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1 - 신촌, 인간실격패 알고보니 부전승


블로그의 가장 큰 미덕은 알찬 정보의 손쉬운 전달이라는데
내 블로그는 그동안(고삐리때 쓰던 블로그인부터 싸이월드와 이글루스를 거치는 동안 내도록) 허랑방탕한 자학일기와 누구나 아는 시시껍절한 정치얘기, 되도않는 내 멋대로의 영화얘기가 주를 이뤘다. 그건 인터넷 클릭질 몇 번으로 얻을 수 있는 남의 얘기들이거나, 아니면 남이 관심없는 얘기들. 그래서 오랫동안 기획했던 정보전달의 글쓰기, 술집 유랑기.를 연재하기로 맘 먹었다.('오랜 기획'은 뻥이다.ㅋ 어제 술마시다 찍은 사진 몇 장에서 불현듯 떠오른 기획이라 얼마나 갈지는 나도 모른다.ㅋ)

이렇다할 전공지식도 없고, 그렇다고 어느 한분야에 대한 덕질도 변변치 못하여 할 수 있는거라곤 주야장창 찾아다니는 술집 유랑기뿐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술집 고르는 솜씨는 좀 매의 눈이다. 내가 추천하는 술집에서 시덥잖은 반응을 보인 사람은 거의 없다능. 이건 팩트다.ㅎ (사실 이것도 주변에 취향이 비슷한 사람만 모여 있어서 그런거임.ㅋ)

어쨌든 연재 그 첫번째의 영광을 차지한 곳은 신촌의 '인간실격패 알고보니 부전승'
오랫동안 단골로 발길을 하던 곳 중에서 심사숙고끝에 골라 연재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으나 말했다시피 어제 술먹다 찍은 사진때문에 급조된 기획이므로 그냥 어제 술마신 집부터 시작이다.ㅋ 그렇다고 마구잡이 함부로 골라 시작하는건 아니다. 여기 되게 좋다.



가게 전경이다.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는 그대로 두고 고개만 돌려 찍은 무성의한 사진이지만 사실 저게 가게의 전부다.



지금은 사라진 신촌의 기찻길을 즐겨 찾는다. 이젠 많이 줄었지만 기찻길을 따라 늘어섰던 고깃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근처의 헌책방, '숨어있는 책'에서 남들이 20년전에나 읽었을 법한 책들을 사모으곤 한다.(사모을 뿐 읽지는 않는다는게 함정.ㅋ)


그 날도 그렇게 헌책방에서 시간을 떼우고 나서는 중이었다. 늘 뭐하는 곳인지 몰라 관심도 두지 않던 골목 한켠의 건물에 왠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명의는 이외수 선생이었는데 내용인즉슨

"세상엔 거지와 거장이 있다. 예전엔 거지도 거장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엔 거지만 있고 거장은 없다. 거장이 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거지의 단계를 지날 수밖에 없는데, 예전엔 이 아직 거장이 되지못한 거지에게 공술과 외상술을 주던 술집이 빈번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채 거장이 되지 못한 거지에게 술과 음식을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기형도나 고흐쯤으로 여기는 젊은 예술가를 빙자한 청년루저들이 봤으면 눈을 희번덕거렸을 그 글줄에 나도 눈을 희번덕거리다 가게로 들어섰다. 그게 이 곳과의 첫 조우.



뒷모습만 보이는 파마머리가 사장님이다. 저 테이블에도 뭔가 악기를 가져가서 연주해주시는 중이었다.



입구부터 시끌시끌하더니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별반 신경쓰지 않는다. 조금 지나서야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과 정체모를 악기를 두드리던 사장님이 나타나선 술은 알아서 꺼내 먹고, 안주는 그날 그날 가능한 안주 한가지만 있으니 먹으려면 먹고 말라면 말라고 한다. 영 마땅치 않으면 시켜 먹거나 사다 먹어도 되고,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그냥 앉아서 놀다가 가도 된단다.

이거 문자로 옮겨놓고나니 엄청 불친절하고 거만한 그림이 그려지지만 전혀 아니다. 저건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어투였고 불친절보단 '편할대로 거리낄 것 없이 놀다가세요'의 뉘앙스였다. 옳커니.


술을 마시고 있자니 사장님이 뭔가를 들고 다가와선 말을 건다. 그는 음악치료사로 일을 하는 뮤지션이고 이 공간은 낮엔 작업실로, 밤에는 술집이 되는 곳이란다. 그러면서 연주해주는 이름모를 악기. 네팔에서(티벳이었나) 건너왔다는 그 악기는 집에 손님이 오면 환영하는 의미로 연주해주는 악기란다. 그리고는 밥그릇 모양이지만 굉장한 소리를 내던 악기와, 가야금을 닮았지만 전혀 다른 소리가 나던 악기, 실로폰을 닮았지만 역시 전혀 다른 소리가 나는 악기까지 보여주고 연주해준다. 아주 신났다.(내가 신난건지, 사장님이 신난건지는 밝히지 않겠음ㅋ)


입구현판이다. 치밀한 스토킹짓으로 사장님 블로그를 찾아내서 말없이 훔쳐왔다.ㅋ 하지만 예상컨데 아마 사장님도 이 블로그를 발견해낼 것 같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응?


이런저런 텍스트가 여기저기에 붙어있다. 온갖 말들이 하고자 하는 단 한마디는 좀 더 편하게, 맘대로, 자유롭게.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규칙. 그것이 서로가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통제하고 재단하고 규격화시키려는 꼰대들의 규칙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비껴가려는, 사실 술도 그래서 마시는 거잖아. 일탈. 먹지말라니까 더 먹고 싶어지는게 술과 담배인건데. 어쩌면 이렇게 거창하게 일탈이니 자유니 하는 진부한 말들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공간은 아니구요"라고 그는 말할지 모르겠다(처음 갔을때 그가 한 말 그대로다.기대속에 들어왔다니 이렇게 말했다) 그냥 놀자고 만든 공간이지만, 사실 그 '그냥'이 중요한거 아닌가. '그냥'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그냥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상은 인간실격패를 주겠지만, 그건 사실 알고보면 부전승.ㅋ

다음 덤벼라, 계속 그냥 살아주마.ㅋ





같이 갔던 후배들. 초상권따위 난 몰라요.




++
아, 앞으로 이 연재엔 공간에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은 노래를 하나씩 붙여줘야겠다.
(길게 주절거릴 것도 없이 오토플레이 시켜놓으면 페이지를 보자마자 노래가 나오겠지?ㅋ)

 
 

절룩거리네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