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제국, 막다른 자본주의의 경고

<최후의 제국>, 막다른 자본주의의 경고

- 이미 지나가버린,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1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 선거가 16일 남았다.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화두는 역시 ‘경제민주화’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조차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한다. 민주통합당은 스스로를 ‘서민’정당이라고 변설한다. 문재인 후보는 “경제력집중의 폐해를 시정하여 헌법정신과 공동체 가치 구현”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쌍용자동차와 현대자동차, 유성기업에 이어 전북의 버스노동자들이 고공 농성에 들어갔다. 전기가 끊긴 가정의 조손은 촛불을 켜고 자다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2
얼마 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민주당은 ‘의료개혁’을 핵심 정책으로 내세웠다. 오바마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했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기조연설에서 오바마는 “아들의 약값 450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눈물 흘리는 직장 잃은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는 “모든 어린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여전히 상위 1%가 전체 부의 43%를 차지하고 아이들 5명 중 1명이 밥을 굶고 있으며, 45명 중 1명은 모텔이나 자동차, 심지어 지하 배수구에서 생활하며 집 없이 살고 있다.

#3
중국의 시장경제는 덩샤오핑의 유명한 ‘흑묘백묘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고양이는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 이야기는 “사회주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 싹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마오쩌둥의 ‘잡초론’을 누르고 중국에 시장경제를 도입시켰다. 흑묘백묘가 등장하고 30년, 중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사회가 됐다. 그러나 동시에 상위 1%가 전체 부의 41%를 차지하고 모유를 팔아서라도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도시빈민과 매일 밤 슈퍼카를 몰고 고급 클럽을 찾는 ‘소황제’들이 같은 도시에 공존하는 모순도 함께 찾아왔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일요일, 주말드라마와 개그콘서트의 단 꿈에 빠져있었다. 방바닥을 뒹굴 거리며 “500원!”을 외치는 코미디언을 보고 낄낄거리면서 다가올 월요일이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헤아리고 있을 때쯤, “당신이 가난한 것은 당신의 책임”이라 일갈하는 미국의 정치인을 봤다. 

SBS의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이다. 화려한 조명과 불빛이 꺼지지 않는 건물. 번쩍이는 광고판과 그 광고가 팔아재낀 상품들, 사람들. 그야말로 ‘불야성’을 비추고 있는 화면이 가리키는 것은 ‘자본주의’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본주의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그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이래로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 최적화된 시스템인 양 군림했다. ‘사회주의’를 대표하던 소련이 무너지고서는 그 독주를 견제할만한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을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2008년 세계 자본주의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고 자본주의의 병증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의 사회적 불평등은 100년 만에 최고조에 달했다”고 말했다.

<최후의 제국>에 등장한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129번 도로 변 모텔촌에 사는 사람들은 집이 없어 모텔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보증금 낼 돈이 없어 집을 잃었거나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은행에 집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교회의 구호식품으로 연명한다. 그마저도 아무런 소스도 바르지 못한 파스타다. 하루 종일 일해서 번 돈은 대부분 모텔의 숙박비로 지출된다. 그러나 그런 일자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공장과 기업은 더욱 싼 인건비를 찾아 나라 밖으로 떠난다. 하루아침에 떠난 기업들이 남긴 것은 실직과 빈곤, 그리고 절망이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그들이 먹는 구호식품은 대부분 유통기한을 하루 남기고 폐기처분되기 직전인 음식들이다. 유통기한이 다 될 때까지 팔리지 않을 만큼 음식은 만들어지고 있지만 배를 곯는 이들도 있다. 음식을 먹을 사람도 있고 먹을 음식도 있지만 정작 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는 모순.

