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6 종로 - 락커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암굴같은 입구다. 롤링스톤즈며 밥 딜런, 데이빗 보위의 사진이 붙어있는 입구를 지나 들어가면 담배연기 자욱한 가운데 듬성듬성 테이블이 몇개 널부러져 있다. 음악소리가 크게 들려오는데 묘하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고요함에 가깝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테이블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인장이 그런 테이블을 딱히 자제시키는 것도 아니건만 소란스러움은 아니다. 끈적거릴만큼 친밀하지도 않고 버름할만큼 데면데면하지도 않다.


# Midnight In Rock'n Roll


자고로 락스타란 불꽃처럼 살다가 떠나버려야 한다. 벽에 똥칠하며 오래도록 사는 건 락스타의 의무가 아니다. 그러니까 60년대의 3J처럼. 


락커스에 처음 갔을 때 쯤 도어즈의 노래가 나왔다. Light My Fire. 

짐 모리슨처럼 살고 싶었는데.


락커스의 벽에는 어느 시대를 살았던 어느 락스타들의 사진이 잔뜩 걸려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누구인지를 특정할 필요는 없다. 다 락스타다. 무언가를 부쉈고 자기가 부서지는 삶을 살았던. 





락커스에는 주로 3차쯤, 그러니까 술도 좀 오르고 이야기거리도 좀 떨어졌을 때 가곤했다. 그래서 락커스에서의 대화는 주로 벽에 붙어있는 락스타들의 시시껍절한 이야기들. 그러니까 주다스프리스트의 롭 할아버지와 프레디 머큐리가 서로를 놀려대고 씹어대던 이야기나 (롭 할아버지가 "프레디는 모터사이클 대회에 나가서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자 프레디가 "그가 발레수트를 입고 발레공연을 한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던)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의 러브스토리 같은 얘기들에 멋대로 온갖 스토리를 가져다 붙이며 낄낄거리며 놀아대는. 약에 찌들어 자살한 락스타는 사랑할 수 있지만 무병장수하며 옛날노래로 투어나 도는 할배들은 용서할 수 없다며 놀아대는.





길 건너 종로통에 온통 소몰이 목동들이 흐느끼는 노래만 나오는 호프집이 가득하다. 간판도 막 소리를 지르고 있다. 들어오라고. 그 골목에서 한블럭만 도망치면 롹스피릿이 이렇게나 충만한 곳이 있다. 심지어 사장님은 존 레논을 닮았다. 정말이다. 깜짝 놀란다. 그래서 과장을 한움큼 정도만 보태서 얘기하면 락커스의 암굴같은 입구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시간이 건너뛰는 그 골목과 같다. SG워너비에서 도망쳐 진자 사이먼앤 가펑클을 만나러 왔습니다.


신청곡을 많이 내지는 않지만 가요만 아니라면 장르불문 거의 대부분의 신청곡을 다 틀어주는 편이고, (가끔 가요도 틀어준다. 그렇다고 SG워너비나 휘성 같은 걸 틀어주진 않아요) 신청곡 리스트에서 파생돼 주인님이 틀어주는 음악도 좋다. 마치 "너네 이 노래도 좋아하지?" 하는 것 같이.



 # 나만 알고 싶은 집





좋아하는 술집 중에 누구든 다 같이 가서 술마시고 싶은 집이 있는가 하면, (이를테면 전봇대집은 누구라도 함께 가고 싶은) 되게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나누고 싶은 집이 있다. 락커스는 후자. 그러니까 비장의 술집이라는 거다. 이미 유명할대로 유명(하다고 하기에 홍대와 강남이 더 익숙한 제 또래의 친구들은 아무도 모르더라만요)한 곳이지만 그래도. 


락커스는 이상하게 내밀하고 (어두워서 그른가) 묘하게 안락하다 (의자가 그렇게 작은데도!!). 어느 날 내가 술마시자며 락커스에 함께 가면 그 쪽을 되게 좋아한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막 의미를 부여해야 뭐라도 걸릴 것 같아서.ㅋ)



# 그 때


락커스에 가장 많이 드나들던 건 한 7~8년 전쯤. 그 땐 사흘에 한 번이 멀다하고. 낙원상가 옥상에 서울아트 시네마와 필름포럼이 있고, 인디스페이스는 중앙극장에, 시네코어도 그 부근에 있을 무렵이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살았던 그 때를 나는 허송세월 기(期)라고 부르는데, 매일같이 저 위에 늘어놓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교보문고에 배깔고 누워 책을 읽었다. 낮에는 중앙극장 옆에 있는 싸구려 커피집에서 커피를 사서 명동성당에 앉아 있었고 낙원상가에서 1500원짜리 국밥으로 배를 채우다 날이 저물면 락커스에서 술을 마셨다. 전화기도 없어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돈도 없어서 늘상 걸어다녔다. 걷다가 공중전화를 보면 전화를 해서 누구를 불러내거나,(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동전을 산처럼 쌓아놓고 수다를 떨기도 했다.


