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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18 - 갑자기 떠난 보령 기차여행


언제나 그랬듯이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바람 쐬러.란 말이 가장 정확한 나들이의 이유였다.
어디라도 좋으니 무작정 뜨고 싶었고, 기차가 타고싶었고, 항구가 보고싶었다.
그렇게 장항선 노선을 살펴보다 무심결에 클릭한 청소역.
역 이름과, 열차 시간과, 운임과, 청소가 장항선에서 가장 오래된 역이라는 정보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채 출발.
 





기차는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멀리가는 기차는.
철도원이나 편지같은 영화와 많았던 드라마가 심어준 간이역에 대한 환상은 그냥 환상이다.
간이역은 그냥 간이역이다. 다만 여기 내리는 승객은 나 혼자였고, 역장 아저씨 혼자서 역을 지키고 있었고, 하루에 정차하는 기차가 단 세 대뿐이라는 것쯤.ㅋ

기차여행에 대한 추억은 아마 대성리나 강촌으로 가는 경춘선 엠티코스가 가장 흔하겠지만,
내 기차여행의 추억은 통일호 입석 밤기차를 타고 강원도 어딘가로 가던 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다. 얼마전에서야 엄마에게 들으니 그 여행은 동네 아줌마들이 아저씨들을 죄다 따돌리고 애들만 데리고 몰래 떠났던 낭만 여행. 그러고 보니 그 때 엄마를 비롯한 그녀들은 삼십대였구나.



관광안내도를 보고 찾은 항구는 오천항이다. 무려 '보령 8경'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을 관광안내도에 박아뒀더라만, 사실 딱히.

항구가 보고싶었던건 아마 어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인것 같다.
글줄이나 읽었다며 세상아 덤비라 선언하는 한량들에 비한다면 자연에서 삶을 영위하는 어부들은 얼마나 위대한가. 심지어 그들은 종종 그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에 잡아먹히기도 하는데. 매 순간 거대한 존재 앞에 겸손해질 마음. 그런 의미에서 농부와는 또 다른 위대함.



어느 항구나 마찬가지지만, 항구 곳곳엔 폐선박들이 널부러져있다.
물 위를 떠나는 순간 존재 자체가 의미 없어지는 것들.
'영광'이란 이름의 폐선이 기묘했다.
낡은 영광을 부여쥐고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다.


항구 바로 옆에는 충청 수영성이 있다.
요즘 말로하면 충청지역 해군사령부쯤 되는건가.
건물들은 거의 다 소실됐고 성벽과 사진의 건물 한 채만 남아있다. 진휼청이라던가.
그나마 그것도 설계도면을 보고 진휼청일 것이라고 유추한 거란다.

뭐, 이런 저런 것들에서 자꾸 떠오르는 말은 '지나가면 사라질 것들'이었다.



수영성에서 본 오천항 전경.

그리고 이 사진을 찍다가 겨우 깨달은 사실은 오천항에서는 바다로 떨어지는 낙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오천항은 방조제앞 만에 만들어진 항구인 것이다.
서해인데 무려 낙조를 못 볼 수는 없었다. 결국 의지해야 할 것은 다시 관광안내도. 보령은 관광객 유치에 꽤나 열을 올리는건지 가는 곳곳마다 대문짝만한 관광안내도가 세워져있다.
감사함미다 보령군수님(시장인가?).




관광안내도의 은혜를받아 학성 해변으로 건너왔다.
지도상에선 방조제만 건너에 바로라 엄청 가까울줄 알았는데, 멀다. 겁내 멀다.
이 먼 길을 찾아오는 파란만장 버라이어티한 과정이 사실 이번 나들이의 핵심 얘깃꺼리지만,
그건 패스. 너무 구차하고 힘들고 길다.

다만 깨달음은 남한은 돈으로 안되는게 없는 사회다. 시골은 서울에 비해 굉장히 불편하다. 쯤이랄까.ㅋ 





여하튼 사람 한 명 없는 학성리 해변을 이리저리 어슬렁 거리며 노래부르고 담배피고 사진찍고.
오래된 기차역과, 폐선과, 늙은 어부와, 사람없는 서해바다와, 낙조는 앞으로의 일 보다 지나간 시간들을 더 떠올리게 한다.

다만 누구나 저리 아름답게 저물 수 있는 것도, 끝마쳤기때문에 내일이면 찬연하게 떠오를 수 있는것도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있다.

무려 새 해인데 동해로 가서 일출을 볼걸 그랬나.ㅋ


하루에 세 번 있는 차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역 앞 다방에 들었다.
나 스타벅스는 안가지만, 별다방은 가는 남자임.

한참을 혼자서 멍하니 앉아있자니 주인 아줌마가 누구 기다리고 있냐고 묻는다. 기차시간 기다리는 중이라고 대답하는데 왠지 웃겼다. 기차를 기다리든, 사람을 기다리든 기다리는 사람 얼굴은 매 한가지일텐데, 저 아줌마는 내가 당연히 사람을 기다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내가 어지간히 외로워 보이거나, 그 아줌마가 늘 사람 곁에서 살아가거나.

커피를 시켜놓고 남자의 자격을 보면서 낄낄거리다 문 닫는다는 주인아줌마의 압박에 계산을 하려는데 아줌마가 눈을 부라린다. 카드 결제가 되는 다방이 어딨냐며. 천 오백원짜리 커피마시고 카드 내밀면 어쩌냐며 짜증을.
700원짜리 삼각김밥도 카드로 결제하는 나지만, 왠지 엄청난 대죄를 지은 것 같아서 굽실굽실. 결국 다음에 드리기로 했다. 다음이 도대체 언제일까.





밤의 청소역은 오전과는 또 다른 모습.
일리가 없잖아. 그게 그거지.ㅋ 다만 이번엔 같이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역장아저씨 퇴근을 기다리는 이미 전작이 있는 친구가 사무실에 역시 있었다는게 오전과는 다른 점.

나보다 먼저와서 대합실에서 책을 읽고있던 저 청년은 내가 대합실에 들어가니 인사하면서 난로를 내 쪽으로 밀어줬다. 어색하게 고맙습니다.  무려 잘생겼었는데. 돌아오는 기차에서 몇 마디라도 좀 더 해볼걸. 난 늘 이런게 문제.


어쨌든 이렇게 갑작 나들이는 끗.
알콜 한 방울 섭취하지 않은 건전하고 바른 나들이 문화를 지'양'합시다.
역시 여행의 매력은 알콜.



++덧



오천항 일대를 휘적거리다 셀카 한 장.
얼굴을 가리니 미남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