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칼날은 언제나 약자를 향한다 - 동정을 가장하지 말지어다


송지선이 죽었다.
흔히 '추문'이라고 표현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자연스레 추문과 짝을 이루는 관심을 빙자한 비난과 욕설과 동정이 따랐다. 그녀는 견디지 못했고 결국 더이상의 반항을 포기했다. 죽일듯이 덤벼드는 이들에게 반항을 포기했으니 죽을 수밖에.

그 추문의 상대였던 임태훈도 죽었다. 이젠.
사람들은 이제 임태훈에게 화살을 돌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요런 댓글 하나를 달아 저마다의 추모를 마친 뒤 이젠 그에게 죽일듯이 덤벼든다. 살인자니 악마니 파렴치한이니 온갖 욕설과 비난이 난무한다. 그를 옹호하려는 이도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넌 이제 죽었다."라는 말 말곤 해줄게 없어.

 사람들이 잔인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나 그들의 칼날은 약자를 향한다. 약자를 억압하고 핍박함으로 인정받는 자신의 우월적 지위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싸움 잘하는 옆 학교 짱한테 삥 뜯기곤 분풀이로 우리반 찌질이들을 두들겨 패던 우리반 깡패가 떠오르는 일이다. 이 순환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찾아낸다. 같은 이유에서 삶이 힘겨운 이들을 전시하는 인간극장류의 최루성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동정은 결국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지위에 안도감을 느끼는 행위다.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약자를 찾아내고 괴롭혀서 안심을 얻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어떤 언론은 네티즌들의 몰지각한 악플이 또 하나의 비극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정작 네티즌들은 그 논란을 재생산하고 확대한 것은 정작 언론이라며 그들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둘 다 아니다. 범인은 이 사회의 구조다. 약자를 밟아야지만 존재가 증명되고 다른 이, 다른 것에 대한 폭력이 삶의 원칙으로 둔갑하는. 즉 다시말해 다르다는 것만으로 이미 약자가 되어버리거나 일반적인 공동체와 윤리 의식에 포섭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용납하지 않고 밟아버리는 이 저질의 사회가 그 범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어느 누가 관심갖고 비난 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송지선과 임태훈이 연애를 했건, 구강섹스를 했건 나와는 전혀 상관있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든건 '8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는 여자' , '구강섹스' , '섹시화보를 찍은 아나운서' 같은 자극적인 이미지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이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건 사회가 통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순종적인 여자는 언제나 '오빠'를 만나야 하고, 섹스는 언제나 음습한 곳에 숨겨져야 한다. 하물며 구강섹스라니. 그것도 섹시화보를 찍은 천박한 아나운서가. 아닌 척하겠지만, 그 사뭇 다른 이미지들이 당신들의 그 거창한 '관심'을 끌어낸건 사실이지 않은가. 자기가 만들어낸 이미지 아니냐고? 그걸 소비한건 당신 아닌가? 자본주의는 니즈가 있는 상품만 생산하는 법.


사람들은 무엇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듯 하다.
지금 당신이 행하는 바로 그것이 폭력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위선적 댓글을 달고 호들갑을 떠는 그 모든 일이 폭력이다. 연민과 동정을 갖는다며 또다른 희생양을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지 말아라. '다른 이'를 억압하는 것으로 밖엔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당신도 이미 깡패다. 동정을 가장하지 말지어다. 


파수꾼 - 그건 싸움잘하는거랑 아무 상관없어



1. 그건 추억이었을까?
2. 정말로 다치지 않았니. 나도 너도.
3. 그럼 그건 폭력이었을까?
4. 그렇다면 피해자는? 또 가해자는?
5. 얼버무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서는,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아.

5. 이제훈 대박.

바더마인호프 - 폭력, 혁명, 모순과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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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적군파

호치민과 체 게바라를 연호하는 그들의 이상은 간단하다. 자본에 의한 착취, 성에 의한 수탈, 국가에 의한 폭력등등. 모든 파쇼적이고 악랄한 행위들. 인민, 즉 나와 너 내 친구들의 행복한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항의와 저항. 고래로 '운동'이나 '혁명'이라고 불리운 것들은 모두 같은 범주에 있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관통하는 적군파의 성립배경에 조금 다른점을 찾자면 그 이름만으로도 후덜거리는 '68'.에 있달까.
해서 망이 망소이의 난과, 독일적군파와, 2008년 여름의 촛불은 그 본질에서 대동소이하니 독일 적군파를 공포의 대상, 테러리스트, 악마집단으로 이해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본래 혁명은 폭력적인 법이다.
마오가 이르길 "혁명은 결코 고상하거나 아름다울 수 없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계급을 뒤엎는 폭력적인 행위다.”
혁명은 그렇다. 혁명은. 혁명을 꿈꾸는 이들만을 탓할 순 없다. '혁명'을 꿈꾸지 않으면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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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의 발단

영화는 67년 가두시위중 사망한 오네조르크를 조명하며 시작한다. 시위도중 경찰에 의해 사망한 대학생,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정부. 80년의 광주와 87년의 이한열을 닮은 그 장면들은 가끔 눈물이 흐를만큼 뜨겁다.

마인호프의 성명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자초한 일'이다. 은행에 대한 테러는 금융독점에의해 인민들을 수탈하는 행위이므로,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외면한채 권력에 굴종한 판사에게, 경찰에게, 기업에게, 국가에게.
애초에 근원을 따져보자면 이 모든 폭력과 테러의 발단의 고리는 '저들'에게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더욱 슬픈건 그 고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끊어내야 하는지 저들은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쯤.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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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모순, 붕괴

호쾌하고 뜨거운 영화의 전반부를 지나 본격적인 적군파 활동이 시작되면서부터 갈등은 생겨난다.
모든 일과 사상엔 모순이 존재하는 법이고 모순을 극복해 내는 과정을 겪으며 숙성되는 법이다. 거기에 혁명이라고 예외일까.

