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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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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젤 밑바닥인 거 같지? 아냐. 바닥같은 건 없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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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눈을 감고 날 꼭 끌어안는다. 어떻게든 이 행위에 집중하려 애쓰지만 시커먼 건물의 그림자나 길 위에 널브러진 캔, 구겨진 종이나 담배꽁초 따위에 수시로 마음이 상한다. 벌거벗은 몸뚱이만 남은 사랑이 실은 이런 끔찍한 모습일 수 있다는 게 속상하다. 이 감정이 우리를 얼마나 더 구차하게 만들 수 있나.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몸을 비비고 움직이는 걸 멈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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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여자가 있었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걸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주먹 크기 만한 덩어리를 굴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다할게 만들 수 있었다. 기대와 가능성 따위는 쉽게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지자 그것들은 쉽게 허물어졌다. 여전히 그런 걸 희망이라 부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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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그런 말을 내뱉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게 내 진심인지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건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버릴 말들을 함부로 지껄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순간엔 또 나는 기어이 말하고 만다. 이젠 너무 많이 말한 탓에 닳고 바라고 헤진 말들을. 더 이상 여자와 내게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말들을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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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묻고 싶어진다. 사는 게 고통스러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삶이 아니라 죽지 않고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 내가 얼마나 더 구차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없다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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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가늠해본다. 한때 환한 등대 아래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있다. 그곳에 닿으려고 악착같이 매달렸던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역사의 불빛 대신 그것을 단단히 움켜쥔 거대한 어둠을 본다. 더는 그것의 깊이와 너비를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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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바닥이라고 누가 그러든. 바닥이 더 깊은 곳에 있다면, 지금 있는 여기가 바닥이 아니라면, 그럼 여기서 지금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그것을 여전히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는 몸을 비비고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희망이라고 부르든, 그것이 멈춰버리면, 그저 거대한 어둠. 


밤새도록 책을 읽은 게 얼마만이지. 그 눅눅하고 오갈데 없는 못난 사랑 얘기에 눈이고 마음이고 빼앗겨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