허송세월이라고 말했지만 그 때는 참 소중했던 시절이다. 얻은 것만 있고 잃은 것은 없이 버린 것만 있는 때. 락커스는 그래서 좋다. 그 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공간들, 소리나 냄새, 마셨던 술이나 사람이 좋은 것.


그렇게 1년쯤 놀고 다시 복학하게 될 때 락커스도 문을 닫고 공사를 시작했다. 셔터에는 '봄이 오면 보자'고 써 있었나. 복학하고 봄이 오고 몇 달쯤 후 락커스를 다시 갔을 땐 내부 인테리어도 매우 멀끔해지고 공간도 더 넓어지고. 그래도 예전만 못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바뀌어야 하고 넓어져야 하고 깨끗해져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지난 것들에 천착하지 않고. 시절은 시절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술집도 내 삶도.



# etc


1.

하지만 락커스는 좀 비쌉니다. 근래엔 편의점에서도 온갖 수입맥주들을 쉽게 살 수 있으니 기네스 한 병에 만원을 받고 필스너우르켈 한 병에 9천원을 받는 락커스는 확실히 비싸요.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으니 다른데서 술을 원껏 마시고 막차로 가거나, 아니면 아껴먹어야 합니다. 락커스에서 술을 먹고싶은만큼 먹었다가 기둥뿌리가 뽑혀본 경험에서 드리는 충심어린 조언입니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기둥뿌리가 하나 없어요.


2.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다 말해놨지만 '나만 알고 싶은 술집'의 기조를 지키기 위해 약도나 정확한 위치 같은 건 공유 안합니다. 그냥 검색하세요. 찾기 엄청 쉬워요. 다만 일요일은 문을 닫습니다. 일요일에 갔다 낭패보지 마시길.


3.

락커스가 문을 닫았다면 그 옆에 '오존'이라는 맥주집도 좋습니다. 이 연재에 끼워줄만큼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아요. 동행인이 에어로스미스보다 림프비즈킷을 더 좋아한다면 오존 쪽이 더 괜찮을 겁니다. 거긴 밥도 팔아요. 맛은 없지만.


4.

늘 그렇듯이 사진은 인터넷 어드메에서 불펌. 그래도 한 장은 직접 찍은 사진임니다. 친구랑 술마시다가, 쟤는 지 사진이 이렇게 쓰이는 줄 모르겠지. 초상권 따위 난 몰라요.ㅋ


5.

스토리지 사이트가 유료화되면서 음악을 올릴 방법이 없네. 기껏해야 유튜브 링크. 



   

       

 


The Doors - Light My Fire 



가는데라곤 술 마시는 집밖에 없어요 Vol.4 종로 - 유진식당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퇴임을 한 후 나는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했다. ‘탐사’라고 하는 까닭은 나의 발걸음이 내 안에 고인 어떤 질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하는 동시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갑자기 고독이 밀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이 뒤따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섰다."

오근재 - '퇴적공간'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내려 인사동 방향으로 걷다보면 낡고 허름한 해장국 집들을 잔뜩 볼 수 있다. 1500원에서 비싸야 3000원 남짓한 해장국 집들에는 할아버지들이 가득차 있다. 조금만 더 가면 길거리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바둑과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훈수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있다. 



종각 지하철역이나 종로2가 버스정류장에 내려 낙원상가 방향으로 걸어오면 같은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 보이는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인사동에 관광 온 젊은 외국인들과 낙원상가에 악기를 사러온 뮤지션들, 서울 도심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유진식당은 그 사이 한가운데에 있다. 





탑골공원에 모여앉은 노인들을 자본주의 시대의 퇴적물로 이해하건, 낙원상가를 찾은 젊은 뮤지션들을 낭만과 미래가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예쁜 꿈으로 치장하건 그들 모두는 배가 고프고 돈이 없다.


그래서 유진식당의 미덕은 '싼 가격'이다. 사실 그게 거의 가장 완벽하면서도 유일한 미덕.


# 장정 3명이 아무리 흥청망청 먹어도 5만원


가장 최근의 유진식당에서 주문한 내역을 떠올려보니,


[소수육 2접시 + 녹두부침 1접시 + 냉면 곱빼기 2그릇 + 소주 2 병]


이렇게 해서 45,000원이다. 





