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그 길은 무슨 맛이에요? - 아이다호 , My own private Idaho





길이란 떠남을 전제로 머무는 곳이다. 누구도 길을 향해 가지 않는다. 길을 통해 걸을 뿐이다. 어쩌면 삶도 마찬가지다. 떠남을 전제로 머무는 곳. 그래서 누구는 삶은 여행이라고 노래했나 보다. 삶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걷는 길에 더 닿아있을 것 같다.

마이크의 길, His road.

“이 길은 어디로든 갈 수 있지. 난 도로의 감식가야, 평생 이 길을 맛보며 살아갈 거야.”

삶의 정체가 여행이고, 방황이고, 어딘지 모를 어딘가를 향해 가기만 하는 것이라면 길 위를 삶의 지대로 삼은 마이크의 ‘길의 삶’이야말로 본질에 가장 가까운 삶일지도 모르겠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는 길을 맛보며 살아가는 길의 감식가는 사실 삶이라는 여행, 세상이라는 길 위에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이고 동시에 바람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에, 예상치 못한 시간에 쓰러져 역시나 예상치 못하게 깨어나고 또 일어서는 기면증. 어느 상처가, 어느 사건이, 또 어느 누군가에게 상처를 좌절을 절망을 얻어맞고 넘어지고 잠들었다가 어느새 다시 깨어나고 일어서는 삶이라는 길 위의 기면증 환자들. 그러나 길 위에 잠든 마이크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고 깨어날 때까지 지켜봐 주고 안아주는 스콧. 우리의 길,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도 깃들어 있을 그 스콧들.





스콧의 길, His ways.


“난 돈을 받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어. 널 사랑해, 돈은 내지 않아도 좋아”

그래서 마이크도 우리도 스콧을 사랑 할 수밖에 없다. 길 위에 지쳐 잠들어도 날 지켜주는 그 스콧을, 돈을 받지 않아도 사랑한다. 스콧은 잠든 내 머리맡을 영원히 지켜줄 거라고, 이 길 위를 계속해서 함께 걸어가 줄 거라고.

그러나 사실 스콧은 없다. 스콧의 길은 삶의 지대보단 차라리 한 번의 외유. 스콧에게 길이란 머물 곳으로 가는 도중. 마이크의 길이 어딘지 모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끝이 없는 길이라면 스콧의 길은 목적지로 가는 여러 형태의 과정들. 언젠간 길의 끝, 집 안쪽 울타리 안에서 담장 밖 길 위의 삶들을 바라보겠지. 다른 이들처럼. 자신과는 다른 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렇게 길 위에 마이크를 남겨두고 떠나가겠지.

청춘을 돌려다오

그러나 사실 마이크는 없다. 평생 길을 맛보고 살아가는 방황과 청춘은 없다. 모두 어딘가를 향해 바삐 걸어갈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 마이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차라리 스콧에 가깝다. 우리는 마이크를 버려두고 언젠가는 담장 안쪽의 세계를 향해 갈 테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지금 잠든 마이크의 머리맡에서 담장 안쪽의 세계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써 ‘우리’라고 말했지만 사실 스콧을 닮은 건 나다. 꿈이니 청춘이니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이니 그저 잠깐, 마이크의 곁에서 마이크를 품 안에 안고 있는 동안에나 지껄인 허황한 ‘말’이다. 나는 길 그 자체보다 길의 끝을 상상하고 있다. 그래서 난 날 닮은 스콧이 싫었다. 다시 마주친 길에서 차창 너머로 마이크와 눈이 마주쳤을 때, 담담하게 바라보던 마이크의 눈과 달리, 미안함인지 미련인지 자괴인지 모를 끈적거리는 눈빛을 보이던 스콧이 싫었다.

청춘을 돌려주세요. 아니, 사실 내게 청춘이 있기는 했던 걸까. 내게도 머물지 않고 늘 변화하는 길 위의 삶이 있기나 했었을까. 그렇다면 언젠가는 나도 어딘지도 모를, 아니 어쩌면 있지도 않은 길의 끝이 아니라 내 발밑의 길에서 살아가고 잠들고 깨어나는 솔직하고 본격적인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계속 막연히 마이크를 동경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어느 만화책에서 보니 동경은 이해와 가장 먼 감정이라던데.





리버는 마이크가 돼버린 걸까?