반면에 보험회사 CEO인 스티븐 마리아노는 1천만 달러짜리 집에 살면서 21만 달러짜리 승용차를 타고 출근한다. 12만 달러짜리 야구장 전용권으로 여가를 즐기고 상담 1회에 9백 달러를 받는 주치의를 두고 있다. 자산규모 6천5백억 원의 그의 보험회사는 금융위기의 불안감을 먹이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돈은 사람을 당당하고 독립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그 말은 곧 “돈이 없으면 사람은 당당하지도 독립적일수도 없다”는 말이다.

누구의 경제민주화 

CNN의 한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는 론 폴 하원의원에게 묻는다.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이 치료비가 비싸게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론 폴 의원은 답했다. “그게 자유입니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죠.”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돈 없고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은 죽도록 내버려둬야 하나” 이번에는 론 폴 대신 론 폴의 지지자로 보이는 방청객들이 답했다. “그렇다”

얼마 전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는 ‘경제민주화’를 주창했었다. 그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히고 밤에는 아이들을 잠자리에 눕히고 안전하게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의료개혁’으로 대변되는 그의 경제민주화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올랜도 모텔촌에 사는 8살 세라는 아플 때 병원에 가지도, 배고플 때 배불리 먹지도 못한다. 그의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올랜도 모텔촌에 살고 있는 이들은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되던 그가 우리로부터 무엇을 빼앗아 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공화당의 조지부시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든 결국 다를 것이 없다. 

201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도 ‘경제민주화’가 화두다.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앞세운다. 서로 자신의 경제민주화가 ‘진짜’라고 우긴다. 어느 한 쪽의 경제민주화가 ‘진짜’라면 다른 한 쪽도 ‘진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경제민주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미래성장 동력에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적극 지원하겠지만, 시장지배력을 남용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의 경제민주화를 규정한다. “우리 헌법의 규범 내에서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면서도 국민경제에 불필요한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는 어쨌든 ‘시장경제체제’안에서 움직인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도 마찬가지다. 그는 “양극화 심화와 이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 새로운 성장과 변화를 막고 있으며 경제․지역․산업․기업 등 사회 전반으로 격차가 확대되고 있다”고 현상을 분석하면서 이 결과로 “시장경제질서의 근간 훼손되고 있다”고 밝힌다. 그의 경제민주화 역시 시장경제체제를 복원하는 일이다.

지금은 사퇴한 안철수 후보도 ‘정의로운 자본가’를 표방하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한국사회가 그동안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착한 자본가’. 그가 1천5백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경제민주화의 적임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행처럼 번지는 ‘경제민주화’가 이 불안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재벌을 개혁하고 복잡한 금융공학을 동원해 부채를 탕감하겠다는 ‘법’과 ‘제도’가 공장에서 쫓겨나 철탑에 오르고 밥을 먹지 못하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1천5백억 원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빈곤을 구제할 수 있을까. 맑스는 “사회가 법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정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보호’, ‘금지’, ‘제한’, ‘강화’, ‘의무화’ 같은 말들이다. 오늘, 경제민주화의 주체는 ‘밥을 굶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밥을 남기고 있는 이들’인 것이다. 어쩌면 보호와 금지, 강화, 제한 같은 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밥을 남길 수 있는 권리’일지도.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오래된 미래


“한 농부가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것이 다른 농부에게 흉작을 초래하지 않는다.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이곳의 경제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곳은 공생의 사회인 것이다”

-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최후에 제국>에 등장하는 브록파 마을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Helena Norberg-Hodge)의 ‘오래된 미래’에 등장하는 ‘라다크’의 마을이다. 

브록파 마을에선 밭에 나가 일 하는 동안 아이들을 이웃이 돌봐준다. 특별히 누가 부탁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과 필요한 도움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마을의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라고 말한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특별한 제도가 마련돼 있는 것은 아니다. 이웃의 아이를 돌보지 않으면 일정한 규제가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동육아를 권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척박한 환경에서도 함께 ‘공생’하고 있다. ‘무상보육’이나 ‘공동육아’ 같은 말들이 이념논쟁의 소재로 등장하고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이 수도의 시장까지 갈아치워 버리는 사회에선 낯선 풍경이다. 

