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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티풀 - 아버지, 당신을 사랑 할 수 있을까요





# 고단함

욱스발은 경계에 서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이민자와 원주민의 경계, 연민과 착취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그 경계의 삶은 고단하다.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마지막 처연한 눈을 보지 못한다면 괴롭지 않을 수 있을텐데. 그저 착취하고 제 배를 불릴만큼 뻔뻔할 수 있다면, 그들의 괴로움에 무관심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할 수 있을텐데. 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이 그를 더욱 고단하게 만든다. 그는 그 고단함을 묵묵히 견뎌내기만 한다. 정신줄을 놓아버리지도 않고, 아이들을 무책임하게 방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괴로움을 쌓아갈 뿐이다. 방출하지 않고 쌓았던 고단함은 한번에 추심을 시작한다. 병이다. 그는 끝까지 고단하다.

그만 유독 고단하고 고독한 것도 아니다. 이냐투리는 세계는 모두 고단하다는 말을 하고싶어 한다.누구는 행복하고 어느 곳은 불행하단 투덜거림이 아니다. 바벨에서부터. 세네갈 이민자들은 백만마리가 넘는 닭을 잡아도 바르셀로나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들은 마약을 팔거나 쫓겨난다. 중국 이민자들은 갖은 착취를 당하면서도 중국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받는다. 그들은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일한다. 욱스발은 그들을 연민하지만 그들을 착취하고 세계는 다시 욱스발을 착취한다. 세계는 모두 고단하다. 영화 내내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도시를 오시하지만 구원따위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집에 '신'의 그림이 붙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신을 가장 간절히 그리는 곳은 바로 지옥이다.



# 가족

바벨에서부터 이냐투리는 자꾸 가족에서 위로를 찾는다. 욱스발은 죽음을 준비하면서 가족을 돌이킨다. 붕괴된 가족은 욱스발의 상처를 마침내 보듬는다. 욱스발은 안나의 곁에서 죽었고, 죽어서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 눈(雪)을 보고, 담배를 피우고, 웃음을 짓고, 질문을 한다. 어머니의 정 같은걸 겪어보지 못했을 남매는 이헤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이헤가 정말로 반창고를 떼어내고 약을발라주는 장면을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심이 되는 기분이 들기도했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이냐투리는 이제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를 떡갈나무 같은 아버지에게 바친다고.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이해하고 위로하는 존재일까. 또 부성이라는 건 정말 그렇게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마음이 따듯해지고 눈물이 나는 일과는 별개로 부성에 대한 강요같았던 텍스트들은, 오직 아버지를 이해하기만 하려는 몸짓처럼 보이던 것들은 좀 불편했다. 그건 가족만이 최후의 보루라는 얘기를 하고싶었던 것 같지만, 그래서 가족에서 위로받는 삶의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난 글쎄. 가족도 고단하고 고독한 세계이긴 마찬가지. 난 차라리 이헤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 버리길, 욱스발이 남매로부터도 고립되길, 마람브라가 차라리 자살해 버리길 바랐다. 어쩌면 그런 완벽하고 갈데없는 절망만이 삶의 진실일지도 모르니까.

가족에서 구한 위로. 같은건 어쩌면 환상. 위로도 연민도 구원도 스스로 해야 할 일.



# 하비에르 바르뎀

길었던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하몽하몽의 잘생긴 육체파 배우였던 이 아저씨는 씨 인사이드의 삶을 사랑하는 안락사 희망자와 단발머리 킬러 안톤 쉬거를 지나 이젠 2시간반 동안 혼자서 관객을 압도하는 본좌가 됐다.

다른 이였다면 가족에 대한 집착이나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계의 삶같은 걸 납득하지 못했겠지만 이 아저씨는그걸 해낸다. 결국엔 죽기직전 화장실에서 자신의 영혼을 목격한 순간, 이 아저씨가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스쳐갔을지 모를 영화를 (21그램이나 바벨이 좋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진 않았던걸 보면 난 이냐투리를 크게 좋아하는 것 같진 않다) 내도록 새겨놓을 영화로 만든 힘은 역시 오롯이 바르뎀 아저씨의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