다. 종석이 명문대에 지원하고, 진희가 꿈과 희망으로 대기업에 지원해보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한땐 나도 잘나갔지’를 주섬거리는 것이 짧은 다리들이 날릴 수 있는 역습의 궤적이다. 애초에 짧은 다리들에게 하이킥으로 경기를 역전하기란 불가능 한 일.


다만 희망이란 그렇게 수태날리는 숏다리들의 로우킥에 천하역사도 쓰러지는 법이란 사실이다. 본야스키의 로우킥이 최홍만과 밥샙을 자빠뜨렸던 것처럼. 그러나 어쩌다 날린 하이킥 한방에 들뜨다간 또, 자기가 그런 하이킥 날릴 수 있을거라고 믿고 로우킥 연습 안하다간, 밥 샙한테 신나게 두드려맞는다. 세상은 원래 롱다리들 편이다. 


덧,


- 시즌 시작할때는 오직 백진희 편이었으나 지금은 박하선도 좋아연.

- 이종석에 박하선, 크리스탈까지. 김병욱 감독이 신인배우 알아보는 눈은 정말 매의 눈입니다.


요즘 본 몇 편


1. 하이킥

이제 고작 2회에 리뷰라니. 성급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러니까 이건 하이킥에 대한 리뷰라기보단 하이킥을 보고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이다. 학자금 대출과 생활고와 취업난으로 대변되는 20대를 연기해낸 백진희에 대한 열광에 대한 반응인것이다.

물론 오늘의 20대는 괴롭다. 그러니까 도무지 앞 말고는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는 괴로움이다. 서점엔 청춘을 위로한다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수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쉽게 88만원세대라고 부르고 쉽게 괜찮다고 힘내라고 말한다.

도대체 뭐가 괜찮고 또 어떤 힘을 내라고.

반값 등록금이니 청년실업이니 말을 만들어내기만 할 뿐 사실 달라지는건 없다. 오히려 이 요란스런 호들갑이 더 불편하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만들어낸 그 사람은 결국 우리가 짱돌을 들지 않은 탓이라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청춘은 원래 그런것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이게 다 가카때문인데 그러니까 원인은 우리가 투표를 안해서라고 말한다. 뭐 다 틀린말도 아니지만, 그게 위로와 격려가 되진 않는다. 그걸 억지로 우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허한 논의의 긑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보이는 앞을 향해서만 달려야한다. 그렇게 그들의 세계로 편입되거나 도태되어야 한다. 앞만 보이게 만들어 놓은 이 터널, 벗어나면 달릴 수 없는 이 철로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고작 2회밖에 안된 하이킥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극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전시했을 뿐 어떤 섣부른 위로나 해결이나 희망도 제시하지 않았다. 기대와 귀추가 주목될 수밖에 없다. 다만 사람들의 섣부른 호들갑이 이 정확한 드라마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백진희에게도.

2. 도가니

배트맨에 대한 논쟁을 벌인적이 있었다. 그는 영웅인가 아닌가. 사적 복수의 결과로 히어로가 되는 배트맨은 영웅일 수 없다. 거기다 그는 자신의 자본과 권력을 이용하는 철저한 자본주의형 히어로. 뭐 여러종류의 수퍼 히어로가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이대면 사실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별로 없다.

사람들은 영웅을 희구한다. 클리셰와 CG를 적절히 버무리고 감동적인 권선징악의 메시지만 넣으면 완성되는 것이 히어로물인데도 끊임없이 양산되는걸 보면 알 수 있다.

인호는 영웅일까. 사적인 복수와 분노도 아니고, 남다른 정의감을 가진 것도 아닌 이 평범한 남자가 이렇듯 모든걸 걸어 뛰어 들게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조금더 설득해주길 바랐지만 영화는 그다지.

그럼에도 넘치지 않으려는 공유의 연기도, 넘치는 공유의 외모도 충분히 좋았다능.
정유미는 돈버는 영화에는 안어울린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능.

조금 더 담담하게 더 시니컬하고 더 우울한 영화였다면 좋았을걸.

3. 푸른소금

신세경은 예쁘다. 진짜 엄청 예쁘다.