혁명은 자기에 대한 확고함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때문에 혁명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인정하는 것은 곧 자기 전체를 부정하는 것. 때문에 모순도 자기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썩어간다.
인간은 '자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 자기를 부정하느니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더 쉽다.

신화란 그렇게 만들어진다. 관념으로 만들어진 혁명은 교조적이다. 결코 현실일 수 없는.
어느 순간엔가 잘못임을 알게되겠지만 잘못을 인정하기란 목숨을 끊는 일보다도 어렵다. 마침내는 아주 슬픈 눈을 하고 죽어갈 밖에. 저 사진속의 눈처럼. 저런 눈을하고도 '난 민중을 위해 살았고 죽을거야'란 자기도 안믿는 얘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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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할것이냐

테러리즘이 무조건 나쁘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옳다고 말하기도 마찬가지지만. 정답은 없는거니까.
다만, 시골 마을에서 호미를 잡고 노동자 농민들과 혁명을 토론하던 남미횽아들과 쏘고 찌르고 태우고 부숴서 혁명을 이끌려던 유럽횽아들중에 누가 지금 우리 곁에 남았는지를 돌이켜 볼일이다.


## 사실 남일이 아니다

영화가 얘기하자는건 적군파의 과격한 테러가 불러온 참상과 몰락도, 그렇다고 그시절로의 향수를 자극하는 저열한 프로파간다도 아니다. 다만.

똑바로 보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전자 신분증을 도입해 시민들을 통제하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국가와 자기만족과 기만으로 가득찬 혁명으로 모두를 속이는 오만, 빼앗기고도 빼앗긴줄 모르는 무지와, 빼앗지 않기 위해 빼앗는 허세, 허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 많이 비슷한것들.

폭력은 그렇게 지금도 우리안에, 우리 사회안에 버젓이 기생하고 있다.


++덧

영화를 보다 며칠전에 케이블티비에서 본 '쏜다'와 장면이 겹치는 황당함을 겪었는데,
그 황당함이란 전혀 매치 되지 않을 것같은 영화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함이 첫번째였고, 상황이 시간을 만들고 그 시간이 다시 상황을 만들어 종래엔 허무해져 버리는 이 웃기지도 않는 매치가 갖는 설득력이 두번째였다.


광기와 폭력


"상습 아동성폭력범 화학적 거세 필요"

나영이 어머니 “관심도 후원도 사양할래요”


분노 할 일이다.
성범죄의 대상이 점차 어린, 약한 여성에게로 집중되는 일과 사회적 공분과 슬픔에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범죄 예방에 대해서 분노 할 일이다. 그러나 분노하는 일이 양형을 늘리고 처벌을 가혹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서는 안된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분출에 가깝다.

성범죄가 일어난 후에 가장 중요시 해야 할 일은 피해자가 다시금 건강을 되찾아 피해를 극복하고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분노를 분출하는 일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 사태에 과연 어떤 도움일까 고민해 봐야한다. 오히려 2차 피해로 번질 우려가 더 크다. 생각해보면 이후를 살아가며 받을 부담스런 사회적 관심(이라고 쓰고 낙인이라고 읽는다)이  범행당시의 충격보다 덜하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다.

사형이니 거세니 하며 떠들어대는 일도 마찬가지다. 고결하게 가해자의 인권을 운운할 만큼의 깜냥은 아니지만 그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정도는 의심해 볼 일이다. 범죄는 양형이 가벼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툭하면 사람을 죽여 없애는 중동이나 가까이는 북쪽나라에서도 성범죄는 빈번하다. 아동 성범죄에 가장 민감하다는 미쿡에서도 아동 성범죄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인민재판 하듯이 모여다니며 죽여라를 외쳐대는 군중들의 폭력성이 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건 차라리 광기(狂氣)다. 자신의 정의감을 과시하며 만만한(?) 가해자를 향해 던지는 돌은 평소 발로하지 못한 자신의 폭력성을 공인된 대상에게로 향하는 광기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나. 그들의 폭력적 분노는 '가해자'란 이름을 갖게되며 동시에 더할나위 없는 약자가 되어버린(이래서 무조건 약자가 옳다고 얘기하긴 어려운 것)이에게로 쏟아진다. 약하고 어린 여성에서 행하는 폭력과 사뭇 닮지 않았나. 라는 불온한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분노하여 사태를 올바르게 다잡는 일과 다만 현상에 천착해 욕구를 분출하는 일은 일견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일인걸 명심해야 한다.

병을 치료하는 일은 통증과 원인을 동시에 제거해 나가야 옳다. 통증을 줄인다며 진통제만 고집하다간 병을 키우기 십상이고 병의 원인을 고친다며 통증을 무시하다간 병보다 고통에 먼저 상할 수 있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부당하고 끔찍한 일에 분노하고 소리치며 같이 울고 흥분하는 일은 표면을 달래는 진통제 같은 것이다. 분노할 일에도 분노하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사회와 사람은 죽은것과 진배 없기 때문이다.
범죄가 발생하는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는 일은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다.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을 처벌하는 일보다 애초에 폭력을 없애는 일이 더욱 현명하고 근원적인 길이다.

++
굳이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사형이니 거세니 하는 방법들이 과연 가당키나한 얘기들인가 의심한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논리적으로 함당한가하는 의문도 의문이지만, 과연 그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이들 또한 사람이 아닌가말이다. 무엇이 있어 누구에게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었을까. 법전 몇쪽 외웠다고, 고작 몇 표 받아 선거에서 당선됐다고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를 부여받는건 아니다. 처벌은 징벌보다 교화에 더 큰 목적을 두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