산간마을, 척박한 토지의 브록파에는 풍족한 음식이 없다. 그러나 배를 곯는 어린아이도 없다. 그들은 잔치가 벌어지면 저마다 보리떡을 지어 나눠 먹는다. 한 덩이의 고기를 얻기 위해 한 마리의 소를 살처분 하는 이들과 하루에 한 끼 빈한한 식탁을 마주하기도 어려운 이들이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일 같은 것은 없다.

솔로몬제도의 아누타 섬은 인구 300명의 작은 섬이다. 이 곳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면 청소를 한다. 수업시간엔 졸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칠판을, 어떤 아이는 옆자리의 아이를 바라보는 풍경은 여느 나라의 학교와 다르지 않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돈을 주지 않아도 학교에 간다. 

어른들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아이를 입양해 키운다. 한 집 건너 한 명씩은 입양된 아이다. 그러나 아누타 섬의 주민들은 입양된 아이를 ‘특별히’ 취급하지 않는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함께 집을 짓는 아누타의 주민들에게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기 보다는 ‘우리의, 공동체의 아이’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브록파도 아누타도 척박한 곳이다. 농사를 짓기에도 험난한 땅이며 바다는 거칠다. 먹을 것은 풍요롭지 않다.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TV도 없다. 아누타 섬에 들어가기 위해 <최후의 제국>제작진은 이틀간 엔진도 없는 돛단배를 타야했다. 척박한 환경이 아마 끈끈한 공동체를 만들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를 지켜줘야 했을 테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의 세상이 팍팍한 땅과 높은 파도보다 척박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지나가버린,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1960년대 히피즘과 반전운동의 기수였던 조안 바에즈는 작년 월가점령에 참가해 노래를 불렀다. “Where's my apple pie?(내 사과파이는 어디에 있지?)”.

월가점령의 흐름은 다소 미약해지는 것 같지만 1930년대 미국 공산당들에 이어 처음으로 미국인들은 ‘사과파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경제민주화’라는 조금은 미심쩍은 말은 정치인들의 힘싸움에 전유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도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일만이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원시공동체 사회엔 그랬다. 커다란 몸집도 날카로운 발톱도 없던 인간들은 서로의 체온과 서로의 어께를 빌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 모든 것을 나눠야 했다. 그러나 그 때엔 한 구석에선 음식이 썩어 가는데도 한 구석에선 밥을 굶는 이가 발생하는 모순 같은 것은 없었다.

자본주의는 인류를 풍족하게 했다. 그러나 삶을 풍요롭게 하지는 않았다. 돈을 받기 위해 학교에 가는 미국아이들과 쌀부대로 만든 가방을 짊어지고 학교를 청소하는 아누타의 아이들 중 어느 쪽이 더욱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법과 제도가 공동육아를 지시하고 이에 반발하는 정치인들이 이념공세를 퍼붓지 않아도 브록파의 아이들은 공동체와 함께 자란다. 이웃집 엄마가 나눠주는 밥을 먹고 자란 아이는 아마 자라서 제 이웃집 아이에게 밥을 나눠줄 것이다. 공짜밥을 주기 싫다며 눈물 흘리며 자기 자리까지 내거는 어른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무엇을 나누어 갖게 될까.

녹색평론 발행인인 김종철 씨는 “지금 필요한 것은,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라도 ‘경제’에 관한 정의를 다시 내리고, 그것이 사회 전체의 새로운 상식이 되도록 하는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300년간 화석연료·핵에너지에 기반을 둔 무한한 욕망 추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개념체계인 그동안의 경제개념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의 오랜 생활방식이었던 순환경제 시스템의 복구·재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wealth)’ 나라인 미국과 중국이 브록파와 아누타의 주민들보다 ‘잘 살고(Wellbeing)'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브록파와 아누타의 생활은 어쩌면 인류가 이미 지나온 길이다. 그건 신비롭게도 아직 남아있는 화석과도 같은 삶. 그러나 동시에 브록파와 아누타는 여전히 오지 않은 인류의 바라마지 않는 미래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마 최후의 제국, 자본주의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금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지속한다면,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이기도 하다. 