지붕뚫고 하이킥



Paolo Pavan - Looking For a Way Out


'하이킥' 시즌2라는 진부한 홍보를 맘에 안들어 하면서도 꾸역꾸역 티비앞에 앉아 지붕뚫고 하이킥을 봤다. 전작에 갖는 흥미와 애정때문이었겠다. 별다른 의미도 없이 흥행작을 울궈먹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프란체스카 시즌3가 그랬던것처럼.)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로 다시 변변한 시트콤을 못만들고 있는 MBC가 띄운 의미없는 한 수라고 궁시렁거리면서 티비앞에 앉아있는데 "어라, 이거 뭔가 좀 다른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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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옮겨 놓은 것 같은 - 메타포

신애와 세경은 갈데없는 신세로 우여곡절 끝에 이순재의 집에 식모로 들어간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골자는 이 자매의 서울 생활기, 혹은 성장기쯤이겠다.
거의 매회의 갈등은 가난한 이 자매를 구박하는 주인집 딸 해리의 핍박에서 시작된다. 해리는 집안의 모든 것을 '소유'한다. 이 집안에 있는 것은 모두 자기 소유임을 간절하게(그렇다. 그건 간절하게에 가깝다.) 주장하고 신애와 세경의 인신마저도 소유하려 한다. 동시에 신애와 자신의 계급적 차이를 항상강조하며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모두에게 인정받으려한다.

이는 마치 유산계급이 무산자를 핍박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에 가깝다. 존재에 대한 인식보단 소유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군중속에서도 고립된채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처럼 해리도 가정에서 고립되어있다. 유복한 가정의 사랑받는 막내딸인듯 보이지만, 저마다의 삶과 생활로 어느 누구도 해리의 잘못과 집착에 응징을 가하지 않는다. 결국 엄마의 꿀밤으로 소동은 마무리되지만 엄마조차도 해리의 잘못이 무언지 자세하게 얘기해주지 않는다. 결국 해리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한다. 무엇과도 소통하지 못하고 물질만을 맹신하는 욕심쟁이 현대인들처럼.

너무 많은 것들을 삼키기만 할 뿐 쏟아내지는 못하는 우리처럼 해리의 작은 몸은 감당하지 못할 고기때문에 늘상 변비에 시달린다. (사실 과도한 육식같은 잘못된 섭생때문에 변비에 시달리는건 바로 우리들 자신아닌가)


##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

하이킥엔 엄격한 계급이 존재한다. 그것이 금력에 의한 것이든 가부장적 권위에 의한 것이든 학력 혹은 나이든 관계없이 하이킥은 무엇으로든 계급을 규정짓고 지배하려는 서슬퍼런 계급투쟁의 과정이다.

가짜학력으로 과외선생노릇을 하고있는 황정음은 학력이 들통나지 않으려 애쓴다. 가짜 서울대생인 그녀에게 진짜 서울대생 지훈의 "몇학번인데요?"라는 말은 친근감의 표현보다는 추궁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가장 쿨한 캐릭터를 표방하는 지훈조차도 은연중 자신의 우월적 지위와 카르텔을 확인하려는 질문인것이다.

정보석은 이순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세경과 경쟁하고, 해리는 신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고자 끊임없이 신애를 핍박한다. 결국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물고 뜯고 싸우는 세상의 축소판.


## 가족의 정체

하이킥 오늘 방송분의 에피소드는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가족의 의미에서 기인하는 갈등들.  각자 "가족이라면 이래야지"를 외치지만 사실 그건 가족안에서 자기가 주도권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의 발로. 그 욕망을 예의니 상식이니 하는 말들로 치장해 봤자.

애초에 가장의 권위라는 말로만 가족의 형태를 얽메이려드니, 서로가 가장이 되고자 할 수밖에. 결국 누가 주도하든 고리타분한 가부장제다. 권위와 권위만이 맞붙어 싸우는.
가족이란 본래 그렇게 불완전한 공동체다. 에피소드의 끝무렵 해리의 나레이션처럼 가족은 선택하지 못한 최초의 공동체. 그 공동체의 빛나는 부분을 발견하게 해주는건 배려와 소통이다.


## 그래도 따듯한, 그래서 더 세상과 같은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말처럼 그래도 세상은 따뜻하다. '뭐가 따뜻한데?'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더오르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 세상은. 학교에 가고싶은 세경을 위해 새 참고서를 몽땅 버려주는 준혁처럼, 갈 곳없는 세경자매에게 기거이 방을 내주는 줄리엔처럼. 세상은 분명히 따듯한 곳이어서 우린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저마다 한걸음씩 내딛어 지금은 비록 아니어도 언젠간 더 좋은 곳을 찾고자 발버둥치면서 살아가는 세상.

지붕뚫고 하이킥의 제목은 헤르만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차용해왔다고 한다. 다른 세상을 찾기 위핸 지붕을 뚫는 것처럼 알을 깨는 것처럼 지금 사는 세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 발 한 발의 하이킥이 언젠간 지붕을 뚫을거라고 믿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 한 발 한 발의 하이킥을 매일 저녁 즐거운 마음으로 시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