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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모처럼 정치 이야기.

어제는 누가 정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 고난도의 의사활동이 아니냐고 묻길래

정치는 인간이 가장 여상스럽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깃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정치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 것. 정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말 것.


암튼 이실직고하자면, 다른 용도로 쓴 글이었지만 애초의 용도는 폐기됐다. 들인 시간이 있어 버리기는 아까우니 여기라도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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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뉴욕 타임스는 ‘정치적 올바름의 패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올바름의 패배’라는 말은 자가당착이다. 트럼프를 선택한 이들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졌다. 소수자 인권을 옹호하고 의료혜택의 범위를 넓히고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진보-좌파가 선점했기 때문에 생긴 관념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주민보다는 자국민의 권익을 우선하고 시장을 활성화해 경기를 부양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의 정치적 선택이 올바르지 않다고 믿는 정치 주체가 어디 있겠나. 애초에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비근한 예로 워마드의 정치를 들 수 있다. 워마드에게 정치란 남성으로부터 권력을 앗아오는 일이다. 일부 언론에선 ‘남성혐오집단’라고까지 부르는 워마드는 여성인 자신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남성이 모든 권력을 쥐고 여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워마드는 그 인식 위에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운동과 정치를 한다. “좋은 한남은 재기한 한남뿐”이라는 구호가 그녀들이 추구하는 올바름을 지시한다. 그녀들 역시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흔히 속칭하는 ‘문빠’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들에게 올바른 정치는 문재인 혹은 노무현으로 대변되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통치를 지속하는 일이다. 이들이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민주당만이 올바른 정치주체이고 다른 세력들은 적폐이거나 ‘정알못’(정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이 문빠들에게 인권 감수성이 없고 노동을 천시한다고 아무리 쏘아붙여봤자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범주란 이토록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 중 가장 무겁고 강한 힘을 지닌 것은 올바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하지만 신념이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오류의 가능성은 의심에서 출발하지만 애초부터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신념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의심이 없기 때문에 신념은 강한 동력을 낳는다. 따라서 신념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는 건 언제나 혁명이나 종교 같은 ‘일방향’의 운동이다. 옳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고, 옳기 때문에 굽힘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운동. 반면 정치의 영역에서 올바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다름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올바름’이란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 쓰는 말이지 ‘다방향’의 운동인 정치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본질이란 제각각의 주체가 물고 뜯고 싸우고 화해하며 각자의 삶을 증명하고 견주는 투쟁이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인지 묻고 답하며 끊임없이 삶과 살을 맞대고 부비는 일. 따라서 정치에서 어떤 올바름은 어떤 곳에선 필연적으로 그르다. 어차피 ‘올바름’이란 인식의 문제다. 어디서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은 가변하게 마련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허위 개념의 문제는 ‘올바름’ 바깥을 상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 올바름은 의심과 사유의 언어가 아니기에 자신의 올바름이 성립하는 순간 그 바깥을 사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정치에 사유 대신 신념이 스미는 순간, 정치는 종교로 변한다. 세상의 모든 모순을 남성의 젠더권력에서 찾으려는 워마드의 인식은 여성을 억압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의 교차를 외면하는 오류를 배태한다. 이 외면은 결국 그녀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여성의 해방에서도 멀어지는 결과를 만든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억압의 기재가 젠더문제에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채롭다. (조악한 예일 수 있지만) 여성 고용주의 갑질에 핍박받는 여성 노동자는 상대가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투쟁할 수 없을까? 여성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워마드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위일까? 한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올바름을 강변하는 태도가 다른 이들의 인권을 짓밟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국에서 생명을 위협받아 한국으로 온 예멘의 난민들을 남성이라는 이유로 다시 사지로 몰아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논리적으로 마땅히 의심하고 고민해야 할 오류들에 대해 적어도 오늘까지의 워마드는 대응하지 않고 있다. 올바름에 대한 신념화가 오류를 수정할 기회마저 앗아간 셈이다. 


(워마드는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을 PC(political correctness)충이라고 조롱한다.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행동하면서 상대의 옳음을 조롱하는 촌극.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혁명가 레닌이다. 혁명가였던 레닌은 혁명의 성공 이후 정치가가 됐고, 정치에서 올곧은 ‘올바름’이란 개념은 성립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생디칼리즘을 비롯한 급진적인 좌익운동과 최악으로 치달은 러시아의 경제 상황, 다양한 욕망과 요구, 상황. 대치되는 입장. 그가 ‘믿었던’ 올바름에 대한 강박만으로는 현실 세계를 헤쳐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된 것. 레닌은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에서 극좌파들의 순수한 정치(말이 좋아 순수한 정치지, 레닌은 이를 비현실적인 근본주의라고 말한다. 책 제목부터 좌익 소아병이다.)를 비판하며 처음 ‘정치적 올바름’이란 표현을 썼다. 러시아 혁명 이후 일부 활동가들이 내세운 구호는 “타협 없이 우회 없이 전진하자”였다. 어떠한 타협과 절충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수사로 포장된 교조주의를 레닌은 ‘좌익소아병’이라고 일갈했다. 


세계는 단편적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정치는 수많은 삶과 욕망이 뒤엉켜 교차하는 유기체와 같다. 그래서 복잡한 사건들의 뒤엄킴을 한 번에 해결해줄 올바른 법정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애초에 이 난국을 타개할 전가의 보도 같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환상이다. 레닌의 일갈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은 유아적 발상에 불과하다. 혁명이나 종교. 사탄이나 적을 상정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은 내재화된 신념을 동력으로 삼는다. “오직 이것만이 옳습니다.” 올바름에 대한 강박은 필연적으로 적대의 정치를 양산한다. 올바름의 여집합은 곧 올바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무찌르는 단순한 적대 행위가 정치일 수는 없다. 정치란 말했듯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많은 것들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애당초 올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을 단정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그렇다고 신념화 한) 언어는 마치 무균실의 언어와도 같다.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은 변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역동성보다는 자기의 결벽을 과시하는 정체의 언어로 기능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의 우아한 세계에 남아있기 위한 비겁한 액세서리. 외부의 균으로부터 나의 언어를 공고히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 그래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덫에 걸린 언어는 살과 살을 비벼 삶과 삶을 바꾸는 실재의 언어일 수 없다. 상충하는 가치, 가변하는 정의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균실에 갇힌 이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워마드의 운동은 정말 여성의 해방이라는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까. 문빠들의 정치가 그들의 말처럼 사람이 우선인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워마드가 세계의 모든 모순을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억압이라는 단순한 인식으로 환원하면 돌아오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진 여성주의 운동의 한계다. 문빠들이 민주당의 집권으로 정치의 모든 것을 환원하려 하면 맞닥뜨리게 될 것은 거대한 괴물이 돼버린 자신들의 모습이다. 변하는 것은 없이 신념화된 올바름을 경전처럼 외우는 도그마에 빠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다. 올바름의 강박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질문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세계를 변화시킬 전복적 상상을 시도하는 일이다. 정치란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올바른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올바름을 상정하는 일은 그리고 그 주박에 갇히는 일은 가능성을 거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정치란 무균실 바깥을 상상하고 그 경계를 넘는 일이다. 가능성을 점지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오류와 실패를 긍정하는 일이다. 오류와 실패에서 다시 새로운 상상과 가능성을 담지 하는 일이다. 정치란 그렇게 그저 살을 부비며 삶을 부닥쳐 살아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