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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4 종로 - 유진식당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퇴임을 한 후 나는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했다. ‘탐사’라고 하는 까닭은 나의 발걸음이 내 안에 고인 어떤 질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하는 동시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갑자기 고독이 밀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이 뒤따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섰다."

오근재 - '퇴적공간'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내려 인사동 방향으로 걷다보면 낡고 허름한 해장국 집들을 잔뜩 볼 수 있다. 1500원에서 비싸야 3000원 남짓한 해장국 집들에는 할아버지들이 가득차 있다. 조금만 더 가면 길거리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바둑과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훈수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있다. 



종각 지하철역이나 종로2가 버스정류장에 내려 낙원상가 방향으로 걸어오면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 보이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인사동에 관광 온 젊은 외국인들과 낙원상가에 악기를 사러온 뮤지션들, 서울 도심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유진식당은 그 사이 한가운데에 있다. 





탑골공원에 모여앉은 노인들을 자본주의 시대의 퇴적물로 이해하건, 낙원상가를 찾은 젊은 뮤지션들을 낭만과 미래가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예쁜 꿈으로 치장하건 그들 모두는 배가 고프고 돈이 없다.


그래서 유진식당의 미덕은 '싼 가격'이다. 사실 그게 거의 가장 완벽하면서도 유일한 미덕.


# 장정 3명이 아무리 흥청망청 먹어도 5만원


가장 최근의 유진식당에서 주문한 내역을 떠올려보니,


[소수육 2접시 + 녹두부침 1접시 + 냉면 곱빼기 2그릇 + 소주 2 병]


이렇게 해서 45,000원이다. 





쥐꼬리 같은 연금이나 자식들에게 눈치받아 받은 쥐똥만한 용돈을 쥔 노인들이 모여앉아 

설렁탕 한그릇에 막걸리 한사발. 유진식당의 단골들이란 그런 노인들이니 이보다 비싸질 수는 없을게다. 

(냉면 가격은 비교적 최근에 올랐다. 얼마 전까지는 냉면도 4천원이었다.) 


장정 둘이 앉아 배가 터질 것 같이 먹고 술도 알딸딸 올랐건만 고작 5만원도 나오지 않는 것. 이것만한 미덕이 어디 있을까. 요즘 냉면집이라고 하는 것들이 죄다 한 그릇에 만 몇천원씩 받아가니까, 냉면에 만두 한접시만 먹어도 5만원 돈은 훌쩍 넘어버리기 십상이다. 


(며칠 전에 갔던 강남 평양면옥에서 냉면 2그릇, 만두 한접시를 먹고 똑같은 돈을 냈다. 4만 5천원.)


사실 유진식당의 냉면맛은 그렇게까지 훌륭하지 않다.





육수는 슴슴한 맛 대신에 진하고, 높은 염도가 그대로 느껴지는 편이고, 육향도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다. 

면도 메밀 함량이 조금 부족해 평양냉면이라기엔 면이 탱탱한 편이다. 자고로 냉면은 입술로도 끊어질만큼 부드러워야.ㅋ


하지만 가성비로만 따지면 서울시내 모든 냉면집 중 으뜸. 7천원에 이만큼 맛있는데 사실 이러니 저러니 토다는 것도 나쁜 짓인듯. 게다가 소주와 막걸리가 2천원이라니. 


유진식당은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충분히 즐기기 위해선 낮부터 앉아 놀아야 한다. 

그야말로 낮술 특화 업체.



# 삼각주


사실 이정도 가성비와 맛을 담보해내는 가게들은 꽤 많다. 아.. 꽤는 아니고, 그래도 좀 있다..ㅋ


유진식당을 좋아하게 된 건 처음으로 식당에 갔던 날의 풍경 때문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애 하나가 냉면에 소주를 먹고 있었다.

수염은 길렀다기 보다는 자르지 않은 모양이어서 자세히 보면 꽤 앳된 얼굴이었다. 잘 봐줘여 스물 예닐곱. 야상잠바에는 땟국물이 막 줄줄 흐르고 있었고, 신발도 다 떨어진 컨버스 단화였다.


그 남자애가 소주를 먹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냉면은 정말 맛있게 먹더라.


바로 옆 테이블엔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어린 남자애가 소리내 울기 시작하면 꼰대적 마인드로다가 잔소리나 시덥잖은 위로라도 할법한 상황이었지만 늘상 보는 일이라는 듯이 슬쩍 한 번 흘겨보고는 자기 설렁탕에 집중하더라. 니가 울건 말건 나는 설렁탕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듯.


울고있던 남자애도 그 남자애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던 할아버지도 사연은 모른다. 


그 날 나와 친구들은 술을 마시면서 그 남자애는 기타를 팔았을 거라는 둥, 그 돈으로 평소에 좋아하던 냉면을 먹고 있는 거라는 둥, 할아버지는 옛날에 이미 기타를 팔아본 경험이 있을 거라는 둥 온갖 소설을 짜내봤지만 몽땅 다 지루한 클리셰고. 


다만 그 기묘한 대비. 눈물을 흘리는 젊음과 그걸 이해해서인지, 무감해서인지 모를 노인의 무관심.


그 둘이 대비돼 보이기도 묘하게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장소.

퇴적물들이 모여 이룬 일종의 삼각주 같은 느낌. 


# 퇴적됐거나, 퇴적되고 있거나, 퇴적될 것이거나


오근재는 탑골공원을 '퇴적공간'이라고 불렀다.

공인된 조직에서 일정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 


우리는 종종 '노인'을 나이든 사람.으로 규정하지만, 사실 나이듬이란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다.

"더이상 당신은 우리사회에 필요없어"라는 표딱지 같은 거.


그래서 탑골공원 언저리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 나이를 떠나서 노인일지 모른다. 더이상 사회의 호명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 일정한 수입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 공인된 조직에 편입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 지금 우리는 급류에 휩쓸려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언젠가 하류에 모여 결국 퇴적될 모래더미. 그러니까 퇴적되거나 퇴적되고 있거나 언젠가는 퇴적될. 그렇게 모인 모래더미들이 쌓여있는 삼각주에서 마침내 만날. 


그 때가 되면 유진식당에서 싸구려 냉면과 소주를 놓고 만납시다. 

하지만 지난 시절의 영광을 얘기하진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