[출처: SBS <최후의 제국> 화면캡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경고했다. 

“우리 자신의 본성, 우리 자신의 욕구가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중매체를 통한 선전이 아무리 광범위하고 끈질기게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밀어붙인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와 우리 아이들이 온전한 정신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본능적인 이해를 꺾지는 못한다” 

영광의 재인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뿌리깊은 나무와 영광의 재인이 비슷한 시기에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내심 더 마음이 갔던 쪽은 오히려 영광의 재인이었다. 그건 오직 박민영 때문이었는데, "뭐야, 김탁구잖아"라는 반응이 떠올랐던 첫 회의 미적지근함과 "우라질, 지랄하네"를 중얼거리는 세종, 심지어 송중기의 자태를 뽐내던 뿌리깊은 나무의 위용에 박민영에 대한 사랑도 잠시 미적지근해졌었다. (여기서 '민영아, 오빠가 미안해' 라고 하면 나 완전 오덕 인증하는거임?)

여하튼 뿌리깊은 나무에 밀려 본방사수가 힘들었던 영광의 재인의 밀린 부분들을 어제, 오늘에 걸쳐 다시보기했다. 보고났더니, 이거 생각보다 더 재밌는 드라마였네.

# 자본주의 우화

옛부터 자고로 캔디라 함은 돈 앞에 의연해야 했다. 나쁜 짓하고 돈으로 떼우려는 재벌 2세에게 "돈이 전부인 줄 아느냐, 일단 사과부터 해라"라는 대사를 날려주는게 자고로 모든 신데렐라, 캔디류의 드라마 첫 회였다. (그럼 그 당당하고 올곧은 성품에 재벌 2세가 홀딱 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가 엄청 예뻐서 반하는 거다. 캔디는 주로 김희선이나 최지우가 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캔디는 돈 앞에 의연하지 않다. 돈이 지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말로 꿋꿋하던 그녀들은 지고의 가치인 돈을 벌기 위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는 꿋꿋함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건 아마 사랑과 낭만으로 살아 갈 수 있었던 시대의 캔디들에 비해, IMF에 사춘기를 보내고 FTA의 시대에 연애를 해야하는 신자유주의형 캔디들이 갖는 삶의 태도때문이겠다. 세상의 모든 가치가 돈에 맞춰지는 것이 당연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캔디. 어쩌면 우리도, 그녀들도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건 극중의 허영도 팀장의 대사에서도 나타난다.
"정말 비참한 건 잘못을 잘못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거야"

여담이지만 모 기업의 광고가 마뜩찮은 것도 같은 까닭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은 좋아질 것도 많다는 말'이라던가. 그건 역시 쌓아올려 나아가는 것만이 오직 옳은 일임을 강변하는 말이다. "돈 벌자고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대신에 "뭐든지 열심히 해서 돈 벌거에요. 빠샤"가 꿋꿋함의 상징이 되는 시대.

조금 유치했지만 영광의 재인은 이런 세상을, 그러니까 세상을 구성하는 계급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그곳은 가족을 찾는 일 마저도 '처음엔' 돈의 힘을 빌려야 했다. 주인공들의 정직한 심성은 돈을 대하는 태도로 그려지고, 타인에 대한 호감과 사랑 역시 돈으로 표현된다. 오직 돈만이 세상의 모든 언어고 감정이고 윤리인 시대, 바로 지금. 

#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을 걸어보려고 해요

이렇게 한 줄이라도 끄적거리고 싶게 만들었던 건 저 진부하고 오글거리는 대사 때문이었다. 진부하고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남겨놓아야 하는 말, 희망.