쥐꼬리 같은 연금이나 자식들에게 눈치받아 받은 쥐똥만한 용돈을 쥔 노인들이 모여앉아 

설렁탕 한그릇에 막걸리 한사발. 유진식당의 단골들이란 그런 노인들이니 이보다 비싸질 수는 없을게다. 

(냉면 가격은 비교적 최근에 올랐다. 얼마 전까지는 냉면도 4천원이었다.) 


장정 둘이 앉아 배가 터질 것 같이 먹고 술도 알딸딸 올랐건만 고작 5만원도 나오지 않는 것. 이것만한 미덕이 어디 있을까. 요즘 냉면집이라고 하는 것들이 죄다 한 그릇에 만 몇천원씩 받아가니까, 냉면에 만두 한접시만 먹어도 5만원 돈은 훌쩍 넘어버리기 십상이다. 


(며칠 전에 갔던 강남 평양면옥에서 냉면 2그릇, 만두 한접시를 먹고 똑같은 돈을 냈다. 4만 5천원.)


사실 유진식당의 냉면맛은 그렇게까지 훌륭하지 않다.





육수는 슴슴한 맛 대신에 진하고, 높은 염도가 그대로 느껴지는 편이고, 육향도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다. 

면도 메밀 함량이 조금 부족해 평양냉면이라기엔 면이 탱탱한 편이다. 자고로 냉면은 입술로도 끊어질만큼 부드러워야.ㅋ


하지만 가성비로만 따지면 서울시내 모든 냉면집 중 으뜸. 7천원에 이만큼 맛있는데 사실 이러니 저러니 토다는 것도 나쁜 짓인듯. 게다가 소주와 막걸리가 2천원이라니. 


유진식당은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충분히 즐기기 위해선 낮부터 앉아 놀아야 한다. 

그야말로 낮술 특화 업체.



# 삼각주


사실 이정도 가성비와 맛을 담보해내는 가게들은 꽤 많다. 아.. 꽤는 아니고, 그래도 좀 있다..ㅋ


유진식당을 좋아하게 된 건 처음으로 식당에 갔던 날의 풍경 때문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애 하나가 냉면에 소주를 먹고 있었다.

수염은 길렀다기 보다는 자르지 않은 모양이어서 자세히 보면 꽤 앳된 얼굴이었다. 잘 봐줘여 스물 예닐곱. 야상잠바에는 땟국물이 막 줄줄 흐르고 있었고, 신발도 다 떨어진 컨버스 단화였다.


그 남자애가 소주를 먹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냉면은 정말 맛있게 먹더라.


바로 옆 테이블엔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어린 남자애가 소리내 울기 시작하면 꼰대적 마인드로다가 잔소리나 시덥잖은 위로라도 할법한 상황이었지만 늘상 보는 일이라는 듯이 슬쩍 한 번 흘겨보고는 자기 설렁탕에 집중하더라. 니가 울건 말건 나는 설렁탕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듯.


울고있던 남자애도 그 남자애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던 할아버지도 사연은 모른다. 


그 날 나와 친구들은 술을 마시면서 그 남자애는 기타를 팔았을 거라는 둥, 그 돈으로 평소에 좋아하던 냉면을 먹고 있는 거라는 둥, 할아버지는 옛날에 이미 기타를 팔아본 경험이 있을 거라는 둥 온갖 소설을 짜내봤지만 몽땅 다 지루한 클리셰고. 


다만 그 기묘한 대비. 눈물을 흘리는 젊음과 그걸 이해해서인지, 무감해서인지 모를 노인의 무관심.


그 둘이 대비돼 보이기도 묘하게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장소.

퇴적물들이 모여 이룬 일종의 삼각주 같은 느낌. 


# 퇴적됐거나, 퇴적되고 있거나, 퇴적될 것이거나


오근재는 탑골공원을 '퇴적공간'이라고 불렀다.

공인된 조직에서 일정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 


우리는 종종 '노인'을 나이든 사람.으로 규정하지만, 사실 나이듬이란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다.

"더이상 당신은 우리사회에 필요없어"라는 표딱지 같은 거.


그래서 탑골공원 언저리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 나이를 떠나서 노인일지 모른다. 더이상 사회의 호명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 일정한 수입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 공인된 조직에 편입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 지금 우리는 급류에 휩쓸려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언젠가 하류에 모여 결국 퇴적될 모래더미. 그러니까 퇴적되거나 퇴적되고 있거나 언젠가는 퇴적될. 그렇게 모인 모래더미들이 쌓여있는 삼각주에서 마침내 만날. 


그 때가 되면 유진식당에서 싸구려 냉면과 소주를 놓고 만납시다. 

하지만 지난 시절의 영광을 얘기하진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