방황과 좌절의 무채색 청춘의 아이콘, 리버는 정말 마이크가 돼버린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의 소실점을 보게 되면 여전히 또 영원히 길을 걷고 거기서 잠드는 리버를, 마이크를 그린다

100109


1. 용산 참사의 영결식이 오늘에서 열렸다. 요 며칠간에 비해 오늘은 날씨가 좀 따듯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는 산 사람들의 몫이다.

2. 만화책 리뷰를 하나 써야해서 이것 저것을 뒤적거리다 결국 '오디션'을 다시 봤다. 로이 부캐넌을 아버지로 여기는 미소년 기타리스트는 역시 섹시하다. 그러나 역시 오디션 최고의 장면은 '나 득음 안할래 누나'를 외치는 래용이.
무릇 자기가 가진걸 알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힘 빼. 힘 빼.

3. 바야흐로 스물여섯. 이 겨울은 다시 성장의 계절이다.

4. 수다 떠는 새 미지근해진 맥주병을 사이에 두고 담배연기 넘어로 희미한 시선을 부딪히는 즐거움이 그리운 즈음이다. 배경음악은 로이부캐넌도 좋고 김광석도 좋다.

5. 선덕여왕이 끝나고 당분간 드라마와는 작별할 생각이었는데, 실수로 추노를 보고야 말았다. 한동안은 여기에 빠져 살게 될 것 같다. 제길.

6. Vecchia Verna는 낡고 허름한 청춘이다. 본래 청춘은 허름하고 낡았다. 반짝반짝 윤이나는 예쁜 청춘 같은건 없어.


Roy Buchanan - The Messiah Will Come Again

Roy Buchanan - The Messiah Will Come Again from http://athazagora.vox.com/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 삶의 한쪽 귀퉁이에 남은 주름이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주름이나 흔적처럼 살다가 사라진다. 목이 메고 마음이 애잔해지는 것은 모두 늦여름 골목길에 떨어진 매미의 죽은 몸처럼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분의것에 불과한데, 지난 몇년간 나는 거기에 너무 마음을 쏟았다. 이젠 알겠다. 역사책의 갈피가 부족해 거기까지 기록하지않은 게 아니었다. 마음 둘 필요없는 주름이나 흔적이기 때문이다. (p51)

─ 그날 밤, 내 머릿속에는 뒷산에 꽃아두고 온 모종삽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비스듬하게 땅에 꽃혀 있을 모종삽. 그 모종삽처럼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꽃아두고 온 것들. 원래 나를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들. 그런 것들. (p80)

─ 그해 겨울, 나는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p131)

─ 인생이란 취하고 또 취해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여름난 같은 것. 꿈꾸다 깨어나면 또 여기.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곳.(p164)

─ 이슬이 무거워 난초 이파리 지그시 고개를 수그리는구나. 누구도 그걸 막을 사람은 없구나.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래서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나는구나. 다시 돌아갈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로구나.(p242)


청춘이라니. 아. 이 손발이 오그라드는 제목이라니.
하지만 아. 청춘, 이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후덜거리는 낱말이라니.

청춘은 마치 흑백필름 같다며 우리 청춘의 이야기를 흑백으로 찍어버린 어느 영화 감독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실 그렇다. 청춘을 마치 신록과 5월과 강렬한 햇빛과 예쁘고 고운 기억들로 치장하는 이 있다면, 장담컨데 그는 청춘을 살아보지 않은 자일테다.

청춘은 무채색이고 괴롭고 또 외롭고 아무일 없이 무료하고 무기력하며 작은 일에 분노하고 기뻐하며 자신의 사랑만이 오직 세상에 유일한 사랑이라 여기는 오만하고 어리석고 여리고 가여운 시절이다.

하지만 살아가며 어느 한 순간이라도 오만하고 어리석고 여리고 가엽지 않은 순간이 있을까. 그래, 우리는 늘 청춘의 가운데를 살고 있다. 아니 삶은 곧 청춘일지도 모른다.


삐뚜루 보면야 암것도 아닌 얘기들이지만 김연수의 스무살 시절들에 적잖이 위로받는건 사실이다. 허겁지겁 밑줄까지 쳐가며 읽은 책을 덮고나니, 이렇게도 허망할수가. 남는게 없다.
그야말로 청춘의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