그토록 싫던 서재명 회장과 닮아가던 재인은 마침내 답을 찾았다. 그건 직원이 곧 회사라는 아버지의 말씀. 그녀는 다시 사람이 희망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을 읊조리면서 모든 희망을 사람에게 건다. 어디서 보기만 하면 하악거리는 소재인 '노동자 자주경영'. 그게 드라마가 하고 싶었던 얘기일테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물려가도 우리 서로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면 살아 갈 수 있다는 얘기. 역시 모든 우화는 오글거려도 새겨들어야 하는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있다. 그들이 권하는 선이란 사람이고, 그들에게서 발견한 희망이었다. 

재밌었던 건 내내 영광의 재인의 앞길을 막았던 뿌리깊은 나무의 주제의식도 같았다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책임이기 때문에 책임질 수 있는 몇몇이 해나가야 한다는 정기준과 정치의 주체는 책임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함께 토론하고 쟁명하여 고통스럽더라도 책임을 나눠가져야 한다는 세종의 대립. 그건 사람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이와 그럴 수 없는 이의 대립이었다. 정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어떤 답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안일하지 않은 대답을 내놨다면, 영광의 재인은 말했다시피 조금 유치하고 조금 조악하지만 결코 거부 할 수 없는 희망으로 대답한다. 그건 재인이 '기적'이라는 무기를 들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희망은 어쩌면 이뤄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기적같은 희망을 가져요"

냉철하고 정확한 눈도 좋지만, 때로는 무조건적이고 근거따위 없더라도 마냥 희망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도 반가운 법이다. 재인이의 기적처럼.

# 박민영, 사실 오직 그녀가 답이다

고백하자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박민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평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못되고 차가운데다 비관적이기까지 한 도시남자라서 사실 희망의 강요. 같은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적의 주체가 박민영이라 이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달까.ㅋ

그녀는 왜 이런 표정을 지어도 아름다운 것인가.


박민영은 예쁜데다 매우 영리하다. 그건 그녀의 작품 선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선택했던 작품들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한다.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자명고를 들먹거리는 이가 있더라만, 자명고는 박민영을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가치있는 작품이다. 완전한 파국, 그 섬칫할 만치의 비극을 가졌던 사극이 존재하기나 했던가. 자명고는 훌륭한 상상력의 스토리와 섬세한 감수성이 스몄던 걸작. 흠이라면 시껍할 만치의 시청률과 조기종영일까. 

여하튼 이 영리하고 예쁜 배우에게 홀릭하게 된 계기는 어느 인터뷰. 성균관 스캔들이 끝나고 있었던 그 인터뷰에서 그녀는 “마지막에 대사성이 김윤식 박사라고 불렀다. 마지막까지 동생의 이름으로 박사를 한 거다. 결국 여자로서 인정받은 건 없다”라고 말했다. 극과 캐릭터를 진짜로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말 좋은 시야를 가진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던 계기.
언제나 다음 작품이 매우 기다려지는 배우랄까.

그녀의 작품중 가장 좋아하는건 런닝,구. 종종 이렇게 단편을 찍어주면 더 좋겠다.




##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

예전에 SNS에 중얼거린 낙서인데,

'인생은 살 값어치가 있다는 감정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살할 만한 값어치가 없다는 감정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경구를 떠올리며 일평생 대충 때우다 가게되면 가고 또 아님 말지 뭐. 하다가도 어느 날은 삶에 당당히 맞서는 무사가 등장하는 무협지에 주먹이 불끈불끈 하기도 한다. 이렇게 흔들흔들 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인가보다. 생각해보니 성균관스캔들에서 정조는 나침반이 흔들리는 한 틀린 방향을 가리키진 않는다는 주옥같은 대사를 날려주신다. 그래, 답은 결국 박민영인 것이다.

이걸로 완벽히 박민영 덕후 인증.ㅋ